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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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동 주거 형태의 변화에 관한 내용이다. 성북동은 계곡이 깊고 물이 맑아 조선시대부터 양반들의 별장지로 사랑받았다. 서울 성북동 별서와 이종석의 별장이 아직 남아있어 양반들의 호화로운 삶을 보여준다. 1936년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시작된 이후 대량의 한옥이 들어서는 한편, 경성부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국유지를 불법으로 점유하고 기초적인 주거시설을 갖춘 ‘토막’이 등장했다. 6.25전쟁 이후 성곽 아래쪽으로 판자촌이 등장했지만, 개발이 진행되면서 철거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성북천의 복개와 도로 확장, 삼청터널의 개통과 함께 성북동 윗동네에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 부촌을 형성하였다. 현재 성북동은 공동주택을 비롯한 다세대 다가구 주택들이 많이 있으며, 윗동네에는 외교단지나 고급단독주택이 자리잡고 있다.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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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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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비고: 성북동 330의198

근거자료 원문

  • 성북동은 산세가 깊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조선시대 왕족과 양반들의 별장이 많았다. 1929년 창간된 교양잡지 <삼천리>는 ‘서울에는 부자양반이 많이 산다. 그러나 조선인 부자가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는 수석(水石)이 좋은 성북동 일대를 가리키리라. 이제 별장지대를 순례하는 첫 길로 성북동 일대를 위선 보기로 하자.’라며 성북동의 별장을 소개하는 글을 싣기도 하였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22쪽
  • 이태준 소설에 비친 성북동 사람들의 주거문제 사람이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성북동은 예로부터 문인들의 사랑을 받는 동네였다. 특히 계곡이 깊고 물이 맑아 조선시대부터 양반들의 별장지로 사랑 받았다. 의친왕 이강의 별장인 성락원, 여흥 민씨 집안인 충정공 민영환의 음벽정 등은 지금까지도 이름을 남기고 있고, 부호 이종석의 별장, 안동 김씨 집안의 별장 등도 이곳 성북동에 있었다. 성락원과 이종석 별장은 아직도 남아 당시 양반들의 호화로운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성북동 사랑은 그들이 남긴 많은 시와 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시와 글을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혜화문 밖에서 무엇을 보겠는가. 惠化門外何所見 푸른 숲 흰 모래밭에 연하여 있네. 點綴有林白沙嘴 북둔의 복숭아꽃 천하에서 가장 붉고, 北屯桃花天下紅 푸른 시냇가에 집집마다 낮은 울타리. 短籬家家碧溪沚 ― 이덕무, 「성시전도(城市全圖)」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제20권) 중에서 맑은 계곡과 언덕을 끼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복숭아를 심어 생업 을 삼고 있다. 매년 늦은 봄이면 놀이를 나온 사람들과 거마가 두 줄 을 지어 가득하게 산 계곡 사이를 메우고 깨끗한 초가집이 많다. 淸溪狹岸 居人種桃爲業 每於晩春 遊人車馬 騈闐山谷間 亦多精灑之茅屋 ― 유본예, 『한경지략(漢京識略)』 명승조 중에서 푸른 숲과 흰 모래밭이 있는 마을, 봄이면 복사꽃이 활짝 피어 붉게 물드는 마을, 그래서 봄이면 놀이를 나온 사람들이 탄 수레와 말이 줄을 지어 계곡을 가득 채우는 곳이 바로 성북동이었다. 그 밖에도 추사김정희, 번암 채제공, 풍고 김조순, 초정 박제가 등도 성북동에 관한 시와 글을 남겼으니 조선시대 선비들의 성북동 사랑은 대단했다. 그들의 별장이 성북동에 많았던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양반들의 주요거처는 사대문 안 북촌 일대였다. 성북동 별장은 봄에서 가을 사이, 날 좋은 날 잠시 이용하는 곳이었으니 이를 당시 성북동의 일반적인 주거환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음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태준의 수연산방과 한용운의 심우장이다. 공교롭게도 두 집 모두 1933년에 지어졌다. 두 집 모두 큰 규모의 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번듯한 기와집이었고 상당한 공사비가 들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태준의 경우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이라는 번듯한 직업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한용운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의 도움 등 주변 지인들의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정도의 집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36년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시작된 이후 성북동에는 집장사들이 지은 ㄴ, ㄷ, ㅁ자 한옥들이 대거 들어섰다. 당시 혜화동은 많은 샐러리맨들의 중상급 주거지로 사랑받았는데, 그와 멀지 않은 성북동 역시(성북동뿐만 아니라 돈암지구) 중산층 주거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한옥도 그 당시 지어진 것이다. 하지만 성북동에 중산층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역시 성북동의 주민이었다. 이태준이 그린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그의 소설 「손거부」를 보자. 주인공 손서방은 주인공(아마도 이태준)을 찾아와 문패를 써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나는 이런 문패를 처음 써볼 뿐만 아니라 호구조사 나오는 순사한테 방패막이로 한다는 그의 말이 우습기도 하고 또 그의 어리숙함에 일종의 취미도 느끼었다. 우선 첫머리엔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라고 쓰고, “거기가 몇 번지요?” 물었다. “번지 그까짓 안 쓰면 어떻습니까?” “왜 안 쓴단 말이요? 아, 장자, 차자 이름을 다 쓴다면서 정작 번지를 안 쓰면 되우?” “우린 아직 번지가 없답니다.” “번지가 없다뇨?” “그게 개천둑에다 진 집입죠. 이를테면 국유집죠. 알아들으시겠습니까? 그래 이제 면에서 나와 번질 매겨 주기 전엔 아직 모릅니다.” 이 대화를 보면 개천가 국유지를 따라 무허가 집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무허가 건물이 손서방의 집 하나밖에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26-129쪽
  • 최근까지도 수연산방 앞, 지금은 도로가 된 옛 성북천 개천둑 자리에는 오래된 건축물이 늘어서 있었다. 이 건물들이 1930년대 건물은 아니었을 것이나, 예전 국유지 자리에 들어섰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국유지에 집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경성의 급격한 인구 증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20년에 25만 명이었던 경성부의 인구는 1926년에는 33만 6천명으로 34.43%라는 엄청난 증가율을 보였다. 인구는 급격히 늘었지만, 경성에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주택이 없었고 그들을 위한 제도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당시 경성부로 몰려든 사람들은 국유지를 불법으로 점유하고 그곳에 아주 기초적인 주거시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토막’ 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런 토막이 경성부 내에 마구 들어서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일제강점기 주택문제는 심각했다. 1926년 5.77%였던 주택 부족율은 1930년대 전반에는 10~15%, 1930년대 후반에는 20%로 계속 증가하며 1944년에는 40.25%라는 엄청난 수치에 이른다. 조선인들의 사정은 훨씬 나빴다. 1933년 현재의 경성부의 인구·주거·가구수 등을 조사하여 담고있는 1935년 『조선연감』을 살펴보면, 경성부내 일본인의 주거 부족율은 2.75%에 불과했지만 조선인의 경우에는 15.15%에 이르렀다. 조선총독부도 이런 주택문제를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총독부는 경성부 내의 토막민들을 당시 경성부 외의 국유지(돈암정, 아현정, 홍제외리 등)에 이주시키려 하였고, 일부는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경성부의 인구는 조선 전체의 인구 증가율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농촌의 생산량은 늘어났을지 몰라도 조선인들의 궁핍은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도시로―특히 경성으로―몰려들었다. 토막민을 경성부 밖으로 이주시켜도, 그 자리에는 다른 토막민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사실 총독부의 주택문제에서 토막민 정책은 주된 의제가 아니었다. 총독부의 토막민 정책은 새로운 제도의 도입, 서민주택의 건설 등 근본적인 대책 없이 무작정 토막민을 경성부 밖으로 이주시키는 것으로 한계가 분명했다. 