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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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구의 종교현황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시대의 성북구 지역은 도성과 가깝고 경관도 빼어나 왕실의 원찰을 비롯한 사찰들이 많이 건립되었는데, 성북동과 북한산을 비롯한 산간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천주교는 1975년 성북동성당이 설립되었고, 1978년에는 석관동성당이 설립되어 성북구 지역에 본격적인 천주교의 교세확장이 시작되었다. 개신교는 1908년 미아리교회(현 돈암감리교회)의 설립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신암교회, 삼선그리스도교회 등이 설립되었고, 해방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교회가 늘어났다. 그밖에도 각 마을에는 민속신앙의 대상인 도당이 있었는데, 도시의 발달과 개발로 인해 점차 사라져 일부 동네에서 마을행사로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으며, 무속인들도 현재는 소수만 활동하고 있다.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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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북동 글라렛선교수도회
  • 미아동 감리교회 부활절 기념선물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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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근거자료 원문

  • 1) 大韓佛敎曹溪宗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 불교는 호국불교로서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편안함을 그 실천목표로 하는 종교이다. 그리고 천여년동안 우리민족의 모든 문화를 이끌었고, 조선조의 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대다수 국민에 의해 민족종교로서 이어져 오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성북구에는 북한산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들이 있는데 이곳의 사찰은 거개가 조선시대 즉 서울이 도읍으로 정해지고 난 후부터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태민안과 왕실가족의 제사를 돌보는 일을 맡아 하던 곳들이 대부분이다. 서울의 북쪽에 위치해 한편은 경기도 고양군과 경계되어 있고 한편은 서울의 종로구, 성북구, 도봉구에 걸쳐 있는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와 그 동쪽의 인수봉, 남쪽의 만경대의 세 봉우리로 구성되어 삼각산이라고도 불린다. 세 산봉의 정상부는 모두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기상이 충천하는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즉 산봉이 높고 화강암으로 된 산용이 웅장하여 예로부터 서울의 진산으로 추앙되어 왔다. 북한산에는 1711년(숙종 37) 에 축조한 길이 8㎞, 평균높이 7m의 북한산성이 남아 있고, 14개의 성문 중 대남문·대성문·보국문·용암문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밖에 산중에는 유명한 北漢離宮址와 文殊庵·太古寺·元曉庵·祥雲寺·道詵寺 등 사찰과 문화유적이 많다. 성북구에 있는 사찰들도 이 북한산의 줄기에 자리하며 그 지맥에 영향을 받고 있다. 성북구에는 보문사를 비롯해 여러 사찰이 있는데 그 중 전통사찰로서 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 사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사찰들 하나하나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기술될 수 없고 자료정리가 되어 있는 몇 사찰에 한해서만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01-602쪽
