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정 마을
장소 인문지리
정릉3동 정릉시장 일대에 밀양 손씨들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마을이다. 밀양 손씨 32세손인 손만기(孫萬琦) 형제가 터를 잡은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현재는 시조 이래 45대부터 50대 정도의 후손들이 약 20가구 거주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7월 그믐에 손만기의 묘에서 시제를 지낸다. 손가정 마을 사람들은 조선 후기까지 주변의 땅을 일궈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잃은 후에는 손가정과 청수동 골짜기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하거나, 석재를 다듬는 석공일을 하기도 했다. 정릉천 곳곳의 바위에는 돌을 깼던 흔적과 반야교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남겨 두었다. 현재 정릉천 근처 두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옆에는 손가정 터에 대한 유래가 적힌 표지석이 있다.
정릉동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10 : 밀양 손씨의 문중 모임, 손가정 노인정, 산신제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2 : 손가정 마을 사람들의 생업, 돌 일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13 : 어린시절 놀이, 고아원 건물과 주변 풍경 (2)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12 : 할머니의 구절판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11 : 앞으로 마을에서 하고 싶은 일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9 : 정릉 사람들의 한국전쟁 경험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8 : 청수장에 대한 기억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7 : 옛날 정릉의 교통편, 주변 시장, 이웃 친구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6 :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에 대한 기억, 어린 시절 간식거리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5 : 어린시절 놀이, 고아원 건물과 주변 풍경 (1)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4 : 명동 양품점 시절의 생활, 결혼의 계기가 된 사건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3 : 미아리에 있었던 외가, 인창중학교, 부모님의 결혼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1 : 여러 직업 생활과 요리를 시작한 계기
  • 손가정 인근 정릉천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10 : 밀양 손씨의 문중 모임, 손가정 노인정, 산신제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2 : 손가정 마을 사람들의 생업, 돌 일
  • 손가정 노인회 건물 마당
  • 손가정 노인회 전경
  • 손가정 노인회 건물 대문
  • 정릉천 버드나무
  • 손가정 내 큰 나무(2)
  • 손가정터 표석
  • 손가정 내 큰 나무(1)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13 : 어린시절 놀이, 고아원 건물과 주변 풍경 (2)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12 : 할머니의 구절판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11 : 앞으로 마을에서 하고 싶은 일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9 : 정릉 사람들의 한국전쟁 경험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8 : 청수장에 대한 기억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7 : 옛날 정릉의 교통편, 주변 시장, 이웃 친구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6 :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에 대한 기억, 어린 시절 간식거리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5 : 어린시절 놀이, 고아원 건물과 주변 풍경 (1)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4 : 명동 양품점 시절의 생활, 결혼의 계기가 된 사건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3 : 미아리에 있었던 외가, 인창중학교, 부모님의 결혼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1 : 여러 직업 생활과 요리를 시작한 계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孫哥亭
  • 이명칭: 손가장(孫家莊)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02709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308-2 일대 (솔샘로18길 35일대)

근거자료 원문

  • 혜화문을 나와 흥천사, 봉국사, 손가정, 경국사를 경유해 북한산으로 가는 길은 성 안 사대부들이 즐겨 찾는 유람길이었다. 이 중에서도 경국사 남쪽 손가정 마을은 바로 옆 계곡의 물과 바위가 ‘밝고 환하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풍광이 수려해 많은 사대부들이 여기에 머물러 시를 읊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86쪽
  • 정릉 토박이 밀양손씨들의 마을 손가정 정릉천을 따라 북한산 쪽을 바라보면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함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있다. 바로 정릉 토박이 밀양 손씨들이 터를 잡고 있는 마을 손가정이다. 1994년,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이루어진 「서울 토박이 찾기 사업」에서는 서울 토박이의 정의를 “대문 안과 문밖 10리 이내의 옛 한성에서 5대 이상 사는 후손들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정릉의 진짜 토박이 마을 손가정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마을에 집성촌이 형성되다 정확히 어느 시점에 어떠한 연유로 손가정에 마을이 형성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현재 토박이 마을 손가정에는 손씨와 왕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이곳 손가정에 손씨(孫氏)와 왕씨(王氏)를 귀양 보냈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손씨의 비율이 더 높았기 때문에 손가정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손가정 토박이 밀양손씨들은 정릉3동 정릉시장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밀양손씨 32세손(世孫)인 손만기, 손찬기, 손형기 삼형제가 터를 잡은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현재는 시조 이래 45대부터 50대 정도의 후손들이 약 20가구 거주하고 있으며, 일 년에 한 번 음력 7월 그믐에 손만기(孫萬琦)의 묘에서 시제를 지낸다. 19세기 전반에 작성된 「동국여지도」에는 북한산성 부근에 ‘손가정’이 기록되어 있고, 조선시대에 제작된 「도성도(都城圖)」에는 정릉천을 중심으로 밀집된 형태의 주거로 나타나 있다. 