손서방의 집은 이런 주택문제의 결과 경성부 주변에 만들어진 여러 토막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여느 토막처럼 ‘국유지’에 지은 집이었고, 그 때문에 번지도 없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손서방 등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토막은 어떤 형태였을까. 경성제국대학 위생조사부 보고서는 토막을 ‘하룻밤 사이에 가마니, 나무판자 조각 등을 대충 모아 재생한 정도’라고 묘사하고 있다. 물론 온돌 등이 갖춰진 곳이 많아 위의 묘사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허름한 것은 사실이었다. 우선 토막은 매우 협소했다. 좁은 곳은 1평~1.5평 내외의 1실(단칸 방) 구조가 대부분이었으며, 방이 두 개 이상인 경우는 하나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1인당 평균 평수는 0.6평 이하가 전체의 79.4%에 달했다. 기본적인 온돌 시설마저 없는 곳도 6%나 됐다. 한 세대에 4인~6인이 사는 경우가 전체에 57.9%에 달했고, 한 세대의 평균 인원수는 4.8명이었다. 「달밤」의 황수건은 7식구가 한 집에 산다고 하였는데, 당시 그의 집이 토막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토막민 평균보다 더 많은 식구가 한 집에서 사는 셈이었다. 자연히 위생문제도 심각했다. 전체의 51.8%는 전용내지, 다세대 공통화장실을 사용했지만 나머지는 공동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화장실이 없는 곳도 있었다. 목욕은 한 달에 한 번 하는 경우가 22.6%, 두 달에 한 번하는 경우가 29.1%였고, 한 번도 목욕탕에 가본 경험이 없는 경우도 11.5%에 달했다. 물론 목욕탕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이 씻지도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름 이외에 전신을 다 씻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달밤」과 「손거부」의 두 주인공―황수건과 손서방―의 생활은 위에 언급한 토막민들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농촌의 궁핍을 이기지 못하고 경성으로 올라왔고, 거기서 다시 쫓겨 성북동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좁은 집에서 여러 식구가 깨끗하지 않은 환경에서 거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해서 생계를 유지했을까?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29-133쪽
  • 2. 성북동의 전쟁피해 : 전후의 살림살이와 판자촌(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의 전쟁 복구의 과정 속에 성북동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흥이 많았던 예술가들은 이 시절을 그래도 아늑하게 기억했다.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 부부는 외진 곳이라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도 행복한 삶을 꾸렸다. 부인도 천생연분, 자연도 천생연분이라고 기록으로 남긴 그의 글에 사랑이 담뿍 배어 있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후일 유럽을 뒤흔들 작곡가 윤이상이 길 건너 조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기붕 시장을 필두로 한 행정건설대 300여명이 서울로 입성한 것이 1951년 3월 18일이었다. 그리고 서울의 시설물들이 복구되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되었다. 당시 성북동에 남아 있던 사람들 외에 피난을 갔던 사람들은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행정처가 임시로 꾸려졌으며, 관할 구청별로 구호 양곡이 지급되었다. 성북동 사람들도 성북구에 속해 이 피난살이를 견뎌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인적·물적 피해는 컸다. 우선 주민의 수가 일시적으로 급감했다. 1949년 13,372명에 달하던 주민수가 1953년에는 5,546명으로 급감했다. 그러나 피난민 등이 더해지면서 인구는 점점 급증했다. 무엇보다 주택수가 부족했다. 한국전쟁 3년 동안 거의 7만 9천여 동의 주택 피해가 있었다. 걔 중에서 성북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서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1951년 3월 16일자 『동아일보』기사에 의하면 성북동은 건물의 피해 측면에서는 “일부 피해 및 건재동健在洞”인 지역으로 평가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성북 제 2동은 한국전쟁 당시보다 15% 정도 손실이 있었다고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화가 가라앉으면서 성북동의 인구 역시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했다. 토착민 외에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이들이 성북동 곳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도 문제는 주택수요였다. 1952년부터 서울시는 새서울 건설을 위해 기존 서울의 공간을 도심지대, 중간지대, 교외지대 등으로 구획하고 이를 개발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국립공원 등의 녹지공간을 설정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당시 정부가 22만 6000호의 난민용 구호주택을 건설, 보급하였지만 그것이 전체 인원을 부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사람들은 시가 보유한 땅이나, 녹지공간으로 설정된 국립공원 등의 지역에 이른바 불량주택이라고 불리우는 토막, 판자집, 바라크 건물(빠락) 등을 세우게 되었다. 성북동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북천, 정릉천변에 피난민들이 정착했고, 공원개발로 예정된 청암장(현 길상사 자리) 부근, 즉 배밭골과 이어진 골짜기에 사람들이 정착하였다. 오늘날 북정마을 역시 당시 서울로 일을 찾아 들어왔던 사람들이 모여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형성 되었던 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시기에 함경도 함청 사람들 역시 성북동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이른바 ‘불량건물’들 혹은 판자촌들이 1960년대 후반까지 이곳 성북동에서 그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주택공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서울시가 불량건물이라 불렸던 바라크(빠락) 등을 현실적인 주거 형태로 인정한 탓도 크다. 그렇다면 이들 피난민 외에 원래 주민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1958년도 보건사회부의 주택조사보고서가 그 단면을 보여준다. 1958년 본 조사보고서에 응답한 성북동 총 가구호수는 403호였다. 그런데 당시 응답자 중 한 가구당 인원수가 주로 5~10명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2,500명 남짓한 이들이 응답한 것이다. 1961년 성북동의 인구가 18,535명인 것을 감안하면 전체를 다 반영한다고 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주택을 자가 소유한 이들이 응답했음을 감안할 때 이들의 응답을 통해 당시 성북동 사람들의 삶의 한 단면을 살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성북동이 전쟁 당시 마을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음은 이 조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조사에 응답한 이들 중 주택을 자가한 이들 중에서 전쟁 중 피해를 입은 가구 수는 총 82호이다. 그러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응답한 가구는 총 193호로 훨씬 많다. 이들 중 일부는 전재戰災를 복구하고 사는 이들도 있고, 그대로 피해를 유지한 채 살림을 꾸려가는 이들도 있었다. 이는 1950년대 정부주도의 도시개발과 주택보급에서 유독 성북동이 제외되어 있던 것에 대한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정부는 대한주택영단, 미 원조기구 등과 더불어 부흥주택, 재건주택, 난민주택, 희망주택, ICA주택 등 갖은 유형의 주택을 민간에 보급하였다. 이는 성북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암동의 재건주택, 운크라의 1957년 미아리 난민정착촌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성북동의 경우에는 이러한 기록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시기 서울시의 도시개발, 즉 구획정리사업에서 성북동과 유관한 개발은 주로 환경정비사업이었다. 즉 종래 파괴된 전화국, 수도시설의 재정비를 위한 증설 공사 등이 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주민들은 주로 전전의 주택에 그대로 거주했던 듯하다. 주택의 대체적인 규모는 11평~30평 사이가 많았고, 대체로 온돌처리가 되어 있는 집들에 살고 있었다. (227호) 그러나 저마다 주택에 사용 된 재료는 달랐는데, 콘크리트 바닥인 집이 138호, 흙바닥인 집이 113호, 마루바닥인 집이 152호 등 각양각색이었다. 중요한 수도의 경우 전용 수도를 사용하는 이가 309호, 공용을 이용하는 이가 34호로 분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주택개발, 새로운 주택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선망은 작지 않았다. 당시 주민들은 대체로 전쟁 이전의 주택에서 거주하고 있었지만 희망하는 형태의 주택으로 총 164호가 주로 서양식을 선호했다. 물론 이들 중 일부는 임시가옥인 ‘빠락’에 주거하는 이도 3호가 있었으며 또 셋집에 거주하는 이들은 모두 54호였다. 생계에 있어서는 공무원이라고 응답한 이가 140호, 상업이라고 응답한 이가 163호로 반반 정도를 차지하는데, 상업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응답자 중 일부인 3호가 ‘빠락’에 거주했고 비율이 크진 않지만 농업에 종사한 자가 5호, 공업에 종사하는 자 27호가 있었다. 이 조사는 응답자의 대부분이 자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등 동민 전체를 대표하기엔 부족하다. 또한 당대 성북동에 허다했던 ‘불량주택’에 거주했던 이들이 모두 포함된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피난민 이외 성북동 원주민들의 삶의 일단을 살펴 볼 수는 있었다고 할 것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50-155쪽
