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산방
1933
서울특별시민속문화재
장소 유적
장소 상업시설
유물 건축물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1933년에 건물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933년 8월 구인회 결성 후 구인회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다. 이 집은 건물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건넌방, ‘공(工)자’형의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된 보통의 ‘ㄱ자’형 집과 비슷하나, 부엌이 뒤쪽으로 붙어 있어 앞쪽에 누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태준은 이곳의 당호를 '수연산방 「달밤」, 「돌다리」, 「코스모스피는 정원」, 「황진이」, 「왕자 호동」 등 문학작품 집필에 전념하였다.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된 집으로, 현재 수연산방이란 상호를 달고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1977년에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성북동
  • 수연산방
  • 2019 성북동 수연산방 전경(1)
  • 수연산방(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
  • 2019 성북동 수연산방 출입문(2)
  • 2019 성북동 수연산방 우측 본채
  • 2019 성북동 수연산방 좌측 별채
  • 2019 성북동 수연산방 이태준 표석
  • 2019 성북동 수연산방 출입문(1)
  • 2019 성북동 수연산방 전경(3)
  • 2019 성북동 수연산방 전경(2)
  • 수연산방
  • 지적도 : 성북동 246번지 일대, 1990년대
  • 수연산방
  • 상허 이태준 가옥(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1호)
  • 성북동 문학산책_수연산방

기본정보

시기

  • 시대: 일제강점기
  • 시기: 1933
  • 비고: 1946년까지 이태준이 거주

주소

  • 주소: 02837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 (성북로26길 8)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조선시대 많은 문인들이 북저동의 복사꽃을 보고 아름다운 산세와 골짜기의 계곡들을 노래했던 것처럼 성북동은 근대 문인들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문인들이 모이는 산속의 작은 집’이라는 뜻의 수연산방은 당시 내로라하는 한국의 문인들이 아름다운 풍경과 수려한 산세를 품은 성북동에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성북동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 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무어 바깥이 컴컴한 걸 처음 보고 시냇물 소리와 쏴 하는 솔바람 소리를 처음 들어서가 아니라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이날 저녁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주었다.’ <달밤> 이태준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24쪽
  • 1900년대에 지은 주택으로 규모가 작은 별장형 주택으로 보이나 살림집으로 축소된 듯하다. 보통의 한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고 있는데 반해,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 안에 배치되어 있다. 1900년대의 개량 한옥이 갖는 요소들을 잘 지니고 있는 중요한 민속자료이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항목명: 수연산방
  • [ 43 ] 수연산방과 상허 이태준 1. 수연산방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1호) ○ 1932년 10월 26일 성북동 248의 수연산방 부지 매입 ○ 1933년도 신축 추정 - 이태준의 생질 서울대 김명렬 교수(영문과)의 “나의 외삼촌 상허 이태준”이라는 글에 따르면, - 고향 철원의 고가를 헐어 그 재목으로 성북동집을 지었으며, 상심루(賞心樓)라는 초당을 따로 짓고 집필하였다 함(상심루는 현재 수연산방의 좌측에 위치 추정) ○ 1933년 8월 구인회 결성 후 구인회의 주요 활동무대 역할 -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이태준, 조용만, 김기림, 정지용(후에 박태원, 이상, 박팔양, 김유정, 김환태 보충) ○ 현재는 이태준의 외종손녀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 걸고 찻집으로 운영 중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45쪽
