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개발
장소 인문지리
성북동의 개발과 관련된 내용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도시형 한옥과 공공시설물을 축조하는 한편, 공원계획과 풍치지구로 선정하여 개발을 제한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성북동에 판자촌이 형성되었지만, 풍치지구가 외국인 주택단지로 책정되면서 성북동 부촌의 신호탄이 되었다. 1960-70년대에는 성북동 고급주택지가 확대되고 외교관 사택들도 들어섰으며, 성북천 복개공사와 북악스카이웨이 공사 등이 진행되면서 일대의 풍경이 다채로워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무차별적인 개발과 재개발로 주민들과의 갈등을 겪기도 하였으며, 자연환경이나 성북동에 거주했던 문화예술인의 흔적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다양한 문화유산과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 최초 ‘역사문화지구 지군단위계획’지역으로 선정되었다.
성북동
  • 성북2주택재개발구역(1)
  • 성북2주택재개발구역(2)
  • 성북2주택재개발구역(3)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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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근거자료 원문

  • 35년의 일제강점기는 1945년 8월 15일 지독하고 고통스러웠던 시대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한 민족끼리 서로 다른 이념을 두고 싸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으로 인해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고 가족이 전쟁에 끌려가고 이웃을 잃어버렸다. 해방과 함께 들어선 판자촌 성북동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의 간송미술관과 혜화문 앞에는 기마부대와 큰 전차가 들어섰다. 성북동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군인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당시 성북동에 살고 있던 많은 정치권과 재계, 문화 인사들도 납북되었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민족끼리 칼로 찌르고 총을 쏴 죽이던 한국전쟁은 분단이라는 뼈아픈 상처만을 남긴 채 끝났다. 전쟁을 피해 피난을 떠났던 성북동 사람들도 돌아왔다.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라졌지만 성북동의 인구는 계속 늘어났다. 살 곳이 없는 사람들이 판자와 슬레이트를 하나씩 들고 성북동의 골짜기 곳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무분별하게 들어선 무허가 판잣집들은 정부나 원주민에게나 골칫거리였다. 다닥다닥 붙어 있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판자촌 사람들은 잦은 화재로 거주지를 잃기 일쑤였다. 조금이라도 비가 내리면 발생하는 침수 피해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정부와 주민들 모두 뒤죽박죽 정신없는 이 판자촌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올바른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31-33쪽
  • 이전부터 성북동 재개발의 필요성은 계속해서 대두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재개발이 시작된 것은 60년대 이후부터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이 등장하게 되는데,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을 비롯한 정부의 핵심인사들이 청와대와 가까운 성북동에 둥지를 틀게 된다. 정치권 인사들과 더불어 재계 인사들도 하나 둘 성북동으로 들어왔다. 의친왕의 별장이었던 성락원 주변은 예부터 꿩이 많아서 ‘꿩의 바다’로 불리었는데, 이 지역으로 부자들의 저택과 외국 대사관저가 들어서면서 꿩은 자취를 감췄다. 대신 대저택이 즐비한 지금의 성북동 주택가의 면모를 빠르게 갖추게 된다. 해방 이후 성북구는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고 부유층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거세게 몰아친 재개발의 물살을 피할 수 없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33-34쪽
  •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그리고 516 군사정변을 겪으면서 성북동은 무차별적인 개발에 몸살을 앓았으며 이전까지 있었던 고귀한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퇴색했다. 성북동에 스며들어서 북둔의 주민으로 살았던 문인들, 예술인들과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이 공생하던 시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과거 자연풍경과 어우러져서 유유자적 생활하던 성북동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미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성북동은 여전히 귀중한 역사와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있는 동네다. 아주 잠깐 단절되었던 우리 동네 성북동과 성북동 사람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야할 때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36쪽