  • 3. '풍치지구'를 벗어나 북악스카이웨이 시대로(1960년대) 문인들의 회고에 등장하는 성북동의 풍경에서 집들이 점차 현대적인 꼴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60년대 중반경은 넘어야 했다. 윤이상이 조지훈과 마주보고 즐겼던 성북천이 복개된 것 역시 1967년 이후이다.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는 바로 이 본격적인 회고의 이전 시대를 읊조리는 이야기이다. 김광섭은 1961년 건축가 김중업에게 부탁한 설계대로 집을 짓고 성북동에서 5년을 거처했다. 그리고 이때의 기억을 후일 시집에 실었던 것이 바로 「성북동 비둘기」였던 셈이다. 성북동에 대한 문인들의 정서는 이렇듯 김광섭에 의해 절묘하게 드러났지만, 그것은 또한 당대 문인들이 성북동을 바라보던 시선이기도 했다. 송지영 선생이 소개한 정한모의 글줄에는 당시 성북동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성북동에 거주했던 정한모는 지금은 고급 주택지대라고 간주되는 곳이 당시에는 “성북초등학교에서 개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와야만 하는 약수터나 빨래터를 찾는 사람들만이 올라오는 곳이었다.”라고 회고한다. 즉 1960년대 초중반까지 여전히 성북동은 비록 정 · 재계의 별장터이고 ‘꿩의 바다’로 불리기는 했지만 아직은 오늘날의 모습보다는 과거의 모습이 더 많이 남아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과거 유명했던 배나무, 복숭아 등의 흔적은 점차 사라져갔지만 몇몇 성북동 산 위의 집들, 그리고 보통사람들로 구성된 지역 문화는 60년대 중반까지 엇비슷하게 이어져갔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서울의 도시계획상 성북동의 위치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 서울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1961~80년 사이에 서울시는 도시계획상 구획정리만 27개 지구에, 60~70년대에 집중된 택지조성사업 등을 대규모로 진행했다. 그러나 종로, 중구, 성북, 서대문, 용산 등 일제하에서 어느 정도 계획되어 있던 지역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특히 성북동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사정이 변했다. 정부는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고, 건설부가 주택건설계획을 발표하는 등 주택보급을 서둘렀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기존 무허가건물들, 즉 흔히 판자촌이라고 불리는 ‘불량건물’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4년간의 불도저식 개발을 통해 유명해진 서울시장 김현옥의 추진력 아래 서울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있었던 대표적 조치가 바로 1967년부터 약 5년간 진행되었던 이른바 ‘판자촌’의 철거와 재배치였다. 특히 서울의 도심부의 현대적 재개발을 위해 정릉 등 기존의 도심 반경에서 5~10km내 외의 무허가 정착지들이 철거 대상이 되었다. 정릉과 등을 맞대고 있었고, 또 그 골짜기에 많은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었던 성북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1967년 6월 성북동 산 25번지 일대의 숲속 풍치지구 약 10만 평이 대규모 외국인 주택단지로 책정된 것은 그야말로 오늘날 성북동 부촌의 전조를 알린 신호였다. 성북천은 복개되었고, ‘풍치지구’로 개발이 불허되었던 숲의 나무들이 집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북악스카이웨이 공사를 위한 대대적인 공사의 진행이 이루어질 무렵 김광섭이「성북동 비둘기」를 발표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북동의 산천을 보호하고 있었던 ‘풍치지구’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 풍치지구라는 것은 일제강점기 경성부의 정책에서 연원한 것이다. 1941년 일제는 조선시가지 계획령을 통해 구시가지 내 북악과 성북, 무학 등 20군데 약 1천 만평을 이른바 ‘풍치지구’로 선정했다. 특히 성북동의 경우, 이보다 앞서 풍치지구 이외에 ‘보안림’으로 개발이 규제되어 있었다. 보안림이란 1937년 경성부가 도시의 녹지계획을 수립하면서, 국토의 보안, 위해의 방지 등등을 위해 벌채 등 난개발을 공권력을 금한 것을 말한다. 당시 성북동 지역의 약 200헥타르에 해당하는 영역이 이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정책위에 1941년 3월 25일 조선총독부고시 제 377호로 새로 풍치지구가 설정되었는데, 북악산과 인접한 성북동의 일부 지역이 다시 여기에 중복 적용되면서 난개발에서 성북동이 제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북동 산림에 대한 보호는 해방 이후 서울시의 도시개발에 그대로 이전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서울시는 도시개발계획을 진행하면서 이러한 풍치지구에 근거, 서울의 시유지로 간주된 성북동 산 지역 등 일부를 공원화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시의 극심한 주택난으로 인해 이러한 시유지에 해당되는 성북동, 즉 청암장 인근 부지들에는 무허가 주택들, 즉 판자촌 등이 난립해서 건설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 말 서울시는 이러한 시유지들을 정리할 계획으로 토지를 개인에게 매각했는데, 이로 인해 무허가 건물에 주거하던 성북동, 돈암동 주민들이 이른바 ‘집달리’ 들에 의해 내쫓기는 등 사회문제를 양산하기도 하였다. 물론 1960년대 중반 이전에도 성북동의 개발이 완전히 묶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쿠데타 이후 일부 시유지들이 개인에게 불하되었고, 성북동 지역의 중요 문화재 주변의 필지 등은 소유권 변화 등을 겪으며, 공간상의 변화를 맞이했다. 그러나 역시 1970년대 성북동의 대대적인 변화를 예비 했던 것은 풍치지구의 본격적인 해제였다. 1967년 6월 성북동 산 25번지 일대가 정부에 의해 외인 택지로 책정되면서 이른바 풍치지구의 축소와 종래 이곳에 무허가 건물을 짓고 십여 년을 넘게 살아오던 주민들의 철거문제가 사회문제로 불거졌다. 특히 성북동 산 14번지와 산 26번지 일대의 1백 호 가량의 무허가 건물들, 성북동 산 1번지 일대의 3백여 동의 무허가 건물들이 강제적 철거의 대상에 놓였다. 이는 서울시의 북악스카이웨이 공사로 인해 성북동산 18번지와 산 25번지 일대의 필연적 철거로 인해 일부 무허가 판자집의 양성화 계획에서 예외로 상정되는 주민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일부 판자촌을 양성화하는 한편 판자촌으로 상징되는 무허가 건물들을 규정에 맞게 철거하거나 개량하고자 하였다. 1968년 12월 현재 성북동에는 여전히 2백 동의 불량건물이 존재했고, 이 과정에서 바로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와 같은 시들이 급격한 변화를 노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1960년대 중반에 이어 두 번째로 대대적인 풍치지구가 해제되었고, 성북동 330번지 일대 등을 포함해서 서울 시내 34곳 풍치지구는 25개로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그리고 1977년 12월 8일 처음 구획된 이래 40여 년 만에 드디어 일제의 풍치지구의 대대적 변동이 발생했다. 총 34곳 중 25개 지구로 풍치지구는 축소되었고, 이 중 성북동 330번지 일대 등이 추가로 해제 되면서 이른바 대개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56-161쪽
