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1949.08.13
장소 인문지리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위치한 행정구역인 동의 하나이다. 성북동은 한양도성의 북쪽에 있는 동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초에 한성부 숭신방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갑오개혁(1894) 때,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면 한성부 동서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이었다. 1911년에는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으로 칭하였고, 1914년 4월 1일 경성부를 축소하면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가 되었다. 그 후 1936년 4월 1일 경성부 관할구역의 확장에 따라 경성부 성북정이 되었고 1943년 6월 10일에는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광복 이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고치면서 성북정은 성북동이 되었으며, 1949년 8윌 13일, 성북구가 동대문구에서 분리 신설됨에 따라 성북동은 이에 속하게 되었다.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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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城北洞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1949.08.13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근거자료 원문

  • 성북동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우리의 역사,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중에서도 제일로 손꼽힌다. 예부터 성북동은 복숭아와 앵두나무가 특산물로 재배되어 성북동 사람들은 과실들을 팔아 생업을 유지하여 북저동, 도화동, 복사동 등 특히 복숭아와 관련한 여러 이름들로 불렸다. 북둔하면 대번에 ‘복사꽃!’이 튀어나올 정도로 서울 내에서는 유명하였다. 봄철 꽃이 필 무렵이면 도성에 있는 사람들이 만개한 복숭아꽃을 보기 위해서 앞다투어 성북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한다. 성북동 복숭아꽃에 반한 조선 문인들도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많은 글과 시를 남겼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15쪽
  • 복숭아와 관련한 이름들처럼 지금은 사라진 이름들이지만 성북동은 노구멧골, 논골, 운수동, 묵사동, 도둑골이란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렸다. 집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노구메(밥)를 떠 신령께 제사를 지냈더니 남편이 돌아왔다 하여 노구멧골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논이 없고 산골지역인 이곳에 논다랑이를 놓고 살아서 논골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또 예전에 묵사(墨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라 묵사동이라 하였는데, 실학자 서애 류성룡도 묵사동에 살았음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16-18쪽
  • 그 옛날 도둑골이 아직도? 숙정문 밖 성북동 일대는 계곡이 깊고 산세가 험해 도둑들이 많이 숨어사는 장소로 유명해 도둑골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성북동은 여전히 도둑촌이라는 별명을 안고 있다. 60년대 이후로 국내 정치인들, 재계 인사들과 대사관저가 몰려 있어 성북동은 대한민국 부자 동네 1순위가 되었다. 이상한 사실은 이 부자들은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들어도 쉬쉬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되기를 꺼려하는 성북동 부자들을 특성을 도둑들은 더 악용하여 대범한 도둑질을 하고 있다.과거 도둑들이 숨어 지내던 곳이었다면 현재는 도둑들의 먹잇감이 되어버린 이곳. 도둑골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18쪽
  • 4. 복숭아 심은 뜻은-북둔도화 19세기 서울의 도시 경관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들인 『한경지략』, 『경도잡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서에서는 서울 근교 명승지 중 하나로 모두 성북동을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복사꽃을 명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이는 18세기가 끝나갈 무렵이나 19세기의 상황을 반영한 것일 뿐 그 이전에 성북동이 유명한 꽃구경 장소였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북둔도화北屯桃花’라는 멋진 신조어는 빨라도 1766년(영조 42) 성북둔 설치 이후에나 서울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음이 분명하다. 영조대의 관료 김구주金龜柱(1740-1786)가 지은 「다시 성북둔을찾다再訪城北屯」라는 한시에는 성북둔이 막 설치된 직후 개척 시기의 성북동 풍경이 나온다. 작품의 예술적 성취도를 떠나 초창기의 성북둔을 소재로 한 시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별반 구경거리도 없던 도성 바깥 황량한 마을의 적적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시이다. 