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관동
1950.03.15
장소 인문지리
성북구 동쪽에 위치한 동의 이름이다. 북쪽으로는 화랑로가 경계이고 동쪽으로는 중랑천을 끼고 있다. 천장산의 동쪽 줄기가 돌을 겹겹이 꿰어놓은 듯하다고 하여 동네 이름을 돌곶이라고 불렀고 그것을 한자로 돌 석(石)자와 꿸 관(串)자를 사용하여 석관이라 한 것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장위리 혹은 석관리로 불렸고, 일제강점기에는 경기도로 편입되어 고양군 숭인면 석관리가 되었다. 해방 후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편입되어 1950년 석관동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 행정동제 실시로 행정동은 장석동, 법정동은 장위, 석관동으로 이원화되었다가 1963년 장석동을 장위동과 석관동으로 분동하였다. 1975년 석관 1, 2동으로 분할되었다가 2007년 다시 석관동으로 통합되었다.
석관동
  • 돌곶이 유래비
  • 천장산이 보이는 석관동 전경
  • 덕성기름집
  • 화랑고가차도 개통(2)
  • 화랑고가차도 개통(1)
  • 상월곡동, 석관동 일대
  • 석관동 338번지 일대
  • 이문동 아파트에서 바라 본 석관동 일대
  • 석관동 하늘채코오롱아파트와 주변 모습
  • 화랑고가차도 개통(3)
  • 화랑고가차도 개통(4)
  • 화랑고가차도 개통(5)
  • 화랑고가차도 개통(13)
  • 화랑고가차도 개통(12)
  • 화랑고가차도 개통(11)
  • 화랑고가차도 개통(10)
  • 화랑고가차도 개통(9)
  • 화랑고가차도 개통(8)
  • 화랑고가차도 개통(7)
  • 화랑고가차도 개통(6)
  • 석관, 월곡, 장위동 일대
  • 래미안석관아파트와 주변 모습
  • 화랑로 석관시장 육교에서 석계역쪽
  • 석관1동 청사
  • 석관동건축폐기물
  • 장위동, 석관동 전경(2)
  • 석관동 전경
  • 석관동에서 바라본 장위사거리
  • 석관동 마루길과 감나무길 주변 모습
  • 의릉과 천장산 자락의 석관2동 전경
  • 석관1, 2동 모습
  • 장위동, 석관동 전경(3)
  • 장위동, 석관동 전경(4)
  •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보이는 석관동 일대(1)
  •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보이는 석관동 일대(2)
  • 돌곶이로8아길 일대(1)
  • 돌곶이로8아길 일대(2)
  • 돌곶이로8아길 일대(3)
  • 화랑고가차도 개통(14)
  • 돌뫼어린이공원(2)
  • 돌뫼어린이공원(1) - 표지판
  • 화랑어린이공원(3)
  • 화랑어린이공원(2)
  • 화랑어린이공원(1)
  • 남성미용실(3)
  • 남성미용실(2)
  • 남성미용실(1)
  • 대신이발관(3)
  • 돌뫼어린이공원(3)
  • 제1회 성북구 민간기록물 수집 공모전_1978년 성북구 석관동 기와공장
  • 석관동 주위 경관
  • 청량근린공원에서 바라 본 풍경
  • 청량근린공원 주변 전경
  • 의릉 정자각 내부(2)
  • 의릉과 주변 풍경
  • 석관동 58-56
  • 청량근린공원 체육시설
  • 의릉 정자각 내부
  • 의릉 내부(1)
  • 의릉 전경
  • 대신이발관(2)
  • 대신이발관(1)
  • 돌이음소공원(2)
  • 도고이용원(3)
  • 도고이용원(2)
  • 도고이용원(1)
  • 석관동제2경로당(2)
  • 석관동제2경로당(1)
  • 동우사우나(3)
  • 동우사우나(2)
  • 동우사우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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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호대중사우나(1)
  • 동호대중사우나(2)
  • 돌이음소공원(1)
  • 형제이발관
  • 석관동제1경로당(3)
  • 석관동제1경로당(2)
  • 석관동제1경로당(1)
  • 금성이발관
  • 우리이용원(2)
  • 우리이용원(1)
  • 동호대중사우나(3)
  • 새서울이용원(1)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石串洞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1950.03.15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근거자료 원문

  • 석관동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풀어본다면 ‘돌 석石’자에 ‘꿸 관串’자이다. 말 그대로 돌이 꿰어져있는 동네라는 의미인데, 이는 마을 동쪽에 위치한 천장산天藏山의 한 줄기가 돌을 겹겹이 꿰어 놓은 형상을 띠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동네에 위치한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은 바로 석관동이라는 한자 이름을 순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245쪽
  • 石串洞 中浪川과 「花郞路」를 끼고 있는 石串洞은 마을 남서쪽의 天藏山의 支服이 검정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팥떡이나 경단을 꽂이에 꿰어 놓은 것 같아 돌곶이마을이 되었다는 說과 이곳 지형이 꽂이로 되었으므로 돌곶이라 하였다는 說이 있는데 돌곶이 이름을 한자로 표기해서 石串이라고 붙인 것이다. 石串洞은 앞의 長位洞과 같이 조선초부터 漢城府에 속했으며 英祖 27년(1751)에는 漢城府東部 仁昌坊(城外) 長位里로 칭하다가 甲午改革때에는 漢城府 東署 仁昌坊(城外) 東小門外契 石串里로 되었다. 그 후 한일합방에 따라 日帝가 1911년 4월 1일(京畿道令 제3호) 京城府 仁昌面 石串里로 칭하다가 1914년 4월 1일(京畿道令 제1호) 京畿道 高陽郡 崇仁面 石串里로 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大統領令 제159호) 서울市에 편입되면서 城北區의 신설로 이에 속하고 崇仁出張所에서 행정을 담당했다. 이듬해 1950년 3월 15일(市條例 제10호) 石串里는 石串洞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1975년 10월 1일(大統領令 제7816호)에 區, 洞의 관할구역 재편성이 있을 때 이문동 북쪽의 석관동 일부 지역(주민수 2,253명)이 동대문구 이문동에 편입되므로서 축소되었다. 