  • 4. 성북동 고급주택지의 형성과 변화(1970년대~2000년대) 성북동의 풍경은 성북초등학교를 전후로 해서 확연하게 구분된다. 성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봤을 때 앞쪽으로 보이는 동네들이 주로 대지 50평 미만의 중소형 주택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교사 뒤쪽 양지바른 비탈 지대는 대체로 규모가 200~300평 이상의 대저택들로 채워져 있다. 흡사 로마 귀족들의 빌라를 연상케 하는 널따란 지붕을 이고 있는 이 대저택들은 대체로 성인 평균키의 두세 배는 됨직한 높은 담장을 두르고 있어 실제로 그 안을 들여다보기는 힘들다. 담장 밖으로 보이는 우람한 침엽수, 늘 닫혀 있는 커다란 창문들, 이따금씩 드나 드는 값비싼 외제 세단 등등으로 미루어볼 때 보통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굉장한 부잣집들이 바로 이런 집들 중 하나이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뜰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그 위를 대형견들이 한가롭게 뛰어놀며, 그 옆에서는 누군가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고 있을지 모른다. 어떤 집엔 풀장도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성북동 고급주택지는 1970년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 확대되었다. 성락원 마을(5통), 꿩의바다 마을(8통), 대교단지(9통)가 그것이다. 입주민은 대체로 국내 대기업 총수, 전 · 현직 고급 공무원, 언론인, 대학교수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 이른바 한국 사회의 ‘주류’였다. 무엇보다 1970년 삼청터널의 개통이 부촌 형성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성북동-세종로 간 거리를 10분 이내로 단축시켜 준 이 터널 덕분에 성북동 고급주택지의 인기는 한층 높아갔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이르면 현대, 럭키금성, 롯데, 국제, 효성, 두산, 코오롱, 한국타이어, 남양유업을 비롯한 우리나라 유수의 대기업 회장들이 모여 사는 한국 제일의 부자동네가 되었다. 그밖에 1974년 일본대사관저와 1976년 서독대사관저를 필두로 주한 외교관들의 사택들 도 속속 들어서서 일대의 풍경을 한층 다채롭게 만들었다. 1970~80년대 성북동 고급주택들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명패도 없는 대문, 철옹성 같은 담장, 슈퍼 하나 없는 골목, 곳곳에 초소와 감시카메라가 있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이 동네를 찾은 취재기자들은 순찰을 도는 경찰들에게 수상한 사람으로 몰리기 일쑤였다. 이 일대의 ‘호화주택’은 심심치 않게 언론의 도마에 올라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지탄 받았다. 심지어 ‘도둑촌’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도둑질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서민 주택가격의 20~30배가 넘는 호화주택을 지어 살 수 있겠느냐는 데서 생겨난 말이었다. 가까운 서민들의 주거지와 동떨어진 채 어떠한 교류도 허용치 않는 한국 최고 부자들의 동네는 좋게 말하면 별천지요, 나쁘게 말하면 자기들만의 성채였다. 갈수록 인간의 얼굴을 잃어가는 고도 자본주의의 속성이 삭막한 경관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1978년 조세희가 펴낸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러한 성북동 고급주택지의 사회적 맥락과 의미를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다. 아주 밝고 깨끗한 동네였다. 아버지가 행복동 삼층집을 팔고 북악산 산허리 숲속 단층집으로 이사를 한다고 처음 말했을 때 누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싫다고 했었다. 비서를 따라 갔다 와서는 반대로 이사 갈 날만 기다렸다. 울타리가 쳐져 있는 동네였다. 입구에 경비실이 있고, 경비원들이 차를 세워 동네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거리는 깨끗하고, 집들은 그림 같았다. 걸어서 이 저택촌을 드나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봄이 되자 동네는 향기로 가득 찼다. 겹법꽃 · 덩굴장미 · 라일락 · 백목련 · 산철쭉 · 가막살나무 · 박태기나무 등이 꽃을 피웠다. 벌들이 잉잉 소리를 내며 날았다. 그 동네에서는 과거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비 온 다음의 풍경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윤호는 거기서 작은 혼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듣고는 했다. ― 「궤도 회전」 중에서 윤호네는 ‘행복동’ 3층집을 팔고 북악산 산허리 숲속 단층집으로 이사를 갔다. 윤호네가 이사를 간 동네에서는 더 이상 3층 다락방 바깥으로 ‘난장이’의 동네가 보이지 않았다. 방죽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무허가 건물들도 벽돌 공장의 굴뚝도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난장이의 가족을 만날 일도 없어졌다. 거리는 깨끗하고 집들은 그림 같은 북악산 산허리 숲속의 동네에서는 더 이상 ‘과거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이웃의 ‘은강그룹’ 회장집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사는 아주 밝고 깨끗한 동네는 저 멀리 서해안의 공업도시 ‘은강시’와 대조된다. (은강) 시내는 많은 구릉이 기복을 이루며, 동서로 뻗은 중앙부의 구릉에 의하여 시가지는 남북으로 나뉜다. 공장 지대는 북쪽이다. 수없이 솟은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오르고, 공장 안에서는 기계들이 돌아간다.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일한다. 죽은 난장이의 아들딸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곳 공기 속에는 유독 개스와 매연, 그리고 분진이 섞여 있다. 모든 공장이 제품 생산량에 비례하는 흑갈색 · 황갈색 의 폐수 · 폐유를 하천으로 토해낸다. 상류에서 나온 공장 폐수는 다른 공장 용수로 다시 쓰이고, 다시 토해져 흘러 내려가다 바다로 들어간다. 은강 내항은 썩은 바다로 괴어 있다. 공장 주변의 생물체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중략) 수많은 공장, 그 공장을 움직이는 경영인들, 그리고 그 경영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서울에 있었다. ― 「기계 도시」 중에서 흔히 성북동을 부자동네와 일반 서민들의 동네가 서로 마주보고 공존하는 기묘한 동네라고들 한다. 그러나 조세희의 소설은 성북동을 좀 더 넓은 각도에서 본다. 소설에서 성북동 고급주택지는 어디까지나 저 멀리 떨어진 공장지대의 대칭점으로서 여기에 존재한다. 밝고 깨끗한 이 동네에서는 ‘과거의 소리’가 그렇듯이 노동자의 소리도 차단된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한다면 성북동 고급주택지는 이들, 성북동 주민들과 마주보며 있는 마을이라기보다 저들,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과 거리를 두기 위한 안전지대이다. 물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성북동 고급주택지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주는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성북동 고급주택지가 한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잘 지적한 훌륭한 문학적 보고서임에는 틀림없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62-168쪽
  • 성북동에는 부자들의 별장이 많이 있었다. 1935년 6월에 발행된 『삼천리』 7권 5호에는 성북동에 부자들의 별장이 모여 있다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기사에 따르면 서울 근방에는 부호들의 별장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눈에 띄는 곳은 죽첨정竹添町 3정목三丁目의 고태高台, 장충단獎忠壇 너머 학구鶴丘 일대, 용산 너머 명수태明水台 일대가 십만장자十萬長者, 백만장자百萬長者의 별장지대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인 부자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은 경치가 좋은 성북동 일대였다. 성북동 일대의 대표적인 별장은 다음과 같았다. 가장 좋은 위치에 차지하고 있는 집은 일제강점기 기업가로 유명했던 백인기白寅基의 별장이었다. 이 집은 후원만 10여만 평이었다. 1925년 5월 27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한일은행에서 은퇴한 백인기는 성북동에 있는별장에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백상규白象圭의 집이었다. 이 집은 양옥 2층 집이었으며 시가로 치면 몇 만원이 넘었다. 세 번째는 한말 총리대신 한규설韓圭卨의 아들인 한양호韓養浩의 별장이다. 한양호는 성북동에 있었던 유명한 요리 집인 음벽정의 경영에 관여했으며, 문영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네 번째는 간송미술관을 만든 간송 전형필全瑩弼의 별장이었다. 다음으로는 대부업자였던 임종상林宗相의 별장이다. 이 별장은 성북동에 있는 자신의 본집보다 더 컸다. 마지막으로 지주였던 이종석李種奭 별장이 있었다. 이 별장은 마치 왕이 사는 듯이 화려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성북동에는 큰 별장이 여러 개 있었다. 약재상 이유선李有善의 별장, 해동은행海東銀行 김계수金季洙의 별장, 경성부 내에서 부자로 꼽히던 김동규金東圭의 별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별장을 포함하여 성북동 안에는 총 14개의 별장이 있었는데 모두 십만장자十萬長者의 별장이며 크고 호화로웠다.(「富豪의 別莊地帶風景, 城北洞一帶」, 『삼천리』 7권 5호, 1935. 6. 1.)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87-88쪽
  • ○ 현대인들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사랑방 휴식처 68 성북동 저택가 전략적 요충지에서 부촌의 대명사로 - 북쪽에 북한산이 있고 서울 성곽이 부채꼴 모양으로 동네를 감싸고 있다. 조선시대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의 진지가 설치될 정도로 중요한 위치였다. 성북동이란 명칭은 도성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는 북악스카이웨이 개통과 삼청터널의 완공으로 교통이 훨씬 편리해졌다. 하늘에서 바라본 성북동은 말 그대로 절경을 이룬다. 아름다운 산세와 현대적인 도시미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서울에서도 대표적인 부촌으로 유명하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23쪽
