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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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구 삼선동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조선시대부터 혜화문 밖의 평평한 모래사장 같은 들판을 삼선평이라고 칭했는데, 삼선평이란 이름은 동네 남쪽의 옥녀봉에서 옥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세 신선과 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군대의 연병장으로 쓰였고, 남쪽 언덕은 사형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또한 개항기에는 도심과 가까운 넓은 공간이어서 집회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1896년에는 최초의 근대적인 운동회가 개최되었고, 1906년 3월에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 간의 한국 최초의 축구경기가 열렸다. 그리고 1907년에는 도산 안창호의 강연회가 열리는 등 민족계몽운동의 요처로 통하기도 했다.
성북동 삼선동 동선동
  • 삼선평에서의 오운 예행연습
  •  東小門外三仙坪(동소문외삼선평)에 貧民部落(빈민부락)을建設(건설)코자
  • 4월 1일부터 개경성될 신구역 타진순례(2), 청량리 왕십리의 연락도로, 도로개수가 급선무
  • 삼선평과 삼선교 표지석(1)
  • 삼선평과 삼선교 표지석(2)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三仙坪
  • 이명칭: 사아평(沙阿坪)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동소문동, 동선동 일대

근거자료 원문

  • 다음으로 東小門(惠化門) 밖을 나가면 城北洞에서 동쪽으로 흘러 淸溪川에 합류되는 개천이 있다. 城北川·安岩川이라 불리우는 이 개천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맑은 물이 흘러 물놀이를 즐기고 빨래하는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혜화문 밖 安岩川의 구부러져 동쪽으로 흘려가는 남쪽과 북쪽에 山地가 서로 통해 古松이 울창하였다. 이 부근의 底地를 三仙坪이라 칭하였으며 이곳은 평평한 모래사장 같은 개울바닥이었기 때문에 朝鮮時代에는 軍隊의 연병장으로 사용되었다, 즉, 삼선평의 안암동쪽에 訓鍊院의 연무장이 있어 訓局의 군마들의 재주를 시험하였다. 이곳은 조선시대 어느 때부터 연무장으로 쓰였는지 확실치 않지만 뚝섬의 살곶이벌 閱武場이 성안에서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곳 넓은 들이 자주 연무장으로 이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선평 남쪽에 있는 오똑만한 지대는 용산 새남터와 같이 死刑場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03-104쪽
  • 東小門洞에서 조금 더 밖으로 나가면 三仙洞에 이른다. 삼선동에는 성북천이 이곳에 이르러 평평한 들판을 만들어 예로부터 三仙坪이라 하였는데, 원래 그 이름은 동리 남쪽 옥녀봉 봉우리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세 신선이 玉女와 놀았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경개가 수려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신라때 화랑들이 섬신을 단련한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 화랑도는 國仙徒라고도 불리웠다. 이 일대는 평평하고 넓어서 조선시대에도 箭串坪과 더불어 군사 훈련장으로 쓰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1쪽
  • ○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의 중심이 된 삼선평과 흥천사 -그렇다면 당시 성북구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어떤 곳으로 통했을까요. 당시 성북구에는 조선시대 5군영의 하나인 어영청과 대한제국 친위대의훈련장이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지금의 삼선교 근처, ‘삼선평’이라 불렸던 평평한 모래 언덕에 위치했습니다. 그랬기에 앞서 소개한 김규식, 나중소와 같은 군인들이 삼선평 인근에 다수 거주했지요. 그들이 곧 의병투쟁과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었습니다. 1896년에는 최초의 근대적인 운동회가 개최되었고 1906년 3월에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 간의 한국 최초의 축구경기가 열린 곳이기도 합니다. 삼선평은 또한 민족계몽운동의 대표적인 요처로 통하기도 했습니다. 1907년에는 도산 안창호의 강연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간절한 애국심으로 꺼져가는 나라의 생명에 숨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취지의 강연이었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34-35쪽