손가정은 손씨뿐만 아니라 다른 성씨들의 오래된 고향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릉3동 안에서 가장 일찍부터 주거지역을 이루며 사람이 거주한 곳이 손가장이다. 동쪽에서 제일가는 동네 조선시대 기록에 손가정은 손씨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손가장(孫家庄, 孫家莊)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옥(1760~1813)은 그가 남긴 「중흥유기(重興遊記)」에서 손가장을 “물 맑고, 경치 좋고 동쪽에서 제일가는 동네”로 평가하였다. 「중흥유기」에 의하면 손가정에는 귀래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흐르는 시냇물, 즉 정릉천 위에도 재간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풍경을 달리하는 손가정은 정릉천의 시원한 물소리와 조화를 이루고, 북한산 시원한 바람이 마을을 감싸는 “정릉의 물 맑고 경치 좋은 마을” 중 하나이다. 농사일하던 마을에서 돌일하는 마을로 밀양손씨들은 조선후기까지 손가정 주변의 땅을 일궈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다. 이들에게 농업은 생업의 기본적 수단이었고, 주변의 농경지는 삶의 터전이었다. 마을 주변에는 골짜기를 따라 계단처럼 생긴 ‘산골논’이 많았다. 봄이면 씨를 뿌리고 모를 심고, 가을에 추수를 하고 타작을 하는 모습은 손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타작하는 풍경을 감상하는 일은 점점 사라져갔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으로 많은 지주와 소작인들이 토지를 잃었다. 토지를 잃은 사람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영세소작인, 날품을 파는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땅을 잃은 정릉의 많은 주민들은 그나마 ‘돌일’을 하며 살 만했다. 손가정과 청수동 골짜기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하는 일을 하거나, 돌을 다듬어 석재를 다듬는 석공이 되기도 했다. 손가정의 주민들은 돌일을 하며 기술을 익혀 비교적 수입이 높은 편이었다. 정릉천 양쪽의 축대는 모두 손가정의 밀양손씨들이 공사를 맡아서 쌓은 것이라 한다. 정릉지역에서 더 이상 돌을 채취하지 않게 되고, 중장비가 사람을 대신하게 되면서 손가정 사람들도 자연히 ‘돌일’에서 다른 일들로 직업을 옮기게 되었고 현재는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하게 되었다. 현재 정릉에서 돌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정릉천 곳곳의 바위에 돌을 깼던 흔적과, 반야교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남겨 두었다. 반야교, 정릉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경국사 일주문 앞의 넓은 다리를 건너다보면 왼쪽으로 화강암을 쌓은 작은 돌다리가 있고, 절벽에는 “李元雨 永世不忘碑”라고 쓴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 옆에 있는 작은 돌다리인 반야교(般若橋)는 1932년 경국사에서 이원우(李元雨)의 시주를 받아 중수한 것이다. 이원우는 당시 황금정(현재 을지로)에 살던 부자였는데, 경국사에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정릉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반야교는 과거 돌일을 하며 생업을 유지하던 정릉 사람들의 땀이 역사가 된 곳이다. 손가정 느티나무(손가정 터) 북한산보국문역 1번 출구에서 나와 KEB 하나은행 사거리에서 보국문로 17길을 따라 가면 정릉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 정릉시장 쪽으로 걷다보면 청수하이츠빌라 맞은편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다. 나무 아래에는 평상이 있어 마을 주민과 정릉천을 산책하는 이들에게 쉼의 자리가 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손가정 터는 현재 정릉천 옆에 위치한 느티나무를 말하는데, 나무 옆에는 손가정 터에 대한 유래가 적힌 표지석이 있다. 주민들은 손가정 주변에 나무가 없었던 시절, 마을 입구에 우뚝 솟아있던 아름드리 정자나무를 기억하고 있다. 수령이 100년 정도라고 했으나, 손가정에 사는 80대 노인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아름드리나무가 있었다”고 했으니 100년은 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옛날 정자나무 옆에 살던 주민은 다달이 그믐날에 막걸리를 사다 놓고 고사를 지냈다. 나뭇가지에 줄을 매달고 그네를 뛰기도 했다.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되어 있는 손가정 느티나무는 형태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정릉의 주민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하고 있다. 옛 경신학교의 추억 일제강점기 손가정에는 경신학교가 들어서기도 했다. 경신학교는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정동에 창설한 학교로 종로구 연지동을 거쳐 1941년 정릉동으로 교사를 옮겼다. 1955년 혜화동으로 이전하기까지 약 14년간 정릉3동에 있었다. 경신학교는 연지동에 있던 1939년 3월 학교 경영권이 미국 선교회 재단으로부터 김흥양, 김원양, 최태영 선생에게 인계되었다. 11월에 최태영 선생이 9대 교장에 취임하고 연지동 교사를 처분하여 성북구 정릉동 산 90번지에 학교부지 2만 평을 매입했다. 그리고 1940년부터 1954년까지 정릉동 시대를 열었다. 1940년 정릉동에 학교 건물을 신축하고 1941년 3월 15일에 정릉동 교사로 이전했다. 1945년에 김규식 박사가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50년 6월 27일 한국전쟁으로 휴교했다. 1951년 부산 남부민동 산정에서 피난지 훈육소를 설치해서 경신학교의 맥을 잇던 중 1952년 2월 11일 주둔군(미군)의 실화(失火)로 정릉교사가 절반이 불타서 학적부, 졸업대장 등 중요 서류가 소실되었다. 이후 경신중학교가 있던 학교터에는 한옥이 지어졌다. 경신학교 터에 주택이 들어서고 그 흔적은 사라졌지만, 손가정에 잠시 머물렀던 경신학교에 대한 추억이 주민들의 기억의 한 조각으로 남아있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10-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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