북둔을 처음 설치할 때 여러 반론 물리쳤으니 北墩初設擯羣言 궂은 날 성황의 지극한 계책이 보존해 주었음이라. 陰雨城隍至計存 지난날엔 그저 평범하고 기다란 골짜기였을 뿐인데, 往者尋常一長谷 어느새 촌가 몇 호 벌려 있구나. 居然排列幾家村 푸른 계곡의 세찬 물소리는 누가 세고 있는지 緣溪洴澼誰爲葉 성곽을 등지고 밭 갈고 김매면 넉넉한 군량 얻으리라. 負郭耘耕可餉屯 다시 맑은 가을 닥치니 계곡의 물과 돌이 좋을씨고. 更得淸秋水石好 나그네 와서 지팡이 짚고 물의 근원 어디냐고 묻는구나. 客來拄杖問窮源 ― 『가암유고』제3권 김구주가 다시 성북둔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이 일대는 긴 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물과 깨끗한 바위가 그럭저럭 보기 좋은 곳이었다. 아무래도 봄보다는 민둥산이나마 단풍과 수석이 어우러진 가을 풍경이 즐길 만했다. 김구주의 시에는 수량이 풍부한 골짜기 양 옆의 땅을 쟁기로 갈고 호미로 김매면 충분한 식량을 얻어 살 수 있다는 탁상공론식의 허술한 판단도 여실히 드러나 있지만 이 마을에 복사꽃이나 그 밖에 다른 유실수를 심었다는 기미는 찾아볼 수 없다. 성북동이 복사꽃과 연관을 갖게 된 것은 포백훈조계를 조직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비로소 안정된 생업을 갖게 된 주민들은 집 주변 공지마다 복숭아, 자두, 살구, 앵두 등 유실수를 심어 가꾸기 시작했다. 관상용이라기보다는 성안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에 보탤 요량으로 기르는 나무들로 단연 복숭아가 주종을 이루었다. 몇 년 뒤 수형을 갖춘 나무들은 4월 곡우를 전후해서 초가 사이사이에서, 성북천 양안에서 분홍 꽃잎들을 흐드러지게 피어 올렸다. 영조 42년(1766)에 성북둔이 설치되었으니 영조 재위 말년 혹은 정조 즉위 초에 이미 서울 사람들의 대표적인 꽃구경 장소로 이곳이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북둔도화’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도 이 무렵부터다. 도성 사람들이 성북동으로 오는 길은 대개 한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혜화문을 나와 성벽을 끼고 북쪽으로 2리(약 800미터)쯤 가면 선잠단과 성북둔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 아래는 성북동 뒷산에서 흘러내린 물길들의 합류 지점이어서 폭도 넓고 수량도 많았다. 본래 주민들이 마전터로 사용하던 곳으로 지금의 성북초등학교 앞 교차로이다. ‘북저동北渚洞’은 이 물가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여기에는 청운교靑雲橋 혹은 운수교雲水橋라고 하는 아름다운 이름의 다리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성북둔이 막아서고 그 뒤편의 언덕을 오르면 온 마을을 복사꽃이 촘촘히 수놓은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었다. ‘북둔도화’란 이런 장관을 일러 하는 찬사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여러 기록들을 종합할 때 성북둔이 있던 곳은 지금의 간송미술관과 성북초등학교 안 어디쯤이 아닐까 추측된다. 북둔에 놀러온 사람들은 어떻게 놀았을까? 1784년(정조 8) 봄,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지은 「유북저동기遊北渚洞記」에 당시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혹 가다가 혹 앉다가 하면서 내려다보니 촌가가 점점이 산기슭에 흩어져 있는데 대체로 복사꽃으로 울타리를 삼았다. 창호의 일부나 처마의 모서리가 언뜻언뜻 울타리 밖으로 드러나 보였다. 도성의 인사들은 달관에서부터 여항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놀고 구경함을 시간이모자란 듯이 열중하였다. 수레와 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노래 소리 번갈아 일어나며 사이사이 생황과 퉁소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국가 백년 승평의 모습이 다 여기에 있음이라. ― 『번암집』 제35권 도성의 양반들뿐 아니라 여항의 서민들까지 와서 같은 공간에서 놀고 갔다는 점이 흥미롭다. 대체로 이들은 아침을 먹고 나와 정오쯤 성북둔에 도착했으며 적당한 곳에 술상을 차려놓고 시를 지어 주고받거나 노래를 듣고 부르며 즐기다가 해질녘에야 서둘러 돌아갔을 것이다. 혹 채제공이나 김조순 같은 전현직 고위 관료들이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성북둔의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는 소소한 권세를 부리기도 했다. 북둔도화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성북동 여기저기에서 도성 양반들의 별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볍지 않은 명예와 부를 가진 이들은 서민들이 사는 북저동과는 조금 거리를 둔 한적한 계곡이나 야트막한 언덕에 정원을 조성하고 그 사이에 기와집 몇 채를 들여놓았다. 용도는 주로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함이었다. 수려한 자연환경에다 도심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은 양반 별서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만족했다. 1790년경부터 하나둘 조성된 별서는 19세말까지 꾸준히 그 수가 늘었다. 유득공의 북둔초당, 민영환의 음벽정, 의친왕 이강의 성락원, 윤용선, 이근택, 이종석의 별장 등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 밖에 주인 미상의 별서로는 오로정, 성북정, 백운정사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선시대 성북동의 별서 조성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의 양옥 별장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재벌들의 고급 주택지 조성으로까지, 시대마다 조금씩 형태를 달리해 이어졌다. 19세기에 조성된 별서 가운데 ‘오로정吾老亭’은 북저동 서북쪽 성곽 아래 지역에 있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지금의 덕수교회나 심우장 부근의 어느 산림 지대로 추정된다. 