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문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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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역사,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로서의 성북동에 대한 설명이다. 일찍부터 성북동은 경치가 아름답고 청정한 지역으로 지식인들을 비롯하여 문인,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많은 문인들의 거주지로, ‘문인촌’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여류 문사 김일엽, 평론가 김기진, 노논객(老論客) 이종린, 소설가 이태준 등이 성북동에 살았고, 만해 한용운도 심우장을 짓고 성북동에서 생활하였다. 음악가 채동선, 불전교수 김두헌 등도 성북동에 거주하였다. 문인, 예술가들의 커뮤니티의 공간이었던 성북동은 다수의 문학작품에 등장하여, 아름다운 풍경뿐만 아니라 성북동 사람들의 이야기가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성북동
  • 보화각 전경(1938)
  • 보화각 개관기념일(1938)
  • 간송미술관
  • 성북구립미술관
  • 성북동과 문학 표석
  • 우리옛돌박물관 입구
  • 우리옛돌박물관 전경
  • 성북동 스토리텔링 가이드북: 성북동 지도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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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근거자료 원문

  •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성북동 일제시기 발간된 유명한 잡지였던 『삼천리』에는 성북동에 관한 몇 가지 기사가 실려 있다. 1933년 10월에 발간된 잡지에 따르면서울 부근은 모두 경치가 아름다운데 그 중에서도 성북리는 산수의경치, 공기의 청정으로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경성부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고 있는데, 특히 성북리는 “한적한 근교이며 지형과 경치가 아름다워 예술을 벗 삼는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성북리는 하나의 문인촌文人村인것 같다고 했다. 1933년 현재 성북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문인가는 시인이자 작사가인 김억金億, 여류문인 김일엽金一葉, 평론가이자 소설가였던 김기진金基鎭, 홍효민洪曉民, 단편소설로 유명한소설가 이태준李泰俊,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종린李鍾麟 등이 있었다.(「城北洞의 文人村」, 『삼천리』 5권 10호, 1933. 10. 1.)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86쪽
  • 5. 이태준의 눈으로 본 1930년대 성북동 단편소설을 잘 써 ‘한국의 모파상’이라고 불리기도 한 상허 이태준은 1933년 성북동에 집을 짓고 자리를 잡는다. 일제강점기 말, 잠시세상을 피해 고향인 철원에 내려가기도 했지만, 이태준은 월북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 성북동에서 지냈다. 성북동 집은 이태준에게 단순한 안식처만이 아니라 작품을 집필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의 집 이름 ‘수연산방壽硯山房’은 벼루가 다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집이 단순한 안식처가 아니었듯 성북동도 그에게 그냥 사는 마을이 아니었다. 성북동에 사는 이웃들의 이야기는 그의 소설의 단골 주제가 되곤 했다. 「달밤」, 「손거부」, 「토끼 이야기」, 「장마」 등은 성북동 사람들, 그리고 성북동에서 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소설을 따라가면 그가 살았던 1930년대 성북동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그가 성북동에 자리 잡은 1933년 무렵의 성북동은 비교적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우선 당시 경성 바로 밖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혜화문과도 가까워 교통이 편리했다. 그 때문인지 문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문인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에도 이미 김일엽, 김기진, 이종린 등이 성북동에 살았고, 만해 한용운도 이태준과 같은 해에 심우장을 짓고 성북동 생활을 시작했다. 또한 주민들의 진정으로 술집이나 요정의 수가 제한되었고, 상수도 설치, 버스시간 연장 등의 주민 진정이 일부 받아 들여져 주거 환경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이 있던 지역은 이런 주택단지는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1936년 초반 ‘대경성계획’을, 후반에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발표하는데 성북동이 포함된 돈암지구는 그중 주택지구로서 1차 사업대상지로 선정되었다. 당시의 계획도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그것을 보면 성북동은 현재 마전터가 있는 간송미술관 앞까지만 개발이 계획되어 있었다. 