조선시대 중기까지 이 洞의 원주민들은 天藏山 아래 거주했는데 懿陵이 석관동 산 1∼5번지에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당시에는 벌판에서 벼농사를 주로 했는데 물색이 좋아 생활이 윤택했다는 것이다. 1960년 이후부터 이 洞에는 인구가 집중되어 농업은 점차 사라지고 도로변에는 商街가 형성되었으며 주택들이 밀집해 있다. 석관동 산 1∼5번지에는 史蹟 제204호로 지정된 懿陵이 있다. 이 왕릉은 조선20대 왕인 景宗과 繼妃 宣懿王后 魚氏의 릉으로 雙陵이다. 경종은 숙종의 長子로 숙종 14년 당시 3세로 세자가 되었고 숙종 43년에 세자로서 대리청정을 하기도 하였다. 숙종이 승하한 뒤 즉위하였으나 病弱하여 원년 8월에 이복동생(숙종의 4子) 延仍君을 世弟로 봉하였으며 재위 4년만에 3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繼妃 宣懿王后는 威原府院君 魚有龜의 女로 숙종 44년 15세로 세자빈이 되었고 경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進封되었으며 英祖 6년에 26세로 所生없이 타계하였다. 追尊된 純祖의 아들 翼宗의 陵도 純祖 31년(1831) 8월 4일에 이 곳 懿陵 左岡에 모시고 延慶墓라 하다가 헌종 즉위년에 추존하여 緩陵으로 높인 뒤 哲宗 6년(1855) 에 楊州都 九里面 仁倉里(東九陵)로 遷奉하였다. 또 석관동 340번지에는 都堂이 있다. 의릉이 조성되기 전에는 천장산 아래에 山神으로서 이 동네의 수호신으로 모시다가 이전해 온 것이다. 이 도당의 主神은 都堂할머니라고 부르며 神主대신 항아리에 벼를 가득 넣고 짚으로 딸은 주저리로 덮어 놓았으므로 女神을 모시고 豊農을 기원한 것이 틀림없다. 이 洞의 서쪽을 흐르는 中浪川은 경기도 楊州에서 발원하여 의정부시를 거쳐 「화랑로」에 놓인 월릉교 부근까지는 한내(漢川)라고 칭하다가, 월릉교에서 牛耳川, 墨洞川이 합류하면서 중랑개(中浪川)로 칭하며 면목동, 중곡동을 지나 살곶이다리에서 청계천과 합류해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중랑천은 전에 松溪川, 또는 涑溪로 불리었는데 이는 松漢院이 있었기 때문이며 중랑천이란 이름은 하류에 中梁浦가 있었으므로 연유되었다. 중랑천은 1970년대까지 매년 여름이면 水位가 높아져 저지대의 주택은 水害를 겪었으며 주택의 하수와 공장의 폐수로 1960년대부터 오염되기 시작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16-818쪽
  • 〈石串第1洞〉 石串 第1洞은 「이문로」 동쪽 일대의 석관동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 명칭이다. 이 洞은 장위제1동과 같이 1949년 8월 13일 서울市에 편입되었을 때 洞會가 설치되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1953년 초에 長位洞會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서울市에 편입될 때도 동일했으리라고 본다. 이 당시의 장위동회는 장위동과 석관동 일대를 관할하고 있었으며, 그 후 1955년 4월 18일(市條例 제66호) 「洞制」실시 때 長石洞事務所로 바뀌었다. 이어서 1963년 1윌 1일 (市條例 제274호) 長石洞을 長位洞事務所와 石串洞事務所로 분리시킬 때 石串洞事務所에 속했으며 1975년 10월 1일(市條例 제981호) 석관동 중 상월곡동과 접하는 「장석로」를 따라 남진, 월곡로를 건너 이문로를 따라 남진하여 이문동과 접하는 도로 이동지역을 石串第1洞으로 하고 그 이외의 지역을 石串第2洞으로 정했다. 이 洞의 북쪽으로는 「화랑로」, 남북으로는 「里門路」(시조사∼외대앞∼석관국교), 「漢川路」가 지나고 있는데다가 남쪽과 북쪽 경계선 부근에 경원선 電鐵 新里門驛과 石漢購이 자리잡고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다. 신이문역과 석계역 사이의 철로 동쪽에는 동원연탄, 삼표연탄, 삼천리연탄, 정원연탄, 칠표연탄 등의 연탄 생산공장이 1962년부터 들어서 있었다. 이 공장에서는 하루 150만개를 생산해서 서울시내의 연탄공급량의 1/2을 공급했으나 주택 난방 연료가 油類로 바뀌는데다가 이 공장에서 나오는 粉塵이 인근 주택가의 公害를 자아내어 民怨이 일어나므로 점차 市外로 이전해 가고 있다. 「한국일보」(’93.1.8) 에 의하면 이곳의 정원연탄은 이미 폐쇄되고, 1993년 1월 7일자로 삼표, 칠표 연탄공장이 폐쇄되므로서 16개소가 7개로 줄어들고 생산량도 30%가 축소되었는데 나머지 9개소도 서울市에서 연차적으로 폐쇄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1975년과 1990년의 석관제1동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819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18-819쪽
  • 〈石串第2洞〉 石串第2洞은 「里門路」서쪽 일대의 석관동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 명칭이다. 이 洞은 앞의 석관제1동의 沿革과 같으므로 1975년 10월 이전은 생략하고 1975년 10월 1일(市條例 제981호) 석관동 중 석관 제1동장 관할구역을 제외한 전역을 石串 第2洞의 관할구역으로 정해서 현재에 이르렀다. 「화랑로」변의 이 洞과 상월곡동 경계지역을 푸석골 또는 돌곶이말이라고 한다. 전에 성황당나무가 있는 고개를 푸석산이라 했기 때문에 푸석골이라고 칭했던 것으로 이 마을은 驪興(지금의 京畿道 驪州)閔氏들의 集姓마을로서 동네의 평안과 발전을 위해 푸석산에서 1년에 한번씩은 山祭를 지내고, 3년에 한번 큰굿을 하였다. 그러나 6.25동란 이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점차 모여 살게되므로서 驪興閔氏들의 集姓村落的인 성격도 차츰 퇴색되어졌고 山祭나 洞祭의 풍속도 사라졌다. 이 洞의 관내에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석관동 261-1) 가 있다. 1960년 5월 13일에 설립인가를 받아 1970년 8월 25일에 현재 위치로 이전했고 그 이듬해 고등학교 과정으로 인가되었다. 그리고 국민은행 석관동지점, 새소망예식장, 새석관시장 등이 자리잡고 있다. 1975년과 1990년의 석관 제2동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820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19-820쪽
