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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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구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성북구는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동북쪽에 위치하면서도 가까워 도성으로 접근하는 주요 길목이었다. 또한, 경관이 좋아서 왕실이나 양반층의 별서지이기도 하였고, 왕실의 원찰이나 왕릉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도성 방어를 위해 성북동 지역에 둔전을 배치하고, 둔전민들에게 포백과 훈조의 독점권을 주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돈암동 지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개발이 이루어져 새로운 도심으로 성장한 반면, 3.1운동부터 의열단 활동, 노동자의 투쟁 등 항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몇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과 성북천의 복개와 복원을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성장해왔는데, 도시의 개발과 보존, 환경과 생태의 어울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성북구
  • 시내일부동명개정(市內一部洞名改正)
  • 구역지번동명변경(區域地番洞名變更) 영등포(永登浦)·돈암동(敦岩洞) 등(等)에
  • 제1회 성북구 민간기록물 수집 공모전_성북의 어제, 오늘, 내일(성북구청 구정홍보영화)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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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근거자료 원문

  • Ⅳ. 光復後의 급격한 變化 1. 光復, 政府樹立, 城北區의 탄생 1) 光復과 城北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시작한 日皇의 항복방송은 약 30분 가량 계속되었다. 이 방송이 끝나자 마자 일본 항복, 한국 독립의 소식은 순식간에 온 시내에 퍼졌고 감격에 들뜬 군중들은 거리로 뛰쳐 나왔다. 광화문과 종로네거리와 서울역전은 이들 군중들로 메워졌고 특정의 선창자도 없이 독립만세 소리가 간단없이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이 군중의 행렬은 다음 날에도 또 다음 날에도 계속되었다. 35년간의 그 지긋지긋했던 질곡의 나날, 황민화운동·징병제도·강제공출·창씨개명·조선어 사용금지·방공훈련·근로봉사 등등의 모든 것에서 해방된 100만 서울시민의 한결같은 감격과 기쁨이 하나의 도가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고 행복된 미래만을 기약해 주지 않았다. 한반도가 북위 38도선으로 분단되어 남반부는 미군, 북반부는 소련군의 점령하에 들어간 젓이었다. 태평양 미육군총사령부 포고 제 1·2·3호라는 것이 발포된 것은 9월 9일이었고 아놀드소장을 장관으로 하는 미군정청이 정식으로 조직·발족한 것은 9월 20일이었다. 한민족이 그렇게도 갈구하던 조국의 독립과 통일이 이룩되기에는 아직도 험난한 우여곡절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광복 당시 한반도 전역에는 약 71만 3천여명의 일본 민간인과 34만 7천명의 일본군인이 있었으며, 그 중 서울에는 민간인 16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고 군인 3만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다. 서울에 있던 이들 일본인들은 일반인·군인을 가릴 것 없이 1946년 4월경까지는 거의 모두가 떠나갔다. 그러나 그 대신 일본·만주·중국 등지에서 거주하던 120만명의 동포가 환국하여 주로 서울·부산·대구 등 대도시지역에 정착하게 되고 거의 50만명에 가까운 북한주민들이 공산체제를 벗어나 남하·정착한 때문에 서울·부산·대구 등지의 인구수는 갑자기 늘어났다. 1944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인구통계에 의하면 서울의 인구수는 988,537명 (그 중 일본인 158,710명)이었는데 그간에 일본인이 모두 떠나 갔음에도 불구하고 1946년 11월 30일 현재의 조사로는 124만 5천명에 달하고 있었다. 광복 후의 3. 4년간 온 나라 안이 모두 그러하였지만 그 중에 서도 특히 서울은 정말 숨가쁜 혼란의 나날이었다. 떠나가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은행권 남발이 원인이 된 심각한 물가앙등, 극도의 쌀(米) 부족 등의 경제적인 혼란과 더불어 신탁통치의 반대와 찬성으로 첨예화한 좌우익투쟁,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國大案 반대와 찬성, 철도노조의 파업에 의한 철도 운행 정지, 京電勞組의 파업에 의한 시내전차의 운행정지 등등의 사건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서울시민은 꿋꿋이 견뎌갔고 시민의 수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모두 7장 58조로 된 서울시헌장이 미군정에 의하여 발포된 것은 광복 1주년을 맞는 1946년 8월 15일이었고 이 헌장의 정신을 받아 그 해 9월 18일자로 「서울특별시 설치」에 관한 군정법령 제 106호가 발포되었다. 즉 그때까지 경기도 관할하의 普通市였던 것이 道와 같은 지위로 승격된 것이다. 참고로 이 법령의 제 1조는 「서울시를 경기도 관할로부터 분리함」이었고 제 2조는 「서울시는 조선의 수도로서 특별시로 함. 서울시는 도와 동등한 기능 및 권한이 유함」이었다. 이 법령의 발효일은 1946년 9월 28일이었으니 바로 서울특별시 시대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이어 이 해의 10월 1일부터는 종전의 일본식 洞里名이 모두 유서 깊은 우리의 동명으로 개칭되게 된다. 初音町이 五壯洞으로, 花園町이 藝館洞으로, 大和町이 筆洞으로 바뀌는 등이 그것이었다. 이 때 몇몇 先人의 讀號도 사용케 되었으니 本町이 忠武路, 黃金町이 乙支路, 竹添町이 忠正路, 元町이 元曉路로 개칭된 것이다. 그러나 城北地域의 경우는 1936년에 崇仁面이 京城府에 편입될 때 그들은 일부러 日本式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城北里는 城北町으로, 敦岩里·安岩里·鍾岩里도 각각 町으로 그 끝 글자를 바꾸는데 그쳤으므로 町을 洞으로 바꾸는 작업만이 이루어졌다. 즉 城北町이 城北洞으로, 敦岩町이 敦岩洞으로 등의 개정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아직도 崇仁面 관내에 그대로 남아었던 長位里·牛耳里·水踰里등의 명칭은 광복 후에도 종전 그대로의 명칭을 답습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47-149쪽
  • 第2章 城北區의 발자취 I . 甲午改華以前 1.先史文化와 城北地域 城北地域일대에 우리 조상들이 정착하여 문화생활을 시작한 것은 歷史時代이전으로 생각된다. 즉, 성북지역은 北漢山줄기가 서남방으로 뻗어 龍岩峰• 柴丹峰을 지나 大東門과 普國門 어간에서 갈라진 칼바위능선을 동쪽으로 하고, 이어 北漢山城의 능선을 따라 普賢峰에서 兄弟峰을 잇는 능선을 따라 북악터널 위를 가로질러 北岳山 鷹峰에서 都城을 따라 내려오는 山勢를 북쪽으로 하여, 그 사이 계곡을 흘러 淸溪川 • 中浪川에 이어 漢江으로 들어가는 貞陵川 • 安岩川 • 牛耳川을 끼고 그 산록의 동남방에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背山臨水의 천연의 생활터전을 바탕으로 先史文化이래 오늘날까지 주거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북구지역은 넓은 의미에서 漢江流域의 서울지역의 일부라는 지리적 여건을 가지며 漢江邊 先史文化團에 포함되는 일반 생활문화권이라는 개연성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성북구지역 일대에서 舊石器• 新石器• 靑銅器의 文化遺跡이 발굴되지는 않았지만 江東區 岩寺洞 先史住居址, 城東區 鷹峰遺跡, 松坡區 可樂遺跡, 江南區 驛三遺跡 등 한강변 선사문화유적을 통하여 보다 넓은 한강유역문화권에 城北區地域을 포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즉, 성북구지역의 先史時代이래 古代의 역사적 발자취는 성북구지역의 독자적인 범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한강변 서울유적이라는 보다 넓은 자연지리적 여건속에서 전개된 동질의 문화를 공통으로 영위한 일반적인 생활터전을 바탕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人類는 대개 地質學的인 시대로 볼 때 新生代 3期末에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현재 고고학적으로 발굴하여 알 수 있는 가장 오랜 舊石器遺物은 그보다 훨씬 후인 신생대 4기 洪積世기간의 인류활동의 결과로 남은 것이다. 따라서 인류사에 있어서는 약 200만년 전에 시작된 홍적세를 흔히 구석기시대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들은 홍적세를 지나 沖積世에 살고 있으며, 충적세의 시작은 대개 지금부터 약 1만년 전쯤으로 보고있다. 