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문
1396
사적
장소 유적
유물 건축물
삼청로11길 40(삼청동 산 2-49)에 위치한 한양도성의 사대문 중 하나이다. 속칭 북문(北門)으로 불렸던 숙정문은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같이 1396년(태조 5)에 건설되었다. 숙정문은 풍수지리상 북쪽이 음(陰)과 물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평소에는 ‘음란한 풍조’를 방지하기 위해 폐쇄하였다 가뭄이 들면 문을 열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1976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도성의 성곽을 복원할 때 이 문의 문루를 건축하고 「숙정문」이란 편액을 걸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건으로 일반의 출입이 차단되었다가 2006년 4월 다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성북동
  • 대한뉴스 제1105호 '삼청지구 성곽, 숙정문 복원공사 완공'
  • [다큐사랑방] 숙정문(최규채 감독)
  • 숙정문(정면)
  • 숙정문(정측면)
  • 숙정문 현판
  • 숙정문
  • 구문팔자타령(九門八字打鈴) (십이(十二)) 숙정문(肅靖門)
  • 오백년(五百年)의 역사(歷史)가진 동소(東小),수구(水口) 양문철훼(兩門撤毀)
  • 예조가 기우제 등의 일로 아뢰다
  • 대한뉴스 제1105호 '삼청지구 성곽, 숙정문 복원공사 완공'
  • 숭례문은 열고 숙청문은 닫고, 인정과 파루에 다시 북을 치게 하다
  • 날이 가물어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어 저자를 옮기다
  • 숙청문을 막고 새 문을 만들게 하다
  • 한재 때문에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어 저자를 옮기며 북을 못치게 하다
  • 이종례가 북청문 밖의 도둑을 잡아 아뢰다
  • 예조가 숙정문을 닫기를 계청하다
  • 예조가 친제와 토룡 석척으로 비를 비는 것 등에 대해 아뢰다
  • 예조가 한재 끝에 장마가 계속되니 숙정문을 닫고 숭례문을 열 것을 청하다
  • 가뭄으로 숙정문을 열다
  • 가뭄이 심해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다
  • 춘당대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숭례문은 닫고 숙정문은 열어 3일 만에 그치게 하다
  • [다큐사랑방] 숙정문(최규채 감독)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肅靖門
  • 이명칭: 숙청문(肅淸門), 북문(北門)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   유물 건축물

시기

주소

  • 주소: 03049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 2-49 (삼청로11길 40)
  • 비고: 성북동과 경계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사적
  • 지정일: 1963.01.21
  • 비고: 한양도성

근거자료 원문

  •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그리고 북대문? 숙정문 국보1호인 숭례문과 흥인지문, 돈의문은 서울로 통하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문들이지만 ‘북대문은 어디에 있지?’라고 할 정도로 북대문, 바로 숙정문은 우리에게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서울의 북쪽 대문인 숙정문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과 비슷하게 과거 통행이 적고 주로 닫아두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정북 쪽 문을 숙정문이라 하는데, 위에 집 지은 것(문루)이 없으며 닫아둔 채 다니지 않는다.’함은 숙정문 이용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풍수지리학 상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여서 길을 다니지 않도록 하여 보존한다 해서 소나무를 심어 폐쇄하였다고 한다.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숙정문의 위치가 산속 깊이 음방에 있어 이를 열어둔다면 도성의 부녀자들이 음란해지기 때문에 닫았다’고 한다. 항상 굳게 닫혀 있던 숙정문도 특별한 경우에는 그 문을 열었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숙정문은 북쪽 음에 해당하여 가뭄이 들면 문을 열어 음을 기운을 살리고 남쪽 숭례문을 닫아 양의 기운을 조절했다. 비가 많이 오는 때에는 숙정문을 닫아 음의 기운을 끊는 역할을 하였다. 연산군 때 숙정문의 위치를 약간 동쪽으로 옮겨 지금의 자리가 되었다. 현재 숙정문의 모습은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문루가 있었음을 고증해 복원하였으며, 북쪽으로 통하는 서울의 4대문으로 활짝 열려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15-16쪽
  • 城北洞 계곡 막바지에는 본래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肅靖門이 있었다. 속칭 북대문이라고 하는 숙정문은 건립된 지 곧 폐쇄되는데, 그 이유는 풍수지리상으로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보다 근본적 이유는 도성으로의 출입문으로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도성에서 의정부, 포천, 원산 등으로 가는, 혹은 반대로 경원가도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로서 숙정문을 통과하려면 성북동 골짜기로 한참 돌아가야 한다. 이에 대하여 혜화동과 삼선동을 잇는 東小門을 이용하면 빠르고 편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동소문을 주로 이용하였고, 숙정문을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이로 인하여 숙정문이 폐쇄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0-391쪽
