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경제
?
장소 인문지리
성북구의 경제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시대의 산업은 농경이 기반이었지만 성북구 지역은 상당 부분의 토지가 산지여서 농지가 부족했다. 따라서 양잠이나 과수가 보다 널리 행해졌는데, 선잠단지나 앵두마을 등의 지명들은 그 흔적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는 성북동 지역에 둔전을 설치할 때 농경지가 부족하자 둔전민들에게 포백과 훈조를 생업으로 삼도록 조치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심을 드나들 수 있는 동소문(혜화문)이 있고 교통망이 발달하여 상업이 발달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섬유와 의약품 관련 제조업이 들어섰고, 외곽의 차고지 확보가 용이하여 운수업도 성행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자연경관과 문화유산,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의 흔적과 결합하여 서울의 역사문화 중심지로 부상하였고 관련 경제활동이 크게 성장하였다.
성북구
  • 위험(危險)한 돈암리(敦岩里) 채석장 부근을 주의
  • 시립전당포
  • 성북구 수유2동 새마을운동
  • 재건국민운동 성북구위원회와 한국연예단장협회 새마을 결연식
  • 옛 월곡동 공장 전경(1)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근거자료 원문

  • 第7章 産業·經濟 I . 前近代社會의 産業·經濟 1. 産業. 經濟의 立地條件(1) 城北區는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설치된 행정구역이다. 서울의 區制는 1943년부터 실시되었지만, 당시의 성북구 지역은 동대문구 관내와 경기도 고양군 관내에 포함되어 있었다. 즉 이 지역은 근대에 이르러 서울에 편입된 곳으로서 前近代社會에서는 城外 또는 郊外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대부분이 경기도에 속하였으나, 城北洞·貞陵洞·彌阿洞·水踰洞·長位洞·安岩洞·鍾岩洞·石串洞·敦岩洞·三仙洞·月谷洞 등은 비록 城 밖에 있었다고 하여도 초기부터 漢城府에 속하였었다. 李成桂가 漢陽으로 도읍을 정한 후 1396년 4월 漢城府의 행정구역을 정하면서 京中五部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의 서울은 협의의 의미로는 都城안의 京中五部를 일컫지만, 광의의 의미로는 성밖의 10리까지 포함하는 城底十里 또는 城底五里까지가 그 영역이었다. 즉 《續大典》에 의하면, 동쪽으로는 수유리·우이천·장위교·송계교에서 중랑포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중랑포에서 살곶이다리 : 신촌·두모포에서 용산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마포에서 망원정·성산·사천나루·돌곶이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돌곶이에서 대조리·연서역·아미산·보현봉에 이른다고 하였다. 성북구 일대는 도성 밖 동북쪽에 위치하여 東部의 崇信坊·仁昌坊에 속한 城底十里 지역이었으니, 현재 貞陵洞 408번지 길가에 서있는 城底五里定界牌는 이같은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는 자료이다. 초기의 성저십리에는 인가가 드물었고, 다만 동대문 밖과 서대문 밖에 약간의 취락이 있었을 뿐이다. 특히 성북구 일대는 서울의 진산인 北漢山의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치면서 곳곳에 석가봉·형제봉·성덕봉·화룡봉·잠룡봉·거수봉·옥녀봉·일출봉·천장산 등 크고 작은 봉우리가 형성되어 있고, 그 사이로 가파른 계곡이 자리잡아 평야가 거의 없기 때문에 취락이 발달할 소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조건 때문에 경치가 수려하여 옛부터 도성민들이 이곳을 자주 찾아 소풍하는 명소로 손꼽혔다. 더구나 의정부·포천 방면에서 도성으로 가기 위하여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이기 때문에 계곡이나 고개마루에는 휴식처가 마련되고 있었다. 산간지대가 대부분인 성북구에 평야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성북천 가의 三仙坪, 안암천 일대, 중랑천·수유천 일대로서 농경지로 일구어지고 있었다. 평야가 일부 있었다고 하지만, 농경생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지형적 조건을 살려 양잠이나 과수가 보다 널리 행해졌다. 현재 성북동 성북국민학교옆 길가에 세워진 先蠶壇址는 이 일대에 뽕나무가 많아 양잠이 발달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고, 먹골배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배·복숭아·앵두·자두 등이 풍성했던 곳이다. 특히 성북동 일대에는 복숭아 나무가 무성하여 北渚洞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漢京識略》에 의하면, 성북동 일대에는 맑은 계곡과 얄은 언덕을 끼고 사람들이 모여사는데, 복숭아를 심어 생업을 삼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매년 봄이면 놀이를 나온 사람들이 계곡 사이를 메워 복숭아꽃을 즐기고, 또 여름이면 복숭아를 맛있게 먹었다고 하였다.《東國與地備考》에 의하면,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桃花洞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도화동·紅挑洞·복사동이란 자연부락의 이름이 남아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朴齊家도 이곳의 복숭아나무를 주제로 시를 읊었는데, 그는 그 재배를 실학적 관점에서 권장하였다. 城北洞계곡 막바지에는 본래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肅靖門이 있었다. 속칭 북대문이라고 하는 숙정문은 건립된 지 곧 폐쇄되는데, 그 이유는 풍수지리상으로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보다 근본적 이유는 도성으로의 출입문으로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도성에서 의정부, 포천, 원산 등으로 가는, 혹은 반대로 경원가도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로서 숙정문을 통과하려면 성북동 골짜기로 한참 돌아가야 한다. 이에 대하여 혜화동과 삼선동을 잇는 東小門을 이용하면 빠르고 편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동소문을 주로 이용하였고, 숙정문을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이로 인하여 숙정문이 폐쇄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숙정문이 폐쇄되면서 東小門의 역할이 커졌으니, 동북지방에서 도성으로 출입하는 길목으로서 중요시된 것이다. 동소문이란 惠化門의 속칭으로 19세기에도 東小門外契라는 동리 이름이 있었다. 지금의 東小門洞·東仙洞·三仙洞·敦岩洞 일대를 일컫는데, 그 가운데로 城北川또는 安岩川이란 개천이 성북동 골짜기에서 흘러 청계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개천이 구비구비 흘러가는 곳 남·북에는 노송이 울창해 산자수려하였고, 그 부근의 저지대는 평평하고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있어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군대의 연병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말기의 문인 李齊九는 늦은 가을날 이 일대를 지나면서 주변 경치를 시로서 읊었다. 小靑門 밖 나서니 城市 티끌 볼 수 없고, 나귀 등에선 붉은 夕陽이 이글거린다, 들판의 국화 시냇가의 단풍이 서로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이루었구나. 東小門洞에서 조금 더 밖으로 나가면 三仙洞에 이른다. 삼선동에는 성북천이 이곳에 이르러 평평한 들판을 만들어 예로부터 三仙坪이라 하였는데, 원래 그 이름은 동리 남쪽 옥녀봉 봉우리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세 신선이 玉女와 놀았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경개가 수려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신라때 화랑들이 섬신을 단련한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 화랑도는 國仙徒라고도 불리웠다. 이 일대는 평평하고 넓어서 조선시대에도 箭串坪과 더불어 군사 훈련장으로 쓰였다. 삼선동 동쪽으로 산비탈에 위치한 동리가 敦岩洞인데, 이곳 역시 조선시대 崇信坊에 속한 성저십리 지역이었다. 돈암동 명칭의 유래가 된 미아리 고개는 본래 되너미고개로 불리웠는데, 因子胡亂때 오랑캐, 즉 되놈이 서울에 침입할 때 이 고개를 넘어왔기 때문이라 한다. 되너미고개 이름을 한자로 敦岩峴 또는 狄踰嶺이라 하였으며, 그리하여 동리 이름도 돈암동이라 하였다. 이 고개는 여러차례 깎여져 낮아지고 그 폭도 넓어졌지만 본래는 몹시 가파르고 험준한 고개였었다 지형적으로 볼 때 도성의 범위가 이곳까지임을 분명히 느끼게 하는데, 도성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가자면 이 고개가 마지막 힘든 장애물이었고, 그 다음부터는 평탄하여 끝에 이른 고개, 마지막 고개라는 뜻으로 또는 경사가 몹시 심하여 밥을 되먹는 고개라하여 되너미고개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고개를 넘는 길은 도성과 경원가도를 잇는 가까운 길이어서, 사람들은 비교적 평탄한 鍾岩洞 쪽보다는 이 길을 잘 이용하였다. 돈암동 남쪽의 普門洞도 지형적 조건이 취락 형성에 적합하지 않았다. 동쪽의 안암동 산자락, 서쪽에 삼선동 산자락 사이에 있어서 지형이 긴 골짜기로 되어 있어 예로부터 절이나 신당이 자리잡는 곳이었다. 본래 동대문구 신설동에 속해 있었는데, 신설동 역시 조선말기에 그 명칭이 보이는 새로이 설치된 동리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89-392쪽
  • 1. 産業. 經濟의 立地條件(2) 城北區에 취락이 형성될만한 곳은 비교적 평탄한 안암동·종암동 일대였다. 安岩洞은 문헌상 나타나는 서울의 洞名중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다. 李成桂는 한양으로 천도한 이듬 해인 太祖 4년(1395) 자신의 萬年幽宅을 찾아 果川·廣州 등을 돌아보고 그해 9월 28일에는 安岩洞에 거동하였다. 그 이듬해 여름에도 왕비 神德王后 康氏가 세상을 떠나자 그 陵地를 찾아 안암동에 내왕하였다. 그 지세가 풍수지리상으로 좋았기 때문인데, 그후 이곳은 世宗의 다섯째 아들인 廣平大君의 세거지였으니 명당이었음이 알려졌음에서였다. 실제로 광평대군의 자손은 그후 번창하여 李氏王族 중에서도 후손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이 일대의 농토가 비옥하였음은 태종 때의 제상 朴訔의 일화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인근의 典農洞·祭基洞·龍頭洞 일대에는 조선시대 국왕이 솔선수범하여 농사짓는 모습을 보여주던 籍田과 농사가 잘되기를 국가적으로 기원하던 先農壇이 있었다. 이로써 볼 때도 이 부근에는 농경이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음 鍾岩洞은 그 서편 산자락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한자로 鍾岩 또는 鼓岩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 서쪽은 산으로 되어 있어 옛날에는 山林이 울창하였으나, 동쪽 일대는 貞陵川 연변으로 비옥한 농경지가 형성되어 예로부터 소출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東國輿地備攷》에 의하면, 북바위 부근에 있는 논과 밭은 소출이 많기로 유명하여, 농부의 자격을 결정하는 의미로도 쓰여 「북바위 전답을 아느냐 ? 」고 물어서 대답을 못하면 「농군으로서 그것도 모르는 것을 보니 가짜 농군임에 틀림없다」고 하여 동리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慶州 金氏와 慶州 鄭氏가 집단적으로 集村部落을 이루고 있었다. 농경지는 石串洞·長位洞 일대에 비교적 넓게 펼쳐 있었는데, 벼농사가 주로 행해졌다고 한다. 사람이 모여 생활하기 좋은 立地條件은 食生活을 쉽게 해결할 수 있고, 음료수가 풍부해야 하는데, 전근대사회에서는 농업의 가능성이 높은 지형조건이 우선되었다. 그러나 점차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회경제적 조건이 취락의 입지를 결정함에 있어서 더 큰 영향을 준다. 그 가운데서도 교통의 편리함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을과 마을사이에 교류를 촉진시키고, 인구의 집중을 유발한다. 따라서 교통조건은 유통경제 발달의 전제조건이었다. 조선시대 성북구 지역에 있었던 樓院, 즉 다락원은 본래 서울 외곽의 한적한 院村이었다. 이곳은 본래 한양에서 강원도나 함경도로 오가는 길손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었으나, 조선후기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최대의 소비도시인 한양으로 많은 물화가 공급되면서 그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매우 번창한 위성도시로 성장해 갔다. 더구나 이 지역은 도성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어 市廛들이 특권으로 행사하던 禁難廛權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私商들의 자유로운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사상들은 이곳의 입지조건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李成桂가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類龍山에 도읍을 정하려고 몸소 순행까지 하였다가 이를 그만두고 漢陽으로 도읍을 정한 것도 교통운수가 편리하였기 때문이었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한강을 끼고 있어서 전국 각지에서 육로·수로가 모두 용이한 지점이었다. 