이러한 홍적세 • 충적세 시기에 전개된 구석기 • 신석기시대의 주민들은 혈연공동체인 씨족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주로 漁撈 • 狩獵 및 자연물 採集에 의한 經濟生活을 영위하였으며, 신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 定着農耕生活을 시작하면서 牧畜生活과 食糧生産經濟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식량채집단계에서 식량생산단계로의 발전을 新石器革命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生産力증가를 통해 인류생활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강변의 신석기인의 주거지는 움집 • 동굴주거 • 부석주거 등이 있었으며, 난방과 요리를 위한 화덕자리와 계단시설을 갖춘 출입문, 그리고 주거지 외곽에 貯藏孔을 만들어 비축식량을 보관하였다. 아울러 짐승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하였으며, 식포기술의 개발로 직물을 이용한 衣類生活을 하였다. 한편 靑銅器遺跡은 대개 구릉지대나 산의 경사면에 위치하였으며, 農耕生活을 주업으로 하였다. 청동기인들은 주위의 하천과 깊은 관련을 가지며 生活用水를 확보하고 본격적인 잡곡농경과 후기에 들어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벼농사의 시작은 청동기문화의 대표적인 경제생활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生産力의 증가와 人口의 증가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발전을 이룩하는 轉期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農耕의 발전과 金屬器의 사용은 原始共産體社會의 평등사회를 탈피하여 私有産制에 따른 재산상의 貧富차이와 지배 • 피지배의 階級關係를 발생시켰다. 따라서 富와 權力을 가진 지배계층이 등장함으로써 政治組織이 형성되고 나아가 君長社會 • 古代固家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4-55쪽
  • 2.統一新羅以前의 城北地域(1) 목축과 농경을 통한 생산력의 증가는 인구증가와 더불어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分業을 발생케 하였으며, 이것은 社會組織과 政治組織을 이루는 변화토대가 되었다. 즉, 氏族社會의 族長勢力을 점차 剩餘生塵物을 독점하고 金屬器文明의 혜택을 우선적으로 향유함으로써 支配階級으로 정착하였으며, 下部族員들은 생산담당자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社會分化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회분야는 씨족사회를 벗어나 部族社會내지 部族聯盟體社會로 발전하였는데, 사회 내부적으로는 일정한 身分體制를 구축하여 이 체제를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統治組織을 이룩하였으며 외부의 다른 사회 • 통치조직과 경쟁 • 대립하여 생존키 위한 공동체로서의 政治組織을 형성케 하였다. 즉, 軍隊• 法律• 監獄 • 租稅 • 官燈組織• 政治理念등을 내용으로 하는 固家體의 등장이 이루어졌다. 우리 역사에서 城北區地域을 포함한 漢江流域을 무대로 최초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辰國과 馬韓 그리고 初期 百濟이었다. 한강유역의 政治勢力의 존재는 이 지방에 支石墓가 발달한 것과 때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석묘의 존재는 族長權 즉, 君長의 정치세력이 그만큼 컸던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지석묘 건립을 위한 노동력의 동원체제를 구축했던 정치조직의 실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滿洲地方에 古朝解 • 扶餘• 高句麗가 국가체제의 정치조직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한강유역 이남에서도 일찍이 문화적 통일성을 가진 정치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즉, 辰國의 존재가 있었다. 기원 전 2세기 후반의 기록에 辰國은 漢나라에 서신을 보내 직접적인 通交를 하고자 하였으나 衛氏朝鮮의 방해로 저지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辰國을 포함한 한강이남 사회에는 기원 전 2세기 초 衛滿에게 쫓겨 海路로 南下한 準王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을 통해 金屬文化가 일반화되어 갔다. 또 衛氏朝鮮의 멸망 후 漢郡縣의 설치로 古朝鮮지방으로부터 수많은 流移民集團이 쉬지않고 辰國社會로 유입되었다. 따라서 이들 유이민들을 통해 발달된 鐵器文化의 혜택을 받은 辰國社會는 더욱 분화 발전하여 한강유역 이남지역에 馬韓·辰韓·弁韓의 三韓聯盟體가 등장하였다. 그 가운데 오늘날의 京離·忠淸·全羅地域을 중심으로 馬韓이 형성되었다. 馬韓은 54개 城둠國家의 연맹체로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큰 나라는 1萬餘家, 작은 나라는 敎千家로 총 10萬戶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한 나라인 目支國을 辰王이 다스렸으며, 여러 국가에는 각각 長帥가 있어 다스렸는데 큰 것은 民智, 다음은 邑借라 하였다. 그런데 目支國의 辰王은 三韓세력을 대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상징적인 존재로 주로 宗敎行事나 戰爭때의 통솔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辰王은 스스로 古代國家의 王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이후 三韓社會는 2세경에 들어 北方流移民의 흡수에 따라 유력한 정치세력이 등장하는데 馬韓의 目支國을 비롯하여 伯濟國, 辰韓의 斯盧國, 弁韓의 狗耶國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城北區地域과 후에 관련되는 伯濟國은 馬韓 54개국의 하나로 북방유이민들이 현 서울지방인 한강유역에 자리잡은 君長社會였다. 여기서 백제국의 세력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辰王이 맹주가 되었던 馬韓聯盟體는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종국에는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百濟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초기 정치세력의 성장과정 속에서 성북구지역은 辰國·馬韓의 伯濟·고대국가 百濟의 영역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5-56쪽
  • 2 .統一新羅以前의 城北地域(2) 百濟가 漢江流域을 중심으로 古代國家로 성장 발전함으로써 城北區일대는 백제세력권에 편입되었다. 백제의 고대국가로의 성장은 한강변의 지리적 여건과 鐵器農耕文化에 의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이에 따른 사회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政治主體集團이 성립됨으로써 가능하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紀에 따르면 기원 전 1세기경 앞선 유이민들의 南下를 뒤이어 夫餘系高句麗流移民집단이 황해도지방을 거쳐 漢江流域에 정착하고 있다. 이는 크게 沸流系와 溫祚系로 나타나는데 百濟建國說話에서 보는 바대로 비류집단은 彌鄒忽(인천지방)에 온조집단은 현재 서울지방인 慰禮城에 정착하고 있다. 이들은 한강유역의 경제성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생산활동과 인구의 증가에 따라 보다 큰 정치집단을 형성하였다. 아우인 온조집단에 의해 형인 비류집단이 통합되고 국호가 十濟에서 百濟로 고쳐졌으며 그 통치범위가 서해안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域北區地域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北部의 解婁集團과 眞氏集團, 그리고 東部의 屹于集團 등은 독자적인 세력권은 가지면서 온조집단에 편제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강유역의 여러 유이민집단들은 초기에 각기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 연맹체들은 온조집단을 중심으로 통일된 국가체로 발전하였다. 한편 百濟의 도읍지를 말할 때 慰禮城이라 칭하여 河北慰禮城과 河南慰禮城으로 구분하고 있는 바, 城北區地域과 관련하여 北漢山東麓의 河北慰禮城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三國史記의 백제 건국설화를 통해 백제 시조의 계보와 그들의 정착지 즉, 都邑地와 그곳의 지리적 형세를 살펴볼 수 있다. 高句麗의 시조 朱蒙은 東夫餘에 있을 때 瑠璃를 낳고 卒本夫餘로 남하한다. 이곳에서 다시 沸流와 溫祚를 낳았는데 뒷날 유리가 졸본부여로 남하하여 주몽의 태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비류와 온조는 10臣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浿水(예성강)와 帶水(임진강)을 건너 남하하여 漢江(서울)에 이르고 이곳에서 慰禮城에 도읍하게 된다. 그러나 10여년 뒤에는 형인 沸流가 미추홀로 분파되어 가고 溫祚는 河南慰禮城으로 도읍을 옮기고 있다. 즉 기원 전 18년 河北의 위례성에서 河南의 위례성으로 천도하고 그곳에 정착하여 百濟國을 건국하고 있다. 이와 같이 溫祚集團이 첫 근거지로 한 慰禮城은 한강 북쪽에 있었으며, 10여년 후에 河南으로 도읍을 옮기니 河北·河南慰禮城의 존재가 등장된 것이다. 그럼 河北慰禮城의 위치에 대해 三角山東麓說과 관련지어 그곳이 城北區·道峰區地域에 비정되기에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學說的인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河北慰禮城은 비류·온조집단이 처음 정착한 곳이다. 