  • 2) 韓國佛敎太古宗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창립하여 오늘에 이른 한국불교 청년회는 5만의 정예회원이 태고보우국사의 얼을 오늘에 정진하며, 청소년단체 협의회와 이사단체로서 맹활약하고 있다, 태고종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단체로서 승려부인들의 모임인 한국불교태고종부인회가 창립되어 활동을 개시하였으며 종도들의 해외견문에 대한 욕구가 커짐에 따라 전국 성지순례 단체인 한불국제여행사를 설립하여 해외성지를 참배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한편 城北區 관내에는 本 宗團소속으로 등록되어 있는 寺利이 太古寺·般若寺·三弘寺·誠心寺·石佛寺·普門精舍·上院寺·奉皇寺·觀音精舍·金剛寺·天中寺·大圓寺·修德庵·龍奉精舍·惠德寺·長安寺·海元寺·觀音庵·仙龍寺·成願寺·正明寺·東園庵·松雲精舍·成佛寺布敎院·般若寺·萬德寺·法輪精舍·積善庵·紅運寺·大興寺·善行庵·祈禱寺·大佛精舍·運華寺·大願寺·月光寺·白運寺·練修寺 등 총 38개에 이르며, 僧侶數는 100여명, 信徒數는 30,250명에 달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06쪽
  • 2. 天主敎 1) 신자 집단의 형성 지금의 성북구 일대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시기는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늦은 편이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서울 북쪽 지역이 초기의 신앙 전파 경로에서 비껴나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즉 1784년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후 그 신앙이 주로 서울 중심부에서 한강 남쪽이나 동쪽의 경기도 방향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100여년 동안 진행된 천주교 박해의 기록에서도 지금의 성북구 북쪽 지역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훗날의 기록에 따르면 일제치하인 1930년대 후반에서야 미아리 지역에 처음으로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때까지 이 일대의 신앙중심지는 1927년 10월에 설립된 혜화동 본당(당시의 이름은 栢洞本堂)이었으며, 이 지역의 신자들도 이 본당의 사목(司救)관할 아래에 있었다. 물론 1938년경에 이룩된 미아리(지금의 吉音洞)의 신자 집단은 다른 예와 마찬가지로 주목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신자 집도 4세대에 지나지 않았고, 정식 공소(公所:본당보다 작은 신자 집회소)로 인정된 것도 아니었다. 한편 이 무렵에는 서울의 城北洞·敦岩洞과 고양군의 水踰里·牛耳里·貞陵里 등에도 몇몇 신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들과 미아리의 신자 집단이 하나의 모임을 형성한 것 같지는 않다. 미아리의 신자들은 이후 혜화동 본당으로 다니면서 미사에 참례하고, 이웃에게 신앙을 전파하며, 새로 이주해 오는 신자들과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지켜 나갔다. 그 결과 2, 3년이 지나면서는 그 신자 집단이 본당에서 주시할 정도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 무렵 혜화동 본당에는 파리외방전교회(M.E.P) 출신의 싱거(Singer, 成載德) 신부가 제4대 주임 신부로 있었고, 그의 보좌는 장금구(莊金龜, 크리소스토모) 신부였는데, 이들이 가끔 미아리 일대의 신자들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곳 신자들은 본당 신부와 신자들의 도움을 얻어 공소의 설립을 꾀하게 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08-609쪽
  • 4) 교세의 확대와 현세 본당이 확대됨에 따라 성북구 지역의 전교 활동도 더욱 활발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68년 당시에는 5개 본당의 총 신자 수가 1만 명 정도였지만, 1975년 무렵에는 1만 8천 명 정도로 증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모두 서울대교구의 제9지구로서 신심 단체나 본당의 활동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신자들 사이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한편, 이 무렵부터 각 본당에서는 현실 참여에도 적극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해마다 연례적으로 실시되는 불우이웃돕기 운동, 종교와 사회와의 유대를 위한 갖가지 노력 등이 바로 그 예였다. 다만 교회의 사회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면서 1970년대의 유신체제아래에서는 성직자와 일부 신자들이 탄압을 받기도 했으며, 장위동 본당 같은 경우에는 본당의 週報가 불법간행물로 인정되어 일시 정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성북구의 천주교회는 1978년에 들어 현재와 같은 본당 구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그 이전까지는 이 지역에 살던 신자들 가운데서도 석관동과 성북동 일대의 신자들이 이문동 본당이나 혜화동 본당으로 다니고 있었는데, 새 본당의 신설로 이러한 문제가 해소된 것이다. 이때 먼저 신설된 본당은 1975년 5월 9일에 인가된 성북동 본당(초대 신부 : 朴貴勳, 요한)이었다. 