강대규
1936 - 1998.12.07
국가무형문화재
인물 개인 공예가
유물 무형문화재
정릉동에 거주했던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이다. 소목장은 목제로 된 세간이나 건축상의 소목조 즉, 각종 가마, 수레, 농기구 등을 제작하는 목수이다. 강대규는 1974년 동아공예대전에서 과반(果盤), 애기장, 서류함, 귀목팔각병, 문방구, 문갑 등을 출품하여 입선하면서 이름이 알려졌고, 1980년 전승공예대전에서 그가 만든 연(輦)이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소목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소목은 연장의 종류가 많고 나무 선별과 오랜 건조 기간, 정밀한 짜임, 상감, 옻칠 등 공정이 까다로운데 강대규는 전통 기법을 제대로 계승한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성북구 정릉로 21가길 35-4번에 거주했다.
정릉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709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396-19 ( 정릉로21가길 35-4)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국가무형문화재
  • 지정일: 1988.04.01
  • 비고: 1998.12.07 보유자 사망으로 인해 해제

근거자료 원문

  • ④ 小木匠 목제의 세간들을 만드는 기능자를 말하며 1988년 4월 2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된 기능보유자는 宋樞萬·千相源·姜大圭 등인데 강대규는 성북구 정릉3동 396-19에 거주하고 있다. 장롱과 궤함 등을 비롯하여 문방구 등의 세간들과 때로는 각종 木物, 즉 가마·수레·농기구·기타 도구류를 포함하며, 건축상으로는 大木에 대칭되는 용어로 쓰인다. 건축상 소목의 구실은 창호와 난간·닫집 등 건물에 부착되는 작은 시설물의 제작을 말한다. 고대에는 목수를 梓人·梓匠·輪輿라 했으며, 이는 수레에서 생긴 중국식 명칭이다. 신라에서는 재장이 속해 있는 관서를 磨典이라 했고, 대목에 해당하는 木尺은 별도의 典邑署에 속하였다.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 때부터 나타나며 조각장·나전장과 더불어 中尙署에 예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에서는 일괄하여 木匠이라 하였는데, 대신 세분화한 車匠· 船匠·補匠·表筒匠·磨造匠·風物匠·鞍子匠·木匠·木櫻匠을 두었다. 목장 중 소목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조선초 세조 때의 기록에도 보이므로 대목과는 구분하려던 것 같다. 소목장의 기능은 목가구의 제작과 건축상의 소목 일을 포괄하고 있다. 조선 초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의 소용으로 제작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고 종류도 잡다해져 지역적인 특성이 현저해졌다. 더구나 지방에서는 목수를 초치해서 필요한 기물을 제작하는 자급자족 형태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목가구는 일정한 규격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반면 건축의 소목 일이 급격히 줄어든 최근세 이후에는 수레나 가구의 제작에까지 자연히 확대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실이나 상류계층의 가구는 옻칠과 密陀繪·자개·대모 등 좋은 치레방법이 구사되었지만 서민사회는 제약이 많았고, 특히 선비들이 문방구의 과다한 겉치레를 기피하는 풍조로 말미암아 나무 자체의 재질을 살리려는 생각이 뚜렷하게 격조를 이루어 내었다. 南道가구가 紋木을 귀하게 여기는 점이라든가, 문목판의 가장자리에다 回裝기법으로 뇌문을 돌리는 섬세한 솜씨 등은 모두 그에 연유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99-700쪽
