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응성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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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유적
보문동에 위치한 한옥이다. 서양화가 손응성(孫應星)[1916-1979]이 거주하였다. 손응성은 강원도 평강 출생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현 배재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화를 입상시키며 등단했고, 일본 다이헤이요 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조카 최인호는 외삼촌인 손응성을 가리켜 평생 ‘조선의 빛깔과 영혼’을 추구한 사람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손응성은 친일행적을 보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미술부문에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다. 손응성은 1948년 이 집을 매입했고, 이후 1979년 사망할 때까지 약 30여 년간 이 집에서 살며 작품 활동을 했다. 이 집은 주변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옥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
보문동
  • 손응성 가옥
  • 손응성 가옥 표석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
  • 비고: 미상, 1948~1979년까지 손응성이 거주

주소

  • 주소: 02871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2가 87 (지봉로23길 4)

근거자료 원문

  • 주목해야 할 건축물 ② 손응성 가옥 보문역에서 보문사로 가는 길의 뒤편으로 규모가 있는 한옥이 남아있다. 이 집은 서양화가 손응성(孫應星, 1916-1979)이 살던 한옥이다. 손응성은 강원도 평강 출생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인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화를 입상시키며 등단했고, 일본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 유학하며 서양화를 공부했다. 홍익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미술문화회, 목우회 활동을 했다. 창덕궁의 비원을 그려 비원파의 창시자로 불리는 등 사실주의 풍경화와 정물화를 남겼으나, 타계할 때까지 한 번도개인전을 갖지 못했다. 소설가 최인호는 손응성 누이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며, 최인호는 한 산문을 통해 외삼촌인 손응성을 가리켜 평생 ‘조선의빛깔과 영혼’을 추구한 사람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손응성은 일제강점기말에는 단광회(丹光會)를 결성하고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 집단 창작에 참여하는 등의 행적을 보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다. 손응성은 1948년 이 집을 매입했고 이후 1979년 서거할 때까지 약 30여 년 간 이 집에서 살며 작품 활동을 했다. 이 집은 주변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옥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 이 가옥은 방형이 아닌 대지의 형상에 따라 ㄱ자형으로 대문채와 안채가 붙어있고, 대문채가 마당 바깥으로 두 번 꺾여 들어간 공간이 붙어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서쪽에서 대문을 진입하면 안쪽으로 마당이 있고, 마당 내부에는 큰 향나무가 서 있다. 저층의 한옥이 동남향을 하고 앉아 있으나, 보문로 가로변의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고립된 형태의 단층 한옥으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18-119쪽
    원문에는 손응성이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못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최인호가 쓴 에세이 「외삼촌 손응성 화백」을 근거로 나온 이야기이다. 하지만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손응성이 1944년 개인전을 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1944년 9월 26일 발행된 『매일신보』에도 1944년 9월 27일에서 10월 1일까지 5일간 화신백화점 7층에서 개인전을 열린다는 기사가 개재되어 있다. 따라서 손응성이 1944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는 것이 더 타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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