  • 2. 일제강점기 도시화되는 성북동 ‘경성도시계획’과 성북동 조선총독부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이후 도시계획을 세우고 진행했다. 총독부가 진행한 도시계획의 시초는 시구개정사업市區改正事業이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기존 도로의 폭을 넓히고 도로 양쪽에 하수도를 만들고 주요도로는 포장을 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이 사업이 실시된 것은 경성, 부산, 대구, 평양 등 몇 개 주요 도시에 불과했다. 경성의경우에도 대부분 4대문 안으로 한정되었다. 성북동이 있던 혜화문 밖지역은 이 사업에서 제외되었다. 구체적인 경성부의 도시계획안은 1926년 이후 총 3차례에 걸쳐 작성되었다. 이 계획안은 실현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성북 지역이 포함된 계획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926년 상반기에 제1차 계획안이 작성되었다. 이 계획안은 성북 지역이 최초로 포함된 도시계획안 이었다. 이 계획안은 구체적인 내용과 도면이 남아 있지 않다. 제2차 도시계획안을 담은 『경성도시계획조사서京城都市計劃調査書』라는 책자가 1928년 9월에 발간되었다. 이 계획안에는 경성의 동남부였던 고양군 한지면 전체와 숭인면 22개 동리 중 11개 동리가 도시계획 구역에 들어가 있었다. 성북리는 도시계획안에 포함된 지역이었다. 제3차 도시계획안을 담은 『경성도시계획서京城都市計劃書』가 1930년에 발간되었다. 이 계획서에서 성북리가 포함된 숭인면에 대해서 “동부 한지면, 숭인면 일대는 청계천이 관류하여 평탄한 토지를 가졌으며 경원선이 남북으로 종관하여 금후 자연적으로 시가지로 발전할 지대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이 계획안에는 모두 192개의 가로계획선街路計劃線이 제시되어 있다. 이중 오늘날 성북구와 관련된 노선은 총 13개였으며, 성북동과 관련된 노선은 총 2개가 있었다. 성북동이 포함된 총3번에 걸친 도시계획안은 일본 및 조선 내에서의 냉담한 반응과 재원조달의 곤란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는 1936년 3월 26일 고시 제190호로 경성시가지계획구역京城市街地計劃區域을 발표했다. 이 계획을 발표하기 전에 경성부는 1936년 2월 14일 발표된 조선총독부령 제18호에 의해서 행정구역이 확장된 상황이었다. 성북리의 경우 경성부에 새롭게 포함되어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경성부시가지계획 구역에 포함되었다. 이 계획에는 경성부 도심에서부터 전차, 자동차 등을 사용할 경우 해당지역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성북리에서 도심까지 가장 가까운 거리는 3,050m, 가장 먼 거리는 4,400m로, 평균 소요되는 시간은 40분이었다. 한편 성북지역에 2개의 도로가 만들어질 것이 계획되었다. 도로번호 13번은 혜화정 광장에서부터 성북정까지 연결되는 도로였다. 도로번호 14번은 돈암정에서부터 성북정까지 연결되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75-77쪽
  • 문인들의 회고에 등장하는 성북동의 풍경에서 집들이 점차 현대적인 꼴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60년대 중반경은 넘어야 했다. 윤이상이 조지훈과 마주보고 즐겼던 성북천이 복개된 것 역시 1967년 이후이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는 바로 이 본격적인 회고의 이전 시대를 읊조리는 이야기이다. 김광섭은 1961년 건축가 김중업에게 부탁한 설계대로 집을 짓고 성북동에서 5년을 거쳐했다. 그리고 이때의 기억을 후일 시집에 실었던 것이 바로 ‘성북동 비둘기’였던 셈이다. 성북동에 대한 문인들의 정서는 이렇듯 김광섭에 의해 절묘하게 드러났지만, 그것은 또한 당대 문인들이 성북동을 바라보던 시선이기도 했다. 송지영 선생이 소개한 정한모의 글줄에는 당시의 성북동 상이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성북동에 거주했던 정한모는 지금은 고급 주택지대라고 간주되는 곳이 당시에는 “성북초등학교에서 개울을 따라 한참을 걸어올라와야만 하는 약수터나 빨래터를 찾는 사람들만이 올라오는 곳이었다.”라고 회고한다. 즉 1960년대 초중반까지 여전히 성북동은 비록 정재계의 별장터이고 꿩의 바다로 불리기는 했지만 아직은 오늘날의 모습보다는 과거의 모습이 더 많이 남아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과거 유명했던 배나무, 복숭아 등의 흔적은 점차 사라져갔지만 몇몇 성북동 산위의 집들, 그리고 보통사람들로 구성된 지역 문화는 60년대 중반까지 엇비슷하게 이어져갔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서울의 도시계획 상 성북동의 위치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 서울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1961~80년 사이에 서울시는 도시계획 상 구획정리만 27개 지구에, 60~70년대에 집중된 택지조성사업 등을 대규모로 진행했다. 그러나 종로, 중구, 성북, 서대문, 용산 등 일제 하에서 어느 정도 계획되어 있던 지역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특히 성북동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사정이 변했다. 정부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고, 건설부가 주택건설계획을 발표하는 등 주택보급을 서둘렀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기존 무허가건물들, 즉 흔히 판자촌이라고 불리는 ‘불량건물’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4년 간의 불도저식 개발을 통해 유명해진 서울시장 김현옥의 추진력 아래 서울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6
  • 1920년대까지만 해도 초가와 양옥이 드문드문 있는 한가한 동네였던 성북동은 1930년대를 지나며 한옥, 양옥 할 것 없이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36년 일본의 경성시 구획정리 과정에서 성북동1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개념의 택지조성사업이 실시되었다. 4대문 안으로만 국한되었던 시내구역이 혜화문 밖으로 넓혀졌다. 혜화문을 통해 오가는 유동인구가 늘어났고, 주변으로 집장사들의 성냥갑 같은 기와집이 빽빽하게 지어졌다. 화물을 나르는 트럭의 이동이 잦았고, 이곳저곳은 공사장으로 바뀌었다.