즉 수연산방 지역은 개발에서 제외된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태준은 그의 단편소설 「달밤」에서 성북동에 온 소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수연산방 앞에는 성북천이 물소리를 내며 흘렀고 ‘솔바람이 쏴―하고’ 불었다. 수연산방에서 성북천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마전터가 있었다. 조선이 국권을 빼앗기며 마전을 하여 납품할 상점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마전은 1910년대까지도 성북동의 몇 안 되는 생업 가운데 하나였다. 그 옆으로는 1908년 만들어진 삼산학교가 서 있었고, 그 아래로는 일반 주택들이 이어져 있었다. 이 주택의 사람들은 서로 힘을 모아 총독부에 상수도 개설 등의 청원운동을 하는 등 상당한 주민 자치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36년 개발이 시작되기 전 성북동은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을지언정 조용하면서도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33년부터 성북동에 자리 잡은 이태준의 글에는 주민자치를 하고, 청원 운동을 하던 성북동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태준은 과연 어떤 사람들을 보고 그렸을까?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23-126쪽
  • 이태준 소설에 비친 성북동 사람들의 직업 지금도 그렇지만 성북동은 1930년대에도, 생산의 장소는 아니었다. 베를 표백하던 마전은 1930년대에는 산업으로서의 가치를 많이 잃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 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태준과 같은 문인들(혹은 엘리트들)은 사대문 안에 좋은 직장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서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달밤」의 황수건은 조금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지만 나름 열심히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성북동에 있던 삼산학교에서 급사로 일하기도 했고, 거기서 쫓겨난 이후에는 신문사의 보조배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형님 내외, 자신 내외, 이렇게 7식구가 같이 살아 쉬이 놀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나중에 보조배달원마저 잘리게 되자 그는 다시 삼산학교 급사로 들어갈 요량으로 운동도 하고 학교 사무실을 찾아가 조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자기보다 힘 좋고 일 잘하는 급사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손거부」의 손서방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부인과 아들둘을 둔 가장이다. 딸도 하나 있었지만 어려서 죽었다. 아들들이 학교에 들어가자 그는 아들의 책값과 월사금을 대느라 ‘일정한 직업은 없지만’ ‘진일 마른일 다 쫓아 댕’기다 하루는 채석장에서 일하다 손이 쪄 엄지손가락 하나를 못 쓰게 된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도 아들을 하나 더 낳는다. 이태준의 눈에 비친 성북동의 토막민들은 항상 취업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1930년대 취업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비단 황수건과 손서방 뿐만이 아니었다. 1910년에 약 1천 3백만 명이었던 인구는 1930년이되면서 이미 2천만 명을 돌파했고, 1930년에는 2천 3백만 명에 육박한다. 25년 만에 약 77%에 가까운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에 대한 제대로 된 대책이 마련된 것도 아니었다. 1930년 조사를 보면 경성의 무업자는 무려 65.32%에 달했다. 물론 당시의 무업자에는 학생, 지주, 종속자 등 직업 없이 다른 사람들의 수입에 의존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들의 비율을 곧 실업률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체 인구의 65% 이상이 직업이 없다는 것은 상당히 높은 수치인 것만은 분명하다. 유업자, 즉 직업이 있는 사람들은 경성부 인구의 34.58%였는데 이것을 일본인과 조선인,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를 해 놓으면 그 안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특히 여성 가운데 직업이 있는 사람들은 전체의 13.94%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여성 일자리가 가사도우미, 여급, 간호원, 전화 교환원, 점원 등으로 한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회 분위기도 이에 한 몫을 했다. 이케다 키요시는 ‘말을 바꾸어 직업여성에게 다시 고한다. 장래의 모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빨리 직장을 버리고 여성 본래의 사명인 가정으로 돌아가 심창深窓의 현모양처 주의를 신념으로 간직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당시 사회가 여성의 사회생활을 바라보는 시선의 일면을 보여준다. 직업도 많이 없고, 시선도 곱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의 사회진출―특히 조선인 여성―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인 여성에 비하면 조선인 남성들의 상황은 나은 편이었지만, 결코 좋은 것은 아니었다. 