그러나 위례성이 도읍지로서의 명칭인지 城邑國家로서의 國號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慰禮’라는 명칭이 城柵에 특징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위례’는 방언에 사방을 둘러친 것을 ‘圍哩’라고 하는데 ‘위례’와 ‘위리’는 그 말소리가 비슷하며, 또 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흙을 쌓아 匡郭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慰禮’라고 한 것으로 풀이하였다. 또, 위례성이 성책의 특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초기의 도읍지인 위례성은 ‘愚禮國’ 또는 ‘慰禮城’으로서 성읍국가를 지칭한 일반명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河北의 慰禮는 夫餘氏남하이래 오랫동안 기초를 다져오던 곳으로, 이를 중심으로 一國을 개창하게 되었으므로 당시의 국호를 愚禮라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河北慰禮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 종래에 慰禮城이 忠淸南道 稷山에 있다는 稷山說과 漢江北岸說, 그리고 河南慰禮城의 廣州說 등이 있어 왔다. 또 漢江以北說은 다시 三角山東麓說과 洗劍亭一帶說이 제기되어 있다. 朝鮮時代의 官撰 地理志들은 위례성을 忠淸道 稷山縣이라 하였다. 즉, 東國與地勝覽에 보면 그 위치는 직산현 聖居山 북쪽 5里쯤에 있고, 土築으로 된 城이라 하고 있다. 직산현의 郡名이 본래 위례성이며 온조가 남하하여 이곳에 도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직산설의 始源을 보면 三國遺事 王曆 溫祚王條에 ‘…都慰禮城一云蛇川 今稷山’이라 한 것이 가장 오랜 기록인데, 이와 같은 高麗時代이래의 인식이 조선시대까지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朝鮮後期에 들어 申景濬·柳馨遠 등 實學者들에 의해 稷山說이 비판·부인되었다. 특히 茶山 丁若鏞은 백제의 첫 도읍지인 慰禮城은 稷山이 아니라 漢江北岸임을 명쾌하게 논증하였다. 즉, 그 절대위치는 惠化門밖 10里 지점인 三角山東麓의 漢陽洞이 그곳이라 하고, 그 증거로 옛성의 흔적이 있으며, 또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곳을 가리켜 漢陽古縣이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의 城이란 다만 나무울타리를 하고(樹柵) 흙을 쌓았기(築土) 때문에 흔적은 있지만 돌은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혜화문 밖 10리 지점이 곧 성북구·도봉구 일대로 비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丁若鏞의 견해는 조선말기 古山子 金正浩의 大東地志에 이어져 위례성이 한강 이북에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한강 이북설은 정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丁若鏞·金正浩의 三角山東麓說은 근년에 이르러 그 견해를 달리하여 백제초기의 위례성은 洗劍洞一帶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아뭏든 많은 異說로 분명한 위치가 정립되지 않았지만 한강북안이나 삼각산동록·세검동일대 등 모두 오늘날의 서울 江北地域이었던 점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한편 최근에 이르러 河南慰禮城에 대해서도 여러 說이 있으며 이를 종합적으로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59쪽 표 慰禮城의 位置比定과 初期 遷都過程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6-59쪽
  • 2. 統一新羅以前의 城北地域(3) 한편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정치제제를 구축하고 그 세력을 성장시켜 나간 百濟는 가장 먼저 馬韓과의 관계를 맺었다. 백제의 온조집단이 처음 남하하였을 때 마한이 한강유역 100리의 땅을 이들에게 할애해 줌으로써 백제가 정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溫祚王은 사냥한 神鹿을 마한에 보내고, 또 포로가 된 靺鞨의 추장을 마한에 보내고 있는데, 이것은 百濟初期에 馬韓에 대해 朝貢關係를 맺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백제세력이 팽창되면서 상대적으로 마한은 쇠퇴하였으며, 마침내 百濟는 마한 중심세력을 악화시키고 영토의 확장을 가져왔으며, 溫祚王때에는 이미 북으로 浿河(예성강), 남으로 熊川(안성천 혹은 금강), 서는 大海(서해), 동은 走壤(춘천) 지방에 이르는 영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역의 확보와 더불어 이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자 王都이외 지역에 東·西·南·北의 四部가 설치되어 지방통치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馬韓의 공멸과 행정구역의 편제 등 급속한 정치공작에 대하여 마한의 잔존세력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고 百濟는 한반도 서남부의 최대세력으로 성장하여 古代통일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아울러 4部體制를 설정하고 國內 民戶를 분정하여 稻田作을 장려하는 등 확대된 영토를 배경으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단계적으로 이룩하였다. 한편 百濟初期 4部 편제속에서 河北慰禮城의 위치가 어떠했는가는 자세치 않지만, 百濟가 475년 公州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하북위례성이 보수되고 있고, 또 漢江 북쪽의 주요 거점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1部의 한 중심성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比流王24년(327) 內臣佐平 優福이 北漢城을 거점으로 모반을 하는데 이는 한강이북의 한 중심성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레라 할 수있다. 따라서 하북위례성이 百濟의 兩京制조직처럼 인식하는 견해도 있다. 이렇게 볼 때 하북의 慰禮城은 초기의 도읍지였으며, 또 그 만큼의 비중이 있었던 것으로 兩京制의 가능성이 전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4部體制의 중심성의 하나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온조왕 17년(B.C 2) 위례성은 樂浪의 침입으로 불태워졌고, 온조왕 41년(23)에 漢水 東北部제부락의 15세 이상 民戶들을 정발하여 修營하고 있다. 즉, 위례성이 한강 북쪽의 중심성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한편 蓋婁王 5년(132) 에는 北漢山城을 축성하고 있다. 여기서 北漢山城을 慰禮城과 동일하게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위례성은 平地(구릉 포함)에 이루어진 성이라 하면 북한산성은 명실공히 山城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兩城은 별개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이같은 2원적인 城의 확보는 平時에는 平地城에, 戰時에는 山城에 入保하는 시대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北漢山城이 축조된 이후로는 北漢城이란 명칭이 보이게 되며(比流王 24년 : 327), 江南의 도읍지는 漢城으로 불리고 있다. 어쨌든 慰禮城이란 ‘樹柵築士’한 平地城으로 따로이 保障之地로서의 山城인 北漢山城의 축조는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責稽王 원년(286) 하북위례성을 高句麗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축하고 있는 데, 이는 북한산성과 밀착되어 있어 民戶의 안정을 도모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百濟는 漢郡縣의 세력인 樂浪과 처음에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先進文化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전쟁을 치루는 적대관계에 들어갔으며 이에따라 백제는 한강이남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낙랑과 통하는 길을 봉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 城北區 지역의 위치는 한강 이북에서 백제세력이 낙랑지역으로의 진출과 방어의 길목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百濟가 中央集權的 통치체제를 정비한 것은 대체로 3세기 중엽 제 8대 古爾王(234∼286) 때이다. 즉, 고이왕 27년(260) 6佐平과 16官等制를 마련하고 公服制度를 정비하였다. 이듬해 왕이 南堂에서 정사를 보았으며, 律令을 반포하고 官吏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적질 한 자는 3배의 배상을 물리게 하는 동시에 종신토록 금고에 처하였다. 이러한 통치체제의 정비는 온조왕이래 진행되어온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을 위한 제도적 조치였던 것이다. 이렇게 국가체제를 정비한 백제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4세기 초 낙랑·대방을 계속 공략하면서 크게 팽창하였으며, 比流王 34년(337) 에는 新羅에서 사신이 파견되자 수교를 하기도 하였다. 