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예술대학
1953 - 1972
장소 교육
성북구 돈암동 산3-1에 있었던 대학이다. 서라벌예술대학은 김세종이 1953년 설립하여 1954년 후암동에서 ‘서라벌예술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그리고 1956년 돈암동으로 이전하고, 초급대학 인가를 받아 ‘서라벌 예술 초급 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64년 4년제 정규 대학 인가를 받아 ‘서라벌 예술대학’으로 변경하였다. 문예, 연극영화, 음악, 미술 등의 예술부문을 교육하였는데 특히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김수영, 염상섭, 유치진, 안수길, 김현승 등 당대 문단의 중진들이 교수진으로 있으면서 많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1972년 중앙대학교에 합병되어 흑석동으로 이전하였다.
돈암동
  • 길음교에서 바라 본 서라벌고등학교 주변 모습
  • 지적도 : 돈암동 7번지 일대, 1960년대
  • 지적도 등본 : 돈암동 633번지, 2022년 현재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徐羅伐藝術大學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교육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1953 - 1972
  • 비고: 1972년 중앙대학교에 인수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산3-1

근거자료 원문

  • 용산구 후암동에서 1956년 돈암동 산3-1번지로 이전한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대학이다. 문예창작학과가 전체 정원의 1/3을 차지하였다.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김수영, 염상섭, 유치진, 안수길, 김현승 등 당대 문단의 중진들이 교수진이었으며, 김주영, 천승세, 이문구, 김원일, 조세희, 윤후명, 오정희, 이근배, 박경용 등 소설, 시, 극작가 등이 배출되었다. 1972년 중앙대학교에 합병되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26쪽
  • 서라벌예대와 서정주<未堂(미당) 世界放浪記(세계방랑기) 詩想(시상)따라 散文(산문)길 10萬㎞(만㎞) <8> 네바다의 沙漠(사막)> 12월2일, 오전 열시 반 비행기로 호놀룰루를 떠나면 로스앤젤레스까지는 다섯 시간 이 걸린다기에 오후 세시반의 밝은 낮에 도착할줄 알았더니 이 두곳의 시간 차이 두시간을 보탠 오후 다섯시반에야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했고, 이미 이곳은 네온사인이 휘황한 밤이었다. 내가 서울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몸을 담고 있었던 서라벌예술대학의 전설립자요, 학장이었던 김세종씨가 그의 여비서를 데리고 기다리고 있다가 무척은 반가와하며 나를 끌어안아서 나도 그를 안고 등을 가벼이 두드려 주었다. 이순정과 의지의 사내 그는 건재하였다. 1954년 서울 남산 변두리에 줄행랑 같은 판잣집의 가교사를 짓고 아직 대학인가도 없이 서라벌예술대학을 시작했을때부터 나는 그를 믿어 문예창작과에 강의를 해온터라 그를 나대로는 잘알지만 그처럼 끈질긴 뜻을 세워 한결같이 실천해오고 있는 사람도 드물줄 안다. 그는 빈주먹으로 나서서 일꾼들과 함께 손수 벽돌을 날라 서울 미아리의 서라벌예술대학을 세워 많은 예술가들을 길러내며 이것을 확장하여 예술대학교로 만들려고 서울 교외에 학교 기지가 될 땅을 사들였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운사납게도 그린벨트제도가 생겨 거기묶이자 할수없이 재정파탄을 당해 중앙대학교에 서라벌예술대학의 운영권까지 맡겨버려야할 운명이 되었다.그렇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는 않았다. 이 무렵에 설상가상으로 그가 가장 아끼던 그의 큰 아들이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기도 했지만 그는 세계 방랑을 한 채쯤 하는걸로 그 상처를 대충 씻어내고는 여기 아메리카의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해서 다시 그의 대단한 의지를 펴 사오년 동안의 노력 끝에 사우드 캘리포니아 인터내셔널 유니버시티라는 한 개의 대학교의 인가를 얻어내는데까지에 이르른 것이다. 물론 아직 시설도 부족하고 학생수도 겨우 몇백명밖에 안되는 초창기의 대학교 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우리 한국인의 손으로 외국에 세워진 맨처음의 대학교인걸 생각할 때 나는 그의 의지에 대한 가슴벅찬 존경의 느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국내 국외 어디에 살건 우리 동포된 이들은 누구나 그의 이일을 도와 이루어내게 해야할 것이다. 경향신문 1978. 1. 25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95
