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준
1925.10.19 - 1985.01.15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강영준은 경성인문중등학원에 다니던 중 지인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시국에 관하여 인심을 어지럽히는 사항을 유포'하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경성부 동대문구 돈암정 499-11번지(삼선교로16길 13)에 거주하고 있었다. 201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돈암동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강영준
  • 강영준 집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姜永俊
  • 이명칭: 강본영준(姜本永俊)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863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3가 3-2 (삼선교로16길 13)
  • 비고: 경성부 동대문구 돈암정 499-11

근거자료 원문

  • 본적: 전북 정읍군 옹동면 비봉리 535 주소: 경성부 동대문구 돈암정 288-41 계열과 단체: 학생운동, 시국담 <활동 내용> 경성 인문중등학원 학생 강영준은 본적지에서 중농의 집에 태어나 1939년 3월 전북 정읍군 칠보면 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동년 4월 경성숭례공립초등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여 1941년 3월 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941년 4월 경성인문중등학원에 입학하여 목하 동교 제3학년에 재학중인자이다. 1941년 여름 휴가 즈음 본적지에 귀성중이었다. 그런데 명 불상의 영덕중에 제1차 구주대전 당시에 영구의 인도에 대한 기만정책에 대한 기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열독한 결과 대동아전쟁 하의 조선민족의 장래도 또한 그와 동양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래 반전사상을 포지하기에 이르렀다. 1943년 11월 4일 주거지에서 정읍군 칠보면 와우리 閔丙燮으로부터 동지방에서 곡의 공출 할당은 전년의 3배로 강화되어 농민이 곤궁해졌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듣자 그에 불만을 품고 동월 9일 주거지에서 피고인의 처의 실부인 전북 임실군 강진면 문방리 589번지 安藤在春 앞으로 붙인 서신에서 “칠보면 집의 소식을 들은 바에 의하면 농부들의 고심이 실로 깊어져 말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믿어집니다. 문방리는 다소 좋겠지만 다양한 공출문제는 정읍보다도 혹심합니다. 이것이 일시적이라면 감수할 수 있지만, 만일 수십년간 지속되다면 우리 조선민족내란이 야기될 것이다. 전문대학의 문과계통의 학문은 폐쇄되고 전부 특별지원병에 간다고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등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시국에 관한 인심을 혹란하였다”고 하여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특이사항> 창씨명은 姜本永俊 <참고문헌> 「강연준판결문」(전주지방법원: 1944.1.25.).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에서 「강영준판결문」을 확인한 결과, 1) "돈암정 288-41"은 "돈암정 499-11" 2) "1941년 여름"은 "1942년 여름" 3) "명 불상의 영덕중에"는 "제명 불상의 잡지 중에" 4) "영구의 인도에 대한"은 "영국의 인도에 대한" 5) "「강연준판결문」"은 "「강영준판결문」" 의 오기이다. (수정일 2020.6.3)
  • ○ 그 외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강영준 - 1906~미상 / 대통령표창 / 돈암동 499-11 거주 - 돈암동에 거주하며 경성인문중동학원에 다니던 중 1943년 11월 고향의 지인으로부터 “곡식의 공출이 전년의 3배로 강화되어 농민이 곤궁해졌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에 전북 임실 강진의 장인에게 “곡식의 공출문제가 정읍보다 더 심하지 않느냐”고 물으며, “이런 일이 지속될 시 조선민족의 내란이 야기될 것”이라며 “전문대학의 문과계통 학문이 폐지되고 특별지원병으로 보내려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일본 경찰은 편지의 내용이 민심을 어지럽히는 사항을 담고 있다고 판단해 강영준을 체포하고 징역 6월에 처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25쪽
    근거 자료의 원문에는 강영준의 생년월일이 '1906~미상'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참고 자료인 공훈전자사료관에는 1925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은 판결문에도 생년월일이 대정(大正) 14년 10월 19일(1925년 10월 19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근거자료의 표기는 오기인 것으로 판단된다.
  • 강영준은 서울 인문중등학원(人文中等學院)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2년에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인 전라북도 정읍군(井邑郡) 옹동면(瓮東面) 비봉리(飛鳳里)에 갔다. 자택에서 잡지의 기사를 보고 일제의 침략전쟁과 전시정책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특히 그 기사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식민지 인도에 대해 기만적인 정책을 취한 내용에 크게 공감하였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민족의 장래도 이와 동일하게 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기에 이르렀다. 1943년 11월 4일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민병섭(閔丙燮)으로부터 정읍 지방에서의 벼 공출 할당량이 전년에 비해 3배로 강화되어 농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워졌다는 말을 들었다. 같은 달 9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강진면(江津面) 문방리(文方里)의 장인 앞으로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을 보면, 일제의 강제공출이나 지원병제도 등을 비판하면서 “놈들의 노예라고 말할 수 있는 실로 비참한 일”이라고 묘사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일시적 곤란이 아니라 이 전쟁이 끝나도 영원히 오랫동안 곤란이 계속될 것인데 실로 생각해보면 비참한 기분”이라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11월 29일 장인이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받아 읽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2월 2일 강영준이 “시국에 관하여 인심을 어지럽히는 사항을 유포”했다는 이유로 체포했던 것이다. 23일 전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44년 1월 25일 이른바 ‘조선임시보안령(朝鮮臨時保安令)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判決文)(전주지방법원:1944. 1. 25)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제적부(除籍簿)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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