  • 나는 주물공장의 화부로서 현지 징용이 되었다. 내 평생은 매연에 가득 찬 이 주물 공장에 발목이 묶여진 셈이었다. 전쟁이 계속되자 물자 부족으로 생활은 궁핍 상태로 빠져 들었다. 물자 부족인데도 성북구는 발전되고 개발되었다. 성냥곽 같은 집장사 기와집이 수 없이 늘어났다. 그 이유인즉 시골 부자들이 농토를 팔아 갖고 도시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정한숙, 「성북구 성북동」
  •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내려온 피난민도 성북동 산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다. 거처가 없는 사람들은 판자 몇 개로 집 모양새만 겨우 갖추고 살았다. 그 모양이 상자 같아서 ‘상자집’, 상자를 일컫는 일본어 하꼬[箱;はこ]를 붙여‘하꼬방’이라 불렀다. 196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어 산비탈이나 언덕에 우후죽순 판잣집을 세우고 품을 팔며 살았다. 판자촌은 주거 환경이 열악해 화재나 침수, 도난 같은 사고가 잦았고, 정부는 1954년 무허가건물 철거·정리 방침을 발표했다. 하지만 판잣집도 겨우 짓고 살던 사람들은 다른 곳에 다시 판잣집을 세울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성곽 바로 아래까지 낮은 지붕이 빈틈없이 이어졌다. 마을을 이룬 사람들은 집주변에 텃밭을 가꾸고, 집을 정비했다. 좁은 골목과 회색 담벼락이 모인 마을에 시장이 서고, 작은 상점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상하수도와 생활기반 시설이 갖춰지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물지게와 똥장군을 진 품팔이꾼들이 물을 팔러 다니고, 분뇨를 치웠다. 성곽 아래 구덩이를 파고 묻은 분뇨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장마가 지는 날이면 하숫물이 개천까지 흘러내렸다. 이 때문에 성곽 아랫동네 북정골은 ‘똥골’이라고도 불렸다. 1960년대 북정골 건너편에는 호화주택들이 들어서며 길을 사이에 두고 부촌과 빈촌의 격차가 생겼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軍과 정부 관련 인사들이 청와대와 가까운 성북동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경제성장기인 1970년대에도 계속해서 재벌의 대저택과 대사관저가 모여 성락원 일대(꿩의 바다)는 부촌으로 탈바꿈하였다.
  • 성북동은 1941년 전체 면적의 10%에 해당하는 구역이 풍치지구로 지정되었다. 풍치지구는 도시계획법상 자연공원을 보전하는 목적으로 해당 구역의 개발을 제한하는 것이다. 쌍다리, 북정골은 성곽과 산자락에 잇닿아 있고, 풍치지구에 속해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었다. 1955년 운수교를 기준으로 성북1동과 2동으로 나뉘면서 운수교에서 삼선교까지 먼저 개발되기 시작하였고, 풍치지구가 속한 2동은 1970년대까지 개발이 제한되었다. 2동 주민들은 규제로 인한 피해에 항의하였고, 거주지가 늘어나며 점차 풍치지구 면적이 줄어들었다.