  • 삼선평과 삼선동 삼천평, 지금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었지만 혜화문을 나오면 성북천을 끼고 넓게 펼쳐진 땅을 사람들은 ‘넓다’는 의미에서 삼천평이라 불렀다. 현재 널리 쓰이는 ‘삼선’이란 이름은 조선 후기에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혜화문은 동북으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었고,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한 혜화문 밖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또한 삼선평이라는 넓은 땅이 있어 군사 훈련에도 적합했다. 군사시설인 어영청의 북둔이 이곳에 설치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북둔옆에 위치한 삼선평은 을지로 6가에 있던 훈련원 등과 함께 군사들의 열무장(鍊武場)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오며 넓은 들판은 사람들에게 군사 훈련시설이 아닌 다른 용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바로 체육이었다. 근대 국민국가시대에 접어들며 ‘국민’의 체력이 곧 국력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스포츠의 국제대회 성적 역시 국력을 측정하는 잣대가 되기 시작했다. 축구, 야구 등 소위 대중 스포츠가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유입되었고, 사람들은 스포츠를 하기 위한 장소를 찾았다. 지금 군대에서도 연병장이 군인들의 축구나 족구의 장소로 활용되듯, 당시에도 군사훈련장은 스포츠를 즐기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훈련원과 삼선평은 때로는 축구장으로, 때로는 야구장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줄다리기 등 최근의 운동회에서 도 즐겨하는 놀이도 행하여졌으며, 골프장도 들어선 곳도 삼선평이었다. 삼선평에서 벌어진 축구 등의 운동은 드물지 않게 달밤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1978년 「경향신문」에서는 ‘얘기로 풀어보는 한국 스포츠 80년’을 연재에서는 삼선평을 ‘근대스포츠의 요람’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혜화로터리를 지나 낮은 고개를 넘어오면 한성대입구 사거리가 나온다. 지금은 길 옆으로 건물들이 가득차 ‘근대 스포츠의 요람’ 삼선평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건물 하나하나를 천천히 지워가다 보면 금새 넓은 들판을 상상할 수 있다. 그곳에서 상투를 틀고 짚신을 신고 축구, 야구라는 새로운 스포츠를 배워가며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는 것은 이곳 삼선동을 찾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 성북구에 위치한 계몽운동의 대표적인 요처는 삼선평이었다. 삼선평은 원래 사아평(沙阿坪)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성북천 주변의 모래 언덕에 위치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5군영의 하나인 어영청과 대한제국기 친위대의 훈련장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1896년 5월 30일 영어학교 교사 허치슨의 주도로 최초의 근대적인 운동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1906년 10월에는 관립한성고등학교에서 운동회가 개최되었고, 1907년 5월 12일에는 서북 출신 유학생들의 연합운동회가 개최되었다. 1906년 3월에는 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축구시합이 처음으로 열렸다. 1907년 5월 12일에는 안창호의 강연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 군대훈련장인 삼선평은 대한제국기 이후 애국계몽운동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1896년 최초의 근대적인 운동회가 개최되었던 삼선평은 1904~1910년까지 강연 및 운동회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 삼선평三仙坪은 하늘에서 내려온 세 신선이 옥녀봉에서 옥녀와 어울려 놀았다는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기록에 보면 삼선평의 옛 이름은 ‘사아평沙阿坪’으로 혜화문 왼쪽과 숙정문 오른쪽 터라 하였다. 삼선교는 삼선평에 놓인 다리를 일컫는데, 지금은 성북동 지하철 한성대입구역의 부역명副驛名으로 쓰인다.
  • 혜화문에 올라서면 성 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삼선평의 풍경이 펼쳐진다. 멀리 동남쪽에 있는 옥녀봉의 옥녀가 천상에서 내려 온 세 신선과 함께 유유자적 노닐던 놀이터라 하여 붙여진 이름 삼선평. 세 신선이 꽂아 둔 지팡이가 기이하게 엉켜 삼선대 위에 우뚝 솟은 소나무가 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성북천이 굽이쳐 내려오며 습지를 만들고, 하늘로 뻗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름을 더해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다. 조선전기의 문신 김종직은 시문집 《점필재집(佔畢齋集)》에서 ‘도성 저잣거리의 번잡한 소리가 들리지 않고 풍광에 빠져 시를 저절로 읊게 하는 경치’라 감탄하였다. 힘 있게 솟구친 북한산의 봉우리가 병풍이 되고, 낙타 모양의 나지막한 낙산 자락이 포근히 감싸 안아 저희만이 아는 숨겨진 정원처럼 자리 잡은 평원이었다. 살구꽃이 피는 봄이 되면 갓을 쓰고 도포자락을 둘러쓴 나들이객, 풍경을 그림에 담고 시로 읊는 문인묵객들도 즐겨 찾았다.