  • ○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성북구의 명소 성북구의 명소 98 구민들 사이에 명성 높은 '밤의 절경' - ‘돌곶이’란 명칭의 유래는 마을 이름과 연관이 깊다.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의 한줄기가 검은 돌을 꽂아 놓은 것 같았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면 지금의 석관동을 의미한다. 석관동의 돌곶이역 방향 야경은 이미 구민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하다. 2층으로 쌓은 듯한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은 보는 사람에게 연신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돌곶이 야경은 항상 바쁘게 살아가는 구민들에게 청량제 역할을 해주고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66쪽
  • 석관동의 이름은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天臧山)의 지맥이 검정 돌을 꼬치에 꿰어놓은 것 같다고 하여 돌곶이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이 마을은 돌곶이라 부르다가 조선왕조 20대 왕인 경종의 능인 의릉(懿陵)이 이곳에 안치된 이후 돌곶이에 능(陵)자를 붙여 ‘돌곶이 능말(마을)'이라고 불렀고, 돌곶이 이름을 한자로 표기해서 ‘석관(石串)’ 이라는 동명이 되었다. 조선시대 석관동은 장위동과 함께 한성부에 속해 있었으며, 의릉이 조성되면서 사람들이 천장산 쪽으로 집단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의 주택가인 1, 2동은 원래 벌판이었고, 주민들은 이곳에서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면서 살았다. 또한 물색이 좋고 살기가 좋아서 산 밑은 전곡과 호박이 잘 되었다고 전해진다. 1960년 이후부터 인구 집중 현상에 따라 농업지대는 점차 사라졌다. 현재 도로 주변에는 상가가 밀집되었으며 그 밖의 지역은 대부분 주택가로 형성되어 있다.
  • 석관동의 유래는 마을 동쪽에 위치한 천장산의 한 맥이 검정 돌아 꽂아 놓은 것 같아 돌곶이 마을이 되었다는 설과 이곳의 지형이 곶이로 되었기에 돌곶이라 하였다는 두 가지가 설이 있다. 석관동의 이름이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현종 2년(1661)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왕이 영릉, 건원릉, 현릉, 목릉 등을 배알하고 돌아오는 기렝 석관에 이르러 금군의 활솜씨를 시험하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조선시대 석관동은 장위동과 함께 한성부에 속해 있었으며, 의릉이 조성되면서 사람들이 천장산 쪽으로 집단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주택가인 1,2동은 원래 벌판이었고, 주민들은 이곳에서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석관동의 현대사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옛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이다. 중앙정보주는 5.16쿠데타 직후부터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부터 의릉 능역 전체를 접수하였으며, 1962년 1월부터는 무상으로 임대하여 사용하였다. 1995년 9월 안기부(옛 중앙정보부)가 내곡동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의릉은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으며, 중앙정보부 건물 자리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설립되었다.
    성북문화원, 2016, 성북문화 제4호, 311-312쪽
  • 도성을 멀찍이서 둘러싼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과 같이 수려한 산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중랑천과 그 지천들이 핏줄처럼 흐르는 널찍한 평야지대. 이러한 자연환경 때문에 조선시대 장위동과 석관동 일대의 땅들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천장산과 오패산 자락에는 왕실의 능묘가 자주 들어섰고 양반 관료들은 자신들의 별업을 조성하였으며, 농민들은 토지를 일구어 논밭을 경영했다. 근대에 접어들어 장위동과 석관동에는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중심에 철도가 있었다. 1911년 경원선 철도가 중랑천을 따라 남북으로 놓였고, 1939년 경춘선 철도가 장위동과 석관동을 가로지르며 동서로 놓였다. 철도의 건설 이후 장위동, 석관동을 지나는 인구와 물자의 이동량이 많 아지고 서울의 권역이 확대됨에 따라 장위동과 석관동의 인구와 주택도 많아졌다. 1970년대 이후 경원선 철도가 도심과 연결되는 전철 노선으로 쓰이며 신이문역, 석계역이 잇달아 생기고, 자동차 도로와 다리가 놓였다. 이와 함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장위동, 석관동에 남아 있었다는 논밭과 농가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두 동은 완연한 서울 시내 주택가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한동안 1 · 2층짜리 단독주택들이 많았지만 1980년대 연립주 택과 다세대주택들이 대거 들어섰고 2000년대부터 구역별로 재개발이 차근차근 이루어지며 고층 아파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 가고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1쪽
  • 석관동의 유래 석관동이란 지명에 관해서는 천장산의 지맥이 검정 돌을 꼬치에 꿰어놓은 것 같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돌곶이 이름을 한자로 표기해서 ‘석관石串’이라는 동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푸석골이라는 마을 이름도 전하는데, 천장산의 소나무가 워낙 크고 사철 푸르러 그 산을 의지해 마을이 형성되어 이러한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서울역사편찬원 편, 『서울 洞의 역사 : 성북구』 4, 2018, 266쪽)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26쪽