취업률로만 보면 남성 유업자의 비율은 53.52%로 여성에 비하면 3배 이상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선인 남성의 경우 거의 20% 가까운 사람들이 단순한 막노동에 종사하고있었으며, 지위가 높은 공무 자유업 종사자는 9%에 불과했다. 하층으로 가면 이런 추세는 더욱 심화되었다. 1940년의 자료이긴 하지만 토막민으로 불리는 당시 사회 최하층 사람들을 조사한 통계를 보면 남성은 736명이 유업자임에 반해, 여성은 83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남성 유업자에 40%가 넘는 301명은 날품팔이 노동자였다. 소설 속 손거부는 여기에 속했다. 나머지 직업도 수레꾼, 마차꾼, 청소 인부, 운송 인부, 운반 인부, 화물운반 짐꾼, 구두공, 넝마주이 등 단순 노동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고정적인 수입을 기대 할 수 없는 직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래서는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다. 여성의 경우 작부酌婦와 여급 등이 직업으로 확인되었다. 한 세대 당 유업자 수는 1명인 경우가 63%, 2명인 경우가 26%로 거의 90%에 육박했다. 조사에서는 여성 취업률이 낮은 이유를 ‘그들의 기술에 상응하는 직업이 가까이에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한 세대 당 유업자 수가 많지 않은 것도, 전체적인 유업자 비율이 낮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이들의 임금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 1940년 기준 토막민 남성 유업자의 하루 평균 임금은 1.30원이었다. 재봉사, 벽돌공, 미장이 등 기술이 필요한 직업의 경우 토막민들이 토막민 이외의 조선인 노동자보다 임금이 현저히 낮았다. 막노동과 인부 등 힘쓰는 직종의 직업을 갖은 사람들은 토막민 이외의 사람들보다 수입이 높은 편이었지만 그나마도 전체 평균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황수건과 손서방은 직업으로 볼 때, 위에서 언급한 토막민들의 사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은 몸을 쓰는 막노동 이외에 다른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결국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이도 할 수 있는 막노동(채석장 일)이나 신문배달 혹은 학교 급사뿐이었다. 그리고 식구는 많은데 임금은 낮은 수준이었으므로 가난은 그들의 운명처럼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태준의 시선은 이렇듯 가난한 사람들을 향했다. 마치 이태준의 시선으로 본 성북동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가득한 동네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성북동은 ‘문인촌’이라 불렸을 만큼 문인들이 많이 살았고, 서슬 퍼런 총독부에 청원운동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산과 실력을 가진 소위 ‘중산층’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또한 부자들의 별장과 그들이 노는 요정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태준의 시선은 왜 가난한 자들을 향했을까? 지금으로선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혹 이것이 해방 이후 이태준의 행적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1930년 이태준의 눈으로 본 성북동은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였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33-137쪽
  • 성북동의 문인촌 서울 부근은 모두 산자수려하여 옛날 이곳을 수도로 잡은 무학대사의 선견지명에 누구나 경탄하거니와 그 중에도 동소문 밖 성북리는 천석(泉石)의 미관, 공기의 청정으로 유명하야 근래에 성 안 사람들이 이주함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한적한 근교인데다가 오리 주둥이 같이 지형이 아름다워 예술을 벗 삼는 문인들이 많이 나가 살아서 일종(一種) 문인촌(文人村)인 듯한 광경을 이루고 잇다. 오늘까지 벌써 그곳 나가서 집 짓고 영주(永住)하는 이에 시인에 김안서(金岸曙), 여류문사에 김일엽(金一葉), 평론가에 김기진(金基鎭), 소설가에 이태준(李泰俊), 평론가에 홍효민(洪曉民), 노논객(老論客) 이종린(李鍾麟) 등의 제씨가 잇다. 『삼천리』 5권 10호, 1933.10.01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30
  • 조선후기 정조는 화원들에게 한양의 지리와 풍속을 그리게 하여 『성시전도城市全圖』를 간행하고, 문인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 실학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가련할사 북둔의 풍속에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음을 수치로 아는구나最憐城北屯邊俗不種桃花以爲恥’라고 읊었다. 뛰어난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알린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성시전도를 보고 백운시百韻詩를 지었다. 정조로부터 ‘아雅(아름답다)’라는 호평을 받은 이 시에서 그는 북둔의 복사꽃이 천하에서 가장 붉다 감탄하였다.
