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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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장소 유적
성북구 성북동 64-1에 위치한 조선시대 선잠단이 있었던 터이다. 선잠단은 국가에서 양잠을 위하여 잠신(蠶神)으로 알려진 중국 신화 속 황제(黃帝)의 황후 서릉씨(西陵氏)를 배향하는 단(壇)을 쌓고 제사지내던 곳이다. 선잠단의 설치와 제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친잠례가 왕비의 소임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했다. 조선 태종 때 현재 위치에 선잠단을 만들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으나 1908년 단과 제향이 철폐되면서 폐허가 되어 일제강점기에 원형을 상실하고, 땅도 개인 소유가 되었다. 1963년 선잠단지를 사적 제83호로 지정하였다. 2016년 선잠단지 정밀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유구를 기초로 2017년 재현 공사를 진행하였고, 2020년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성북동
  • 2013년 선잠제
  • 1997년 아리랑축제 개막선포 및 선잠제
  • 1998년 선잠제
  • 1999년 선잠제
  • 2008 성북아리랑축제 구민체육대회 선잠제향
  • 2011년 선잠제
  • 2015년 선잠제
  • [성북을 찾다] 사적 제83호 선잠단지
  • 성북동 선잠단지(1)
  • 성북동 선잠단지(2)
  • 선잠단지
  • 2016 선잠제향(1)
  • 2016 선잠제향(5)
  • 성북동 선잠단
  • 선잠단지 안내판(1)
  • 선잠단지 안내판(2)
  • 선잠단지 재현 공사 완료 후(7)
  • 선잠단지 재현 공사 완료 후(6)
  • 선잠단지 재현 공사 완료 후(5)
  • 선잠단지 재현 공사 완료 후(4)
  • 선잠단지 재현 공사 완료 후(3)
  • 선잠단지 재현 공사 완료 후(2)
  • 선잠단지 재현 공사 완료 후(1)
  • 사적 83호 선잠 단지
  • 선잠단지 표석(2)
  • 선잠단지 표석(1)
  • 선잠단지 안내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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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선잠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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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잠제 축문(2)
  • 2013년 선잠제
  • 2021 선잠제(4)
  • 2021 선잠제(3)
  • 1997년 아리랑축제 개막선포 및 선잠제
  • 1998년 선잠제
  • 1999년 선잠제
  • 2008 성북아리랑축제 구민체육대회 선잠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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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년 선잠제
  • 2015년 선잠제
  • 선잠단지(6)
  • 선잠단지 성북선잠박물관 외관
  • 선잠단지 풍경
  • 2021 성북동밤마실_선잠단지
  • 예조에서 주례와 역대의 제도에 의거하여 단유(壇壝)에 대한 일로 아뢰다
  • [성북을 찾다] 사적 제83호 선잠단지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先蠶壇址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
  • 비고: 1405~1413년 사이 축조

주소

  • 주소: 02880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1가 64-1 (성북로 17)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사적
  • 지정일: 1963.01.21

근거자료 원문

  • 전교하기를, “선잠제단(先蠶祭壇)이 매우 좁아 내외 명부(命婦)들과 섞여 앉을 수 없으니 보축(補築)하도록 하고, 또 장원서(掌苑署)에 유시하여, 뽕나무를 잘 길러 빨리 잎이 나도록 하라.”하였다. -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 3월 8일 기사 2번째기사 1504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26
  • 〈개정한 제사 제도〔享祀釐正〕〉 선농단(先農壇), 선잠단(先蠶壇)의 신위는 사직단(社稷壇)에 배향하고 해당 제단의 터는 국유로 이속시킨다. 산천단(山川壇), 산천 악독단(山川嶽瀆壇), 우사단(雩祀壇), 사한단(司寒壇), 옥추단(玉樞壇), 칠사사현사(七祀四賢祠), 여단(厲壇), 성황단(城隍壇), 마조단(馬祖壇), 무열사(武烈祠), 정충단(旌忠壇), 선무단(宣武壇), 정무단(靖武壇)의 제사는 이제부터 폐지하고 해당 단(壇)과 사(祠)의 터는 국유로 이속시킨다. 대보단(大報壇), 만동묘(萬東廟), 숭의묘(崇義廟), 동관묘(東關廟), 남관묘(南關廟), 북관묘(北關廟) 및 지방 관묘(地方關廟)의 제사를 폐지하고, 대보단의 터는 궁내부에서 관할하며 숭의묘와 북관묘는 국유로 이속시킨다. 만동묘, 동관묘, 남관묘 및 지방 관묘는 해당 지방 관청에 넘겨 백성들의 신앙에 따라 따로 관리할 방법을 정한다. 역대의 묘, 전, 능, 사 및 지방에 설치한 사직단과 문묘는 모두 정부의 소관으로 한다. 이 칙령(勅令)은 반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 7월 23일 양력 3번째기사 1908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33
  • ▫ 사적 제83호 선잠단지 先蠶壇址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사유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동 64-1 지정연월일 : 1963. 1. 21. 선잠단은 국가에서 양잠을 위하여 잠신(蠶神)으로 알려진 중국의 3황5제 중 한 사람인 황제(黃帝)의 황후 서릉씨(西陵氏)를 배향하는 단(壇)을 쌓고 제사지내던 곳이다. 이 단은 조선시대 성종 2년(1471)에 처음 쌓은 것으로 단을 쌓은 방법은 사직단(社稷壇)과 같게 했으나 단의 남쪽에는 한 단(段) 낮은 댓돌이 있고, 그 앞쪽 끝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했다. 이러한 의식은 매년 3월 첫 번째 뱀날[初巳日]에 거행하다가 1908년 7월, 선잠단은 선농단(先農壇)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졌으므로 현재 그 터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5백년간은 농업과 잠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노업을 주관하는 신을 동대문구 제기동의 선농단(先農壇)에서, 잠업을 주관하는 신은 선잠단에 모시고 국가에서 매년 제사를 지냈다. 우리 조상들은 부족국가시대부터 농사와 함께 누에치기, 즉 양잠을 매우 중시했으므로 역대 왕실에서는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권장하기 위해 국왕은 친경(親耕)을 했고, 왕비는 궁중 안에 단을 꾸며 내명부・외명부들을 거느리고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했다 또한 매년 늦은 봄 3월 길(吉)한 뱀날[巳日]에 혜화문 밖의 선잠단에 풍악을 울리고 제사를 지냈다고 ≪동국여지비고≫에 소개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선잠제가 국가의식이므로 이날에는 대신을 보내 제사를 주관했다. 선잠단지는 현재 1,765㎡(528평)에 지나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이 일대의 성북초등학교 자리도 포함했던 넓은 곳이었다. 선잠단은 일제 때 폐허가 되어 민유지가 되었으나, 현재는 그 위치에 ‘선잠단지’라는 팻말이 세워지고 주변을 정리하여 보존하고 있다. 선잠단을 쌓은 것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친잠례가 왕비의 소임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했다. 현재 서초구 잠원동은 조선시대에 잠실이 있었던 지역이었으므로 한말까지 수령(樹齡)이 300~400년 되는 뽕나무가 살아 있었는데 현재는 고사(枯死)되어 밑동 부분만 남아 있으므로, 서울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2, 1990 / 박경룡, ≪서울 문화유적≫, 1997.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84-86쪽
  • ○ 1980~9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선잠단 정비 조선 때 임금이 농사장려를 위해 선농단(선농단)에서 제를 올리고 친히 소를 몰았던 것처럼 왕비도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선잠단이라는 것을 만들고 뽕나무를 심어 매년3월 이곳에서 뽕나무를 돌보던 전통이 있었다. 성종 2년때부터 시작된 이같은 의식은 한말 때까지 계속됐으며 왕비들이 이곳의 뽕잎을 따다가 창덕궁내에서 직접 누에를 치기도 했다. 당시 선잠단에는 양잠을 처음 시작했다는 중국황후 서릉씨의 신위를 배향하기도 했는데 1908년 신위가 사직단으로 옮겨지고 일제를 거치면서 선잠단이 사라졌다. 해방후 선잠단이 있던 성북동 64의1에 댓돌과 함께 표석을 설치하고 3백여평의 뽕밭도 조성해 놓았지만 주택가 속에 있다보니 아는 이가 별로 없다. 휴일 아이들에게 뽕잎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면 좋을 듯하다. 단체로 갈 경우 성북구청 문화공보실(927-6864)에 미리 연락하면 자세한 안내도 받을 수 있다. 교통편은 지하철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러 5분정도 걸어가거나 좌석버스 16·712·113번이나 시내버스 2·3·12·20번등을 이용하면 된다. (1990.06.16.)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3쪽
  • ○ 발길 닿는 곳마다 퍼지는 문화의 향기 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역사의 현장 - 조선시대 왕비의 소임 중 하나는 친잠례를 지내는 것이었다. 누에를 키워 고치에서 실을 뽑아 원단을 만드는 일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해 각 도에 생산지를 선정해 뽕나무를 심도록 하는 한편, 각 도에 한 곳 이상의 잠실을 지어 누에를 키울 정도로 양잠을 중요시했다. 잠사는 국가의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 생산되었다. 중종은 여러 도의 잠실을 서울 근교로 집결하도록 했다. 현재의 송파구 잠실동 일대는 그런 잠실이 있던 곳이다. 구한말까지 이 일대에서는 수령이 300~400년이나 되는 뽕나무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성종 때에는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해 달라는 기원을 드리기 위한 선잠단을 혜화문 밖에 세웠다. 단에는 대를 모으고 중국 황제의 왕비인 서릉씨의 신위에 제사를 지냈다. 단의 남쪽에는 한 단 낮은 댓돌이 있는데, 그 앞쪽 뜰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했다. 선잠단은 1908년 선농단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 제사를 지내면서 폐허화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개인 소유가 되었다. 현재는 성북초등학교 옆길에 조그마한 터만 남아 아쉬움을 남기지만, 매년 5월이면 이곳에서 선잠제례를 재현하고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50-51쪽
