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교통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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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구의 교통 및 통신에 관한 내용이다. 교통망의 발달을 보면, 1928년 서울 도심에 시내버스가 처음 등장한 이후 1935년을 전후한 무렵 돈암동, 안암동, 종암동까지 시내버스가 들어갔다. 이는 당시 서울 인구의 증가에 따른 시가지 확대와 관련이 있고, 도시계획으로 돈암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시가지가 조성되면서 1941년에는 돈암동까지 전철도 들어섰다. 해방 이후에는 성북구에 차고지를 둔 버스노선이 운영되었으며, 1980년대 지하철망이 본격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현재 4호선과 6호선, 우이신설선이 성북구를 통과하고 있다. 성북구는 산지가 많은 특성상 도로율이 낮았었는데,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발달로 도로망도 확충되어 2019년 현재 도로율은 22.41%가 되었고 포장율은 100%이다. 한편 1905년 을사조약으로 회원권을 상실하였던 만국우편연합(U.P.U)에도 정부 수립과 동시에 가입자격을 얻게 되어 1949년 12월 17일자로 가입되었고, 성북구에는 돈암동우체국이 생겼다. 2017년 현재 성북구에 우체국은 16개소가 있다.
성북구
  • 대한뉴스 제480호 '건설의 새소식'
  • 전차구역제(電車區域制)를 경성부(京城府)는철폐(撤廢)하라
  • 「뻐스」운전시간(運轉時間) 연장(延長)을 진정(陳情) 대표오씨(代表五氏)가 동서통(東署通)해 경전(京電)에 성북부근(城北附近) 주민(住民) 궐기(蹶起)
  • 대한뉴스 제480호 '건설의 새소식'
  • 동경성(東京城 )˝발˝ 연장(延長)-돈암정(敦岩町) 전차(電車) 금일(今日) 개통(開通)
  • 돈암동·의정부간 버스 16일 개통
  • 뉴-서울 지도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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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근거자료 원문

  • 2. 朝縣市街地計劃令과 京城市街地計劃(3) 3) 街路網計劃과 城北地域 이상과 같이 1936년 3월 26일 京城府 市街地計劃區域을 고시한 總督府는 그로부터 꼭 9개월이 경과한 1936년 12월 26일자 總督府告示 제722호로 計劃街路網과 土地區劃整理를 결정·고시한다(301쪽 〈그림 2〉京城市街地計劃 街路網圖(1936년) 참조). 計劃街路의 내용은 광로(노폭 53m) 1개, 대로 1류(노폭 35m) 4개, 대로 2류(노폭 30m) 18개, 대로 3류(노폭 25m) 33개, 중로 1류(노폭 20m) 35개, 중로 2류(노폭 15m), 중로 3류(노폭 12m) 70개 노선으로 도합 220개 노선이었는데 그중에서 城北地域을 기점·종점 또는 통과지점으로 하는 노선은 大路 3류(노폭 25m) 4개, 중로 1류(노폭 20m) 1개, 中路2류(노폭 15m) 5개, 中路 3류(노폭 12m) 2개 등 도합 12개 노선이었다(303쪽〈표 3〉참조). 또 계획구역내에 모두 19개의 광장(면적합계 169,250㎡) 을 배치하였는데 城北地域에는 安岩町 광장 1개(면적 7,800㎡) 만이 배치되었는데 불과하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18-319쪽
  • 2) 城北區內의 計劃街路 城北區의 街路사정은 鐘路·中區 또는 江南地域이나 그밖의 新開發地에 비해 매우 빈약한 상태에 있다. 성북구의 街路事情이 이렇게 좋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區 행정구역내에 北岳山·開運山·北漢山 등 여러 개의 山林이 자리하고 있어 格子型의 가로조성을 저해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계획적으로 개발되기 이전에 여러 산비탈에 붙어 주택이 들어서서 이미 市街化가 거의 완료된 후에야 서울市에 의한 개발이 시작된 때문이다. 즉 서울市에 의한 본격적인 도시개발사업은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걸쳐서였는데 이미 성북구 관내의 住宅 市街化는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전반기에 거의 끝났던 것이다. 현재 城北區 관내를 始·終點으로 하거나 경유하고 있는 都市計劃街路는 30개 노선이고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327~328쪽 〈표 7〉 성북구 도시계획 가로현황 참조). 大路1류(폭 35m) 3개 大路3류(폭 25∼30m) 6개 中路1류(폭 20m) 6개 中路2류(폭 15m) 9개 中路3류(폭 12m) 6개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26-328쪽