정조와 순조 연간에 활동한 중인 문사 장혼張混(1759-1828)이 이곳을 방문해서 지은 「북저동에서 놀다遊北渚洞」라는 제목의 시는 마을과는 멀리 떨어진 이 별서의 조용한 공기를 전달한다. 부제를 ‘마을 서북쪽 성곽의 그늘에 기대어 새로 지은 정자가 있으니 ‘오로’라고 편액하였는데 심히 맑고 깨끗하였다. 벽에 쓰다(洞西北附城陰 有亭新構 扁曰吾老 甚精灑 走題壁上).’라고 하여 별서의 위치를 밝히고 있다. 무성한 송림 사이로 흘러내리는 한 줄기 시냇물, 一流水夾萬株松 몇 리를 가도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하네. 數里行過人未逢 연기 피어 올리는 집 몇 채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烟火幾家隱何處 천길 절벽 위 망루 하나 외로운 봉우리에 기대고 있네. 城譙千仞倚孤峰 꾀꼬리와 노는 그대여, 띠로 덮은 정자가 좋구나 黃鸝遊子茅亭好 푸른 이파리 한가한 구름, 한낮의 경치가 농염하다. 綠葉閑雲午景濃 온종일 누구는 여길 별천지인양 생각하는데 鎭日誰知濠濮想 성문으론 수레와 말이 다투어 달려가네. 郭門車馬競相從 ― 『이이엄집』 제7권 이 오로정이란 별서의 존재는 1803년(순조 3)에 이만수가 지은「오로정」이라는 한시에서도 확인된다. 추측컨대 늦어도 순조 연간부터는 성북동 산간의 적당한 곳에 아름다운 별서들이 속속 조성되고 있지않았을까? 앞으로 더 많은 자료를 보면서 성북동 별서들의 이름, 위치, 조성연대, 소유주 등을 확인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일단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1766년 선잠단 부근에 성북둔이 설치된 이후 수십 호 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들 성북동 주민들은 포백훈조계가 조직됨으로써 비로소 안정된 생업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이 마을이 북둔도화로 알려져 근교의 명승지로 떠오른 것은 빨라야 1780년대의 일이며 1800년을 전후로 해서 도성 양반들의 별서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 결과 초창기 선잠단과 성북둔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의 범위는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저 너머 깊숙한 산림지대로까지 확장되었다. 일반 서민과 상류층의 주거지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공존하는 성북동 특유의 양극적 삶의 구도는 이즈음 어슴푸레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51-59쪽
  • 북둔도화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성북동 여기저기에서 도성 양반들의 별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볍지 않은 명예와 부를 가진 이들은 서민들이 사는 북저동과는 조금 거리를 둔 한적한 계곡이나 야트막한언덕에 정원을 조성하고 그 사이에 기와집 몇 채를 들여놓았다. 용도는 주로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함이었다. 수려한 자연환경에다 도심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은 양반 별서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만족했다. 1790년경부터 하나둘 조성된 별서는 19세말까지 꾸준히 그 수가 늘었다. 유득공의 북둔초당, 민영환의 음벽정, 의친왕 이강의 성락원, 윤용선, 이근택, 이종석의 별장 등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 밖에 주인 미상의 별서로는 오로정, 성북정, 백운정사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선시대 성북동의 별서 조성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의 양옥 별장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재벌들의 고급 주택지 조성으로까지, 시대마다 조금씩 형태를 달리해 이어졌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56-57쪽
  • 일제강점기의 성북동(1910~1945) 1. 일제강점기 성북동의 행정구역 명칭 변화 '5부 8면제'의 실시 :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 성북동은 조선이 만들어진 초기부터 한성부漢城府에 속했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이 때 성북동의 명칭은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崇信坊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성북동’이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1945년까지 성북동의 행정구역 명칭은 네번 바뀐다. 첫 번째 행정구역 변화는 1911년에 이루어졌다. 4월 1일 경기도 내에 면의 명칭 및 구역을 정하는 법령인 경기도령 제3호가 발표되었다. 이 법령에 따라 경성부는 동 · 서 · 남 · 북 · 중 5개 부部와 8개의 면面으로 재편되었다. 이것을 통상적으로 ‘5부部 8면제面制’가 실시되었다고 한다. 5개부와 8개 면 아래에는 661개 동洞과 리里가 속하게 되었다. 성북동은 8개 면 중 하나인 숭신면崇信面에 속하게 되었다. 숭신면은 성북동을 포함하여 40여개의 동과 리로 구성된 면이었다. 1911년 4월 1일 이후 성북동의 주소는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 법령에 따라 형성된 경성부의 총 면적은 약 62.84㎢(16方里)이었다. 부를 담당하는 직책으로 부장을, 면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면장을 두었다. 이들은 경성부의 최고 책임자였던 부윤府尹의 지휘 감독을 받아 군과 면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68-69쪽
