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둔
1765 - 1901
장소 인문지리
어영청의 북둔이 있었던 것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어영청은 조선 후기 새로 편성된 중앙군인 5군영 중 왕을 호위하던 군영이다. 둔(屯)은 조선시대 각 지방의 주둔병의 군량을 자급하기 위해 국가에서 반급(頒給)한 전답을 말한다. 성북둔은 영조 41년(1765) 어영청의 재정보충과 도성 동북쪽의 방위를 위해 설치되었으며, 그와 함께 둔사와 창고를 건립하였다. 성북동 지역은 도성과 궁궐과 인접해 있으면서 인가가 거의 없는 넓은 계곡 지역으로 방어에 취약한 구간으로 지적되어 왔다. 영조대 영의정인 홍봉한의 건의로 혜화문 밖 선잠단에 둔을 설치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에 의해 어영청과 함께 폐지되었다.
성북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城北屯
  • 이명칭: 북둔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765 - 1901
  • 비고: 1. 1765년 음4월 이후 설치 시작2. 1901년 전 폐지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비고: 삼선교 부근/간송미술관과 성북초등학교 일대

근거자료 원문

  • 또 혜화문 밖 삼선평은 말 그대로 넓은 평야여서 군사 훈련하기에도 좋았다. 그리하여 영조는 혜화문 밖 성북동에 한양을 지키는 세 부대 가운데 하나인 어영청의 북둔을 설치한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0쪽
  • 3. 개척자들-성북둔과 성북동포백훈조계 전라감사 조운규가 말에 태워 보낸 장계가 조정에 당도했다. 국왕 영조가 직접 장계를 펼쳐 읽었다. 달포 전 나주 객사 기둥에 걸린 흉서에 관한 보고였다. 영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간신만조奸臣滿朝 민함도탄民陷塗炭이라.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 흠, 잘도 지어내는구나.” 필시 무신년 잔당들의 소행이 분명했다. 역모를 실행에 옮기기 전에 민심을 떠보려는 얕은 수였다. 재위 31년(1755)을 맞은 영조는 이런 종류의 괘서사건을 처리하는 데도 제법 이골이 났다. 즉시 금부도사를 전라도로 내려 보내 사건을 수사한 후, 흉서를 쓰고 붙인 범인과 그 연루자를 모두 체포해 서울로 압송토록 했다. 주모자는 윤지尹志(1688-1755)라고 하는 68세의 노인이었다. 영조 즉위년, 노론의 보복을 받아 아버지인 전 훈련대장 윤취상이 처형된 직후 제주에서 나주로 30년을 귀양지에서 뒹굴었다고 했다. 국문은 수월했다. 친국을 당한 윤지는 어차피 죽게 될 몸, 거사 계획을 낱낱이 실토했다. 그리하여 정월 스무날에 일어난 나주괘서사건은 3월말 일단락되었다. 관련자 41명을 처형하고 20명을 귀양 보냈으며 2명의 관직을 추탈했다. 관대한 처분은 아니었다. 이복형 경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영조는 재위 기간 내내 고약한 풍문에 시달렸다. 집권당 노론에게 쫓겨난 재야의 양반 세력들이 믿고있는 독살설이 풍문의 핵이었다. 그들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왕이 된 연잉군 이금李昑은 자신들의 임금이 아니었다. 즉위 초 영조에게 청주성 함락이라는 수모를 안긴 ‘이인좌의 난’ 이후로 무려 15번의 괘서사건이있었다. 그때마다 민심이 동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영조와 노론 집권자들은 사건의 주모자와 연루자를 솎아내 피비린내 나는 응징을 가했다. 한편으로 예방 차원의 대책도 마련했다. 그 중 하나가 도성 수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비변사에서는 여러 해 논의를 거쳐 영조 27년(1751)에 「수성절목守城節目」을 완성해서 올렸다. 한성부의 백성들을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삼군문에 소속시켜 평시에는 훈련을 받게 하고, 유사시에는 자신이 소유한 무기를 들고 도성의 지정된 위치에 올라가서 수도를 방어케 한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영조는 절목을 반포하면서 만약 적이 도성을 위협하면 예전 왕들처럼 몽진하지 않고 ‘내가 먼저 기운을 내서 성 위의 담에 올라가 백성을 위로할 것’이라고 사뭇 감동적인 윤음까지 내렸다. 