  • Ⅱ. 日帝强占期의 建設 1. 道路 日帝强占期에 城北區 管內에 어느 道路가 있었는지에 대하여 정확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京城府가 府域을 확장하고 1936년에 제작한 《大京城構圖》에 의하면 현재의 성북구 관내로 통하는 당시의 간선도로는 ①종로구 혜화동에서 출발하여 성북동 방면과 정릉동 방면, 그리고 돈암동 방면의 3갈래길이 등재되어 있고, ②東大門에서 淸凉里方面으로 나오다 창신동과 숭인동 중간쯤에서 돈암동으로 이어지는 길, ③신설동에서 돈암동으로 이어지는 길, ④지금의 大光高等學校에서 종암동, 미아리로 이어지는 길, ⑤종암동 3거리에서 지금의 월곡동, 장위동 방면으로 갈라지는 길, ⑥지금의 城北洞길에 해당하는 길 등이 있었다(341쪽 〈그림 –1〉1936년 제작 《大京城構圖》의 部分圖 참조) 이상이 1936년 당시의 城北區地域의 주요 간선이라 할 수 있는 바, 朝鮮王朝中葉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大東與地圖에 비추어 볼 때 새로이 신설된 도로는 그때까지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다음 이들 간선도로의 폭과 정비수준에 관한 것으로 道路幅은 7m정도에 道路中央部分을 약간 돋우고 양쪽 가장자리에는 약 1m의 뚝을 파서 排水가 잘되게 하는 정도이다. 다만 日帝末期에 와서는 이른 바 「마카담」 工法이 시행되어 현대식 포장공법에 의한 도로포장을 하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城北區地域에도 아스팔트 포장을 하였을 것으로는 보여지지 않으며, 주로 4大門안의 주요도로에나 부분적으로 시행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1962년에 발행된 《市政槪要》에 의하면 당시 서울의 23개 도로에 再鋪裝工事가 시행되었는데 그 중 성북구관내의 간선도로의 경우 돈암동∼종로 4가 간은 1959년 기점 23년 전인 1936년에 포장되었고, 안암동∼중랑교 간은 1959년 기점 22년전인 1937년에 신설동∼돈암동간은 1959년 기점 5년 전인 1954년에 포장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당시의 도로포장에서 砂利道鋪裝과 아스팔트 鋪裝의 비중은 어떠하였을까에 관한 것으로 1937년용 《日本都市年鑑》에 의하면 高級鋪裝과 簡易鋪裝(砂利鋪裝)으로 구분 기록하고 있는데 서울 一圓의 鋪裝道路延長 363,644m, 2,359,042㎡ 中高級鋪裝이 19,710m 에 373,508㎡로 面積比 15.89%, 簡易鋪裝이 31,761m에191,729㎡로 面積比 8.1%정도로 高級·簡易鋪裝을 합쳐도 24%에 지나지 않는 鋪裝率이었던 것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40-342쪽
  • Ⅲ. 光復以後의 建設 1. 道路 서울이 600년의 古都라고는 하지만 엄격히 말한다면 600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은 四大門 안을 이름이고 그 밖은 60여년의 역사밖에 안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서울의 시가지의 확장연혁을 보면 알 수 있다. 성북구의 경우도 都市的인 형태와 생활양식을 영위하게 된 시기는 1936년 성북구지역이 京城府에 편입하게 된 때 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36년 이후 光復 때까지는 당시의 재정사정이나 사회사정이 변두리 지역에까지 시설투자를 할 힘이 미치지 못했고, 따라서 성북구 지역에도 이렇다 할 도시시설의 정비를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光復以後 人口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변두리로 증가되는 인구가 集積되면서 도로를 비롯한 上·下水道등 都市施設의 정비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市街地가 새로이 형성되면서 道路를 새로이 施設하는가 하면 기존 도로도 通行需要가 팽창함에 따라 확장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성북구를 통과하거나 관내 지역간의 도로중 주요 도로의 시설 확장연혁을 기술하기로 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48-349쪽
  • 2. 橋梁 1992년말 현재 城北區管內에는 17개의 교량이 있다. 청계천이 北漢山에서 發源하여 城北區의 市街地를 貫通하면서 흐름에 따라 갈라 놓은 市街地를 잇기 위한 것이다. 이들 橋梁은 이 地域의 開發趣勢에 따라 시설되었는데 그 중에 가장 이른 것이 1961년에 시설된 安岩 第2橋이고 다음이 1966년에 시설된 普門 第2橋와 安岩橋가 있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교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그 이전에는 現存하는 교량처럼 「슬라브」나 「콘크리트 박스」 또는 鐵骨빔으로 시설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시골에 가면 발견되는 木造橋梁이 있었던 것이다. 光復以後의 것만 하더라도 1953년 당시에도 吉音橋가 있었으며 1960년 당시에는 敦岩洞에 콘크리트 構造의 新三仙橋가 있었으며 미아동에는 吉音橋 以外에도 落合橋라는 橋梁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 光復以後의 工事記錄을 보면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사이에 彌阿橋 改修工事가 있었는데 幅 10m에 延長 24.6m의 규모였으며, 1965년에는 吉音橋 據張工事가 있었는데 幅 13m에 延長 42m였다는 기록을 볼 때 현재의 吉音橋는 그 以後다시 확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교량도 當該地域은 물론 背後地의 擴大에 따라 여러 차례의 확장을 거듭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전하는 기록이 없어 모두 기술하지 못함이 유감이다, 참고로 1992년말 현재의 성북구관내의 교량현황을 보면 〈표 –12〉와 같다(360쪽〈표 –12〉 교량현황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58-359쪽