  • ▫ 서울시 민속자료 제 11 호 성북동 이태현가 城北洞李太賢家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조래혁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동 248 지정연월일 : 1977. 3. 17. 이 집은 앞에 내를 두고 뒤에 동산을 낀 터에 서남향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막돌로 쌓은 화장담에 일각대문(一角大門)이 세워져 있다. 집터 안에는 북동쪽에 몸채 하나만 배치되고, 행랑채 등의 별채는 없다. 1900년대에 지어진 건평 23.2평의 이 건물은 서남향한 ‘공자(工字)’ 형의 집으로 평면의 간살이는 보통 ‘ㄱ자’ 형 집과 비슷한데 다만 부엌이 뒤쪽으로 붙어있어 앞쪽에 누마루를 설치한 것이 다르다. 즉 중앙 2칸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의 남쪽에는 한 칸 크기의 안방을 만들고 안방 앞에는 작은 한 칸 크기의 누마루가 놓였으며, 뒤에는 칸 반 크기의 부엌이 있다. 대청의 북쪽에는 한 칸 크기의 건넌방이 배치되고 대청과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가 길게 놓였으며, 건넌방 뒤에는 한 칸 크기의 뒷방이 있다. 기단(基壇)은 다듬돌로 줄을 맞춰 쌓은 네벌대이고 초석은 긴 육면체로서 위가 약간 좁은 네모뿔대 모양인데 면을 접었다. 기둥은 약간 흘림을 가진 각주(角柱)로 면을 접었으며 도리는 납도리로서 역시 면을 접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이 집은 별장형 주택의 작은 집이면서도 모든 것이 알차고 예쁘장하게 의장이 되어 있으며, 특히 감나무, 사철나무를 주류를 한 이 집의 정원은 민가정원(民家庭園)의 맛을 듬뿍 느끼게 한다. 뒤쪽을 약간 덧달아서 개축한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한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는데 이 집은 규모는 작지만 사랑채와 안채를 집약시킨 집으로 1900년대의 개량 한옥이 갖는 요소들을 잘 지니고 있다. * 참고자료 : 문화재관리국, ≪문화유적총람≫, 1997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1987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46-147쪽
  • ○ 문화재 가옥의 활용 - 상허 이태준 가옥의 활용 방안 ·이태준 가옥은 성북동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나, 민간이 소유하고 있음. ·문화재 안내판과 표지석 등을 설치해놓고 있으나, 성북동 문화의 핵심 거점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음. ·본채 일부를 전시공간으로 재현하거나, 장기적으로 고증과 문화재위원회 협의를 통해 사라진 상심루를 재현하여, 이태준 전시관을 운영하도록 함. ·상심루 관련 자료(정밀실측조사보고서)와 공간 활용계획 235쪽에 [그림120] 상허 이태준 가옥 활용계획이 제시되어 있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35쪽
  • ○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문화유적 문화유적 03 상허 이태준 가옥(수연산방) 정취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전통한옥 - 상허 이태준 가옥은 <문장강화>와 <무서록>을 쓴 상허 이태준의 고택을 손녀가 찻집으로 낸 곳이다.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 온전히 쉴 수 있는 여유가 묻어나 있다. 집의 규모가 작아 많은 손님이 찾을 수 없는 게 아쉽지만, 본채에는 사랑방, 안방, 마루까지 모두 6개의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 라일락 나무 아래의 둥그런 벤치와 테이블이 운치를 더한다. 가장 인기 있는 자리는 사랑방의 바깥 쪽자리. 원래 방 높이보다 한 단 정도 높게 되어 있고 문에는 한지 대신 유리를 끼워 밖이 잘 보이게 했다. 여기 앉아 있으면 담장 너머로 북악산 자락이 건너 보인다. 전통 차와 함께 옛 선인들의 정취를 느끼며 조용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5쪽
  • ○ 조용했지만 뜨거웠던 저항의 근거지 성북 - 역시 같은 해인 1933년, 소설가 이태준도 성북동에 수연산방을 짓습니다. 그는 1947년 월북하기 전까지 가족들과 함께 거주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심우장과 수연산방은 1930년대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도심 속 역사의 공간이자 일제강점기 뜨겁게 글을 써내려갔던 두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났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0쪽
  • 1. 성북동의 문화재 ○ 서울시 민속문화재 -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1호 : 상허 이태준 가옥 -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로26길 8(성북동, 수연산방) - 지정일 : 1977.03.17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1쪽