  • 1. 선잠단의 위치와 연혁 ○ 위치 : 성북동 64-1번지와 63-31번지 해당하는 구역 ○ 연혁 - 태종 5년(1405)과 태종 13년(1413) 사이 어느 해에 처음 이곳(당시 지명은 동소문 밖 사한이)에 축조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 수축을 거침 - 1908년 단과 제향이 철폐되고 폐허로 남겨져 일제강점기에 원형을 상실 - 1963년 선잠단지가 사적 제83호로 지정하여 관리 - 2016년 성북구가 용역사업으로 <선잠단지 복원화 및 보존·관리·활용을 위한 기초학술연구>(서울학연구소)를 실시하여 선잠단의 본래 영역과 원형을 고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65쪽
  • 1. 성북동의 문화재 ○ 사적 종목 : 사적 제83호 명칭 : 서울 선잠단지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로 17 지정일 : 63.1.2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0쪽
  • ② 先蠶壇址 先蠶의 儀는 우리나라에서는 高麗 초기에 시작되었고 朝鮮朝에 들어와서도 親蠶禮는 왕비 所任中의 하나였으며 世宗도 양잠을 크게 장려하였다. 각 道마다 適地를 골라 뽕나무를 심게 하였으며 蠶室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하였다. 城北洞 64번지에는 先蠶壇이 있었다. 규모는 538坪 면적에 2丈 3寸의 크기, 2尺 7寸의 높이이다, 사적 제83호로 보존되고 있다. 선잠단은 조선시대 역대왕비가 누에를 길러 명주를 생산하기 위하여 蠶神으로 알려진 중국 황제의 왕비였던 西陵氏를 배향하는 壇을 쌓고 제사지내던 곳이다. 성북동에 있었던 선잠단은 成宗 2년(1471) 3월에 初創하였고 成宗 8년에는 昌德宮苑에 採桑壇을 신축하여 왕비의 親蠶禮를 거행하였으며 中宗 원년(1506)에는 여러 道의 蠶室을 서울로 집결토록 하였다. 현재 강남의 蠶室洞은 그런 잠실이 있었던 지역이며 韓末까지 樹齡이 3∼400년 되는 뽕나무가 살아 있었는데 현재는 枯死되어 밑둥부분만 남아있으며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선잠단을 쌓은 방법은 社稷壇과 같게 하였으나 단의 남쪽에는 한 段 낮은 댓돌이 있고 그 앞쪽 뜰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 이 의식은 매년 3월에 거행하다가 1908년 7월 선잠단은 先農壇의 신위와 함께 社稷壇으로 옮겨 배향되면서 여기는 遺址로 남게 되었으며 현재는 城北國民學校 옆 길거리 여러 집들에 둘러싸인 그 위치의 터에 ‘先蠶壇址’라 쓴 팻말을 세우고 주변을 철책으로 쌓아 보존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87-688쪽
  • 2. 선잠제의 봉행과 계승 ○ 선잠제의 의의 - 선잠제는 고대의 전설적인 여인 서릉씨(西陵氏)를 모시는 제사로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국가제사 ○ 조선왕조의 선잠제 봉행 - 고려의 전례를 이어받아 선잠제를 선농제와 함께 중사(中祀)로 규정하고 정종 2년(1400)에 처음 선잠제를 치름 - 제향 기록은 주로 조선전기의 문헌에 집중되어 있으며 조선후기에는 그 횟수가 격감 - 영조 43년(1767) 3월, 『조선왕조실록』을 상고하여 선잠제와 친잠례를 각각 선잠단과 경복궁에서 봉행하고 선잠단에는 친잠례에 앞서 예관(禮官)들을 보내 섭사(攝祀)로 제향을 봉행토록 하였음 ○ 선잠제의 중단 - 1908년 반포된 칙령에 의해 선잠단과 선농단의 신위가 사직단으로 옮겨지고 해당 제단의 터가 국유로 이속되면서 공식적인 제향 중단 ○ 선잠제의 재현과 계승 - 1993년부터 선잠단지에서 성북구와 선잠제보존위원회, 대한잠사회가 공동으로 재현행사를 치르기 시작해 이후 성북구의 대표적 전통문화축제로 정착 - 성북문화원은 2002년 『선잠제의 역사와 의례』, 2010년 『선잠단과 길쌈이야기』등의 도서를 간행하고 2014년 11월에는 <선잠제향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어 선잠제향의 원형 복원과 계승을 위한 지속적인 역할 수행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65쪽
  • 2. 숲 속의 유토피아-선잠단 터 선잠단 터의 무성한 뽕나무 숲을 들여다보면 나도향의 단편소설「뽕」(1925)이 생각난다. 소설 속 뽕밭이 모든 희망이 무너진 디스토피아의 축도라면 선잠단 터의 뽕나무 숲은 유토피아, 즉 살기 좋은 나라에 대한 오랜 갈망의 표현이다. 선잠단에서 지내던 선잠제는 처음으로 누에를 쳐서 비단을 짜 옷을 해 입었다는 전설의 여인 서릉씨를 선잠신先蠶神으로 받들어 모시는 국가의 중대한 제사였다. 그 목적이 그 해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선잠제는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제와 짝을 이루었다. 선농제가 백성의 식생활과 관계있다면 선잠제는 백성의 의생활과 관계있었다. 고대 중국에서 발달한 이 제사들이 한국에 수용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조선에서는 고려의 체제를 이어받아 정종 2년(1400) 음력 3월에 처음 선잠제를 지냈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는 조선 초의 문신 변계량이 지은 「선잠제의 악장」 가운데 한 절로서 선잠단에 들어간 왕후가 신을 맞아 제사를 끝마쳤을 때 악사들이 음률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이다. 태종 때 왕명을 받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아아 우리의 민생이 嗟我民生 배부르고 따뜻하면 편안하도다 飽煖乃安 그 누가 옷 입지 않고도 孰曰無衣 추위를 막는다고 말하나 而得御寒 위대하고 위대한 서릉이 赫赫西陵 하늘처럼 은택을 입혔도다 配天其澤 예절 따라 제사를 드리니 崇祀以禮 참으로 옛날부터 그랬도다 實維自昔 ― 『춘정집』제4권 노랫말은 개개인에게 필요한 양식과 의복이 갈등 없이 부드럽게 충족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정치의 근본 목적임을 말한다. 그것은 달성 불가능한 드높은 목표가 아니다. 위대한 서릉은 그와 같이 근본에 철저한 지도자에게 하늘처럼 크나큰 복을 내릴 것이다. 깨끗한 제물과 조심스러운 걸음, 장중한 음악과 단순한 노랫말. 제관들의 마음엔 실수 없이 매끄럽게 치러지는 제사처럼 살기 좋은 나라의 밑그림 하나쯤 그려졌을 것이다. 선잠단 터는 서울에 남은 조선시대 유적들 중에서 연대가 오래된 축에 속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선잠단은 동소문 밖 사한이에 있다’고 적혀 있고, 『태종실록』 13년(1413)조에 ‘선잠의 단과 담이 이미 축조되었으나 법식과 다르므로 옛 제도에 따라 수축해야 한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잠단은 태종이 한양으로 환도한 이후인 태종 5년(1405)과 태종 13년(1413) 사이에 동소문 밖 사한이, 곧 성북동 지금 이 자리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후 단을 옮겼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1908년 신위가 사직단으로 옮겨가면서 제단이 철폐되기까지 선잠단은 거의 600년 세월 동안 제자리를 지킨 셈이다. 일제강점기에 본래 있던 제단과 담장도 없어지고 길가의 필지도 일부 잘려 나갔으나 가운데 터는 용케 살아남았다. 지금 터 안쪽에 마련해 놓은 제단과 그 위의 비석은 본래의 것은 아니며 근래 선잠단 터 정비 시에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이것이 조선시대에 만든 제단으로 착각하는 방문객들이 많다. 『세종실록』과 『국조오례의』 등 여러 문헌에 그 치수와 규례가 도판과 함께 실려 있으니 제단과 담장을 옛 제도에 맞게 복원하는 것이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1963년 정부에서는 이곳을 사적 제83호 ‘선잠단지’로 지정하여 표석을 세웠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선잠단 터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였다. 가까운 한양도성 성벽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망국의 버려진 제단을 돌보기에는 너무도 가난하고 힘든 시대였다. 그러는 사이 선잠단 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 정체를 알 수 없는 덤불숲으로 바뀌고 말았다. 가끔 담배를 피우려고 독서실에서 몰래 빠져나온 청소년들에게나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그런 곳에 뽕나무를 심어 가꾸기 시작한 것은 1976년의 일이다. 이학수라는 분이 계셨는데 옛날 그곳이 선잠단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식목일을 맞아 동네 주민들과 함께 뽕나무를 식재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성북동 사람들은 족히 40년 동안 가꾸어온, 서울 시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훌륭한 뽕나무 숲을 가지게 되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과 같은 멋진 이야기가 가까운 곳에도 있었던 것이다. 자유롭게 드나들면 좋겠지만 지금은 보호를 위하여 자물쇠를 걸어두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가끔 답사객을 위해 문을 열어둘 때 슬그머니 들어와 석축 위에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는 젊은 연인들의 뒷모습이 그림 같다. 이곳에서 다시 선잠제를 봉행한 것은 1993년의 일이었다. 1908년 신위가 옮겨진 지 85년 만이었다. 매년 함께 뽕나무를 가꾸어오던 성북동 주민들과 대한잠사회의 노력이 컸다. 이후 선잠제는 성북동 주민이 주축이 된 선잠제보존위원회를 중심으로 매년 5월마다 성북구민의 날 행사와 연계해 치러지다가 올해로 22회를 맞았다(2014년은 4월 16일의 세월호 참사 때문에 행사가 전면 취소되었다). 90년대에만 해도 제사 지내는 날 주민들끼리 선잠단 터 앞에 모여 국수도 삶아 나누어 먹으며 잔치도 벌이고 바로 옆 성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동 체육대회도 열었다고 하는데, 언제부턴가 행사의 주도권이 구청으로 넘어가고부터는 그런 소박한 부대 행사들이 이벤트사에서 주관하는 조선시대 왕비와 제관의 화려한 행렬로 대체되었다. 선잠제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한다면 지금과 같이 1년에 한 번씩 치르는 재현 행사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선잠제와 같이 하나의 지역 공동체 속에서 재현되는 무형유산은 반드시 원형을 철저히 고증한 다음 재현에 참가할 사람들을 지정해 놓고 정기적인 연습을 통해서 그 지역의 다음 세대에게로 전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자체적인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며 무엇보다 지방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장기적이고 세밀한 복원 계획의 수립, 학술 · 고증 분야에 대한 대담한 지원이 우선 할 일이다. 선잠제와 선잠단이 성북구 주민들의 삶의 맥락과 무리 없이 이어져 주민 모두가 사랑하고 아끼는 문화유산으로 부활할 날을 기다린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30-39쪽