  • [23] 1960~70년대 성북동의 개발 1. 1960년대 : 거주 공간의 변모 ○ ‘판자촌’의 철거와 재배치 (1967~1971년) - 서울의 도심부의 형대적 재개발을 위해 정릉 등 기존의 도심 반경에서 5~10km내외의 무허가 정착지들이 철거 대상 - 정릉과 등을 맞대고 있었고, 또 그 골짜기에 많은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었던 성북동도 포함. - 1968년 12월 현재 성북동에는 여전히 2백동의 불량건물 존재 ○ 풍치지구가 대규모 외국인 주택단지로 책정 - 1967년 6월 성북동 산 25번지 일대의 숲속 풍치지구 약 10만평이 대규모 외국인 주택단지로 책정 → 성북동 부촌 형성의 전조 - 1968년 북악스카이웨이 건설 - 김광섭, 시집 『성북동 비둘기』 출간 (1969)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1쪽
  • 2. 일제강점기 ○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성북동의 변화는 서울시 연혁도(1977)의 내용을 중심으로 파악 ○ 1936년 토지구획정리사업 ○ 성북동은 현재 한성대입구역에서 가까운 일부지역만 토지구획정리사업에 해당 ○ 1940년 경성시가지계획공원 - 1940년 경성시가지계획공원도를 보면, 성북동은 대부분 풍치지구에 해당되어 있어, 시가지계획공원에는 크게 성곽을 중심으로한 일부 구역만 구획되어 있음. ○ 1941년 풍치지구 계획 - 1941년의 풍치지구계획도에는 성북동 대부분이 풍치지구에 포함되어 있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22-223쪽
  • [ 36 ] 성북동의 형성과 변화 1. 조선시대(18세기) ○ 성북동에 대한 지명, 혜화문, 한양도성, 활인서 등 외에 성북동은 도성 내부에 비해 크게 부각되어 있지 않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22쪽
  • 3. 해방 이후 국가재건기 ○ 1965년 토지구획정리사업현황 - 1965년 토지구획정리사업현황을 보면 일제강점기부터 계획되었던 돈암지구가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 ○ 1968년 서울도시계획공원 - 삼선교와 가까운 지역은 주거지역이 형성되고 있으며, 풍치지구로 계획되어 있는 곳의 대부분은 서울도시계획공원 구역으로 남아있음. ○ 1976년 불량주택재개발구역현황 - 1976년 불량주택재개발구역현황을 보면 성북동에서는 현 북정마을 인근 성곽부근에 불량주택재개발구역이 표시되어 있음. ○ 1976년 서울도시계획풍치지구 - 1976년 개발시기에도 성북동은 삼선교와 가까운 길 주변으로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 도시계획풍치지구에 해당되고 있음. ○ 1976년 주택지조성사업(그림 참조) - 1976년의 주택지조성사업 계획도를 보면, 성북동의 위쪽도 주택지 조성 대상지로 포함되어 있음. - 범례로 보면 지도의 위쪽 넓은 부분이 ‘6 성북단지(대교주택단지)’로 표시되어 있고, 현 선유골 주변으로 추정되는 지역이 ‘5 성북단지(조선일보단지)’로 표시되어 있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23-225쪽
  • 작가의 작품이 발표될 무렵의 성북동은 일제의 도시 확장 계획에 의해 주거지로 개발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태준은 수필에서 그와 관련된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요즘 성북동과 혜화동엔 짓느니 집이다. 작년 가을만 해도 보성고보에서부터 버스 종점까지 혜화보통학교 외에는 별로 집이 없었다. 김장 배추밭이 시퍼런 것을 보고 다녔는데 올 가을엔 양관, 조선집들이 제멋대로 섞이어 거의 공지 없는 거리를 이루었다. 성북동도 지형이 고르기만한 데는 공터라고는 조금도 없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만 집을 나서도 안볼래야 안 볼 수 없고 새로 짓는 집들이 자꾸 눈에 띄는 것이다. (이태준「집이야기」) 아무커나 우리 성북동의 봄은 순동양적, 순조선적 봄이어서 좋다. 요즘 꼴같잖은 양관들을 짓고 어을리지도 않는 사꾸라를 심어놓는, 그래서 성북동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딱한 친구들이 생기는 것은 약간치 않은 비애이긴 하다만. (이태준 「고목」 중에서) 도시의 확장은 한양도성으로 인해 만들어지던 경京과 향鄕을 해체시켰다. 다시 말하면성 안과 성 밖의 구별이 흐려졌다는 것이다. 그 경계가 흐려지면서 발생하는 문제와, 안타까움을 작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97쪽
  •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성북동 비둘기]에서 시인 김광섭이 아쉬워했던 성북동의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 인간은 편리를 위해 환경을 개조했다. 맑은 물이 흐르고 아낙들이 빨래하던 계곡은 인구와 주택들이 급증하면서 오염되기 시작했고 더 이상 주민들은 냄새나는 개천을 원하지 않았다. 복개는 결국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청계천이 그러했듯 도로가 필요한 시대에는 도로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했고 지금에 와서는 교통체증과 도시오염의 심각성이 커지면서 환경이 더 중요해졌다. 2010년 성북천은 다시 흐른다. 선잠단 앞은 아니지만 한성대 입구 사거리를 기점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환경은 한번 파괴되면 복원하는데 몇 배의 비용이 든다. 이제는 좀 더 멀리 내다보는 도시개발 정책과 시민의식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124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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