  • 1978년 조세희가 펴낸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러한 성북동 고급주택지의 사회적 맥락과 의미를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다. 아주 밝고 깨끗한 동네였다. 아버지가 행복동 삼층집을 팔고 북악산 산허리 숲속 단층집으로 이사를 한다고 처음 말했을 때 누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싫다고 했었다. 비서를 따라 갔다 와서는 반대로 이사갈 날만 기다렸다. 울타리가 쳐져 있는 동네였다. 입구에 경비실이 있고, 경비원들이 차를 세워 동네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거리는 깨끗하고, 집들은 그림 같았다. 걸어서 이 저택촌을 드나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봄이 되자 동네는 향기로 가득 찼다. 겹법꽃, 덩굴장미, 라일락, 백목련, 산철쭉, 가막살나무, 박태기나무 등이 꽃을 피웠다. 벌들이 잉잉 소리를 내며 날았다. 그 동네에서는 과거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비 온 다음의 풍경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윤호는 거기서 작은 혼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듣고는 했다. - 「궤도 회전」중에서 윤호네는 ‘행복동’ 3층집을 팔고 북악산 산허리 숲속 단층집으로 이사를 갔다. 윤호네가 이사를 간 동네에서는 더 이상 3층 다락방 바깥으로 ‘난장이’의 동네가 보이지 않았다. 방죽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무허가 건물들도 벽돌 공장의 굴뚝도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난장이의 가족을 만날 일도 없어졌다. 거리는 깨끗하고 집들은 그림 같은 북악산 산허리 숲속의 동네에서는 더 이상 ‘과거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이웃의 ‘은강그룹’ 회장집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사는 아주 밝고 깨끗한 동네는 저 멀리 서해안의 공업도시 ‘은강시’와 대조된다. (은강) 시내는 많은 구릉이 기복을 이루며, 동서로 뻗은 중앙부의 구릉에 의하여 시가지는 남북으로 나뉜다. 공장 지대는 북쪽이다. 수없이 솟은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오르고, 공장 안에서는 기계들이 돌아간다.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일한다. 죽은 난장이의 아들딸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곳 공기 속에는 유독 개스와 매연, 그리고 분진이 섞여 있다. 모든 공장이 제품 생산량에 비례하는 흑갈색, 황갈색의 폐수, 폐유를 하천으로 토해낸다. 상류에서 나온 공장 폐수는 다른 공장 용수로 다시 쓰이고, 다시 토해져 흘러 내려가다 바다로 들어간다. 은강 내항은 썩은 바다로 괴어 있다. 공장 주변의 생물체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중략) 수많은 공장, 그 공장을 움직이는 경영인들, 그리고 그 경영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서울에 있었다. - 「기계 도시」중에서 흔히 성북동을 부자동네와 일반 서민들의 동네가 서로 마주보고 공존하는 기묘한 동네라고들 한다. 그러나 조세희의 소설은 성북동을 좀 더 넓은 각도에서 본다. 소설에서 성북동 고급주택지는 어디까지나 저 멀리 떨어진 공장지대의 대칭점으로서 여기에 존재한다. 밝고 깨끗한 이 동네에서는 ‘과거의 소리’가 그렇듯이 노동자의 소리도 차단된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한다면 성북동 고급주택지는 이들, 성북동 주민들과 마주보며 있는 마을이라기보다 저들,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과 거리를 두기 위한 안전지대이다. 물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성북동 고급주택지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주는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성북동 고급주택지가 한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잘 지적한 훌륭한 문학적 보고서임에는 틀림없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10
  • 성북동 고지대 주민들의 식수난 시내에 부설되어있는 송·배수관 시설이 낡고 모자라 변두리 관말지역과 고지대 주민 20여만 명이 심한 식수난을 겪고 있다. 서울시내에 부설되어 있는 송·배수관은 모두 8천4백30km이며 10년 이상 된 낡은 관이 40%인 3천2백71km나 되고, 10∼35년 된 노후관 2백10km까지 합치면 노후관이 50%선을 넘는다는 것. 이 때문에 평당 km당 10kg의 수압(통상압력)에도 견디지 못해 송·배수관의 파열사고가 잦아 생산된 물을 제대로 공급치 못하고 있으며 누수율이 30%선을 넘어서 수돗물의 증산에도 불구하고 식수난이 풀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중략) 이 같은 식수난을 겪고 있는 변두리 관말지구는 관악구 상도동 2백30가구 등 7개 동 1천6백90가구를 비롯, 영등포구 오류동 등 12개 동 1천9백80가구, 서대문구 갈현동 등 9개 동 1천90가구, 성동구 천호동 등 6개 동 9백90가구, 성북구 성북동 등 4개 동 2백40가구 등 총 5천9백90가구 6만여 명이다. 또 고지대는 서대문구 갈현동(70가구)를 비롯, 불광동(90가구) 응암동(70가구) 평창동(40가구) 홍은동(50가구) 홍제동(40가구) 연희동(30가구) 성동구 옥수동(1백20가구) 성북구 돈암동(30가구) 정릉동(60가구) 등 6백 가구(6천여명) 이다. 『중앙일보』 1975.05.19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31
  • 전화가 가라앉으면서 성북동의 인구 역시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했다. 토착민 외에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이들이 성북동 곳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도 문제는 주택수요였다. 1952년부터 서울시는 새 서울 건설을 위해 기존 서울의 공간을 도심지대, 중간지대, 교외지대 등으로 구획하고 이를 개발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국립공원 등의 녹지공간을 설정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당시 정부가 22만 6000호의 난민용 구호주택을 건설, 보급하였지만 그것이 전체 인원을 부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사람들은 시가 보유한 땅이나, 녹지공간으로 설정된 국립공원 등의 지역에 이른바 불량주택이라고 불리우는 토막, 판자집, 바라크 건물(빠락) 등을 세우게 되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4
  • 성북동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북천, 정릉천변에 피난민들이 정착했고, 공원개발로 예정된 청암장 부근, 즉 배밭골과 이어진 골짜기에 사람들이 정착하였다. 오늘날 북정마을 역시 당시 서울로 일을 찾아 들어왔던 사람들이 모여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던 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시기에 함경도 함청사람들 역시 성북동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이른바 ‘불량건물’들 혹은 판자촌들이 1960년대 후반까지 이곳 성북동에서 그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주택공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서울시가 불량건물이라 불렸던 바라크 - (빠락) 등을 현실적인 주거 형태로 인정한 탓도 크다. 그렇다면 이들 피난민 외에 원래 주민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1958년도 보건사회부의 주택조사보고서가 그 단면을 보여준다. 1958년 본 조사보고서에 응답한 성북동 총 가구호수는 403호였다. 그런데 당시 응답자 중 한 가구당 인원수가 주로 5~10명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2천5백명 남짓한 이들이 응답한 것이다. 1961년 성북동의 인구가 18,535명인 것을 감안하면 전체를 다 반영한다고 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주택을 자가소유한 이들이 응답했음을 감안할 때 이들의 응답을 통해 당시 성북동 사람들의 삶의 한 단면을 살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5
  • 성북동이 전쟁 당시 마을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음은 이 조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조사에 응답한 이들 중 주택을 자가한 이들 중에서 전쟁 중 피해를 입은 가구수는 총 82호이다. 그러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응답한 가구는 총 193호로 훨씬 많다. 이들 중 일부는 전재를 복구하고 사는 이들도 있고, 그대로 피해를 유지한 채 살림을 꾸려가는 이들도 있었다. 이는 1950년대 정부주도의 도시개발과 주택보급에서 유독 성북동이 제외되어 있던 것에 대한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정부는 대한주택영단, 미 원조기구 등과 더불어 부흥주택, 재건주택, 난민주택, 희망주택, ICA 주택 등 갖은 유형의 주택을 민간에 보급하였다. 이는 성북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암동의 재건주택, 운크라의 1957년 미아리 난민정착촌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성북동의 경우에는 이러한 기록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시기 서울시의 도시개발, 즉 구획정리사업에서 성북동과 유관한 개발은 주로 환경정비사업이었다. 즉 종래 파괴된 전화국, 수도시설의 재정비를 위한 증설공사 등이 주로 이루어졌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5