그러나 종이 위에 쓰고 그린 계획이 위기 때 실제로 작동할 것인가? 영조는 안심할 수 없었다. 사실 나주 객사에 흉서가 붙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위험은 등잔 밑에도 있을 터였다. 특히 도성 북쪽 북한산 주맥이 갈라져 생긴 깊숙하고 널따란 골짜기가 도성을 구렁이처럼 감싸 안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닿을 때마다 근심이 밀려왔다. 잘 훈련된 자객이라면 저자의 백성들이 ‘도둑골’이라고 부르는 그 곳에서부터 불과한 식경이면 담장을 뛰어넘어 창덕궁 대조전 앞뜰에 내려앉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머무르고 있는 경희궁도 안전한 곳이 못될 것이다. 저 인적 없는 골짜기에 반군이 몰래 찾아든다면? 음모로 가득 찬 어두운 물소리 하나가 잠을 청하려는 영조의 머리맡에 들려오는 듯했다. 그런 고민을 넌지시 영의정 홍봉한에게 내비쳤다. 며칠 후 홍봉한이 그럴듯한 계책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영의정이 직접 지도를 펼쳐 놓고 찬찬히 짚어가며 아뢰었다. “이곳의 골짜기는 지면이 매우 평평하고 넓은데, 나무꾼들이 함부로 들어가 벌채하여 민둥산이 되어 나무가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일 수십 호의 인가를 두어 살게 한다면, 도성을 빙 둘러 수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토질이 좋지 않은 밭이나마 약간 경頃이 선잠단 근처에 있으므로 어영청의 급료를 먹는 군사들 수십 명을 모집하여 그 땅에 살게 하되 그 밭을 경작하게 하고 세금을 감하여 주어 생활을 정착하게 한다면 또한 돌아가농사를 짓게 하는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도성 바깥에 마을 하나를 만들어 위협 요소를 사전에 없앤다는 영의정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을이 훌륭한 방패막 역할을 하리라. 영조는 즉시 실행에 옮길 것을 명했다. 영조 41년(1765) 음력 4월의 일이었다. 어영청이 바빠졌다. 어영청은 혜화문 밖 선잠단 옆에다 ‘성북둔城北屯’이라 이름한 둔전을 설치하고 둔사와 창고를 지었다. 둔사에 걸 편액의 글씨는 윤동절尹東晢(1722-1789)에게 부탁해 놓았다. 곧이어 어영청 군적에 이름이 올라 있는 백성 수십 명과 그 가족들을 선잠단 주변으로 이주시켰다. 선뜻 오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 모집에 애를 먹었다. 쓸 만한 땅이 얼마간 있는데다 계곡의 수량도 넉넉하니 두서너 해만 고생하면 생활은 나아질 것이라고 설득했다. 서둘러 지붕을 올리고 울타리를 두른 초가집들이 흥덕동과 송동 너머 성저城底에 생겨났다. 둔전 설치 논의가 있은 지 1년 만인 영조 42년(1766) 마을의 윤곽이 잡혔다. 저녁이면 굴뚝마다 피어오른 연기가 성벽 아래 골짜기에 퍼졌다. 서울 사람들은 이 새로운 마을을 ‘성북동城北洞’이라 불렀다. 그러나 성북동 사람들의 막막한 생활은 시간이 지나도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홍봉한이 아뢰고 어영청에서 내어준 농토는 모래흙으로 이루어져 작물이 뿌리 내리기 어려웠다. 정도定都 이래 300년이 넘도록 버려져 있던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런 데서 어찌 살라는 거야? 쉿, 입조심하라구. 이대로 죽을 셈인가? 말할 것은 말해야지. 황량한 골짜기 안 굶주림에 참다못한 주민들은 정식으로 불만사항을 제기하고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어영청으로선 일단창고를 열어 저축해 놓은 식량을 주민들에게 내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허나 그렇게 하자니 비용이 줄줄 새나갔다. 주민의 생계도 보장하고 재정의 고갈도 막는 일석이조의 묘수가 필요했다. 최소한의 대책이 마련되었다. 주민들에게 농사 아닌 새로운 일감을 가져다주어 일정한 노임을 받게 하자는 것이었다. 일감으로는 포백과 훈조가 적당했다. 흔히 마전이라고 하는 포백은 포목을 삶고 볕에말려 새하얗게 표백하는 공정을 말한다. 옷감의 품질에 최종적으로 영향을 주는 공정인 만큼 그 중요성이 컸다. 