  • 1. 1930년대 성북동 문인촌 형성의 배경 ○ 동소문 밖 성북리는 산자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하여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성안 사람들 가운데 이곳으로 이주하는 인구 증가(창의문 밖 세검정 부근도 문인촌으로 유명) ○ 일제강점기 중반 서울의 도시화가 상당히 진전되고 본정통(현 명동, 충무로)을 중심으로 남대문, 서대문 안팎에 거주하는 일본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비교적 한적하고 일본인 거주민이 거의 없는 동소문 밖이 새로운 주거지로 부상 ○ 1920년대 중반부터 인접한 명륜동, 혜화동, 동숭동에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이 다수 설립되면서 거대한 조선인 학교촌이 형성되고, 성북동은 그 배후지로 기능하게 됨→ 조선인 문인, 화가 등 문화예술인들의 이주 증가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4쪽
  • ○ 「성북동의 문인촌」·「세검정의 문인촌」, 『삼천리』제5권 제10호(1933. 10. 1) 城北洞의 文人村 서울 부근은 모다 山紫水麗하여 녯날 이곳을 수도로 잡은 無學大師의 선견지명에 누구나 경탄하거니와 그 중에도 東小門 밧 城北里는 泉石의 미관, 공기의 청정으로 유명하야 근래에 城안 사람들이 이주함이 만타. 그런데 이러케 한적한 근교인데다가 오리 둥주리가치 지형이 아름다워 예술을 벗삼는 문인들이 만히 나가 사라서 一種 文人村인 듯한 광경을 이루고 잇다. 오늘까지 벌서 그곳 나가서 집 짓고 永住하는 이에 시인에 金岸曙 女流文士에 金一葉 평론가에 金基鎭 소설가에 李泰俊 평론가에 洪曉民 老論客 李鍾麟 등의 諸氏가 잇다. 洗劍亭의 文人村 東에 城北洞이 잇다면 西에 또한 洗劍亭이 잇노라 하리만치 장구의 량쪽 모양으로 東西에 벌너서 文人村을 다투는 곳이 洗劍亭이다. 紫霞門 밧 洗劍亭이 山水 조왓든 것은 역사에 昭然한 사실이다. 이곳에 永住하려고 터전을 잡은 이에 소설가 玄鎭健氏가 잇고 최근에 또 평론가 金璟載氏가 이주하엿스며 政客 徐廷禧翁도 나가서 산다. 아마 자차로도 文人論客이 洗劍亭 부근으로 만히 나가 살니라 함이 필연의 勢일 것 갓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6쪽
  • ○ 「문단왕래」, 『개벽』 신간 제3호 (1935. 1. 1) 한동안 城北洞이 文士村이라고 하드니 近間에는 彰義門外가 文士村이 되어간다. 城北洞에는 金億, 李泰俊, 盧子泳, 金基鎭氏等이고 彰義門外에는 李光洙, 玄鎭健, 嚴興燮, 宋影氏等이다. 말하자면, 東部의 文士村, 西部의 文士村 옛날같으면 『편쌈』이라도 한번해볼만한 일이지만 人物이 文士들이라 武氣는 大禁物이나 文筆競爭은 한번쯤 해볼만한일이다 西部文士村에는 詩人이 없는 것이 遺憾이고 東部文士村에는 詩人이 꼭한사람만이 잇는 것이 孤獨하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6쪽
  • [ 19 ] 근대 신문화운동의 거점, 성북동 1. 성북동의 입지조건 ○ 민족운동 공간의 이동 -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 신간회 해소, 좌익운동 탄압 등의 북촌 중심의 합법적 민족운동 공간의 상실로 북촌 중심의 민족운동의 쇠퇴 - 민족운동의 중심 세력과 문화 예술인들의 사대문 밖, 특히 성북동으로 이동 ○ 조선인 거주 개발 공간 - 성북동 일대는 일본인이 주도한 식민지사회에서 한국인이 집단적으로 주거하면서 한국적인 가치를 구현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서울의 주거공간으로 부상 ※ 용산, 신당동, 충정로, 아현동, 마포 등지에는 일본인 중심의 신시가지 건설 ○ 교육 인프라 풍부 : 주변에 조선인 고등교육기관 밀집 - 주변에 경성제대(동숭동), 혜화전문(혜화동), 보성전문(안암동), 경성고등상업학교(종암동), 경성제대예과(청량리) 등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대학 수준 교육기관 밀집 - 고등교육기관 중앙고보(계동), 보성고보(혜화동), 동성상업학교(혜화동) 설립·이전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7쪽
  • 3. ‘출판미술’(단행본 장정)을 통한 문학과 예술의 만남 ○ 단행본 장정 - 성북동 거주 화가들이 성북동 동료 문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단행본의 장정에 참여 - 단행본 장정에 한국전통 이미지와 동양화법을 적용해 한국적 출판디자인 양식을 개척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9쪽
  • [ 24 ] 1980~90년대 성북동의 재발견 1. 1980년대 ○ 심우장과 간송미술관의 재발견 - 만해 한용운 심우장 서울시기념물 제7호로 지정(1984) - 태고종 중앙불교회관 낙성(1985) - 간송미술관, 추사 김정희 탄생 2백돌 기념 기획전 개최(1986)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0쪽