  • 그래서 주민들은 주로 전전의 주택에 그대로 거주했던 듯 하다. 주택의 대체적인 규모는 11-30평 사이가 많았고, 대체로 온돌처리가 되어 있는 집들에 살고 있었다. (227호) 그러나 저마다 주택에 사용된 재료는 달랐는데, 콘크리트 바닥인 집이 138호, 흙 바닥인 집이 113호, 마루 바닥인 집이 152호 등 각양각색이었다. 중요한 수도의 경우 전용 수도를 사용하는 이가 309호, 공용을 이용하는 이가 34호로 분류되었다. 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주택개발, 새로운 주택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선망은 작지 않았다. 당시 주민들은 대체로 전쟁 이전의 주택에서 거주하고 있었지만 희망하는 형태의 주택으로 주로 서양식을 선호했다. (164호) 물론 이들 중 일부는 임시가옥인 ‘빠락’에 주거하는 이도 있었다. (3호) 또 셋집에 거주하는 이들도 (54호) 있었다. 생계에 있어서는 공무원이라고 응답한 이가 (140호), 상업이라고 응답한 이가 (163호)로 반반 정도를 차지하는데, 상업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응답자 중 일부는 임시가옥인 ‘빠락’에 거주했고 (3호) 비율이 크진 않지만 농업에 종사한 자가 (5호), 공업에 종사하는 자 (27호)도 있었다. 이 조사는 응답자의 대부분이 자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등 동민 전체를 대표하기엔 부족하다. 또한 당대 성북동에 허다했던 ‘불량주택’에 거주했던 이들이 모두 포함된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피난민 이외 성북동 원 주민들의 삶의 일단을 살펴 볼 수는 있었다고 할 것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5
  • 1967년 6월 성북동 산 25의 일대가 정부에 의해 외인 택지로 책정되면서 이른바 풍치지구의 축소와 종래 이곳에 무허가 건물을 짓고 십여년을 넘게 살아오던 주민들의 철거문제가 사회문제로 외화되었다. 특히 성북동 산 14~26번지 일대의 1백호 가량의 무허가 건물들, 성북동 산 1번지 일대의 3백여 동의 무허가 건물들이 강제적 철거의 대상에 놓였다. 이는 서울시의 북악스카이웨이 공사로 인해 성북동 산 18과 25일대의 필연적 철거로 인해 일부 무허가 판자집의 양성화 계획에서 예외로 상정되는 주민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서울시장 김현옥은 일부 판자촌을 양성화하는 한편 판자촌으로 상징되는 무허가 건물들을 규정에 맞게 철거하거나 개량하고자 하였다. 1968년 12월 현재 성북동에는 여전히 2백동의 불량건물이 존재했고, 이 과정에서 바로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와 같은 시들이 급격한 변화를 노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7
  • ‘한국판 비벌리힐스’ 성북동 24시 1. 전직 대통령 부부는 성북동에 집을 사러 왔다 그 집 안주인이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집을 사지 못했다. 안주인은 함께 집을 보러 온 대통령의 딸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며 집을 못 팔겠다고 했다.  2. 살던 집을 팔려다 작은 문제가 생겼던 J그룹 C 회장은 일이 마무리된 뒤 난데없이 운전기사를 해고해 버렸다. 그가 C 회장 집에 생긴 문제를 친구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이 회장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3. 집 주인들은 부동산에서 "원하는 가격보다 더 받아줄 테니 복비를 더 달라"고 하면 가차없이 거래를 끊는다. "돈 몇 푼 더 받자고 나더러 협잡질을 하자는 거냐"는 것이 이유다. 하늘이 낸 부자들만 산다는 동네 서울 성북구 성북동. 이곳의 대저택들은 웬만한 부자들도 소유는커녕 구경 한 번 해보기도 힘든 집들이다. 이들 집의 주인들만큼이나 파란만장한 내력을 <월간중앙>이 공개한다. 성북동에는 없는 것이 많다. 우선 고층건물이 없다. 주민들이 스스로 제1종 주거전용지역으로 묶어줄 것을 요청해 높은 건물은 지을 수 없다.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조망권을 함께 누리자는 합의가 만들어낸 결과다. 또 택시를 빼면 대중교통이 전혀 없다. 마을버스가 다니기는 하지만 흔히 알려진 성북동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변두리'까지만 운행한다. 걸어다니는 사람도 없다. 다소 가파른 언덕길 골목마다 고급 승용차들만 오갈 뿐 인적을 찾기란 어렵다. 때문에 외부인이 이 동네에 잘못 발을 들였다가는 한참을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다. 집집이 높이 쌓아올린 담장과 그 위로 고개를 내민 감시 카메라들이 이곳이 '대한민국 부촌 1번지' 성북동임을 말해준다. 대부분 문패도 없는 두터운 철문 속 저택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 회장과 저명인사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성처럼 둘러친 담장 너머를 들여다보지 않고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있다. 정한술 평화부동산 대표. 그는 성북동에서 40년 넘게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동네 유지'다. 비록 성북동 초입의 사무실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대저택을 소유한 것도 아니지만 성북동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니, 그가 모르는 성북동 주민이 없다고 해야 옳겠다. 그는 성북동 대저택 중 들어가 보지 않은 집이 거의 없다. 번지수를 댈 필요도 없이 집 외관만 설명해도 누구 소유며 현재는 누가 사는지 훤하다. 보통사람들은 일생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저명인사들을 그는 옆집 아저씨 보듯 한다. 심지어 기자가 "저런 집들은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하자 대뜸 자동차 열쇠를 집어들며 "갑시다" 하며 나선다. 그는 모 대기업 회장 아들의 집으로 안내했다. 정원수와 잔디를 새 단장 중인 그 집은 대문이 열려 있었다. 정 대표는 "아무 말하지말고 고개만 끄덕이시라"고 귀띔한 뒤 집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남의 집, 그것도 대기업 회장의 아들네 집이라는 설명에 대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기자가 머쓱해진 순간이었다. 그는 정원사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설명을 했다. "이 집은 이 동네 어떤 집보다 관리가 잘 된 집입니다. 전망도 뛰어나죠. 이 나무는 30년이 넘은 감나무인데….“ 『중앙일보』 2006.10.21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76
  • 억울합니다 공원用地(용지)에 鐵條網(철조망)쳐 10年(년) 써오던 공동우물 막아 公衆(공중)이용에 장애 없도록 市(시)서 條件附(조건부)로 許可(허가)한 곳 當事者(당사자)는 “誣告(무고)혐의로 住民告發(주민고발)하겠다.” 저희주민 2백 50여 가구는 지난 10년 간 서울 성북동 14, 15 등 시유지에 살아왔습니다. 지난 11월 중순 濟東(제동)산업사장 沈相俊(심상준)씨가 이 시유지 3만 여평에 말뚤과 철조망을 치면서 시유림 1천여 그루를 벌채했습니다. 저희주민들은 철조망에 막혀 10년 간 써온 공동우물의 물길이 막혔습니다. (서울 성북동산 14 金正昇(김정승)씨외 주민 33명) 말썽이 난 北岳(북악)공원용지 3만여 평은 시유지이다. 沈相俊(심상준)씨(50 성북동 183의30)는 지난 11월 중순 2백여만 원을 들여 공원둘레에 말뚝과 철조망을 2km가량 쳤다. 공사도중 인부들은 시유림을 마구 베어 청부업자 金(김)모씨가 무단개간 혐의로 즉심에 넘어가기도 했다. 10여 년간 인근 시유지에 무허가건물을 짓고 살던 주민들은 이 철조망으로 동네 우물의 물길이 막히자 말뚝과 철조망을 끊는 등 반발-. 이 때문에 지난 12일 趙定鎬(조정호)씨(29 성북동산 14)등 주민 4명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 주민들이 계속 철조망을 잘라 물을 길어먹자 沈(심)씨는 17일 직접 인부들을 데리고 나와 우물을 폐쇄하고 “우물을 파면 동네 집들을 다 헐겠다.”고 주민들에게 위협했다는 것-. 주민들은 “심씨가 공원 땅을 제 것인양 행세한다”고 주장한다. 말썽이 되고 있는 공원용지아래 외인주택용지(일명 城樂園(성락원))2만 5천여 평을 소유하고 있는 심씨는 지난달 17일 “외인주택을 위한 풍치림조성」을 바라는 건설부장관이 서울시장 앞으로 낸 공한을 첨부, 철조망가설 신청서를 서울 성북구청에 내 25일 시장의 승인을 얻었다. 심씨는 지난 6월 땅은 자기가 대고 집은 외국인들이 지어 10~15년 후에는 심씨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의인주택 29동(싯가 약 4억원)의 건립계약을 체결해쓴데 외국인들은 29가지의 계약조건 중 인근에 녹지대를 확보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심씨는 말한다. 그런데 시당국은 철조망가설을 허가해 줄 때 ①인접주민, 산책객 및 공중이용에 장애가 있어서는 안되며 ②공사시행으로 수목의 피해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내세워 허가해주엇으며 벌채한 부분에 대해서는 검찰에 고발키로 했다. 심씨는 또한 철조망가설을 이유로 “공원용지의 연고권을 주장않겠다.”고 시당국에 각서를 썼다고 주장했고 “우물길이 막혔다는 건 근거없다”고 말하면서 “동네 안에도 또 1개의 우물이 있다.”고 말했다. 동네안의 우물은 하수구 가까이 있어 제대로 마실 수 없다는게 주민들의 말-. 15일 밤 서울 성북동 자택으로 찾아간 기자에게 심씨는 “구청직원이든 경찰관이든 공원 용지를 싸고 장난치는 사람이 있으면 용서않겠다” 고 흥분, 진정서를 낸 주민대표들을 무고혐의로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심씨는 “주민들을 조종하는 토지브로커가 있다”고 말하면서 “조사를 나온 성북서 정보계 형사들이 이미 그 명단을 파악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경향신문』 1967.12.20 기사(뉴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84