  • 4. 流通經濟 1) 교통·운수의 길목 동소문, 즉 혜화문은 도성에서 동북지방으로, 동북지방에서 도성으로 오가는 주된 출입문이었다. 물론 동대문을 통하여 왕래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동소문 밖의 성북구 지역은 동북지방과 도성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연변에 있어 예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한 길목으로 여겨지고 있다. 도성을 나서서 우선 쉬어가야 하는 곳이 이곳이었고, 함경도·강원도 등 동북지방에서 바쁜 걸음으로 오다가 마지막으로 쉬어가는 곳이 이곳이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위성도시화할 가능성을 내포한 곳이었다. 조선후기 인마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樓院이 상업도시로 성장하였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유통·경제는 교통·운수의 입지가 그 첫째 조건이다. 상공업이 발달하기 위하여는 교통수단이나 교통로 등이 편해야 한다. 그런데 중앙집권적 사회에서의 교통 문제는 국가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조선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조선왕조는 고려후기의 누적된 대외·대내적 문제를시정하여 밖으로 국가 역량을 키우고, 안으로 국민 총화를 강화하려는 이념 밑에서 개창되었다. 그것은 고려후기에 권문세족이 발호하는 가운데 중앙집권체제가 약화되고 왕권이 쇠약해진 데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였다. 이에 새로운 집권층인 사대부들은 중앙집권의 강화와 관료 정치의 정비를 추구하게 되니, 왕조 개창을 전후하여 추진된 일련의 개혁은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목표로 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리하여 15세기에는 국력이 크게 선장되었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커지게 되었다. 중앙집권화 정책이 강화됨에 따라서 통치체제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교통과 통신 그리고 운수 조직이 정비되어 갔다. 보다 강력한 지방 통치를 위해서도 교통망의 정비, 운송망의 정비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교통 문제는 또한 사회가 발달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의 하나였다. 생산력이 증대되고, 그 잉여생산물이 처분되면서 상공업 활동이 활발해졌다면, 그것을 매개하는 기본적 역할은 교통·운수 체계이다. 교통·운수 체계란 그 의미에서 볼 때 문화의 지역간 이동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데, 특히 생산력이 증대되고 있는 사회에서 주목되고 있다. 교통 문제는 생산 능력에서 뿐만아니라 물화의 가치에 있어서도 그 효과를 증대시켜 주고 있다. 왜냐하면 물화의 가치는 장소적 제약을 받는다. 물화로 하여금 이와같은 제약을 벗어나 그 가치 또는 효용을 가능한 한 크게 발휘토록 하는 것이 교통·운수 체계인 것이다. 이와유사하게 물화는 시간적 제약에 의해서도 가치를 제약받는다. 일정 시기에 물화를 매입하여 보관하였다가, 그 물화의 수요가 증대 될 때 처분하면 물화의 가치는 증대된다. 창고업이 그러한 기능을 토대로 하고 있다. 운송업·창고업은 크게 교통의 범주에 속하는데, 조선후기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상인들은 그러한 운송·보관의 기능을 잘 활용하여 자본을 집적하였다. 현재 서울의 지리적 위치를 보면, 남쪽으로는 부산까지 약 450㎞, 목포까지 약 440㎞, 북쪽으로 신의주까지 약 500㎞, 회령까지 약 620㎞로 되어 대체로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도 이곳은 중요시되어 南京이 설치된 바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교통망이 한양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교통로라고 하면 陸路를 생각하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을 중심으로 동·서·남의 방향으로 고속도로가 시원스럽게 개통되어 있고, 아울러 국도와 지방도가 사면팔방으로 뚫려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그러나 근대화 이전에 있어서는 구릉과 하천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 관계로 인하여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하였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토목 기술이나 교통수단도 그리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육로가 이용되지는 못하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행정·군사상의 필요성으로 인하여 驛路와 擺撥이 정비되어 교통·통신망으로서 그 기능을 다 하였다. 