성북천은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할 뿐 아니라 양안의 바위와 토양이 깨끗해 마전일에는 제격인 곳이었다. 훈조는 메주 담그는 일을 말하는데 성북동에서 담근 메주는 궁궐에 납품하게끔 되어 있었다. 생산성 없는 농지 대신 수공업에서 그 수익을 취했다는 점에서 성북둔은 새로운 형태의 수공업적 형태의 둔전이 되었다. 마전할 포목은 도성 안에 있는 목면(무명), 포(베), 저(모시) 세 가지 점포의 물건과 송도(개성)의 모시 전부에 해당하였는데 이 일은 영조 43년(1767) 가을부터 성북동 주민들에게 떨어졌다. 매 동(50필)마다 무명은 4냥, 베는 6냥 5전, 모시는 10냥씩 노임을 주게 했다. 박한 노임이었지만 일감이 많아 다행이었다. 이듬해 겨울부터는 성북동에 훈조막을 설치하고 숙련자를 보내 콩을 삶아 메주 담그는 법을 주민들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포백만으로는 수입이 부족하므로 연융대鍊戎臺 훈조계 주민들이 맡아 하던 일감을 일부 떼어 성북동 주민에게 할당한 것이다. 훈조막 1개소마다 솥 2개씩 걸고 일꾼 5명을 두어 교대로 콩을 삶게 하였다. 콩 1석당 노임은 6전으로 쳤으나 돈 대신 쌀 2말씩을 지급했다. 그리고 이 모든 주민들의 권리와 또 그에 따르는 의무를 문서화,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계약서를 작성해 보관하였는데 이것이 지금 남아 있는 「성북동포백훈조계완문절목」이라는 문서이다. 왕명을 믿고 도성 북쪽 황량한 골짜기로 들어와 살게 된 수십여 세대 성북동 사람들의 자생할 길이 이 문서에 밝혀져 있는 것이다. 메주 담그는 일은 왕조 말기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군영이 개편, 해체되면서 사라졌다고 해도 성안의 단골 점포를 대상으로 하는 마전일은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성북동 주민들의 생업으로 남아 있었다. 증언에 따르면 지금의 성북초등학교 앞 교차로가 마전터였으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성북동에 마전일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마전일은 규모가 크고 힘이 필요한 일이라 주로 남자들이 도맡아 했다고.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200년 가까이 마전일을 생계수단으로 하여 살았던 옛 성북동 사람들의 시름과 기쁨을 잘 보여주는 신문 기사이다. 마전질을 하게 되었다. 동소문 밖 성북동은 호수가 70여 호에 생업 되는 바는 다만 포백 장사뿐으로 날마다 문안 각 포백 단골을 삼아두고 포목을 가져와서 포백하는 것이 큰 생업인데 요사이 가뭄으로 인하여 동리 우물 29개소나 말라버리고 시냇물이 또한 말라서 포백을 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그 업을 폐지하다시피 전부 중지하고 그 대신 짚신과 기타 미투리를 삼아서 겨우 호구하기 때문에 동민의 생활난을 부르짖는 소리가 창천하던 바요 요사이로 가끔 비가 시작되어 다시 시냇물이 회복되었으므로 전과 같이 포백업을 시작하고 동민들은 매우 낙관을 하는 모양이라더라. ―『매일신보』 1917년 7월 5일자 지난 날 마전을 위한 물을 공급하던 성북천은 말끔히 복개된 지 오래이다. 굽고 경사진 도로를 따라가면서 지금도 발아래에 흐르고 있다는 시냇물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지만 헛된 일이다. 삶아진 천을 볕에 널었을 법한 물길 옆 널찍한 땅은 크고 작은 건물들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옛 금녕약국 앞 인도에 작은 화강암제 표석 한 개가 외로이 서서 예전 이곳이 마전터였음을 알려줄 뿐이다. 그 마저도 빼곡하게 세워둔 자동차들의 덩치에 가려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 옛날 자신의 방패막으로 삼기 위하여 변변한 논밭 몇 마지기 없는 곳에 사람들을 모집해서 살게 한 권력. 그 권력이 지도상에 그린 계획의 비할 데 없는 허술함을 현장의 사람들은 기나긴 배고픔 속에서 노동의 착실함으로 메워 가야만 했다. 도저히 살 수 없음과 그래도 살아야 함이라는 깊은 모순 속에서 성북동의 새벽이 밝았다. 성북동만 그러하랴. 