  • 부제의 실시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조선총독부는 1913년 10월부터 1914년 4월까지 지방제도 개혁을 실시했다. 1913년 10월 30일 제령制令 제7호로 부제府制를 실시할 것이 발표되었다. 이후 총독부는 이에 대한 세부적인 법령을 발표했다. 이에 근거하여 1914년 4월 1일부터 경성 · 인천 · 군산 · 목포 · 대구 · 부산· 마산 · 평양 · 신의주 · 원산 · 청진 12개 지역에서 부제가 실시되었다. 이 때 성립된 부府는 이전 부府와 성격이 달랐다. 새로 만들어진 부는 그 산하에 면面이 있지 않았다. 지방행정의 기초단위로서 부가 성립된 것이다. 새롭게 부가 성립되면서 기존행정구역 산하에 있던 면은 분리되어 군 아래로 배치되었다. 이 때 분리된 면은 주로 농촌지역이었다. 면을 제외한 시가지 지역은 새로운 부가 되었다. 새로 성립된 부는 지방행정상 도시지역만을 관할하는 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그 면적은 이전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경성부의 면적은 약 36㎢이었다. 경기도는 1914년 3월 13일 도령道令 제3호를 발표하여 도내의 명칭과 구역을 정했다. 이에 따라 경성부 8면 중에서 일부는 경성부로 편입되었고 일부는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으로 편입되었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고양군은 총 3개면 155개리로 구성되게 되었다. 고양군으로 편입된 지역은 용강면龍江面, 연희면延禧面, 은평면恩平面, 숭인면崇仁面, 뚝도면纛島面, 한지면漢芝面 6개 지역이었다. 성북동은 숭인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명칭은 성북리로 바뀌게 되었다. 숭인면은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새로 만들어진 면이었다. 옛 경성부 숭신면崇信面과 인창면仁昌面 중에서 한지면에 속하게 된 일부 지역을 제외한 지역으로 형성되었다. 숭신면의 숭崇자와 인창면의 인仁자를 따서 숭인면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숭인면 아래에는 22개의 리가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고양군내에서 가장 많은 리로 구성된 면이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69-71쪽
  • 경성부에 편입된 성북리 : 경성부 성북정 1914년 부제 실시 이후 경성부의 면적은 약 36㎢이었다. 당시 경성부의 인구는 대략 40만이었는데 이 인구를 수용하기에 경성부의 면적은 매우 좁았다. 경성부의 확장에 대한 구체적인 움직임은 1930년대에 들어가서 이루어졌다. 이노우에 기요시井上淸 경성부 부윤府尹은 1932년 12월 27에 있었던 정례 기자회견에서 도시계획령都市計劃令의 시행과 함께 경성부의 구역을 크게 확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경성부는 부의회府議會에 경성부 확장에 대해 안을 상정하고 그 내용에 대해 협의했다. 이와 함께 경성부에 편입될 고양군, 시흥군, 김포군 관계자들과 회합을 가지면서 경성부를 확장할 준비를 했다. 경성부의 구역확장에 대해 규정한 총독부령總督府令 제8호가 1936년 2월 14일 발표되었다. 이 법령에 따라 경성부의 구역은 동쪽으로 숭인면 내의 중랑천中浪川 우안右岸의 지역, 서쪽으로 고양군 연희면 일부와 용강면 전 지역, 남쪽으로 한지면 일원 및 시흥군 내 영등포읍 전역, 북쪽으로 고양군 은평면 지역 일부 및 숭인면 정릉천 이남 등의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성북리가 속했던 숭인면의 일부 리는 경성부로 편입되고 일부 리는 숭인면으로 남게 되었다. 성북리는 돈암리, 신설리 등과 함께 경성부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명칭도 성북리에서 성북정城北町으로 바뀌게 되었다. 1936년 구역확장으로 경성부의 면적은 기존의 면적에 비해 약 3.7배가 늘어나 약 136㎢이 되었다. 인구도 23만 2천여 명이 더해져 약 63만 6,800명을 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큰 규모였다. 관할 구역이 확장됨에 따라 경성부는 관리상의 이유로 용산龍山, 동부東部, 영등포永登浦 세 출장소를 설치했다. 숭인면에 속했던 여러 동리는 동부출장소에 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북정은 동부출장소 관할에 들어가지 않고 경성부 본청本廳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성북정의 위치가 경성부 본청과 더 가깝기 때문에 행정상의 효율성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은 바로 지켜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부 확장안이 실시되고 성북정이 경성부의 본청에 속하게 되었는데 2개월이 지나도록 성북정의 행정사무는 동부출장소에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 성북정 주민들의 불만이 많았다. 동부출장소는 신설정(현재 신설동)에 있었는데 1936년 당시 교통상황 등을 생각해볼 때 성북정에서 신설정까지 왕복하는 것이 많이 불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북정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경성부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 결과 경성부에서는 1936년 6월 22일부터 성북정에 관한 사무를 경성부본청에서 취급하도록 결정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71-72쪽