  • ⑤ 肅靖門 성북동 계곡 막바지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都城四大門(東大門, 崇禮門, 西大門, 蕭靖門)의 하나인 속칭 北門이라 하는 숙정문이 있다. 서울의 正北에 위치한 이 문은 처음에는 肅淸門이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肅靖門으로 개칭되어 中宗이후의 역대 王朝實錄에 모두 肅靖門으로 기록되고 있다. 四小門의 하나인 彰義門과 함께 楊州와 高陽으로 왕래하는 통로로 이용되기도 한 이 문은 다른 도성의 문과 같이 太祖 5년(1396)에 창건 되었다. 太宗實錄 13년 6월조에 의하면 “地理상으로 보아서 國都의 藏義洞門(彰義門)은 觀光坊 東嶺(薦靖門)의 길과 함께 景福宮의 좌·우쪽 팔이니 길을 열지 말아서 地脈을 완전히 보존해야 된다”는 풍수학자 崔揚善의 건의에 따라서 이 두 문을 닫고 통행을 금지하였다. 다만 旱災가 심할 때는 肅靖門을 열고 崇禮門을 닫았으며 장마가 심하면 이 문을 닫고 崇禮門을 여는 풍속이 전하였으니 그것은 太宗 16년 (1416) 禮曹에서 마련한 祈雨節目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서, 旱災가 심하면 먼저 宗廟·社稷과 名山·大川에 기우제를 거행하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아니하면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어 市場을 옮기고 人定과 罷漏를 알리는 鐘樓의 종을 치지않고 錚을 치고, 비가 오면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닫으며 그 외의 모든 것을 환원하였다. 이것은 북은 陰이요 남은 陽인 까닭에 旱災 때 陽을 억제하고 陰을 부양하는 陰陽五行思想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李圭景의 『五洲衍文長箋散鎬』에 따르면,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長安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게 되었다는 俗說이 있는데 이것도 숙정문이 陰方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있었던 듯하다. 이 숙정문은 燕山君 10년(1504) 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동쪽인 지금 자리로 移建하였는데 이 때는 石門만 세우고 門樓는 세우지 아니한 듯하다. 1975년 서울특별시에서 門樓를 복원할 때에 虹霓로 된 石門만 있었느냐 아니면 門樓도 있었느냐 하는 문제로 수차례의 토론을 거친 후, 太祖 때 건축할 때는 있었다는 점에 의하여 門樓를 복원하고 肅靖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21-722쪽
  • 1864년 大院君 執政이후 景福宮을 중건할 때 지대가 낮아 기울어져 가는 東大門을 중건함과 동시에 都城무너진 곳도 보수하였으나 開港이후 서울의 都城은 파괴 일로를 걷게 되었다. 肅淸門은 景福宮의 主山인 白嶽山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고 있는 都城의 北門으로서 이 門도 다른 都城의 문과 같이 太祖 5년(1396)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그 18년 후인 太宗 13년(1413) 에 風水學生 崔揚善이 白嶽山 東嶺과 西嶺은 景福宮의 양 팔과 같으므로 東嶺에 있는 肅淸門과 西嶺에 있는 彰義門을 함께 폐쇄해야 한다고 上言하여 이에 따라서 肅淸門은 항상 닫아놓고 통행을 금지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 肅淸門은 崔揚善의 건의가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폐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그것은 肅淸門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白嶽山의 山脈으로 山이 높고 험해서 통행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山을 넘으면 또 北漢山脈이 앞을 막고 있으므로 이 門을 통과하여 다른 데로 연결되는 도로가 없었다. 이 門을 통과하여 오른쪽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京元街道로 연결이 되나 京元街道는 肅淸門에서 훨씬 남쪽에 있는 惠化門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 惠化門은 거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니 京元街道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쉽고 편리한 惠化門을 이용하지 않고 불편한 肅淸門을 이용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폐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旱災가 심할 때는 肅淸門을 열고 崇禮門을 닫았으며 장마가 심하면 이 門을 닫고 崇禮門을 여는 풍속이 전하였으니 그것은 太宗 16년(1416) 禮曹에서 마련한 祈雨節目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서, 旱災가 심하면 먼저 宗廟·社稷과 名山·大川에 祈雨聚를 거행하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아니하면 崇禮門을 닫고 肅淸門을 열며 市場을 옮기고 人定과 罷漏를 알리는 鐘樓의 종을 치지 않고 錚을 치고, 비가 오면 崇禮門을 열고 肅淸門을 닫으며 그 외의 모든 것을 환원하였다. 이것은 北은 陰이요 南은 陽인 까닭에 旱災 때 陽을 억제하고 陰을 부양하는 陰陽五行思想에서 나온 것이다. 李圭景의 「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肅淸門을 열어 놓으면 長安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俗說이 있는데 이것도 肅淸門이 陰方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肅淸門은 燕山君 10년(1504)에 본래의 위치에서 약간 동쪽으로 移建하였는데 이때에는 石門만 세우고 門樓는 세우지 아니한 듯하다. 그러나 1975년 서울特別市에서 門樓를 복원할 때에 虹霓로 된 石門만 있었느냐, 아니면 門樓도 있었으냐 하는 문제로 수차에 걸쳐 전문가들의 토론이 있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太祖 때 건축할 때는 있었다는 것에 의하여 門樓를 복원하였다. 그런데 이 肅淸門이 어느 때 肅靖門으로 기록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中宗實錄이후에는 모두 肅靖門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새로 세운 門樓에는 肅靖門이라는 懸板을 걸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3-84쪽