조선시대의 교통망은 우선 수도인 한양과 지방 행정 중심지인 감영을 연결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는데, 즉 한양을 結節點으로 하는 X字型간선도로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도로의 동북쪽에는 함흥·길주·경성·회령, 서북쪽에는 평양·안주·의주, 서남쪽에는 공주·전주·나주·동남쪽에는 충주·상주·동래 등의 주요 도시가 분포하였다. 한양에서 동북쪽으로 뻗은 도로를 북로라고 하고, 서북쪽으로 향한 도로를 서로라 했으며, 서남쪽으로 뻗은 도로를 삼남로, 동남쪽으로 향한 도로를 영남로라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위와같은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전국에 9개의 간선도로가 있었다. 제1로는 서울에서 의주, 제2로는 서울에서 서수라, 제3로는 서울에서 평해, 제4로는 서울에서 동래, 제5로는 서울에서 통영, 제6로도 서울에서 통영(노선이 다름), 제7로는 서울에서 제주, 제8로는 서울에서 보령, 제9로는 서울에서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 간선도로 중에서 성북구를 지나는 길이 제2로로서, 이른바 北路이다. 이 길은 다른 길과 달리 행정·외교적 통로라기 보다는 군사적 도로였다. 북방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으면 서울로 파발마·역마가 정신없이 달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에는 장애물이 많았으니, 태백산맥의 능선을 가로질러 넘어야 했고, 그 중간에도 추가령 협곡지대를 지나야 했다. 따라서 가장 험준한 철령 고개를 넘어 벼슬살이를 가거나 귀양살이를 가는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한양에서의 일정도 제일 오래 걸렸다. 즉, 남으로 나주까지 8일정, 동래까지 10일정, 북으로 의주까지 10일정임에 대하여 회령까지 21일정이었고, 경흥 서수라까지는 25일정이었으며, 중간의 함흥까지도 10일정이었다. 인마의 왕래도 이와같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물화의 운송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본래 정부가 백성들에게서 징수하는 조세도 함경도·평안도에 한하여는 잉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북지방에서 한양으로 운송되는 물화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함경도 지방은 산악지대이어서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고, 그리하여 흉년 동으로 기근이 잦았는데, 이때에도 중앙에서 진홀을 위한 곡물을 보내기가 쉽지 않아, 정부에서는 경상도 동해안 지방에 비축된 곡물을 해안도로, 또는 연해 해로를 통해 이송토록 조치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08-411쪽
  • 1. 道路(1) 도성내의 도로는 성문을 통하여 성 밖의 도로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전국도로망과의 연결점은 다음과 같다. ⋅서북방면 : 숭례문-경기감영-영은문-무악재-홍제원 ⋅남쪽방면 : 숭례문-이문동┌청파역-와요현-동작진 ├남묘-이태원-서빙고나루 └청파역-당고개-습진터-노량진 ⋅서쪽방면 : 숭례문┌약전현-아현-노고산-창천┌양화도 │ └광홍창-서강나루-밤섬-여의도-영등포 └만리재-마포나루 ⋅동쪽방면 : 홍인문-동묘┌안암동천-제기현-북바위┌무너미고개 | └안락재-중랑포 └영도교-왕십리-차현-살꽃이-송파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당시 전국의 주요도로망은 대체로 9개로 나뉘었으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제1로는 서울에서 의주를 연결하는 도로로서 홍제원을 거쳐 고양 파주 개성을 거쳐가는 1,086리의 거리였다. 이 길은 燕行路 또는 使行路라고 불리웠으며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신들이 오가는 도로였다. 제2로는 흥인문 즉 동대문에서 수유치를 넘어 동북쪽으로 서수라로 가는 길이다. 김화, 금성, 철령, 안변, 원산, 영홍, 함흥, 함관령, 북청, 길주, 명천, 경성,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을 거쳤다. 關北路라고 불렀으며 거리는 2,459리이다. (중략) 이중 제2로는 동대문을 거쳐 현재의 성북구지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간선도로는 지선도로와 함께 광범한 도로망을 형성하였고 오늘날 도로망의 근간이 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53-555쪽