  • 3. 선잠단·선잠제의 자세한 연혁 66쪽에 [표6] 선잠단·선잠제의 연혁(1400~2016)이 제시되어 있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66쪽
  • 6) 先蠶壇과 靈星壇(1) 조선시대에 현 城北區 城北洞 64의 1에는 누에치기를 장려하가 위한 先蠶壇이 위치해 있었으며, 성북동 75번지에는 별에게 제사를 올리던 靈星壇이 있었다. 朝鮮時代의 治産 가운데 養蠶은 농업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여성들이 누에를 길러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일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생산활동이었다. 이에 王室에서는 국민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王妃의 소임 중의 하나로 曆代王室에서 親蠶禮를 거행하였다. 先蠶壇은 국가에서 누에농사의 풍년을 위해 단을 쌓고 蠶神 西陵氏(중국 3皇 가운데 1인인 黃帝의 왕후)를 제사지내던 곳이다. 東國輿地備攷에 보면 先蠶壇은 東郊 惠化門밖에 있는데 제도가 南壇과 같고 西陵氏를 제사지내는데 神座는 北에 있어 南方이다. 매년 늦은 봄 (3월) 吉한 巳日에 제사 지낸다고 하였다. 한편 養蠶의 기원은 아득한 上古時代부터 시작하여 3국을 거쳐 高麗時代에는 先蠶壇을 쌓고 역대 國王이 農쫓을 장려하였다. 朝鮮時代에 들어 世宗·成宗·中宗·英祖때에 養蠶이 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先蠶禮의 의식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 先蠶禮은 조선 成宗 2년(1471)에 만들어졌다. 국가에서 양잠을 널리 권장하기 위해 成宗 9년(1478) 봄에 昌德宮 後園에 단을 쌓고 王妃가 친히 內命婦·外命婦를 거느리고 親蠶의 禮를 거행하였다. 이때 궁궐 후원에 쌓은 단의 제도는 風雲雷雨壇과 같다고 하니 단의 규모가 둘레 2丈 3尺, 높이 2尺 7寸, 사방에 섬돌을 놓고 두 낮은 담이 25步였을 것이다. 따라서 先蠶禮는 성 밖인 이곳 선잠단에서 베풀고, 궁중에 뽕나무밭을 가꾸어 王妃가 親蠶禮를 거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친잠례에 관한 기록을 보면 成宗 때 3번, 中宗 때 2번, 宣祖 때 1번 거행하였다. 그후 英祖 때 이에 관한 문헌이 산실되어 고증할 사람이 없자 江華에 소장된 實錄을 조사한 다음 영조 43년(1767) 2월 26일 王世孫이하 宗親·文武百官을 거느리고 親耕儀式을 거행하고 이어 3월 10일에 親蠶禮를 거행하였다. 현재도 昌德宮 秘苑 宙合樓 서편에 親蠶室이 남아 있어서 純宗王后 尹妃는 최근까지 前例에 따라 이곳에서 親蠶禮를 거행하였다. 한편 先蠶禮를 행한 뒤에는 왕비의 採桑儀가 있었는데 採桑壇은 선잠단 서쪽에 있었으며 뽕나무는 각 단의 동쪽에 심었다. 이때 嬪宮·世孫嬪宮·內外命婦에게 각각 소임을 맡겼고 內執事이하에게 茶食을 내렸으며 蠶母에게는 棉布를 하사하였다. 또 8道나 서울의 죄인들에게 特赦를 내렸으며 英祖는 궁중의 養蠶所에서 키운 누에고치를 여러 대신들과 각도 지방관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곳 先蠶壇 남쪽에는 한 段 낮은 댓돌이 있고 그 앞쪽 뜰에는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蠶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 이 의식은 매년 3월에 거행하였는데 1908년 7월 이 단은 先農壇의 神位와 함께 社稷壇으로 옮겨 그 遺址만 남게 되었으며 1939년 10월 18일 史蹟 제 83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는데 1961년 11월 10일에 「先蠶壇址」라는 표지를 하였고 1963년 철책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91-93쪽
  •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고대 황제의 황비 서릉씨를 누에신(잠신蠶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 단은 고려 성종 2년(983)에 처음 쌓은 것으로, 단의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누에를 키우게 하였다. 세종대왕은 누에를 키우는 일을 크게 장려했는데, 각 도마다 좋은 장소를 골라 뽕나무를 심도록 하였으며, 한 곳 이상의 잠실을 지어 누에를 키우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원년(1506)에는 여러 도에 있는 잠실을 서울 근처로 모이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강남 잠실이 바로 옛 잠실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선잠단의 설치 이후 매년 3월에 제사를 지내다가 1908년 잠신이 의지할 자리인 신위를 사직단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그 터만이 남게 되었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서울선잠단지 사적 제83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7 조선의 왕비들은 내외명부의 여성들을 거느리고 누에를 치는 방인 잠실로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 했다. 친잠례를 행하기 전에 누에의 신인 ‘선잠先蠶’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을 ‘선잠제향先蠶祭享’이라고 하는데, ‘선잠단先蠶壇’은 바로 이 선잠제를 치르는 제단이다. 선잠제는 다른 사람을 선잠단으로 보내 대신 행하게 하기도 했고, 왕비가 친잠하는 장소에 별도로 선잠단을 쌓고 직접 거행하기도 했다. 선잠단은 조선 태종 연간에 중국의 제도에 맞춰 현재의 위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잠제향은 조선 초기 이후 지속적으로 봉행되었으나, 1908년(융희 2) 7월 선잠 신위를 선농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 배향한 후 중단되었으며, 선잠단은 방치되어 원형을 잃었다. 현재는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1939년 10월 18일 조선총독부에 의 해 보물 제17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 사적 제83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지금은 ‘선잠단지先蠶壇址’라 새긴 표석만이 큰길과 집들로 둘러싸인 조그만 터전을 지키고 있다. 1908년 이후 중단되었던 선잠제향은 성북동 주민들에 의해 1993년에 다시 봉행되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매년 음력 3월 뱀날巳日 선잠제향을 재현하는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 찾아가는길 버스 : 1111번, 2112번 버스 또는 02, 03번 마을버스를 이용, 홍익대부 속중 · 고등학교 정류장에서 내려 도보로 1분. 지하철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 6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15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62-263쪽
  • 선잠단(先蠶壇)에 지내는 제사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 3월 10일 갑진 2번째기사 1426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7
  • 선잠단先蠶壇은 양잠養蠶의 풍요를 위해 처음으로 백성에게 양잠하는 법을 가르친 신神에게 제사지내는 곳이다. 조선시대 왕은 선농단에서 논을 갈고, 농사의 신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를 올렸고, 왕비는 선잠단에서 누에를 치고 잠신蠶神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 지냈다. 선잠단의 위치는 1425년에 발간된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에“선잠단은 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사한이는 성북동을 말한다. 선잠제는 순종1년(1908) 선잠단의 신위를 사직단社稷壇으로 옮겨가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되고, 성북동이 개발되며 주변으로 건물이 들어서서 예전 규모와 모습은 사라졌다. 1963년에 사적 제83호로 지정되었고, 선잠제향보존회에서 1993년부터 선잠제향을 복원하여 해마다 5월 초에 선잠제를 지내고 왕비행렬행사를 개최한다.
  • 선잠단의 위치는 1425년에 발간된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에서 처음 나타난다. “선잠단은 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한이는 성북동을 말한다. 예로부터 나라에서는 누에치고 길쌈하기를 권장하고, 누에신[蠶神]에게 제사지내는 단을 만들어 왕비가 해마다 친히 제사지냈다. 중국 상고시대 황후인 서릉씨西陵氏를 누에신으로 모시고, 주변에 뽕나무를 심고, 궁중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였다.
  • 선잠단지(先蠶壇址, 사적 제83호)는 성종 2년(1471)에 세운 곳으로 양잠의 창시자로 알려진 중국 왕비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해마다 왕비가 선잠단에 와서 누에농사와 양잠업이 번창하기를 기원하였다.
  • 성북초등학교 동쪽, 성북동 64번지 1호에 선잠단지(先蠶壇址)가 있다. 사적 제83호로 지정된 선잠단지는 현재 성북구청에서 정비하여 제단을 비롯한 표지석 1개, 뽕나무 46주, 안내판 1개, 홍살문으로 복원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초에 국가에서 국민들에게 누에치기를 장려하기 위해 단을 쌓고 관리들이 잠신 서릉씨(중국 삼황 중의 한 명인 황제의 황후)에게 제사지냈다. 우리나라에서 선잠의 의식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401년(정종 3) 4월에 선잠단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국가에서 양잠을 널리 권장하기 위해 1478년(성종 9) 봄에 창덕궁 후원에 단을 쌓고 친히 왕비가 봉호를 받은 부인들을 거느리고 제사하는 친잠의 예를 행하였다. 친잠례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성종 때 세 번, 중종 때 두 번, 단종 때 한 번 행하였고, 영조 때에는 사라진 문헌을 고증하여 1767년(영조 43)에 다시 친잠례를 거행하였다. 최근까지 전례에 따라 순종왕후 윤비가 비원에서 친잠례를 거행하였다. 현재는 성북구청에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역대왕실에서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지내오던 전통제례의식 선잠제를 성북구청에서 1993년에 재현하여 매년 늦은 봄 길한 사일에 거행하며, 선잠 왕비 행차와 선잠제를 봉행하고 있다.