  • ▫ 비지정 숙정문 肅靖門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동 삼청터널 위에 자리한 숙정문은 남대문・동대문・서대문과 함께 서울 성곽 4대문의 하나로 속칭 북문(北門)이었다. 서울의 정북에 위치한 이 북문은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되어 중종(中宗) 이후의 실록에는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과 함께 양주(楊州)와 고양(高陽)으로 왕래하는 통로로 이용되기도 한 이 문은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같이 태조 5년(1396)에 창건되었다. 이 문은 연산군 10년(1504)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동쪽인 지금 자리로 이건했는데 이때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로 된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세우지 않은 듯하다. 1975년 서울시에서 무너진 문루를 복원하려고 할 때 석문만 있었느냐 아니면 문루도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토론을 거쳐, 태조 때 문루가 건축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를 복원한 뒤 숙정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조선 초의 기록을 보면 풍수설과 음양설에 따라 숙정문을 닫아 두었거나 열어 놓기도 했다. 그 예로 태종 13년(1413) 6월에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풍수지리학 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서(上書)를 전달하자, 마침내 이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했다. 그 후 태종 16년(1416)에는 기우절목(祈雨節目)을 만들어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으며, 비가 많이 내리면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게 했다. 즉 가뭄이 심하면 먼저 종묘・사직과 명산(名山)・대천(大川)에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남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어 놓는다. 그리고 시장(市場)을 옮기고 보신각의 종을 치는 대신 징을 치게 했다. 이는 북은 음(陰)이요, 남은 양(陽)인 까닭에 가물면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설에서 나온 것이다. 예종 때의 기록에도 몹시 가물면 종로의 시장을 구리개(현 을지로 입구)로 옮기고, 남대문을 닫은 다음 북문, 즉 숙정문을 열게 한 뒤에 기우제를 지냈다고 했다. 한편 조선시대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게 되었다고 소개했다. 이것도 숙정문이 음방(陰方)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있었던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상원(上元: 음력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이 전해 온다고 했다. 이는 숙정문 부근의 자연풍경이 아름다워 도성의 사녀(士女)들이 자주 이곳을 찾아와 놀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오래도록 비가 오면 숭례・흥인・돈의・숙정문에 나가서 비가 개이기를 비는 제사인 영제(禜祭)를 지냈다. 조선시대 선조 때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을 보면 숙정문 밖 한 바위틈에서 액체가 흘러나오는데 맑을 때는 마치 막걸리 빛 같고 진할 때는 떡과 같아서 사람들이 다투어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숙정문 밖의 쌀바위[米岩] 전설이 남아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하루 세 차례 씩 1되 가량의 쌀이 나왔는데 나무꾼 노인이 욕심이 생겨 이 바위에 지키고 앉아 쌀이 나오는 대로 자루에 담아 가득 채우기를 한 달 가량 계속 했더니 쌀 대신 끈적끈적한 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 참고자료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56-158쪽
  • 성북동 계곡 아래에서 산등성을 따라 올라가면 사대문의 하나인 숙정문, 속칭 북문이 있다. 숙정문은 처음에는 숙청문이었는데 중종 이후부터 역대 왕조실록에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숙정문은 1504년(연산군 10)에 동쪽으로 약간 이전시켰고, 1976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도성의 성곽을 복원할 때 이 문의 문루를 건축하고 「숙정문」이란 편액을 걸었다. 숙정문은 도성 사대문의 하나이지만 많은 수난을 겪어 왔다. 이 문이 건립된 지 18년 후인 1413년(태종 13)에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가 있자, 이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숙정문의 사용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폐쇄하여도 도성 출입에 큰 불편은 없었을 것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서울의 숙정문을 항상 닫아 두는 것은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부녀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이 문을 닫아 두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숙정문이 음방, 즉 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북은 음이요, 남은 양인 까닭에 가뭄 때는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한다. 이에 관련해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는 풍속이 1416년(태종 16)부터 있었고, 장마가 지면 숭례・흥인・돈의・숙정 4문에 나가서 영제라는 비 개이기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 『동국세시기』에는 “상원(음력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하 수 있다”는 말도 전해 온다.
    양보경, 1998, (사연이 깃든) 성북의 유래, 43-44쪽
  • 城北洞계곡 막바지에는 본래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肅靖門이 있었다. 속칭 북대문이라고 하는 숙정문은 건립된 지 곧 폐쇄되는데, 그 이유는 풍수지리상으로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보다 근본적 이유는 도성으로의 출입문으로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도성에서 의정부, 포천, 원산 등으로 가는, 혹은 반대로 경원가도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로서 숙정문을 통과하려면 성북동 골짜기로 한참 돌아가야 한다. 이에 대하여 혜화동과 삼선동을 잇는 東小門을 이용하면 빠르고 편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동소문을 주로 이용하였고, 숙정문을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이로 인하여 숙정문이 폐쇄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0-391쪽
