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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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구의 인구변화와 현황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시대 성북구 지역은 농지가 부족하고 산지가 많아 교통의 요충지임에도 인구가 많은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의 인구 증가와 도시의 확장으로 돈암동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조성되고 교통망이 발달하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6.25전쟁을 거친 직후에는 서울지역에서도 인구가 적은 편이었는데, 1960년대 서울의 도심재개발이 이루어지고 강제철거를 당한 사람들이 성북구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빠른 속도로 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서울의 확장과 강남개발 등으로 성북구지역은 사실상 서울의 도심으로 자리잡아 급격한 변동없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2018년 통계기록을 기준으로 성북구의 인구는 447,687명이고, 세대수는 186,601세대이다.
성북구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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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근거자료 원문

  • 3. 6.25 事變後의 급격한 변화 1) 급격한 人口增加와 施設의 不足 光復 그리고 大韓民國政府수립후 최초로 실시된 1949년 5월 1일 현재의 인구조사에는 城北區의 인구수는 빠져 있다. 城北區가 탄생하기 약 4개월 전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의 城北地域 인구수는 일부는 東大門區로, 그리고 나머지는 高陽郡 崇仁面의 인구수로 집계되고 있다. 城北區의 인구수가 처음으로 집계된 것은 1953년 3월 말일 현재의 戶口數 조사에서였다. 이것은 6.25사변으로 흩어졌던 서울市가 서울에 수복하여 행정체제가 어느정도 정비된 후 첫번째로 실시한 기본통계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때 城北區內의 家口數는 11,712, 인구는 57,916인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도 休戰會談도 이루어지기 전이라서 이 戶口數를 기준으로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1955년 12월말 현재의 호구수를 기준으로 할 수 밖에 없다. 1955년말 현재 城北區의 家口敎는 24,739가구였고 인구수는 131,549명이었다. 그리고 5년후인 1960년 말 현재는 가구수가 48,794에 인구수가 264,981인으로 倍이상 늘어났고 66년 인구센서스 결과의 인구수는 519,510명, 70년 인구센서스에서는 196,716가구에 인구는 963,692인으로 집계된 것이다. 1955년말 현재와 70년 센서스 결과를 비교할 때 城北區는 실로 15년간에 家口數에 있어 8배가 늘었고 인구수는 7.3배가 증가한 것이다. 이 기간동안의 인구격증현상은 서울市 전역에 걸친 것이 었지만 그래도 1955년 센서스 결과의 서울市 총인구수가 1,574,868명 그리고 1970년 센서스 결과의 서울市 총인구수가 5,536,377명으로 56∼70년의 15년간에 3.5배의 인구증가였는데 比해 城北區의 7.3배는 엄청난 것이었고 아마도 서울市內 9개 區중에서도 단연코 뛰어난 현상이었다. 이상과 같은 단기간의 인구집중 현상은 그 당연한 결과로 주택, 上·下水道, 敎育 등등에 걸쳐 심각한 施設不足현상을 초래하였다. 그 단적인 例로 이 당시 城北區 下月谷1동에 위치한 崇仁國民學校가 학생수와 학급수에 있어 東洋최대라는 명예롭지 못한 기록을 세운 것이다. 숭인국민학교가 동양 최대의 국민학교라는기록은 1972년 6월에 바로 이웃하여 숭곡국민학교가 설립되면서 깨어지는데 숭곡국민학교가 설립되므로서 학생을 분리 수용할 당시 崇仁국민학교는 148학급에 학생수가 11,965명이었다고 하며 숭곡국민학교가 설립되므로서 학생수가 6,760명으로 감소되었다는 것이다. 1956년에서 70년에 걸친 城北區의 인구증가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다. 