  • 서라벌예대 졸업생 한분순 시인의 회고 시만을 사랑하다 떠난 L문우 한분순(64학번, 시인·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서울 돈암동 미아리고개를 넘어 버스를 내리면 곧바로 길음시장이 나오고, 비좁은 시장 골목을 가로질러 걷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고성처럼 서 있는 아담한 건물이 서라벌예대였다. 수업시간. 김동리 선생님의 소설 창작 강의는 늘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학생들이 써 온 작품 하나하나를 읽으며, 첫 문장부터 맞춤법, 띄어쓰기, 부호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지적해 주시던 강의. 무엇보다 작품 첫 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이 인상적이었다. 첫 문장이 정확해야 더 읽을 마음이 생기고 작품의 첫 문장에서 이미 그 작품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서정주·박목월·김구용 선생님 시간에도 학생들 작품을 일일이 읽고 지적해 주시는 창작실기는 글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동기생들 중에는 수업 시간에 제출하여 지적받고 수정한 작품을 신춘문예에 응모하기도 했다. 그중 L은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른 것에 용기를 얻어 그 후 계속 응모하였으나 늘 턱걸이에 머물렀다. 낙선의 고배를 마실 때마다 길음시장 포장마차 긴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동문들도 덩달아 마시며 위로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김주영·이근배·오정희 외, 2013,『문학이라 쓰고 인생이라 읽다』, 작가세계, pp.12~13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96
  • 서라벌예대 졸업생 소설가 이경자의 회고 부끄럽지만, 아름다웠던 시절 이경자(65학번, 소설가) 부끄럽지만, 아름다웠던 시절 이경자(65학번, 소설가) 대학입시 1차에 떨어져서 생사도 구별하지 못하게 마음이 얼어 버린 때, 강릉고 출신 의 남학생 정종명이 서라벌예술대학에 가 보라고 말해 줬다. 미아리고개를 넘으면 학교가 있다고 그랬다. 미아리고개라면 단장의 미아리고개일 테니 찾기도 쉬울 것이라 여겨 혼자 그 곳을 찾아갔다. 아무리 오르고 내려도 험한 고개는 나오지 않았다. 강원도 산골 출신의 내게 4차원으로 뚫어 놓은 포장길이 고개로 보였을 리 만무. 그래도 운이 좋아 합격해서, 중학교 때부터 가출 및 탈출하고 싶었던 고향땅 양양으로 돌아가지 않게 됐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김동리 선생님이 가르치시던 소설 창작만 열 심히 듣고 다른 공부는 하지 않았다. 첫 학기에는 강의실이 비좁도록 학생들이 들이찼다. 날이 갈수록 학생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열아홉 살 소설가 지망생이던 나는 소설이 무 엇인지도 모른채 토하듯이 소설을 써 댔다. 소설을 써서 시간 중에 읽힌다는 것만으로 소설을 잘 쓰는 편에 속했다. 어느 날 내 뒤에 앉았던 서울 출신의 여학생이 등을 툭 치더니 쪽지를 줬다. ‘경자 씨. 중국집에 가면 꼭 문을 조금 열어 놓고 먹어야 해.’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화여고 출신의 오정희가 소설을 잘 썼다. 수업 중에 발표한 소설에 홀랑 반했다. 키가 작고 다부진 남학생이 기억난다. 잊지 못할 사건이기 때문이다. 용산고 출신이라 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소설을 잘 쓰려면 사회의 밑바닥을 알아야 한다며 나를 서울역으 로 데려갔다. 지금의 대우빌딩 근처이니 유명한 사창가였던 ‘양동’의 입구쯤이었던 것 같 다. 그는 기차같이 생긴 다방으로 데려갔다. 담배연기 자욱하고 말소리가 천장까지 두텁 게 쌓인 그곳은 아마 역전다방이란 이름이 붙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황석영’이라고 했다. 사춘기 때『사상계』에서 읽고 「입석부근」을 쓴 그 황석영이라는 것이었다. 