  • 동부 석관리 조선시대 한성부의 성저십리 지역에 속한 석관동 지역은 도성에서 동구릉과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왕이 능행차로 오갈 때 잠시 쉬어가던 곳이었다. 『조선왕조실록』 현종 2년조(1661)에 석관동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이유이다. 기록을 보면 “왕이 건원릉・현릉・목릉을 배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석관에 이르러 금군禁軍의 활 솜씨를 시험하였다.”고 나와 있다. 1736년(영조 12)에도 영조가 ‘석관현石串峴’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고, 1747년(영조 23)에도 지금의 동구릉과 의릉을 배알하고 돌아오다가 석관현에서 열병하였다. 조선 왕실은 석관동 지역을 비롯한 도성의 동쪽 천장산 주변을 ‘율원栗園(밤나무 동산)’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율원은 조선시대 궁궐의 정원과 화초 등을 관리하고 각 도에서 진상한 과일을 관리하던 관서인 장원서 소속의 밤 생산지이다. 안암동, 제기, 청량, 고암(종암)의 마을들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경성(京城)의 10리(十里) 주위는 본부(本府)에서 관할하는 금산(禁山)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감역관(監役官)을 설치하고 금송(禁松)을 순검(巡檢)케 하였으니 그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닌데, 근래에 장원서(掌苑署) 및 내국(內局)에서 새로 율원(栗園)을 정하여 안암동(安巖泂) · 제기(祭基) · 청량(淸涼) · 고암(鼓巖) · 석관(石串) 등의 마을을 모두 소속시켰습니다. (『경종실록(景宗實錄)』 권6, 경종 2년 3월 26일(신해)) 이후 경종 사후에 석관동 지역에 의릉懿陵이 자리 잡았는데, 의릉이 이곳에 안치된 후 돌곶이에 ‘능’자를 붙여 ‘돌곶이능말(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후기 석관현 일대에는 장위동 지역과 마찬가지로 당대 고위 관료들이 전장田莊과 별업을 만들어 놓고 일시적으로 거주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 가문의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1658~1721)이 거주하였다. 이들 이 외에도 지중추부사를 지낸 어석윤魚錫胤(1701~1768), 좌의정을 지낸 김약로金若魯(1694~1753) 등이 거처하기도 하였다. 1757년(영조 33) 좌포도청이 대리청정을 하던 세자(즉 사도세자)에게 제출한 보고문에서 ‘석관리 승방石串里僧房’이라고 하여 석관리의 명칭이 확인된다. 조선시대 고문서들 가운데는 석관동 일대의 전답을 매매하고 이를 증명, 신고하는 문서가 상당수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고문서로는 숙종 연간에 활동했던 내시 김여흥金麗興이 남긴 토지문서가 있다. 이에 따르면 1712년(숙종 38) 내시 김여흥은 내시 김석명金碩鳴에게 양주楊州 돌곶乭串 청대막靑黛幕의 논 6부 5속 5마지기를 정은자正銀子 28냥을 받고 팔았다. 그리고 내시 김여흥은 이 사실을 글로 진술하여 한성부 관아에 보냈다.19 이밖에도 석관동 일대의 농토와 관련한 토지매매문서가 다수 남아 있어 이들 문서의 생산 시기, 토지 소유자, 매매의 성격에 관해 면밀히 조사한다면 조선 후기 석관동 지역의 사회경제사와 농토를 일구고 살아가던 농민들의 생활 모습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27-28쪽
  • 고양군 석관리 1910년 일제의 강제 합병 이후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면서, 1911년 이 지역은 경성부 인창면 석관리로 편제되었으며, 인창방 석관리라는 명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1914년 3월 13일 경기도령이 발표되면서 도내 각면의 명칭과 구역을 정하였다. 이때 경성부와 경기도의 행정 구역 조정이 이루어졌으며, 경기도 고양군에 경성부의 6면을 소속시켰다. 고양군에 소속된 지역은 용강면, 연희면, 은평면, 숭인면, 둑도면, 한지면 등인데, 이 중 석관리는 숭인면에 속하였다. 숭인면은 종래의 숭신면과 인창면을 합친 명칭이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28-29쪽
  • 성북구 석관동 1946년 9월 18일 서울시가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다(군정법령 제106호). 이어 10월 1일 이제껏 사용되어 온 일본식 명칭을 우리 고유명으로 개칭할 때, 석관리는 고유명 그대로 하였다. 1949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고, 성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고양군에서 성북구에 편입되고, 같은 해 성북구 내 숭인출장소에 소속되어 이곳에서 석관리의 행정을 담당했다. 1950년대 지도에는 ‘석곳동’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1950년 3월 15일 석관리는 석관동으로 개칭되었다(서울시조례 제10호). 1955년 4월에는 시조례 제66호 「동설치조례」에서 법정동을 설치하며 장위동과 합쳐 장석동長石洞으로 제정되었다. 그 후 1963년 1월 1일부터 시행한 ‘서울특별시 동 명칭 및 구역제정’으로 장석동에서 분리되어 석관동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그 후 1975년 10월 1일 행정동 재편성이 있을 때 석관1동과 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2007년 12월 30일부터 다시 석관동으로 통합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외준)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29-30쪽