이어 漢城에 도읍한 백제는 4세기 중엽 近肖古王 (346∼375) 때에 이르러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근초고왕은 남으로 馬韓 여러나라를 쳐서 369년경에는 전라도 남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가야국에도 압력을 가했으며, 북으로는 옛 대방땅에 진출하여 고구려군대를 격파하였으며, 371년에는 太子와 함께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故國原王을 전사케 하여 남진하는 고구려세력을 저지하고 대방군 대부분을 확보하였다. 따라서 百濟는 한반도의 서반부인 경기·충청·전라의 전부와 낙동강중류역·강원·황해도 일부를 차지하는 領域國家로 발전하였다. 아울러 372년에는 東쯤에 사신을 보내 중국대륙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倭와도 통하여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또, 백제는 西海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중국 遼西地方에 진출하여 상업활동을 전 개하는 한편 전략적 가치를 지닌 해안식민지와 같은 성격을 지닌 遼西·晉平郡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일본지역에는 이미 한반도에서 일본열도에 진출했던 고구려계·백제계·가야계 등 이주민이 건설한 식민국가가 있어 백제의 고대 해상세력이 용이하게 慶지역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백제는 중국과 왜를 연결하는 국제무대의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0-62쪽
  • 2. 統一新羅以前의 城北地域(4) 한편 高句麗는 4세기 후반 백제의 평양성 공격으로 왕이 전사를 당하는 시련을 맞이하여, 대외적인 팽창을 지양하고 대내적인 체제정비와 국력신장을 꾀하였다. 小獸林王은 372년 佛敎文化를 수용하고, 太學을 세워 귀족자제를 교육하였으며, 373년에는 律令을 반포하여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질서를 새롭게 하였다. 이러한 국력신장을 배경으로 391년 이후 廣開土王·長壽王 때를 거쳐 南下政策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니, 백제의 도읍지였던 城北區지역을 포함한 서울지역은 兩國의 각축장이 되었다. 광개토왕 이전 375년∼390년 사이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한 것이 4회, 백제가 고구려를 침공한 것이 3회였다. 이러한 양국의 공방전에 이어 광개토왕의 백제침공은 그 즉위년부터 시작되었다. 광개토왕 원년(391) 왕이 직접 4만군을 이끌고 백제의 石峴城 등 10여성을 공격하여 한강 이북의 여러 부락을 함락시켰으며 關彌城(강화 교동)을 공략하였다. 한편 ‘廣開士王確文’을 보면 永樂 6년(396) 王은 水軍을 이끌고 海路를 통하여 관미성과 彌鄒城(인천)을 장악하고, 阿旦城(성동구 아차산성)·大山韓城(한성 혹은 북한산성) 동 58城과 그 주위 700村을 공략하여 漢江北岸을 점령하였다. 이때 백제 阿莘王이 항복하지 않고 항전하자 광개토왕은 阿利水(한강)를 건너 精兵으로 백제의 도읍인 漢城을 육박하니 아신왕은 세력이 궁하여 남녀 1千口와 細布 1천필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에 광개토왕은 백제의 王弟와 大臣 10인을 인질로 하여 돌아왔다. 이후 백제의 아신왕은 고구려에 설욕하고자 397년 太子 腆支를 倭에 보내어 화의를 맺고, 399년 任那加羅·慶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는 등 군사를 일으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광개토왕의 백제정벌은 故國原王의 전사에 대한 설욕으로 보복의 의미가 컸던 것이며, 漢城을 포함한 한강유역에 대한지배권은 여전히 百濟에 있었다. 그후 高句麗는 長壽王(413∼492) 이 즉위하여 427년 도읍을 國內城에서 平壤城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南進政策을 추진하여 영토확장과 지배권의 팽창을 꾀하였다. 이에 百濟는 毘有王 7년(433) 新羅에 사신을 보내어 화의를 청하고 羅濟同盟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에 대응하였다. 그러나 장수왕은 475년 군사 3만명으로 漢城을 공략하여 백제의 蓋鹵王을 살해하였다. 이로써 百濟는 漢江流域을 고구려에게 내주고 熊律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향후 77년간 城北區지역을 포함한 서울지방은 고구려의 통치하에 들게 되었는데, 때로는 백제의 반격으로 그 영향력이 미치기도 하는 접경지역이 되기도 하였다. 이때 高句麗는 서울지방을 중심으로 北漢山郡을 설치하고 北漢城에 南平壤이라는 別都를 두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2-64쪽
  • 2. 統一新羅以前의 城北地域(5) 그리고 新羅는 6세기초 智證王·法興王代에 이르러 古代國家體制를 완성하고, 眞興王 때에 이르러 狂服國家로 발전하였으며 漢江流域으로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이때 百濟 聖王(523∼553) 이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 옛 영토를 회복하고자 함에 따라 진홍왕은 성왕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550년 경 백제 성왕은 道薩城(천안)을 공취하고, 金峴城(진천)에서 혈전을 벌였으며, 551년에는 신라와 함께 북진하여 漢江流域의 6郡을 점령 수복하였다. 이때 新羅는 南漢江을 따라 내려오면서 竹領이북 高峴(鐵嶺) 이남의 한강 상류지역 10군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城北區지역을 포함한 서울지역은 百濟의 영역이 되는 듯하였으나, 新羅가 그 2년 후인 553년 고구려부터 수복한 백제의 한강유역을 기습공격하여 한강유역을 독점함으로써 이 지역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 이러한 眞興王의 한강유역 진출은 北漢山의 牌峰에 세워졌던 眞興王巡狩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어 진홍왕은 한강유역에 軍事體制의 행정구획인 新州를 설치하고 州治는 廣州에 두었다. 따라서 이후 서울지방의 한강유역은 新羅의 삼국통일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즉, 신라는 한강유역을 장악함으로써 人的·物的자원의 비약적 증가가 있었고, 백제·고구려에 대한 효과적 제압을 위해 지리적 잇점을 확보하였으며, 南陽灣의 黨項城을 문호로 하여 적극적인 對中國外交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眞興王은 그 16년(555) 北漢山을 순행하고 돌아온 2년 후 서울지방을 포함한 한강유역의 넓은 지역을 관할하기 위하여 우선 國原城(충주)을 小京으로 하는 한편 新州를 폐지하고 지금의 한강 이북 서울지방에 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약 11년 뒤인 진흥왕 29년에는 다시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훨씬 남쪽으로 후퇴하여 南川州(이천)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북한산주 설치에 따른 한강유역에 편중된 軍民의 이동으로 백제나 가야의 군사행동에 대한 배후 안정을 위한 후퇴와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즉, 603년 고구려 장군 溫達이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아차산성을 공격하였으며, 이때 眞平王은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군사를 물리쳤는데 고구려의 침공은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무렵 신라의 서북국경은 임진강을 사이로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북한산주는 신라 서북지방의 행정·군사의 중심지가 되어 성북구 지역을 포함한 서울지방을 관할하였다. 이어 7세기에 들어 삼국간의 공방전은 더욱 치열하였는데, 고구려는 백제와 동맹하여 한강유역 회복을 꾀하였으며, 백제는 주로 신라의 서쪽 국경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전쟁상황 속에서 新羅는 文武王2년(662) 北漢山州 지방에 南川州를 다시 설치하고, 664년 북한산주를 漢山州로 개칭하였으며 治所를 廣州에 두었다. 이러한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간의 공방전은 660년 百濟가, 668년 高句麗가 羅唐聯合軍에게 멸망되고, 676년 신라가 居을 축출함으로써 한반도에는 新羅의 통일국가가 출현하였다. 신라는 새로이 갖게된 옛 백제 땅과 고구려 영토의 일부를 포함하여 神文王 5년(685)에 새로운 지방행정조직을 편성하였는데, 신라 본토에 3州백제 옛땅에 3州고구려 옛땅에 3州 등 전국을 9州로 나누고 5小京을 설치하였다. 이때 성북구지역을 포함한 서울지방은 漢山州에 편입되었다. 한산주는 그 州治인 廣州를 중심으로 경기도·충청북도·황해도에 걸치는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그후 景德王 16년(757)에 漢山州를 漢州로 개칭하였고, 지금의 서울지방에는 漢陽郡을 설치하여 太守와 小守의 지방장관을 두었다. 