    양보경, 1998, (사연이 깃든) 성북의 유래, 37-38쪽
  • 예조(禮曹)에서 계달하기를, “무릇 제향의 단유(壇壝)가 모두 옛 제도대로 되지 아니하였으니, 신(神)을 섬기는 예의에 미진한 바가 있습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덕(宣德) 5년 2월 일의 본조(本曹)의 수교(受敎)에는 이러하였습니다. ‘선잠단(先蠶壇)을 만든 것이 제도에 맞지 아니하여 바닥의 고름세[面勢]가 기울어지고, 흙에 모래와 자갈이 섞여서 심은 뽕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니, 그래도 제비(帝妃)의 영혼이 여기에 있어 오르내린다고 하겠는가? 또 악기(樂器)에 다는 기구로 난조(鸞鳥)·봉황(鳳凰)·벌레·짐승과 같은 장식(粧飾)과 기(旗)·꿩깃·유소(流蘇) 따위는 비나 눈을 한 번 맞으면 쉽게 떨어지는데, 봉상시(奉常寺)에 간직하여 다른 제사에 통용하여 옮기고 왕래하니, 1년이 되지 못하여 모두 훼손(毁損)되었고, 또 신주독(神主櫝)을 봉상고(奉常庫) 안에 두었다가 제사 때가 되면 하인들이 어깨에 메어다가 올리니, 무례(無禮)함이 더욱 심하다. 우사단(雩祀壇)·선농단(先農壇) 곁에 선잠단(先蠶壇)을 쌓고, 모든 제단(祭壇)의 곁에다가 집을 세워서 신주를 안치하며, 창고를 세워서 제기와 악기를 간직해 두고, 지키는 자로 하여금 단(壇) 옆에 모여 살게 하여 전토를 주고 잡역(雜役)을 없애어 삼가 지키도록 하여서, 거칠고 무성한 잡초를 깎아내고 도둑을 방비하게 하면 단유(壇壝)가 완비(完備)되어 신(神)을 섬기는 예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법을 세우는 데에 자세하고 극진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유사(有司)에서 옛날대로 하고 폐하여 이제까지 행하지 아니하니, 대체에 온당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무릇 단유(壇壝)는 《오례의(五禮儀)》에 의하여 수축하고, 선잠단을 우사단·선농단의 곁으로 옮겨 마련하며, 세 단(壇)의 중앙과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 옆의 편리한 땅에 집을 세우고 창고를 세워서, 예전의 수교(受敎)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성종실록 35권, 성종 4년 10월 25일 계미 4번째기사 1473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23
  •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여러 제사는 단유(壇壝)의 소재(所在)가 옛 제도와 맞지 않는 것이 많으니, 이제 주례(周禮)와 역대의 제도를 고증하고 그것을 참정하여 뒤에 갖추 기록합니다. 수(隨)나라의 제도에 선잠단(先蠶壇)이 궁궐 북쪽 3리에 있다 하였고, 우리나라는 도성(都城) 북쪽에 단(壇)을 두었으니, 옛 제도에 합합니다. 예전대로 수축(修築)하게 하소서. (하략)” - 성종실록 40권, 성종 5년 3월 28일 계축 5번째기사 1474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친잠할 때에 꼭 행하여야 할 사건을 고제(古制)를 살펴서 기록하여 아룁니다. (중략) 1. 《예기》의 제통(祭統)에, ‘제후(諸侯)의 부인(夫人)은 북교(北郊)에서 누에를 쳐서 면복(冕服)을 제공한다.’ 하였고, 한(漢)나라 제도에는 봄에 뽕이 피면 황후(皇后)가 후원(後苑)의 잠실에서 친히 누에를 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선잠단(先蠶壇)은 도성(都城)의 북쪽에 있으므로 지세(地勢)가 좁아서 친잠(親蠶)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한(漢)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후원에다 채상단(採桑壇)을 축조하여 친잠하게 하소서.” - 성종실록 125권, 성종 12년 1월 18일 계사 5번째기사 1481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26
  • 예조에서 아뢰기를, “각도의 단유(壇壝)의 체제는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담을 쌓지 아니한 곳도 있어서 사람과 짐승이 들어가서 짓밟아서 더럽혀 놓는 곳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여러 제사의 의식[諸祀儀式]을 보면, ‘큰 제사[大祀]인 사직단(社稷壇)은 사방 2장(仗) 5척(尺)·높이 3척 사방으로 낸 계단[階]이 3층씩이며, 양쪽으로 작은 담[壝]을 친다. 자[尺]는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한다. 중간 제사[中祀]인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과 선농단(先農壇)·선잠단(先蠶壇)·우사단(雩祀壇)은 모두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이요, 작은 담이 둘이다. 작은 제사[小祀]인 영성단(靈星壇)·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사단(馬社壇)·마보단(馬步壇)은 모두 넓이가 2장 1척, 높이가 2척 5촌이요, 작은 담이 하나다. 묻는 구덩이는 모두 묘단(廟壇)의 북쪽 임방(壬方)의 땅에 있게 하되, 남쪽으로 계단을 내고, 네모지고 깊게 하여 물건을 넣어 둘 만하게 만든다. 그 제도는 벽돌을 층이 지게 쌓아 올려서 조그마한 천정(天井)을 만드는데, 깊이와 넓이를 3, 4척쯤 되게 하고, 그 남쪽에 밟고 오르내리는 통로를 만들어서, 일이 없을 때에는 흙을 매워 두고, 제사지낼 때에는 흙을 파내고 깨끗이 소제하였다가, 제사를 마치면 사람을 시켜서 폐백과 축판(祝版) 등속을 가지고 밟고 다니는 길로 내려가서 구덩이 안에 집어넣은 다음에 흙을 부어서 꼭꼭 다지고 예에 따라 사람을 두고 지키게 한다.’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사묘(祠廟)가 없는 중간 제사[中祀]인 악해독단(嶽海瀆壇)은 풍운뇌우단의 제도에 따라, 사방이 2장 3척, 높이 2척 7촌, 작은 담[壝]을 둘로 하고, 작은 제사[小祀]인 명산대천단(名山大川壇)과 각 고을에서 제사지내는 제단(祭壇)은 영성단(靈星壇)의 제도에 따라, 사방이 2장 1척, 높이 2척 5촌, 작은 담을 하나로 하고, 사방으로 계단을 내되 3층씩 쌓아 올리고, 묻는 구덩이도 위의 구덩이의 체제에 의하여 만들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 12월 8일 갑술 3번째기사 1430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8
  • 옛 성북동에 누에가 좋아하는 뽕나무가 가득 들어섰던 장소가 있다. 바로 매년 선잠제를 지내던 곳이었고 지금은 터로만 남은 선잠단지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20쪽
  • 우사단(雩祀壇)·동방 토룡단(東方土龍壇)·선농단(先農壇) 【모두 흥인문(興仁門) 밖 평촌(坪村)에 있다.】 마보단(馬步壇)·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사단(馬社壇) 【모두 흥인문 밖 사근사리(沙斤寺里)에 있다.】 선잠단(先蠶壇) 【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 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 【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에 있다.】 남방 토룡단(南方土龍壇) 【한강 북쪽에 있다.】 서방 토룡단(西方土龍壇) 【가을두(加乙頭)에 있다.】 북교단(北郊壇)·북방 토룡단(北方土龍壇)·여제단(厲祭壇) 【모두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다.】 -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도 한성부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21
  •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악·해·독·산천의 단이나 묘가 고제(古制)가 아닐 뿐더러, 국도에서 제사지내는 산천·풍운뢰우 및 선잠(先蠶)·선농(先農)에 모두 단만 있고 묘가 없으니, 외방의 악·해·독·산천에 나라에서 제사를 행하는 곳으로서 사묘가 없는 곳은 반드시 묘를 세울 것이 없고, 단이나 묘를 모두 예전대로 하게 하고, 신주를 간직하는 집과 신주·고방을 짓는 것은, 인가가 멀리 떨어져서 해곡(海曲)과 심산(深山)에 비록 간수하는 사람을 정하더라도 수호하기가 심히 어려우니, 나라에서 행제(行祭)하는 곳에는 신주와 고방 각기 두 간을 풍년을 기다려서 짓고, 소재관이 제사지내는 곳으로서 신주를 두는 집과 주고(廚庫)를 짓지 않은 곳은 관사 안의 깨끗한 곳을 가려서 따로 집 한 채를 짓고, 신판과 제기를 간직하여 두되, 제사 때에 임하여 재계하고 목욕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지내는 곳으로 운반하게 하고, 단과 묘를 간수하는 사람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1호를 택하여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고 위임하여 정하소서.” - 세종실록 76권, 세종 19년 3월 13일 계묘 2번째기사 1437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8
  • 조선시대 중국의 제도를 따라 북쪽 외곽인 성북동에 선잠단을 쌓고 나라의 큰 제사인 선잠제향을 봉행하였지만, 그것이 성북동을 사람살기에 맞춤인 마을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0쪽
  • 조선의 왕비들은 내외명부의 여성들을 거느리고 누에를 치는 방인 잠실로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했다. 친잠례를 행하기 전에 누에의 신인 ‘선잠(先蠶)’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을 ‘선잠제향(先蠶祭享)’이라고 하는데, ‘선잠단(先蠶檀)’은 바로 이 선잠제를 치르는 제단이다. 선잠제는 다른 사람을 선잠단으로 보내 대신 행하게 하기도 했고, 왕비가 친잠하는 장소에 별도로 선잠단을 쌓고 직접 거행하기도 했다. 선잠단은 조선 초기부터 등장하는데, 중국의 제도를 따라 성의 북쪽인 지금의 성북동 지역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성종 2년(1471)에 지금의 위치 부근에 다시 크게 조성하였다. 선잠제향 역시 국초인 정종 2년(1400)에 설치된 이후 계속 이어졌으나, 순종2년(1908) 7월 선잠신위를 선농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 배향한 후 중단되었으며, 선잠단 역시 방치되었다. 선잠단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크게 훼손되어 현재로서는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1939년 10월 18일, 총독부에 의해 보물 제17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 서울시가 사적 제83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현재 선잠단지는 낮은 울타리로 둘러싸여있으며, 가운데에 ‘선잠단지(先蠶壇址)’라 새긴 표석만이 남아있다. 1993년 지역주민들이 ‘선잠제 보존위원회’를 만들어 선잠제향을 재현·복원하였고, 현재까지도 매년 5월마다 선잠제향을 재현하는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
  • 지평 박준원(朴俊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잠단(先蠶壇) 제향 때 아헌관(亞獻官)인 전(前) 판서(判書) 이익원(李翼元)은 도성문을 곧장 빠져나갔고, 종헌관(終獻官) 서회수(徐晦修)는 뒤늦게 따라갔으니, 모두 견책하여 파직시키는 법을 시행하기를 청합니다.” (중략)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였다. - 영조실록 123권, 영조 50년 7월 1일 임자 3번째기사 1774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33