  • 삼청터널 위쪽에 위치한 숙정문은 서울성곽의 4大門의 하나로 北門이라 하는데 中宗 이후에는 肅靖門으로 기록되고 있다. 肅靖門은 건립된지 18년 후 太宗13년(1413) 에 風水地理學上 景福宮의 양팔이 되는 彰義門과 肅靖門을 통행하는 것은 地脈을 손상시킨다는 上書가 있자, 마침내 이 門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太宗16년(1416) 부터 가뭄이 심하면 肅靖門을 열고 南大門을 닫는 풍속이 있었으니 이는 北은 陰이요 南은 陽인 까닭에 가뭄 때 陽을 억제하고 陰을 부양하는陰陽五行說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리하여 「五洲衍文長箋散稿」(卷6) 에 보면 서울의 肅靖門을 항상 닫아두는 것은 이 門을 열어 놓으면 長安의 婦女子가 浮亂해지므로 항상 門을 닫아 두었다는 俗說도 있다. 이것은 肅靖門이 陰方 즉 女子의 方位에 있는 까닭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東國歲時記』에 보면 上元(음력 정월 대보름) 전에 民家의 부녀자들이 세번 肅靖門에 가서 놀면 그 해의 災厄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이 전해 온다고 하였다. 이는 肅靖門 부근의 자연풍경이 아름다워 都城의 士女들이 자주 이곳을 찾아와 놀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오래도록 비가 오면 崇禮, 興仁, 敦義, 蕭靖 4門에 나가서 榮祭라는 비 개이기를 비는 제사를 거행하였다. 朝鮮時代 宣祖 때 이수광의 『芝峰類說』 災異部에 보면 肅靖門 밖 한 바위틈에서 액체가 흘러 나오는데 맑을 때는 마치 막걸리빛같고 진할 때는 떡과 같아서 사람들이 다투어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숙정문 밖의 쌀바위(米岩)전설이 남아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하루 세차례씩 1되 가량의 쌀이 나왔는데 나뭇군노인이 욕심이 생겨 이 바위에 지키고 앉아 쌀이 나오는 대로 자루에 담아 가득 채워 가지고 한 달 가량 계속 했더니 쌀대신 끈적끈적한 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62-763쪽
  • ○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성북구의 명소 성북구의 명소 86 38년 만에 시민들에게 공개되는 비경 -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과 함께 서울 성곽 4대문의 하나인 북문. 양주와 고양으로 왕래하는 통로로 태조 때 축성되었으며 태종13년(14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이 풍수지리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려 한 때 숙정문이 폐쇄되고 통행이 금지되기도 했다. 1968년 무장 공비가 침투한 1·21사태 이후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었다가 38년 만에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로 이어지는 약 1.1Km 구간이 1차 개방되어, 미리 신청한 사람들은 안내원과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46-147쪽
  • 숭례문(崇禮門)은 열고 숙청문(肅淸門)은 닫고, 인정(人定)과 파루(罷漏)에 비로소 다시 북을 치게 하였다. -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 6월 23일 경진 3번째기사 1427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4
  • 날이 가문다고 하여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청문(肅淸門)을 열고, 저자를 옮겼다. -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 윤4월 23일 갑진 3번째기사 1428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4
  • 전교하기를, “숙청문(肅淸門)을 막고 그 오른편에 새 문을 만들라.”하였다. -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7월 25일 계축 6번째기사 1504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4
  • 숭례문(崇禮門)을 폐쇄하고 숙청문(肅淸門)을 열어 저자를 옮기며 북을 치지 못하게 하니, 이는 한재 때문이었다. - 중종실록 8권, 중종 4년 6월 3일 계해 3번째기사 1509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4
  • 포도장(捕盜將) 이종례(李宗禮)가 아뢰었다. “신이 북청문(北靑門) 밖의 도둑을 추포(追捕)하였는데, 모두 도망하여 숨고, 한 사람이 화살에 맞아 죽어 머리를 베어 왔습니다.” - 중종실록 10권, 중종 4년 12월 29일 병진 6번째기사 1509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4
  • 예조(禮曹)가 계청(啓請)하기를, “다음달 초1일부터 숭례문(崇禮門)을 열고 숙정문(肅靖門)은 닫고서, 격피고(擊皮鼓)는 도로 예전에 있던 시장의 그 자리에 갖다 두도록 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 중종실록 48권, 중종 18년 6월 29일 무진 2번째기사 1523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4
  • 예조 판서 윤인경(尹仁鏡)이 아뢰었다. “사직에는 이미 섭행했고, 종묘에는 연(輦)을 치우고서 가마를 타고 나오시어 재계하는 별궁에서 치재하시다가 비로 인해 정지하셨으니, 비록 이번에 친제하시더라도 번거롭지 않을 듯합니다. 또 지금의 토룡석척(土龍蜥蜴)이나 원통한 옥사를 심리(審理)하는 것이나 해골을 덮어주고 시체를 매장해 주는 것이나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청문(肅淸門)을 열어놓는 것과 같은 일들은, 토룡으로 비를 부르고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어놓고 사람의 해골을 묻어주고 항아리에 석척·사의를 담아놓고 비를 기원하고 옥사를 즉시 처결하고 의옥(疑獄)을 잘 분별하여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풍운뇌우단에서 친제를 거행하시려는 것은 성탕(成湯)이 상림(桑林)에서 비를 빌고 송 인종(宋仁宗)이 교외에서 친히 비를 빈 것과 같은 아름다운 뜻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조종조에는 비록 한재를 만나더라도 친제한 때가 없었으므로 예관(禮官) 만으로 의논하기는 곤란하니, 대신들과 의논하심이 어떻겠습니까?” - 중종실록 84권, 중종 32년 4월 26일 갑술 2번째기사 1537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4