  • 구제의 실시 :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 1937년 이후 경성부의 지방행정 분야 사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일본의 침략정책 때문이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으며, 1941년 12월 8일에는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것으로 인해 기존의 행정업무에 공출 및 식량통제 등과 같은 시국사무가 더해지면서 지방행정 업무가 급증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인구증가였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늘어나기 시작한 경성부의 인구는 1936년 구역확장 이래로 더욱 늘어나 1940년경 경성부의 인구는 대략 100만 가까이 되었다. 이와 같은 늘어나는 행정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경성부는 경성부 본청 및 각 출장소의 직원을 증원했다. 그리고 1940년 7월 1일에는 새로운 출장소인 서부출장소西部出張所가 신설되었다. 하지만 폭증하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다른 방안이 필요했다. 조선총독부, 경기도, 경성부는 합의 끝에 경성부에 구區를 설치하는 것을 결정했다. 1943년 6월 9일 총독부령 163호로 「경성부 구區의 명칭, 위치 및 관할구역」에 대한 법령이 발표되었다. 이 법령에 따라 1943년 6월 10일부터 ‘구제區制’가 실시되었다. 용산, 동부, 서부, 영등포 출장소는 폐지되었다. 동부출장소 관내는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개편되었으며, 용산출장소는 용산구로, 서부출장소는 서대문구로, 영등포출장소는 영등포구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함께 경성부 본청이 담당했던 지역은 종로구와 중구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각 구에는 구장區長을 두고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처음 구가설치될 때 구장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구제의 실시에 따라 성북정은 종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경성부 본청에서 성북정에 관한 행정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구제가 실시된 지 1년 5개월이 지난 1944년 11일 1일에 성북정은 종로구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 성북정이라는 명칭은 해방 이후인 1946년 10월1일 일본식 동명을 고치면서 성북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73-74쪽
  • 현대의 성북동(1945~현재) 1. 정치·문화의 1번지 성북동(1945~1950) 동회와 동회를 이끈 인물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마을이라고 부르는 최소단위가 바로 동네 혹은 ‘동洞’이다. 서울의 경우에 한정하더라도 이는 18세기 이래 자연발생 적으로 성장해온 생활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서울, 즉 경성부 역시 행정의 최소단위를 바로 이 동으로 삼았고, 당대에는 이를 ‘정町’이라고 불렀다. 1936년 4월 경성부로 편입된 ‘성북정’ 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 아래 있다. 성북정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이후였다. 그리고 이들은 곧 성북구락부라는 청년조직과 총대/정회라는 청년조직과 지역조직을 만들어 지역의 이익을 위한 활동을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해방 이후로 이어졌다. 1946년 왜색을 일소하는 움직임 하에 성북정은 곧 성북동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성북동에는 동회와 이를 이끈 동회장들이 있었다. 동회는 1933년 10월 3일에 설치되었던 정회가 그 기원이 된다. 1943년 구제가 실시된 이래 동대문구에 속했던 성북동은 그해 8월 1일에 성북 1, 2 정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해방 이후인 1946년 10월 1일 정회는 동회로, 정회를 이끄는 정총대는 동회장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성북 제 1, 2정회 역시 제 1동회와 제 2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1955년 4월 18일 동제가 실시되어 성북 제 1동과 제 2동의 구역이 재정의되기 이 전까지 근 십년간 유지되었다. 1955년 이전까지 행정의 최소단위에서 힘을 발휘했던 것은 이들 동회, 그리고 동회장이었다. 원래 행정조직이 아닌 동회는 1949년 7월 4일 공포된 지방자치법에 의해 폐지될 뻔했었다. 그러나 예산 문제, 그 리고 연이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정식 행정조직의 산하에 속하지 않고, 반관반민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물론 성북동에는 예로부터 마을 문화가 강했고, 해방 이후에도 동민들의 자치조직인 ‘자성회’가 조직되어 동민단합과 문화적 계몽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해방 3년, 그리고 주민동원이 일상회되어 있던 이승만 정권 하에선 이들 동회를 중심으로 여러 조직들이 난무했다. 5.10선거를 수행하기 위한 향보단(후일의 민보단), 주민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한 유숙계, 애국반(후일 국민반) 등이 그것 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에 동회는 일시적으로 이러한 단체들에 대 한 지원을 떠맡는 등 지역 활동에서 핵심을 담당했다. 성북동에도 동회 아래 제 1향보단 등 향보단이 결성되었고, 이른 바 해방 정국 우익 4대 청년단체 중 하나인 국청 성북동 제 1분회, 제 2 분회 등이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 청년단의 활동은 특히 1948년 1월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의 조선 방문을 계기로 격화되었다. 