  • ③ 城北洞 이태현 家 城北洞 248번지에는 19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는 건평 23.2평, 대지 120평 규모의 韓式주택이 있어 1977년 3월 17일에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다. 趙來赫씨 소유로 되어 있는 이 건물은 西南向의 工字形집으로 평면의 간살이는 보통 ㄱ字形집과 비슷한데 다만 부엌이 뒷쪽으로 붙어 있어 앞쪽에 누마루를 설치한 것이 다트다. 즉 중앙 2間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의 남쪽에는 한칸 크기의 안방을 만들고 안방 앞에는 작은 한칸 크기의 누마루가 놓였으며 뒤에는 칸반 크기의 부엌이 있다. 대청의 북쪽에는 한칸 크기의 건너방이 배치되고 대청과 건너방 앞에는 툇마루가 길게 놓였고 건너방 뒤에는 한칸 크기의 뒷방이 있다. 뒷방과 건너방 外側 벽에는 처마밑을 내 쌓아서 벽장을 만들었고 대청뒤의 쪽마루 역시 처마를 내 달아서 뒷방과 부엌 변소를 연결하는 복도로 삼고 있다. 건너방 앞에 있는 돌마루를 亞字문양의 난간이 설치되고 밑으로 아궁이가 있다, 基壇은 다듬돌로 줄을 맞춰 쌓은 네별대이고 礎石은 긴 육면체로서 위가 약간 좁은 네모뿔대 모양인데 면을 접었다. 기둥은 약간 흘림을 가진 角柱로 면을 접었으며 도리는 납도리로서 역시 면을 접었다. 처마도리와 중도리는 사괴맞춤을 하였으며 종도리는 장혀를 덧붙이고 헛창방을 보내서 그 사이에 소로를 끼웠다. 구조는 中央間을 一高柱五王樑形式으로 처리하였고 양측면 꺾은 間은 맞거리三樑形式으로 처리하였다. 보머리는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대공은 板臺工으로 하였으며 홑처마집이다. 이 집은 규모가 작은 別莊形 주택을 살림집으로 축조한 듯하다. 작은 집이면서도 알차고 예쁘장하게 意匠 이 되어 있으며 감나무, 사철나무를 主流로 한 庭園은 民家庭園의 맛을 듬뿍 느끼게 한다. 뒷쪽을 약간 덧 달아서 개축한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된 집이다. 朝鮮時代의 韓屋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고 있는데 이 집은 규모는 작지만 사랑채와 안채를 한채에 집약시킨 집으로 1900년대의 改良韓屋이 갖는 요소들을 잘 지니고 있는 중요한 민속자료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13-714쪽
  • 5. 이태준의 눈으로 본 1930년대 성북동 단편소설을 잘 써 ‘한국의 모파상’이라고 불리기도 한 상허 이태준은 1933년 성북동에 집을 짓고 자리를 잡는다. 일제강점기 말, 잠시세상을 피해 고향인 철원에 내려가기도 했지만, 이태준은 월북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 성북동에서 지냈다. 성북동 집은 이태준에게 단순한 안식처만이 아니라 작품을 집필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의 집 이름 ‘수연산방壽硯山房’은 벼루가 다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집이 단순한 안식처가 아니었듯 성북동도 그에게 그냥 사는 마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이 있던 지역은 이런 주택단지는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1936년 초반 ‘대경성계획’을, 후반에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발표하는데 성북동이 포함된 돈암지구는 그중 주택지구로서 1차 사업대상지로 선정되었다. 당시의 계획도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그것을 보면 성북동은 현재 마전터가 있는 간송미술관 앞까지만 개발이 계획되어 있었다. 즉 수연산방 지역은 개발에서 제외된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태준은 그의 단편소설 「달밤」에서 성북동에 온 소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수연산방 앞에는 성북천이 물소리를 내며 흘렀고 ‘솔바람이 쏴―하고’ 불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23-124쪽
  • 간송미술관 앞을 지나면서 도로는 2차선으로 좁혀지고 ‘쌍다리’ 라고 하는 곳이 나온다. 덕수교회(이종석 별장),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구 본원, 성북구립미술관, 수연산방(상허 이태준 가옥) 등이 마주보고 있는 이 지역은 복개 전 성북천 위로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아래쪽은 돌다리, 위쪽은 나무다리였다. 지금은 쌍다리 돼지불백 이란 상호를 단 식당만이 옛날 지명을 알려 준다. 큰길과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구 본원(현 피정의 집)을 잇는 복자교는 1968년에 준공되었다. 성북구청은 2014년 이 다리 아래쪽으로 약 100미터 구간에 있던 가옥과 상가를 철거, 쌍다리지구 특화거리 조성을 준비하고 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77-178쪽
  • 상허 이태준 고택도 지방민속자료(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19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는 한옥이다. 이 집은 규모가 작은 별장형 주택이지만 평면의 모양 등으로 보아 살림집으로 지어진 것 같다. 작은 집이면서도 모든 것이 알차고 예쁘장하게 꾸며져 있으며, 특히 감나무・사철나무를 주류로 한 정원은 민가 정원의 맛을 듬뿍 느끼게 한다. 그리고 뒤쪽을 약간 덧달아서 개축한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된 집이다.
