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관동 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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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정 문화재
장소 종교시설
성북구 화랑로32가길 17(석관동 340-17)에 있는 민속신앙의 종교시설이다. 도당이란 주로 서울과 경기 지방에서 마을을 수호하는 수호신 혹은 신을 모신 당집을 의미한다. 석관동 도당에서 모셔지는 신은 천장산의 산신인데,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봉화산신은 ‘도당할아버지’이고, 천장산신은 ‘도당할머니’로 인식되어 이 지역의 수호신으로서의 여신으로 모셔졌다. 그런데 의릉이 조성되면서 천장산에 있던 도당을 옮기게 되었고, 석관동 석관파출소 건너편에 자리잡고 동신(洞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도당 안에는 신주(神主) 대신 항아리에 벼를 가득 넣고 짚으로 땋은 주저리로 덮어 놓았다. 주신(主神)이 여신이었음과 이 마을의 주업이 농업으로서 풍농을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도당제를 지낸다.
석관동
  • 석관동 도당
  • 석관동 도당 안내문
  • 2013 석관동 도당제(1)
  • 2013 석관동 도당제(2)
  • 2013 석관동 도당제(3)
  • 2019 석관동 도당제(1)
  • 2019 석관동 도당제(2)
  • 2019 석관동 도당제(3)
  • 2019 석관동 도당제(4)
  • 2019 석관동 도당제(5)
  • 2019 석관동 도당제(6)
  • 2019 석관동 도당제(7)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石串洞 都堂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종교시설

시기

주소

  • 주소: 02789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340 (화랑로32가길 17 옆 도당)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2. 民間信仰 1) 石串洞 都堂 石串洞 340번지에 都堂이 있다. 원래 天藏山에 있었으나 懿陵이 들어오자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함께 받들고 와서 현재 위치에 둔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약 5∼6평의 堂內에 畵像 또는 神主대신 항아리에 벼를 가득 넣고 짚으로 땅은 주저리로 덮어 두었다. 즉 항아리를 主神으로 받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主神이 女神임을 알 수 있다(男神인 경우는 항아리 대신 木巠을 숭배한다), 또 벼를 넣은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마을의 主業은 農業으로써 豐農의 祈願에 목적을 두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모르나 이 마을이 형성될 당시 守護神으로 숭배되어 왔고 또 숭배되어 오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35-636쪽
  • 또 석관동 340번지에는 都堂이 있다. 의릉이 조성되기 전에는 천장산 아래에 山神으로서 이 동네의 수호신으로 모시다가 이전해 온 것이다. 이 도당의 主神은 都堂할머니라고 부르며 神主대신 항아리에 벼를 가득 넣고 짚으로 딸은 주저리로 덮어 놓았으므로 女神을 모시고 豐農을 기원한 것이 틀림없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17쪽
  • ▫ 비지정 석관동 도당 石串洞 都堂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동유(洞有)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석관동 산 1-5 원래 천장산(天藏山)에 있었으나 의릉(懿陵)이 들어오자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함께 받들고 와서 건립한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의릉이 조성되기 전에는 천장산 아래에 산신으로서 이 동네의 수호신으로 모시다가 이전해 온 것이다. 이 도당의 주신(主神)은 도당 할머니라고 부르는데 신주(神主) 대신 항아리에 벼를 가득 넣고 짚으로 땋은 주저리로 덮어 놓았으므로 여신을 모시고 풍년을 기원한 것이 틀림없다. 또한 벼를 넣은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마을의 주업은 농업으로서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들에 의하면 도당신(都堂神)은 양주분으로 현재 중화동 봉화산 신은 도당할아버지이며, 천장산 신은 도당할머니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석관동에서는 도당할머니 신을 위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 도당의 제사는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오후에 지냈는데 도가(都家)・소임・주비 등 5명의 제관(祭官) 선정은 매우 까다로워서 제삿날의 일진(日辰)과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맞아야 한다. 만약 이 조건이 맞아도 집안에 해산을 했다던가 초상이 났다던가 부정(不淨)이 있으면 선출되지 못했다. 