서울 市에 인구증가를 가져온 요인들, 地方으로부터의 거대한 流入人口, 多産多死에서 多産小死로의 전환, 그 결과에 의한 전국적인 인구증가 현상, 교통·통신의 발달 등등의 요인 외에 城北地域에만 해당되는 요인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열거할 수 있다 첫째 1950년대의 중반에 (54∼56년) 미아리에 있던 서울市 共同墓地를 폐지하고 이 뒷터에 시내 중심부에 있던 무허가 不良建物 철거민들의 移住定看地를 조성한 사실. 둘째 1963년 1월 1일을 기하여 京畿道 楊州君 蘆海面 전역(倉洞里·月溪里·孔陵里·下溪里· 中溪里·上溪里·道峰里·放鶴里·雙門里)이 서울市에 편입되어 城北區 관할구역의 일부가 됨으로써 인구수가 크게 늘어났었다. 세째 光復, 大韓民國 政府수립 그리고 6.25사변을 거치는 과정에서 국민의 敎育熱·向學熱이 크게 향상되었고 따라서 전국에 걸쳐 많은 中·高等學校 및 大學의 설치, 각급학교의 定員증가 동의 조치가 이루어졌었다. 그와같은 추세에 따라 1934년에 安岩洞에 입지한 普成專門學校가 高麗大學校로 승격, 크게 확장·발전하였고 1944년에 東仙洞3가에 입지한 誠信女學校가 1963년에는 성신여자실업초급대학이 되고 이어서 4년제 사범대학, 일반대학교로 확장 발전하였으며 同德女子大學이 1967년 3월에 下月谷洞에 신축교사를 설립 이전해 왔고 1971년에는 國民大學이 貞陵洞에 신축교사를 세워 이전해 오는 등으로 城北區는 현재 서울市內에서 가장 많은 6개의 綜合大學校를 관내에 가지는 敎育地區로 발전하였다. 이와같은 교육기관의 立地는 당연히 大學村을 형성하는 등으로 인구집중에 커다란 波及效果를 나타낸 것이다. 네째 1949년의 구역확장, 1963년의 구역확장으로 엄청나게 그 면적이 넓어진 서울의 東北, 城北區는 당시의 鐘路·中區나 70년대의 江南地域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地價가 낮았으며 따라서 일반 서민들의 집장만하기도 손쉬웠다. 거기다가 서울 市에 의한 不良住宅 철거민을 위한 定看地가 上灣洞·中演洞등지에 대규모로 조성되었다. 1960년대의 後半이었다. 이러한 要因들이 城北區의 인구수를 엄청나게 늘어나게 했고 마침내 1973년에 北部地域이 분리되어 道峰區가 되었으며 城北區의 면적은 매우 협소해지게 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74-177쪽
  • 第6章 建設 I . 人口의 集積 1. 人口의 集積推移 人口는 모든 行政需要의 原單位이다. 人口의 增加展望을 하여 物的 施設을 計劃하고 增加된 人口에게 行政供給을 하기 위해 施設을 擴充한다. 그것이 다름 아닌 建設이라 할 수 있다. 이런 意味에서 人口의 集積推移부터 되돌아보았다. 人口가 一定地域에 集積함에 있어서 그 密度가 아직은 성길 때에는 안정된 生活의 터전을 위한 住宅과 通行을 便利하게 하기 위한 道路의 整備가 고작이지만 人家가 密集하여 都市地域化하고 生活環境이 汚染될 때에는 上水道가 供給되어야 하고 또 下水道施設이 整備되어야 하며, 自然으로부터 火災를 防止하기 위해 河川에 堤防을 築造하는 등의 行政供給을 要한다. 우리는 以上에서 말한 것들을 「建設」이라는 用語로 槪念化하여 使用한다. 그리고 이런 意味에서 建設의 歷史는 人口의 集積에 對應한 物的 施設의 供給史라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지금 城北區의 人口는 55만명을 헤아리고 ㎢당 人口密度는 22,689명으로 매우 稠密한 都市地域이다. 그러나 이 地域에 이 많은 人口가 集積하는데에는 오랜 時日이 걸렸다. 지금부터 70여년전만 해도 이 地域의 인구는 고작 3,000명 내외의 완전한 農村地域이었다. 그러던 것이 서울의 都市地域이 擴張을 거듭, 조금씩 조금씩 외곽지역으로 人口가 集積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人口는 增加만 하는 것은 아니다. 都市의 변두리地域은 어느새 中間地帶로 변하고 地域의 機能도 變化하여 住居地域이 商業業務地域으로 바뀌면서 人口의 減少現像을 가져온다. 城北區도 例外는 아니어서 1976년을 고비로 全體的으로는 날로 人口가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城北區全地域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地域은 벌써 20여년전부터 줄어들고 있지만 어떤 지역은 아직도 계속하여 증가일로를 달리고 있다, 다음으로 地域別人口의 集積推移를 되돌아 보기로 한다. 이상 성북구지역의 지역별 인구 집적추이를 본 바, 이를 개관하면 성북구의 성장은 대체로 光復以後부터 본격화되고 박차를 가하게 된 연대는 1960년대이며, 1970년대는 안정적 성장, 1980년대 후반에 와서는 도심과 변두리의 중간지역답게 점차 감소추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역별 연대별 인구집적추이를 표로 보면〈표 ­ 1〉과 같다(339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33-334쪽