그리하여 교통운수 조직이 모두 한양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역원제와 조운제가 그것이었다. 북에서는 평안도·함경도에서 남에서는 전라도·경상도에서 출발하는 파발·조선 등이 모두 서울인 한양으로 집결되었다. 더구나 한양은 당시 최대의 소비도시로서 전국의 물화가 이곳으로 공급되었다. 이 시기의 한양 인구는 20만명 내외로서 그 대부분이 소비인구이었다. 함경도의 북어, 제주도의 말총 등이 모두 한양으로 공급되어야 했다. 이를 매개하는 상업은 본래 도성 안의 市廛商人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그 수요와 공급 물량이 크게 증대하면서 시전상인들이 이를 감당하기에는 벅찼고, 이를 기화로 私商들이 상거래에 참여하였다. 사상인들은 처음에는 七牌·梨峴·龍山 등지를 근거지로 하였으나, 점차 그 영역을 확대하여 松城·樓院등 교통의 길목에서 전국 각지에서 들어오는 물화를 매점매석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어물, 특히 북어의 수요가 증대하였는데, 그 공급로는 경원가도였다. 함경도 元山場에서 수합된 북어는 말 잔동에 바리바리로 실려 철령을 넘어 서남쪽으로 길을 재촉하다가 서울 가까이에 위치한 樓院에 이른다. 이에 사상인들은 누원으로 모여들어 이를 매점하니, 누원은 장사치들과 이에 어울려 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칠패·이현 뿐 아니라 송파의 상인들도 이곳으로 모여 들었다. 누원이 이렇게 성시를 이룬 것은 교통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누원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오면 미아리 삼거리에 이르고, 여기에서 돈암동이나 종암동 두 갈래로 나뉘어 도성에 들어가는데, 상인들은 시전의 간섭을 피하기 위하여 종암동 쪽으로 가서 동대문의 梨峴 상인과 접촉하거나, 계속 남으로 향하여 뚝섬·송파 상인과 연결하기도 하고, 한강을 경유하여 용산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한편 《擇里志》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는 입지조건으로 地理·生理·人心·山水의 네 가지를 꼽고 있는데, 특히 교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조건을 갖춘 곳은 그리 흔하지 않으나, 대체로 계곡이나 강변이 적당하고 해변이나 계곡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도 한강변과 그에 속한 계곡지대를 구체적으로 주목하였다. 한강변의 용산, 마포, 송파 그리고 누원은 그러한 곳들이었다. 서울 서북쪽 城底十里였던 성북구 일대는 북한산 기슭에 위치한 계곡지대로서 논과 밭이 많은 편은 아니나, 地理·山水 등 취락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이전부터 취락이 형성되고 있었다. 더구나 京元街道의 길목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하였기 때문에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는 그 위치의 중요성이 제고되어 위성도시화할 가능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한천·중랑천·정릉천 주변에는 개활지가 형성되어 농경이 영위되었고, 성북동·정릉동·장위동 등 구릉지대에는 과수 재배의 입지조건도 양호하여 대규모 과수재배단지의 가능성도 지니고 있었다. 요컨대 성북구 일대는 여러가지 면에서 취락의 입지조건이 제공되고 있었으며, 특히 교통의 요충지이어서 18세기 이후로는 위성도시로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던 곳이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2-395쪽
  • 2. 農耕生活 1) 농업의 역사 城北區지역은 지형적으로 구롱과 계곡이 많아 농업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성에서 좀 떨어진 지역, 예컨대 정릉천·한천 연변에는 크지는 않지만 퇴적평야가 형성되어 일찍부터 농경이 행해졌는데, 북바위 전설에 의하면 곳에 따라서는 비옥한 농토도 있었다. 城北區지역을 포함한 서울 주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先史時代부터였다. 뗀석기를 이용하여 동물을 사냥하거나 나무열매를 채집하며 식생활을 해결한 舊石器人들도 이 지역에 거주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그 증거는 분명치 않다. 이 지역에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마련된 것은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본격화되고 있다. 그것이 분명한 것은 이곳에서 멀지않은 주변 지역, 예컨대 동대문구 전농동, 성동구의 왕십리, 서대문구의 신촌, 그리고 강동구의 암사동, 하남시 미사동, 양주군의 동막동, 고양시 일산 등지에서 당시의 주거지가 집중적으로 발견되었고, 농기구로 쓰였을 돌괭이, 돌보습 등이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경다운 농경은 靑銅器時代에 이르러서였다. 신석기시대에는 농경이라고는 하지만 원시적 농경이었는데, 청동기시대에는 농경을 더욱 발전시켜 돌도끼나 홈자귀, 팽이로 땅을 개간하여 독식을 심고,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를 하였다. 농업은 종래의 피, 조와 아울러 콩·보리 등 밭농사가 중심이었지만,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도 행해졌다. 이 시기의 출토물들은 토기를 비롯하여 도끼, 반달돌칼, 거울, 칼 등이 중심이었는데, 성북구 일대에서도 직접 출토되었다. 즉 貞陵川주변에서는 고인돌과 더불어 청동기유물들이 다수 수집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한강유역 일대는 확실히 선사시대부터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지역은 북한산의 정기와 한강의 힘이 합쳐진 천혜의 분지로서 지형, 기후상으로도 사람들이 살기 좋은 땅이었다. 한강 하류의 하상은 해발고도가 낮고 토사가 과도하게 퇴적하여 항상 홍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넓은 때 沖積平野는 생활터전으로서 그 토질이 양호하여 농업에 적합하였고, 그리하여 선사시대 이래로 취락이 발달하였다. 더구나 고대도시의 입지조건인 방어와 교통이 두루 조화된 곳으로서, 북한산·수락산·불암산·도봉산 등 북쪽의 산악들이 방어벽이 되어 주었고, 한강은 내륙과 바다를 연결시켜 주었다. 1977년에 발굴된 여주군 혼암리의 취락지에서는 반달 돌칼과 무문토기 동의 유물과 함께 炭化米가 출토되어 벼농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물론 이 시기에 이르면 조·수수·보리 동의 밭농사는 보다 널리 보급되어 갔다. 그 후 철기시대에 이르면 농경이 보다 본격적으로 발달하여 철제의 농기구가 다양하게 개량되었고, 작물의 종류도 다양화되어 갔는데, 그것은 강남구 역삼동의 주거지나, 송파구 풍납동, 양평군 대심리의 治鐵趾 출토의 유물에서 입증되고 있다.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한강 유역에서는 伯齊라는 새로운 세력이 기존의 馬韓세력과 각축을 벌이면서 영역을 확장해 갔다. 북방유이민으로서 한강유역에로 남하한 백제는 마침내 전 한강유역의 부족사회를 통일하고, 통일왕국으로서의 百濟를 건국하였다. 한강 하류의 비옥한 평야지대는 백제사회 발전에 있어서 경제적 기반이 된 것이다. 한강유역의 개발도 백제사회의 발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백제는 이곳을 정치적·사회적 중심지로 삼으면서 토지의 개간과 수리시설의 확충에 힘써 당시 그 수확량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훨씬 다대하였다. 이는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 문헌이나, 부근에서 발굴된 유물·유적에서의 출토품이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백제가 한강 유역에 나라의 터를 잡은 것은 분명하지만, B.C 1세기 전후 溫祚集團이 처음으로 정착한 곳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후일의 백제도읍이었던 하남위례성에 앞서 한강 북쪽에 잠시 정착했다고 한다. 혹자는 세검정 일대를 비정하고도 있지만, 또 다른 의견은 미아리 또는 장안평이라고 한다. 후자의 견해가 근래에는 보다 설득력을 보이고 있는데, 河北慰禮城의 위치가 미아리 일대라고 하면, 성북구 일대는 그 관할이었음이 틀림없다. 지형적 여건이나 교통의 입지에서 볼 때 그것은 충분히 예상된다. 백제는 국가적 성장이 한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권농정책에 유의하였다. 溫祚王이래 역대 국왕은 직접 순행하며 농토를 개간하고 농업기술을 보급하며 농업생산력 증대에 힘썼다. 7세기에 이르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이 지역은 신라의 관할에 속하였는데, 신라 역시 농업을 중시한 나라였다. 당시의 지명에 제방과 저수지를 뜻하는 이름이 많았으며, 인근의 고분에서는 가래, 쇠시랑, 쟁기 등 철제농기구가 다수 출토되고 있어서 농경이 자못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서울에 南京이 설치되니, 성북구 일대는 남경의 관할에 들었다. 이때에는 牛耕에 의한 심경법이 일반적으로 행해져, 이 지역에서도 우경이 널리 행해졌고, 그 결과 생산력이 보다 증대되고 있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5-397쪽
  • 2) 農耕의 본격화 농경이 본격화되는 것은 조선왕조가 1394년 漢陽으로 도읍을 정하면서였다. 한양이 수도가 되면서 城北區일대도 그 관할에 속하였지만, 이 지역은 도시적 성격 보다는 농촌적 성격을 계속 유지하였다. 조선왕조는 한양으로 천도함과 더불어 수도의 행정구역을 漢城府로 승격, 특별시로 삼고, 그 구역을 다시 동·서·남·북·중의 5부 52방으로 나누어 도시 규모를 갖추고 그 둘레에 성곽을 쌓았다. 이를 都城이라 한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도성안에만 모여 살기에는 비좁았다. 그리하여 벌써 世宗 때 도성 주변까지도 한성부의 관할로 설정, 이를 城底十里라 하였다. 성북구 일대는 동부 崇信坊에 속하였다. 그런데 성저십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도성 안의 사람들과 달리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어찌보면 성저십리는 京中五部의 식량·채소의 기지였다. 그리하여 한성부에서는 성저십리에서의 농경을 권장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歡農官을 파견하였다. 즉 세종 10년 국가는 한성부의 건의에 따라서 성저 각 마을을 재편, 30家를 1里로 하여, 2里마다 권농관 1인을 임명하였다. 권농관의 임명은 농업기술을 보급하여 생산력을 중대시킴에 그 의도가 있었다. 본래 수도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주위에는 도시적 요소와 농촌적 요소가 복합되어 있는 環狀의 중간지대가 나타나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郊를 성저십리라고 했던 것이다. 근대화 이전까지 郊 지역은 고유의 지역구조와 기능, 그리고 특색있는 경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시의 보호막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성북구 일대는 그러한 특성을 특히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전근대사회에서 도성의 공간구조는 성 안의 시가지 대 성 밖의 전야, 또는 문화경관대 자연경관으로 대비되며, 성곽은 양자의 경계선 역할을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서울은 지형 조건과 위치상의 특성으로 인하여 성 안과 성 밖이 결합되어 조화를 이룬 독특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즉, 서울이라 하면 흔히 성 안 5부 지역을 일컫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성 밖의 城底十里까지 포함시키고 있었다. 城底十里라고 하여도 엄밀히 10리까지가 아니고, 지형상 때로는 5리까지일 수도 있고, 때로는 20리까지일 수도 있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동쪽으로는 양주의 경계까지 15리, 동남으로 광주의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 한강까지 5리, 서남으로 시홍의 경계까지 15리, 서쪽으로 양천의 경계까지 15리, 서북으로 고양의 경계까지 20리, 북쪽으로 양주의 경계까지 20리에 이르렀다. 이로써 보면 그 면적은 城內보다는 城外의 지역, 즉 성저십리가 더 넓었다. 그런데 성저십리의 사방 경계에는 각각 四山禁標를 세워 이 지역의 자연환경 보존을 위해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첫째, 이 지역에 묘를 만들 수 없고, 둘째, 소나무를 도벌하면 엄벌에 처하고, 세째, 나무뿌리나 토석을 채취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규제조처로 인하여 성저십리에는 큰 취락이 발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농경도 그리 발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한양의 인구가 20만명을 넘게 되면서 그들을 위한 식량과 연료가 비례적으로 막대하게 공급되어야 했다. 당시 기본적인 식량이었던 쌀·콩 등 곡물은 정부가 농민들에게서 징수한 세곡과 재경지주의 농장에서 올라오는 소작료로 충당하였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양국은 近郊 지방에서 공급 되었으니, 광주·양주·김포·고양 등지는 그러한 곳이었다. 성북구의 종암동·안암동·장위동·석관동·월곡동 둥지에는 비옥한 전답이 분포되어 있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7-399쪽