동회장 중에는 후일 국회의원이 된 이도 있었다. 1951년 당시 성북 제 1동의 동회장은 조태우趙泰友씨, 그리고 제 2동의 동회장은 김일金一씨였다. 이 중 제 2동의 동회장 김일은 1954년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서울시 국회의원 16인 중 1인으로 9,838표로 당선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만주 봉천 삼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 금릉대학을 중퇴한 이후 국민회의 선전부장, 자유당 성북구 당 위원장 등을 역임했었던 인물이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이래 주민조직 의 핵심을 담당했던 동회의 위상이 1950년대 중반까지는 여전했음을 보여주는 한 사건이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42-144쪽
  • 5. 성북동의 길-2015년 성북동의 풍경과 사람들 얼마 전 작고한 건축가 정기용(1945~2011)은 오래된 길은 ‘의미 깊은 그림일기(figurative journal)’라고 했다. 세대의 끊임없는 교차 속 에서 저마다의 추억이 길 위에 포개지므로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에 그치지 않고 길의 두꺼운 역사 속에 편입되는 의미 깊은 행위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더불어 모든 길은 다른 길과 연결된다. 홀로 있는 길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의 길은 반드시 다른 길과 만나면 서 새로운 장소와 의미를 획득한다. 그런 점에서 길은 과거로부터 왔으면서 현실의 공간이자 미래의 입구가 된다. 성북동의 수많은 거리, 골목들 역시 그러하다. 이 마을 사람들의 만남과 의지가 그 길들 위에 아로새겨져 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71-172쪽
  •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파도 2015년 성북동의 화두를 꼽으라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의 극복 문제일 것이다. 지역재생사업 또는 예술가들의 활동에 힘입어 해당 지역의 상권이 발전하면서 오랜 기간 지역을 발전시켜 온 상인이나 예술가들이 뛰어오른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거리를 떠나는 것을 일컫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비단 성북동의 문제만은 아니다. 올해 11월 서울시는 임대료 폭등이 극심한 시내 9개 지역(대학로, 인사동, 신촌 · 홍대 · 합정, 북촌, 서촌, 성미산마을, 해방촌, 세운상가, 성수동)을 선정, 지역 상권을 보호하는 방안을 발표하였는데 이 중 성북동은 빠져 있어 다른 인기 상권에 비해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의 상황은 훨씬 급박하게 돌아간다. 거리에 나가면 문득 예전에 없던 산뜻한 가게가 들어서 있고, 노후된 상가와 주택을 허문 자리에 어느새 고층의 상가와 빌라가 올라가는 것이 목격된다. 병원, 약국, 세탁소가 있던 공간은 주민 생활과는 관계없는 카페나 음식점으로 바뀌고 있다. 변화는 뚜렷하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 이어진다면 성북동 역시 서울의 다른 인기 상권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소비지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거리의 경관 또한 지금의 수수한 표정을 잃고, 화사하지만 몰개성적인 파사드로 뒤덮일 것이다. 뾰족한 수는 없어 보인다. 민간 자본의 흐름과 사유재산의 자유로운 처분을 지자체 차원에서 억제할 제도적 장치가 전무한 까닭이다. 앞서 말한 서울시가 내놓은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해결 방안도 언뜻 모범 답안처럼 보이나 찬찬히 뜯어보면 빤한 원칙론의 반복에 불과한 느낌이다. 내놓은 방안대로 임대인과 임차인, 주민, 전문가, 공무원으로 협의체를 구성해 임대료 인상 자제를 약속하는 ‘상생협약’을 체결하도록 유도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문제의 해결을 주민 개개인이나 마을공동체에게만 떠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관은 관대로 민은 민대로 문제점을 찾고 적극적인 대안을 모색해서 실천 방안을 협의해 나가야 한다. 성북동의 경우 다시 건축가 정기용의 말을 경청함이 좋을 성싶다. “우리가 분명히 해둘 것은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는 근대의 유적들이란 누가 선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나간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의외로 우리 가까이에 있던 것으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아 재창조되어 또 다른 시간대로 지속된다. 역사적 가치란 다시 생산될 수도 없고 대체할 수도 없는 가치를 말한다. 단순한 회상이나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다시 생명을 불어넣을 창조적 힘이 가해질 때 유적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동시대의 예술적 가치로 환원될 것이다. 파괴로부터 시작하는 건설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부터 재창조되는 것이 절실한 시점이다. 우리들은 이제 파괴의 발톱에서 신음하는 시간과 기억들을 구출하여 그들이 존재할 공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 정기용, 『사람 건축 도시』(2008) 중에서 지금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을 지키고 재창조함으로써 사라져가는 시간과 기억들에게 존재할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 막강한 현실의 힘 앞에서 너무 이상적이고 허술한 말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절문근사切問近思’라 했다.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각하면 길은 열린다. 성북동이 볼거리 많고 돈 쓰기 좋은 ‘상권’이 아니라 과거의 소리가 낮게 들려오는 수수하고 살기 좋은 ‘마을’로 우리 곁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94-197쪽