  • 1. 道路(2) 1911년 총독부는 「도로규칙」을 공포·시행했으며, 1911년∼1915년을 제1기 치도사업 5개년계획기간으로 정하고 1917년∼1922년을 제2기 치도사업 6개년계획으로 정하여 사업에 착수하였다. 서울의 가로망은 1912년 일제가 47개 노선을 개수한 것이 그 시초이다. 적극적인 계획은 1936년 조선총독부 고시 제722호로 확정된 220개의 노선과 19개의 광장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현재의 도심부와 영등포의 가로망은 이때 구성된 것이 대부분으로 개설되지 않았던 가로망도 지금까지 효력이 살아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1939년 작성된 計劃街路網一覽에 나타나는 성북구지역의 도로망은 다음의 〈표 1〉과 같다(557쪽 표 참조). 이러한 도로개설 및 그 계획은 당시 경성부 인구의 증가추세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한편 일제에 의한 근대적 도로망의 건설은 그 일차적인 목표가 식민지의 경영과 대륙진출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계획된 것으로 많은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해방 후 미군정통치, 남북분단, 한국전쟁 등의 정치, 사회혼란으로 도로개발은 제대로 수행될 수 없었다. 1960년대에 들어 경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도로건설사업이 추진되었다. 1962년 현재 서울의 도로 총면적은 100만㎡정도이고 총길이는 103만 1,811m 에 달하였다. 이것은 당시 서울시의 총면적 270㎢에 비해 너무 협소하였으며 현대도시로서의 양상을 갖추기에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당시 서울시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시세팽창으로 인한 교통량 소화를 위해 1958년부터 외곽순환도로 조성사업을 1962년에 완공할 목적으로 적극 추진하였다. 이 순환 도로는 한강을 기점으로 하여 한남동-옥수동-금호동-왕십리-고려대학 앞-미아리-정릉-부암동-홍제동-마포-원효로 종점-한강의 노선이었다. 이후 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개발계획이 성공적으로 수립, 시행되면서 경제규모도 비약적으로 확장되었고 또한 차량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이를 수용하기 ,위한 도로건설이 꾸준히 추진되어 왔다. 성북구 지역 또한 이러한 추세와 발맞추어 계속적인 도로건설과 확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92년 12월 현재 성북구관내의 도로 및 시설물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558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56-558쪽
  • 1. 道路(3) 마지막으로 성북구 관내의 도로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화랑로 : 폭 35m 길이 8,000m 하월곡동-화랑대역-태릉선수촌 시계를 지난다. 종암로 : 폭 30m 길이 2,250m 종암동3거리-월곡동-미아3거리를 지난다. 안암로 : 폭 25m 길이 1,700m 대광고교-안암동-종암동3거리를 지난다. 무학로 : 폭 25m 길이 2,000m 안암동4거리-시립동부병원-무학국교를 지난다. 미아로 : 폭 25m 길이 1,500m 돈암동-길음동-미아3거리를 지난다. 정릉길 : 폭 25m 길이 4,350m 북악터널-길음교-월암교를 지난다. 삼양로 : 폭 20m 길이 3,450m 길음 1동-삼양시장-한신국교를 지난다. 회기로 : 폭 20m 길이 1,750m 종암동3거리-회기동-휘경동4거리를 지난다. 돌곶이길 : 폭 20m 길이 1,440m 석관동로타리-염광상고-장위동을 지난다. 삼선교길 : 폭 15-20m 길이 1,000m 삼선교-삼선2동-삼선2교를 지난다. 안감내길 : 폭 15m 길이 1,670m 대광국교-성북구청뒤-돈암4거리를 지난다. 아리랑고개 : 폭 15m 길이 1,450m 돈암4거리-전병원앞-아리랑시장을 지난다. 보국문길 : 폭 15m 길이 2,250rn 청수교-정릉4동-청수장을 지난다. 월곡동길 : 폭 15m 길이 1,150m 종암동-서울사대부중-하월곡동을 지난다. 장위동길 : 폭 12m 길이 1,900m 창문여중-신장위시장-장위 3동을 지난다. 성북동길 : 폭 10∼15m 길이 2,950m 삼청터널-성북2동-삼선교를 지난다. 인촌로 : 폭 15∼20m 길이 1,050m 보문사 사거리-고대병원을 지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58-559쪽