  • 농토가 비옥하고 인근에는 산천경계가 수려한 북한산·도봉산·수락산 등이 있어 조선초기부터 성북구 일대에는 양반들이 정착하였다. 특히 사대부들은 복잡한 도시보다는 한적한 변두리에서 시문을 익히며 산수를 즐겼다. 그러나 벼슬을 단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양반들이 서울 주변에 모여 살았다. 《成宗實錄》에 의하면, 근교에 농장을 가지고 있는 양반이 많았다고 한다. 《擇里志》에 의하면 양주·포천·가평·영평 등을 포함하는 東郊와 고양·적성·파주·교하 등을 포함하는 西郊에 사대부가 많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한양 조씨, 광주 이씨, 양천 허씨, 여흥 민씨, 이천 서씨, 안산 김씨 등이 그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종암동 안말에는 경주 김씨와 경주 정씨가 집단적으로 모여 살았고, 안암동의 궁말에는 광평대군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그리고 성북동 골짜기에도 논골이라 하여 전답이 있었는데, 그 부근에는 조선후기 이조판서를 지낸 沈相應의 별장이 있었다. 또 월곡동에는 여흥 민씨가 큰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이웃에 있는 석관동·장위동에는 넓은 별판에서 벼농사가 잘되었는데, 특히 장위동에서는 대규모의 농장을 갖고 있던 해평 윤씨가 세도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성북구를 비롯한 城底十里의 近郊에서는 쌀·보리·콩 등의 주곡 보다는 채소·과일 등 원예농업이 더 발달하였다. 최대의 소비도시 한양에서 대량으로 소비되는 채소·과일 등은 원거리 수송이 불가능하였으므로 땔감과 함께 주로 근교지방에서 공급되었다.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러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채소·과일의 수요가 증가하였으며, 이에 따라 개간이 가능한 근교의 토지는 거의 菜田으로 바뀌어져 갔고, 성북구 일대와 같은 구릉지대에는 과수 재배 단지가 조성되어 갔다. 채소·과일은 그 수요가 증대하면서 목화, 담배, 약재 등과 함께 상품작물로 주목되었으니, 조선후기에 이르면 여러가지의 사회적 배경을 토대로 농산물의 상품화가 촉진되었고, 그것은 농업경영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상이었다. 16세기 이후 도처에 생겨난 場市가 농촌경제와 연결되면서 농산물의 상품화가 널리 이루어져 갔다. 농민들은 소득을 보다 높이려고 경영을 다각도로 모색하여 생산성이 높고 상품성이 높은 작물을 재배하여 그 잉여 생산물을 장시에 내다 팔았다. 상품화를 위한 농작물의 재배는 주로 도시 주변에서 성행하였으며 특히 한양의 교외에서 유행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전주 부근의 생강밭, 평양 부근의 담배밭, 황주 부근의 지황밭, 개성 부근의 인삼밭 등에서는 그 수익이 논농사 上上田에 비하여 10배 이상이 된다고 하였다. 18세기 이후에는 상품작물의 재배가 지역별로 전문화되고 있었다. 한양의 근교에 원예농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은 소비시장이 가깝고, 한강과 그에 이어지는 크고 작은 하천 연변에 넓은 충적지가 많으며 교통이 편하고 인근에 풍부한 비료 공급원이 있으며, 특히 조선후기에는 밭농사에 대한 농업기술이 수리기술과 함께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즉, 시장 조건으로서 한양은 전술한 바와 같이 20만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조선시대 제1의 소비도시였으며, 한양 주민의 대부분은 식량, 과일, 채소, 연료 등을 성 밖에서 공급받아야만 생활이 가능한 非農民들이었다. 물론 17세기 경에도 한양 성안에는 아직 터밭이 군데군데 있어서 일부 주민들은 채소의 일부를 직접 재배하여 수요에 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관청에서는 주변의 빈터에 채소밭을 마련하여 관청의 하인들에게 가꾸게 하였는데 18세기 이후에도 그러한 현상이 일부 남아 있었으나, 그것은 부분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한양 부근의 전답은 대부분 한강과 그 지류에 발달한 충적토로서 토양이 비옥하였다. 이 토지의 대부분은 대부분 채소밭으로 이용되었는데, 뚝섬·송파·면목동·연희동 등의 채소밭이 특히 유명하였다. 성북구에서는 중랑천·한천·정릉천·안암천 등에 넓은 충적토가 형성되어 채소가 대규모로 재배되고 있었다. 한편 원예농업에서 유의할 것은 地力의 유지였다. 여름철 상레적으로 생기는 홍수로 인하여 상류에서 운반되는 비옥한 토양이 하천 연변에 퇴적하였으나, 連作으로 인한 지력의 감퇴를 방지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대책이 요구되었다. 한양은 근교의 농민들이 필요로 하는 비료가 산적해 있었다. 원예농업에 쓰이는 주된 비료는 糞尿였으며, 그 공급처는 인구가 조밀한 도시였다. 그러므로 근대화 이전에 있어서의 원예농업지역은 분뇨의 수송권과 그 범위가 일치하였다. 채전이 많았던 왕십리·뚝섬 뿐 아니라 면목동·수유리·장위동·석관동 등지에는 도성에서 운반해 온 거름 구덩이가 도처에 분포되어 있었다. 한양의 외곽지대, 즉 성저십리가 원예농업지대라고 하지만, 지역마다 토지 이용상 서로 다른 특정을 가지고 있었다. 채소밭은 동교와 서교에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왕십리·뚝섬 등에서는 배추·무가, 청파동·아현동에서는 미나리가, 청파동·이태원·용산 등에서는 호박·수박·토란이, 송파·양재·탄천 등에서는 오이·호박·무·배추·파 등이, 구파발에서는 시금치·쑥갓·상치 등이, 수유리·장위동·석관동 등에서는 무·배추·미나리 등이 재배되었다. 특히 석관동 천장산 밑 동리는 호박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00-403쪽
  • 3. 製造業 城北區를 중심으로 서울의 동북 지역 외곽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제조업이 발달하지 않았다. 전근대사회에서 이 지역은 구릉이 많고 계곡이 깊어 놀이터, 유원지로서 보다 주목되었고, 비교적 평야가 있던 한천·중랑천 등 지역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었을 뿐이다. 현재 성북구 지역은 주요 도로에 연하여 상가가 발달하고, 주민 생활과 직결되는 시장이나 서비스 산업이 존재할 뿐 공업은 매우 부진하다. 규모가 큰 공장은 거의 없다. 안암동·종암동에서는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석재 공업이 활발하였으나, 지금은 모습을 볼 수 없다. 도봉구·노원구 쪽으로 나가면 한천 연변에 미원, 삼양식품, 샘표간장 등의 식품공업 공장과 삼풍제지, 삼양펄프 등 제지 공장, 그리고 쌍용시멘트, 동아콘크리트, 삼화페인트 등 화학 공장들이 있어 준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는 정도이다. 또 노동력이 풍부한 미아동·상계동 일대에서는 주업 또는 부업으로 잡화, 의류, 가발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가내수공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에서는 그러한 공업이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따라서 성북구 지역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한편, 삼선동·종암동·길음동·노원동 등지에서는 석물을 채취하여 이를 가공하여 수요에 응하고 있었다. 삼선동이나 노원동 등지의 석재는 주로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쓰였다. 도성을 수축할 때도 이곳에서 돌을 채취하여 사용하였다고 본다. 도성은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므로 당초에 여름 장마로 무너진 곳이 많아 곧 石城으로 다시 쌓았다. 북한산성은 조선후기에 쌓은 석성으로, 본래는 성이 없었다. 이에 숙종 28년(1700) 우의정 申琓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여 북한산성을 수축하게 되었다. 병자호란때 우리가 패한 것은 서북의 국경을 지키지 못하고 도성을 버린 탓이며, 지금도 사람들은 변란이 일어나면 남한산성이나 강화성으로 피난할 것만 생각하는데, 그러한 곳은 급할 때 믿을 곳이 못된다. 창의문 밖 북한산은 석벽이 솟아있어 그곳의 산세를 이용하여 성을 쌓고 곡식과 무기를 비치하여 도성과 안팎이 되어 서로 힘을 다하여 굳게 지키면 비상시를 당하여 왕이 피난할 필요도 없다. 도성,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돌을 떠서 갖고 오는 것이 큰 일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노원동 등지에서 채석하였으나, 민폐가 심하여 삼선동·정릉동 등에서 채석하였다. 이같은 작업은 관아의 일이라서 제조업이라 할 수는 없지만, 석재 채취도 점차 민간인의 수요에 응해서 전문적 직업으로 자리잡아 갔다. 부역제가 무너지면서 양반들이라고 하여서 강제로 백성을 사역할 수는 없었다. 일을 시키거나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려면 그 댓가를 지불해야 했다. 일부 양반들은 주택을 호화롭게 짓고자 하였다. 건축 자재로 나무를 쓰기 보다는 석재를 원하였다. 안암동의 진석산이나, 길음동의 큰돌산은 양질의 돌로 이루어진 바위산이었다. 돌의 질이나 빛깔이 매우 좋아 세도양반이나 돈이 많은 부자들은 이곳의 돌을 이용하여 집을 짓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서는 일찍부터 채석업과 석재 가공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진석산의 돌은 일제때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에도 사용하였다. 그 밖에 성북구 일대에서는 조선시대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던 옹기 같은 것이 제조되었을 것이다. 옹기는 그 만드는 수법이 쉬어서 흙과 물과 햇볕이 좋은 곳이면 어디서나 제작되었다. 수유리·가오리·상계동 등은 그러한 곳이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성북구 일대에서의 제조업은 그 규모가 엉성하였고, 그 생산도 많지 않았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06-408쪽
  • Ⅱ. 日帝下의 産業經濟 1. 農林業 日帝時代, 오늘날의 城北地域과 그 이북의 일대(道峰區·盧原區)는 조용한 농촌지역이었다. 오늘날의 농촌처럼 市場에 내놓기 위한 채소같은 것을 가꾼 것도 아니고 花卉를 재배한 것도 아닌 순전한 米穀 單一排作의 농업경영이었고 겨우 副業이 있었다면 새끼·가마니를 짜서 換金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다행이 정릉천·성북천·중랑천 등의 河川이 흘러 水利는 괜찮은 편이라 水利組合의 필요도 없었지만 低地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미나리밭 등도 별로 없었던 것이 특색이었다. 일제시대 성북지역 농업에서 다행이었던 것은 당시의 성동지역이나 동대문지역에 넓은 면적의 東招땅이 있어 적지 않는 수의 日本人移住民이 넓은 땅을 개간 또는 매수하여 과수원이나 米作경영을 했는데 대해 城北地域에는 日本人농업경영 入植者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인 入植者가 거의 없었다는 점은 1934년 현재의 學齡兒童調査에서 崇仁面에 일본인 학령아동이 극히 적었다는 점에서 알 수가 있다. 즉 34년 당시 崇仁面內 城北里·貞陵里·水踰里·牛耳里·路十里·長位里·上月谷里·彌阿里 등지에는 단 한명의 일본인 학령아동도 존재하지 않았고 安岩里·樊里·石串里 등지에는 일본인 학령 아동이 있었으나 그 수는 남자 1명 또는 여자 1명 정도에 불과하였다는 점에서 일본인 농업 入植者가 殆無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일제하 城北地域 농업에서 다행했던 일의 또 한 가지는 洪水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제하에서는 1920년 大洪水와 1925년 乙丑年 大洪水때문에 城東·東大門·龍山·麻浦·永登浦 등의 지역에 굉장한 洪水被害를 보았고 수십만평의 농토가 매몰 유실되었는데, 城北地域은 中浪川邊의 극히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홍수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지대가 높아 홍수피해는 입지 않았겠지만 반대로 거의 매년 또는 隔年으로 되풀이 되었던 旱災에 의한 피해는 적지않게 있었을 것이다. 1933년 12월말 현재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城北지역이 속했던 高陽郡 崇仁面내의 戶口敎는 7,416호, 36,797호 였는데 그중에서 農林·牧畜業에 종사한 것은 1,431호, 8,489명이었다. 즉 33년말 당시 숭인면내의 농업자수는 戶敎에서 19.3%, 인구수에서 23.1%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위의 숫자는 오늘날의 東大門區 지역을 포함한 숭인면내 전체의 숫자였고 城北지역내만 보면 農業戶口敎 비율은 훨씬 더 높아진다. 예컨대 미아리의 경우 총호수 261호중 농업호수가 143호로 54.8%, 長位里의 경우 총 300호중에 농업호수가 208호 69.3%, 鍾岩里의 경우 총 호수 137호중 농업호수 43호로 31.4%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상에 열거한 里洞은 서울의 都心部에서 비교적 거리가 먼 지역들이며 도심에서의 거리가 가까운 里洞들, 예컨대 城北里의 경우 총 호수 589호중 농업호수는 불과 2호로 0.3%에 불과하며 敦岩里의 경우도 총호수 4,199호중 농업호수는 34호로 겨우 0.8%밖에 되지 않는다. 이상에서 미루어 일제하에서도 1930년대 부터는 서울에서의 거리가 가까운 郊外地도 非農業인구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土地도 또한 점포·주택·공장 등 非農業的 용도로 전환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상 일제강점기 城北地域의 농업이 비교적 평범하고 별로 특색이 없었지만 그래도 두가지점에서 약간의 특색이 있었다. 