  • 2. 1990년대 ○ 성북동 전통문화의 재발견 - 성북구, 선잠제향 재현 행사 개최(1993) ㆍ성북구, 선잠제보존위원회, 대한잠사회 주관 - 성북문화원 개원(1996) ㆍ성북동 대교단지에 사는 대기업 총수들을 중심으로 지역발전을 위한 문화원 설립 을 추진 ㆍ성북구의 행정지원 아래 설립되는 「성북문화원(가칭)」의 발기인은 이동찬(李東燦) 코오롱그룹 회장, 조석래(趙錫來) 효성그룹 회장 등 모두 12명 ㆍ초대원장 : 구두회(LG창업고문) - 성북로 ‘문화의 거리’ 조성 사업(1998) ㆍ성북로를 ‘문화의 거리’로 만드는 사업 ㆍ성북로 주변의 문화공간들을 연결한 탐방 코스 운영과 성북동 주민센터 맞은편 벽화거리 조성 ㆍ1999년 6월 인근 한성대학교 교수와 학생들이 그린 벽화는 가로 55미터, 세로 2.2미터의 크기로 성북동의 역사와 인물들을 담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0쪽
  • ○ 1980~9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 성북동 배경의 연극 ‘혈맥’ 공연 연극계 복고 바람이 토속적인 사실주의극의 당당한 부활로도 이어지고 있다. 국립극단의 '한국 연극의 재발견' 시리즈 첫번째 작품인 '혈맥' 이 그것. 김영수 작, 임영웅 연출로 12~21일 평일 오후7시30분, 토.일요일 오후4시 국립극장 소극장 무대에 오른다. 작가 김영수 (1911~1979)는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한국신극사를 개척한 1세대 연극인 중 한 사람이다. 이 작품은 해방직후 서울 성북동의 달동네를 배경으로 기층민과 자본가의 갈등을 그린 그의 대표작이다. 희곡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 이 작품이 국립극단에 의해 연극으로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실로 50년만의 일. 작품발표 이듬해인 48년 제1회 전국연극대회 (극단 신청년)에서 작품상, 연출상, 남녀 주연상을 휩쓴 명작이지만 그동안 공연기회가 없었다. 당시 김영수는 신청년의 전속작가였고, 연출가는 한때 동양극장의 간판이었던 박진이었다. 주인공 털보 역에 국립극단장 정상철을 비롯, 백성희, 김재건, 최상설, 전국환 등이 출연한다. 무대 박동우, 의상 최보경. 02-274-1151 (1998.06.08.)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8쪽
  • [ 25 ] ‘성북동 문학’의 범주 확장 1. 기존 성북동 관련 문학 연구의 한계와 새로운 연구의 방향 ○ 기존 연구의 한계 - (주민등록상) 주소지/거주지 중심으로 인물 파악, 조명 - 폭넓은 문화허브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성북동을 무대로 하여 활동했던 작가들의 행정을 주소지만으로 재구하는 것은 한계 - 소설가 안수길, 이호철은 성북동의 암자에서 집필하였는데, 이 경우 주소지 기록만 가지고 보면 이 사실은 누락 ● 기존 주목 받은 성북동의 문학인 - 한용운, 이태준, 김광섭, 조지훈 ● 새롭게 조명 받는 성북동의 문학인 - 염상섭, 박태원, 박태원, 김내성, 김광균, 김향안, 김수영, 전광용, 김종삼, 김구용, 한운사, 정한숙, 정한모, 이어령 참고자료 : 『성북, 100인을 만나다』 (2015) ○ 새로운 연구의 방향 - 작품에서 성북동을 주요 소재나 배경으로 삼았던 작가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조사는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므로 - 이들 작가들을 ‘성북동 문학인’ 명단에 적극 편입시킬 필요 - 성북동이 표제뿐 아니라 내용에서 등장하는 문학 작품들을 조사하고, 문인들의 회고나 당대의 ‘문단가십’등 소식란을 살피는 작업 필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2쪽
  • 2. 문학 작품 속 ‘성북동’의 이미지 ○ 기존 성북동의 이미지 - ‘풍류를 아는 교양인들의 주거지’로서의 이미지 ㆍ성북동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문학작품에 지속적으로 반영되어 흔히 경제적 여유를 갖춘 교육자, 작가, 사회운동가들이 성북동 거주자로 설정 ㆍ성북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을 ‘성북동 문학’으로 적극 재조명해야 함. -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의 이미지 ㆍ이 시가 꾸준히 성북구 관련 대표 문학 작품으로 호명되는 것은 반성할 여지가 있음 ㆍ성북동이 갖고 있는 문화공간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표제가 아닌 실제 내용의 독해를 통해 성북동이 갖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재구해야 함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2쪽