  • 승정원이 아뢰기를, “선잠단(先蠶壇) 제향 축문의 빈 곳을 채울 때에 헌관(獻官) 안창군(安昌君)의 성명을 의당 갖추어 썼어야 하는데, 대축(大祝)이 성(姓)자를 쓰지 않아 비록 즉시 바로잡기는 했으나 이미 일이 매우 잘못되었으니, 대축 한용탁(韓用鐸)을 중추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 정조실록 44권, 정조 20년 3월 11일 정사 2번째기사 1796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 처음으로 선잠(先蠶)에 제사하였다. -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3월 4일 기사 2번째기사 1400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6
  • (전략) 예조에서 또 아뢰었다. “제사(諸祀)의 단유(壇壝) 안에서는 오직 사직단(社稷壇)과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만이 법식대로 축조(築造)되었고, 그 나머지 영성(靈星)·사한(司寒)·마조(馬祖)·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馬步)·중농(仲農)·후농(後農)의 단유는 모두 아직 축조되지 못했으며, 선농(先農)·선잠(先蠶)·노인성(老人星)·북교(北郊)·여제(厲祭)의 단유는 비록 축조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법식과 다르니, 윗항의 단유는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땅을 보아서 축조하소서.” -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6월 8일 을묘 2번째기사 1413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 예조(禮曹)에서 제사(諸祀)의 단(壇)·유(壝)의 제도를 아뢰었다. “선잠단(先蠶壇)과 영성단(靈星壇)은 높이가 3척(尺), 둘레가 8보(步) 4척(尺)이고, 4방으로 나가는 계단이 있으며, 선농단(先農壇)은 양유(兩壝)가 같고 유(壝)는 각각 25보(步)이며, 마사단(馬社壇)·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보단(馬步壇)은 각각 너비가 9보, 높이가 3척이고, 사방으로 나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6월 13일 갑인 4번째기사 1414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 첨지중추원사 박연(朴堧)이 상언하기를, “제사드리는 것[祀享]은 나라의 큰 일이온데, 우리 나라의 제단(祭壇)이 모두 그 제도가 틀렸사오므로 지난번에 신이 청하여서 모두 개정하도록 명하셨고, 특별히 제단 감조색(祭壇監造色)을 세워 그 건설하는 일을 위임하옵고, 영의정 황희와 호조 판서 안순(安純)과, 대제학 정초(鄭招)와 부윤 홍이(洪理)를 명하사 제조로 삼았사오니, 대개 그 일을 중하게 여기셨던 때문입니다. 그때에 다만 종묘(宗廟)·사직(社稷)만을 개정하옵고, 그 나머지의 중사(中祀)·소사(小祀) 아울러 10여 단(壇)은 모두 역사도 시작하지 아니한 채, 이제까지 8, 9년이나 되도록 국가의 영선(營繕)이 호번(浩煩)하다 하여 덮어두고 거행하지 않고 있사옵나이다. 그러나 신은 생각하옵건대, 제단을 개정하는 일은 마땅히 뒤로 미룰 것이 아니옵고, 또 그 공사는 이미 전우(殿宇)를 화려하게 건축하는 사치도 없는 것이옵고, 또 깎고 단청 칠하는 사치도 없는 것이오며, 단지 돌을 포열(布列)하여 단을 쌓고 바깥으로 난간과 담장을 마련하는 것뿐이옵니다. 그러하온데도 불긴(不緊)한 것으로 보고 여러 해 동안 지체하는 것은 매우 불가하옵니다. 이제 만약 고치지 아니하옵고 그대로 후세에 전하오면, 제소(祭所)가 적의(適宜)함을 잃게 되옵니다. 그 중에서도 선잠(先蠶)·산천(山川)의 두 단(壇)은 잡석(雜石)으로 지경을 이루었사오므로 무너지는 것은 겨우 면할 것이오나, 그 나머지 여러 단은 모두가 흙 언덕이 될 뿐이옵니다. 또 단소(壇所)에 난간으로 보호하는 것이 없어서 소·양·개·돼지가 마구 드나들어 더럽게 만들며, 아울러 좁고 막히고 또 많이 기울어지고 쓰러져서, 예를 행하고 음악을 쓰는 데 모두 그 의례대로 못하게 되옵니다. 지금 예악이 바야흐로 성(盛)하고 제도가 닦여 밝은데, 이에 사전(祀典)에는 결함이 이와 같이 있사오니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더군다나 일찍이 미신(微臣)에게 명하시어 그 일을 감독하게 하셨사오니, 어찌 구차하게 세월을 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와, 창성한 시대의 날로 새로와지는 성덕(聖德)에 누가 되게 하겠사옵니까.”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 11월 13일 계사 3번째기사 1438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9
  • 한편 성북동에는 뽕나무도 많이 있었다. 이는 이곳에 설치되었던 先蠶壇과 관계가 깊다. 현재 성북국민학교 옆 길가에는 先蠶壇址라는 표지석이 있다. 사적 제83호로 지정된 선잠단지는 현재 빈터만 남아 보존되고 있지만, 일찌기 조선초기에 국가에서 누에치기를 장려하기 위하여 단을 쌓고 누에신인 西陵氏를 제사지내던 곳이다. 《용재총화》에 의하면, ‘선잠단은 동소문밖에 있으며 3월에 풍악을 울리며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고, 《동국여지비고》에는‘선잠단은 동쪽 교외 혜화문 밖에 있는데, 제도가 南壇과 같고 서릉씨를 제사지낸다. 神座가 북에 있어 남향이다. 매년 늦은 봄 길한 己日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목면·모시와 더불어 비단이 중요한 옷감재료이다. 비단은 고급의 옷감으로서 그 이전부터 대외수출품으로서도 이름이 나서 그 수요가 컸다. 그런데 비단은 명주실로 짜며, 명주실은 누에고치에서 뽑는다. 누에는 뽕나무 잎을 먹고 산다. 따라서 비단을 제조하기 위하여는 뽕나무 재배가 잘 되어야 한다. 누에를 키우며 뽕나무 재배단지로 유명했던 곳이 蠶室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왕조는 동·서 두곳에 잠실을 설치하고 있었으니, 동잠실은 자양동 일대에 있었고, 서잠실은 연희동 일대에 있었다. 선잠단이 있었던 성북동에도 잠실이 있었다고 보인다. 이 곳에서는 누에를 잘 키우는 것이 그 업무였다. 누에를 잘 키우기 위해 잠실을 설치했지만, 이에 앞서 뽕나무가 잘 가꾸어져야 양잠이 성사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선초에는 국가에서 심은 뽕나무가 자라나기도 전에 잠실을 서둘러 설치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민간의 뽕나무에서 뽕잎을 채취하여 민원의 소지가 있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뽕나무 재배에 힘을 기울였다. 조선왕조의 역대 국왕들은 農桑은 의식의 근원이라고 하여 이를 국정의 주요 지표로 삼았다. 농경을 통해 식량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서 양잠을 통해 의복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초기부터 뽕나무 재배를 위해 여러가지 조처를 강구하였는데, 태조 때에는 법으로써 가가호호마다 그 가족수에 따라 대호·중호·소호로 구분하고 그에 비례하여 심어야 할 뽕나무 숫자를 정해 놓았다. 태종 때에는 뽕나무를 심지 않는 농가에는 벌과금을 부과시키기도 하였다. 국가에서 누에치기를 장려하고, 그리고 뽕나무 재배를 권장한 것은 매우 오래 전부터 행해진 일이다. 어떠한 일을 장려하고 권장하기 위하여 전근대 사회에서는 먼저 모범을 보여야 했다. 그것이 籍田과 親蠶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신라 때의 길쌈놀이도 그러한 것 중의 하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유리왕 때 6부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각기 왕녀가 우두머리가 되어 7월 보름부터 날마다 길쌈을 하여 8월 보름에 그 성과가 많고 적음을 심사하여 진 편은 이긴 편에게 술과 음식 그리고 노래를 선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先蠶의 의식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초기 정종 3년(1401) 에는 선잠단을 만들어 신의 도움을 기원하였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신이 좌우한다고 믿어 농사를 지을 때나, 가축을 기를 때나, 심지어 자손을 원할 때는 신에게 보살펴 주기를 기원하였다. 특히 동양사회의 지배층은 그들의 특권을 보호해주는 수호신을 믿고, 그들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동양 사회에서는 가장 중요시된 제사는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였다. 하늘과 땅은 농경의 바탕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제사는 왕실에서 국가적으로 행하였다. 선잠단도 그러한 의도에서 누에가 잘 자라고 누에고치가 많이 생산되고 나가서 뽕나무가 잘 자라도록 기원하기 위해 세운 제단이었다. 여기에서의 제사 주관은 왕실에서 하는데, 그것은 모범을 보이는 동시에 양잠을 권장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세종·세조·성종·중종·영조 때에 양잠이 성행하였다. 그것은 국가가 이 시기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성종때는 중농정책이 국가의 기간산업 시책으로 정착되었던 때로서, 성종 9년(1478) 양잠을 국가적으로 권장하기 위해 창덕궁 후원에 제단을 쌓고 왕비가 친히 봉작을 받은 부인들을 거느리고 제사를 지내고, 이어서 친잠의 예를 행하였다. 이때 궁궐 후원에 쌓은 제단의 모습은 사방에 섬돌을 놓고 둘레 2丈 3尺, 높이 2尺 7寸 이었다 그러나 궁중에 설치한 제단과 궁중에서의 친잠례는 민간 사회에 그리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이에 왕실에서는 성 밖인 성북동에 선잠단을 설치하고 주변에 뽕나무 밭을 일구어 왕비가 행차하여 선잠례를 거행토록 하였다. 션잠단 남쪽에는 한 단 낮은 뱃돌이 있고, 그 앞쪽 뜰에는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에게 그 뽕잎을 따다가 먹이게 하였다. 선잠단에서의 先蠶禮는 어찌보면 뽕나무에서 뽕잎을 정성스럽게 따는 예식이며, 궁중에서의 親醫禮는 뽕잎을 누에에게 먹이는 예식이라 하겠다. 뽕잎을 따거나 그것을 누에에게 먹이는 일은 주로 아녀자들이 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선잠례나 친잠례는 왕비가 주관하여 시범을 보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물론 잠실을 계속 관리하기 위하여는 소정의 관원이 있었다. 잠실은 그 격에 따라 內蠶室과 外蠶室로 구분되는데, 외잠실이 누에고치 생산을 위해 설치된 실제적 시설임에 대하여 내잠실은 친잠례를 위한 상징적인 시설이었다. 외잠실에는 상의원에서 別座가 파견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내잠실에는 환관이 배치되어 누에를 직접 관리하는 蠶母를 감독하였다. 잠모는 대개 노비들이었다. 친잠례는 양잠에 대한 위정자들의 관심이 많았던 때 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성종·중종·영조 때에는 이에 관계된 기록이 많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03-406쪽
  • 현재 성북국민학교 옆(성북동 64-1)에는 史蹟 제83호로 지정된 先蠶壇址가 있다. 이 壇은 조선초 성종 2년(1471)에 국가에서 국민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蠶神(西陵氏)에게 매년 늦은 봄 吉한 巳日에 풍악을 써서 제사를 지냈다. 선잠단 남쪽에는 한 단 낮은 댓돌이 있고 그 앞쪽 뜰에는 뽕나무를 심고 宮中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했다. 大韓帝國때인 1908년 7월에 先農壇의 神位와 함께 선잠단은 社稷壇으로 옮겨 配享되면서 터만 남고 史蹟으로 지정되어 1961년 1l월 10일에 先蠶壇址라고 표시되었다. 1인 금년 5월 16일 성북구청에서는 先蠶祭를 지내고 이날을 區民의 날로 정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63쪽
  • 현재 성북동 성북국민학교옆 길가에 세워진 先蠶壇址는 이 일대에 뽕나무가 많아 양잠이 발달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고, 먹골배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배·복숭아·앵두·자두 등이 풍성했던 곳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0쪽