황석영이든 아니든 나는 그가 소설가라는 데 홀랑 정신을 잃 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게 소설을 잘 쓰려면 어쩌고저쩌고 사회의 밑바닥과 군중의 생 활을 알아야 한다, 등등의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가 누군가를 소개도 해 줬다. 어떤 남자였던 것 같다. 그는 서울역으로 가서 구두닦이도 인사시키고 그랬던 것 같다. 그 후 그는 학교에 나 오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뒤에 등단을 하고 황석영 선생님을 만났다. 그때 그 사람, 키 가 작고 다부지고 얼굴색이 검은 편이던 그 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일종의 저능아나 지진아 군에 속하는 편이다. 세장물정을 잘 모른다. 지금도 마 찬가지다. 나랑 이야기를 해 보거나 살아 보면 내 의식이 좋으면 순수, 나쁘면 천치라는 걸 금방 깨닫는다. 이런 사람이라서 열아홉 살 그 나이에도 김동리 선생님이 화장실에 가시는 것이 충격이었다. 이런 충격의 유사한 것이 또 있었다. 버스를 타고 보문동을 지나는데 허리가 조금 구 부정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이동하 선배님! 왜 소설가가 되었는데도 저렇게 기운 없이 걸어가지? 내 현실 감각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허공에 떠 있다. 김주영·이근배·오정희 외, 2013,『문학이라 쓰고 인생이라 읽다』, 작가세계, pp.14~15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97
  • 서라벌예대 졸업생 소설가 송기원의 회고 이 돈이 뭔 돈인지 잘 알제? 송기원(68학번, 소설가) (중략) 서라벌예술대학은 시내에서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오른쪽의 산등성이에 덩그렇게 위치해 있었다. 원래 바윗덩어리로 이루어진 돌산의 중턱을 다듬어 거기에 올려 놓듯 세운 대학 건물은 예술 어쩌고 하면 흔히 떠올리기 마련인 무슨 화려하거나 고상한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아리는 서울의 변두리에 속했다. 그런 미아리 일대에서도 예술대학은 무허가 판잣집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동네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는데, 게다가 반듯하게 자란 나무 한 그루 없이 본관을 위시해서 교사들만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였다. 어쨌든 장돌뱅이 어머니의 무거운 한을 어깨에 짊어지고 서울로 올라와 벌써부터 서울이라는 곳 자체에 주눅이 들어 헉헉대는 나에게는 기이하게도 미아리고개를 넘어서서 예술대학의 건물이 보이기만 하여도 금방 주눅에서 풀려나 생기가 도는 것이었다. 그런 예술대학의 분위기 속에서 나는 한 마리 암뱀이 되어 당연한 것처럼 암흑의 사상을 품어 퇴폐며 탐미, 그리고 위악이라는 새끼들을 낳았다. 아아, 그 새끼들 덕분에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문인 행세를 하며 살아남을 줄 누가 알았으랴. 김주영·이근배·오정희 외, 2013,『문학이라 쓰고 인생이라 읽다』, 작가세계, pp.18~19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98
  • 서라벌예대 졸업생 소설가 한승원의 회고 별들이 번쩍이던, 미아리고개 강의실 한승원(60학번, 소설가) 1960년 3월, 미아리고개의 2년제 서라벌예술초급대학 문예창작과 1학년 강의실에는 별들이 번쩍거렸다. 학과 정원이 60여 명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삼분의 일가량이, 이런 저런 대학의 문학 콩쿠르에서 장원, 차상, 차하, 최우수상 따위에 입선한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등록금 전액 면제의 갑류 장학생이거나, 반액 면제 혜택의 을류 장학생들이었 다. 그 가운데는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문단에 등단한 시인도 있었다. 지금 미국에서 대 단한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세방 시인이 그였다. 나머지는 등록금을 온전히 내 고 들어온 일반 학생들이었는데 나와 이문구와 하현식은 거기에 속했다. 그 속에서 시 골뜨기인 나는 만학이었으므로 늘 가슴 두근거림을 안은채 하루하루를 살았다. 학생들은 모두 교수진이 좋아서 미아리고개의 서라벌예대 문창과로 모여든 오기와 패기 넘치는 문사들이었다. 