  • 2. 電車 전차와 전기사업을 벌였던 漢城電氣會社는 위와 같은 사업의 호조를 계속 보였으나 전등사업 등에 무리한 시설확장을 하는 등으로 자금난에 빠지자 미국의 Empire Trust Co. 와 합자, 1904년부터 韓美電氣會社로 개정되었다. 그러나 경영난은 계속되어 마침내 일본인이 설립한 日韓瓦斯株式會社에 1909년 6월 23일 일화 120만원에 매도되었다. 이 회사는 한일합방이후 계속 전차노선을 확대하는 등의 성장을 계속하면서 1915년 9월에 사호를 京城電氣株式會社로 바꾸고 일제강점기 내내 전차가 가장 중요한 시내 교통수단이 됨에 따라 독점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당시 성북구 지역을 통과하던 전차노선은 서대문-청량리 노선의 지선이었다. 이 노선은 돈암동에서 출발하여 삼선동, 창경원, 원서동을 거쳐 종로4가에서 본선과 만나고 있었다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종로 4가-창경원-혜화동까지 운행하던 전차노선을 돈암동 버스종점까지 연장하겠다는 것을 발표한 것은 1937년 11월 중순이었다. 즉 종로 4가에서 창경원까지 운행하던 전차노선을 혜화동을 거쳐 돈암동까지 연장 운행하겠다는 것이었고, 돈암동 구획 정리사업에 맞추어 준공이 될 수 있게 1938년3월 에 착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전차부설공사는 1939년 3월 8일에 시작하였으며 4월 15일에는 이미 동소문로터리까지는 개통되었다. 이후 돈암동버스종점까지의 공사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것은 중일전쟁의 발발로 인한 물자부족과 노동력 부족 때문이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공사가 끝나 돈암동에 전차가 들어간 것은 1941년 7월 12일이었다. 이 전차개통을 보도한 신문기사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 12일부터 돈암정버스종점까지 전차가 개통되게 되어 그 부근일대의 교통은 상당히 편하게 되었다. 고양군 숭인면은 호수가 5천에 인구가 3만이나 되며 또 그 주민의 대부분이 시내에 있는 관청 회사 등에 통근하는 터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버스가 매일 6회 밖에 다니지 아니하여 교통상 많은 곤란을 받았다. 이에 面民일동은 면협의회원을 대표로 하여 京電당국에 전차선 개통으로 여유가 있게 되는 버스를 우이동까지 운행하고 운행회수를 늘려달라고 진정하였다.”《동아일보 1939년 4월 14일.》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59-561쪽
  • 3. 自動車 1) 버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는 1939년 2월 1일 오성자동차부에서 전부터 서울 근교를 운행하던 아래 노선의 자동차사업을 인계받아 운영하기도 했다. 아래의 노선중 처음 것과 마지막이 현재의 성북구지역을 통과한다. 종로3가-수유리 9,500m 수유리-화계사 1,200m 수유리-우이동 3,000m 돈암동-정릉리 2,000m 1931년 당시 경성부내의 인구수는 36만 5천명이었고 자동차 보유대수는 200만대도 안되었다. 또 1934년 현재로 고양군 숭인면내에는 한대의 자동차도 없었으니, 당시 이곳 주민이 서울로 들어오려면 하루에 한두번 운행하는 시외버스를 이용하거나 걸어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전반기 경성을 출발하는 시외버스가 화계사와 안암동의 개운사까지 달리고 있었는데, 하루에 두번 정도 왕복 운행하였다. 요금은 화계사까지는 56전, 개운사까지는 20전이었다. 당시에 있어서 가장 손쉬운 교통수단은 자전거였는데, 1932년 12월말 현재의 자전거 보유대수는 성북리 45대, 안암리 75대, 종암리 33대, 돈암리 112대, 정릉리 58대, 이문리 14대, 장위리 39대, 서관리 6대, 상월곡 4대, 하월곡 18대였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 자전거를 갖는다는 것은 일반대중에게 있어서는 쉽지 않았다. 시내버스가 돈암동까지, 안암동을 거쳐 종암동까지 들어간 것은 1935년과 1936년에 걸쳐서이다. 이때 이와같이 시내버스 노선이 들어가게 된 것은 우선 인구증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928년 현재 4,593호 22,185명이었던 숭인변의 인구수는 1933년에는 7,416호 36,797명으로 늘어 戶數에 있어서 61.4%, 인구수에 있어서 65.8%의 증가를 보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돈암리의 경우 1928년의 406호 2,059명이 1933년에는 861호 4,199명으로 증가하여 호수에 있어서 112%, 인구수에 있어서 103.9%의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두번째 이유로는 1934년에 보성전문학교가 안암동 1번지에 입지한 것과 관련이었다. 이어 1939년에는 종전까지 명륜동에 있던 경성고등상업학교(훗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도 종암동으로 이전 입지한 사실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세째는 서울의 행정구역 확장과 시가지계획령의 시행이었다. 서울의 구역확장으로 새롭게 경성부에 편입된 지역 주민의 교통문제는 경성부가 책임지고 해결해 주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이때 경성부시가지계획에는 돈암지구 구획정리사업이 포함되었는데, 이 사업과 관련하여 교통문제가 시급한 과제가 되었던데 그 원인이 있다. 네째는 시내버스의 운영권이 경성부에서 경성전기주식회사로 이양되었다는 점이다. 