  • 예조가 아뢰기를, “날씨가 가물면 남문은 닫고 북문을 열며 피고(皮鼓) 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음(陰)을 부지(扶持)시키고 양(陽)을 억제하는 뜻입니다. 지금 한재(旱災) 끝에 장마가 개지 않아서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으니, 전례에 따라 숙정문(肅靖門)을 닫고 숭례문(崇禮門)을 여소서.”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 명종실록 23권, 명종 12년 7월 17일 무진 2번째기사 1557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5
  • 가뭄이 극심했기 때문에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청문(肅淸門)을 열었다. - 선조실록 10권, 선조 9년 5월 4일 병신 1번째기사 1576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5
  • 가뭄이 심하여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정문(肅靖門)을 열었으며, 시장을 옮겼다. 상이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를 옮기고 감선 철악(減膳撤樂)하였다. - 선조실록 18권, 선조 17년 5월 2일 정축 1번째기사 1584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5
  • 예조에서 아뢰기를, “춘당대(春塘臺)에서 석척동자(蜥蜴童子)가 기우제를 지낼 때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정문(肅靖門)을 열어 3일 만에 그치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 영조실록 58권, 영조 19년 5월 16일 무술 1번째기사 1743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5
  • 금위영(禁衛營)에서, “이전에 훈련 도감(訓練都監)이 도성의 내산(內山)과 외산(外山)을 나누어 소나무 채벌을 금지하던 자내(字內)는 금위영과 어영청(御營廳)이 나누어 맡아 관리하여야 합니다. 금위영의 경우 외산을 맡아 2패(牌)가 사현(沙峴) 서쪽에서 홍제원(弘濟院) 다리가 있는 대천(大川)부근 동쪽까지, 3패가 홍제원 다리가 있는 대천부근 서쪽에서 양철평(梁鐵坪), 말흘산(末屹山), 정토(淨土), 가좌(加佐) 동쪽 성산리(城山里)까지 관리하게 하고, 어영청의 경우 내산은 1패가 숙정문(肅靖門) 삼청동(三淸洞) 냇가 서쪽 북악에서 창의문(彰義門) 대로(大路) 동쪽까지, 2패가 창의문 대로 서쪽에서 돈의문(敦義門) 북쪽까지, 외산은 1패가 사현 이북으로 서곡강(西曲江)까지, 남쪽으로 안현(鞍峴)의 제1, 제2, 제3봉(峯) 안쪽까지 나누어 맡아 관리하게 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 고종실록 19권, 고종 19년 10월 21일 갑술 2번째기사 1882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5
  • ○ 1960~7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 숙정문의 복원 서울시가 문화재 보존사업의 하나로 벌이고 있는 서울 성곽복원 계획의 1차 구간인 삼청 지구(창의문∼숙정문∼성북동 뒷산)와 숙정문 복원공사가 21일 준공됐다. 서울시가 지난해 9월15일 공사비 3억4천8백26만원을 들여 착공, 13개월 만에 완공된 삼청 지구 성곽은 총 길이 1천9백94m로 성곽복원과 함께 홍예석만 남아 있던 서울의 정북문인 숙정문도 완전 복원됐다. (1976.10.2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7쪽
  • ○ 연혁 - 1396년(태조 5) : 도성의 북문으로서 숙청문(肅淸門) 건립 - 1413년(태종 13) : 풍수학생 최양선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성의 통행을 금함 - 1416년(태종 16) : 가뭄이 심해지자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어둠 - 1504년(연산군 10) : 원래 위치에서 약간 동쪽으로 옮겨 세웠는데 이때 홍예문만 세우고 문루는 얹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 - 1523년(중종 18) : ‘숙청문(肅淸門)’ 대신 ‘숙정문(肅靖門)’이란 명칭이 처음 『실록』에 등장 - 1968년 :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 - 1976년 : 문을 복원하고 편액을 걺 (글씨: 박정희 대통령) - 2006년 : 4월, 일반에 개방 ○ 주요 사항 - 【풍속】조선왕조에서는 가뭄이 심할 때에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것은 음양오행사상에 기원을 둔 것으로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인 까닭에 가뭄이 심할 때 양을 억제하기 위함이었음 - 【설화】쌀바위[米巖] 전설 : 숙정문 밖에 있던 바위로서 일정량의 쌀이 나왔는데 이것을 발견한 나뭇꾼 노인이 쌀을 가져가 걱정 없이 지내다가 어느날은 욕심이 생겨 자루에 가득 채워 돌아왔는데 그 후 쌀 대신 물만 흘러나왔다는 이야기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60쪽
  • ○ 관련 자료 - 가뭄이 심할 때 숙정문을 열어두는 풍속 날이 가문다고 하여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청문(肅淸門)을 열고, 저자를 옮겼다. (以旱閉崇禮門開肅淸門 徙市) — 『세종실록』세종 10년(1428) 윤4월 23일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60쪽
  • 날이 가물어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어 저자를 옮기다 날이 가문다고 하여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청문(肅淸門)을 열고, 저자를 옮겼다. 『세종실록』 권40, 세종 10년(1428 무신 /명 선덕(善德) 3년) 윤4월 23일(갑진) 3번째기사
    기우제의 시작
  • 숭례문은 열고 숙청문은 닫고, 인정과 파루에 다시 북을 치게 하다 숭례문(崇禮門)은 열고 숙청문(肅淸門)은 닫고, 인정(人定)과 파루(罷漏)에 비로소 다시 북을 치게 하였다. 『세종실록』 권36, 세종 9년(1427 정미 /명 선덕(宣德) 2년) 6월 23일(경진) 3번째기사
    기우제의 마무리
  • 극심한 가뭄으로 기우하는 일에 관해 전교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근일 가뭄이 극심해서 비를 바란 지가 오래인데 비가 올 듯하면서 오지 아니하니 매우 걱정스럽다. 기도(祈禱)하는 일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내일 오관산(五冠山) 등에서 기우(祈雨)한 다음에 형편을 보아서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정문(肅靖門)을 열고 피고(皮鼓)를 치지 말고, 저자를 옮기는 등의 일도 거행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금년에는 무(巫)·맹(盲) 및 소동(小童)의 기우를 아직 거행하지 않았으니 또한 전례를 상고해서 아울러 거행할 것으로 예조에 이르라." 『명종실록』 권23, 명종 12년(1557 정사 / 명 가정(嘉靖) 36년) 6월 24일(을사) 5번째기사