  • 성북동 4명 장충동 3명 한남동 3명 "巨富(거부)들은 江北(강북)산다" 「고액납세 20人」의 거주지는… 강남은 역삼동 2명으로 “체면” 성북 2동 政財界 거물 몰려 압구정동엔 단 1명도 없어 비싼 집이 곧 부자의 척도는 아니지만 서울시가 최근 발표한 건물분 재산세 고액납세자 순위는 한국의 부자가 강남보다는 강북에 모여 사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20위 안에 든 집중 절반이 용산구 한남동 유엔빌리지, 성북구 성북동, 중구 장충동에 몰려있어 여전히 전통의 富村임을 입증한 셈.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나 서초구 양재동 빌라촌, 종로구 평창동 등 신흥부자촌은 한 집도 명합을 내밀지 못했다. 다만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집 2채가 17, 19위에 등록돼 강남의 체면을 유지했을 뿐이다. ○…북악산 기슭에 위치한 성북동 富村은 행정구역상 성북 2동 소속. 徐元錫(서원석) 한려개발대표의 집 등 20위권에 4채가 포진한 이곳은 크게 「대교단지(9통)」, 「꿩의 바다(8통)」, 「성락원(5통)」 등 3곳으로 나눠진다. 원조는 성락원으로 조선왕조때 왕이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선비에게 하사해 형성된 전통취락으로 아직까지 한옥이 남아있다. 91년 작고한 모기업 창업주 沈(심)모씨가 이곳의 대지주로 있었으며, 각종 교육원이나 외국 대사관이 위치. 이어 개발된 곳이 꿩이 많이 있다고 해서 「꿩의 바다」로 불리는 8통으로 3共(공)시절 북악 스카이웨이 개통과 함께 들어서기 시작해 고급주택 1백 51채가 있다. 朴忠勳(박충훈) 전 국무총리 등 정계 원로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 대한교육보험에서 지난 70년대 후반기에 택지를 조성해 80년대 중반부터 집이 들어선 대교단지에는 모두 2백 12채가 몰려있다. 趙洋來(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 李義淳(이의순) 셋방그룹 회장, 鄭夢憲(정몽헌) 現代商船(현대상선) 부회장 등 재계거물들이 마을주민들이다. 집집마다 자가용을 2대 이상 고유하고 있고 가장 많은 집은 5대나 된다는 것. 장충동과 함께 3명을 순위에 진입시킨 한남동 유엔빌리지는 단지 전체가 성북동과 달이 외부와 분리된 「이방지대」. 67년 대한주택공사가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을 위해 지은 「外人村(외인촌)」으로 중국 북경의 고관대작이 몰려 사는 南中海(남중해)나 미국의 베벌리힐즈에 버금간다는 것이 부동산 업계의 설명이다. 처음부터 힐탑 아파트연립주택 단독주택이 混成(혼성)된 주택단지. 뒤에 건립된 남산 외인아파트 등으로 외국인들이 이주하자 내국인에게 불하해 전·현직 고위관리와 재벌그룹 회장들이 속속 집주인으로 등장. 崔淳永(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朴泳逸(박영일) 대농그룹 회장, 許愼九(허신구) 럭키석유화학 회장 등 재계주역들과 金龍煥(김용환) 전 민자당 정책위의장 閔寬植(민관식) 전 국회의장 대행 등 정치인들이 곳곳에 자리. 단지 입구가 1곳뿐인데다 다른 주택가와 담장으로 격리돼 있는 이곳은 경비초소만 10여 곳에 이르고 집집마다 방범용 폐쇄회로는 거의 기본시설로 갖추고 있다. 장충동도 李壬龍(이임용) 태광산업회장, 李洙彬(이수빈) 삼성그룹 비서실장의 집 등 3채가 20위권에 들어가 옛 명성을 유지했다. ○… 이들 지역의 특징은 경사지인데다 남향으로 산을 끼고 있으며 교통이 편리한 단독주택단지라는 점, 성북동이 북악산기슭으로 공기가 맑은데다 삼청터널만 지나면 시내로 곧장 연결되는 대신 유엔빌리지는 南山(남산)을 조금 뒤로 한데다 한강을 눈앞에 내려다보는 背山臨水(배산임수)의 전통적 風光(풍광)을 과시. 그러나 지역마다 빌라 신축 붐으로 최소 50평대 이상의 빌라들이 들어서고 있으나 주민들은 주거분위기가 깨진다며 우려하는 눈치. <金允淳(김윤순)기자> 『경향신문』 1992.06.24 기사(뉴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87
  • 196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성북동 고급주택지는 1970년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 확대되었다. 성락원 마을(5통), 꿩의바다 마을(8통), 대교단지(9통)가 그것이다. 입주민은 대체로 국내 대기업 총수, 전․현직 고급 공무원, 언론인, 대학교수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 이른바 한국 사회의 ‘주류’였다. 무엇보다 1970년 삼청터널의 개통이 부촌 형성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성북동-세종로 간 거리를 10분 이내로 단축시켜 준 이 터널 덕분에 성북동 고급주택지의 인기는 한층 높아갔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이르면 현대, 럭키금성, 롯데, 국제, 효성, 두산, 코오롱, 한국타이어, 남양유업을 비롯한 우리나라 유수의 대기업 회장들의 모여 사는 한국 제일의 부자동네가 되었다. 그밖에 1974년 일본대사관저와 1976년 서독대사관저를 필두로 주한 외교관들의 사택들도 속속 들어서서 일대의 풍경을 한층 다채롭게 만들었다. 1970~80년대 성북동 고급주택들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명패도 없는 대문, 철옹성 같은 담장, 슈퍼 하나 없는 골목, 곳곳에 초소와 감시카메라가 있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이 동네를 찾은 취재기자들은 순찰을 도는 경찰들에게 수상한 사람으로 몰리기 일쑤였다. 이 일대의 ‘호화주택’은 심심치 않게 언론의 도마에 올라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지탄 받았다. 심지어 ‘도둑촌’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도둑질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서민 주택가격의 20~30배가 넘는 호화주택을 지어 살 수 있겠느냐는 데서 생겨난 말이었다. 가까운 서민들의 주거지와 동떨어진 채 어떠한 교류도 허용치 않는 한국 최고부자들의 동네는 좋게 말하면 별천지요, 나쁘게 말하면 자기들만의 성채였다. 갈수록 인간의 얼굴을 잃어가는 고도 자본주의의 속성이 삭막한 경관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9
  • 성북-평창-청담동 손꼽히는 富村(부촌) 서울 부자들 어디 사나…. 대부분 공기 맑고 전망 좋은 산기슭에 위치 성북동-기업인 청담동-전문직 등 선호도 차이 탈옥수 신창원의 강절도 행각이 밝혀지면서 서울의 고급 주택가가 새삼스레 관심을 끌었다. ‘서울의 베벌리힐스’로 불릴만한 대표적 부촌(富村)으로는 서울 성북구 성북동, 용산구 한남동, 종로구 평창동 구기동, 서초구 양재동, 강남구 청담동 등을 꼽을 수 있다. 이같은 부촌은 언제 어떻게 형성 됐을까, 일반 주택가에 비해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 27일 정오경 성북동 주택가. 높다란 담이 길게 이어져 잇고 골목별로 설치된 경비초소 외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곳을 비롯해 대부분의 부촌은 공기가 맑고 전망이 좋은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 식료품점 비디오 대여점 등 생활편의 시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공통된 특징. 한 경비원은 “승용차로 드나들고 필요한건 전화로 배달시키기 때문에 불편은 없다”고 말했다. ▽성북동 = 산자락에 있어 맑은 공기와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는 전망을 자랑하는 저택밀집지역. 구한 말 의친왕의 별궁이었던 성낙원(城樂園)·사적 37호)이 있을 정도로 좋은 터로 꼽혀 왔으며 60년대 초부터 고급주택가로 개발됐다. 풍치지구로 묶여 있어 대부분 2층 이내지만 대지 200평이 넘는 집이 대부분. 시세는 평당 500만원 남짓이지만 건축상을 수상한 ‘작품’들이 상당수여서 매매가격을 단순 산정하기는 곤란하다는 게 인근 부동산업자의 설명. 『동아일보』 1999.07.28 기사(뉴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91
  • 벌써 20여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박물관에 수위자리가 비어 있어서 공채시험을 본 일이 있었는데 그때 1등으로 합격돼서 채용된 새파란 젊은 청년이 있었다. … 이 젊은이가 그 후 20년 가까이 박물관 식구 노릇을 하는 동안 충직한 수위로서 남긴 이야깃거리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집이 없어서 성북동 어느 산마루에 어설픈 판잣집을 지었다가는 뜯기고 뜯길 때마다 노숙을 해야 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박물관 근무를 거른 일은 없었다. 어느 해인가 장마철에 집을 뜯긴 정상이 하도 딱해서 박물관 발굴 때 끌고 다니는 작고 허술한 천막 하나를 빌려 준 일이 있었는데 장마가 갠 후에 돌려온 천막꼴을 보고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최순우, 「이충구씨」, 1974.
  • 도성과 가까운 명승지로 알려지면서 세도가들의 별장과 정자가 성북동의 풍광에 더해졌다. 의친왕 이강의 별궁인 성락원과 조선시대 문신 민영환의 별장 등 왕실과 양반들의 별장이 이곳에 있었다. 조선후기 문신 김윤식이 쓴 일기를 모은 『속음청사續陰晴史』에는 조선후기 세도가였던 이지용과 이근택의 별장이 동소문 밖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지용은 성북동에 있던 별장에 내외국 관리들을 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1907년 7월,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사법권과 경찰권 위임, 군대 해산 등 국권침탈의 야욕을 드러낸 정미늑약丁未勒約을 강요하였다. 이에 친일파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인 이지용과 이근택의 별장도 불에 타 사라졌다.