그와 같은 막막함에 맞닥뜨리지 않고 일군 살림이나 마을이 어디 흔할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다시 옛 마전터 표석을 굽어보노라면 200년 전, 더운 여름날 솥에 불을 지피고 무거운 포목을 져 나르며 땀 흘리던 성북동 사람들의 일노래 한 자락 들려오는 듯하다. (백외준) ※ 덧붙이는 말 성북둔이 언제 폐지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901년(광무 5) 둔사를 허물었다는 대한제국 정부의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이전 어느 시점에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당 기록은 성북동농민 이낙현李洛賢이라는 사람이 내장원에 올린 소장訴狀으로 성북동 둔사 중 허물다 남은 7칸에 대해 재목 값을 내장원에 상납한 후 그 자리에 집을 짓게 해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하여 내장원은 ‘번거롭게 하지 말 것’이라는 답을 보내와 청원을 기각했다. 당시 관리기관이 황실 재정을 맡아보는 내장원이었던 것으로 봐서 성북둔터가 황실 소유지로 있었음이 확인된다.이후 성북둔 터는 1908년 통감부의 방침에 따라 인근의 선잠단 터가 국유지로 전환된 것과 시기를 같이해 국유지로 전환되었다가 어느 시점에 민간에 불하된 것으로 보인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40-50쪽
  • 윤취상은 말하기를, “성북(城北)은 낮고 평평하여 높은 봉우리에서 내려다보이는 것이 마치 어른이 아이를 안고 굽어보는 것과 같아서 진실로 적병이 여기에 웅거하게 되면, 아무리 높은 보루(堡壘)와 기병(奇兵)이 있다고 해도 힘을 쓸 데가 없을 것 같으니, 이는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곳으로, 구준(狗樽)과 백악(白岳) 사이에 4, 5개의 돈대를 설치한다면 안팎으로 서로 돕는 형세를 이루어 적병이 압도하는 걱정을 없앨 수가 있습니다. 안현(鞍峴)은 외로이 떨어져 있어 성원(聲援)해 줄 곳이 없기 때문에, 적병이 난무하고 물 긷는 길을 포위하여 차단한다면, 돈대의 수졸(守卒)들은 칼도 써보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니, 돈대를 설치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도성(都城)은 남북이 험준하여 산을 이용해서 성첩을 축조한 곳이 상당이 있었고, 전에 축조한 것도 완고(完固)한 데가 많았습니다. 동서는 땅이 평탄하고 성이 낮아 제일 허술하니, 수선(修繕)하는 역사(役事)는 의당 동서를 먼저하고 남북은 뒤에 해야 합니다.” - 숙종실록 39권, 숙종 30년 2월 15일 을유 1번째기사 1704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34
  • ○ 어영청 성북둔이 있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 18세기말부터 ‘북둔도화’라는 조어가 유행함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96쪽
  • 1. 정의 ○ 어영청(御營廳) - 조선후기 새로 편성한 중앙군인 5군영(五軍營) 중 왕을 호위하는 3군문(三軍門)의 하나 - 인조반정 이후 후금(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후금의 침공에 대비할 목적으로 창설된 어영군을 모체로 하여 창설 - 1704년(숙종 30), 훈련도감, 금위영 등과 함께 도성삼군문으로 편제되는 과정에서 한차례 개편 - 1751년(영조 27), ‘수성윤음’ 반포시 작성한 〈도성삼군문분계지도〉에 어영청이 담당한 구간 표시 - 순조 이후 장어영(壯禦營)·총어영(摠禦營) 등으로 바뀌었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폐지 ○ 성북둔(城北屯) - 둔(屯) : 조선시대 각 지방 주둔병의 군량을 자급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반급(頒給)하는 전답 - 어영청의 재정보충과 도성 동북쪽 방위를 위해 성북둔 설치 논의 - 1765년(영조 41) 영조의 명을 받아 어영청이 혜화문 밖 선잠단 옆에다 ‘성북둔(城北屯)’을 설치하고 둔사와 창고를 건립 -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기 어영청과 함께 폐지되었으며 1901년(광무 5)년 둔사를 훼철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71쪽