  • 第9章 社會·文化 I . 社會 1. 人口動態(1) 城北區는 1949년 8월 13일자 大統領令제159호에 의해 설치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북구를 이루고 있는 지역은 옛날부터 서울의 城外地域으로 포함되어 왔다. 즉 朝鮮 太祖 5년(1396) 에 漢城府의 5部 坊里名을 정하여 境界標石을 세울 때부터 東部의 崇信坊·仁昌坊에 속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서울의 번영이 都城안에서만 머물렀던 까닭에 인구는 비교적 희소하였던 곳이다. 이곳에 인구가 많지 않았던 것은 이 지역이 서울의 4大門의 하나인 北門(蕭靖門)의 바깥쪽에 위치하였던 것과도 관련이 된다. 숙정문은 이 문을 열어두면 임금의 거처인 景福宮의 팔을 자르는 것이 되며, 장안의 여자들이 음란해 진다는 風水說과 俗說로 인해 거의 閉門되다시피 하였기 때문에, 다른 대문 바깥에는 마을과 저자가 생겨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했어도, 이곳은 한적한 곳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은 그 地形이 北漢山·貞陵山·駱山·開運山등의 산과 지금 아리랑고개·미아리고개라 불리우는 구릉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사이 城北川·貞陵川邊 등의 低地帶가 형성되어 있어서 자연풍광은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아낌을 받아왔으나, 저지대를 제외하고는 험한 지역으로 사람이 살기에 적당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의 토양은 전형적인 花崗岩 風化地形으로 인해 생긴 ‘마사’라고 불리는 모래흙으로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어 마을이 형성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암자와 산도둑의 소굴이 뜸뜸이 있는 바위와 구릉과 산으로 오래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 곳에 御營廳의 北屯을 설치하여 군인들과 이와 관련된 민간인들을 살게 하였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삼선교·종암동 일대의 평지가 1884년경까지 新兵 練兵場으로 남아 있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인구가 많은 지역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 日帝强占期에는 이 지역은 高陽郡 崇仁面으로 편제되어 京畿道 관할이 되었고, 日帝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하여 인구가 점차 늘어났다. 일제때의 이 지역 인구는 京城府행정구역 확장을 위한 사전조사자료 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우선 1916년의 숭인면 중 신설리·용두리·안암리·제기리·청량리·전농리·답섭리·종암리·돈암리·성북리·정릉리만의 인구규모를 살펴보면 戶口1,745호, 인구 7,547명으로 이때 京城府 전체의 호구수가 58,082호, 인구가 253,068명임을 감안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숭인면 전체의 인구규모는 1928년에 4,593호, 22,185명이던 것이 1933년에는 7,416호, 36,797명으로, 1928년을 기준(=100) 으로 할 때 인구증가지수가 165.8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같은 기간 경성부의 인구증가지수가 118.8, 高陽郡內 龍江面이 159.9, 延禧面이 137.7이었던 것과 견주어 볼 때 이 지역의 인구증가추세가 컸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앞서 1916년의 인구규모를 살펴본 숭인면 중 신설리·용두리·안암리·제기리·청량리·전농리·답십리·종암리·돈암리·성북리·정릉리 