    기우제의 절차
  • 춘당대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숭례문은 닫고 숙정문은 열어 3일 만에 그치게 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춘당대(春塘臺)에서 석척 동자(蜥蜴童子)가 기우제를 지낼 때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정문(肅靖門)을 열어 3일 만에 그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영조실록』 권58, 영조 19년(1743 계해 / 청 건륭(乾隆) 8년) 5월 16일(무술) 1번째기사
    기우제의 절차
  • 예조가 기우제 등의 일로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금년에 한재가 꼭 파종 시기에 닥쳤고 망종(芒種) 절기가 내일(來日)인데 이미 추수(秋收)할 가망이 없어 사정이 민망하고 절박하게 되었으니 기우(祈雨)하는 일을 불가불 일체 거행해야 하며, 폐문 천시(閉門遷市)하고 북을 치지 못하게 하는 일들을 속히 거행해야 합니다. 또한 재변이 이처럼 절박한 시기에는 이전에는 대신을 보내 종묘 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중신 및 내신을 나누어 보내 기우하는 의식이 있었으니 지금도 그 사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춘당대(春塘臺) 못가에서의 석척 기우(蜥蜴祈雨)057) 는 오는 21일에, 맹무 동자 기우(盲巫童子祈雨)는 오는 25일에 거행하고, 별도로 대신을 보내 종묘 사직에 제사하는 의식과 중신 및 내신을 나눠 보내 기우하는 의식은 속히 거행하며 경복궁에서의 석척 기우와 폐문 천시하고 북을 치지 못하게 하는 일들은 우선 일기(日氣)를 보아서 차차 거행할 것이니 일시에 다 거행할 수 없다." 하였다. 『명종실록』 34권, 22년(1567 정묘 / 명 가정(嘉靖) 46년) 4월 19일(갑진) 1번째기사
    기우제의 절차
  • 예조가 친제와 토룡 석척으로 비를 비는 것 등에 대해 아뢰다 예조 판서 윤인경(尹仁鏡)이 아뢰었다. "사직에는 이미 섭행했고, 종묘에는 연(輦)을 치우고서 가마를 타고 나오시어 재계하는 별궁에서 치재하시다가 비로 인해 정지하셨으니, 비록 이번에 친제하시더라도 번거롭지 않을 듯합니다. 또 지금의 토룡석척(土龍蜥蜴)이나 원통한 옥사를 심리(審理)하는 것이나 해골을 덮어주고 시체를 매장해 주는 것이나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청문(肅淸門)을 열어놓는 것과 같은 일들은, 토룡으로 비를 부르고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어놓고 사람의 해골을 묻어주고 항아리에 석척·사의를 담아놓고 비를 기원하고 옥사를 즉시 처결하고 의옥(疑獄)을 잘 분별하여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풍운뇌우단에서 친제를 거행하시려는 것은 성탕(成湯)이 상림(桑林)에서 비를 빌고 송 인종(宋仁宗)이 교외에서 친히 비를 빈 것과 같은 아름다운 뜻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조종조에는 비록 한재를 만나더라도 친제한 때가 없었으므로 예관(禮官) 만으로 의논하기는 곤란하니, 대신들과 의논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중종실록』 권84, 중종 32년(1537 정유 / 명 가정(嘉靖) 16년) 4월 26일(갑술) 2번째기사
    기우제 절차의 의미
  • 성문을 열고 저자를 환원하고, 사신으로 온 왜인들은 관원을 명하여 공궤하게 하다 삼공이 아뢰기를, "봄 여름의 가뭄에는 숙정문(肅靖門)을 열고 숭례문(崇禮門)을 닫으며 피고(皮鼓)를 치지 않고 징을 사용하는 것은, 양기(陽氣)가 강성하기 때문에 음기(陰氣)를 붙잡아 세우고 양기를 억제하려 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이미 가을철로 들어와 음기가 기세를 부리는 때이므로, 숭례문을 닫고 징을 치는 것은 사리에 어그러질 듯합니다. 더구나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중추(仲秋)에 춘령(春令)420) 을 사용하면 가을비가 내리지 않고, 하령(夏令)을 사용하면 그 나라가 가문다.’ 했습니다. 단지 비를 비는 일만 하고, 숙정문을 여는 것이나 숭례문을 닫는 것과 피고를 치지 않는 등의 일은 정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이번에 추장의 사송(使送)으로 온 사람에게는 관원을 명하여 잔치를 내리시면 되고, 부득이 보시기로 하면 왕궁(王宮)에서 인견(引見)하시는 것이 가합니다. 왜인(倭人)을 공궤(供饋)하는 일 때문에 법가(法駕)421) 를 갖추고 다른 대궐로 행행(行幸)하시는 것은 사체에 방해로울 듯싶습니다. 또한 듣건대, 이 왜인들이 객관(客館)에 있을 적에 건방지고 오만한 말을 많이 하여 폐단이 매우 적지 않았다는데, 지금 동래(東萊)와 웅천(熊川) 고을 등의 수령들 【동래 현령 노보세(盧輔世)·웅천 현감 신포(辛抱) 등을 왜인들 대우를 잘못한 것 때문에 잡아다가 추고(推考)했다.】 을 잡아다가 추고하고 있지만 죄가 있는지 죄가 없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대저 왜인들의 선척을 척량(尺量)할 적에 분명하게 단속해서 하면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게 되고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따라주면 좋아하는 것은 곧 그들이 언제나 가지는 마음입니다. 이번에 만일 이런 것 때문에 수령들의 죄를 다스릴 경우, 다음에 수령된 사람들이 과연 모두 현명하다면 공정을 지키고 사곡하지 않겠지만, 만일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면 그들이 물고 늘어질까 싶어 일체 왜인들이 하려는 대로 따르고 국가의 법은 지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 그 사람들이 일로(一路)와 객관(客館)에서 한 짓을 보면 건방지고 오만함이 막심하니, 심상한 예절로 보셔야 하고 예를 갖추어 대우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대신들이 아뢴 말이 지당하니, 성문을 열고 저자를 환원하여 즉시 전대로 하도록 하라. 객인(客人)들을 접견하는 일도 대신들이 아뢴 말대로 관원을 명하여 공궤하게 하라." 『중종실록』 권62, 중종 23년(1528 무자 / 명 가정(嘉靖) 7년) 8월 1일(경자) 1번째기사
    기우제 절차의 의미