  • 장위동 · 석관동 마을과 민속의 특징 장위동과 석관동에는 아직까지 이중계里中契, 마을 주민들의 유대, 상호부조, 공동재산 등으로 대변되는 마을공동체적 특징이 남아있다. 이는 도시 민속에서 중요한 연구 항목으로, 이 특징이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배경과 현황 파악이 중요하다. 때문에 이를 위하여 장위동과 석관동 사람들의 삶 자체, 즉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고, 어떤 공동체적 유대를 가지고 어떤 풍속을 지키며 살아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동 연혁을 살펴보면, 장위동과 석관동이 서울로 편입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895년 갑오개혁 때는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 동소문외계에 속하였고, 1910년 10월 1일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예속시키면서, 이듬해 4월 1일 경성부 성외 지역에 8면제를 시행할 때 장위동, 석관동은 경성부 인창면에 편입되었다. 또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을 축소할 때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속하여 광복 때까지 계속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 확장될 때 장위동과 석관동은 서울시로 재편입되어 성북구에 속하였다. 명칭도 장위리, 석관리로 불리다가 1950년 3월 15일 동명 개정이 있을 때에 와서야 비로소 장위동, 석관동이 되었다. 현재 장위동은 1, 2, 3동이 있고, 석관동은 1, 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다시 석관동으로 통합되었다. 자연마을을 살펴보면, 장위동에는 웃말, 아랫말, 멍덕굴, 간대마을, 활량리 5개 마을이 있었고, 석관동에는 푸석골이 있었다. 석관동은 일제강점기에 와서 인구가 늘어나 윗말, 아랫말로 나뉘었고 마을 사람들은 마을 이름보다는 그 마을이 속했던 행정구역 1구, 2구로 호칭한다. 이런 마을들에 세거성씨들도 살았는데 잘 알려진 성씨가 바로 장위동 해평 윤씨다. 남녕위 윤의선尹宜善(1823~1887), 장위산인 윤용구尹用求(1853~1939)로 대변되는 장위동 해평 윤씨는 윤의선 대에서 시작하여 3~4대정도 이 곳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나 마을사람들은 더 오래 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석관동에는 푸석골에 여흥 민씨 집성촌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관련 기록이 전무한 상태다. 진주 강씨 역시 석관동에서 오래된 성씨 중 하나이다. 고조高祖대부터 들어와 살았다고 하니 지금까지 대략 6~7대 정도 이어져 내려온 셈이다. 장위동, 석관동은 5, 60년 전까지만 해도 넓은 벌판에서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네에는 암암리에 소를 도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5, 60년 전까지만 해도 도당제의를 올렸고, 여름엔 대동놀이, 정월엔 윷놀이를 했었다. 잔치나 상이 났을 때는 동네에서 다 함께 도와주었고, 마을 공동체조직인 이중계가 존재하여 마을 공동재산을 관리하고, 상부상조하며 마을의례를 조직했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52-153쪽
  • 2019년 현재 장위동 웃말, 석관동 웃말에 이중계가 유지되고 있다. 2018년 초까지 유지되던 장위동 아랫말과 활량리는 재개발로 인하여 이중계가 해체된 상황이다. 이중계가 유지되는 마을들은 공통적으로 마을 공동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마을 공동재산으로부터 나온 임대료는 계원들의 상부상조와 마을제의에 사용한다. 때문에 도시화가 진행되어 옛 마을 정경은 이미 알아볼 수 없이 바뀌었고, 인구 이동으로 인하여 토박이들도 뿔뿔이 흩어졌지만, 장위동, 석관동 마을공동체 조직은 아직도 유지되어 옛 마을에서의 유대를 나누며 서로 상부상조하고, 마을공동체의례도 존속시키고 있다. 이는 장위동과 석관동에 남아있는 마을민속의 특징이다. 토박이들의 타지 이주가 잦아짐에 따라 새롭게 형성된 토박이 계조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향우회이다. 장위동 활량리 향우회는 활량리를 고향으로 하는 토박이 모임으로 이중계와는 차별점을 갖는다. 즉 이중계는 엄격한 장자 가입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면, 향우회는 장자 여부와 상관없이 1962년 이전 활량리 출생자면 가입이 가능하여 이중계 회원들은 향우회에도 가입되어 있다. 이는 도시화되어 가는 서울에서 사람들이 공동체적 결속을 유지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장위동과 석관동에는 토박이뿐만 아니라 지방이나 서울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도 대다수를 차지한다. 석관동에 연탄공장이 들어서면서 연탄가게나 연탄수송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또 서울도시 개발로 동대문 근처에서 점점 밀려나 장위동까지 오게 된 봉제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다양한 지역에서 올라온 시장 상인들, 여러 업종에 종사하는 회사원 등 이들은 상호간에 유대관계를 맺으며 장위동, 석관동이라는 터전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53-155쪽