이 지역은 당시 혜화동 본당의 관할구역 안에서도 가장 먼 곳이었으므로 본당 신부나 신자들이 독립을 원해 오던 곳이었는데,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본당 설립의 꿈을 이루고, 348세대 1,025명의 신자들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성북동 본당에 이 어 1978년 3월 15일에는 石串洞本堂이 분리 신설되었다. 본래 이곳은 성 골롬바노회에서 신부 파견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본당 설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교구에서도 본당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1977년에는 새 부지를 매입하고 이어 다음해에는 朴魯憲(요한금구) 신부를 초대 본당 신부로 임명하였다. 성북구 안의 본당과 신자 현황(614쪽 표 참조). 위와 같이 새 본당이 신설됨으로써 성북구에는 모두 7개 본당이 자리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세도 계속 확대되어 1984년 무렵에는 26,400명의 신자를 기록하게 되었고, 이것이 1992년 말 현재 39,00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기록을 살펴 보면, 1980년대 말부터는 예전에 비해 선자가 크게 증가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주로 지역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새 신자들이 탄생하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발전의 가능성은 있다고 할 수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13-614쪽
  • 3. 改新敎 4) 성북지역 선교의 과정과 현황 1900년대의 서울지역 교회가 부흥하여 각처에 교회가 설립될 때 성북지역에도 최초로 미아리교회(현 돈암감리교회)가 1905년 동대문 교회의 기도처로 시작되어 1908년 교회가 설립되었고 1937년에는 신암교회(장로교)가 1938년에는 삼선그리스도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전까지 완만한 발전을 계속하다 1904년에 들어와 더욱 많은 교회가 설립되어 15개 교회로 증가되었는데 이때 성결교단의 돈암성결교회 (1946년)가 설립되는 등 각 개신교단들이 지역선교를 위한 교회를 설립하였다. 도시의 인구증가와 더불어 성북지역에도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어 왔는데 1992년 말 개신교수가 249개 교회에 교인이 130,170명이 되어 성북구 인구의 24%나 차지하고 있다. 성북지역의 교회들은 열정적인 선교활동을 통하여 많은 주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90여년의 선교역사를 통하여 성북지역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인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양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복음의 근본정신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성북지역의 교회들은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양자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선교가 바로 이웃사랑의 실천이요, 이웃사랑의 실천이 바로 선교임을 고백하면서 이를 위하여 열심히 봉사해 왔다. 주민의식개혁, 육영사업, 공공기관활동 협력지원, 주민들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지금도 여러 교회들이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이러한 활동들은 앞으로 더욱더 확장될 전망이다. 성북지역에서 교회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때 지역사회와 더불어 아름다운 공동체가 형성되어 갈 것이라 믿는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17-619쪽
  • 4) 성북지역 선교의 과정과 현황 성북지역에서의 개신교 발전 현황 ○ 년도별 교회설립 현황(618쪽 표 참조). ○ 교파별 현황(618쪽 표 참조). ○ 교회별 설립년도 ⋅ 1910년 이전 (감리) 돈암감리교회 1908 ⋅ 1920년대 (감리) 보문제일교회 1925 ⋅ 1930년대 (장로) 신암교회 1937 (그리스도) 삼선그리스도교회 1938 ⋅ 1950년대 (장로) 정릉교회 1942 (장로) 영암교회 1945 (감리) 미아감리교회 1946 (성결) 돈암성결교회 1946 (장로) 덕수교회 1946 (감리) 경동교회 1946 (장로) 양광교회 1947 (성결) 성북성결교회 1947 (장로) 미암교회 1948 (장로) 성북교회 1949 (장로) 안암교회 1949 ⋅ 1950년대 (성결) 혜화교회 1953 (장로) 광선교회 1953 (장로) 삼선감리교회 1954 (장로) 영암교회 1954 (감리) 정릉감리교회 1954 (장로) 성암교회 1954 (장로) 종암교회 1955 (장로) 돈암교회(암암동) 1955 (감리) 안암감리교회 1955 (장로) 월곡교회 1955 (장로) 국제평화교회 1955 (장로) 동암교회 1957 (장로) 성일교회 1958 (장로) 송천미아리고개 1958 (장로) 삼선교회 1959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19쪽