  • 성북동 쉼터라고 부르는 이곳에서부터 성곽은 아무 장애물 없이 저 너머 인왕산 자락까지 거침없이 이어진다. 몇 군데 가파른 경사를 만나지만 성곽 위에 조성된 널따란 산책로를 걷는 것도 큰 무리가 없다. 느티나무 그늘이 커서 한여름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 준다. 언제나 고요하고 생기 있는 시간이 거기에 있는 듯하다. 고개를 남쪽으로 돌리면 나뭇잎 사이로 혜화동과 명륜동이 보이고 이정표만 잘 따라간다면 성균관, 창경궁까지도 걸어갈 수 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영차! 들어 올려 아래로 떨어뜨린다는 덮개돌 너머로, 산하나를 온통 크고 작은 지붕으로 뒤덮은 커다란 마을 하나가 따스한 햇볕을 받고 있다. 찰칵, 성북동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8-29쪽
  • 城北洞 惠化門과 肅靖門사이의 서울성곽이 부채꼴 모양으로 감싼 城北洞은 조선시대에 都城수비를 담당했던 御營廳의 北屯이 영조 41년(1765) 에 설치되었으므로 洞名이 붙여졌다. 城北洞은 朝鮮初부터 漢城府에 속했는데 갑오개혁(1894)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한성부 東署崇信坊(城外) 東小門外契 城北洞이라 하였다. 그런데 한일합방 후 日帝는 1911년 4월 1일(京畿道令 제3호) 5部 8面制를 실시함에 따라 이곳을 京畿道 京城府 崇信面 城北洞으로 칭하였고, 1914년 4월 1일(京難道令 제1호) 경성부를 축소함으로써 경기도 고양군 崇仁面 城北里로 되었다. 그 후 1936년 4월 1일(總督府令 제8호) 경성부 관할구역의 확장에 따라 경성부 城北町으로 되었으며 1943년 6월 10일(府令 제163호) 區制를 처음 실시함에 따라 東大門區에 속하였다. 광복이 되자 그 이듬해 1946년 10월 1일 日帝式洞名을 고치면서 城北町은 城北洞으로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이어서 1949년 8윌 15일(大統領令 제159호) 城北區가 새로 설치됨으로 城北洞은 이에 속하였다. 이 때 城北川에 놓인 雲水橋를 중심으로 도로 남동쪽은 城北洞 1街, 도로 서쪽은 城北洞 2街로 나뉘었다. 그 뒤 성북동 2가는 성북동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都城 4小門의 하나인 惠化門을 나서서 왼쪽 일대의 계곡마을인 城北洞은 옛부터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水石이 어울린 山紫水明한 마을로 복숭아, 앵두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이 洞의 자연촌락명으로 紅挑洞, 桃花洞, 복사동이 남아있다. 조선후기 순조 때 지은 『漢京識略』에 보면 「맑은 계곡과 언덕을 끼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복숭아를 심어 생업을 삼고 있다. 매년 늦은 봄이면 놀이를 나온 사람들과 車馬가 두 줄을 지어 가득하게 山漢各사이를 메우고 깨끗한 초가집 이 많다.」 고 소개하고, 서울 사람들은 봄이면 仁王山아래 살구꽃, 서대문 밖 西池의 연꽃, 동대문밖 수양버드나무꽃, 세검정 부근의 水石 등과 함께 성북동의 복숭아꽃 구경을 찾아 나섰다고 하였다. 성북동은 북절골(北寺洞), 北渚洞, 桃花洞, 北屯, 北會洞 등 옛부터 많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 곳을 北寺洞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전에 절이 있었거나 먹을 제조하는 관아인 墨寺가 있었던 데에서 命名된 것으로 추측되고, 北倉洞이라고 칭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의 御營廳의 北倉 이 성북동 260번지 水月庵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北渚洞은 『東國輿地備攷』卷2 漢城府 名勝條에 소개되어 있으나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성북동의 자연촌락명으로는 노구멧골, 도둑굴, 雲水洞, 논골 등이 있다. 노구멧골은 옛날 이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집을 나간 남편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노구메(밥)를 떠놓고 山川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그 정성으로 결국 남편이 돌아와서 잘 살았기 때문에 붙여 졌으며, 도둑굴은 성북동의 북동쪽의 계곡이 깊고 지형이 험준하여 도둑이 은거하기가 용이하였으므로 불리었다. 그래서 조선후기에는 어영청의 北屯을 두어 군대를 주둔시켰고, 朝廷에서는 이곳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으나 워낙 산 속이라 농토가 적고 市場이 멀어서 생할곤란으로 속속 떠나가자 英祖 41년(1765) 鰲興府院君 金漢耈와 영의정 洪鳳漢이 王에게 건의하여 서울 각 市場에서 파는 布木의 漂白 즉 마전하는 권리를 이 곳 주민들에게 주고, 3년 뒤 英祖 44년(1768)에는 彰義門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궁중에 바치는 메주 쑤는 권리를 일부 이 곳 주민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도 城北洞 양쪽 골짜기의 물이 合流되는 부근의 낸가를 마전터라고 칭하였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雲水洞은 성북동 60번지 부근의 마을로 바위에 刻字가 되어 있는데 이 곳을 논골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어떤 사람이 깊은 산속인 이곳에 논다랑이를 조금 풀고 살았기 때문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60-762쪽