    양보경, 1998, (사연이 깃든) 성북의 유래, 45-46쪽
  • 상허 이태준가옥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1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6길 8 이 고택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1904-?)이 29세였던 1933년에 지어 ‘수연산방壽硯山房’ 이란 당호를 붙이고, 1946년 월북할 때까지 거주하였던 곳이다.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에 수록된 「목수들」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터의 내력 등이 묘사되어 있다. 집을 지은 1933년은 이태준이 정지용, 김유영, 이종명 등과 함께 구인회를 결성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그는 수연산방에서 『달밤』, 『손거부』, 『돌다리』 등의 단편과, 『황진이』, 『왕자호동』 등의 장편을 남기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특히 『달밤』과 『손거부』 등은 성북동이 무대가 된다. 수연산방은 앞에 내를 두고 뒤에 동산을 낀 터에 서남향으로 자리 잡았으며 막돌로 쌓은 화장담에 일각대문이 세워져 있다. 집터 안에는 북동쪽에 몸채 하나만 배치되고, 행랑채 등의 별채는 없다. 건평은 23.2평이며 ‘공자工字’형의 건물로 정면4칸, 측면4칸으로 구성된 보통의 ‘ㄱ자’형 집과 비슷하나, 부엌이 뒤쪽으로 붙어 있어 앞 쪽에 누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기단은 다듬돌로 줄을 맞춰 쌓은 네벌대이고, 초석은 긴 육면체로써 위가 약간 좁은 네모뿔대 모양인데 면을 접었다. 기둥은 약간 흘림을 가진 각주로 면을 접었으며 도리는 납도리로서 역시 면을 접었다. 정원은 감나무, 사철나무로 주류로 하여 다양한 화초가 심어져 있어 민가 정원의 맛을 듬뿍 느끼게 한다. 뒤쪽을 약간 덧달아서 개축한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한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는데 이 집은 규모는 작지만 사랑채와 안채를 집약시킨 집으로 1900년대의 개량 한옥이 갖는 요소들을 잘 지니고 있다. 현재 수연산방이란 상호를 달고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찾아가는 길 버스 : 1111번, 2112번 버스를 이용,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정류장에 서 내려 도보 2분. 03번 마을버스를 이용, 쌍다리 정류장에서 내려 도보로 3분. 지하철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 6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22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70-271쪽
  • 상허 이태준의 고택 상심루는 그의 외손녀가 ‘수연산방’이라는 다원을 경영하여 문인들이 즐겨 찾고 있다.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의 문인으로 호는 상허이다. 일본 동경상지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5년 『시대일보』에 단편 「오몽녀」를 발표하면서부터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1933년에 박태원・이효석・정지용 등과 ‘구인회’를 조직하고 작품 창작에 전념했다. 8・15광복 때까지 주목할 만한 상당한 양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단편에 「달밤」 「까마귀」 「복덕방」 「무연」 「사냥」 「영월영감」 「돌다리」 「토끼이야기」 등이 있고, 장편에 「제2의 운명」 「화관」 「불멸의 함성」 「청춘무성」 「왕자호동」 「황진이」 등이 있으며, 광복 직후에 발표된 중편 「해방전후」와 장편 「사상의 월야」 등이 있다. 주인공의 성격 묘사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던 그는, 한편으로 토착적인 생활의 단면을 작품에 부각시키는 구성법을 최초로 시도함으로써 한국 현대소설에 기법상의 한 틀을 마련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 밖에도 유명한 저서로 『문장강화』가 있으며, 특히 탁월한 미문가로서 주로 예술적 정취가 짙은 단편에 능했다. 광복 후에는 좌익 문화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에 월북한 후에 ‘조선작가동맹’의 위원장이 되기도 했으나, 『소년기행』 등의 저서로 북한 당국의 박해를 받아 사회적 활동이 정지당한 뒤로 소식불명이 되었다. 그 동안 규제문인으로 그의 작품이 묶여 있다가, 1988년 7월 19일 당국의 조치로 해금되었다.