제관선정은 제삿날 10일 전에 했으며, 선출된 제관은 그날부터 출입을 삼가고 매일 목욕재계를 하며, 내외를 금하고 마음을 정결히 해야 했다. 도당 주위에는 며칠 전부터 왼새끼에 창호지를 끼우는 금줄을 두르고 출입을 금했다. 제수(祭需)는 황소, 고기, 수탉, 3색 과실, 시루떡, 막걸리 등을 쓰는데 시장에서 쇠고기를 살 때에는 제관이 직접 흥정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흥정을 한다. 소, 닭 등 수놈을 제물로 쓰는 것을 보아 도당의 주신은 여신(女神)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쇠고기는 모두 꼬지에 꿰는데 내장은 내장대로, 껍질은 껍질대로 꿰어 짚으로 엮은 다음 제관들이 집집마다 돌린다. 각 가정에서는 그 날 제수를 받기 위해 깨끗하게 마련한 쟁반을 마련해서 기다린다. * 참고자료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85-186쪽
  • 작은 별자리 그리기 하나 ; 점집(당집) 역사 옛날부터 돌곶이 마을엔 점집이 많았다고 한다. 풍수적으로 기운이 세서 그렇다고 하는데 동네에서 만난 한 무당 할머니는 천장산 도당이 세다고 알려주었다. 한국예술 종합학교 후문에서 파출소 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조그맣게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곳이 천장산 도당이다. 여기에 모셔진 신이 도당 할머니인데 원래 천장산(天藏山)의 산신이었다가 조선왕조 20대 경종의 능인 의릉(懿陵)이 들어서면서부터 산에서 쫓겨나 산신(山神)에서 동신(洞神)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할머니신의 짝지인 할아버지 신은 봉화산(烽火山)신인데, 여기서는 아직도 400년 넘은 큰 마을 도당 굿이 열리고 있다. 도당 안에는 신주 대신 벼가 가득 든 항아리가 있는데, 곡식이 든 항아리를 신의 상징으로 모시는 경우, 그 신은 여신이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의 데메테르처럼 서양이나 동양이나 여성이 대지와 풍요를 상징하는 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는 도당에서 도당 할머니를 위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제사 지내기 열흘 전에 미리 여러 명의 제관을 선출하는데, 그 열흘 동안 매일 목욕재계해야 하고, 집밖 출입을 삼가며, 마음을 정결히 해야 한다고 한다. 돌곶이 마을에 점집이 많은 다른 이유는 옛날부터 찾는 사람이 많아서일 수도 있다. 한 번도 제대로 번성한 적 없이 의릉이나 안기부에 치여 온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 살림이 그리 넉넉할 리 없었고, 힘들거나 아픈 일이 있으면 주로 점집을 찾곤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지역엔 나라만신으로 유명한 김금화 선생(중요무형문화재 제82-나호로 서해안풍어제 배연신굿 및 대동굿 기·예능 보유자)이 살고 계시다. 『한국민속신앙사전』에 나온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85년 2월 21일에 보유자로 지정받은 김금화(金錦花,여)는 1931년에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 ‘안바꾸니’[朴厚里]에서 가난하게 살던 농부 김녕 김씨 김택근과 이음전 부부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7세 때 황해도 옹진군(현재 인천시 옹진군) 흥미면 괴암리로 이사했고, 12세부터 신병을 앓기 시작했다. 17세 때 당시 큰 무당이던 외할머니 김천일에게 내림굿을 받고 굿 절차의 기본과 무당의 마음가짐, 처신하는 법 등 무당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기초적인 내용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관무당’과 방숮덕 등 당시의 현역 무당들을 따라다니면서 굿 현장의 경험을 쌓았다. 19세가 되던 해 정월에 옹진군 용호도의 대동굿을 의뢰받고 6박 7일에 걸친 큰 굿을 처음 도맡아 성공적으로 주재한 후부터 ‘당일만신’ ‘홍길동만신’ 등의 별호로 불릴 정도로 전문 무당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으로 피란하여 만석동과 부평동 등지를 전전하다가 1966년 서울 노량진, 1970년 석관동으로 이사한 후 얼마 있다가 다시 이문동으로 이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7년 10월 13일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연평노래’와 배연신굿 공연으로 개인상을 받으면서 신문·방송 등 언론에 처음 소개됐다. 김금화는 무속을 미신으로 취급하고 타파 대상으로 삼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무당이 겪어야만 하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한 예로, 이문동으로 이사한 후 집에서 굿을 하던 중 이웃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함으로써 부득이 굿을 중단하고 북한산으로 자리를 옮겨서 굿 일정을 마쳐야만 했다. 그의 첫 번째 만수대탁굿 고난이었다. 전통 강신무로서의 김금화에 대한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황해도를 비롯한 서해안 지방의 주요 전통 무속의례인 철무리굿, 배연신굿, 대동굿, 내림굿, 진오기굿 등의 의례절차와 기·예능의 내용은 물론 해박한 지식과 오랜 경험 및 뛰어난 기량을 겸비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많은 신딸과 단골을 거느리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큰무당으로서의 인품을 지녔다. 