  • ▫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小木匠 시대 : 기능보유자 : 강대규(姜大圭)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정릉 3동 396-19 지정연월일 : 1988. 4. 1. 목재의 세간들을 만드는 기능자로서 송추만(宋樞萬)・천상원(千相源) 등과 함께 강대규(姜大圭)도 지정되었다. 장롱과 궤함 등을 비롯하여 문방구 등의 세간들과 때로는 각종 목물(木物), 즉 가마・수레・농기구・기타 도구류를 포함하며, 건축상으로는 대목(大木)에 대칭되는 용어로 쓰인다. 건축상 소목의 구실은 창호와 난간・닫집 등 건물에 부착되는 작은 시설물의 제작을 말한다. 고대에는 목수를 재인(梓人)・재장(梓匠)・윤여(輪輿)라 했으며, 이는 수레에서 생긴 중국식 명칭이다. 신라에서는 재장이 속해 있는 관서를 마전(磨典)이라 했고, 대목에 해당하는 목척(木尺)은 별도의 전읍서(典邑署)에 속하였다.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 때부터 나타나며 조각장・나전장과 더불어 중상서(中尙署)에 예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에서는 일괄하여 목장(木匠)이라 했는데, 대신 세분화한 수레장・선장(船匠)・통장(桶匠)・표통장(表筒匠)・마조장(磨造匠)・풍물장(風物匠)・안자장(鞍子匠)・목소장(木梳匠)・목영장(木纓匠)을 두었다. 목장 중 소목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조선초 세조 때의 기록에도 보이므로 대목과는 구분했던 것 같다. 소목장의 기능은 목가구의 제작과 건축상의 소목 일을 포괄하고 있다. 조선초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의 소용으로 제작되었으나, 조선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고 종류도 잡다해져 지역적인 특성이 현저해졌다. 더구나 지방에서는 목수를 초치해서 필요한 기물을 제작하는 자급자족 형태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목가구는 일정한 규격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반면에 건축의 소목일이 급격히 줄어든 최근세 이후에는 수레나 가구의 제작에까지 자연히 확대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실이나 상류계층의 가구는 옻칠과 밀타회(密陀繪)・자개・대모 등 좋은 치레방법이 구사되었지만 서민사회는 제약이 많았고, 특히 선비들이 문방구의 과다한 겉치레를 기피하는 풍조로 말미암아 나무 자체의 재질을 살리려는 생각이 뚜렷하게 격조를 이루어 내었다. 남도(南道) 가구가 문목(紋木)을 귀하게 여기는 점이라든가, 문목판의 가장자리에다 회장(回裝) 기법으로 뇌문을 돌리는 섬세한 솜씨 등은 모두 그에 연유한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2, 1990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 1998년 12월 7일 보유자 사망으로 지정해제.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06-107쪽
  •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AC15B300ADDCB1936X0 생년 1936 졸년 1998 향년 63세 시대 대한민국 활동분야 무형문화재/장인 부 강우석(姜又錫) [상세내용] 강대규(姜大奎) 1936년~1998년. 현대 무형문화재‧장인. 출생지는 경상남도 사천(泗川)이다. 부친은 강우석(姜又錫)이고, 부인은 이운자(李雲子)이다. 삼천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 목수인 부친을 따라 서울로 상경하였다. 철도청 목공으로 잠시 근무하였고, 30세가 되는 해 결혼을 하고 부친과 함께 목공소를 운영하였다. 1974년 동아공예대전에서 과반(果盤)‧애기장‧서류함‧귀목팔각병‧문방구‧문갑 등을 출품해 입선하면서 목수로서 이름을 알렸고, 1978년부터 1996년까지 사단법인 전통공예기능보존협회 이사를 맡았다. 1980년에는 제5회 전승공예대전에 사찰에서 큰 재(齋)를 올릴 때 사용하는 불구(佛具)인 연(輦)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았고,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90년 제20회 서울특별시 공예품경진대회 심사위원을 지낸 뒤 조선시대의 전통 목가구인 장롱‧서안(書案)‧사방탁자‧연상(硯床)‧소반 등을 제작하는 소목공 기술을 전승하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열정을 쏟았지만 나무선별에서부터 세밀한 조각 공정까지 굉장히 까다로워 조화신(趙化信)만이 전수 교육 조교로 강대규의 전통기법을 이어가고 있다. 소목기능보유자로는 강대규(姜大奎) 외에 송추만(宋樞萬)‧천상원(千相源)‧정돈산(鄭敦散)‧설석철(薛石鐵) 등이 있었다. 자녀로 1남 3녀를 두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항목명: 강대규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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