시인으로는 서정주·박목월·김구용 선생이, 소설가로는 김동리 선생, 평론가로는 조연현 선생이 강의를 했다. ‘시 창작론’과 ‘시 실기’ 강의는 서정주 선생과 김구용 선생이 했고, ‘문장론’은 박목 월 선생이 했고, ‘소설 실기’와 ‘소설 창작론’은 김동리 선생이 했고, ‘희곡론’강의와 ‘시 나리오론’강의는 지금 나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어떤 분들이 맡았다. 40대 중반이거 나 후반이던 그 선생님들은 모두 열강을 했다. 강의를 받는 학생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실기 시간은 늘 치열했다. 이마에 별 한둘씩을 달고 있는 학생들은 실기 시간에 누군가 제출한 작품에 대하여 사정없이 찍고 까고 헐뜯었다. 오만과 치기가 넘쳐났다. 작품을 제출한 학생은 뭇매를 맞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강의실에는 나중에 경희대로 전학 간 조세희 소설가(후에‘난장이’연작 소설로 서 울의 종이 값을 올려놓았다.), 이세방 시인, 이문구 소설가(『관촌수필』의 작가), 나중에 캐나다로 이민 간 박상륭 소설가, 졸업 후 한양대로 편입한 이건청, 하현식·장효문 시인, 강호무·한상윤 소설가, 이재금·조정자·곽현숙 시인 그리고 내가 있었다. 나는 교수들의 강의 한마디 한마디, 학생들의 감상소감 발표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에 새겨들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발견이었고, 하루 하루의 삶은 피와 살이 되고 있었다. 김구용 선생은 T.S엘리엇의『황무지』와「J.A.프루프록의 연가」, 단테의 『신곡』 들을 줄줄 외면서 강의를 했고, 학생들에게도 외우라고 했다. 미술 전람회에 반드시 가 라고 하고, 좋은 연극·영화를 보라고 하고, 클래식 음악을 열심히 들으라고 권했다. 나는 토요일 일요일에는 국립도서관으로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세계문학 전집을 읽 었고, 점심을 굶으면서도 유치진 선생의 남산 원형극장에서 공연하는 <햄릿>, <세일 즈맨의 죽음>, <포기와 베스> 등을 관람했고, 음악 감상실에 드나들었다. 미아리 학교 앞에서 길음동으로 가려면 정릉천을 건너야 했다. 내를 가로질러 뽕뽕다리가 놓여 있었다. 뽕뽕다리 양옆에 대포집과 밥집·떡집·빵집들이 널려 있었다. 학생 들은 끼리끼리 어울려 대포를 마셨다. 교수님들을 모시고 가서 마시기도 했다. 나는 하현식과 함께 2학년 교실에 가서 도강을 했다. 선배들은 후배들의 도강을 모른체했다. 선배들의 강의실에는 소설가 김원일과 시인 신중신이 있었다. 훗난 영화감독이 된 김원두도 거기에 들어 있었다. 신중신은 시 실기 시간에 발표한 「내 이렇게 살다가」 라는 시를『사상계』신인상에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키 작달막한 오 모는 재학 중에 『자유문학』소설부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다. 나는 도강을 하면서 선배들의 치열한 활동을 부러워했다. 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인가. 하루하루 가슴 두근거리게 하던 그 미아리 서라벌예 대 문창과 다니던 시절을.. 김주영·이근배·오정희 외, 2013,『문학이라 쓰고 인생이라 읽다』, 작가세계, pp.67~69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99
  • 서라벌 졸업생 소설가 정종명의 회고 내 문학의 뿌리는 제4강의실 정종명(66학번, 소설가·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단편 당선되어 특기장학생으로 문창과 입학 나는 탄광촌으로 알려진 태백에서 중학교를 나와 강릉으로 유학을 갔다. 전신이 사 범학교인 강릉고에 진학해 보니, 거기에 시인 원영동 선생님이 국어를 담당하고 계셨 다. 선생님은 내가 만난 최초의 문인이었다. 중학교 시절에 소설 비슷한 글을 써서『학 원』이란 학생 잡지에다 이름 석 자를 올려 본 이력을 밑천삼아 겁도 없이 문예반을 기웃거리게 되었는데, 그런 병아리를 선생님은 은혜로운 눈길로 보살펴 주셨다. 그 선생님을 따라 두세 군데 백일장에 나가 입상의 영예를 누렸고, 그런 과정을 통 해서 나는 막연하게나마 장차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슴 깊 이 내리게 되었다. 내가 고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원영동 선생님은 서울로 훌쩍 떠나시 고 말았다. 당시 몇몇 대학에서는 고교생을 상대로 백일장이나 문예작품을 공모해서 당선된 학생을 특기장학생으로 선발했다. 나는 그 관문을 통해 대학에 들어갈 작심을 진작부터 굳혀 놓고, 입시공부는 뒷전으로 밀어 둔 채 습작이나 문학작품 탐독에 더 열중했다. 이듬해 초여름 데모 열풍이 전국을 강타했을 때, 조기 방학이 실시되어 나는 태백 친가로 돌아갔다. 