    양보경, 1998, (사연이 깃든) 성북의 유래, 46-47쪽
  • 서울 성북구 성북동 248번지. 이곳에 있던 초가를 헐고 기와집을 지어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 수연산방과 간송미술관 1. 수연산방-상허 이태준과 구인회 1933년은 이태준에게 특별한 해였다. 그는 그해 성북동 골짜기 개천 옆에 집을 짓고 수연산방이라 이름 지었다. ‘벼루硯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壽 글을 쓰는 집’이란 의미였다. 잠시 집을 비운 일도 있긴 하지만 수연산방은 월북할 때까지 그의 보금자리였다. (중략) 이렇게만 보면 이태준은 성북동에 살았을 뿐 활동은 주로 종로에서 한 셈이다. 하지만 〈표-1〉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태준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1933년 성북동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성북동에서 『아담의 후예』, 『달밤』, 『어머니』, 『색시』, 『손거부』, 『장마』, 『토끼 이야기』, 『가마귀』, 『황진이』, 『밤길』등 그의 많은 대표작을 집필했다. 뿐만 아니라 『달밤』, 『손거부』, 『장 마』, 『토끼이야기』 등 많은 작품에서 성북동을 소재로 삼았다. 『무서록』에도 성북동을 소재로 하는 수필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성북동 수연산방은 이태준에게 가장 적합한 글쓰기 장소였을지 모른다. 구인회 회원들도 성북동을 찾았다. 수연산방을 나와 성북천을 건너 조금만 오르면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걸어서 5분도 되지 않을 거리이다. 이 별장에서 이태준은 구인회 회원인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단순히 그 한번뿐만 아니라 구인회 회원들은 자주 성북동을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수연산방은 일종의 별장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런 좋은 곳을 손님들이 가만히 두었을리 없다. 특히 돈암동에 살던 박태원은 해방 이후 수연산방과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한다. 이태준의 월북으로 수연산방은 ‘이태준 가옥’이라는 이름조차 잃었다. 이름을 찾은 것은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된 1988년의 일이다. 이태준은 이곳 수연산방에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집의 당호에 어울리는 활동이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함께 했다. 가끔 찾아오는 벗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지금은 찻집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집이지만 주인 잃은 수연산방은 어쩌면 그곳에 앉아 글 쓰던 주인을 지금도 기다릴지 모른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29-235쪽
  • 수연산방은 ‘문인들이 모이는 산속의 작은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벗을 찾아 장안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모여들면서 수많은 인연이 얽히던 곳, 성북동 수연산방은 상허 이태준의 집이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이태준(1904~?)은 유년기 추억이 있는 고향을 떠올리며 서울 외곽에 집을 지었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248번지. 이곳에 있던 초가를 헐고 기와집을 지으면서 수연산방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수연산방은 밖에서부터 콩돌을 박은 화장담과 일각 대문, 담 너머로 쏟아진 나뭇가지가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수연산방은 도포 입고 갓을 쓴 목수들이 손수 만든 연장으로, 기일을 정하지 않고 천천히 여유롭게 지은 한옥이라 그런지 기품이 있는 동시에 사람을 아늑하게 품어주는 맛을 지녔다. 이태준은 월북하는 그날까지 아내와 더불어 수연산방에서 살았다. “불빛이 없던 성북동, 달빛이 깁을 깔아 놓은 듯했다.” 당시 이 근방에는 포도원이 많았다. 이곳 포도밭에 가던 일을 쓴 이효석의 글이 있다. 이태준의 글에도 이곳은 포도밭이 있는 지역으로 묘사된다. 성북동은 그때도 시정 번잡에서 떨어져 한적하니 은거하기 좋은 곳이었던 듯하다. - <서울 북촌에서 4. 성북동 세집>, 김유경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59-60쪽