  • 현재 성북동 성북국민학교옆 길가에 세워진 先蠶壇址는 이 일대에 뽕나무가 많아 양잠이 발달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고, 먹골배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배·복숭아·앵두·자두 등이 풍성했던 곳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0쪽
  • 7. 선잠단에 모셔진 서릉씨 고대국가에서부터 백성들에게 권하였던 농업과 잠업은 조선시대까지 맥을 잇고있다. 우리나라에서 선잠단을 마련하고, 제를 올린 것은 고려 시대부터이지만, 활발한 의례활동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고, 조선 시대에 들어서 체계를 갖추고, 의례 를 올리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선잠단은 선잠의 서릉씨(西陵氏)를 제향하는데, <예서주>에 “<사기>에 말하기를, 황제가 서릉씨에게 장가갔는데, 서릉씨가 처음으로 누에를 쳤다고 한다.” 하였다. 신위를 단위의 북방에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자리는 왕골자리로 한다. 위 글에서는 선잠단에 모셔진 이가 서릉씨임을 확인할 수 있고, 서릉씨가 황제의부인이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누조와 서릉씨가 같은 인물일까. 서릉씨의 딸 누조가 황제의 원비가 되어, 백성에게 누에 치고 의복 만드는 법을 가르쳤는데, 후세에서는 그에게 제사하고 선잠이라 한다. 위 글에서는 누조의 성이 서릉씨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후로 국가기록에서는 선잠단에 모셔진 잠신을 ‘서릉씨’로 통일하여 쓰고 있다. 위 글에서는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서릉씨가 누에 치는 양잠뿐만 아니라 옷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는 점이다. 비단을 얻으려면 양잠으로만 되지는 않는다. 누에고치의 실을 뽑아내야 하고, 이 실로 옷감을 짜는 일이 끝나야만 비로소 비단이라는 황홀한 천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천만 있다고 옷을 해 입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느질을 하여 의복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즉, 선잠이라는 말에는 양잠과 함께 비단을 만들어내는 길쌈, 옷을 지어 입는 바느질 솜씨까지 내포하는 말로 이미지되어야 한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14-15쪽
  • 8. 선잠단의 확장된 의미, 의(衣) 선잠단에 잠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백성들에게 양잠을 권하는 정치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인간에게 양잠을 알려 준 신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누에와 고치 풍년을 기원하는 기도를 담는다. 앞서 선잠의 의미가 의복 짓는 데까지라 했으 니, 비단뿐 아니라 삼베, 모시, 무명을 만드는 길쌈 전반에 대한 상징으로 그 의미를 확장해야 타당할 것이다. 농사를 잘 지어 모시풀, 삼, 목화에서 좋은 원료를 얻었다한들 길쌈을 하지 않는다면, 좋은 옷감은 얻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다음의 이야기는 옷감 짜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옛날에 베틀바위가 있는 바로 밑의 마을에 갑숙이라는 처녀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녀는 아주 가난하여 남의 집에 가서 베를 짜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나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녀는 온갖 약을 구해서 어머니께 드렸지만 효험이 없었다. 어느 날, 약을 지어 가지고 오늘 길에 날이 저물었다. 어둠을 헤치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가에 한 노파가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그녀는 노파를 업고 와서 어머니 옆에 눕히고,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밤낮으로 두 사람을 간호하느라 잠을 자지 못한 그녀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노파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노파가 간 뒤에 어머니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갑숙이는 그 다음날부터 다시 베를 짰다. 그녀의 베짜는 솜씨는 아주 뛰어났으므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임금이 갑숙이와 궁궐에서 베를 짜는 직녀들의 솜씨를 겨루어 보게 하였다. 직녀들이 가지고 있는 베틀은 아주 좋은데, 그녀의 베틀은 아주 보잘것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베 짜기 시합을 보려고 베틀을 설치해 놓은 산 중턱에 몰려들었다. 베 짜기 시합이 시작되어 한참 베를 짜는데 난데없이 갑숙이가 구해 준 노파가 나타나 그녀의 베틀을 세 번 두드렸다. 그러자 베틀이 열 개로 변하고,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열 개의 베틀에 앉아 베를 짜 주었다. 시합이 끝난 뒤에 보니, 그녀가 짜는 베가 직녀들이 짠 것보다 훨씬 곱고 잘 짜여 있었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그녀에게 왕비가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녀는 홀어머니를 두고 왕비가 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녀의 효심에 감동한 임금은 그녀의 어머니가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재물을 마련해 주고,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이 베틀바위는 경북 의성군 의성읍 치선리 선암마을 뒷산에 있었다고 한다. 효의 덕목을 바탕으로 한 전설인데, 베를 잘 짜면 왕비도 될 수 있었으니, 길쌈은 여성에게 중요한 일이었고, 곧 나라의 일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16-17쪽
    선잠단의 의미와 전근대시대 길쌈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설화와 관련된 내용
  • 하지만 양잠 농가도 사라진 지금 우리가 선잠단을 다시 돌아보는 까닭은 무엇일까? 양잠, 길쌈, 바느질로 연결되는 여성의 일은 근대화 속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1918년을 전후하여 제사(製絲)가 기계공업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직공의 대부분은 여자들이었다. 당시 제사공장에서는 견우직녀가 만나는 칠월칠석날 밤이 되면 여공들이 집단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이는 칠석날 밤 직녀성에게 절을 하면, 베틀 솜씨나 바느질 솜씨가 는다고 믿는 풍습을 이어갔던 것이다. 1970년대 이후로 화학섬유가 등장하고, 수공업적인 양잠과 길쌈이 사라지는 가운데 여성은 피복 노동자로 활동을 이어나가며 경제 성장의 한 축을 여전히 담당하였다. 그런 가운데 여성의 길쌈노동이 옷감별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경북 성주의 명주짜기는 중요무형문화재 87호가 되어, 조옥이(1920~2007) 님이 최초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는 15대에 걸쳐 전승된 기능을 보유하였던것이다. 무명은 중요무형문화재 28호로 전남 나주의 ‘샛골나이’가, 모시는 중요무형문화재 14호로 충남 한산모시가, 삼베는 중요무형문화재 32호로 전남 곡성 ‘돌실나이’가 지정되었다. 선잠단이 갖고 있던 본래적 의미에 걸맞게 여성은 계속해서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또한 문화재로도 그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전통을 계승한다는 측면과 함께 선잠단이 갖는 현재적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21쪽
    선잠단이 가지는 현대적 존재 이유
  • 성북구 성북동에는 ‘선잠단지(先蠶壇止)’라는 사적지가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양잠의 신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내던 선잠단이 있던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는 의식주이다. 선잠단에서 제사를 지낸 것은 의생활의 바탕이 되는 양잠이 잘 되기를 바라는 의식도 포함하고 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37쪽
  • 3. 동교 사한이에 선잠단이 있었다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을 선잠단(先蠶壇)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시대에 따라 도성의 북쪽인 북교(北郊)에 단을 쌓기도 했고, 동쪽인 동교(東郊)에 선잠단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주나라(周) 에서는 선잠단이 북교에 있었다. 이는 북쪽이 ‘순음(純陰)’이었기 때문에 정한 것이다. 여기에서 ‘순음’의 의미는 두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생사(生絲)를 뜻하는 것으로 선잠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인 서릉씨가 양잠을 처음으로 했던 것과 연관된다. 즉 누에치기를 통해 뽑아내는 실이 생사였기 때문에 이를 뜻하는 ‘순(純)’은 북쪽에서 나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의미는 서릉씨가 여성이므로 음양설(陰陽說)에 따라 순수한 음(陰)의 방향인 북쪽에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의미도 된다. 선잠단이 동교에 설치된 것은 한나라(漢) 부터였다. 이는 뽕나무가 봄에 자라기 때문에 만물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를 더하여 동쪽에 단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송나라에서도 이러한 한나라의 선례를 따라 뽕나무가 잘 자라라는 의미로 동교에 선잠단을 설 치하였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41쪽
    선잠단이 도성의 북쪽에 위치하는 이유에 대한 설