  • 2. 성북둔의 설치 목적 ○ 어영청의 재정 조달 - 영조 때 균역법(均役法)의 시행으로 어영청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역가(役價) 수입이 줄어든 대신 급대(給代)를 지급받게 됨 - 그러나 줄어든 역가 수입분에 비해 지급 받은 급대의 수입이 적었으므로, 이를 보충하기 위해 둔전을 늘려 어영청의 수입을 보장하고자 하였음 - 성북둔 역시 균역법 실시 이후 어영청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방편에서 신설 ○ 도성 방어 체제 강화 - 성북동 지역은 도성과 그 안의 궁궐과 인접해 있으면서 인가가 거의 없는 넓은 계곡 지형이므로 늘 도성 방어에 취약한 구간으로 지적되었음 - 위와 같은 취약점을 염려하여 숙종 연간 처음 성북동 지역의 군사시설 설치 논의가 있었는데 시행되지 않았음 - 1765년(영조 41), 영조가 영의정 홍봉한의 건의를 받아들여 혜화문 밖 선잠단에 둔을 설치하도록 명함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71쪽
  • 3. 성북둔의 운영 ○ 근무 인원 - 감관(監官) 1명, 서원(書員) 1명, 고직(庫直) 1명, 사환(使喚) 3명(총 6명) - 감관 : 성북둔의 책임자. 어영청 교련관 중에 1명을 임명(임기 1년) - 서원 : 서무 담당 - 고직 : 창고지기 - 사환 : 업무 보조 ○ 규모 - 전과 답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미아리에도 별도의 둔전을 두었음 - 각종 비용을 제외하면 어영청으로의 상납액은 30냥 가량(납부처는 군색) ○ 72쪽에 [표7] 성북둔의 규모(순조 10년, 1810)가 제시되어 있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72쪽
  • 4. 관련 자료 ○ 1765년(영조 41), 영조와 영의정 홍봉한의 성북둔 설치 논의 영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북성(北城, 북한산성) 주맥의 동북쪽에 빈 골짜기가 하나 있어 지면이 매우 평평하고 넓은데, 나무꾼들이 함부로 들어가 벌채하여 민둥산이 되어 나무가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일 수십 호의 인가를 두어 살게 한다면, 가히 도성을 수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박전(薄田) 약간 경(頃)이 선잠단 근처에 있는데, 군사(軍士)의 늠료(廩料)를 먹는 자로 하여금 그 땅에 살게 하되 그 밭을 경작하게 하고 그 세금을 감하여 주어 그들에게 생활을 정착하게 한다면, 가히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는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지형을 그려 진달하라고 명하였다. 홍봉한이 손가락으로 지점(指點)하며 조목조목 아뢰기를 자못 자세히 하매, 임금이 어영청에 창고를 설치하고 백성을 모집하라고 명하였으니, 곧 오늘날 성북창(城北倉)이었다. 창고가 성외에 있어서 한갓 도둑에게 빼앗길 염려가 있으며, 거민들은 땔나무를 하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가 없는데다가 창고의 저축미로 먹여 주기를 바라니, 소모되는 비용이 도리어 심하였다. — 『영조실록』 영조 41년(1765) 4월 17일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72쪽
  • ○ 1765년(영조 41), 영조와 영의정 홍봉한의 성북둔 설치 논의(승정원일기) 乙酉四月十七日申時, 上御資政殿。(중략) 鳳漢曰, 北城主脈補土之役, 今已了當, 鍊戎臺一局, 若使摠使, 一向盡心, 則別無可虞者。而以地勢言之, 戎臺在於北山之西北, 故肅靖門北東, 無以照管, 東村無賴樵採之類, 任意往來, 童濯無餘, 已不勝其痛駭。況其一帶長谷, 介在城外, 虛曠蕪廢, 所見可悶。自前已有募民入居之議, 而尙今未遑者, 全由於忽於遠慮, 視若餘事也。此是御廳分授處, 故御將爲之深憂, 常加料度, 昨日則親往而遍審, 方欲略略設施。此不過募聚民居於回抱之平地, 買給近處屯田, 設置若干倉穀, 使之資生而安接, 不欲煩諸朝家, 但自營門經紀, 而事係新創, 難於獨決, 往復於臣, 臣果力贊之。是不但環守都城之計, 實有與戎臺, 表裏聲勢之益, 使之及時措置, 以爲緩急相須之道, 何如? 上曰, 卿其取紙而指陳, 此誠好矣。使御廳卽爲擧行, 可也。所置之田, 爲營屯, 而居民將爲屯軍耶? 鳳漢曰, 自當如此, 而御廳有本牙兵, 而自廟堂定額, 今不必加其軍額, 就其元摠中移定, 則自可依其事目, 除雜役矣。上曰, 依爲之。(하략) — 『승정원일기』 영조 41년(1765) 4월 17일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72쪽