그리고 漢陽郡의 領縣으로 荒壤(豊壤 : 楊州)과 遇王縣(幸州)을 두었으니 이때 성북구지역을 포함한 서울·양주군·고양군 일대가 漢陽郡에 속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울지방의 별칭인 漢陽이란 이름이 바로 신라의 漢陽郡에서 유래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백제의 도읍지였던 오늘날 서울지방인 北漢山城과 漢城 일대는 고구려가 점령했을 때는 南別都로서 주요 군사기지였으며, 新羅가 차지하면서는 對高句麗전쟁의 요충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영역이 大同江流域에까지 확대됨에 따라 漢陽都은 변방적 성격을 벗어났으며, 宣德王3년(782) 신라 서북방변인 황해도일대에 浿江鎭이라는 막강한 군사기지가 설치됨에 따라 漢陽郡은 이제 명실공히군사기지에서 民事行政지역으로 편제되었다. 그리하여 漢陽郡은 景德王 16년 이후 신라 하대까지 漢州의 관할구역으로 지속되었으며, 高麗 太祖 23년 楊州로 개칭되기까지 그 軍號와 治所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漢陽郡에서는 新羅下代에 金凡文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지방에 도읍을 정하려고 北漢山城을 치다가 패하여 잡혀 죽은 사건이 있었다. 이전에 憲德王代 熊律都督이었던 金憲昌이 일찍이 그의 부친인 金周元이 왕위계승에 유력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822년 熊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國號를 長安, 年號를 慶雲이라 하여 한때 충청·경기 일대를 장악하는 기세를 떨쳤으나 곧 진압되고 官軍에게 패멸하였다. 이에 김헌창의 아들 凡文은 憲德王 17년(825) 高達山(여주)의 賊 壽神 등 100여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지금의 서울지방에 도읍을 정하려고 北漢山城을 치다가 都督 廳明에게 敗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金憲昌父子의 반란은 新羅下代의 지방세력 출현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며, 특히 9세기 말기 眞聖女王 때에 이르러 정국은 더욱 혼란에 빠져 급기야 後三國時代를 맞게 된다. 892년 甄萱이 完山에 웅거하여 後百濟라 칭하였고, 北原·溟州를 거쳐 鐵圓 등 인근 70여 郡縣을 공략한 弓裔는 浿西地方 勢力의 항복과 896년 開城의 王建父子가 귀부해옴으로써 그 세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898년 궁예의 휘하인 王建이 楊州와 見州地域을 공략하고 浿西道와 漢州 관할 30餘城을 장악하니 지금의 서울지역은 弓裔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이어 901년 弓裔는 王을 칭하고 국호를 高麗라 하였다가 摩震·泰封등으로 고쳤다. 그러다가 918년 궁예가 추방되고 王建이 국왕에 추대되어 高麗王朝를 개창함에 따라 漢陽郡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太祖 23년(940)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성하고 郡縣號를 개칭함에 따라 漢陽郡은 楊州로, 漢州는 廣州로 개편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4-67쪽
  • 3. 高麗時代의 城北地域(1) 高麗時代에 城北地域을 포함한 서울지방은 대체로 靖宗(1035∼1046) 때까지는 楊州, 文宗이후 忠烈王(1275∼1308) 때까지는 南京, 忠宣王 이후 高麗末까지는 漢陽府로 불리웠다. 고려 건국 초 楊州로 불리웠던 서울지방은 成宗2년(983)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楊州救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각 지방은 대부분 地方豪族들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楊州地方은 뚜렷한 豪族이 나타나지 않고 王建의 공략에 의해 점령된 지역으로 왕권의 직할지 성격을 띄었다 하겠다. 그런 인근 廣州는 太祖를 섬겨 高麗王朝의 창업을 도운 王規의 세력판도였다, 왕규는 廣州를 기반으로 한 豪族出身으로 지위가 大품에까지 이른 사람으로 자기의 두 딸을 太祖의 紀로 들이고 또 한 딸은 惠宗의 紀로 들여 그의 外孫으로 왕위를 계승케 하기 위한 책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 始興地方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衿州姜民를 중심으로 한 豪族勢力이 존재하였다. 姜柑贊은 5代祖 이래 시흥(서울 봉천동 낙성대)에 살면서 그의 아버지 弓珍이 고려 건국 초기 太祖를 도와 三韓壁上功臣이 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姜柑贊家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시흥을 중심으로 호족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강 이북의 서울지역인 楊州地方에는 당시 어떤 호족세력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양주는 898년 王建이 弓裔 휘하에서 점령한 지역으로 泰封의 직할지가 되었다가 高麗에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935년 後百濟王 甄萱이 고려에 항복해 오자 왕건이 견훤에게 楊州를 食邑으로 준 것으로 보아 당시 양주지방에 웅거하고 있던 토착적인 호족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고려 건국 초에 王權强化와 豪族勢力의 中央官燈로의 편제 및 중앙집권정책에 따라 地方制度가 정비되어 갔다. 즉, 光宗때의 각종 제도의 정비는 호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중심의 통치체제를 구축했으며, 이를 배경으로 成宗때에 이르러 지방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成宗 2년(983) 2월에 처음으로 지방에 12牧을 설치하고 地方官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12收은 楊州를 비롯하여 廣州·忠州·淸州·公州·尙州·眞州·羅州·全州·昇州·海州·黃州였다. 이렇게 고려 초 단순히 楊州로 불리우던 城北區지역을 포함한 서울지방은 최고의 지방행정단위의 하나인 楊州牧이 되어 중앙정부로부터 常駐官인 牧使가 파견되었으며 戶長이하 여러 鄕職을 지휘 감독하게 되었다. 이어 成宗 6년에는 楊州牧에 經學博士·醫學博士 각 1명이 보내져 地方敎育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어 成宗 14년(995) 州府郡縣의 칭호를 고치고 전국을 10道로 나누었으며, 12牧에 節度使를 두었다. 절도사를 둔 것은 종래의 民事行政성격의 지방제도에서 軍事行政的인 성격으로 전환된 것으로 12州의 牧을 폐지하여 軍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楊州는 左神策軍이 되어 右神策軍 海州와 더불어 開京의 左右二輔가 되었다. 그리고 楊州는 廣州·黃州·海州 등과 함께 關內道에 속하였다. 이어 穆宗 8년(1005) 3월에 觀察使·都團練使·團練使·刺使 등 外官을 모두 도태시키고, 다만 12節度·4都護·東西北界 防禦鎭使·縣令·鎭將만을 남기었다. 즉, 기존의 100여 고을의 地方官이 거의 도태되어 民事的성격이 위축되고 軍事的성격을 띤 지방관제만 남게 되었다. 그러니 顯宗때에 이르러 地方制度의 새로운 변화가 있게 된다. 顯宗 3년(1012) 楊州를 비롯하여 廣州·忠州·晉州·吉州·黃州 등에 節度使를 대신하여 按撫使가 설치되었다. 이어 顯宗 9년(1018)에 안무사를 폐지하고 전국을 4都護·8救·56知州都事·28鎭將·20縣令을 설치하여 民事行政중심의 고려시대 지방관제의 기부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이러한 개편에 따라 按轉使의 지위에 있던 楊州는 救으로 환원되지 못하고 楊州知事 즉, 知州事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顯宗 이후 5道 兩界의 지방편제 속에 城北區地域을 포괄하고 있던 楊州는 楊廣道의 관내에 들게 되었다. 이어 楊州는 文宗 21년(1067) 일약 南京으로 승격되어 高麗 三京制의 하나로 운영되었다. 南京의 官制로 留守 이하 副留守·判官(小尹)·司錄參軍事·掌書記·法曹·醫師·文師등을 두고 1068년 궁궐을 창건하여 南京의 면모를 갖추었다. 南京의 설치는 군사·정치·경제적인 중요성의 대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國家基業의 연장을 위한 地理圖議思想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때 설치된 南京의 규모나 위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며 단지 東國文獻備考에 ‘文宗이 창건한 南京의 新官이 肅宗때 이루어진 宮地와 같은 것’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략 지금의 景福宮부근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문종 때 설치된 南京은 그 개창 이후 이렇다 할 吉應이 없게 되자 그 지위를 지키지 못하고 머지않아 楊州로 환원된 것으로 보이는데, 개창 이후 9년째 되는 문종 30년 이후의 일로 추정된다. 그리고 문종 23년(1069) 京離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新京畿가 만들어지자 城北區地域을 포함한 南京地方은 楊廣道·交州道·西海道의 일부와 함께 新京畿地域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南京에서 楊州로 환원된 서울지방은 肅宗때에 이르러 다시 南京으로 승격하여 3京의 하나로 면모를 갖추었다. 숙종 때 南京으로의 재승격은 地理圖讖說과 더불어 肅宗의 즉위과정에서 있었던 불합리한 왕위계승과 政敵숙청 등에 의한 심리적 갈등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숙종은 나이어린 조카 獻宗으로부터 禪讓의 형식을 빌기는 했으나 찬탈이나 다름없이 왕위를 물려받았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肅宗은 權臣들을 살해하고 어린조카들을 귀양보내고 있다. 