  • 고려시대에는 선잠단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선잠단의 위치가 전해지고 있지 않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정종(定宗) 2년에 선잠제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정종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으로 환도했었고, 한양으로 다시 환도한 것은 태종 5년의 일이었으므로, 정종 2년의 선잠제는 개경에서 시행되었을 것이다. 태종(太宗) 이후 국가 제도가 정비되고, 세종(世宗)이 즉위한 후 의례를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선잠단은 이때 위치가 정리되었다. 선잠단이 한양에 처음으로 어디에 설치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태종 13년의 사전(祀典) 개정안에 의하면 이미 축조되어 있긴 하지만 법식에 맞지 않으므로 땅을 보고 축조할 것을 예조(禮曹)에서 건의하여 선잠단을 새로이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선잠단은 새로 축조되지 못하였다. 세종 12년에 박연(朴堧)은 선잠단의 구조가 허술하고, 지면의 형세가 기울어지고 높낮이가 고르지 않으며, 토질이 척박하여 뽕나무를 심어도 잘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선농단(先農壇)과 우사단(雩祀壇) 곁에 가까이 새롭게 터를 정하여 축조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박연의 이 건의는 바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후 박연은 선잠단 주위에 난간으로 보호하는 것이 없어 소‧돼지 등 가축들이 드나들어 더러워졌으 므로 개정하는 공사를 시작하자는 상소를 다시 올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박연의 의견은 왕의 하교를 받았음에도 시행되지 못하였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42쪽
  • 성종(成宗) 4년, 앞서 세종대의 박연의 의견을 따라 선잠단의 위치를 우사단과 선농단의 곁으로 옮겨 마련하도록 하였다.14 그러나 이듬해 예조에서는 중국의 역대 제도를 참고하여 여러 단의 제도를 건의하였다. 이때 “수나라(隋)의 제도에 선잠단이 궁궐 북쪽 3리에 있다 하였고, 우리나라는 도성 북쪽에 단을 두었으니 옛 제도에 합합니다. 예전대로 수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15 성종 8년의 친잠례를 위해 마련된 ‘친잠절목(親蠶節目)’에는 선잠단이 북교(北郊)에 있고, 뽕잎을 따는 장소에 설치되는 채상단은 후원에 있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그간 선잠단의 위치가 옮겨진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선잠단은 처음 만들어진 곳에서 근처로 이전하였을 가능성은 있지만 크게 위치가 옮겨진 것은 아니다. 이미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는 선잠단이 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 즉 지금의 성북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대 선잠단을 선농단 근처로 옮기자고 했지만 성종대까지 시행되지 못했으며, 성종이 허락하긴 하였지만 도성 북쪽에 단을 두었다는 것을 보면 결국엔 위치를 옮기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42-44쪽
  • 조선후기에 편찬된 서적들은 모두 선잠단의 위치를 동교(東郊)라 하였다. 숙종대 이긍익이 저술한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는 “선잠단은 동교-동소문 밖-에 있으며, 서릉씨를 향사하였는데, 음력 3월 첫 사일에 향사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영조대 편찬한 『문헌비고(文獻備考))』를 증보하여 고종대 편찬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도 선잠단은 동교에 있다고 하였다.18 성종대 북교라 한 것은 창덕궁의 바로 북쪽에 선잠단이 있었기 때문에 북교라 인식한 것이다. 조선후기의 기록을 보면 선잠단은 동소문 밖에 있는데 그 위치가 북쪽에 가까우므로 북방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동교에 있다는 기록들도 결국은 같은 곳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즉 선잠단은 지금의 성북동에 있었으며, 이를 동교에 위치한다고 하였지만, 성종대에는 창덕궁의 정북쪽에 위치하였으므로 북교라 지칭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선잠단의 위치는 영조대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해동지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선잠단의 규모는 고려시대와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제후국이었던 만큼 중국의 규모보다 작게 만들어 졌다. 중국 송나라의 선잠단의 규모는 사방 2장, 높이 5척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에서는 사방 2장(丈), 높이가 5척(尺)이며 사면에 층계가 있는 구조였다. 즉 송나라와 고려의 선잠단과 규모가 같았다. 그러나 조선의 선잠단은 논의를 거쳐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寸), 사방에 계단이 있으며, 양쪽에 유(壝)가 있고, 이 유는 25보(步)로 결정되었다.21 이를 현재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선잠단은 가로 세로 각각 약 7m의 네모난 단이며, 높이는 81cm이고, 유는 45m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조선의 선잠단은 송나라, 고려와 비교했을 때 단의 크기는 약간 크고, 높이는 낮게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 국가 제사 중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컸던 사직단의 크기는 사방이 2장 5척, 높이 3척, 유 25보였다. 사직제는 대사(大祀)였던 만큼 중사인 선잠제보다 규모가 컸다. 그러므로 선잠단은 사직단의 크기보다 작게 만들어 졌다. 또한 송나라 의 단 보다는 크기는 약간 크지만, 높이에서 큰 차이는 보이는 만큼 제후국으로서 격을 낮추어 단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선잠단은 이렇듯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선잠단의 단 바깥쪽에는 다시 낮은 담인 유를 쌓았다. 선잠단의 담은 소나 양과 같이 가축들이 돌아다니면서 단의 흙을 망가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유는 담 안쪽에, 제단 주위에 쌓은 낮 은 담이다. 이것은 제례를 행할 때 성계와 속계를 나누어주는 관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예를 행할 때 장소가 좁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례에서 역할에 따라 유의 밖과 안에 자리를 마련하여 좀 더 예를 효율적으로 시행하려는 현실 적인 기능도 하였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44-46쪽
  • 한편 선잠단 신위는 대한제국 순종황제 2년(1908) 7월에 선농단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배향했고 그 후 773평의 선잠단 터는 1939년 10월 18일 일제에 의해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 터의 일부(528평)는 개인에게 불하되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66쪽
  • 한편 선잠단은 광복 후 국유로 이속시켜 1961년 11월 10일 선잠단지(先蠶壇址)란 돌 팻말을 세우고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83호로 지정되었으나 거의 방치상태에 있었다. 이를 1976년 단 앞에 뽕나무를 심은 후 주민 이학수씨로 하여금 돌보게 하였다. 1972년 6월 9일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경기도 가평에서 뽕따기와 누에치기를 하며 친잠행사를 시작한 후 1973년 6월5일 충북 청원에 있는 잠업기술연구원에서, 1974년 5월 28일 강원도 춘천 뽕나무 마을에서 거행한데 이어 1981년 9월9일 전두환 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충북 청원에 있는 잠업기술연구원에서 친잠행사를 거행하였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68-69쪽
  • 요즘은 축제나 문화행사가 넘쳐난다. 축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제 웬만해선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주관단체나 기관에서 아무리 열심히 행사를 준비해도 주민이 거의 참여하지 않는 행사들이 많아졌다. 선잠단 사업 역시 그렇게 될 것이 가장 우려스러웠다. 주관단체 주도로 이루어지는 행사는 자칫 주민이 참여하지 않는 일회성 행사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선잠단 사업은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성북구 주민들은 선잠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선잠단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오래된 토박이가 많은 곳으로 알려진 성북동에 당연히 이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도 많을 것으로 기대했다. 2010년 8월부터 9월까지 2개월 동안 성북의 지역 신문, 현수막 등의 홍보를 통해 ‘선잠단과 길쌈’에 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주민제보를 기다렸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로 아무것도 접수되지 않았다. 몇 분의 제보가 있었지만 선잠단에 관한 결정적인 제보는 아니었다. 굳이 선잠단만이 아니라 복개되기 이전의 성북천 일대에서 놀던 기억이나 사진이라도 찾았지만 그것은 구청이나 성북구사진가회에서도 구하기 어려웠다. 왜일까?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109쪽
  • 1. 선잠단과 양잠에 관한 기억 처음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대한잠사회와 청원 잠사박물관을 방문하여 자료 수집을 하였는데, 다행히 1910년대 선잠단 사진을 구할 수 있었다. 나무는 하나도 없는 황무지 상태지만 제단이 남아있고 주춧돌이 남아있는 모습이 현재의 모습보다는 많이 넓어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의 모습은 언제 어떻게 조성된 것일까? 성북초등학교와의 사이에 난 도로는 당시 사진에는 없어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 길은 언제 난 것일까? 선잠단은 국가적 행사였기 때문에 제단 주변이 현재보다는 넓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현재는 바로 옆에 도로가 나있고 성북초등학교와 어색하게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그 실마리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111쪽