그 첫째는 바로 이웃한 崇仁面 龍頭里(현 東大門區 龍頭洞)에 京畿道 農事試驗場이 있었으며 같은 面內의 淸凉里에 조선총독부 農業試驗場이 있었다는 점이다. 龍頭里와 淸凉里에 이와같은 엄청난 기관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은 조선총독부와 경기도 당국이 서울 東部와 北部일대의 농업 전반에 관하여 높은 比重과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임을 알 수가 있고 또 이들 시험장에서의 여러 가지 시험 연구 결과는 바로 이들 시험장이 위치하는 高陽郡 崇仁面에서의 농사지도에 이바지했을 것이라 는 추측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특색의 둘째점은 京畿道 原蠶種製造所가 같은 崇仁面내의 祭基里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各道의 原蠶種製造所라는 것은 蠶業이 가장 盛한 곳에 가까이 있기 마련이다. 蠶種의 수송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또 日本유수의 섬유공업 회사인 鍾淵鉉續의 系列I場이 日帝下 韓半島내 여러 곳에 입지하고 있었다. 많은 조선여성들이 이 鍾淵鉉績 공장에서 노동력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鍾淵鉉續의 한반도내 공장들중에서 가장 최초로 1925년에 진출 입지한 곳이 바로 서울의 東大門밖, 高陽郡 崇仁面 新設里의 製絲工場이었으며 누에실(蠶絲)을 뽑아내는 대규모 근대적 시설이었다. 「뽕나무가 잘 크고 살진 꼬치가 커서 좋은 실을 얻게 하여지다」하는 기원을 드리고자 先蠶壇을 城北區 城北洞에 설치한 것은 朝鮮王朝 成宗 2년(1471년) 3월의 일이었다. 東小門밖에서 부터 미아리를 넘어 수유리·우이리로 이어지는 城北地域일대와 東小門밖 淸凉里·忘憂里로 이어지는 일대의 지역에는 조선왕조시대부터 양잠이 매우 盛한 곳이었고 그것은 日帝時代末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러므로 경기도 原蠶種製造所가 祭基里에 위치하였고 이 땅안 최초의 근대적 生絲工場이 925년에 崇仁面 新設里에 입지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城北地域 농촌이 한적하고 별로 이렇다할 특색도 없는 일반 농촌지역이었는데 대해 林業에서는 특색이 있었다. 그 첫번째 이유가 北漢山-貞陵을 거쳐 開運山으로 연결되는 일대, 北漢山아리랑고개에서 城北里 뒤 일대의 山林이 문자 그대로 深山幽各이었기 때문이다. 1937년 12월에 발간된 「京城府市街地計劃 風致地區指定資料調査書」에 의하면 당시의 城北町·敦岩町·安岩町 일대의 森林상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城北町일대 이 지역은 北岳의 東方에 연속된 山地 및 이것과 漢城城節과의 사이의 溪谷地帶로서 山腹斜面 및 溪谷間에 繁茂하는 松樹는 樹勢가 왕성하다. 또한 技葉色澤의 生氣는 三淸洞과 필적되는 것이다. 또 惠化門(東小門)밖 安岩川의 彎曲 東流하는 곳 南北測에 山地가 相通하여 古松이 울창하다. 이 부근의 低地를 三仙坪이라 칭하며 舊 韓國時代의 練兵場이 있던 곳이다. 현재 城北町에는 朝鮮時代의 先蠶壇을 설치하였던 장소가 있어 당시 여기서 蠶神을 모셨다고 한다 敦岩町 및 安岩町方面 이 지역의 北은 丘陵性山岳(貞陵山)에 의하여 둘러 싸였으며 府域境界에 접하고 東方은 祭基洞과의 중간에 座居한 一塊의 丘陵은 南北에 조금 길게 뻗어있음으로서 이 지역 전체의 地形은 대단히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山勢는 평범하지마는 그 中復이하에 밀생하는 松樹는 부근의 風致를 佳하게 하여 한층 閑靜한 區域을 이루고 있다. 또한 安岩町 丘陵의 南端에 古木이 울창하여 白書에 暗黑을 이룩하는 한 구획이 있어 그 동편인 新設町, 龍頭町方面에 對하여 爽快味를 주는 유일하고 중요한 風致林이다 그 密林의 北東에 따른 南面地에 巨刹 開運寺가 있다. 寺傳에 의하면 李朝太祖의 王師僧 ‘無學’의 開基라 하며 이 부근 극히 한정하며 또한 風致도 佳良하다. 龍頭洞의 平桓地에 한 小丘가 있다 이 지구는 현 京畿道農事試驗場및 總督府原蠶種製造所가 있는 곳으로서 松樹가 많으며 風致가 좋을 뿐 아니라 原蠶種製造所구내는 朝鮮時代國王이 親蠶의 規範을 보인 ‘東籍田’ 이 있던 장소이다. 또 丘上 松林에 에워싸인 곳에 ‘先農壇址’가 있다. 李朝時代에 農事를 위한 祭祝를 모시던 史蹟址이다. 위의 글로 당시의 城北地域일대의 森林이 얼마나 우거져 있었고 또 그 범위가 얼마나 넓었던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 일대의 森林이 이렇게 울창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와 경기도에서도 이 일대 山林의 보호와 육성 그리고 새로운 造林에 역점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敦岩里에는 國有森林保護區사무소가 있었고 鍾岩里에는 京畿道가 직영하는 苗圃場이 있었다. 이 묘포장의 넓이는 9,682평이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28-432쪽
  • 2. 商工業 서울에 市街地計劃令이 실시되는 1936년까지 서울 都市計劃의 根幹을 이룬 것은 1912년부터 20년대까지에 실시된 이른바 市區改正事業에 의한 街路網整備와 1913년 2월 25일자 조선총독부령 제11호 《市街地建築取締規則》이라는 것이었다. 이 市街地建築取締規則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建築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당시는 건축허가 업무가 경찰업무였기 때문에 이 規則도 경찰법령이었다. 그런데 이 규칙 제6조에 「惡臭·有毒가스 또는 多量의 煤煙 또는 粉塵을 발사하는 工場 기타 公安衛生上 危害를 미칠 염려가 있는 건물은 제1조의 시가지중 특히 지정한 지역내가 아니면 이를 건설할 수 없다」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朝鮮總督府는 1913년 7월 17일자 告示제220호로 《市街地建築取締規則》의 대상 市街地를, 京畿道 京城府內 中部·東部·西部·北部의 전역과 龍山面·漢芝面의 전지역 그리고 仁昌面내 일부 및 崇仁面내 일부 지역으로 告示하고, 이어 제6조의 지역(공장을 건축할 수 있는 지역)으로 ① 城壁外의 지역 중 西大門停車場에서 漢江에 이르는 鐵道線路 以東의 지역을 제외한 地域, ② 城壁內 東部 北廟에서 新橋洞 新橋에 이르는 無名川流域, 新橋洞 新橋에서 於義洞 道路를 거쳐 東大門通에 이르는 線의 以東地域 등으로 발표한다. 그러나 이때 결정한 對象 市街地 범위는 너무나 광범하고 동 제6조 대상지역은 너무 細分化되었다고 판단한 것인지 다음해인 1914년 5월 30일자 總督府告示 제89호로써 建築取締規則이 적용되는 市街地의 범위를 「京鐵道 京城府」로 한정한 데 이어 準工業地域에 해당하는 제6조의 地域을 ① 城壁外의 地域. 다만 西大門停車場에서 漢江鐵橋에 이르는 鐵道 本線路 以東의 地域을 제외한다. ② 城壁內 惠化洞·東崇洞·梨花洞·忠信洞·鐘路 六丁目·黃金町(乙支路) 六丁目·동 七丁目. 다만 黃金町(乙支路) 六丁目·七丁目內 電車道路 以南의 地域을 제외한다. 라고 지정한다. 즉 1936년까지 서울에서 工場建設이 허용된 지역은 오늘날의 서울驛을 중심하여 京釜線·京義線철도의 서쪽 지역 일대와 鐘路·乙支路의 6·7가 以東의 지역, 그리고 惠化洞·東崇洞·梨花洞·忠信洞 등이었으며 그 중 乙支路 6·7가의 電車路線 以南은 당시에 日本人들의 家屋이 신축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이 지역은 工場의 立地가 제한된 것이다. 京城市街地計劃令에 의한 地域制가 공포된 것은 1939년 9월 18일이었는데 이때에는 이미 오늘날의 城北地域일대는 京城府域內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런데 1939년의 地域制에 의하면 里門洞의 中浪川邊일부가 공업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외에는 城北地域일대에 걸쳐 工業地域은 전혀 지정되지 않았다. 즉 당시의 京城府당국은 北漢山의 맥을 따른 북부일대의 지역에 공장이 들어서는 것을 禁忌한 것임을 알 수가 日帝下 城北地域에는 이렇다 할 제조업의 立地가 없었다. 1934년 당시의 조사에 의하여 성북지역에 소재한 공장을 열거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433쪽 표 참조). 일제하 城北地域의 제조업에 연관하여 부기해 둘 것은 1925년에 같은 崇仁面內 新設洞에 鐘淵紡續柱式會社의 東大門工場이 입지했다는 점이다. 이 공장은 누에고치를 풀어서 生絲를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당시 이 땅안 屈指의 큰 공장으로서 200명이 넘는 직공을 쓰고 있었다. 이 공장은 鍾岩洞·安岩洞 일대에서는 步行距離내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勞務者 특히 17·8세의 젊은 노동층이 女工으로 이 공장에 취업했을 것이다. 제조업이 이상과 같은 상태에 있었으니 商業도 발달할 수 없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제하의 城北地域에는 단 한개의 市場도 金融機關도 존재하지 않았다. 東大門市場과 新設洞, 惠化洞의 商街나 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1936년 12월말 현재로 京城商工會議所에서 발간한 《朝鮮會社表》라는 큰 책자에는 당시의 全 朝鮮內 4,848개의 會社(本社)와 본사는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 두고 支店만 조선에 두었던 150개 支店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자에 수록된 회사 중 성북지역에는 아래의 3개밖에 없었다. (合資) 德興社, 軟岩洞 391∼3, 1935년 창립, 會社代表 崔善益, 자본금 15,000원. (合資) 東村家畜商會, 敦岩洞 248, 1933년 창립, 회사대표 稅所珪介 자본금 5,000원. (合資) 平山救場, 敦岩洞, 1929년 창립, 회사대표 香川守行, 자본금 90,000원. 위 3개의 회사 중에서 첫번째의 德興社는 「穀物·線絲·線布·絹布 및 土地의 賣買·金融과 위에 附帶하는 業務」가 회사설립의 목적이었다. 아마 이 회사는 한편은 각종 穀物을 판매하고 한편은 각종 布木·섬유류 등을 판매하면서 金融業도 한 종합적 상업회사였던 것 같다. 다음의 洞村家畜商會라는 것은 種兎 및 토끼가죽을 주로 하면서 돼지·닭 등 각종 家畜의 사육·판매를 業으로 한 회사였고 마지막의 合資會社 平山收場이라는 것은 젖소(乳牛)의 사육과 牛乳의 판매를 業으로 한 회사였다. 1920년대 및 30·40년대만 하더라도 우유를 마시는 일은 극히 上流層에 국한했고 일반인은 평생 우유 한잔 마시지 못했던 시대였었다. 이렇게 商業面에서도 보잘 것이 없었던 城北地域이 그 모습을 달리해 간 것은 市內버스가 달리게 되고 마침내는 敦岩洞까지 電車가 달리기 시작한 때 부터의 일이다. 1931년 당시 京城府內의 인구수는 36만 5천이었고 자동차 보유대수는 200대도 안되었다. 또 1934년 현재로 高陽郡 崇仁面內에는 한대의 자동차도 없었으나 당시의 이곳 주민이 서울市內로 가려면 徒步가 아니면 하루에 한 두번씩 밖에 안오는 市外버스, 그리고 自轉車였다. 1932년 12월말 현재의 자전거 대수는 城北里 45대, 安岩里 75대, 鍾岩里 33대, 敦岩里 112대, 貞陵里 58대, 里門里 14대, 長位里 39대, 石串里 6대, 上月谷 4대, 下月谷 18대였다. 이러한 時代였으니 市內버스가 들어 온다는 것은 하나의 空間革命이었다. 京城市內버스가 敦岩洞까지 들어간 것은 1932년 3월에 그때까지 京城府營으로 운행되던 市內버스事業을 京城電氣柱式會社에서 引受하게 된 후부터의 일이다. 이때부터 京電은 電車가 다니지 않던 곳에 市內버스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惠化洞에서 敦岩洞네거리까지 不定期的으로 버스를 운행한다. 그리고 이 버스 승객이 점점 더 늘어가고 敦岩洞에 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되어 인구수가 늘자 鐘路 4가에서 昌慶苑을 거쳐 惠化洞 로타리까지 다녔던 電車를 敦岩洞 네거리까지 연장한다. 1941년 7월 12일의 일이였다. 市內버스가 다니고 電車가 다니게 되면서부터 三仙과, 敦岩洞네거리 등에 점포가 들어서고 市街地化가 진행되게 된다. 敦岩洞버스 종점이 있던 네거리옆에 敦岩 公設市場이 설치된 것은 1938년 또는 39년경이었다고 당시의 주민이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의 말에서 40년대의 前半期는 1937년의 中日事變 발발, 1941년 12월의 太平洋戰爭 발발로 모든 물자가 결핍되어 기존의 점포도 문을 닫고 轉業을 했던 時代였으니 城北地域의 시가화에도 限界가 있었다. 이 지역의 商街形成, 市街地化는 결국 光復이후로 넘어가야 했던 것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32-435쪽
  • Ⅲ. 光復後의 産業經濟 1. 農·畜産業 광복후 1960년대까지도 서울市內 변두리에는 많은 農業人口가 있었고 농업경작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1961년에 발간된 제1회 서울市 統計年報를 보면 1960년 현재로 城北區 관내에 농가 호수 984, 농가인구 4,725인, 田沓 합계 651정이 집계되고 있다. 또 그렇게 성행하지는 않았지만 畜産業을 경영하는 자도 있어 역시 60년말 현재로 畜牛 78, 馬匹 11, 돼지(豚) 137두, 닭 546首 등으로 집계되고 있다. 1950∼60년대에 걸쳐 城北區일대에 養鍵등이 盛했다는 것은 1958년에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城北區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된 徐範錫의 직업이 養鍵業이었으며 그는 당시 貞陵洞 山 1번지 자택에서 양계를 크게 하고 있었던 것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城北區에 農業이 盛했다는 것은 1960년대 말까지, 그것도 道峰·牛耳·樊 등의 각동이 이 區관내에 포함되어 있을 당시까지만의 일이다. 道峰區가 分區되어 나간 후인 1973년 말 현재의 통계에 의하면 성북구 관내 農家戶敎는 불과 22가구 뿐이며 그 22가구도 沓作·田作은 하나도 없고 果樹가 1, 소채가 21로 집계되고 있으며 畜牛·養蠶 등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니 이미 70년대에 들어와서는 城北區관내의 市街化는 거의 완료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1980년 이후의 통계에는 성북구 관내에는 단 한개의 과수원도 단 한필지의 소채밭도 집계되지 않고 있으니 城北區의 농·축산업은 1970년대의 중반에서 완전히 종말을 告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36쪽