이어 숙종이 즉위한 이듬해 3·4월에 開京 부근에 때아닌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천재지변이 있게 되자 인심이 크게 동요되었고 中書省에서는 이번 天災가 지난번의 政變과 살육으로 인한 것으로 해석하여 형벌을 삼가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陰陽術의 대가인 衛尉丞同正 金謂磾는 〈道詵記〉〈道詵踏山歌〉〈三角山名堂記〉〈神誌秘詞〉등 地理圖讖書를 인용하여 南京設置를 건의하였다. 즉, 남경을 설치하면 四海에서 朝貢해 올 것이며, 地勢가 明堂이나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며 國家社稷이 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南京建都는 일단 보류되었다. 그러다가 숙종 4년에 가뭄·장마·우박 등 天災地變이 유난히 많이 일어나자 숙종은 移都할 것을 결심하여, 이해 9월 정식으로 南京建都를 논의하게 되었다. 숙종은 왕비·왕자·군신·승려들을 이끌고 三角山 僧伽窟을 거쳐 楊州地方을 行幸하여 도읍지로서의 지형을 살폈다. 이어 숙종 6년 9월에 南京開創都監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崔思諏를 相地官으로 하여 尹瓘·文象·陰德全과 함께 楊州로 가서 도읍에 마땅한 지역을 살피게 하였다. 이들 相地官 일행은 10월에 돌아와 南京候補地로 지금 서울 동대문 밖의 蘆原驛, 도봉산 아래의 海村方面, 漢江 연안의 龍山方面, 面岳 남쪽인 지금의 景福宮 부근 등을 돌아보고 그중 面岳 남쪽의 지금 서울지방이 적당하다고 보고하였다, 이렇듯 오늘날 城北區에서 分區된 道峰區地域이 이때 南京의 후보지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肅宗은 명을 내려 肅宗 6년 10월 宗廟·社稷·山川에 南京建都를 고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때의 궁궐위치는 景福宮 神武門 밖의 오늘날 청와대 자리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 규모는 경복궁 크기보다 훨씬 적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부터 2년 8개월간에 걸친 大役事끝에 숙종 9년 5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으며 延興殿에서 百官의 朝賀를 받았다. 당시 南京地域은 東西로는 大峰 즉, 오늘날의 駱山으로부터 岐峰 즉 鞍山에 이르고 있으며, 南北으로는 沙里 즉, 龍山한강변으로부터 北岳山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城北區地域은 南京의 동북쪽 인근지역이었으며 당시 남경의 크기는 지금의 서울도심지역을 합한 것만큼의 큰 규모였다. 그리고 南京은 留守府직할로 3郵·6縣의 속현과 領縣管轄地로 1府·2州郡·1縣이 있어 오늘날 경기도 서북부 절반을 관할구역으로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7-71쪽
  • 3. 高麗時代의 城北地域(2) 이렇게 숙종 때 재건된 南京은 文宗 때와는 달리 이후 忠烈王 말기까지 약 2세 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숙종 이후 고려왕조는 女眞의 북방침입과 金의 건국에 따른 압력, 李資謙의 亂과 妙淸의 亂, 武人政權의 성립, 蒙古의 침입과 江華遷都 등 많은 정치·사회적 변동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地理圖讖思想에 의한 吉凶禍福에 의지하려는 사회풍조를 지속시켰다. 숙종의 뒤를 이은 睿宗은 음양설·지리도참설의 혹신으로 南京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예종 3년 이후 네 차례에 걸쳐 親幸을 하였다. 또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겪은 仁宗은 이러한 변란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지리도참설로써 구제받으려 하여 南京에 行幸하였다. 그러나 同王 6년 2월 南京의 궁궐이 화재를 입게 되자 왕의 南京行幸은 중지되었다. 그후 南京의 궁궐이 언제 복구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毅宗 4년(1150)과 同 21년에 왕이 南京에 行幸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복구된 것으로 보인다. 武人政權 성립 이후 왕의 南京行幸의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高宗 21년 (1234) 7월에 왕이 內侍 李白全을 보내어 御衣를 南京 假闕에 안치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이때 한 승려가 도참설을 인용하여 옛 양주 땅에 궁궐을 짓고 왕이 이곳에 거처하면 국운이 800년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말을 따른 것이다. 이때 高宗은 江都에 피난하고 있어 스스로 나올 수가 없었던 까닭에 御衣로서 대신한 것이다. 그리고 南京의 假闕은 正宮에 대한 難宮또는 別宮의 뜻으로 지금의 昌慶宮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高宗 22년에는 太祖의 神位를 開京 壽昌宮으로부터 이곳에 옮겨 안치하는 한편 어의안치를 3기로 나누어 南京宮關과 開京 康安殿에 안치하도록 하였다. 그후 忠烈王 34년(1308) 즉위한 忠宣王은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개편하면서 南京을 漢陽府로 개편함과 동시에 府尹·判官·司錄의 官制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漢陽府는 交河郡과 見州·抱州·幸州·峰城縣·高峰縣·深嶽縣·豊壤縣·沙川縣 등 3屬郡·6屬縣 만을 관할하게 되어 종래 南京의 관할구역에 비해 크게 축소되었다. 즉, 이때부터 漢陽府는 高陽·楊州·抱川등 현재 한강이북 서울지방과 그 주변일대를 관할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漢陽府는 다른 府와 마찬가지로 王의 巡駐와 御衣安置등은 사라지고 開京과 가깝기 때문에 국왕의 遊幸과 사냥터가 되고 말았다. 그후 恭愍王때에 이르러 다시 漢陽府가 南京으로 환원되고 또다시 漢陽府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지리도참설에 따른 國基延長思想에 따라 漢陽遷都計劃이 논의되고 南京宮闕의 중수가 단행되기도 하였다. 이어 禑王 때는 遷都論이 더욱 고조되어 우왕 7년(1381) 9월 드디어 漢陽遷都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천도는 變異를 피하기 위한 임시 천도였던 것으로 6개월 만에 다시 開京으로 돌아왔으며 개경에서 항구적인 천도계획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漢陽遷都論은 恭讓王때에 와서 한층 더 고조되어 儒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양왕 2년(1390) 9월 漢陽遷都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한양천도는 開京의 地德을 쉬게 하고 變異를 피하기 위한 천도였으나 천도한지 며칠만에 虎患이 생기고, 그해 11월에는 金宗衍·趙裕 등이 李成桂를 도모하려는 사건이 일어나 왕위보존이 어려워지는 등 극히 불안한 정세에 휩싸였다. 그리하여 開京遷都가 논의되고 결국 6개월 만에 다시 開京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恭讓王 2년 京畿를 左道·右道로 分定하였는데 漢陽은 京畿左道에 편입되어 科田과 功臣田 등의 반급지역이 되었다. 이후 서울지방은 朝鮮王朝가 개창되어 首都로서 漢城府가 되기까지는 漢陽府로 존속되었다. 그리고 城北地域에는 高麗時代의 南京의 榮華를 말해주는 듯 普門寺·彌陀寺·慶國寺 등 고려시대로부터 전승된 유명사찰이 건재하고 있다. 慶國寺는 정릉3동에 위치해 있는데 애초 忠肅王 12년(1325)에 律師 淨慈가 창건하여 靑巖寺라 하였던 사찰로 1330년경에 無奇가 머물면서 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떨쳤으며, 1331년에 居士 蔡洪哲이 禪房을 증축하여 禪僧들의 수도를 적극 후원하였다. 1352년 금강산 法起道場을 참배하고 남하한 印度僧 指空이 住錫한 뒤로 고승대덕의 수도처이자 호국안민을 위한 기도도량으로써 전승되었다 그리고 보문동 3가에 위치한 普門寺는 睿宗 10년(1115)에 國師 曇眞이 비구니의 수련장으로 창건하여 전승된 사찰로 창건 당시 조그만 암자로 탑골에 있었으므로 탑골승방이라 하였다. 그런데 보문사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탑골승방의 역사를 말하는 女僧房으로 彌陀寺가 있다. 이 사찰은 光宗 원년(950)에 惠居國師가 처음 창건하였으며, 文宗 원년(1047) 에는 石搭을 조성하여 탑골승방이라고 불리어졌다. 다시 忠肅王 원년(1314)에 彗鑑國師에 의해 중건되어 전승되고 있다. 그런데 탑골승방은 1927년 獨鵑 崔象德이 중편소설 「僧房悲曲」을 이곳에서 집필하여 그 연고성을 더욱 깊게 하였다. 한편 高麗時代 驛站制度에 따라 開城에서 楊州를 교통하는 靑郊道에 蘆原驛이 있어, 오늘날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迎署驛·淸波驛이 상호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城北區地域은 蘆原驛과 연결되는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고려시대 驛站制는 매우 발달하여 전국에 걸쳐 驛傳系統이 펼쳐 있었다. 역참은 政令과 公報의 전달,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 사신 왕래에 따른 迎送과 접대, 지방파견 관원의 遞送과 물자수송 등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역참은 군사·미타사(탑골승방)외교변에서 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역참에는 驛田·驛丁·驛馬를 두었으며 교통량과 군사·경제적 중요성에 따라 大·中·小路의 3등급으로 구별하여 토지지급의 차등을 두었으며, 이로써 역참의 경비와 客館의 식료공급 동의 재원을 삼게 하였다. 이러한 驛站의 계통으로 고려시대에는 驛路의 幹線이 22個道였으며 驛의 수는 525개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이중 城北區地域을 지나는 靑郊道에 蘆原驛 등 15개역이 계통지어 있었다. 즉, 靑郊(개성), 通波(통진), 馬山(봉성), 碧池(고봉), 迎曙(남경), 平里(덕수), 橡林, 丹棗(적성), 淸波(남경), 蘆原(남경), 幸州驛, 從繩(수안), 金輪(수주), 重林(인주), 綠楊(견주) 등이다. 그리고 靑郊道는 春州道·平丘道로 이어져 오늘날 서울의 동북·동남방으로 연결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1-74쪽