  • 2. 성북동, 조선인 부호들의 별장 지대 ○ 1935년, 성북동 내 개인 별장 14개소 확인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8쪽
  • ○ 「부호의 별장지대 풍경, 성북동 일대」, 『삼천리』제7권 제5호(1935. 6. 1) 서울에는 부자양반이 만히 산다. 그러기에 서울 근방에는 부호의 別莊이 수두룩하다. 위선 눈에 띄이는 곳이 竹添町 三丁目의 高台와, 獎忠壇너머 鶴丘 一帶와 龍山너머 明水台 一帶가 모다 十萬長者, 百萬長者의 別莊地帶이라 그러나 조선인 부자가 가장 만히 사는 곳으로는 水石이 조흔 城北洞 一帶를 가르치리라. 이제 별장지대를 巡禮하는 첫길로 城北洞 一帶를 爲先 보기로 하자.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0쪽
  • 3. 전후의 살림살이와 ‘판자촌’ ○ 전쟁으로 인해 주민수 일시적으로 급감(1949년 13,372명 → 1953년 5,546명)했으나 곧바로 피난민, 상경민이 더해지면서 인구가 급증하므로 주택난 초래 - 성북동은 타지역보다는 피해가 적어 “일부 피해 및 건재동”으로 분류 - 성북제2동은 전쟁 전에 비해 15% 정도의 손실 - 인구가 급증하면서 성북천, 정릉천변에 피난민들이 정착했고, 공원개발로 예정된 청암장 부근, 즉 배밭골 과 이어진 골짜기에 사람들이 정착 ○ 오늘날 북정마을 역시 당시 서울로 일을 찾아 들어왔던 사람들이 모여 정착하면서 형성 - 이 시기에 함경도 함청 사람들 역시 성북동에 정착 ○ ‘불량건물’들 혹은 판자촌들이 1960년대 후반까지 이곳 성북동에서 그 모습을 유지 - 1958년 보건사회부 주택조사보고서의 내용(대상 : 성북동 가구 403개호) - 성북동 주민들 중 전전(戰前)의 주택에 그대로 거주하는 비율이 높음 - 주택의 대체적인 규모는 11-30평 사이가 많았고, - 온돌처리가 되어 있는 집(227호) - 주택 건축 재료는 콘크리트 바닥(138개호), 흙 바닥(113개호), 마루 바닥(152개호) - 전용 수도 사용(309개호), 공용 수도 사용(34개호)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0쪽
  • 2. 1970년대 : 부촌의 형성과 한양도성 복원 시작 ○ 부촌의 형성 - 일제강점기에 구획된 풍치지구의 대거 해제 - 서울시의 북악스카이웨이 공사로 인해 성북동 산18과 25일대의 필연적 철거로 인해 일부 무허가 판자집의 양성화 계획에서 예외로 상정되는 주민들 발생 - 성북동 산 14~26번지 일대의 1백호 가량의 무허가 건물들, 성북동 산 1번지 일대의 3백여 동의 무허가 건물들이 강제적 철거의 대상 - 1977년 12월 8일 서울시 풍치지구 총 34곳 중 25개 지구로 축소되면서 성북동 330 일대 등을 추가로 해제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1쪽
  • ○ 주한 외국대사관저 준공·입주시작 ㆍ1976년 10월 12일, 주한 서독대사관저 준공식(성북동 330-198)을 시작으로 일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저 입주 ㆍ2016년 현재 45개국 주한 대사관저가 있음 ◈ 주한 네팔 대사관(저)을 비롯해 주한 브라질, 알제리,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유럽연합, 터키, 폴란드, 앙골라, 스웨덴, 우크라이나, 노르웨이, 덴마크, 카자흐스탄, 독일, 방글라데시, 핀란드, 일본, 그리스, 세네갈, 오스트레일리아, 멕시코,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중국, 캄보디아, 콜롬비아, 수단, 베네수엘라, 캐나다, 몽골, 폴란드, 스리랑카, 싱가포르, 키르기스탄, 이라크, 포르투갈, 아제르바이잔, 파푸아뉴기니, 페루 대사관저가 있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1쪽
  • ○ 1960~7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대한교육보험, 외국인 주택 건설 외국인 주택 건설에 보험사서 6억 출자. 재무부는 생명보험회사에서 약 6억원을 외국인 전용 주택과 대규모 「아파트」건설에 투자하도록 지도할 방침이다. 11일 관계당국은 이 외국인 주택건설 사업은 서울시내 성북동에 이미 확보된 9만평의 대지에 단독주택 1백90동(8천8백평) 「아파트」2동(3천6백평) 부속건물3동(3백평)을 세우도록 했다. (1967.03.1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3쪽
  • ○ 1960~7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 주한 서독대사관저 준공 주한 서독대사관저 준공식이 12일 상오 11시30분 서울 성북구 성북동 330의198 현장에서 박동진 외무부장관과 「카를·로이데리츠」주한 서독대사 등 1백 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신축된 서독 대사관저는 총 공사비 6억 원을 들여대지 2천60평에 건평 6백 평의 2층 건물로 독일 연방 정부가 한국에 세우게 되는 최초의 건물이다. 본 건물 외에 대사관 직원들이 거주하는 4개의 「아파트」식 부속 건물이 있다. (1976.10.12.)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7쪽
  • ○ 1980~9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 성북동에 고급빌라 속속 들어서 서울의 대표적인 고급단독주택 밀집지역인 성북구 성북동 풍치지구에 고급빌라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이 빌라들은 고급주택가란 명성에 걸맞게 나름대로 독특한 설계에 따라 건설되다보니 성북동의 고급스러움을 더해준다. 대부분 90평형대의 대형빌라며 분양가도 최고 평당 1천2백만원선을 호가하고 있다. 남경건설은 동구여상 아래쪽에 45~1백1평형 「남경그린 빌리지」 68가구를 13일부터 분양중이다. 45~60평형 20가구, 61~80평형 42가구, 80~1백1평형 4가구로 평당분양가는 7백50만원선. 동마다 엘리베이터가 있고 1층에는 10평규모의 전용 정원이 딸려 있다. 대원각 맞은편에 민설계(대표 민영백)가 시공중인 「성북 빌하우스」는 길다란 경사지의 특성에 맞게 원형과 직선이 조화를 이루는 설계를 도입했다. 단일평수 90평형 15가구중 6가구가 남아있으며 분양가는 평당 1천2백만원선. 입주는 내년 4월 예정이다. 신원건설이 성북2동사무소 인근에 건축한 「신원빌라」 80평형18가구도 Y자(字)형에다 1층 로비를 갖춘 이색적인 설계로 이미 완공됐다. 현재 8가구가 남아있으며 평당분양가는 최고 1천만원이다. 미덕건설은 성북동 천주교성당 옆에 90평형「성락원 하이츠빌라」 17가구를 완공해 입주가 진행중이며 현재 일부 미분양으로 남아있다.(1996.02.14.)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5쪽
  • 2. 성북동의 별서정원 ○ 성북동의 입지 조건 - 산, 계곡, 하천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맑고 수려한 자연환경 - 도성 및 궁궐과 가까워 혜화문을 통해 언제든지 도보로 왕래 가능 ○ 그밖의 별서정원 - 유득공(1748~1807)의 ‘북둔초당(北屯草堂)’ (위치 불명) - 민영환(1861~1905)의 ‘음벽정(飮碧亭)’(현 연화사 자리) - 김병시(1832~1898), 윤용선(1829~1904), 이근택(1865~1919)의 별장 (명칭, 위치 불명) - ‘오로정(吾老亭)’, ‘성북정(城北亭)’, ‘백운정사(白雲精舍)’ (소유주, 위치 불명) ○ 성북동 별서정원의 가치 - 서울 근교에서 조선시대 별서정원과 별서문화를 살필 수 있는 드문 자료 - 조선시대 서울 양반층의 자연관, 주거관을 비롯해 자연친화적 유상문화와 풍류문화의 실상을 구체적인 공간 속에서 당시에 남긴 문학작품들과 연계시켜 파악할 수 있게 해줌 - 철저한 보존 및 관리 방안을 마련하여 실행하되 적절한 활용 방안을 강구하여 서울 시민들이 찾아가서 심신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정책적 유연성이 요청됨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84-85쪽
  •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을 정도로 풍치 좋은 곳에 일제시기에는 전형필을 비롯한 김기창, 김환기, 이태준, 한용운 등의 예술가들이 살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성곽을 따라 서민들이 정착했다. 그리고 숲이 우거져 ‘꿩의 바다마을’이라 불리는 곳에는 1970년대부터 개발 붐이 불면서 고급 주택과 각국 대사관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 2010, 선잠단과 길쌈이야기,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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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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