  • 2. 商業 城北區내 상업의 특징은 인구가 증가하고 주택이 들어서게 되자 市場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점이다. 敦岩洞에는 1930년대 말부터 公設市場이 있었지만 오늘날 城北區관내에 있는 시장들의 거의가 자연발생적이었다. 安岩洞·普門洞에 다수의 인구가 모이게 되자, 普門市場이 생겼으며 鍾岩洞에도 미아리에도 석관동에도 정릉에도 시장이 생겼다. 1941년 4월 현재로 발간된 城北區 行政區域地圖에 나타난 市場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열해 보았더니 아래와 같다. 石串市場·長石市場·새石串市場·새長位市場·長溪市場·月谷市場·월곡結合市場 農水産物直販場(월곡3동)·동신商街·鍾岩市場·미아市場·吉音市場·동경프라자·普門市場·敦岩市場·三仙市場·貞陵市場·貞陵 4동市場·청수시장 현재 城北區 産業課에 등록되어 있는 許可받은 시장은 모두 14개이며 재래시장 12, 백화점 1, 쇼핑센터 1로 되어 있다. 〈표 2〉 와 같다(438쪽 표 참조). 이 표에 의하면 재래시장 중에서는 면적에 있어서나 점포수에 있어서나 종암시장·보문시장·돈암시장 등이 대규모 시장이고 三仙市場·石串市場·청한상가 등이 뒤를 따르고 있다. 또 종암 1동의 청한상가와 吉音 1동의 동경유통은 流通業근대화의 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1963년 11월에 설립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歷史를 지녔고 1985년 8월에 기업을 공개하여 上場法人이 된 新世界百貨店이 미아店을 개설한 것은 1988년 8월 30일의 일이며 그것은 현대적 百貨店 郊外部(혹은 副都心) 開店의 효시가 되었다. 新世界百貨店 미아店의 개설로 특히 미아리고개 이북 주민들의 高級商品 구매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37-438쪽
  • 3. 製造業 城北區관내에는 都市計劃上 準工業地域이 전혀 지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動力을 사용하거나 騷音·振動 등을 수반하는 제조업은 입지할 수 없는 지역이다. 그러므로 성북구 관내에 있는 제조업은 섬유류·被服제조·假髮제조업, 그리고 醫藥品 제조업 등이 주류를 이룬다. 1) 假髮·衣類·被服·紙類 등 製造業 섬유·피복제조·가발업 중에서 규모가 큰 것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순서 없음). ○ (株) 金剛賢易 安岩洞 4가 23-2 1966년 2월 8일에 설립된 假髮제조·수출업체로서 1990년 현재 자본금은 5천만원이나 年間 200억원 가까운 수출액을 올리고 있는 가발업계의 중진이다. 주요시설로는 포스타머신 37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종업원은 52명이다. ○ (株) 旭成 城北區 貞陵2洞 227-126 旣成服 전문 메이커이며 年間 매출액 84억으로 그중 61억원분을 수출하고 있다. 1978년 3월 7일에 旭成通商(株)으로 설립되었으며 80년 6월 15일에 현 소재지인 성북구 정릉동으로 본사를 이 전하였다. 89년 9월에 社號를 (妹) 旭成으로 변경,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0년 말 현재 자본금은 10억 4천만원, 종업원은 남여 합해서 120명이다. ○ (株) 內外패션 長位洞 238-392 Y셔츠, 잠바 등을 위시한 紳士服 전문 제조업체이다. 1985년 3월 15일에 설립되었으며 연간매출액이 35억원 정도, 1990년 말 현재의 자본금은 3억원이며 종업원수는 224명이나 된다. ○ (株) 大光被服(合資) 普門洞 5가 35 코트를 전문으로 생산하여 수출을 하는 회사이다. 1954년에 中區 筆洞에서 大光被服合資會社로 法人설립을 했으니 대단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종업원수는 약140명 정도이며 주요시설로는 본봉기 140대, 특종기 130대를 보유하고 있고 연간매출액 14억원으로 그중 6억원 정도를 수출하고 있다. ○ (株) 泰福産業 下月谷洞 49-6 각종 의류 특히 메리야스 제품을 제조·수출하는 업체이다. 1957년 10월 16일 자본금 5백만원으로 泰福메리야스工業社를 설립, 65년 7월에 商工部로 부터 수출품생산 지정업체로 지정되었다. 85년 7월 1일에 泰福産業(株)으로의 상호변경과 동시에 法人體로 전환하였다. 道峰區 창동에 별도의 공장이 있으며 下月谷洞 본사·공장종업원은 120명, 년간 매출액 4억 5천만원으로 전량을 수출하고 있다. 1990년 말 현재 자본금은 8억 2천만원이다. ○ 三中交易産業(株) 貞陵洞 365-2 공업용 필터백, 여과布 및 면벨트 등 産業用 직물을 제조·판매하는 전문업체이다. 1969년 6월 27일에 설립되었으며 90년말 현재 자본금 2억 4천만원, 연간 매출액 30억, 그중 일부는 수출하고 있다. 종업원수 70명이나 京畿道 始興市 大也洞에 별도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외에 성북구 관내에서 종업원이 50명 이상되는 피복·섬유업체는 다음과 같다. ○ 세미상사 三仙洞 3가 100-5 모피제조·수출업체로서 90년말 현재 종업원 98명 연간생산액 150억원, 거의 全量을 수출하고 있다. ○ 대한섬유 敦岩洞 186-314 점퍼 전문 제조업체로서 1990년 현재 종업원 57명, 연간생산액 42억원으로 거의 內需用으로 판매되고 있다. ○ 다이아나 敦岩洞 19-48 여성의류 전문메이커로서 90년 말 현재 종업원 55명, 연간매출액 24억원이며 거의 전량을 내수용으로 판매하고 있다. ○ 영보직물 安岩洞 4가 101-18 옷감제조업체·수출업체로서 1990년 말 현재 종업원 88명, 연간매출액 172억원으로서 거의 전량을 수출하고 있다. ○ 모아방 貞陵洞 674-3 兒童服 전문메이커로서 1990년 말 현재 종업원 90명, 연간매출액 19억원으로 거의 전량이 내수용으로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다. ○ 원용산업 鍾岩2동 1-6 피복·침구류 제조업체, 종업원 125명, 연간매출액 약 4억원 정도, 그중의 약 90%를 수출하고 있다. ○ 사해무역 長位洞 36-3 1990년 말 현재 종업원 50명, 의류제조·수출업체이다. 연간매출액 44억원 정도, 그중 2억 5천만원 정도를 수출하고 있다. ○ 월다크(브랑누아) 下月谷洞 48-73 구두·핸드백 등 皮黃類전문메이커이다. 종업원이 약 240명 정도, 연간매출액이 280억원에 달하는, 비교적 규모가 큰 업체이다. ○ 신라산업 貞陵3동 916-1 앨범제조 전문업체이다. 1990년 말 현재 종업원 50명, 연간매출액 25억원, 그중 약 7억원 정도를 수출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39-441쪽
  • 2) 醫藥品製造業 ○ 一洋藥品(株) 下月谷洞 24-5 우리나라 굴지의 大 醫藥品 제조업체이다. 1957년 7월에 鐘路區 敎義洞 60번지에 善林製藥을 창립하여 노루모·하이포酸 등을 생산하다가 1959년 5월에 현 위치인 城北區 下月谷洞에 공장을 이전하고 製酸製 원료인 乾操水酸化 알루미늄 겔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1960년 8월에 一洋藥品工業社로 상호를 변경, 72년 1월에 柱式會社로 法人業體가 되었으며 1974년 일양약품 생산 작업과정 6월에 企業을 공개하였다. 1972년 3월에 日本 富土化學(株)과 기술제휴를 한 것을 효시로 일본·오스트리아·프랑스·이태리·스위스 각국의 세계적인 의약품 제조업체들과 기술제휴 또는 기술제공 계약을 맺으면서 제품 및 업종 다변화를 꾸준히 계속해 왔다. 그리하여 현재는 일반의약품 뿐만이 아니라 食料品·人蔘제품의 제조·판매, 農藝·家畜 用品의 제조·판매, 醫藥部外品·日用雜貨의 제조·판매, 生藥·特用作物 및 農藝의 재배·판매, 화장품·도료·洗劑類의 제조·판매 등 그 제품과 업종이 매우 다양하다. 本社와 工場을 下月谷洞에 가지는 외에 경기도 용인군 器興邑 下揭里에도 대규모 공장을 가지고 있으며 支店·事業所를 전 국내에 배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 N.Y.·홍콩·싱가폴·인도네시아·臺灣 등지에 海外支社 또는 現地法人을 거느리고 있다. 本社·工場을 합해 시설규모는 토지 34,496평 건물 11,567평이나 되며 1990년 말 현재 授權柱式數 102억 8천 8백만원, 종업원은 관리직·생산직을 합하여 약 1,500명, 연간매출액은 1,000억원이며 그중 반수는 內需, 나머지 반은 수출하고 있다. ○ 丸仁製藥(株) 安岩洞 4가 41-1 1957년 7월에 환인제약소로 출반한 洋藥 전문제조업체이다. 82년 12월에 柱式會社로 法人體가 되고 87년 12월에는 京畿道 安城郡 대덕면 소현리에 대규모 공장을 신축하였다. 主 생산품은 신경정신질환 치료제, 주사제, 軟膏 및 기타 일반의약품이며 1990년 말 현재 자본금 16억원, 연간 매출액 125억원이고 거의 국내에서 판매하고 있고 종업원은 152명이다. 부산·대구·광주·대전·전주·마산·서울 등지에 사무소를 개설, 활발히 기업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韓和製藥(株) 石串洞 261 1982년 6월 21일에 설립된 洋藥 전문메이커이다. 1993년 3월까지 東大門區 신설동에 本社·공장이 있었으나 93년 4월에 성북구 석관동의 현 위치로 본거지를 옮겼다.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난곡리에 별도의 공장을 가지며 1990년말 현재 자본금 42억 4천만원, 종업원 수 256명, 연간매출액이 234억원에 달하고 있다. 主 生産品은 안티비오·마베론·가스피로·류테란 등이며 생산품의 거의가 내수용으로 판매되고 있으나 앞으로는 수출시장 개척에도 注力한다는 것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41-442쪽
  • 4. 運輸業·土建業 城北區에는 江北의 他區에 비하여 운수업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 아마 泊車場 확보가 용이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주된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大進運輸(株) 貞陵 4동 818 1957년에 설립된 市內버스 전문업체이다. 1990년 말 현재 종업원은 300명이며 버스 104대를 운영하고 있다. 자본금은 8억 6백만원이며 연간 매출액은 27억원이다. ○ 道原交通(株) 貞陵洞 893-1 市內버스 운수업. 1990년 말 현재 市內버스 57대를 운행하고 있고 자본금 5억원, 종업원 수 90명, 연간매출액 30억원이다. 1971년에 설립되었다. ○ 東洋交通(株) 貞陵 4동 820-17 市內버스운수업. 1966년 5월 1일에 설립되었으며 1990년 말 현재 버스 78대를 운행하고 있고 종업원수 260명, 연간매출액 27억원, 자본금은 4억 3천만원이다. ○ 常進運輸(株) 石串洞 124-9 市內버스운수업. 1961년 10월 29일에 설립되었으며 1990년 말 현재 시내버스 82대를 운행하고 있다. 종업원 수 249명, 자본금은 4억 6천 5백만원이다. ○ 長安實業(株) 石串洞 220-1 택시운수업. 1962년 5월 29일에 설립되었으며 1990년 말 현재 자본금 3억 2백만원, 택시 92대, 종업원 290명이다. ○ 大旺企業(株) 택시운수업. 1969년 12월 4일에 설립되었으며 택시 111대를 운행하고 있고 종업원 수는 210명, 연간 매출액은 25억원이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姉妹會社인 大旺運輸(株)가 있으며 역시 택시 53대로 택시운수업을 하고 있으며 연간매출액은 15억원에 달하고 있다. ○ 韓都通商(株) 貞陵 771-7 택시운수업. 1990년 말 현재 택시 약 50대를 운행하고 있으며 종업원수 147명, 연간매출액 16억원이다. ○ 瑞光産業(株) 普門洞 7가 118 1955년 12월에 自由建設(株)로 창립하였으며 1964년 1월에 瑞光産業으로 社號를 바꾸었다. 土建·鋪裝·電氣·軍納·消防設備 등의 종합 건설업이며 1980년 8월에 핀작크식 水門제작 특허를 취득하였고 1989년 10월에 企業을 공개하였다, 1990년 7월에 住宅建設業 지정업체로 등록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 海外建設業體로 등록되었다. 1990년 말 현재로 사무직 117명 기술직 168명 합계 285명이며 자본금은 106억 8천만원에 달하는 우리나라 有數의 건설업체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43-444쪽
  • 3) 機械·電子·音響器機 製造業 ○ 韓國토프론(株) 下月谷洞 16-7 1986년 3월 26일에 설립된 스피커제작 전문업체이며 1990년 말 현재 자본금 5억, 종업원수는 140명이고 연간매출액 130억, 그중 반은 수출하고 나머지는 內需판매하고 있다. ○ 성원전자 종암 1동 17-2 音響器機중 보이스코일 전문제조업체이다. 下月谷洞 16-7에도 系列工場을 갖고 있으며 종업원수 85명, 연간매출액은 약 10억원이고 거의가 국내판매를 하고 있다. ○ 광전실업(株) 普門洞 7가 112-8 택시 미터기 전문제조업체, 1990년 말 현재 종업원 50명, 연간매출액은 11억원이다. ○ 유풍전자 下月谷洞 46-26 電子部品 전문제조업체, 1990년 말 현재 종업원 70명, 연간매출액 16억에 달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43쪽
  • I . 前近代社會의 塵業• 總濟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도시가 발달하면서 상품의 수요가 증대하면서, 특히 북도 지방의 魚物이 한양을 비롯한 남부 지방민에 선호되어 물화의 운송이 촉구되었다. 수요·공급의 원리에 의해서 수요가 증대하자, 이를 계기로 상인들은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종래 큰 장애물로 여겼던 험준한 산악도 극복해 나갔다. 그것은 함경도 지방의 北商과 서울지방의 私商모두에 의해 추진되었다. 동북쪽 지방의 물화가 서울로 반입되기 위하여는 제2간선도로, 즉 北路를 이용해야 했다. 그러나 그 길은 전술한 바와 같이 험준하였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휴식을 취해야 했다. 본래 정부에서는 이 때문에 역원제를 운영하였는데, 대체로 30리마다 역 또는 원을 설치하여 교통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평지의 도로와 달리 북로에서는 20리 내외에 역·원을 설치하였다. 북로에 설치된 주요 역·원은 樓院·파발막·양문역·풍전역·창도역·신안역·고산역·용지원·남산역·덕원참·고원역·금파원·초원역·함원역 등으로서 철령 이전에만 10개의 역·원 또는 참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성북구 지역에 있었던 樓院은 함경도와 포천 지역에서 진땀 흘리고 찾아 온 사람들의 마지막 쉼터로서, 상인들은 여기에서 물품의 거래를 이모저모로 계산하게 되니, 자연 오랫동안 지체하게 되었다. 상인들은 이곳에 머무르며 한양에서의 가격 동향을 여러 정보를 통해 탐지하기도 하였다. 서울에서도 물건을 미리 받기 위하여 이곳에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노변취락이 형성되었고, 특히 상거래 활동이 빈번해지면서 상업도시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누원이 발달하자 인근 松隅里에도 그 여파로 취락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두 도시는 한때 서로 상권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누원에서 서울로 진입하기 위하여는 미아리까지 와서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삼선평을 경유하여 동소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종암동·안암동·숭인동을 통해 동대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인데, 화물의 운송은 주로 후자의 길이 이용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11-412쪽