등의 인구는 숭인면 전체인구의 절반을 늘 웃돌아 서울에 보다 근접한 지역적 특성과 함께 인구규모면에서도 서울에의 편입대상으로 두드러져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1936년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숭인면 중 안암리·성북리·신설리·종암리·돈암리·답십리·전농리·청량리·회기리·휘경리·이문리·제기리·용두리 지역은 다시 서울로 먼저 편입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먼저 서울로 재편입된 지역을 중심으로 근대적 도시로의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1934년에 제정 공포된 朝鮮市街地計劃令으로 1939년에 京城府 전역에 걸쳐 都市計劃이 시행되었는데, 이때 이 지역에는 「敦岩地區土地區劃整理事業」이 실시되어 주택지개발·공공시설 확보·도로 개설 등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 돈암지구는 삼선동·동소문동·돈암동·안암동 일대의 저지대를 구획하여 완전한 住居地區로 정리되어 日帝强占期 말까지 정연한 中上流의 住宅區를 이루어 인구증가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또한 이와 동시에 도로를 확장하여 電車路線을 돈암동까지 연장하여 교통이 편리해진 것도 경성부 도심과 가까운 위치라는 장점과 함께 인구증가의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성북구 지역에 본격적인 인구증가가 이루어진 것은 광복 이후이다. 광복이후 이 지역은 서울의 팽창을 막바로 받아들이는 주택지역으로서, 1949년 8월 서울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1936년에 먼저 편입되어 있던 지역과 고양군 숭인면의 새로 편입된 지역을 합하여 새로이 城北區로 설치되었던 것이다. 설립 직후인 1949년 9월말 현재 성북구의 인구는 144,647명 (남 72,091, 여 72,556) 으로 서울의 9개 區중 인구가 가장 적은 동대문구에 이어 두번째로 작은 구였다. 곧이은 6·25동란으로 주민들이 피난하는 등 인구가 격감하였다가 휴전 성립 후에야 정상적인 규모를 살필 수 있는데, 성북구는 1956년까지는 서울 9개 구 중 인구규모가 8, 9위에 머무르다가 1957년과 1958년에 7위로 오른 후부터 1962년까지 인구규모 5위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차츰 인구가 증가되어가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인구증감율에서도 확인되는 바 〈표 5〉 에서 이 기간의 성북구 인구증감율은 매우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고, 서울시 전체 평균증가율을 항상 웃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1950년대 후반의 성북구의 인구증가는 6·25동란 후에 전반적인 서울인구의 증가와 함께 이 지역-특히 돈암동에서 미아리 일대·삼양동에서 수유리에 이르는 북한산 동쪽 구릉지대와 하월곡동 등 성북천·정릉천변-에 피난민을 비롯한 이주민들이 잡다한 무허가건물을 집단으로 짓고 들어서 이른바 不法定着地區(squatterd area) 를 곳곳에 형성하였던 것도 한 요인으로 생각된다. 반면 인구밀도 측면에서 살펴보면 성북구의 면적은 서울 9개 구 중에서 서대문구-성동구에 이어서 3번째로 컸기 때문에, 이 기간의 ㎡당 인구밀도는 늘 서울시 전체평균을 밑돌았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93-496쪽
  • 1. 人口動態(2) 이어 1963년 1월에는 서울시 행정구역이 다시 크게 확장되었는데 이때 京畿道 楊州郡 蘆海面의 창동리·월계리·공릉리·하계리·중계리·상계리·도봉리·방학리·쌍문리가 성북구에 편입되어 蘆海出張所관할로 편제되었다. 따라서 성북구는 이 구역확장으로 지금의 도봉구·노원구의 구역까지를 포함하게 된 것이다. 구역확장 후의 성북구 인구현황을 살펴보면 다음 〈표 1〉과 같다(497쪽 표 참조). 이후 넓어진 성북구 지역에 인구유입이 계속 되었다. 