  • 자연마을과 세거 성씨들 석관동 석관동은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天藏山의 한 맥에 검정 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떡이나 경단을 꼬치에 꿰어놓은 것 같은 형상이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불렸다. 조선왕조 20대 경종의 능인 의릉懿陵이 이곳에 안치된 뒤부터는 돌곶이 능말로 불렸다고 하는데 돌곶이란 이름을 한문으로 표기하여 석관石串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원래 의릉이 생기기 이전에는 천장산 아래, 즉 현재 의릉이 있는 자리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왕릉이 그 자리에 만들어지면서 주민을 집단으로 이주시켜 지금의 돌곶이로路 건너편 쪽으로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화랑로를 따라 상월곡동에서 장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마을 사람들은 ‘마른대미고개’라고 불렀다. 이 고개를 넘으면 평지가 시작되므로 고개가 바로 끝난다는 뜻에서 ‘대미고개’라고 불렀는데 발음 관계상 언제부터인지 ‘마른대미고개’라 하였다고 한다. 이 고개 마루에 동네의 재앙을 막아주는 수호신인 서낭(성황)나무가 있었는데 커다란 소나무였다고 한다. 자식이 없는 사람이 서낭나무에 빌면 자식도 얻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소나무는 크고 사철 푸르러 산 전체가 푸르게 보인다고 하여 ‘푸석산’이라고 불렀다. 이 푸석산을 배경으로 그 앞쪽, 즉 동쪽에 마을이 있었는데 푸석골 또는 돌곶이말이라고 불렀다. 푸석골은 석관동에 있던 여흥 민씨들의 집성마을이었다고 한다. 여흥 민씨들은 동네의 평안과 발전을 위해 푸석산에서 1년에 한 번씩은 산제를 지내고 3년에 한번 큰 굿을 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인구증가로 석관리는 1구와 2구로 분리되었다. 마을은 옛길, 즉 지금의 돌곶이로 23길, 22길, 한천로 78길을 따라 길 북쪽에 길게 형성되어 있었다. 서남방향으로 절반이 1구이고 반대 동북방향으로 절반이 2구였다. 1구는 웃말이라고 하였고, 2구는 아랫마을이라고 하였다. 웃말과 아랫마을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간혹 ‘가운데 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통용되는 마을 명칭은 아니었다. 웃말, 아랫말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동쪽에 있는 몇 집을 제주도처럼 떨어져 있다고 하여 ‘제주도말’이라고도 불렀다. 1950년에 와서 석관리는 현재의 지명인 석관동으로 변경되었다. 1975년에는 1동과 2동으로 분동되었는데, 1구가 2동이 되었고, 2구가 1동이 되었다. 1912년 『고양군 숭인면 석관리 토지조사부』14에 의하면 석관리에는 창덕궁 소유지, 국유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 마을 소유지15가 있었다. 그 외 개별적으로 거주하면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으로는 정씨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 최씨, 도씨, 전씨, 한씨, 김씨, 박씨, 손씨, 유씨가 있었다. 1950~60년대 마을의 성씨별 구성은 창원 황씨와 진주 강씨가 가장 많았고, 우봉 이씨와 경주 최씨, 안동 권씨와 청주 한씨 순이였으며, 그 외에 변씨, 추계 추씨, 신평 이씨, 안씨 등이 있었다고 한다. 진주 강씨는 참판 공파로 그의 고조부터 이곳에 살았다고 하니 대개 일제 이전, 즉 한말에 이곳으로 입향한 셈이다. 그러나 1912년 토지조사부에 강씨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주민들에 의하면, 진주 강씨는 경기도 광주에서 왔다고 들었으나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하였다. 진주 강씨 후손들에 의하면, 선산은 남양주시 내각동에 있다고 한다. 특히 조부 때 5남 1녀를 낳아 이후 일가가 크게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조부는 월곡동 고개를 넘으면서 서낭당에 자식을 많이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도 이 집안이 호수가 가장 많다고 인식하고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60-162쪽
  • 공동체적 특성을 반영하는 이중계와 개별 친목계 마을공동체 조직, 이중계와 향우회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일상 의례, 공동 행사, 공동 노역을 통해 결속된 자신들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마을 조직들은 시대와 사회구조에 따라 명칭과 성격은 달리하지만, 오랜 전통을 가지고 발전해 왔다. 동계洞契는 그 중 중요한 전통조직이다. 통상 전근대 시기에 해당하는 ‘전통적’ 조직으로 인식되는 동계는 최초에는 재지사족을 중심으로 향촌을 지배하고 교화할 목적으로 형성되어 상하합계上下合契 방식으로 행해졌다. 그 후 점차 왜소화되어 양반만의 상호부조적인 결사체로 되거나 관官의 하부구조로 재편되고, 자연촌 단위에서는 기층민을 중심으로 촌계류村契類 조직들이 나와 실제적인 촌락 운영을 담당하였다. 이중계里中契는 바로 이런 촌계류村契類 조직 중 하나로 마을 단위로 조직된 계조직이었다. 현대에 와서 도시 속에 존재하는 이중계는 이런 촌계류村契類 조직의 많은 기능이 쇠퇴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석관리에도 1, 2구, 즉 웃말, 아랫말에 모두 이중계가 있었다. 이장이나 구장과 같은 행정조직 말고도 전통적인 마을조직으로서 영좌와 소임을 둔 것도 마을공동체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이곳에서는 마을대동회를 ‘이중계里中契’라고 불렀다. 이중계 가입을 하려면 지분을 내고 들어와야 한다. 그러나 회원이 사망 시에는 직계 자손은 그냥 들어올 수 있다. 이중계 모임은 산신제 이후 날을 정해 가졌다. 모임 때 통문을 만들어 돌린 것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다. 이중계 모임 때 마을재정을 결산하며, 소임 등 마을 일꾼을 뽑는 것도 이 모임에서다. 단위는 1구와 2구를 구분하여 각 마을에 영좌와 소임을 따로 두었다. 현재까지도 1구에서는 이 조직이 유지되고 있고 43명의 회원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중계 회칙이라든지 하는 것은 가지고 있지 않고 명단만 가지고 있다. 석관리 마을에는 공청公廳이 있었는데, 움막 형태였다고 한다. 이 공청은 마을 재산, 즉 이중계 재산이었으며 순대국집으로 바꾼 후 세를 받아왔다. 지금 이 공청 자리는 시유지市有地라서 매년 280~290만 원의 토지 이용료를 낸다. 석관리 이중계는 마을에 상이 났을 때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상례를 치른다든가 마을의례인 도당제를 주최하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든가 하는 역할을 했다.