둘째로 1970년대 말부터 임석재, 로저 자넬리(Roger L. Janelli, 인디애나주립대 민속학교수), 조자룡, 임동권, 이두현, 장주근, 최종민, 김인회, 황루시, 김수남 같은 한국무속 연구 전문가들의 현지 조사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자료를 제공하는 가운데 자신이 지닌 무속의례 관련 기·예능의 무형문화로서의 가치에 대해 일찍부터 자각하기 시작했다. 셋째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무속 관련 기·예능 보유자 중 가장 많이 해외 초청 공연을 했다. 1982년 5월부터 7월까지 한미수교 100주년기념 문화사절단으로 초청받아 미국, 녹스빌 국제박람회장, 로스앤젤레스 박물관, 뉴욕 한국문화원,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 등에서 3개월에 걸친 순회공연을 했다. 이를 시작으로 2007년까지 20여 차례에 걸쳐 스페인,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중국, 이탈리아, 일본 등 외국의 대학, 박물관, 방송국, 국제회의, 국제 문화축제행사 등에 초청받아 순회공연과 강의 등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한국의 굿이 지닌 종교적·예술적·문화적 내용과 가치를 알리는 활동을 계속했다. 레비 스트로스가 한국에 왔을 때 특별히 참관한 굿이 김금화의 만수대탁굿이었다. 국내에서의 초청공연, 학술공연 및 강의, 굿 시연 등의 활동경력은 셀 수 없이 많다. 넷째로 무속 관련 지식과 기예의 방대한 내용을 책으로 출판했다. 1995년에 문음사가 출판한 『김금화의 무가집-거므나따에 만신 희나백성의 노래』가 그것이다. 이 책에서 김금화는 앞에서 열거한 여섯 가지 굿 각각의 의미와 유래, 준비과정, 진행순서, 굿의 내용과 무가 가사 등을 현장성 있게 자세히 서술해 놓았다. 이뿐만 아니라 부록으로 굿에 사용되는 모든 장식과 도구에 대한 설명, 굿에서 사용되고 불리는 모든 노래가사와 음악가락 및 장단을 악보와 함께 실었다. 이 책 말고도 김금화는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푸른숲, 1995) 『비단꽃 넘세-나라만신 김금화 자서전』(생각의나무, 2007) 등의 저서를 냈다. 김금화의 책이 나오기 이전의 무속 관련 자료집들은 모두 무속인이 아닌 학자나 전문 연구자들이 관찰·조사하고 채록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었다. 다섯째로 19세 때 첫 신딸을 맞은 이래 평생 동안 수많은 신딸과 신아들을 두었다. 김금화에게는 특히 외국인을 포함하여 국내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신딸이 많다. 여섯째로 2004년 3월 23일 강화도에 서해안풍어제 전수관 금화당(錦花堂)을 건립하고 ‘사단법인 서해안풍어제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존회’를 발족시켰다. 그래서 김금화 선생을 만나 뵈려고 찾아갔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외대로 넘어가는 고개 가기 전에 있는 골목길 끝자락에 김금화 선생의 전통무속연구소가 있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허름한 가정집이었다. 선생은 안 계셨고 대신 따님으로 보이는 분에게 물 한 잔을 얻어먹고, 만날 약속을 정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너무 바쁘신지 몇 번이나 전화를 드리고 연락을 기다렸지만 다시 만나 뵐 수 없었다. 아쉬운 데로 울랄라 빈대떡집에서 유마트로 가는 골목 중간에 있는 월추암이란 곳에 갔다. 여기 계신 할머니는 조상신을 모시고 있고 월추암을 연 지는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최근에 나는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관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꼭 집어서 물어볼 것이 없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돌아온 답변은 잘 될 것이니 점 보러 괜히 돌아다녀 봐야 무당년들이 굿하라고 쓸데없는 소리나 많이 하니 쓸데없이 점 보러 다니지 말고 꼭 물어볼 것이 있으면 다시 찾아오라는 것. “그런데 여기 이 동네에 왜 이렇게 점집이 많은 거죠?” “집들이, 허술한 집들이 많아서 그르지” …… 오늘날 무속은 그저 민간신앙 아니면 사이비(似而非), 잘 해봐야 기예로 치부되기 십상이지만 한때 무속이 사람들에게 끼쳤던 영향은 좋던 싫던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흔적은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있다. 석관동을 걷다보면 골목 사이사이 박혀있는 卍자를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으스스하다고, 이상하다고, 잘 모른다고 밀어내지 말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돌곶이 생태문화 연구팀, 2013, 돌곶이 문화지도 그리기, 85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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