무덥고 지루한 50여 일의 방학 동안 나는 약 1천 매에 가까운 장편 과 70여 매에 이르는 단편을 썻는데, 「도주」라는 그 작품이 서라벌예대 문창과 주최 고교생 문예콩쿠르에서 당선되는 행운을 차지했다. 그 소설을 뽑아준 사람이 김동리 선생님이었다. 오정희·이경자·윤정모와 어울리며 특기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입학한 나는 약간의 우월감에 젖어 있었다. 바로 위 학년에 작가 이동하, 시인 김형영 형이 포진하고 있었다. 1년 후면 나 도 그들처럼 학생 작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리라는 터무니없는 시건방을 여러모 로 과시했던 것 같다. 50여 명에 이르는 학생 가운데서 나중에 문단에 나온 문우를 손꼽으면 김년균·오정 희·이경자·윤정모·이우선·김희원·장경호·이남진·이옥희·안병국 등이 나의 동기였다. 그중 에서 오정희와 이경자는 나와 동인회 비슷한 모임을 만들어 학교 앞에다 정한 내 하숙 집에도 스스럼없이 드나들 정도로 절친했다. 내가 3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 이미 신춘문예를 통과해 당당한 작가로 입신한 오정희는 문창과 조교로 재임하고 있었다. 김년균 시인의 자취방에서 습작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 그해에 학교는 졸업했으나 직장 잡기가 난 감했다. 그 무렵 김년균 형이 월간문학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미아리 달동네에다 방 하나를 세 들어 혼자 살고 있었다. 문창과 동기생이기는 하지만 군 복무를 마치면서 대학에 들어온 그 형이 나의 딱한 사정을 알고 일단 자기 집에다 거처를 정해 놓고 차 차 진로를 모색해 보자고 제의했다. 끼니는 대개 미아리 길음시장에서 매식으로 때웠고, 김년균 형이 출근하고 나면 나 는 어두컴컴한 그 빈방으로 혼자 돌아갔다.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작품을 쓴답시고 고 심했지만 여름날 뿌리 뽑힌 고구마 줄기처럼 심신이 고루 시들어버린 나머지 이렇다 할 진척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 당시에 쓴 약 5백여장의 중편 하나를 기념 삼 아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지금 보면 어디에도 내놓을 형편이 못 되는 엉터리 작품이 었다. 그 엉터리 작품을 싫증도 안 내고 끈기 있게 읽어 주면서 “잘 썼다. 넌 틀림없이 큰 작가 될거야.”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던 김년균 형의 그 무던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 하다. 두어 달을 그렇게 버티고 나서 소설가 이동하 형이 소개해 준 『월간스포츠』라는 잡지사에 취직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잡지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출근 6개월 만에 다시 실직자가 되고 말았다. 이동하 형이 다시 소개를 해서 이번에는 작가 김원일 선배가 부장으로 재직 중인 국민서관이라는 출판사에 입사했다. 아동물 출판사인데 걸핏하면 야근이었다. 나는 거기서 4년 6개월을 근무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아내를 따라 병원에 갔는데,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에 굴러다니는 잡지 한권을 집어 뒤적거리다가 거기서 나는 참으로 충격적인 동화 한 편 을 발견했다. 내가 한 사람의 작가가 되기를 어쩌면 내 자신보다 더 간절하게 소망했 던 ‘그 여자’의 장선작품이었다. 나는 지난 3년간 문학과는 거의 의도적으로 담을 쌓고 지낸 스스로의 배신행위가 당치도 않은 패배주의자의 자기기만적 자학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로부터 오래잖아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내일에 대해 아무 보장도 없는, 불확실한 가능성과의 고달픈 씨름의 연속이었다. 나는 시시각각으로 엄습 하는 처절한 불안감과도 싸워 이겨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먹고살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숙제 앞에서는 더더욱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나는 결국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소설가 김문수 선배가 재직하는 출판사에 연줄을 대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내 생에에 잊을 수 없는 몇 사람과 의 교우가 시작되었다. 