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1933.08.01
인물 개인 문인
시인이다. 1958년 『현대시』에 「폐결핵」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시인 구상의 소개로 박고석을 알게 되었고 1959년부터 2년간 정릉에 있던 박고석의 집에 머물렀다.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와 민주화에 관심을 가져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고 문학을 통한 현실참여 운동을 벌이다 가택연금과 구속을 당하기도 하였다. 1986년부터 2010년까지 평범한 사람부터 역사적 인물까지 작품의 대상으로 삼은 『만인보』 30권을 발간하였다. 소설 『화엄경』, 『김삿갓』, 산문 『고은통신』, 전기 『이중섭평전』, 『한용운평전』 등 다양한 분야의 저서가 있다. 2018년 최영미 시인에 의해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었고, 고은 측에서는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였지만 항소심에서도 패소가 결정되었다.
성북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高銀
  • 이명칭: 고은태(髙銀泰, 본명), 일초(一超)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문인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근거자료 원문

  • 박고석이 정릉의 화실을 비워두고 원남동 건물 4층에 넓은 화실을 두고 거기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정릉은 완전히 내 차지였다. … 아직 나는 정릉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 박고석의 화실 한 채에는 두 개의 커다란 방이 있었다. 한 방은 한국일보의 주간부장 서인태가 쓰고 있었는데 그는 홍릉에서도 나와 함께 커다란 하숙방에서 살던 술친구였다. - 고은, 「나의 산하 나의 삶」 고은高銀(본명 고은태)은 1933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기 입산하였으나 《현대시》에 「폐결핵」으로 등단한(1958) 후 10년 만에 환속하고 문단에서 활동하였다.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와 민주화에 관심을 가져 1970년대‘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고 문학을 통한 현실참여 운동을 벌이다 가택연금과 구속을 당하기도 하였다. 1986년부터 2010년까지 등장인물 5천 6백여 명, 4천 편이 넘는 시를 엮어 『만인보』30권을 발간하였다. 소설 『화엄경』, 『정선아리랑』, 산문 『고은통신』, 『두 세기의 달빛』, 전기 『이중섭평전』, 『한용운평전』, 『고은전집』(총38권)등 1백 5십 권이 넘는 책을 냈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41쪽
  •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1958년 『현대시』에 시 「폐결핵」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출가 하여 10여 년을 승려로 지냈고, 문단 생활을 하면서 환속하였다. 역사 인식과 사회 비판 의식을 작품에 내세웠고, 민족과 민중의 삶을 아울렀다. 1986년부터 쓴 연작시 「만인보萬人譜」는 평범한 사람부터 역사적 인물까지 작품의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 2010년까지 30권으로 출판되었다. 1990년부터 6년 간 191회에 걸쳐 자전소설 「나의 산하 나의 삶」을 일간지에 연재하면서 1950~1970년대 문단과 문화예술인들의 삶과 교류를 기록하기도 했다. 소설 『화엄경』, 『김삿갓』, 시인 이상과 한용운, 화가 이중섭 평전, 산문과 시론 등 다양한 분야의 저서가 있으며,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43쪽
  • 이중섭과 절친했던 시인 구상의 소개로 박고석을 알게 된 고은은 1959년부터 2년 간 박고석의 집에 머물렀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59쪽
  • ○ 고은(高銀) - 시인의 삶 · 전북 군산 출생(1933~ ), “『만인보』의 시인” - 주목할 작품 · 고은은 1990년대 『동아일보』에 장기연재한 자전적 장편소설 「나의 산하, 나의 삶」에서 성북동과 관련된 일화들을 매우 많이, 자세히 소개 · 「나의 산하, 나의 삶」은 성북구 문인들에 대한 회고를 가장 폭넓게 소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성북동의 문학을 재구하면서 이 작품에 소개 · 수록된 고은과 주변 문인들의 행적을 자세하게 파악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음 · 고은, 「나의 산하, 나의 삶」, 『동아일보』, 1992~1995. ◈ 성북동의 문인들과의 다양한 교류를 다루고 있고 이태준, 김광섭, 이호철, 조지훈 등과의 성북동 교류생활이 그려져 있음. 이호철의 성북동 암자 생활 소개 (1992.12.27.)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5쪽
    고은이 「나의 산하, 나의 삶」을 연재한 곳은 『경향신문』이다.
  • 고은(1933~ ) : 전북 군산 출생. 고은(본명: 고은태, 법명: 一超)은 1952년 출가한 뒤 불교정화운동이 거세지던 1957년 북한산 일선사에서 짐을 풀고 공부했다. 고은은 자신의 법명인 일초(一超)의 ‘일’과 이 절을 창건한 도선국사의 ‘선(詵)’을 따 절 이름을 ‘일선사(一詵寺)’라 했다. 이 무렵 정릉에 사는 예술인들, 화가 한묵·박고석, 소설가 박경리 등과 교유했다. 1962년 환속한 고은은 이후 전국을 떠돌아 다니다 1967년부터 윤호영의 도움으로 정릉에 기거했으며 1970년 정릉 골짜기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다행히 예비군 훈련 때문에 의식불명의 신체가 발각되어 입원, 의식을 회복한 뒤 장기간 치료와 휴양을 하고 1971년 연희동으로 이사하였다. 상경 후 많은 문인, 화가 들과 교류가 있었으며 성북동도 중요한 만남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5쪽
    근거자료의 각주 89번의 내용이다. 고은이 1933년 9월 12일 『경향신문』에 게재한 「나의 산하, 나의 삶 <148>」의 내용을 참고해 볼 때 1967년 고은이 윤호영의 도움으로 거처를 옮긴 곳은 정릉이 아닌 홍릉이다.
  • 고은 1933~ 한국전쟁 이후 1952년 입산했으나 1958년 『현대시』에 「폐결핵」으로 등단, 10년 만에 환속하고 문단에서 활동하였다. 고은은 시인 구상의 소개로 박고석을 알게 되고, 그의 정릉 집에서 1959년부터 2년간 머물렀다. 박고석이 정릉의 화실을 비워두고 원남동 건물 4층 넓은 화실을 두고 거기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정릉은 완전히 내 차지였다. …… 아직 나는 정릉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 박고석의 화실 한 채에는 두 개의 커다란 방이 있었다. 한 방은 『한국일보』의 주간부장 서인태가 쓰고 있었는데 그는 홍릉에서도 나와 함께 커다란 하숙방에서 살던 술친구였다. - 고은, 「나의 산하 나의 삶」 우리 사회의 노동문제와 민주화에 관심을 가졌던 고은(고은태)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문학을 통한 현실참여 운동을 벌이다가 가택연금과 구속을 당하기도 하였다. 1986년 첫 권이 출간된 후 2010년까지 5천 6백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4천 편이 넘는 시를 엮어 30권으로 완성한 『만인보』를 발간하였다. 그 밖에도 소설 『화엄경』, 『정선아리랑』, 산문 『고은통신』, 『두 세기의 달빛』, 전기 『이중섭평전』, 『한용운평전』, 『고은전집(총38권)』 등 150권이 넘는 책을 내며 활발히 활동하였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119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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