즉 시내버스를 경성부가 운영할 때에는 그 노선이나 운영방법이 관료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차와의 경쟁을 의식하여 전차가 다니던 길을 중복하여 버스도 운행하였으므로 경쟁이 치열하여 결국 전차시내버스 모두의 영업실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부영버스의 경우 1930년도 收支決算이 겨우 1원 48전, 1931년에는 14원 63전이 되어 사실상 缺損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시내버스를 인수한 경성전기주식회사는 전차 및 버스의 경영합리화를 위하여 버스노선을 전차노선과 병행시키지 않았으며 원칙적으로 전차가 다니지 않는 구간을 택함으로서 버스를 전차의 보조수단으로하였다. 즉 전차를 내리면 버스를 탈 수 있게 하여 하나의 표로서 전차와 버스의 승환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요금은 종전대로 5전으로 하였다. 이때 돈암동 종암동 등에 京電이 운영하는 시내버스가 들어간 정확한 일자는 확인할 수가 없으나 아마도 1934년 1935년경이었으리라 추측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66-568쪽
  • 4. 지하철 여기에서는 성북구 지역을 통과하는 지하철 4호선을 중심으로 지하철의 건설과정과 현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원래 1971년 서울시 지하철 건설본부가 발족한 후 구상했던 지하철 노선은 제1호선에서 5호선까지의 5개 노선 133.04㎞였고, 이는 일본에서 파견된 교통조사단의 조사에서도 타당하게 보았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호선 : 서울역-종로-청량리 (9.14㎞) ⋅ 2호선 : 강남구 삼성동-성수동 경마장-왕십리-을지로-마포-여의도-김포(35.5㎞) ⋅ 3호선 : 성북구 미아동-혜화동-퇴계로-영천갈현동(21.5㎞) ⋅ 4호선 : 경부고속도로 입구-율곡로-대림동-사당동(34.5㎞) ⋅ 5호선 : 천호동 신설동-종로-신촌 (32㎞) 그해 12월에는 위 2·3·4호선의 도심반경 5㎞를 통과하는 37.8㎞에 대한 측량을 마치고 계획을 확정하였다. 그런데 실제의 2·3·4호선은 원래의 계획과는 관계없는 새로운 노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까지의 서울은 모든 기능이 도심에 집중된 單核都市였기 때문에 교통은 혼잡과 마비를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영동·잠실을 하나의 핵으로 개발하고 영등포지역을 또하나의 핵으로 개발하여 서울을 3개의 핵을 가진 「多核都市」화 해야한다는 다핵도시론이 도입되었다. 1975년 5월에 제출된 「지하철 순환선(강남강북)건설을 위한 기술 및 경제성 조사」라는 용역보고서는 당시 650만의 인구 중 72%가 강북에 밀집되었던 상황을 순환 지하철의 건설을 통해서 1980년대를 기하여 강남·강북의 인구비를 50 : 50으로 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목표로 2호선의 노선은 재조정되었고 그에 따라 3·4호선의 노선도 재조정되었다. 한편 多核都市化는 긴 시일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단기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2호선이 도심부를 통과하여 많은 도심부 유출입 승객을 수송하기는 하였지만 서울시의 특수한 放射環狀的가로망과 도시발전형태로 인하여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사당, 봉천, 신림동이나 역삼, 서초, 양재동에서는 도심유출입을 위하여 지하철 2호선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것은 2호선이 많이 우회하게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또 구파발·불광동과 수유·상계동 등지의 도심유출입이나 방사선형 상호유출입은 도심과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2호선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특수한 가로망과 방사선형태의 도시인 서울의 균형있는 발전과 근본적인 도시교통의 개편을 위해서는 도심을 방사선형으로 관통하는 지하철 3·4호선의 건설은 필연적이었으며 이는 이미 2호선 건설시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구체적인 건설계획의 추진은 1978년 서울시가 민자건설계획을 발표하고 2호선 시공업체에게 이 사업에 적극 참여할 것을 촉구하면서 비롯되었다. 그후 계획의 검토와 경제장관협의회의 결정을 거쳐 1979년 2월 19일 지하철 3. 4호선 민자건설계획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민자건설에 대한 종합적 분석결과 지하철의 조기완공과 정부의 자금지원 등에 문제가 생겨 다수의 건설업체가 공동참여하도록 했다. 이에 국내 23개 우수건설업체가 공동출자하여 지하철 3·4호선 전담 건설업체인 「서울지하철주식회사」가 1980년 3월 11일 설립되었다. 이보다 앞선 2월 29일에는 지하철3·4호선이 구파발3거리와 수유3거리에서 기공되었다. 한편 주주와 시공주가 동일한 관계로 철저한 감리가 곤란하였고 또 건설업체의 출자능력에도 한계가 있어 서울시는 보다 적극적인 사업추진을 위하여 1981년 8월 31일 자본금 500억원으로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를 설립하여 9월 1일 발족하게 되었다. 