  • ○ 문인들에게 비친 성북동의 이미지 - 일제강점기 ㆍ사대문 밖이면서도 접근성이 뛰어난 휴양지 ㆍ당일치기로 나설 수 있는 거리로서, 가깝지만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휴양지 ㆍ암자 등에서 칩거하여 글을 쓰려는 문인들이 자주 찾는 장소 - 8.15해방 이후~1960년대 초반 ㆍ교양과 경제적 여유를 겸비한 주민들이 대거 이주하여 고급주택가의 대명사로 각인되는 시기 ㆍ단순히 호화주택이 늘어선 것이 아니라, 교양을 갖춘 이들이 입주해 있다는 이미지도 함께 보급 ㆍ성공한 작가가 되어 성북동에 이사한 사연이 인구에 회자된 바 있는 김내성 스스로가 ‘성북동인’의 한 전형으로서 받아들여진 면이 있음 ㆍ김내성 등 유명 작가에 의해 가장 자주 소설의 배경으로 소환된 때가 이 시기로 고급스런 주택 뿐 아니라 명승고적에 못지않은 자연경관도 유지하고 있는 최고급 주택가로서 알려짐 ㆍ근처의 돈암동·종암동과 대비되어 형상화 - 1960년대 이후 ㆍ부자들과 특권층이 유입되고, 개발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지기 시작 ㆍ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김지하의 『오적』, 정한숙의 『성북동』 ㆍ특권층의 비밀회동 장소로서의 요정에 대한 형상화가 이루어짐 ㆍ산업화에서 소외된 서민들이 그려지면서, 부정적인 성격을 지닌 공간으로서의 이미지가 만들어짐 ㆍ장편소설의 배경이 되는 빈도는 극적으로 낮아짐 ○ 이미지의 각축과 공존 - 긍정적인 이미지로서의 성북동과 부정적 이미지로서의 성북동은 1960년대 이후 서로 각축하며 공존 - 역사문화지구로서 성북동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긍정적 이미지’를 적극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것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3쪽
  • 3. 문인 커뮤니티의 장(場), 성북동 ○ 일제강점기 - ‘구인회’, 『문장』 동인, ‘청록파’ ○ 8.15해방~1960년대 - 자유문학가협회/해외문학파의 수장이었던 김광섭, - 청년문학과협회 혹은 『현대문학』 계열의 주요 인사였던 조지훈과 조연현이 성북동에 거주 - 해방 이후 발간한 문학잡지 『백민』, 『현대문학』, 『자유문학』, 『문학예술』 동인들의 교류가 성북동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 - 성북동은 문인들 간의 활발한 공적/사적 회동이 이루어지는 장소 - 시인 고은을 사칭하다 체포되었던 이가 성북동을 주무대로 삼아 활동했던 것을 보면, 이 일대가 문인들, 혹은 문인 지망생들의 교류 장소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3쪽
  • [ 26 ] 새롭게 조명 받아야 할 성북동 작가들 1. 성북동 작가들 ○ 새로운 성북동 작가군의 발굴 - 한용운, 이태준, 김광섭, 조지훈 등 성북동 거주 문인으로서 기존에 활발히 논의되었던 작가들 외에, - 성북동 거주 문인이면서도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거나, 성북동 거주 문인이 아니더라도 성북동에서 활동하였거나, 성북동을 소재/배경으로 삼았던 문인들에게도 주목해야 할 시점 ①성북동 거주 문인 : 이태준, 박태원, 김기진, 한용운, 김일엽, 김억, 김광섭, 염상섭, 조지훈 ②성북동에서 집필활동을 한 문인 : 김래성, 이광수, 이길룡, 안수길, 이효석, 이산, 이호철 ③성북동을 배경으로 한 문학 : 박완서 김동기, 조정래, 김광균, 고은, 윤대녕, 윤백남, 마해송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4쪽
  • [ 27 ] 성북동 관련 문학작품 1. 성북동 관련 문학작품의 분류 ○ ‘성북동’이 표제에 포함된 작품, ○ 성북동을 주요 소재나 배경으로 삼고 있는 작품 ○ 거주/비거주 문인들에 의해 성북동에서 집필되었다고 밝혀진 작품 2. ‘성북동’이 표제에 포함된 작품 ○ 작품 경향 - 성북동을 표제로 삼고 있는 세 편의 시·소설(김광섭, 강은교, 정한숙)에 드러나는 성북동의 이미지는 대체로 도시개발에 의한 음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어두운 편임 - 이번에 발굴한 수필 2편(김동섭, 이윤재)은 훌륭한 자연경관으로 작가나 지식인들이 휴양을 위해서, 또 작업을 위해서 즐겨 찾던 고장으로 성북동을 묘사함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6쪽