  • 그리고 이 洞에는 지방 민속자료 제10호의 李載濬家(성북동 243-4)와 제11호의 李太賢家의 한식 주택이 있다. 한편 종교기관으로는 조계종 星羅庵자리(성북동 284번지)에는 比丘尼 大學과 韓國 比丘尼會 총본부가 들어서 있고, 그 건너편에는 三角山 水月庵(성북동 274-2)이 1968년에 세워져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등학교(성북동 150번지), 東丘女子中商業高等學校(성북동 1가 168-275), 정신박약아 특수학교로 서울 명수학교(성북동 226-91) 와 성북국민학교(성북동 60번지)가 있다. 성북동은 1949년에 정부에서 風致地區로 지정해 주택을 지을 수 없었으나 한남동, 돈암동, 응봉동 지구와 함께 해제되어 주택지구로 변경되었다. 그 밖에도 프란체스코 수도원(성북동 75번지)이 위치한 곳에는 조선 중기의 中宗 2년(1507)에 별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단터, 즉 靈星壇이 있었다. 이 洞의 북쪽은 북한산이 있고 이 산 봉우리 중에는 마치 개가 걸터 앉은 모양이라하여 狗蹲峰이라 하고 이 봉우리 남쪽에는 산 모습이 마치 머리를 들고 사방을 바라보는 것 같다해서 擧首峰이라 칭한다. 구준봉 뒤쪽의 잘룩한 고개를 補土峴 즉 「보토고개」라고 하는데 이는 서울의 入首목이 되어 잘룩하므로 風水地理說에 따라 그 약한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매년 흙을 메우고 떼를 업혔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이 전해온다. 『東國瓚地備政』卷2에 「普賢峰의 곁가지 산발이 곧 都城의 主脈이기 때문에 摠戎廳에서 ‘補土處’를 설치하고 주관해서 補築하였다」고하였다. 전에는 성북동의 교통이 불편했지만 196~년 이후 「北岳山 길」의 개통과 최근에 삼청터널이 뚫리어 「삼청동길」(동십자각∼삼청공원∼삼청터널)과 「성북동길」(삼청터널∼성북2동∼삼선교)이 만남으로써 교통이 원활해졌다. 현재 城北洞 1街와 城北洞지역은 성북제1동사무소와 성북제2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64-765쪽
  • 〈城北第1洞〉 城北 第1洞은 城北洞 1街와 城北洞 일부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 管轄區域 명칭이다. 서울의 行政洞 설치는 日帝가 1916년 9월 28일(京城府 告示 제19호) 경성부 주민과 행정관서와의 연락업무를 담당할 總代를 두고 洞政을 실시하던 것이 효시로서 1933년 10월 3일(京城府 告示 제127호)에 町會를 설치하고 1943년에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해 町會에 有給(또는 명예직)의 書記를 두었다. 1943년 區制를 실시할 때 東大門區에 속하였고 이 해 8월 1일에 城北1, 2町會를 두었는데 광복이 되자 1946년 10월 1일 町會는 洞會로, 町總代는 洞會長으로 개칭함에 따라 城北 第1洞會와 第2洞會로 바뀌었다. 그 후 1955년 4월 18일(市條例 제66호) 「洞制」를 실시할 때 城北 第1洞은 성북동 중 雲水橋 도로 동남방의 지역, 城北 第2洞은 성북 제1동 관할구역을 제외한 전역으로 정해졌다. 이 洞의 남북으로는 「성북동길」(삼청터널∼성북2동∼삼선교)이 관통하고, 남쪽은 「東小門路」가 지나고 있으며 그 밑으로는 지하철 4호선이 통과하여 한성대입구역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北漢山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城北川이 되어 「성북동길」 밑으로 흘러 동소문동과 안암동을 거쳐 청계천에 합류되는데 현재 성북제1동 지역부터 동소문동 5가까지는 복개되어 개천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광복 당시부터 1990년까지 성북 제1동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766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65-766쪽
  • 〈城北第2洞〉 城北第2洞은 北漢山 밑의 城北洞 대부분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 명칭이다. 이 洞의 연혁은 앞의 성북 제1동과 같이 1943년 6월 10일(府令 제163호)에 區制를 실시할때 東大門區에 속하고 이어서 8월 1일에 城北2町會가 설치되었다. 同 上 그 후 광복으로 1946년 10월 1일(美軍政廳 法令 제106호) 町會는 洞會로, 町總代는 洞會長으로 개칭함에 따라 城北 第2洞會로 개칭되었다. 그 후 1955년 4월 18일(市條例 제66호)에 「洞制」를 실시할 때 城北 第2洞은 성북동 중 雲水橋 동남방 지역을 제외한 성북동 전지역을 관할구역으로 정해졌다. 성북 제2동은 제1동보다 면적이 5배나 넓고, 주민 수효도 많은데 대부분 山地로 되어 있다. 이 洞의 남쪽은 史蹟 제10호로 지정된 서울 성곽이 복원되어 있어서 종로구와 경계가 되며, 북동쪽은 「北岳山길」이 지나고 있다. 이 길은 자하문∼부암동∼돈암동 (7.7㎞) 에 이르는 북한산 능선을 따라 만든 길로써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침입 이후로 수도권 경비 강화와 산책로를 위해 이 해 9월 28일에 완공되었다. 이 길은 처음에 有料도로였으나 최근에 와서 철폐했으며 겨울철에 조금만 눈이 와도 통행이 어려운 것이 특정이다. 그리고 이 洞의 주요도로인 「성북동길」은 삼청터널을 지나 삼청동으로 통하기도 하고 「북악산길」, 「우암길」과도 연결된다. 여기서 광복 당시부터 1990년까지 성북 제2동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767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66-767쪽
  • 성락원 근처는 꿩이 많이 살아 ‘꿩의 바다’라는 이름이 붙었다. 도심에서 보는 동물이라고는 비둘기와 길고양이뿐인 요즘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마을사람들의 기억에는 산짐승들과 만남이 아직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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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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