  • 4. 巫俗信仰 2) 城北區 巫俗의 樣相 城北區내에 散在해서 현재 巫業을 하고 있는 무당 가운데 그중 몇몇 巫가 받들고 있는 神像과 樂器, 巫具 그리고 굿에 관한 儀式節次를 간략하게 기술해 보자. 현재 鍾岩洞 28-252에서 巫業을 하고 있는 윤길례(女, 63세)의 例를 들어보면 神壇 위 벽에 가로×세로 약 50㎝× 80㎝ 가량의 채색된 巫神圖가 서쪽벽에 5장 북쪽벽에 4장이 붙어 있다. 神格을 보면 창부신·별상·오방신장·장군·관운상·산신할아버지·부처와 칠성, 삼불제석, 대신할머니 등이며 그리고 북쪽벽의 각목 위에는 가로×세로 약 8㎝×25㎝ 정도되는 백지에 신의 이름을 써 붙였는데 모두 12장으로 이를 왼쪽부터 보면 ①팔만신장님 ②산신할아버지 ③장군님 ④천하장군님 ⑤산신도사님 ⑥약사보살님 ⑦구름성관님 ⑧월광님 ⑨일광님 ⑩옥황상제님 ⑪지하대신 ⑫천하대신 등이다. 巫樂器는 장고·징·제금이 주가 되며 巫具로는 방울·부채·삼지창·신장칼·언월도·작두 등을 사용하고 점을 칠 때에는 쌀과 엽전을 사용한다. 의상은 고사나 치성을 할 때에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으며, 굿을 할 때에는 巫服을 입는다. 굿의 순서는 ①부정거리 ②불사거리 ③호구거리 ④대신·말명거리 ⑤산거리 ⑥신장거리 ⑦대감거리 ⑧조상거리 ⑨나라굿거리 ⑩장군거리 ⑪별상거리 ⑫신장거리 ⑬대감거리 ⑭성주거리 ⑮창부거리 뒷전 순이다. 鍾岩洞 92-170에서 巫業을 하고 있는 유성렬(여, 72세)의 예를 들어보면 神壇 앞 벽에 가로×세로 약 70㎝×80㎝ 정도의 채색된 巫神圖 7장이 붙어 있는데 1장에 巫神圖 한분의 神이 그려져 있는 것도 있는가 하면 1장에 여러 神이 그려져 있는 巫神圖도 있다. 차례대로 보면 ①창부신·오방신장님·임금님·백마장군 ②일월성신·옥황상제·용장군님 ③제석님(세분) 칠성님(일곱분) ④도사님 ⑤산신님 ⑥약사여래님, 석가모니불 약사보살 ⑦조장군·장장군·관우장군님·왕장군·최일장군·별상님·호구장군 등이다. 巫樂器는 제금·징·장고를 주로 쓰며 그 밖에 피리·해금·대금 등을 쓰며 巫具는 방울·신장칼·언월도·삼지창·작두를 썼는데 특히 방울은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굿의 절차를 보면 ①부정거리 ②불사거리 ③산거리 ④가망거리 ⑤조상거리 ⑥장군거리 ⑦신장거리 ⑧대감거리 ⑨성주거리 ⑩창부거리 ⑪귀면말명거리 ⑫뒷전거리 순이다. 敦岩洞 186-302에서 巫業을 하고 있는 한길순(여, 70세)의 예를 들어보면 한길순은 巫神圖 대신 巫壇 윗쪽 벽에 가로 10㎝, 세로 40㎝ 정도의 흰 종이에 붉은색으로 세로로 써서 붙여 놓았다. 이 종이는 神壇 서쪽 벽에 한장, 북쪽 벽에 12장을 붙여 놓았는데 각 神의 명칭은 열다섯으로 모두 漢字로 썼다. 이들을 왼쪽부터 보면 ①三佛帝釋 ②日月星辰 ③玉皇上帝 ④七星 ⑤仙官道士 ⑥八道名山山神 ⑦門入門雷聖神將軍 ⑧天門神將 ⑨五方神將 ⑩別上님 등이다. 巫樂器는 장고·징·제금 등이며 때에 따라 피리 또는 대금과 해금도 사용한다. 대금과 해금 등 큰 굿을 할 때 악사를 부를 경우에 사용한다, 굿의 순서는 ①부정거리 ②불사거리 ③칠성거리 ④제석망거리 ⑤신중거리(중생거리) ⑥산신거리 ⑦대신거리·장군거리 ⑧별상거리 ⑨신장거리 ⑩대감거리 ⑪성주거리 ⑫창부거리 순이다. 東小門洞 3가 77에서 巫業을 하고 있는 성옥례(여, 37세)의 예를 들어보면 神壇 윗쪽에 巫神圖 9장이 걸려 있는데 정면으로 보이는 서쪽벽에 6장, 왼쪽벽에 2장, 오른쪽 벽에 1장이 걸려 있다. 이를 왼쪽부터 차례로 적어보면 ①관세음보살상 ②삼불제석 ③칠성님 ④용왕님 ⑤산신할아버지 ⑥신장님 ⑦대신할머니 ⑧장군할아버지 ⑨단군할아버지 순이다. 巫樂器는 장고·징·제금 등이며 큰 굿을 할 때에는 캡이를 부르는데 피리·해금·대금 둥을 사용하며 巫具는 방울·부채·신장말·삼지창·언월도 등을 사용하며 작두는 타지 않는다. 피리는 남편이 담당한다. 굿의 순서는 ①부정거리 ②불사거리 ③칠성거리 ④제석거리 ⑤신중거리 ⑥산선거리 ⑦대신거리·장군거리 ⑧별상거리 ⑨신장거리 ⑩대감거리 ⑪성주거리 ⑫창부거리 순이다. 三仙洞 1가 274-56에서 巫業을 하고 있는 송영수(남, 43세)의 예를 들어보면 巫神像은 神壇위에 가로×세로 약 40㎝×80㎝의 크기의 巫神圖 9장이 걸려 있는데 巫神像을 보면 ①오방선장님 ②백마장군님 ③용궁할아버지 ④글문도사님 ⑤후불신령님 ⑥산신할아버지 ⑦칠성님 ⑧삼불제석 ⑨대신할머니 등이다. 오방신장님 옆에는 붉은색으로 一心奉請宋氏諸宗神將大敢之位라고 쓴 가로×세로 약 10㎝×80㎝의 종이가 붙어 있다, 이것은 신장대감으로 오선 송씨의 부친을 모신 것인데, 돌아가신 부친이 수도가 좀 부족하기 때문에 巫神圖를 모시지 못하고 글자로 써서 모신 것이라고 한다. 巫樂器는 북·징고·장고 등을 사용한다. 巫服은 별도로 갖추어 입지 않고 흰색 한복을 주로 입는다. 굿의 종류는 치성제수굿·병굿·진적굿 등을 주로 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21-623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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