  • 함경도(咸鏡道)는 야인(野人)과 이웃하여 있고 또 번호(藩胡)도 있어, 조정에서는 예부터 방어(防禦)하는 일을 중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남북 병사(南北兵使)와 북도(北道)의 대소 수령(守令)은 모두 무부(武夫)를 가려서 보내는 것이 예(例)였다. 더구나 조정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수령이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이 오로지 가혹한 징수와 혹독한 형벌을 일삼았고, 백성을 초개(草芥)같이 여겼다. 그래서 백성도 또한 수령을 ‘낮도둑’이라 지목하여 원수같이 여겼다. 간혹 문관(文官)을 가려서 보내기도 하나 백성들의 기대에 걸맞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북도 시골 사람으로 서울에 처음 온 자가 있었는데, 동소문(東小門)으로 들어와서 성균관(成均館) 앞길에 이르러서는 같이 온 사람에게, “여기는 어느 고을 읍내(邑內)이기에 관사(官舍)가 이같이 높고 넓은가?” 하고 물으니, 같이 온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모르는가? 여기는 읍내가 아니라, 조정에서 ‘낮도둑’을 모아서 기르는 곳이다” 하였다. 이 말이 비록 너무 감정이 북받쳐서 한 말로 그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듣기에 또한 괴이하다. 『송와잡설(松窩雜說)』 「송와잡설(松窩雜說)」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81
  • 17일 이른 아침에 동소문(東小門) 밖의 백성의 집에 나가 있었는데, 또 금부(禁府)에 모두 모이라는 명이 있었다. 색승지(色承旨) 성운(成雲)이 와서 전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시종하는 신하로 상하가 마음을 같이하여 지극히 좋은 정치를 기약하였다. 너희들의 마음이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에 너희들이 조정의 일을 처치하는 것이 지극한 과오가 있어 인심을 불평하게 하였기 때문에 마지못하여 죄를 준 것이니, 나의 마음도 어찌 편하겠느냐. 죄주기를 청하는 대신도 어찌 사적인 의도가 있겠는가. 너희들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내가 밝지 못하여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법률대로 죄를 주면 반드시 이 정도가 아닐 것이다. 너희들은 사심(私心) 없이 국가를 위하였기 때문에 끝으로 감하여 가벼운 죄를 주었으니 알고 떠날지어다.” 하였다. 이날 밤은 동소문 밖 민가에서 잤다. 『해동야언(海東野言)』 권3, 「중종(中宗) 상(上)」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82
  • 동소문(東小門) 밖에서 무과(武科)를 복시(覆試)하였는데, 전 사정(司正) 유승연(柳承淵)을 제(第一)로 하였다. 임금이 친열(親閱)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실행하지 않고, 좌대언(左代言)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유승연을 부사직(副司直)으로 삼았다. 『태종실록』 권 27, 태종 14년 갑오(1414,영락 12) 4월6일(기유) 1번째 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83
  • 혜성(彗星)이 나타났는데, 그 빛이 희미하였다. 어가(御駕)가 돌아오다가 소계천(所界川)가에 머무니, 서울에 머물렀던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에서 풍정(豐呈)을 바치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술을 올리고, 다음에 좌의정(左議政) 강맹경(姜孟卿)·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양산군(梁山君) 이징석(李澄石)·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변(李邊) 등이 술을 올리니, 어가(御駕)를 수종하던 종친(宗親)·재추(宰樞)와 서울에 머물렀던 종친·재추에게 잔치를 내려 주었다. 백관(百官)들이 동소문(東小門) 밖으로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해질 무렵에 환궁(還宮)하였다. 『세조실록』 권15, 세조 5년 기묘(1459,천순3) 3월 1일(계미) 1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84
  • 김유(金宥)가 적성(積城)으로 가니, 김흥(金興)이 동소문(東小門) 밖에 나가 전별하였다. 민건(閔騫)과 예조 판서 이승손(李承孫)을 보내어 전별하고 아청면포 겹원령(鴉靑綿布裌圓領)·초록주 탑호(草綠紬塔胡)·유청주 철릭(柳靑紬帖裏)·백초 과두(白綃裹肚) 각각 1, 시복(矢服)·궁도(弓弢) 각각 1, 대전(大箭) 6, 각궁(角弓) 1장을 주었다. 김흥이 돌아와서 대궐에 나아가니, 노산군이 맞이하여 조계청(朝啓廳)으로 들어갔다. 김흥이 유청사운저사(柳靑四雲紵絲) 1필, 청직금통주슬란저사(靑織金通紬膝欄紵絲) 1필, 용안(龍眼) 1합(盒), 여지(荔枝) 1합, 백사당(白沙糖) 1통(桶), 회회도아(回回絛兒) 1조(條)를 바쳤고, 노산군은 아청면포 겹원령·초록주 탑호·유청주 철릭·백초 과두 각각 1, 시복·궁도 각각 1, 대전 6, 각궁 1장을 주었다. 김흥이 또 경정 공주(慶貞公主) 집으로 가니, 노산군이 환관 김충(金忠)을 보내어 어육(魚肉)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단종실록』 권4, 단종 즉위년 임신(1452년, 명 경태 3년) 10월13일 (신축) 1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85
  • 왜인을 홍화문으로 내보내라고 전교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야인(野人)은 늘 동소문(東小門)으로 왕래하거니와, 왜인(倭人)은 이제 비로소 보건대 여염 사이의 작은 길로 데리고 다녀서는 안되겠으니, 홍화문(弘化門) 앞의 큰길로 내보내야 하겠다.” 『중종실록』 권63, 중종 23년 무자(1528년, 명 가정 7년) 9월21일 (경인) 2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86
  • 형조가 아뢰기를, “장용위(壯勇衛) 박명건(朴命建)이 동소문(東小門) 밖의 소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는데 동부(東部)에서 초검(初檢)한 상처와 한성부(漢城府)에서 복검(覆檢)한 상처가 서로 다릅니다. 처음에는 동류(同類) 장용위【손내은석(孫內隱石).】가 시친(屍親)으로 정장(呈狀)을 하였는데, 그 뒤에 그의 삼촌숙(三寸叔)인 이준(李準)의 정소(呈訴)에 ‘요즈음에 여자를 얻어가지고 돌아다녔는데 그 본남편이 살해한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사간(事干)을 형조에서 막 추문하고 있으니 속히 다시 검시(檢屍)하게 하소서.”【 어떤 사람의 말에는 도총부(都摠府)에서 징속(微贖)을 너무 독촉하므로 목매어 죽었다고 한다.】 하니, 그렇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권95, 중종 36년 신축(1541년, 명 가정 20년) 6월11일 (병인) 1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87, No.094