  • 2) 누원상인의 활동(1) 樓院은 본래 먼 길을 오가는 여행객 또는 공무로 출장가는 관원을 위해 설치한 院이 있던 곳이다. 다락원이라고도 했다. 이 곳은 함경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일 뿐 아니라 포천·김화·화천 등지로 빠지는 사잇길로도 이어지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였다. 원은 조선초기에 많이 설치되고 그 이용이 잘되었으나, 조선후기에는 국가가 설치한 원보다는 민간에서 사사로이 설치한 주막이 그 기능을 대신하면서 그 역할이 약화되었다. 누원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였다.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이 상인들에게 주목되고, 북도의 물화가 이곳에 집산되면서 상업도시로 성장하여 갔다. 본래 누원을 비롯한 성북구의 외곽 지역은 한가한 농촌으로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城底十里라고 하여 한성부의 행정구역에 포함되었다고 하여도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동소문 밖의 성북동·돈암동, 그리고 동대문 밖의 숭인동·안암동·종암동 등에 이르는 정도였다. 성북구의 외곽 지역, 즉 지금의 노원구 일대는 농촌으로서 농가가 곳곳에 산재하여 있었을 뿐이었다. 원이라 하여도 주변에는 거의 인가가 없었다. 당시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물자가 자급자족으로 충족되었기 때문에 지역 상호간에 물화가 유통되지 않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사람들의 왕래도 빈번하지 않았다. 봉건적인 조선왕조는 중농정책을 내세워 오히려 상업 활동을 통제하였다. 즉, 도시의 상엽은 市廛에 한하여 국한시켰고, 지방에서의 행상 활동도 가급적 규제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상황은 16세기 말 이래로 바뀌어 갔다.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기를 띠며, 그리고 정부의 통제정책이 이완되면서 상업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사상들의 활동이 두드러져갔다. 사상의 대두는 한 때 견제를 받기도 하였다. 즉 일찍부터 상업을 독점해 왔던 시전상인들은 정부로부터 禁難廛權을 얻어 내어 사상들의 활동을 억압하려 하였다. 금난전권은 시전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일종의 독점적 전매특권으로서, 그들의 상업 활동과 이익을 침해하는 상행위를 규제할 수 있었다. 예컨대 그들이 판매하는 물품을 일반 상인들이 팔면 난전이 되었다. 그러나 사상들은 서로 연계하여 신속한 정보망과 풍부한 자금을 토대로 이에 대항하여 상행위를 계속하였으니, 초기에는 종루·이현·칠패 등이 사상활동의 선두 주자였다, 18세기 말 이래로는 정부로서는 더 이상 사상의 성장을 막을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결국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였다. 이로써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은 이후 어느 정도 보장되었으며, 그들 중의 일부는 도고로 성장해 갔다. 사상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화를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거나 다른 지역의 상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상권을 확장하여 갔다. 그리하여 사상들의 활동 범위는 점차 넓어져 당초의 종루·이현·칠패 등에서 벗어나 한양의 외곽 지대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상업 기지를 설립하여 갔으니, 한강 연안, 말죽거리, 송파, 과천, 그리고 누원 등지가 새로운 유통기지로서 대두하였다. 이들 지역은 시전상인의 금난전권 규제지역에서 벗어나 있을 뿐아니라 도성 안과 밖을 매개시켜 주는 교외 지역으로서 위성도시의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던 곳이다. 非農人口가 모여들 수 있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파탄된 농촌에 살 수 없게 된 이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고, 특히 한양으로 집결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도성 안은 비좁아 거주 공간이 보장될 수 없었고, 자연히 그들은 성 밖에 거처를 마련해야 했다. 더구나 맨 몸으로 한양에 온 그들의 살 길은 장사하거나 품팔이 또는 하인노릇 하는 것 뿐이었다. 이에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그 기지로 주목받은 서울 주변의 유통기지에는 사람들이 집중되어 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직전의 한양의 인구는 대체로 10만여명에 이르고 있었다. 이는 왕조 초기와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이래 사회가 안정되면서 인구의 급격한 증가 현상이 나타나 18세기 초에 이미 20만명 가까이에 이르게 되어, 한양은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대도시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이들 증가된 인구의 태반이 한양의 교외, 즉 용산·마포·뚝섬·두모포 그리고 누원 등 위성도시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정조 31년(1789) 의 戶口總數에 의하면 마포·용산의 인구가 약 1만 5천명, 서빙고가 약 3천여 명,두모포가 약 4천 5백명, 뚝섬이 약 2천명이었다고하며, 누원이 말죽거리와 비슷하게 약 3천명이었다고 한다. 이는 종래의 행정 중심지들 보다 많은 인구가 집중되었음을 증거하는데, 실제로 당시 감영이 있었던 원주·춘천·성주·해주 보다 큰 도시였다. 한낱 원의 소재지였던 누원이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조건 때문에 상업도시로 성장하여 주목되는 유통기지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에는 두 가지 측면의 원인이 작용하였다. 첫째 타의에 의해 농촌을 쫓겨나야 할만큼 당시의 농촌사회는 분해 현상이 심화되고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흉년과 재난이 특히 심하였다. 여러 차례 가뭄과 홍수 등에 의한 흉년이 계속되면서 유민이 많이 생겨났다. 게다가 탐관오리의 학정과 양반지주의 착취로 농민들은 견디기가 어려웠고, 여기에 경영 방법의 혁신으로 광작과 임노동의 도입이 확산되면서 부지런한 일부 농민들은 농가 소득을 올렸지만, 대다수의 농민들은 소직지조차 얻기가 힘들게 되어 농촌을 본의아니게 떠나야 하기도 했다. 정치를 비교적 잘했다는 英祖때의 기록은 수시로 각도의 유민이 한양으로 모여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상업의 발달도 농촌 인구의 이농을 촉진시켰다. 농업이 1년 내내 힘든 노동을 해도 소득이 별로 없었던 데 대하여 상업은 물건을 단순히 중개만 하면 손쉽게 많은 이득을 취하였다. 이를 인지한 농민의 상인으로의 전화는 자연발생적이었고, 자율적이었다. 도시에서의 상공업의 발달이 농촌인구를 흡인하느냐, 인구의 도시집중이 상공업을 발전시키느냐 하는 논의는 달걀과 닭의 선후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이농민이 상공업에 종사하게 되자 상공업이 발달하였고, 상공업의 발달이 또한 더 많은 농촌 인구를 도시로 흡인하였으니, 조선후기에는 도처에 상업도시가 생겨났다. 특히 한양 주위에는 그 경향이 보다 두드러졌다. 행정도시였던 한양·평양·전주 등은 이제 상업도시로 변모하여 갔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12-415쪽
  • 2) 누원상인의 활동(2) 조선후기의 일부 상업도시들은 장시를 토대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樓院이나 松牌里역시 그러한 상업도시들이었다.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천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장시는 보통 5일마다 열려서, 인근의 주민들이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을 교환하였는데, 일부의 장시는 점차 상설시장으로 되어 갔다. 누원은 18세기 후반 하나의 상설시장이었다. 또 본래 국지적 시장권을 형성하고 있던 장시는 포구 등과 연결되면서 전국적 시장권을 형성, 원격지 교역에도 참여하였다. 여기에서의 상행위의 주체는 특권상인으로서의 공인도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지만, 거의 사상인들이었다, 누원의 사상인들은 관북 지방의 건어물을 주로 취급하였지만, 전국적 시장권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누원 주변에는 마석우장·동두천장·신천장·송우장·차탄장 등이 있었고, 이들은 철원·원산과 연결되었는가 하면, 송파·용산·뚝섬 등과 연결되기도 하였다. 주변의 장시에서는 미곡·약재·건과·면포 등을, 원산에서는 북어가 누원으로 집하되었다. 그런데 장시가 형성되기 이전에도 농민들은 여러가지 형태로 교역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은 농민 상호간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지역간을 이동하면서 상업을 하는 행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나, 때로는 관부와 결탁된 상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농업 경영에서 자가 소비 이외에 잉여생산을 할 수 있는 계층은 지주들이었다. 따라서 농업 중심 사회에서는 지주들의 잉여생산물이 주로 교역되고 있었다. 15·6세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 시기에는 생산력이 점진적으로 증대하고 생산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일부 농민층은 어느 정도의 잉여를 축적할수 있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농업기술의 보급과 농민의식의 성장을 바탕으로 소생산자인 일반 농민층에서도 市場性을 고려한 이른바 상업적 농업이 영위되고 있었다(416쪽 그림 누원 부근의 장시 참조).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농촌사회의 사회적 분업도 어느 정도 진전되고 있었다. 원래 중세사회에서는 물품의 교환이 통제되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은 공물·진상·부역 등의 방법으로 징발하였다. 따라서 생산 판매를 위한 수공업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도시 인구가 늘어나고 그들의 물품 수요가 증대하면서 판매를 위한 생산이 이루어져 갔다. 조선후기에는 그러한 경향이 한충 두드러졌다. 도시에서는 사치적 수요를 위한 금은세공품·철물가공업·문방구 생산을 비롯하여 민간의 일상 생활용품들이 생산되었고,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가내부업으로 해결할 수 없는 도자기·농기구 등의 생산 비중이 높아져 갔다. 농민들의 가내 수공업도 본래는 자가소비를 위한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잉여생산이 가능해지고 유통이 원활해지면서 특히 장시가 발달하면서 마포·변포·모시·명주 등의 직조업과 종이를 만드는 제지업 등에서는 판매를 위한 가내수공업이 전개되어 갔다. 농민들은 국가의 부세제도 운영, 계속된 흉년 등에 의해서도 유통 경제에 참여하였다. 일반 농민에게 지워진 각종의 전세·공납·군포 등을 부담하기 위하여 자신의 식량곡을 처분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생산되지 않는 공물을 납부하기 위하여는 자신이 갖고 있는 물화를 가지고 생산지로 가서 구입하여 납부해야 했다. 심지어는 전답과 소·말 등을 팔아서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농민 간의 이러한 교역은 개인 사이에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아무데서나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교역이 증대됨에 따라 점차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행하였다. 예컨대 장시가 그러한 곳이었다. 또한 이 지역의 농민들은 그들이 가진 물품을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판매하기 위하여 보다 수요가 많은 서울 등의 대도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이 행하는 또 하나의 교역 형태는 지역권을 넘어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상업을 하는 행상과의 교역이었다. 행상들은 농촌사회에서 공급이 부족한 물품 또는 구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수공업 제품, 그리고 소금·생선 등의 수산물을 농민에게 제공하였다. 