이는 1960년대 이후 이 지역이 택지개발사업 등의 시행에 의해 주거지역으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즉 성낙원 언저리의 주택단지, 대교단지 등 성북동·정릉동·동선동 일대는 1960년대 現代 都市化過程에서 중·상류 주택지화 하였고 이 시기에 미아지구와 종암동 일대에도 주택지가 형성되었으며, 1966년부터는 장위동 일대도 택지가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니 1980년까지의 성북구 주택건축의 44%가 1960∼1969년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택지의 개발과 함께 한편으로는 1960년경부터 시작된 도시재개발사업으로 강제철거를 당한 주민들이 집단으로 현재의 미아동 거의 전부와 상계동·중계동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어 이도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따라서 성북구의 인구는 서울시 전체 인구증가율을 항상 웃돌아 1960년에 대비해서 1966년에는 2배로 급증하였고, 1970년에는 거의 4배에 가까운 인구증가를 보였다(502~503쪽 〈표 5〉 참조). 이어 1970년대 전기 江南地域 개발이 본격화 되었을 무렵, 江北에서는 계속해서 수유동 방면에서 장위동·석관동 방면으로 시가지가 크게 확장되어 북쪽으로 창동·도봉동으로, 남쪽으로는 상월곡동·하월곡동·석관동 둥이 택지화되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되었다. 이 시기 성북구의 인구는 서울 9개 區중 영등포구에 이어 두번째로 많았으며, 도심의 종로구·중구의 5, 6배에 달하게 되었다. 특히 수유동·우이동·도봉동 등 지역의 인구가 급증하고 개발도 진행중이어서 계속적인 인구증가가 예상되어 分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1973년 7월에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독립하기에 이르렀다. 분리되어 나간 도봉구는 면적이나 인구면에서 本區인 성북구보다 규모가 커서 성북구는 이때의 조정으로 크게 축소되어 서울 11개 區중 면적과 인구규모 모두 7번째가 되었다. 분구 전후의 성북구 인구규모를 살펴보면 다음 〈표 2〉, 〈표 3〉과 같다(499~500쪽 표 참조). 또 1975년 10월에는 성북구와 인근 동대문구·도봉구와의 사이에 區域변경이 있었다. 이것은 대개 지리적 관계에 의한 것인데, 모든 경계를 지리적 여건에 맞추어 조성하되 區域的주민의 일상생활권을 크게 참작하여 종래의 區境界 중 불합리한 부분을 조정한 것이다. 따라서 이 때의 구역조정으로 성북구는 지리적 여건과 생활권에 의해 동대문구·도봉구와의 구역이 확정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 조정 후의 성북구 인구규모를 살펴보면 다음 〈표 4〉 와 같다(501쪽 표 참조). 이후의 성북구의 안,구동돼 추이를 〈표 5〉 의 對前年比를 통해서 살펴보면 서울시 전체 증가율을 밑돌고 있음은 물론, 1977년을 경계로 완만하게 계속적인 감소추세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먼저 강북에 위치한 대부분의 區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후반 이후 서울시의 도시개발 방향이 강남지역 개발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이에 따라 인구이동의 방향도 江北에서 江南으로 급속도로 진행되어 강북에서 강남으로 인구집중이 일어났던 점과 관련된다. 두번째로는 이 지역이 도심과 변두리 사이에 낀 중간지역으로서 이미 개발이 완료되어 인구성장이 끝난 안정된 주거지역으로서의 성격이 정착된 점과 관련된다 하겠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북구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전반기에 가장 활발하게 개발되었고,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는 주택건축 등 개발이 위축되기 시작하여 더 이상의 인구증가 요소는 없었던 것이다. 반변 인근의 도봉구와 노원구는 계속적인 개발로 강북에서의 인구이동을 주도하였던 것과 대조되는 사실이다. 주거지역으로서 성북구가 갖는 또 하나의 특색은 강남의 주거지역과는 달리 단독주택을 단위로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최근 아파트가 散在的으로 들어서고 있으나 강남지역과 같이 大團地化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에 따라서 대량의 인구유입도 없었다. 