  • 4. 朝縣時代외 城北地域 朝鮮時代에 들어 漢陽遷都가 실현되자 城北地域은 수도 漢城府의 城底十里 지역으로 편제되었다. 약 18㎞의 都城이 수축됨과 더불어 4大門가운데 하나인 肅淸門(후에 肅靖門) 즉, 北大門이 건립됨으로써 도성의 북쪽지역이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그 지명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城北區地域은 서울 漢城府의 定都와 都城修築 및 肅淸門·惠化門(東小門) 등의 건립과 더불어 일련의 역사성을 가진다. 또한 서울지방의 保障之地로서 쌓은 北漢山城 역시 城北區의 북쪽 경계를 이루어 북한산성의 築城 또한 城北區역사의 상징적인 일면을 장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惠化門을 지나 元山에 이르는 서울 동북방의 간선도로가 城北區地域을 관통하고 있어 女眞과의 교통로가 되었으며, 나아가 丙子胡亂의 侵寇路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朝鮮後期에 들어서는 私商이 발달하여 樓院店의 都賈가 활약하는 등 상업활동의 중심지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으며 東活人署 등 빈민구제기관이 설치되어 운영되기도 하였다. 한편 三仙坪에서는 軍事의 조련이 실시되었고 城郭守備를 위한 御營廳의 北倉이 이곳에 있어 漢城府의 안보·치안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또 貞陵·懿陵 등이 위치하여 王室의 安葬地로서의 기능도 하였으며, 先蠶壇·靈星壇이 있고 北屯桃花의 명승지로서 시민의 휴식터가 되기도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4-75쪽
  • 7) 王室陸과 願利 城北區 自然環境은 명승지로 조선시대 王室의 주목을 받아 그 墓域으로 선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인근에 願刹이 위치하게 되었다. 일찍이 貞陵洞은 太祖 李成桂의 神德王后 康氏의 능인 貞陵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石串洞에는 조선왕조 제 20대왕인 景宗과 繼妃 宣懿王后 魚氏의 雙陵인 懿陵이 자리잡고 있으며, 下月谷洞에는 高宗의 長子였던 完王의 애기 陵과 高宗의 後宮인 內安堂 貴人 李氏墓도 이곳에 있다가 西五陵域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翼宗의 單陵인 追緩陵도 純祖 때 석관동의 懿陵 左岡에 위치해 있다가 哲宗 때 東九陵域으로 遷奉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陵을 수호하고 주인공의 명복을 기원하는 新興寺(興天寺)·奉國寺·蓮花寺 등 願刹이 인근에 자리하였으며 開運寺와 같은 사찰도 자리잡게 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93쪽
  • 8) 城北區의 行政區域과 城底五里牌 城北區地域이 구체적인 행정구역으로 편입된 것은 朝鮮時代에 들어와서 였다. 漢陽에 도읍을 정한 朝鮮王朝는 漢陽府를 漢城府로 개칭하고, 1396년 白岳山·駱山·木覓山·仁旺山을 잇는 약 18㎞의 都城과 4大門·4小門의 문루를 수축하였다. 그리고 城內의 행정구역을 분할하여 東部·西部·南部·北部·中部의 5部를 정하는 동시에 이를 다시 52坊으로 분할하여 坊名表를 세웠다, 5部 52坊은 대체로 淸溪川을 중심으로 北岳山·仁旺山·南山등에서 내려오는 細川으로 경계를 삼았다. 여기서 城北區의 행정구역은 지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都城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바로 5部中 東部에 崇信坊과 仁昌坊이 설치되었다. 한편 《世宗實錄》 地理志를 보면 한성부 관할구역이 49坊으로 축소되고 都城 안과 성 밖 5里∼10里지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경계는 대개 산능선과 하천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았다. 대체로 城底十里지역을 살펴보면 동쪽은 楊州 松梁院과 大峴을 연결하는 선이며, 서쪽으로는 楊花渡와 高陽 德水院까지이고, 남쪽은 漢江과 露渡까지 였으며 북쪽은 언급이 없으나 北漢山까지로 추정된다. 따라서 오늘날 城北區地域은 東部의 城底十里지역에 포함되었으며 구체적인 행정구역으로는 東部(城外) 崇信坊과 仁昌坊이 설치되었다. 한편 成宗때 완성된 《經國大典》에 漢城府의 하부조직으로 部·坊 밑에 契와 統이 나타나는데 구체적으로 살필 수가 없다. 따라서 성저 10리에 속하였던 성북구지역이 언제 東部 崇信坊과 仁昌坊에 속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살필 수가 없으나 英祖 27년(1751) 에 반포된 《守城冊全》의〈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보면 43坊 328契의 명칭이 보이는데 이때 성북구지역에 해당하는 部·坊·契의 명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東部〉 ·崇信坊(城外) : 崇信坊契·陵洞契·加五里契·長位里契·安岩契·牛耳契·水踰村契·新設契 ·仁昌坊(城外) : 仁昌坊契·祭基里契·典農里契·馬場里契·踏十里契·往十里契·私契·伏里契·中梁浦契·沙阿里契·往十里驛契 이어 正祖 13년(1789) 에 간행된 《戶口總數》에 보면 漢城府는 47坊 378契로 늘어나고 있는데 이때의 성북구와 관련있는 東部 崇信坊과 仁昌坊의 契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東部〉 ·崇信坊 : 崇信洞契·新設契·鍾岩里契·代里契·加五里契·水踰村契·安岩洞契·陵洞契·沙阿里契·御倉契·牛耳契 ·仁昌坊 : 仁昌洞契·往十里一契·往十里二契·私契·淸凉里契·踏十里契·祭基里契·長位里契·中浪浦契·典農里契·馬場里契 이렇게 볼 때 1751년에서 1789년 사이에 행정구역의 변경에 따라 契의 증가와 坊 사이의 조정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崇信坊의 戶口數는 1,241戶에 인구 3,886명으로 남자 2,192명, 여자 1,694명이었다. 仁昌坊은 2,511戶에 인구 7,683명으로 남자 4,526명 여자 3,157명이었다. 그리고 高宗 4년(1867) 에 반포된 《六典條例》에 보면 漢城府를 5部·47坊·340契로 분할하고 있다. 이때의 성북구 해당지역은 東部 崇信坊 지역으로 국한되었는데 崇信洞契·月谷里契·沙阿里契·安岩洞契·鍾岩洞契·長位里契·陵洞契·水逾村契·加五里契·牛耳里契·御倉契·新設契 ·伐里契 등이 있었다. 이어 1894년 甲午改革 때에는 漢城府 5部를 5署로 고치고 坊은 그대로 47坊으로 하였으며 契를 줄이고 洞을 새로이 두어 47坊, 228契, 775洞으로 하였다. 이때 성북구 지역은 東署 崇信坊(城外) 東門外契와 東小門外契, 그리고 仁昌坊(城外) 東小門外契 지역에 해당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98-100쪽
  • ○ 1930년대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 - 한편 1920년대에 사회주의 계열에 의해 일어났던 수많은 쟁의는 1930년대에 이르러 사라지게 됩니다. 1925년 치안유지법이 만들어지고 신간회가 해산되어 합법적인 쟁의 공간 또한 축소됩니다. 이에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혁명적 조합활동을 전개합니다. 사실상 비합법적, 불법적인 쟁의활동이었지요. 드러내놓고 싸울 수 없으니 지하에서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혁명을 궁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하조직 중 대표적인 단체로 경성트로이카와 경성콤그룹이 있습니다. 1930년대 이후 성북구 지역에서 활동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관계를 맺은 단체이지요. 경성트로이카는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노동운동, 학생운동, 반제국주의운동 등을 진행했습니다. 경성콤그룹은 경성 코뮤니스트 그룹을 줄여 부른 이름으로 1939년에서 1941년 사이 서울과 경상남도, 함경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조선공산당 재건 조직이었지요. 성북구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중 이 두 단체에서 활동한 인물로는 정태식을 꼽을 수 있습니다.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그는 성북동에 거주하며 적색노동자그룹, 공산주의자그룹 결성에 매진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경성콤그룹에 참여해 활발하게 활동했지요. 성북동에 거주했던 방용모, 돈암동에 거주했던 이현우, 정릉동에 거주했던 주영복, 안암동에 거주했던 김상준과 김순원 등은 모두 경성콤그룹에 소속되거나 연루되어 체포되었던 이들입니다. 두 단체 외에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던 이들로는 성북동에 거주했던 김하경, 안복산과 돈암동에 거주했던 홍석표, 안암동에 거주했던 김용태 등이 있습니다. 성북동에 거주했던 배성룡 또한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1924년 사회주의단체 화요회와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사회주의 활동가들은 비록 민족주의와 대립하며 그 노선을 달리 했지만 해방 전까지 일본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했고 희생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1-102쪽