윤후명·이문열·이외수 등과 ‘작가동인’결성 처음 만난 사람이 윤후명이었다. 이 친구를 통해서 유익서와 이채형·황충상을 만났 다. 윤후명은 이미 기성시인이었지만 유익서 등은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우리는 급속 히 가까워졌고, 누구의 제안이었는지는 지금 기억에 없지만, 하여간 우리는 월 1회씩 습작품에 대한 합평회를 갖는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약 1년정도 그런 작품 합 평회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성장했고, 다소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네 사람 모두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던 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됨으로써 그 지루하고 암담하고 차라리 처절하기까지 했던 힘겨운 문학 수업기에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1978년 10월호『월간문학』신인작품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나의 데뷔작은「사자의 춤」이다. 등단하고 나서 1년쯤 지났을 때,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작가들을 만나게 되 었다. 이문열·이외수·윤후명·손영목·서동훈·유익서·김원우·김채원·유홍종·표성 흠 등 쟁쟁한 젊은 작가들을 만나 ‘작가동인’을 결성한 것이다. 1980년 8월 15일, 한국문예진흥원 뒤뜰 잔디밭에서 첫 회합을 가졌고, 이어서 도서 출판 민음사에서『작가동인』1집을 내었다. 『작가동인』을 4집까지 내는동안 강석경· 김상렬·김인배·정소성·최학·황충상 등도 참여했다. 이들 덕분에 나도 덩달아 ‘좀 쓰는 젊은 작가’로 분에 넘치는 평가를 받았고, 지금까지 문단 말석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내력도 어쩌면 그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강릉과 서라벌예대 제4강의실은 내 문학의 뿌리이자 산실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김주영·이근배·오정희 외, 2013,『문학이라 쓰고 인생이라 읽다』, 작가세계, pp.122~125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00
  • 북디자이너 정병규가 회고하는 서라벌예대와 한국 문학 북디자이너 정병규 역시 서라벌예대에서 스무살 청춘을 보낸 사람 중 한 명이다. 1946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하근찬, 손창섭, 장용학의 소설을 읽으며 문사의 꿈을 키웠고, 1967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이시영 시인, 감태준 시인, 소설가 송기원이 그와 함께 공부했고 바로 위로는 소설가 오정희가 있었다. 정병규가 이야기하는 서라벌예대는 오늘날 대학의 풍경과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서라벌예대는 문학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가난한 청년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기성 질서를 마음껏 비웃고 조롱했던, 낭만적 기백이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6.25와 4.19를 겪으며 자라난 그들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관점과 시야로 세계를 관찰하며 혁신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그런 점에서 서라벌예대라는 이름은 그저 물리적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현대 한국문학사의 중요한 어떤 국면을 보여주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 북디자이너 정병규 인터뷰 中 (2014. 12. 1. 서교동 투썸플레이스)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04