이러한 점이 성북구 인구동태가 안정되게 된 요인들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는 轉入과 轉出관계를 살펴보면 보다 분명하게 이해되는데 1991년의 경우 성북구의 1일 평균 전출 : 전입의 비는 397명 : 352명으로 전출이 전입을 앞지르고 있어 완만한 인구감소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인구밀도에 있어서는, 성북구는 1960년대에 주거지역으로서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졌던 것과 관련하여 1960년대 말까지는 서울시 평균 인구밀도를 밑돌아 인구밀도가 그리 높지 않은 지역이었으나, 개발의 진행과 아울러 인구유입이 이루어져 인구밀도도 높아져 1970년을 경계로 서울시 평균 인구밀도를 넘어서기 시작하였다. 이어 1973년에는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되어 나가면서 면적이 대폭 축소되어 인구밀도는 더욱 높아져 ㎡당 22,108명으로 서울시 평균 인구밀도 10,030명의 두배를 넘어섰으며, 마포구-동대문구에 이어 세번째로 인구밀도가 높은 구였다. 또 1975년에는 인접구와의 구역 조정으로 인구밀도가 24,360명으로 더욱 높아져 중구에 이어 두번째로 인구밀도가 높은 구가 되었다. 이후 성북구는 구역 조정도 없었고, 1970년대 후반 이후 인구수가 완만한 감소추세를 보임에 따라 인구밀도도 점차 낮아져 1991년 현재는 22,326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는 서울시 평균 18,014명을 上뼈하여 서울시 22개 區중 8위로서, 성북구는 아직도 인구밀도가 높은 편에 속한다고 하겠다. 한편 성북구 관내의 인구밀도 상황은, 성북구에 대해 ‘서울의 주거지역의 다양성을 축소시켜 보여주는 진열장’이라 비유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즉 성북구 관내에서 중·상류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는 성북2동·정릉3동·정릉4동 등은 ㎡당 인구밀도가 1만명 이하로 낮은 분포를 보이고 있는 반면, 6·25동란 이후 무허가건물이 집단으로 들어서 서울의 문제성 많은 주거지역으로 손꼽혀왔던 길음 1·2·3동과 월곡3·4동, 장위 3동 등은 인구밀도가 5만명 내외로 아주 높은 지역으로 구별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월곡3동과 장위 3동은 ㎡당 인구밀도 6만명을 넘는 고밀도지역에 속하고 있다. 참고로 1991년 현재 성북구 각 동별 인구현황을 살펴보면 다음 〈표 6〉과 같다(503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96-501쪽
  • <일제강점기 성북구 지역 동의 인구 변화> 1915년 성북동: 810 돈암동: 1,138 안암동: 345 보문동: - 정릉동: - 길음동: - 종암동: - 월곡동: - 장위동: - 석관동: - 계: 2,293 1930년 성북동: 1,666 돈암동: 2,462 안암동: 1,817 보문동: - 정릉동: 1,391 길음동: - 종암동: 649 월곡동: 621 장위동: 1,679 석관동: 551 계: 10,340 1949년 성북동: 13,372 돈암동: 62,685 안암동: 17,664 보문동: 17,510 정릉동: 17,622 길음동: - 종암동: 6,400 월곡동: 8,251 장위동·석관동: 5,880 계: 149,384
    근거자료의 '<일제강점기 성북구 지역 동의 인구 변화>'표에 기록된 수치를 옮겨적은 것이다. 본문의 돈암동은 현재의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이 포함된 지역이다.
  • 근거자료 p.5 표<성북구 지역 숭인면 관내 리의 호구수 및 인구>
  • 인구등록 추이(단위: 세대, 명) •2018 세대: 186,601 등록인구 합계: 447,687(남: 216,495 여: 231,192) 등록인구 한국인: 435,868(남: 211,904 여: 223,964) 등록인구 외국인: 11,819(남: 4,591 여: 7,228) 인구증가율(%): -1.70 세대당 인구: 2.34 65세 이상 고령자: 67,782 인구밀도(명/㎢): 18,218 면적(㎢): 24.57
    기획예산과(통계기록팀), 2019, 제34회 성북통계연보 , 38-39쪽
    제34회 성북통계연보의 '등록인구추이'표에 기록된 수치 중 2018년 부분을 옮긴 것이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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