  • 혜화문과 맞닿아 있는 삼선평은 군사요충지이자 훈련장이었다. 수천 명의 군사가 모일 수 있는 평원을 방어막으로, 성북천과 구릉이 도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1765년 설치한 어영청의 북창이 근처 성북동에 있어 성곽의 수비와 한성부의 안보·치안을 위한 훈련이 이루어졌다. 이후부터 도성의 치안과 방위防衛를 담당한 어영청과 훈련도감은 이곳을 주요 훈련지로 삼고 군사를 훈련시킨다. 한의운이 아뢰어 이르기를, 훈련도감 중군 서영보가 본국 군병 훈령으로 내일 아침부터 마칠 때까지 삼선평으로 나가있는다 합니다. 韓義運啓曰, 訓鍊都監中軍徐英輔, 本局軍兵中旬事, 自明日限畢試間, 三仙坪出去矣. -《 승정원일기》순조, 1816.3.21 - 삼선평이란 명칭은 1816년(순조16) 훈련도감을 이끄는 서영보가 병사들을 데리고 삼선평으로 나간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문헌자료를 살펴보면 삼선평은 창의문 밖에 있던 연융대鍊戎臺와 함께 도성 동편의 주요한 군사훈련장으로 이용된다. 봄과 가을이 되면 활쏘기, 말타기 등을 시험하는 도시都試를 열어 무관과 군사들의 무예를 시험하는 시험장이었다. 한편 왕과 왕세자, 무관들이 함께 모여 활쏘기를 선보이는 사회射會를 즐기는 날이면 풍악이 울리고 성대한 음식이 차려진 가운데 장부들의 활쏘기 승부가 벌어지기도 했다.
  • 군사훈련장으로 쓰이던 삼선평은 갑오개혁 이후 운동회와 각종 스포츠 경기 장소로 바뀌었다. 1896년 4월 6일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최초의 근대 올림픽이 개최된 지 한 달도 안 된 5월 2일, 우리나라의 최초 근대식 운동회가 삼선평에서 열린다.
  • 삼선평은 조선시대 초부터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에 속한 마을로 1984년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서 숭신방(성외) 동문외계 삼선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듬해인 1911년 4월 1일 일본은 지명을 정비하며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삼선평이라 하였고, 1914년 4월 1일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로 바뀌었다.
  • 일제시기 삼선평 일대는 목장으로 이용된다. 1910~1920년대 일본인 히라야마 마사토[平山政十]가 평산목장을 운영하며 100여 마리의 젖소를 기르고, 조선 왕실과 총독부 의원醫院에 우유를 납품하였다. 농촌에서 일제의 공출로 땅과 소작권을 잃은 농민들이 한양으로 올라와 도시 빈민이 되어 살 곳을 찾아 떠돌았다. 넓은 공터인 삼선평에 허름한 움막을 늘어갔다. 히라야마는 빈민들이 살 수 있는 집을 목장 근처에 마련하기 위해 자선음악회를 벌이기도 했다.
  • 1936년 4월 1일 일제가 경성부 구역을 확장할 때 삼선평은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돈암정이란 일본식 동명으로 불린다. 1943년 6월 10일에 서울에 구제區制를 실시함으로써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해방 후 일본식 지명을 폐지하며 1946년 10월 1일 돈암정이 돈암동으로 바뀌었고, 1949년 5월 13일 삼선동 1,2,3가, 그 후 5개동(1~5가)으로 분할되었다. 1963년 돈암동 일부를 분리하여 동소문동이라고 하였다.
  • 1930년대에 들어서 드넓은 초원은 하루아침에 황폐한 부지로 뒤바뀐다. 1937년 2월 경성시가지계획 구획정리사업의 첫 사업지구로 공업지역인 영등포와 대현지구, 삼선평이 속한 돈암지구가 선정되었다. 1941년 11월에 완공된 돈암지구는 오늘날 보문동, 안암동, 동소문동, 동선동, 삼선동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집장사’라 불리던 주택건설업자들이 지은 도시한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정비 된 삼선동 일대 거리에는 2층 한옥상가가 생겨났다. 도로와 접하는 면에 상가를 열었고 뒤쪽으로 살림채를 둔 구조였다. 주로 목재를 사용하여 지은 집으로 지붕에는 기와를 얹고, 유리, 벽돌 등 새로운 자재를 사용했다. 도시 한옥과 2층 한옥상가는 근대 도시에 적응해 가는 주거 형태의 변화를 보여준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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