  • 수연산방은 1933년에 지은 개량한옥으로 약 120평의 대지로 이루어져 있고 서남향으로 난 건물이 두 채로 된 집이다. 수연산방의 현판은 이태준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 탁본을 떠 직접 만들었다. 각 건물에 이름을 붙였는데, 기와집에는 문향루, 죽향루라는 현판을, 초가집에는 상심루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태준이 각종 책과 자료를 두고 작품을 썼던 상심루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에는 커다란 삿갓모양으로 둥글게 짚을 얹은 초당이었다. 마루와 방 한 칸을 들였는데, 방 안에는 조촐한 탁자 위에 백자와 청자, 난을 놓고, 벽에는 서화를 걸어서 감상하였다고 한다. 이 방에서 이태준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지냈다. 창 밖에는 파초와 모란과 자목련이 피어 있었다. 월북한 후 이태준의 행적은 묘연하다고 전해진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만 있을 뿐,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그 누구도 확실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생애 가장 행복했고 따뜻했던 시절을 보낸 성북동 수연산방(성북구 성북동 248), 상허 이태준에게 그곳은 그리움의 한 자락으로 오래 기억되었을 것이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62쪽
  • 수연산방은 서남향으로 된 건물이 두 채로 된 집이다. 수연산방의 현판은 이태준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서 탁본을 떠 직접 만들었다. 각 건물에 이름을 붙였는데, 기와집에는 문향루(聞香樓), 죽향루(竹香樓)라는 현판을, 초가집에는 상심루(賞心樓)라는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태준이 각종 책과 자료를 두고 작품을 썼던 상심루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에는 커다란 삿갓모양으로 둥글게 짚을 얹은 초당이었다. 마루와 방 한 칸을 들였는데, 방 안에는 조촐한 탁자 위에 백자와 청자, 난을 놓고, 벽에는 서화를 걸어 놓고 감상하였다. 이 방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지냈다. 창 밖에는 파초와 모란과 자목련을 심었다.
  • 우리나라 현대 소설의 바탕을 이룬 상허 이태준尙虛李泰俊, 1904~?이 1933년 짓고, 1946년 북한으로 가기 전까지 살던 집이다. 이곳에서 『달밤』, 『가마귀』, 『복덕방』 같은 작품을 썼다. ‘수연산방壽硯山房’이란 이름을 짓고 살며 느낀 소소한 행복과 이야기를 수필로 남겼다. 내가 조선집을 지음은 이조 건축의 순박, 중후한 맛을 탐냄에 있음이라. 그런 전통을 표현함에는 돈보다 일에 정을 두는 이런 구식 공인工人들의 손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임으로 … 이런 노인들은 왕십리 어디서 산다는데 성북동 구석에를 해뜨기 전에 대어 와서 해가 져 먹줄이 보이지 않아야 일손을 뗀다. 젊은이들처럼 재빠르진 못하나 꾸준하다. 남의 일 하는 사람들 같지 않게 독실하다. 그들의 연장은 날카롭게는 놀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내키는 대로 힘차게 문지른다.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아무리 요새 시쳇時體집이라도 얼마쯤 날림기는 적을 은근히 기뻐하며 바란다. (「목수들」) 조선시대 건축의 순박함을 닮은 나이 든 목수 다섯 사람이 지은 안채는 목수의 우직함과 상허의 안목이 깃들어 있다. 집을 짓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문향루聞香樓, 죽향루竹香樓, 상심루賞心樓라고 쓴 편액을 걸어 두었다. 지금까지 전하는 상허가 쓰던 책장과 곁에 두고 보던 해석海石이 이 집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태현가’로 지정(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1호, 1977)되었던 명칭이 납월북작가 해금조치로 1988년 제 이름을 찾았다. 지금은‘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유족이 찻집을 운영하며 개방하고 있다.