농민들은 이들을 통해서 그 지역에서 구하기 힘든 물품의 대가로 주로 그들의 기본적인 생활자료인 곡식이나 옷감을 지불하고 있었는데, 때로는 구입한 물품의 지불능력이 없으면 나중에 추수할 때의 곡물을 지급하기로 하는 외상거래도 행해지고 있었다. 행상들의 왕래가 빈번해지자 이들의 숙식을 위한 장소로서 원 또는 주막이 설치되었는데 누원이나 송우참이 그러한 곳이었다. 특히 누원은 교통의 길목이어서 상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누원에는 본래 장시가 없었다. 시전을 중심으로 특권적 경제질서를 유지하고자한 조선정부는 시전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다른 곳의 장시는 인정하면서도 서울 근처에 장시가 설립되는 것을 규제하였다. 그런데 누원은 함경도 지방에서 생산되는 어물과 포목이 서울로 반입되는 주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이곳에 장시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즉 숙종 40년(1714) 이곳의 상인 鄭光載등이 장시를 설치하려 하였고, 이어서 영조 45년(1769) 에도 역시 이곳 상인들이 장시를 설치하려 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노력은 서울 시내 시전상인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원의 상인들은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결국 18세기 후반에는 송파, 한강변과 더불어 상업 중심지로 역할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누원은 도봉산 기늙에 위치하여 서울 중심부와 가까워서 서울 시전상인들의 상거래에 제일 큰 타격을 주었다. 정조 5년(1781) 서울 종로에서 魚物을 팔던 내어물전인의 고발에 의하면 동북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각종 어물을 누원에 사는 崔敬允·嚴次起·李星老 등이 매점해 두었다가 조금씩 칠패와 이현의 난전인들에게 보내면 그들은 값을 올려 팔았고, 이리하여 서울 시내의 魚物 값이 오를뿐 아니라 이 때문에 어물전은 실업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기록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누원에서 상행위를 하는 자들은 中都兒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도아는 본래 시전이 매집한 상품을 소매상이나 소비자에게 전매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최소한 辛亥通共이 시행되기 이전까지는 서울에서 유통되는 상품거래는 시전을 중심으로 행해지도록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즉, 서울에 반입되는 상품은 반드시 시전의 중개를 통해 소비자에게 전매되어야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유통되는 상품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상품을 매집하고 분산하는 기능을 시전상인이 모두 담당할 수는 없었다. 특히 어염과 같이 부패성이 크기 때문에 단기간에 유통시키지 않으면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이와같은 상품을 갖고 있던 상인들은 새로운 시전, 즉 공급처를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기존의 시전들은 이를 반대하고 그들이 지정한 비시전계 상인들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하였으니, 중도아와 여객주인이 그러한 상인들이었다. 이를테면 중도아는 당초에는 시전에 예속된 하청업체와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자본 규모가 영세하여 소량의 상품을 행상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매하거나, 시전 부근 등에 임시점포를 차려 소매상이나 소비자에게 상품을 판매하였다. 그들은 시전에 세금을 바쳐야 하고, 그들이 거래하는 상품은 반드시 시전에서 매입한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난전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들은 난전과 결탁하여 난전이 매집한 물건을 시중에 판매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시전이 난전을 제어하고 서울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그 상업 활동을 인정한 중도아가 이제는 도리어 난전의 활동을 조장하고, 나아가 시전의 활동에 제약을 주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는 중도아는 본격적으로 난전 활동을 폈다. 이에 난전에 대한 시전과 정부의 규제가 강화되자 일부 중도아는 시전의 금난전권을 피해 누원·송파와 같은 외곽 지역으로 근거지를 바꿔 그곳에서 서울에 반입하는 상품을 매집하였고, 일부는 서울에 남아 외곽 지역의 중도아가 공급하는 상품을 서울의 소비자에게 유통시켰다. 그들은 이제시전을 거의 배제하고 상업 활동을 폈는데, 정조 15년(1791) 신해통공이 시행되면서 합법적으로 자유로이 상행위를 전개하였다. 누원의 상인들은 송파 등지의 상인들과 자금을 합자하기도 하고,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면서 대규모로 매점활동을 폈으니, 19세기에 이르면 누원상인들은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상인 중의 하나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15-419쪽
  • 3) 都賈商業의 전개(1) 도봉산 기슭에 자리잡은 누원 상인들이 대규모로 상품을 매점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른바 都賈 행위였다. 도고 행위는 18세기에 누원 상인 뿐만아니라 시전상인, 경강상인, 공인, 송상 등이 영리의 극대화를 위해 벌인 행위였다. 17세기 후반에 나타난 상업계의 몇 가지 변화는 이후 각 개별 상업자본의 가치액 증대를 가능하게 하였다. 국내에 있어서의 상업인구의 증가는 상인들 사이에 심한 경쟁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일부 상인들은 관권과 결탁하거나 혹은 스스로의 우세한 자본력을 이용하여 독점적 매점상업을 영위하여 상업자본의 집적에 성공하였고, 대외무역이 발전함에 따라 그것에 종사한 의주의 灣商, 동래의 萊商, 개성의 松商 등 역시 자본 집적에 성공하였으며, 이어서 그들은 금속화폐의 전국적 유통으로 인하여 도회지 부근과 농촌사회를 배경으로 고리대자본을 증대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18세기 이래 상업계에 만연하였던 각종 도고 행위는 이와같은 독점적 매점상업이 심화되면서 빚어진 현상이었다. 조선후기에 크게 발달하였던 도고상업은 그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다른 상인과의 경쟁을 배제하기 위하여 관권과 결탁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특권적 매점상업을 영위한 경우이니, 주로 시전상인과 공인의 도고상업이 그것이며, 둘째는 민간 상인 가운데 큰 자본을 가진 자들이 스스로의 경제적 실력과 정확한 정보망, 신속한 유통망을 바탕으로 독점적 매점상업을 영위하는 경우이니, 난전상인·경강상인·송상 등의 활동이 그것이다. 누원상인은 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관권과 결탁하여 특권적 매점상업을 하는 경우에는 수도로서의 한양과 감영 소재지로서의 營底 등 관아도시를 배경으로 하지만, 교통의 요지를 거점으로 하는 사상인들은 자본력·정보땅·유통조직 등 경제적 환경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보다 순수한 상품의 유통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상도고의 활동은 우선 서울에서 가장 현저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도시 주변의 상업 중심지 또는 새상품의 반입로에서 발달하였다. 예컨대 누원이나 송우점이 그러한 곳이었다. 그리고 상품의 생산지 또는 생산지 주변의 상품집산지도 사상도고의 활동근거지였는데, 예컨대 원산과 같은 곳이다. 특히 서울 주변, 즉 누원 등지에 사상도고의 거점이 마련된 까닭은 첫째, 이곳이 지방 생산품, 예컨대 함경도의 어물 등이 서울로 운반되는 길목이라는 점과, 둘째 이곳은 금난전권이 행사되는 권역 밖이면서도 비교적 서울과 가까와서 서울 시내의 사상도고, 예컨대 칠패 이현 상인들과 연결이 쉬웠고, 또 서울 시내 사상도고가 직접 이곳에 나와서 상품을 매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근교의 사상도고 근거지 가운데 서울 중심부와 가까와서 시전상인에 제일 큰 타격을 준 곳이 누원이라 함은 전술하였지만, 이와 더불어 주목되는 곳이 용산·마포 등 한강 연변이었다. 한강변이 유통기지로 발돋움해 간 데는 나름대로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강변은 전국의 물화가 선박으로 한양에 집중될 때 그 하역처였고, 용산·마포 등지는 당시 가장 큰 소비 시장인 한양과 바로 인접해 있었고, 더구나 청파동 북쪽에 칠패 장터가 있어 사상들과 물화를 교역하기가 매우 용이하였다, 한강변 유통기지를 근거로 하여 상업활동을 전개한 상인들을 五江商人이라 하는데, 누원상인들은 이들과도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왜냐하면 누원상인들의 주된 상품인 어물을 5강상인들도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강상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시기도 18세기 후반으로서 누원상인의 대두 시기와 거의 같은 때였다. 5강상인들은 선박이라는 운송수단을 갖고 있어서 선상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때문에 대규모로 도고활동을 펼 수 있었다. 그러나 경강변에는 일찍부터 어물전·염전·미전 등 시전의 분전들이 있어서 그 간섭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5강상인들은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이에 비하여 한양과 다소 떨어진 누원은 서울에로의 길목이지만, 시전들이 분전을 설치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중도아에게 상행위의 일부를 위임하였더니, 그들은 누원을 근거지로 오히려 시전상인의 활동을 잠식하고, 독자적 상권을 구축하여 갔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누원상인들은 누원에 독자적인 장시를 설치하고자 했고, 일부 중도아들은 동북 지방에서 서울로 유입되는 각종 어물을 이곳에 매점해 두었다가 칠패·이현의 사상인들과 연계하여 도고행위를 폈다. 그것은 서울의 시전상인들을 매우 곤경에 빠지게 하였다. 또 칠패에 난전을 차려놓은 무리들이 누원에 사람을 보내어 어물 수천 바리를 통틀어 매점하기도 하였으니, 확실히 이곳은 금난전권의 권역 밖이었음을 알 수 있고 칠패·이현 상인들과 누원상인들이 지속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시전상인들이 누원 등의 난전상인들에 의해 큰 타격을 받자, 그들은 이곳까지 금난전권을 확장시키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 누원은 특히 동북지방, 즉 원산 등지에서 오는 어불과 포목을 매점하는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시전 중에서도 어물전과 포전인들이 주로 누원을 금난전권 권역 안으로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그 근거로 그들은 이른바 近難百里之內가 모두 금난전권 권역 안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이와같은 시전상인의 주장은 곧 특권적 상업권을 넓힘으로써 사상인들의 도전을 배제하려는 노력이었지만, 이 시기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는 그것을 무의미하게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19-422쪽