  • 6. 조국 해방을 위한 성북인들의 마지막 투쟁-1940년대 ○ 수세에 몰린 일본과 끝까지 저항하는 독립투사들 - 1940년대, 마침내 조국 해방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을 확보한 일본은 결국 이 때문에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중국 뿐 아니라 미국까지 건든 셈이었으니 승리가 어려운 싸움에 뛰어든 것이었지요. 일본의 국운이 쇠하기 시작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그들의 통치 하에 있었습니다. 독립의 희망이 보이는 듯해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지요. 30년 넘게 싸워온 독립운동가들은 이제까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더욱 강력하게 투쟁을 진행합니다. 1940년대, 성북구는 청년 지식인과 민족 지도자의 거주지로 완전히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이 독립운동의 방략을 찾고 독립의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7쪽
  • ○ 시국담으로 고초를 겪은 성북인들 - 1940년대 초 주목할 만한 독립활동 중 하나는 시국담을 논하는 것이었습니다. 말그대로 현재 당면한 국내 및 국제 정세나 대세를 이야기 나눈 것이지요.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미국과 중국 등지에서 송출된 단파방송을 듣고 전쟁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일본의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고 앞으로의 동향을 예측하고 독립운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구상했습니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성북동과 삼청동 등 은밀한 장소를 찾아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소식을 나누었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8쪽
  • ○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 앞서 소개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증명하듯 성북구는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산실입니다. 이곳에서 출생하거나 거주한 독립운동가들의 일대기를 엮는 것만으로도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전후 근대기가 완성됩니다. 성북구가 발굴·조사한 성북구의 항일 독립운동가는 112명에 이릅니다. 성북구를 자주 오가며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까지 더한다면 일제강점기 성북구와 관련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는 더욱 풍부해질 겁니다. 성북구는 오랜 시간동안 세간에 드러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의 공적을 발굴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오늘날의 성북구는 곧 어제의 영웅들이 다져놓은 우리의 훌륭한 역사문화자원이기 때문입니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00년전, 성북천과 안암천, 돈암동 일대 곳곳에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모진 고문을 겪어내야 했던 이름 없는 애국지사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감시를 피해 성북동 깊은 골짜기에서 독립투쟁을 계획하고 거사에 뛰어든 독립투사들이 있었습니다. “독립군이라면 남들이 어데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이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했던 김동삼을, 정릉의 초라한 오두막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던 장건상을, 그리고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않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33쪽
  • ­ 이 시기 성북구는 단순히 독립운동가들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 모두가 나라의 상황을 체감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과 계몽의 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성북구에서 대규모로 일어나게 된 까닭도 이러한 토대가 뒷받침 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성북구만의 특징은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가 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시골의 경관을 띠고 있으면서도 경성부내와 통신이 비교적 편리하고 이동이 쉽다는 지리적 특징은 독립운동가들이 결집하고 은거, 피신하기에 용이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35쪽
  • 1920년대 성북구는 의열단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이자 근거지로 일본이 늘 주시하던 지역이었지요. 이렇듯 그 어떤 단체보다 강렬한 저항을 실천했던 의열단의 안팎에는 성북인들과 그들의 터전인 성북구가 든든한 지지대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62쪽
  • ○ 조용했지만 뜨거웠던 저항의 근거지 성북 - 1930년대 성북구는 1920년대 보다 더욱 인구가 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의 유입이 많아집니다. 특히 1920년대부터 조성된 학도촌의 분위기는 이 시기 더욱 짙어지는데 이길용은 동아일보를 통해 발표한 수필 「신록의 대경성 부감기」에서 성북동을 완연한 학도의 마을이라고 표현합니다. 1930년대에의 서울은 도시화가 상당히 진전되고 종로를 중심으로 일본인 인구가 증가하는데 이에 반해 비교적 한적한 성북동은 문인들의 새로운 주거지로 부상합니다. 또한 1920년대 중반부터는 성북구와 인접한 명륜동, 혜화동 등에 고등교육기관이 다수 설립되면서 조선인 학교촌이 형성되고 성북동은 그 배후지로 기능합니다. 이 시기 성북구는 일본 메이지대학 출신의 지식인 이신구가 지역사회운동을 주도했으며 자금난에 시달리던 삼산학교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됩니다. 1933년에는 성북유치원도 설립됐지요. 그리고 같은 해에 한용운의 심우장도 지어졌습니다. 한용운은 1933년부터 그가 입적한 1944년까지 심우장에 거처합니다. 집이 북향인 것은 그가 일부러 조선총독부과 등지기 위해 의도한 방향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심우장에서는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김동삼의 장례식이 치러지기도 했었지요. 역시 같은 해인 1933년, 소설가 이태준도 성북동에 수연산방을 짓습니다. 그는 1947년 월북하기 전까지 가족들과 함께 거주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심우장과 수연산방은 1930년대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도심 속 역사의 공간이자 일제강점기 뜨겁게 글을 써내려갔던 두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났습니다. 성북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많은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항일 정신을 표현했고 거친 탄압 속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듯 그들이 창조한 작품들은 많은 독자들을 고무시켰고 이는 곧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힘이 되었지요. 실제로 돈암동에 거주했던 양정중학교 학생 신형균은 1937년 말부터 민족적 성격이 농후한 소설을 읽고 이듬해 통의동에서 조선독립의 실행에 관해 협의했다가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 또한 분명 독립운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겠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99-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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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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