  • [ 28 ] 문인 커뮤니티와 성북동 1. 성북동 문인 커뮤니티의 구성 ○ 성북동은 많은 문인들의 거주지였고, 그 중에는 <문예>의 주축이었던 이태준, <자유문학>의 주축이었던 김광섭, <현대문학>의 주축이었던 조연현 등 문인 커뮤니티의 중심역할을 맡았던 문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음. ○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문예> 동인, <청록집> 동인, ‘구인회’ 동인들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 ○ 이번 조사에서는 성북동에서의 문인 활동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들의 서지를 제공하며, ○ 성북동이 갖고 있는 문인/문학의 고장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자료들을 좀 더 활발하게 찾아 정리해야 함.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쪽
  • ○ 성북동 고서점 - 「여적」, 『경향신문』, 1964.8.19.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 성북동 고서점 ­ 「나의 젊음 나의 사랑1」, 『경향신문』, 1997.9.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 ‘아마추어 문학가의 고장’ 성북 - 「글쓰는 즐거움 여성 축제 장원」, 『동아일보』, 1984.6.8.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 ‘아마추어 문학가의 고장’ 성북 - 「문학소년 음독자살」, 『동아일보』, 1958.8.24.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 ‘아마추어 문학가의 고장’ 성북 - 「문학소녀 자살」, 『동아일보』, 1966.8.29.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 ‘아마추어 문학가의 고장’ 성북 - 「휴지통」, 『동아일보』, 1968.10.2. (고은 사칭범의 성북동 활동)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 30 ] 아방가르드 미술인들의 동네, 성북 1. ‘아방가르드 미술인들의 동네’ 성북, 미술과의 인연 ○ 젊은 아방가르드 미술인들의 창작동네 성북 - 한국의 미술계에서 성북은 친정이나 본가, 고향처럼 친근한 느낌을 주는 장소 - 미술계의 원로들이 다수 거주 - 작고한 화가들의 자택이 미술관으로 문패를 바꿔다는 경우도 많음 ○ 아방가르드[전위예술(前衛藝術), avant-garde] 아방가르드는 전위(前衛), 선두, 선구 등의 뜻으로 프랑스의 군사 용어인 ‘전위(부대의 전초로서 선발된 소수 정예부대)’에서 나온 말. 정치적 의미로 오늘날에는 좌익(左翼)과 같은 말로, 특히 예술상으로는 인습적인 권위와 전통에 대한 반항, 혁명적인 예술 정신의 기치를 내걸고 행동하는 예술운동을 말한다. 따라서 특정의 주의나 형식을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는 신시대의 급진적인 예술 정신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는 말이지만,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중심으로 한 조형활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들 활동의 배후에는 기계 문명의 발달과 무의식 세계의 규명, 원시 예술의 발굴, 사회 의식의 확대 등 신시대적인 여러가지 요인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이 말은 반자연주의라는 점에서 동시대의 문학, 연극, 영화 등의 분야에 있어서도 그 실험적, 혁명적인 행위에 대해서 쓰여진다. (출처 : 『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1999) ○ 50년 전 성북동은 젊은 미술인들에게 창작의 푸른 터전 - 도심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수려한 산수를 간직한 성북동의 지리적 특성이 미술인들의 예술적 영감 형성에 좋은 영향을 미침 - 도심에 비해 지가나 집값이 저렴해서 창작활동을 위한 널찍한 공간을 확보하기에 용이함 ○ 성북은 아방가르드 미술인들의 집합소 - 성북에 자리잡은 젊은 미술인들은 아카데미즘적 미술전통을 순순히 따르기보다는 새로운 변화와 저항의 예술을 표방 -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의 맨 앞줄에 서서 한국 미술의 변화를 이끌어 감 ○ 성북동 마전터가 주는 예술적 영감 - 마전 : 조선시대 성북둔을 중심으로 존재한 성북동의 주민들의 생업 중 하나로 생포목을 잿물에 빨아서 볕에 말린 후 표백하는 일 - 화폭의 흰 천(캔버스)을 연상케 하는 지난날 성북 주민의 마전 일은 훗날 이 지역에 살게 되는 미술인들의 도래를 예고한 듯이 여겨지는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8쪽