  • 공동체적 특성을 반영하는 이중계와 개별 친목계 개별 친목계 계는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자발적인 참여와 합의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든 비교적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모임이다. 한국인들에게 친목계는 아주 익숙한 단어로 한국사회에는 다양한 계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위에서 서술한 마을단위의 친목조직인 이중계 외에도 장위동, 석관동에는 다양한 목적계, 공동노동을 위한 계, 목돈 마련을 위한 계들이 존재했었다. 이런 계들의 공통의 특성은 ‘모여서 함께 하다’이며, ‘함께 모일 때 생기는 힘’, 즉 ‘공동체적 힘’은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바이다. 석관동 주민들의 친목모임은 아주 다양하다. 매월 10일은 꾀꼬리회, 재개발계, 골목회, 돌곶이회, 친목회 등이, 매월 24일은 금강회, 25일은 상포계, 30일은 동지회가 각기 모임을 갖는다. 매월 둘째 주에 행운회, 홀수달 마지막 날에 동우회, 짝수 달 첫째 토요일에 우석회 모임이 있다. 이 외에도 연령별로 비슷한 혹은 같은 나이의 주민들끼리 친목회를 조직하는 것도 한때 유행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우회인데 쥐띠와 소띠, 즉 1936년생과 1937년생끼리 만든 친목모임이다. 부부가 함께 참여하므로 부인들의 모임은 따로 없다. 이 모임은 매월 27일에 갖다가 너무 잦다고 하여 2달에 한번 갖는다. 연령별 모임은 모두 15개다. 이 모임들 상위 모임은 석관동 중앙회다. 중앙회에서는 봄과 가을로 경로잔치 겸 체육대회를 주관한다. 물론 과거 아랫말과 윗말 주민들이 함께 모임을 갖는다. 그리고 그 회원 자격은 자식에게 물리는데, 장남이 물려받는 것이 원칙이나 사정에 따라 차남이 물려받을 수도 있다. (중략) 옛날 통장들의 친목회로 통친회를 들 수 있다. 석관동에서 25년간 통장을 지냈던 김동현 씨는 석관1동 통친회에 가입되어 있다. 예전만 하더라도 통장에 대한 연임 제한이 없었다. 그래서 보통 한번 통장을 하면 20년 넘게 하고 65세에 그만두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통장을 오래 한 사람들의 친목회가 생겨났다. 김동현 씨가 가입되어 있는 통친회는 그 명칭이 ‘석관1동 통친회’다. 당시만 하더라도 석관1, 2동이 합쳐져서 석관1동이라고 칭하던 때였다. 김동현 씨는 40대부터 시작하여 석관1동 12통(지금은 21통) 통장을 25년간 했다고 한다. 통장의 주 업무는 동사무소에서 하달한 것인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전출입 주민에게 통장이 직접 도장을 찍어줘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민방위 소집, 반상회보 돌리기 등 자잘한 업무도 모두 통장이 해야 할 일이었다. 한 통에 보통 7개 반이 있었고, 한 반에 13~14가구 정도 있었다. 김동현 씨는 12통 통장을 65세에 그만두었다. 석관1동 통친회는 조직된 지 25년 정도 된다. 초창기는 회원이 20여 명 정도 되었는데, 연로하여 작고한 사람도 있고 하여 현재는 11명 정도 남았다.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고 회비는 두 달에 2만원씩 낸다. 경조사 시 화환을 보내주는데 현금으로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김동현 씨는 부동산 친목회에도 가입되어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66-168쪽
  • 공동체 관행과 놀이 공동체 관행과 탈관 풍속 마을 공동체 조직인 이중계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옛 마을을 떠올리게 하고 민속을 지속시키는 주축이 되었다. 장위동과 석관동 모두 5, 60년대만 하더라도 초상이 나면 다른 농촌과 마찬가지로 마을주민 모두가 간단한 술 등을 사서 부조하였고, 부인들은 상가에 모여 청량리시장에서 사온 베로 밤새 상복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주해 온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상포계를 조직하여 초상 때 태우는 일도 있었으나 예전 마을에서는 주로 이중계가 상포계 역할까지 담당했다. 이처럼 상례를 공동체 단위에서 치르는 관행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석관동 마을소유인 상여는 24명이 메는 큰 상여로, 이를 보관하는 상여집이 따로 있었다. 이 상여집은 상여를 쓰지 않게 되면서 마을창고로 썼다가 가게로 꾸며 세를 받아 마을기금에 보태었다. 석관동에 있었던 상여집은 현재 터만 있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장위동에는 지금의 장위3동 주민센터 동남쪽, 지금의 한천로 위치에 상주도가가 있었다고 한다. 장위동 상여는 공주릉 이장 당시 장위리 사람들이 도와주었다고 하여 마을에 하사하였다. 그 상여는 48명이 메는 큰 상여로 선소리꾼이 앞뒤에 탈수 있었다. 마을에서는 돈 많은 집안에서만 이 상여를 빌려 썼고, 지금은 한국민속촌에 기증하였다. 일반 평민들이 사용하는 상여는 이보다 작은 상여로 마을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당시 석관동 마을에는 ‘거지대장’이 살았다고 한다. 평소에는 걸인들을 모아 동냥을 하고 다니지만 선소리를 잘하여 동네에 상이 나면 상여 위에 올라가 요령을 흔들며 선소리를 하였다고 한다. 그가 사라진 후에는 마을 주민들 중에서 그 역할을 돌아가며 맡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강명옥 씨 작은 아버지도 이 일을 맡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 후 상여를 쓰지 않게 되면서 이중계 계원이 사망하면 영구차 한 대, 관광버스 한 대를 보내줬다. 현재는 동네에 있는 공청을 임대하여 한 달에 60만 원씩 임대료를 받는데, 그 돈으로 계원 사망 시 55만 원을 태워준다. 장위동, 석관동 지역 사람들은 예전에 주로 탈관을 했었다고 한다. 탈관은 상례에서 시신을 넣어 장지까지 운반한 관을 매장 직전에 제거하는 풍습으로 경기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탈관을 하는 이유는 시신이 흙과 닿아 고르게 부패하기를 바라는 관념에서 생긴 풍습이라고 한다. 탈관은 보통 시신을 모실 광중壙中(구덩이 속)을 내광과 외광으로 구분하여 파는데, 내광은 시신의 체형에 맞추어 시신의 형태와 비슷하게 파고, 외광은 네모반듯하게 직사각형으로 판다. 하관은 관을 광중 앞에 안치하고 관뚜껑을 열고 시신만을 무명으로 한 들끈을 잡고 조심스럽게 광중으로 내린다. 하관이 끝나면 맏상주가 폐백을 올리고 홍대를 덮는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74-175쪽
  • 세시풍속과 놀이 대동놀이 석관동에는 1960년대까지 마을주민들 전체가 참여하는 세시 놀이로 대동놀이가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초여름에 날을 잡아 중랑천 백사장에 천막을 치고 가마솥을 걸어 음식을 하고 명창 지화자, 목계월 등 5명 정도를 불러다가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당시 중랑천은 매우 맑아 그중 마루돌이 있는 곳에 주민 전체가 나와 빨래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행사에 드는 비용은 주민들 중에 경제적으로 넉넉한 독지가들의 출연으로 마련된다고 한다. 대동놀이는 70년대까지도 이어졌으며 장위동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였다. 장위동에서도 대동놀이를 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활량리가 제일 잘 놀았다고 한다. 장구 치고 꽹과리 불며 놀았는데, 대동놀이 하러 소근내(지금의 우이천)의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근처까지 갔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77쪽