  • ○ 1779년(정조 3), 성북둔 근처에 잡은 호랑이 1마리 또한 어영청의 말로 아뢰기를 “혜화문 밖 성북둔 근처에서 중호 한 마리를 잡았으므로 이를 봉진하고자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본 영문에서 범을 잡은 사람들에게 상을 베풀도록 하여라.” 하였다. (又以御營廳言啓曰 惠化門外城北屯近處 中虎一頭捉得 封進之意 敢啓 傳曰 令本營門施賞) — 『승정원일기』 정조 3년(1779) 11월 3일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73쪽
  • ○ 1791년(정조 15), 성북둔에 별입직한 초계문신들의 활쏘기 성적 어영청이, 초계 문신이 습사(習射) 때 과녁을 맞힌 것에 대해 아뢰었다. 어영청이 아뢰기를, “성북둔(城北屯)에 별입직(別入直)한 초계 문신 서유문(徐有聞)은 오늘 습사 때 20순에 과녁을 맞힌 것이 35발이고, 김달순은 20순에 과녁을 맞힌 것이 51발이고, 한상신(韓商新)은 10순에 과녁을 맞힌 것이 15발이니, 모두 직소(直所)에서 나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여, 전교하기를, “김달순이 20순에 51발을 맞힌 것은 충분히 무변(武弁)보다 낫다고 할 만하다. 현재 문겸의 빈자리에 이미 김달순을 처분하여 활 쏘는 곳에는 서유구(徐有榘)만 남았다. 서유구는 변화될 수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조각할 수 없는 썩은 나무처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니, 오늘 또한 내보내도록 하라.”하였다. — 『국역 일성록』 정조 15년(1791) 10월 27일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73쪽
  • ○ 서울의 대표적 유상공간과 명물 - 북둔(北屯, 성북둔)의 도화(桃花, 복사꽃) ○ 서울의 유상지_경도잡지 필운대 행화(杏花), 북둔의 복사꽃, 흥인문밖 버들(楊柳), 천연정(天然亭) 연꽃, 삼청동 탕춘대(蕩春臺)의 수석(水石)이 술과 노래를 즐기려는 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도성의 둘레는 40리인데 이를 하루 만에 두루 돌면서 성 내외의 꽃과 버들을 감상하는 것을 좋은 구경거리로 여겼다. 이른 새벽에 오르기 시작하면 해질 무렵에 다 마치게 되는데 산길이 험하여 포기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弼雲臺杏花 北屯桃花 興仁門外楊柳 天然亭荷花 三淸洞蕩春臺水石 觴詠者多集于此 都城周四十里一日遍巡周覽 城內外花柳者爲勝 凌晨始登昏鍾可畢 山路絶險有委頓而返者 - 유득공,『경도잡지』 <풍속>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78쪽
  • ○ ‘북둔도화(北屯桃花)’의 명성 - 성북동포백훈조계의 조직으로 안정된 생업을 갖게 된 성북동 주민들은 집 주변 공지에 복숭아, 자두, 살구, 앵두 등 유실수를 심어 가꾸기 시작했는데 이는 성 안 시장에 내다팔기 위함이었음 - 4월(양력) 곡우를 전후해서 집 안팎에서 복숭아나무를 비롯한 여러 유실수들이 개화하였으므로 성북동은 영조 재위 말년~정조 즉위 초에 이르러서 도성 사람들의 대표적인 봄꽃 구경 장소로 널리 알려짐 → ‘북둔도화(北屯桃花)’라는 신조어 탄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78쪽
  • ○ 살구꽃, 복숭아꽃, 진달래꽃이 피는 봄소풍 장소 ㆍ북둔도화(北屯桃花): 혜화문을 나와 성벽을 끼고 서북쪽으로 2리쯤 서북쪽으로 나오는 곳으로 간송미술관과 성북초등학교 일대 ㆍ행화만발(杏花滿發): 성북정의 봄의 모습. 살구꽃 만발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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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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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화문
    분류: 장소, 유물
    시기: 조선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