  • ○ 일본 자유미술가협회 출신 화가들과 신사실파의 창립 - 일본 자유미술가협회 출신 화가들의 신경향 ·김환기는 자유미술가협회와 신사실파를 모두 아우르며 아방가르드의 선봉에 서며 유영국, 이중섭과 함께 일본에서 자유미술가협회 회원으로 작품활동을 펼쳐나감 ·보수적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추상적 미술을 표방한 아방가르드 미술운동 단체였던 자유미술가협회의 1937년 창립전에는 한국화가로는 김환기와 문학수, 유영국, 주현 등이 출품 ·1943년 자유미술가협회는 미술창작가협회전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이때 열린 제 7회전에서 이중섭이 태양상을 수상 ·김환기와 유영국은 기하학적 추상양식을 보여주었고 문학수와 이중섭은 초현실주의 경향이 강한 작품들을 제작 - 해방 후 화단의 아방가르드적 움직임 ‘신사실파’의 창립 ·일본에서 자유미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한 이들은 귀국이후인 1947년 즈음 ‘신사실파’를 발기하고 창립전을 개최 ·조형이념으로 결성된 최초의 그룹이라고 평가받는 신사실파는 김환기, 유영국, 이규성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으며 전쟁이후 열린 1953년 5월의 전시회에는 이규상이 빠지고 백영수와 이중섭, 장욱진 등이 가담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9-190쪽
  • 3. 서양화단의 흐름 ○ 성북동과 서양화단의 아방가르드 움직임 - 성북의 노시산방이 수향산방이 되면서 수향산방의 새 주인장 수화 김환기를 시작으로 아방가르드적 정신을 지닌 서양화가들도 하나 둘씩 성북 주변으로 이사들어와 이웃하기 시작 - 일본에서 추상미술을 표방했던 자유미술가협회을 통해 추상미술에 입문했던 이들은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등을 통해 추상미술의 세계를 국내에 소개 - 이들은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며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아방가르드적 활동을 펼쳐나갔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9쪽
  • ○ 이북 출신 화가들의 모던아트협회, 그리고 기조전 - 한국전쟁기 피난지 부산에서의 움직임 ·한국전쟁은 막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던 화단에 큰 재앙이었으나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피난지인 부산에서도 작품활동 계속 ·수화 김환기를 중심으로 했던 신사실파가 부산에서 전시를 가졌고, 박고석, 한묵, 이봉상, 정규, 황염수 등 훗날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한 이들도 전시회 개최 ·주로 월남한 이북출신 예술가라는 공통점이 있었던 덕분에 이들은 서로를 예술적으로뿐 아니라 동지이자 형제처럼 의지하고 지냄 ○ 대표 화가 - 김환기(1913-1974), 변종하(1926-2000), 윤중식(1913-2012), 한 묵 (1914- ), 박고석(1917-2002), 이중섭(1916-1956), 황염수(1917-2008), 김종하(1918-2011), 표승현(1929-2004), 전성우(1934- ), 오 윤(1946-1986), 김성환(1932- )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90쪽
  • ○ 성북동 거주자의 사회·문화적 특성 - 지식인촌: “1938년 경 물 맑고 소나무 우거진 경치 좋은 동네로서 주민의 거의 전부가 교원, 문사, 교역자 이렇게 지식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만 살고 있는 동네. 전문대학 정도의 학력쯤은 거의 전부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음악가 채동선, 불전교수 김두헌, 소설가 이태준 등 제씨이다.” - 문인촌: “오늘까지 벌서 그곳 나가서 집 짓고 영주하는 이에 시인에 김안서(金岸曙), 여류문사에 김일엽(金一葉), 평론가에 김기진(金基鎭), 소설가에 이태준(李泰俊), 평론가에 홍효민(洪曉民), 노논객(老論客) 이종린(李鍾麟) 등의 제씨가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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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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