  • 이 집은 상허 이태준이 29세였던 1933년에 지어 ‘수연산방(壽硯山房)’ 이란 당호를 짓고, 1946년까지 거주하였던 곳이다. 이태준은 이곳에서 「달밤」, 「돌다리」, 중편 「코스모스 피는 정원」, 장편 『황진이』, 『왕자호동』 등의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에 수록된 「목수들」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터의 내력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집은 앞에 내를 두고 뒤에 동산을 낀 터에 서남향으로 자리 잡았으며, 막돌로 쌓은 화장담에 일각대문(一角大門)이 세워져 있다. 집터 안에는 북동쪽에 몸채 하나만 배치되고, 행랑채 등의 별채는 없다. 1933년에 지어진 건평 23.2평의 이 건물은 서남향한 ‘공자(工字)’형의 집으로 평면은 보통 ‘ㄱ자’형 집과 비슷하지만, 부엌이 뒤쪽으로 붙어 있고 앞쪽에 누마루를 설치한 것이 다르다. 즉, 중앙 2칸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의 남쪽에는 한 칸 크기의 안방을 만들고, 안방 앞에는 작은 한 칸 크기의 누마루가 놓였으며, 뒤에는 반 칸 크기의 부엌이 있다. 대청의 북쪽에는 한 칸 크기의 건넌방이 배치되고, 대청과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가 길게 놓였으며, 건넌방 뒤에는 한 칸 크기의 뒷방이 있다. 기단은 다듬돌로 줄을 맞춰 쌓은 네벌대이고, 초석은 긴 육면체로서 위가 약간 좁은 네모뿔대 모양인데 면을 접었다. 기둥은 약간 흘림을 가진 각주(角柱)로 면을 접었으며 도리는 납도리로서 역시 면을 접었다. 정면 4간, 측면 4간의 이 집은 별장형 주택의 작은 집이면서도 모든 것이 알차고 예쁘장하게 의장이 되어 있다. 특히 감나무, 사철나무로 주류를 한 이 집의 정원은 민가 정원의 맛을 듬뿍 느끼게 한다. 뒤쪽을 약간 덧달아서 개축한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한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는데, 이 집은 규모는 작지만 사랑채와 안채를 집약시킨 집으로 1930년대의 개량 한옥이 갖는 요소들을 잘 지니고 있다. 현재는 개조되어 찻집으로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 文壇小新聞 B記者 李泰俊氏. 中央日報學藝部長으로 活動하는外에 最近書齋로 草堂三間을 建築하였는데 勿驚 建築費가 一金四白圓也라고 일홈은 草堂三間이지만은 氏의書齋이니만큼 古典味, 東洋味를加하야 기둥은 江原道에서 「무푸레」나무를 求하여다가 껍질도버끼지않고 自然그대로 使用하고 礎石도 牛耳洞에서 怪石을求하여다가 놓았는데 一見 古色이 蒼然하고 네귀에는 풍경을달아 文字 그대로 옛날선배의 草堂한가지라고.
    청조사, 1934, 신인문학 창간호, 80쪽
    문단소신문 B기자 이태준 씨. 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활동하는 외에 최근 서재로 초당삼간을 건축하였는데 놀랍게도 건축비가 일금 사백 원이라고. 이름은 초당삼간이지만은 씨의 서재이니만큼 고전미, 동양미를 가하야 기둥은 강원도에서 ‘물푸레’나무를 구하여다가 껍질도 벗기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사용하고 초석도 우이동에서 괴석을 구하여다가 놓았는데 일견 고색이 창연하고 네 귀에는 풍경을 달아 문자 그대로 옛날 선비의 초당 한가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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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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