  • 세시풍속과 놀이 가설극장 70년대에 들어와서 장위동에 대동극장, 석관동에 이문극장이 세워졌다. 이 두 극장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마을사람들이 주로 천막을 친 가설극장을 이용했다. 이 가설극장의 위치는 대략 지금의 장위동 사랑제일교회 근처였다. 영화 한 번 보는데 그 당시 50환 정도 받았다고 한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77쪽
  • 생업과 시장 농업 강북구 우이동 도봉산 기슭에서 발원한 우이천은 예전에는 소근내라고도 불렀는데, 장위동과 노원구 경계를 지나 석관동을 거쳐 중랑천, 즉 한내에 흘러든다. 석관동은 중랑천이 중랑구와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고 있고, 중랑천의 지류인 우이천이 석관동 동북쪽을 흘러 지난다. 그래서 장위동, 석관동 곳곳에 우이천,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시냇물이 얼기설기 흘러 지난다. 이는 논농사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 또 석관동에는 천장산, 장위동은 장위산 일부분이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천장산 밑은 전곡田穀의 산지였다고 한다. 천장산에 의릉이 들어서면서 천장산 밑에서 살던 마을사람들은 밀려나 지금의 위치로 이주해 오게 되었고 이 마을은 돌곶이능말이라고 불렸다. 능말이라고 해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주업은 여전히 농업이었다. 이는 『승정원일기』 1725년(영조1) 8월 27일(임진)에서도 잘 나타난다.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아무런 차이 없이 똑같이 보살펴야 할 백성이지만, 본주의 경우에는 능침이 있는 곳이니, 별도로 돌보아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게다가 이제 막 산릉의 큰 역사를 겪었기에, 오늘 능행으로 인하여 교외에 나오게 되었으므로 본주의 연로한 백성들을 불러 대령하게 한 것이니, 민폐에 대해 진달할 것이 있으면 상세하게 진달하도록 승지는 말을 전하라.” 하니, 백성들이 아뢰기를, “본주는 연이어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살아갈 길이 없었는데, 올해는 적당하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농사가 다소 풍작이어서 살아갈 가망이 있을 듯합니다. 다만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군향미로 이전하는 수량이 제법 많으니, 지금 다소 풍작이 든 농작물을 북한산성에 죄다 봉납한다면 그 폐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본읍에 봉류(捧留)하고서 그대로 군향미로 삼기를 바라니, 그렇게 한다면 온당하고 편리한 일이겠습니다. 병신년(1716, 숙종42) 이후로 각종 미납분이 해마다 많이 적체되고 있으니, 또한 바라건대 전부 다 탕감하여 본주의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혜택을 입을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리고 본주는 12능침이 봉안되어 있는 곳으로 땅도 넓고 사람도 많아 사체가 자별(自別)함이 다른 읍에 비할 바가 아니니, 또한 바라건대 독진(獨鎭)을 설치하고 과거를 설행하여 인재를 뽑는 규례도 수원(水原)이나 광주(廣州)의 예대로 특별히 거행해 주소서. 이것이 진실로 백성들의 바람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풍년이 들었다고 해도 농사를 지은 수확량의 대부분을 북한산성의 군향미로 내야 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던 이곳 사람들은 그리 풍요롭지 않았던 듯하다. 장위동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양주밥 먹고 고양굿 한다”는 말은 농토는 양주에 두었고 고양에서 거주하므로 식생활은 양주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장위리는 고양군에 속했고, 그 주변 지역인 망우리, 노원, 도봉, 우이 등 대부분 지역이 양주군에 속했던 지역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이 지역 주민들 대부분은 농민이었고 살고 있는 지역에서 땅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웃 마을까지 가서 땅을 부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특산물은 없고 주로 벼, 조, 수수, 고추 등을 재배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장위동, 석관동 사람들의 주 업은 여전히 농사였다. 조선총독부 토지조사부에 의하면, 1912년 장위리 논 132,150평, 밭 93,723평에서 윤용구 및 그의 아들들이 소유하고 있는 전답은 논 30,854평, 밭 53,672평으로 전체 장위리 논 면적의 1/4, 밭 면적의 1/2정도 차지한다. 석관리는 특히 논이 많았는데, 그 면적이 장위리의 두 배에 가까웠다. 이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석관리에 대량의 전답을 점유한 것과 무관하지않다.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논 80,115평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석관리 전체 논 면적 261,529평의 1/3을 차지한다. 석관리 전체 밭 면적은 22,706평인데 그 중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밭은 6,338평이다. 조선총독부 고양군 숭인면 석관리 지적도를 보면 지금의 석관동 주민센터 서남방향에 장위동에서 석관동으로 흘러드는 시냇물이 있었다. 현재는 복개되었지만, 대략 이 곳부터 지금의 지하철 6호선 석계역 방향, 즉 동북향으로 제방이 표시되어 있다. 이 제방은 강줄기를 따라 동북쪽으로 뻗어 중랑천에 이르면 다시 중랑천을 따라 북남방향으로 제방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당시 중랑천의 범람 방지와 논농사에 유리한 물 관리를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덕수 씨는 60년대까지만 해도 장위동, 석관동에서 논농사 짓는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뚝방 수리에 참여해야 했으며, 만약 참여하지 않으면 논 물을 공급받지 못했다고 한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79-181쪽
  • 장위동 · 석관동의 건축이야기 장위동과 석관동은 1960년대 이후 도심의 본격적인 확장으로 공공사업을 통한 주택단지의 건설, 국가권력의 상징이었던 구 중앙정보부가 자리잡기 시작했던 지역이다. 중랑천의 동쪽으로는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학교 이공대학(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이 자리잡고 두 지역은 경춘선과 화랑로를 통해 접근이 가능했다. 석관동 중앙정보부는 청와대와 가까운 남산에 신청사가 지어지며 기능이 축소되었으나, 국가지정문화재 의릉 권역은 이미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수십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소규모 밀집 주택 단지는 재개발로 인하여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고 있고, 의릉은 지속적인 복원정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도시 교통 기반시설의 확충으로 많은 인구가 살고있는 동네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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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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