  • 미당, 동리, 김수영 미당(서정주 시인) 선생님 수업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미당 선생님은 날씨가 좋으면은 “오 날씨가 좋구만!” 하시면서 건너편 길음시장 쪽에 있었던 ‘밀리언 다방’으로 저희들을 데리고 가셨어요. 그 다방이 주 강의실이었던 셈이죠. 거기 가면 차 한 잔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자네 뭐 쓴 게 있는가?” 물어보시곤 했어요. 또 흐린 날에는 “이런 날 어떻게 강의를 하나” 하시면서 나가셨죠. 하여튼 소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강의라는 것은 안 하셨습니다. 반면에 소설가이신 김동리 선생님은 자주 강의를 하셨어요. 주로 글 쓸 주제 하나 던져주시고는, 다음 수업 때까지 글을 써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손’에 대해서 몇 매를 써와라 이런 식으로. 산문을 가르치셨으니까 그렇게 하신 것이죠. 김수영(시인) 선생은 거의 격년으로 강의를 하셨는데 나는 김수영 선생 강의를 못들었어요. 잠깐 뵙기만 했었는데 주로 낡은 국방색 바바리 코트를 입고 다니셨어요. 소매가 반질반질했어요. 눈이 굉장히 컸어요. 김수영 선생이 복도나 교정에서 학생들을 잡고 이야기를 많이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학생들도 김수영 선생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았어요. 웬만한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은 거의 다 서라벌예대에 출강을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그분들이 갈 데가 없었어요. 일반 대학 국문과에서는 안 받아 주었으니까. 당시 문교부 규정에 의하면 학위가 없으면 교수 임용을 못하게 되어 있었어요. 서라벌예대나 나중 서울예대 같은 학교만이 우리나라 최일급 문인들에게 강의 공간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 북디자이너 정병규 인터뷰 中 (2014. 12. 1. 서교동 투썸플레이스)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04
  • 1956년 4월 미아리고개 너머 산을 깎아 만든 자리에 서라벌예술대학의 3층짜리 교사가 지어졌다. 1953년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대학이 새로 건물을 짓고 돈암동 산3-1번지로 이사를 온 것이다. '문인 사관학교’라고 불린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에는 김동리를 비롯해 당대 최고의 시인 서정주, 안수길, 박목월, 곽종원, 이광래, 정태용, 김구용, 양원달 등이 교수로 있었다.
  • 이 남루한 동네들 한켠에 서라벌예술대학이 들어선 것은 1956년이었다. 주소는 돈암동 산 3의 1번지. 현재 지하철 4호선 길음역 부근 동부센트레빌 아파트 자리이다. 미아리 고갯마루에서 10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나오는 곳이다. 1953년 6월 용산구 후암동에서 개교했던 서라벌예대는 1955년 5월부터 새 교사를 미아리고개 너머 개운산 북쪽 기슭에 신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3월 학교를 이전하였다. 길음동의 나즈막한 민가들을 내려다보며 우뚝 솟은 서양식 건물이 이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라벌예술대학은 한국 최초의 예술대학으로 지금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의 전신이다. 1953년 문예창작과 100명, 연극영화과 100명, 음악과 100명 총 300명의 학생을 모집해 첫 수업을 시작한 서라벌예대는 전후 황폐한 문화 풍토 속에서 젊고 참신한 예술인들을 길러내는 요람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서정주와 박목월과 김구용이 시를, 안수길과 김동리와 계용묵이 소설을 지도하는 문예창작과는 전국의 문학 청년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문학의 전당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내노라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예술대학을 만든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전쟁은 모든 한국인들에게 큰 고통과 상처를 주었으며 그것은 이 땅의 예술가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데올로기의 허울 아래 죽임을 당하거나 북으로 끌려갔다. 운 좋게 살아남아 다시 서울에 돌아온 예술가들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극심한 가난과 굶주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패배의식이 감수성 예민한 정신을 짓눌렀다. 당시 예술가들의 집합소였던 명동의 다방은 씁쓸한 자조와 허무한 냉소로 가득찼다. 