기공이후 5년 8개월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4호선의 경우는 1985년 4월 20일 상계동에서 한성대입구역(삼선교)옆 11.7㎞ 구간이 1차로 개통되었다 나머지 구간은 1985년 7월 16일부터 시운전에 필요한 준비작업을 마치고 8월 18일부터 시운전에 들어가 1985년 10월 18일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지하철 4호선의 총연장은 30.3㎞로 역의 수는 24개이며 갈아탈 수 있는 역은 창동역을 포함하여 7개이다. 90년 현재 298대가 운행되며 운행소요시간은 약 47분으로 1일 402회 운행되어 표준속도는 35㎞/h 이다. 성북구 관내에는 한성대입구역, 성신여대입구역, 길음역 등이 있다. 1990년도 지하철 4호선의 수송인원은 2억 1449만 729명으로 서울시 지하철의 여객수송인원 11억 6994만 6667명의 약 18.3%를 차지하고 있으며, 수입액은 411억 3,487만 6,670원으로 전체 수입액 1,947억 5,385만 1,44.0원의 약 21.12%를 차지하고 있다. 하루평균 52만 2,016명이 이용하며 정기 여객수는 33.2%를 차지한다. 여객 1인당 평균승차거리는 16.2㎞이다. 성북구 지역 지하철역의 시간대별 승차인원은 다음의 표와 같다. 이표에서 보듯이 이용객의 대부분이 출퇴근시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오전 출근 시간인 08:00-09:00의 혼잡도가 길음역은 232%, 성신여대입구역은 무려 263%에 달한다. 성북구 관내 지하철 2호선의 시간대별 승차인원현황은 〈표 2〉 와 같다(575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72-575쪽
  • 3. 自動車 2) 승용차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의 높은 성장과 생활양식의 변화로 승용차 소유내용이 예전과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즉 자가용승용차의 비중이 영업용보다 더욱 높아진 것이다. 1992년도 12월 현재 성북구 관내 자동차 등록 현황은 다음과 같다(572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72쪽
  • 2. 우편 한편 1905년 을사조약으로 회원권을 상실하였던 만국우편연합(U.P.U) 에도 정부 수립과 동시에 가입자격을 얻게 되었다. 1952년 1월 19일 만국우편연합으로부터 1949년 12월 17일자로 소급하여 가입이 제확인되었음을 통고받았다. 당시 성북구에는 돈암동에 서울 돈암동우체국이 있었다. (중략) 이어 1967년부터 1971년까지의 제2차 통신사업 5개년개획에서는 통신수요가 높은 농촌·도서지방이나 도시에 우체국을 계속 신설하고 기존 우체국에 대해서는 증축을 단행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이 기간중인 1970년 7월 1일에는 전국적으로 우편번호제가 실시되었다. 이는 당시 경제의 발전으로 우편량이 급격히 증가, 신속하고 확실한 우편 서비스를 위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편번호제의 실시로 우편물 폭주에도 신속히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우편번호제는 처음에는 3자리의 머리번호와 두자리의 꼬리번호로 이루어졌었는데 1988년에 전체 6자리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표 3〉은 현재 성북구 관내의 우편관서 현황이다(583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82-584쪽
  • 1) 電信 1905년에서 1943년까지 우리나라에는 1,087개소의 전신취급소가 설치되었다. 일제시대 성북구지역에는 돈암동에 전신취급소가 있어 당시의 전보를 취급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85쪽
  • 2) 電話 80년대에 들어서는 전자교환과 광통신시대가 도래하여 혁신적 진보가 이루어졌다.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발족하여 전기통신사업은 공영화하였고 연간 100만회선 이상의 신규 전화를 계속 공급하여 극심한 전화적체를 해소하였다. 현재 성북구 관할구역의 전화업무는 성북·미아·청량리·혜화전화국에서 담당하고 있다. 성북구 관내의 전화보유현황은 다음 〈표 4〉 와 같다(587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86-587쪽
  • 근거자료 p.4 표<1939년 성북구 지역의 도로망>
  • 우체국 수(단위: 개) 2014: 18 2015: 18 2016: 18 2017: 16 2018: 16
    기획예산과(통계기록팀), 2019, 제34회 성북통계연보 , 168쪽
    제34회 성북통계연보의 '우편시설'에 기록된 수치를 옮긴 것이다.
  • 자동차등록(단위: 대) 2018년 합계: 116,543(관용: 286 자가용: 110,754 영업용: 5,503) 승용차: 99,950(관용: 96 자가용: 97,220 영업용: 2,634) 승합차: 5,362(관용: 38 자가용: 4,168 영업용: 1,156) 화물차: 11,078(관용: 143 자가용: 9,313 영업용: 1,622) 특수차: 153(관용: 9 자가용: 53 영업용: 91) 이륜자동차: 26,271(관용: 184 자가용: 26,087)
    제34회 성북통계연보의 '자동차등록'에 기록된 수치를 옮긴 것이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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