  • 선잠단에 대한 기억 송대식 전 구의원(50세)은 성북동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다녔고 현재까지 살고 있는 본토박이다. “성북구의 생활수준은 극과 극이다.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한쪽은 극빈층(대한민국의 마지막 0.5% 빈곤층)이, 다른 한쪽은 최고 부자들(0.1%의 부자들)이 살고 있다. ‘성북동비둘기’라는 시는 이런 성북동의 현실을 노래한 슬픈 이야기다.” “선잠단 옆길은 7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때도 길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까지도 관심이 없었다. 관심가진 것이 요즘... 선잠단 옆에 독서실(현재 부대찌개 집)이 있어서 중학교 때 친구들이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선잠단으로 넘어가 담배피기도 했다(저는 아니구요. 웃음). 당시 선잠단은 풀숲에 우거져 있어서 뭔지도 몰랐고 무덤으로 알고 있었다.” 이영순(66세, 홈패션 운영) “성북동에서 60년을 살았다. 예전 선잠단의 모습은 나무도 없었고 약장수들이 약 팔고 활동사진도 보여주곤 했다. 그냥 공터인줄 알았다. 뽕나무는 전혀 없었고 성북 초등학교와의 사이에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백영애 (50세, 성북 감떡집) “30년 넘게 살았다. 선잠단이 예전에는 덤불로 덮여있었다. 선잠단 앞에 집이 있어 작은 골목길로 돌아서 올라갔다.” 성북동이 가장 깨끗하고 도둑도 없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성북동에 살기로 했다는 하두호 할아버지(83세, 성북2동 경로당 회장)는 1952년부터 이곳에서 살았다. “제사지내기 시작한 것이 얼마 안된다. 1993년부터이고 제관으로도 참여했다. 선잠단은 양잠을 권장하기 위한 곳이다. 뽕나무는 근래에 심은 것이고, 그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허가 집들이 들어서 있었고 선잠단 옆에는 도로가 없었다. 한 블 록 아래 한옥집이 있는데, 길이 있었다. 70년대 길을 뚫었다. 간송 미술관에서 살았는데도 특별한 것을 몰랐다. 제단인줄 몰랐고 선잠제를 지내기 시작한 후에나 알게 되었다. 양잠하던 곳은 없었다.” 다른 어르신들을 만나도 옛날 선잠단은 잘 모른다거나 기억을 해도 위와 비슷한 의견이었다. 선잠단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선잠단지는 1993년 5월 제향을 시작하기 이전까지는 덤불에 싸여있거나 공터이거나 묘지인,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10월 [보물 제17호]로 지정되었고 해방 후 1961년 11월에는 [선잠단지] 표지석이 세워졌고 1963년 [사적 제83호]로 지정되었지만 주민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70년대까지 선잠단은 주민들의 기억 속에 묻혀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선잠단을 별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112-113쪽
  • 선잠단의 뽕나무 선잠단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76년부터이다. 그 이전의 뽕나무가 없었다는 증언은 정확했다. 뽕나무가 심어진 것은 바로 1976년이기 때문이다. 선잠제 보존위원회 회장이며 18년 동안 보존회 활동을 해온 현금동(68세, 쌀집운영)씨와 페인트점을 운영하는 정동규(59세)씨를 만나면서 정확한 상황을 듣게 되었다. “이학수라는 분이 있었다. 5년전 돌아가셨는데, 지금 살아있었으면 100세정도 되었을 것이다. 70년대에 그 분이 구청에서 선잠단의 유래를 듣고는 왕실에서 제사지내는 중요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선잠단 주변의 덤불을 치고 정리했다. 이학수씨가 선잠단을 정리하고 잘 돌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구청에서 식목일 행사로 뽕나무를 심게 했다. 막걸리를 내겠다며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뽕나무를 심었다. 원목은 구청에서 구입해줬다. 그후 구청에서도 이학수씨한테 선잠단을 관리하게 하였다. 특별한 보수는 없었다. 당시 선잠단에는 아무것도 없는 민둥산 모양이었다.” 이 증언은 대한잠사회에서 발간한 [잠사회 80년사]란 책을 통해 선잠단 조성과정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앞서 ‘18세기 이후 양잠 산업의 변화’를 집필한 이정향의 글에서 보듯, 1976년 식목일 행사로 이학수씨와 주민들이 뽕나무를 심었고 그 이후부터 선잠단이 그나마 관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동규씨는 그때 20대였는데,이학수씨와 함께 뽕나무를 심은 3명중의 하나라고 한다. 역사 속 산증인이다. 그 이후 이학수씨는 명예 관리인이 되었고 관리소 명패까지 만들었다. 그로부터 20년이흘러서야 제향이 시작된 것이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113-114쪽
  • 1982년부터 근잠회와 대한잠사회에 의해 매년 봄 뽕잎 가지치기와 비료주기, 주변정리를 하며 선잠제 재현을 수차에 걸쳐 건의하던 차에, 성북구청에서 1993년 서울천도 600년을 기념하여 문화재 복원 차원에서 선잠제향을 재현하기에 이른다. 일제시기 끊어진 제향이 85년만에 재개되었고 제향이 치러진 5월 16일을 성북구민의날로 정했다. 주민과 시민단체가 주도가 되어 살려낸 문화재 복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선잠단에는 홍살문이 없었다. 선잠단 앞에는 여전히 건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1998년에 와서야 민가를 헐고 홍살문을 세울 수 있었다. 그 당시 건물에 가로막혀 있던 모습은 여주 잠사민속박물관에서 어렵게 찾을 수 있었다. 선잠단지 가운에 길은 지금과 달리, 붉은 벽돌로 깔려있다. 80년대부터 선잠단지 조성과 조사를 해온 박재명 관장님은 [잠사회 80년사]의 저자이자, 양잠산업의 산증인으로 사진자료도 많이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본인도 가진게 없다고 하신다. 당시에 관계자들에게 자료를 전부 넘겨주었는데, 담당자가 바뀌고 하면서 자료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화가 안되어 있는 시대에 인화된 사진들이 송두리째 없어진 것이다. 부실한 기록문화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114-115쪽
  • 선잠단의 크기 선잠단과 성북초등학교와의 사이에 난 길은 언제 생겼을까? 구청 지적과에서도 특별한 기록이 없다는 것으로 보아, 이는 구청에서 일부러 도로를 낸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 도로이거나 민간이 조성한 것이 아닐까 한다. 가장 오래전 정확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성북초등학교 땅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간송 미술관의 전성우 씨일 것이다. 부인 김은영 씨(77세)가 전화를 통해 증언을 해주셨다. “성북초등학교는 간송 땅이었는데, 해방 후 소학교의 땅이 없어 희사했다. 원래 삼산초등은 5개 교실이었고 선잠단 옆에 있었다. 해방 후 학교가 좁고 땅이 없어 현재의 자리를 희사한 것이다. 일제 때도 성북초등 자리는 선잠단이 아니었다. 선잠단 북쪽에 있다고 해서 오세창 선생이 ‘북단장’이라 이름지었다. 그곳이 간송미술관 자리이다. 선잠단과의 사이에는 오솔길이 있었는데, 그다지 좁지 않았고 현재의 길이 그대로 난 것 같다. 선잠단 뒤 삼거리에 물이 많았고 길상사, 골프장 등에서 내려오는 물이 삼거리에서 모여 선잠단 오른쪽 샛길로 빠져나갔다. 길상사 위쪽으로 절, 암자가 300여개나 있었다. 숲이 우거져 오소리, 토끼, 여우가 나올 정도였다. 현재 명수학교에는 큰 물 웅덩이가 있어서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성북동에 터를 잡고 들어온 것은 1934년경의 일이고 그때 성북초등학교 부지를 포함한 만여 평을 구입하게 된다. 위창 오세창 선생은 그곳이 옛 선잠단지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단장(北壇莊)이라 명명하였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115-116쪽
  • 1910년대의 선잠단 사진을 볼 때, 현재 선잠단 양쪽에 있는 빌라와 도로까지가 선잠단지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773평이었던 선잠단지는 1930년대 일제에 의해 200여평만 남겨놓고 528평이 개인에게 불하된다. 현재 제단의 모습이 비좁아진 이유는 그 때문이다. 성북초등학교와의 사이에는 오솔길이었는데, 언제 지금과 같은 축대가 쌓이고 도로가 생긴 것일까? 성북초등학교 연혁에 의하면, 학교 동관이 세워진 것은 1969년으로, 그즈음 축대를 쌓고 도로가 생긴 것이 아닐까 한다. 일제시기 200평 남짓 남아있던 것이 광복 후 1998년 홍살문을 세우기 위해 민가를 사들이면서 조금 넓어져 현재 선잠단지의 최종 넓이는 285평(939㎡)이다. 그렇다고 선잠단 제단의 크기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국조오례의에 기준하여 선잠단의 크기는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寸), 사방에 계단이 있으며, 양쪽에 유(壝)가 있고, 이 유는 25보(步)라 하였다.3 환산하면 제단의 크기는 가로, 세로 7m 인데, 실제 측량결과 7m가 약간 넘지만 비슷한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유(壝)’라고 하는 중간 담장이 사라진 것이 아쉽다. 복원과정에서 정확한 사료를 근거로 하지 않은 듯하다. 유의 너비가 45m이니, 이를 통해 선잠단의 전체 너비를 예측 할 수 있다. 1910년대 사진을 보아도 중앙의 제단 앞으로 장대석이 쌓여있는데 그것이 바로 ‘유’였음을 알 수 있다. 북쪽에는 축문이나 폐백(幣帛)을 태우거나 매장하는 예감(瘞埳)이 있었고 그 남쪽으로는 길(踏道)이 있었다4고 하니, 지금보다는 제단의 북쪽도 꽤 넓은 구역이었음을 예측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이 자갈이 깔린 중앙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길이 있었다 하더라도 종묘나 사직과 같이 전돌이 깔리지 않았을까 한다. 자갈은선잠단을 찾는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가져가기도 해서 복원된다면 고증을 거쳐 제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116-117쪽
  • 양잠에 대한 기억 선잠단 일대에서 뽕나무치고 누에치는 일을 얼마나 했을까?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성북동에서의 양잠의 기억은 없었다. 대부분 할머니들의 기억은 결혼하기 전 친정고향에서 일하던 것이었다. 1976년 선잠단에 뽕나무가 심어지기 전까지 이곳은 뽕나무도 없었고 양잠과는전혀 상관없는 곳이었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대규모 잠실도 아차산과 낙천정 일대가 동잠실이고 연희궁 일대가 서잠실, 잠원동 일대는 신잠실이었다. 잠원동에 오래된 뽕나무의 흔적이 남아있고, 송파구 잠실에는 뽕나무 관련 이야기들이 전해오는 것에 비해 성북구에는 뽕나무에 관한 흔적이 거의 없는 것이 특이하다. 간혹 자료에는 ‘성종2년(1471) 선잠단 남쪽에는 한단 낮은 댓돌이 있고 그 앞쪽 뜰에는 뽕나무를 심어 궁중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했다’5고 하는데, 그렇다면 성북의 뽕나무는 궁중의 잠실을 위한 뽕밭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북잠실을 의미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선잠단 안에 뽕나무가 있었던 것은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시기 선잠제향이 끊어지면서 선잠단지는 뽕나무 하나 없는 황무지가 되었다. 한편 1993년 [성북구지]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양잠을 권장하면서 지금의 제기동에 경기도 원잠종제조소가 있었고 1925년 숭인면 신설리(신설동)에 비단실을 생산하는 근대적 제사(製絲)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시설이 들어섰다는 것은 그 일대가 잠업이 성행했음을 말해준다. 동소문 밖에서 미아리 넘어 수유리, 우이리 등의 성북지역과 청량리, 망우리 등지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양잠지역6이었다. 생사공장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잠실과 공장 노동자로 일한 여성들이 남아있을 수도 있는데, 이번 조사에서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사 대상자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성북에 정착한 사람들이고 도시에 정착한 이상 더 이상 양잠이나 길쌈은 하지 않았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117-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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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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