이러한 절망의 시대 서라벌예대의 탄생은 갈길 잃은 젊은 예술지망생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건이었다. 전국의 예술지망생들이 소문으로만 듣던 시인, 작가, 영화감독, 음악가 들의 지도를 받고자 서울의 한구석 미아리고개를 넘어와 입학원서를 냈다. 1966년 이 학교에 입학한 소설가 오정희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바람 세고 황량한 돌산 아래, 젊은이들이 저마다 대예술가로의 꿈을 품고 모여든 예술대학 교정은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이 현실감이 없었다. 그 이상하게 비현실적인 풍경은 바로 우리들의 젊음의 시간, 오직 예술이 아니면 채워지고 치유될 수 없는 열정과 절망과 상처가 빚어내는 것이었으리라. ― 오정희, 『문학이라 쓰고 인생이라 읽다』(2013) 서라벌예대는 교수진도 대단했지만, 그들로부터 배운 졸업생들 역시 일찌감치 예술계의 중심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대가의 반열에 든 사람도 많다. 문인들로는 김주영・김원일・김형영・박상륭・송기원・송수권・오정희・윤정모・이경자・이근배・이동하・이문구・이시영・조세희・천승세・한승원이 이 학교를 나왔다. 또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금세 얼굴이 떠오르는 배우들, 김인태・김흥기・남성훈・민욱・문희・이대근・이정길・전유성・조춘・최불암 등도 젊은 시절 미아리고개를 넘나들며 연기의 기초를 닦았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94-96쪽
  • 서울 시내에서 미아리고개 너머 서라벌예대까지 가는 길은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결코 쉽지 않았다. 서울 시내에 사는 학생들은 전차나 버스를 타고 혜화동로터리와 삼선교를 거쳐 돈암동 종점에서 일단 내린 다음, 거기에서부터 미아리고개까지 비포장의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서 다시 10분 정도 터벅터벅 내려가야 학교에 당도할 수 있었다. 마포에 살았던 오정희는 등교하는 데만 족히 두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 고생해가며 학교에 다녔던 졸업생들은 그 시절을 ‘미아리 시절’라 부를 때가 많다. 흔히 ‘한 많은 미아리고개’라고들 하는데 그 ‘한’에는 배고픈 시절 젊은 예술가들의 힘겨운 기억들도 얼마큼은 스며 있는 것이다. 예술대학인 만큼 수업은 실습 위주로 이루어졌다. 문예창작과의 경우 학생들은 매주 작품 한 편씩 써내야 했다. 그러면 수업시간에 교수와 동료 학생들은 새로 쓴 작품들을 읽으며 합평회를 가졌다. 합평회는 때로 한바탕 날선 비판과 대결의 장으로 변하기도 했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내보여야 하는 부끄러움의 자리이자, 혼자서 몰래 질투와 시샘을 감추어야 하는 고독한 시간이 되기도 했다. 중요한 부분을 지적해 주는 경험 많은 교수들의 역할도 컸지만, 무엇보다 학생들끼리 작품에 대한 진지하고 열띤 토론의 자리가 있음으로 해서, 서라벌예대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가진 문인, 배우들을 어느 곳보다도 많이 배출하였다. 1972년 자금난으로 학교 운영이 어려워진 서라벌예대는 중앙대학교에 합병・인수되고 말았다. 캠퍼스도 중앙대가 있는 동작구 흑석동으로 옮겨가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이란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서라벌예대의 ‘미아리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98년에는 예술대학 옆에 있던 서라벌고등학교도 이사를 가버리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지금은 아무런 자취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혹시,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미아리고개를 넘어갈 일이 있다면, 50년 전 뜨거운 피를 품은 채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내렸던 젊은 예술가들의 발걸음을 한 번 상상해볼 일이다. 그러다 괜찮은 싯구 하나 건져올릴지 누가 알겠는가.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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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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