  • 3) 都賈商業의 전개(2) 누원 못지않게 광주의 송파·삼전도 일원도 각 지역에서 서울로 반입되는 상품의 유통로였으므로 일찍부터 장시가 발달하였고, 이 장시를 근거지로 하여 사상인들의 도고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송파 장시에서의 사상인의 매점 활동이 시내 시전상인에게 큰 타격을 주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부터였다. 영조 30년(1754) 의 기록에 의하면, 서울의 사상인과 송파의 사상인이 서로 결탁하여 삼남지방과 동북지방에서 오는 상인을 유인함으로써 대규모의 장시를 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부 당국자도 이는 금난전권을 피하여 시전상인의 본업을 빼앗는 것으로서,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실업하고 있다고 염려하였다. 당시 송파장시는 5일장이 아닌 상설시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송파장시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누원과도 연결되고 있던 칠패 등지의 사상 도고였다. 19세기 초 대규모 사상 중의 하나였던 孫道康은 양주·광주 등지의 부호들에게서 자금 수만 냥을 조달하여 직접 원산에 가서 어물 선박 전부를 매점하거나, 혹은 어물이 서울로 반 입되는 길목인 누원·송우점 등지를 지켰다가 그것을 모두 매점하는 도고 중의 도고였다. 순조 4년(1804)에도 그는 어물 30여 바리를 매점, 운반하였는데, 이를 안 서울 시내 어물전인들이 취체하려다가 오히려 그 일당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시기 누원·송우점·송파 등 서울을 둘러싼 몇 개의 장시를 연결하는 사상도고의 조직은 비교적 규모가 컸다. 앞서의 孫道康은 순조 5년에도 많은 자금을 가지고 원산에 가서 각종 어물을 매점함으로써 시전상인들에게 크게 해를 입혔으며, 같은 해에 시전상인들이 퇴계원에서 삼전도의 상인 20여명이 북어, 대구 등 50여 바리를 싣고 오는 것을 시전에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가 오히려 구타당하기도 하였다. 서울을 둘러싼 사상도고의 활동권의 또하나의 요지는 포천의 송우점이었다. 이곳은 동북지방의 상품이 서울로 운반되는 경우, 누원에 앞서 머무는 곳으로서 이곳도 18세기 후반에는 사상도고의 근거지였다. 정조 12년(1788) 시전 내어물전의 보고에 의하면, 송우점 역시 당시 사상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서, 시전인들이 조사한 이곳의 사상인들은 크게 두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하나는 원산에 사는 상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송우점에 거처를 마련한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또 통천 등 수산물 생산지의 상인들과도 서로 관계를 맺어 매일 60내지 70바리의 어물을 거래하고 있었다. 즉 누원의 사상인들이 주로 서울 시내의 사상도고와 연결되어 있었던 데 대하여 송우점의 상인들은 주로 생산지의 상인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로써 볼 때 동북지방에서 생산되는 어물 등은 대체로 원산 지역의 사상인들에 의해 수집되어서 송우점 상인들에게 넘겨지고, 다시 누원 상인들을 통하여 서울 시내의 칠패 등 사상인에게 전매되고 있었던 것이다. 시전상인들이 서울에 앉아서 지방의 행상들이 가져오는 상품을 받아 팔았던 것과 비교하면, 누원 등지 상인의 이같은 도고활동은 한층 더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것이었다. 시전상인들이 관부와 결닥하여 금난전권을 행사하고자 하였지만, 18세기 후반이래로는 사상인들의 포위망이 더욱 압축되어 시전상인들의 활동을 제약하였다. 사상인들은 누원과 한강변·칠패 등지를 연결하는 제1선과 송우점·송파·말죽거리를 연결하는 제2선으로 포위망을 구축하여 시전상인을 압박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시전상인들은 때로는 실업하는 사태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7세기까지는 그 위세를 부리던 시전상인들은 차차 경제적 역량이 약화되어 갔고, 그에 대신하여 자본력과 조직력이 우세한 사상인들이 전국적 범위로 대규모의 도고행위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누원·송파 등의 지역이 상업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은 시전의 특권적 상업활동에 대항하여 사상인들이 상권을 나름대로 확보하기 위하여 생산지에서 서울에 반입되는 상품을 이곳에서 매점하는 도고 행위를 전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들 지역은 사상인들의 활동을 최대한 보장해 준 곳이었다. 따라서 도고상업, 특히 사상인들의 도고상업은 이들 지역에서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전의 금난전권이 강화되고 사상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심화되자 그들은 도고 행위를 합법화하기 위해 특정 시전의 中都兒가 되기도 하였다. 즉 그들은 시전으로부터 약간의 물건을 구입하거나 시전에 물품의 일부를 공급해 주기도 하고, 일정한 세금을 납부하기도 하였다. 물론 중도아는 처음부터 합법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은 시전이 인정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중도아를 자처하여 시전에 반입되는 물품을 중간에서 매점하였고, 그 과정에서 시전은 물론 소상인을 침해하였기 때문에 중도아는 곧 山賊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여하튼 누원 등지를 거점으로 삼은 중도아들은 초기에는 시전과 일정한 관계를 갖고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나, 도고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시전을 배제하고, 드디어는 시전올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이와같이 중도아로 변신한 사상인들이 도고상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시전과 달리 그들은 금난전권을 소유할 수 없고 시전에 구속 前産業時代의 운반수단인 지게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더욱 컸고, 그렇기 때문에 서울 외곽 장시의 성숙이라는 상업적 환경에 보다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22-424쪽
  • 3) 都賈商業의 전개(3) 당시 서울에 상품이 반입되는 길목은 육로로는 누원과 송파, 수로로는 한강변의 용산·마포 등지였는데, 어물을 많이 취급하던 칠패 등의 사상인들은 특히 누원에 주목하고, 직접 이곳에 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하여 동북 지방에서 서울에 반입되는 어물을 매점하여 쌓아 두었다가 서서히 서울에 반입시켰다. 칠패의 상인들은 심지어 어물의 생산지인 원산까지 진출하여 상품을 매점하기도 하였는데, 이때에도 누원이나 송우점 상인들과 정보망이나 자금면에서 연계가 있었을 것이다. 즉 초기의 사상인들은 그들이 매입한 상품을 직접 시전과 관계를 갖고서 시전의 금난전권이 행사되는 서울 도성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판매하였으나, 도고상업 단계가 되면 도고상인의 일부는 시전의 금난전권이 행사되는 영역 밖에서, 예컨대누원이나 송파 등지에서 상품을 매입하여 그곳에 보관하였다가 일정한 시기에 도성 안으로 반입하여 판매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매점한 상품을 반드시 서울에로만 반입하는 것이 아니라 값을 고려하여 지방으로 다시 유출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누원의 경우에는 이들 지역의 상인들이 동북 요로에 거처하면서 서울에로 반입되는 어물을 독점하고 그 이익을 독점하였던 때문에 시전상인의 원성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 해당 지역의 관원에게 도고행위를 엄히 규제하게끔 지시하였으나 그들은 조금도 두려움없이 도고행위를 계속하였다. 중앙정부의 지시를 받은 지방관원들도 그들과 결탁하고서 규제하기는 커녕 그들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마침내 정부는 정조 6년 누원의 乾房을 혁파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으며, 서울 시내 사상인들의 도고행위도 엄금시켰다. 이 시기의 누원상인은 일종의 定住商人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정부가 누원상인에 특별히 규제조치를 발동한 것은 누원상인들이 시전 중에서도 어물전의 활동을 압박하였기 때문이다. 시전 중 대표적 6의전 가운데서 유일한 식료품 상점이 어물전이었다. 더구나 어물전은 그 설립의 역사가 다른 시전에 비해 가장 오랠뿐더러 봉건정부에 대한 국역의 부담이 다른 시전에 비해 번다하였으므로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조 6년 경에는 수산물의 생산이 흉작이어서 공적이건 사적이건 수요에 응할 어물들이 품귀 상태였는데, 이 때문에 봉건정부의 수요를 위해서도 어물을 갖고 도고활동을 하는 불법에 대해서 불가불 관권을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시전상인의 활동이 위축된 것은 봉건적 특권상인이 갖고 있던 본래적 모순 구조에 기인한다고도 하겠다. 시전상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사상인에 대하여 특권을 행사하였고, 또 收稅權을 남용하여 일반 상인들을 억압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서울의 내어물전·외어물전에서 취급하는 물화는 주로 말린 생선과 저린 생선이었는데, 저린 생선배가 한강변에 정박하면, 그들 시전상인들이 가서 매입, 시중에 전매하였다. 이때에 내어물전·외어물전 상인들은 수세 명목으로 가령 100同에서 2·30동을 남정할 뿐아니라 헐값으로 억매하는 등 폐단이 많았던 것이다. 이와같은 폐단을 정부가 시정해 주어야 하건만, 오히려 정부는 시전의 편만 들어 주었다. 이에 사상인들은 불법임을 알고도 그들의 생존을 위해 시전과의 관계를 기피하게 되고, 나중에는 보다 많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사상인들끼리 연대하여 자금을 합자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시전을 배제하고 도고행위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누원상인들이 서울의 어물전으로 가는 어물을 중간에서 모두 매점하여 그것을 서울의 중도아들 그리고 송파의 사상인들과 짜고 서로 전매를 하여 많은 이득을 보면서 어물전에 큰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어물전인들이 국역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고 청원하고 있다. 나아가 사상인들은 각지에 장시를 신설하기까지 하여 상권을 장악하는데 힘썼다. 원래 누원상인들은 서울과 동북지방을 잇는 요충지에 거처하면서 서울로 반입되는 동해안 생산의 어물을 매점, 독점적으로 이익을 챙긴 신흥 도고로서, 일명 鄕民都賈라고도 하였다. 이들은 시전상인에 비하여 각지의 물가 시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자본금도 많아서 물가의 조종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고 상술에 능하였다. 더구나 인근에 松隅場이라는 장시가 있어 어물의 매점이 매우 용이하였다. 정조 12년 (1788) 내어물전·외어물전·포전 동 3개 시전이 경기감영에 낸 소장에 의하면, 즉 함경도 지방의 산물은 松隅場을 경유하여 서울에 이르는데, 누원에는 도고상인들이 많아서 이들이 3개 시전에서 취급하는 北布또는 어물을 거의 매점하기 때문에 시전에는 물건이 없어 할 일이 없고, 나라에 바칠 進排도 궁핍하니, 이는 공사간에 낭패라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 주변 백리 지역에서는 도고 행위를 언급하고, 발각되면 엄형에 처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시전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먼저 원산에 거주한 사람들로는 南大擧·金義敬·金成五·金政煥·金厚若 등이고, 누원에 거주한 사람들에는 金雲敬·朴責宗·李孝白둥이 있어서 서로 主客의 관계를 맺고, 또 통천 포구의 石景洙·許榮端·裵敬和 등과도 연계하여 이익을 독점하였다는 것이다. 그 물량은 소·말 바리로 6·70바리였다고 한다. 사례에서 보듯이 누원의 상인들은 대규모의 자본으로서, 조직적인 상행위를 통하여 원산·통천 등의 생산지 상인과 결탁, 도고 행위를 벌였는데, 이같은 새로운 상업계의 변화는 18세기 이후에는 누원·송우점 뿐아니라 양주·광주·파주·포천 둥지의 육상교통로 요충지와 인천을 비롯한 연해안 포구·용산·송파 동 한강변 등 서울로 통하는 주변 각처에서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조선후기 특히 18세기 후반 이래 상업계는 변화하고 있었는데, 종래의 관권과 결탁된 특권상인에 대하여 풍부한 자본력과 우월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사상도고의 활동이 보다 두드러졌고, 봉건정부로서도 더 이상 사상인의 성장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통공정책의 시행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갖 院村에 불과하던 누원이 도고상업의 중요한 기지로 될 수 있었던 첫째 요건은 이곳이 동북지방과 서울을 잇는 교통로의 요충지였지만, 이와 더불어 이곳은 서울에 가까우면서 서울 市廛의 통제권 밖에 있었다는 점과 18세기 이후에 이르러 전통적 상업계가 변혁되지 않으면 안되게끔 사회·경제적 조건이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특히 한양의 인구 증가는 단순한 인구증가가 아니라 그것이 소비인구의 증가라고 했을 때 전국 각지에서 한양으로 물화의 대량 유입이 불가피했고, 이를 종래의 시전상인들이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할 때 그 주변에서 상업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아무리 중농적 사회라 하여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하물며 이 시기에는 농촌 사회가 그 내적 원인에 의하건, 외적 요인에 의하면 분해가 심화되고 있었고, 그러한 속에서 발생한 이농민의 증가는 대체로 상업인구의 증가를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기존의 상업질서를 지키려는 측과 새로운 상업 질서를 수립하려는 측의 갈등과 대립은 자연히 충돌을 일으켰고, 그것은 특권에 의존하려는 측보다는 경제력에 의존하려는 측이 유리하게 판정나게끔 결과되어 갔는데, 이는 역사 발전의 원리에서 볼 때 순리적 현상이었다. 즉, 누원, 송우점, 송파, 그리고 칠패, 이현, 한강변 등의 새로 나타난 사상인들 이른바 亂廛의 도고 행위는 특권에만 의존하려한 시전의 상행위를 여러모로 압도해 갔고, 봉건정부로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전의 독점적 상업, 체제는 점차 해체되어 갔고,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는 사상도고가 상업계를 주도하였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누원의 상인들 역시 나름대로 역할을 하였으니, 전근대사회 말기에 있어 성북구 일대는 경제적으로 자못 주목받는 곳이었던 것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24-427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2-16

이 자료의 상위 자료 보기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