  • 게복(啓覆)을 들었다. 좌부승지(左副承旨) 이명규(李名珪)가 진주(晉州)의 죄수 수군(水軍) 박한석(朴漢石)의 추안(推案)을 아뢰었다.【한석(漢石)은 그 아비 보중(甫中)을 때려 죽인 죄인으로 죄가 능지 처사(凌遲處死)로 부대시(不待時)였다.】 영사(領事) 유보(柳溥)가 아뢰기를, “이 사람이 아비를 죽인 정상이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으니, 천하의 큰 변고이며 성왕(聖王)의 정치에 큰 누를 끼친 자입니다. 천지 사이에 잠시도 용납해 둘 수 없는 자이니 속히 율법에 의하여 전형(典刑)의 엄중함을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율법대로 하라고 일렀다. 형조 판서 유인숙(柳仁淑)이 아뢰기를, “장용위(壯勇衛) 박명건(朴命建)은, 그의 삼촌 이준(李準)의 정장(呈狀)에 ‘그 아내의 본남편의 소행인지 의심스럽다.’고 하였기 때문에 추국해 보니 이미 의심스런 단서가 없고 또 의심할 만한 자취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도 매우 못생겨 남편이 없었는데 명건이 상번(上番)했을 때에 취하여 아내로 삼았다고 합니다. 만약 타인에게 살해를 당했다면 반드시 상처가 많을 것인데 다른 상처는 없고 다만 목맨 흔적만 있으니 분명히 피살되었다고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에게 묻기를 ‘너의 남편이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은 무슨 까닭이냐, 고민한 일이 있지 않았느냐?’고 하니 ‘남편이 저녁을 먹고 숙직을 나가면서 말하기를 「인정(人情)으로 무명 3필을 써야 할 곳이 있는데 구해 놓았는가?」 하기에 얻지 못했다고 대답했더니 고민스런 표정으로 도로 들어왔다. 그래서 마침 궐문에 미처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궐직(闕直)하였는데 「이 또한 큰 죄이니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며 몹시 걱정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입궐(人闕)했다가 여러 날 돌아오지 않았다. 뒤에 들으니 동소문(東小門) 밖에 목매어 죽은 자가 있다고 하기에 가 보았더니 바로 우리 남편이었다.’고 하였습니다만, 이와 같이 작은 일 때문에 목매어 죽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그러나 요즘 긴요하지 않은 일로 해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중대한 옥사이긴 하나 믿을 만한 증거도 없는데 문득 형추(刑推)를 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준(李準)의 본뜻을 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설원(雪冤)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공갈 협박하여 뇌물을 받아내려는 처사였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주인집으로 가서 명건의 아내에게 설득하여 말하기를 ‘무명 2동(同)쯤은 가져야 염하여 장사지낼 준비를 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주지 못하겠다고 대답하자 곧 화를 내고 정장(呈狀)한 것입니다. 명건의 아비와 본처(本妻)는 정소(呈訴)할 뜻이 없었는데 이준만이 이와 같이 했다는 것은 적실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는데 형신하는 것은 미안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형조가 취품(取稟)할 때 ‘시친(屍親)의 정장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옳던 그르던 간에 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에 추국을 명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아뢰는 뜻을 듣고 보니 과연 의심스러운 듯하다. 그러니 의심스런 옥사의 일은 마땅히 대신에게 의논해야 한다.” 하였다. 영의정 윤은보, 우의정 윤인경, 좌찬성 유관, 우찬성 양연이 의논드리기를, “지금 박명건의 검장(檢狀)을 상고해 보니 상흔(傷痕)은 바로 목맨자리 뿐으로 타살을 당한 것이 아님은 의심할 만한 단서나 근거할 만한 흔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준(李準)의 소장(訴狀)만을 따라 갑자기 큰 옥사를 일으킨다면 사건의 실정은 얻지 못한 채 상(傷)하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준이 명건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면포(綿布) 2동(同)쯤은 있어야 염습하여 장사지낼 자본이 된다.’고 하였다 하니 이것을 근거하여 헤아려 보면 그 뜻이 공갈해서 재물을 취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원통함을 씻어 주려던 뜻이 아니었으니 추문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추문하지 말라는 것으로 형조에 말하라.” 『중종실록』 권95, 중종 36년 신축 (1541년, 명 가정(嘉靖) 20년) 6월 18일(계유) 1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88, No.095
  • 일시(日時) 기축년(1889, 고종26) 8월 9일에 일기청을 설치할 것을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정탈(定奪)하다. 동월 26일에 당상과 낭청을 계하(啓下)하다. 9월 8일에 이전 호위청(扈衛廳) 자리였던 전설사(典設司)에서 회동(會同)하다. 동월 12일에 이전 호위청 자리였던 전설사에 전담 부서를 설치하다. 동일에 《일성록(日省錄)》과 《윤발(綸綍)》을 내각(內閣)에서 봉출(奉出)하다. 동일에 일기를 정원(政院)에서 옮겨 오다. 경인년(1890, 고종27) 12월 15일에 일기의 수집(蒐輯)을 마치고 이를 받들고 나아가다. 동일에 당상과 낭청 이하를 별단(別單)에 써서 들이다. 18일에 혜화문(惠化門) 밖에서 세초(洗草)하다. 동일에 낭청들을 모두 감하(減下)하다. 『일기청등록(日記廳謄錄)』 「일기청개수등록(日記廳改修謄錄)」 〈일시(日時)〉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90
  • “풍우 오백년의 노문, 동소문은 헐렸다. 부근 일대 시가정리로" 외국문물이 아직 조선에 들어오기전 서울 장안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성곽의 1문 동소문 1명 혜화문은 작 24일로 드디어 헐리고 말았다. 쇄국의 시대로부터 시간은 흘러 서울 장안의 문물은 엄청난 진보와 변화를 보이고 장안의 발전은 옛날의 고적보다도 교통의 편리를 높이 평가함에 이르러 동소문과 성곽일부는 경성부의 시가정리구역에 들어가 지난 20일 향기로운 아카시아 꽃에 싸인 동소문에는 공부의 사정이 없는 골이디어 헐리기 시작 24일로써 마지막 ‘아취’의 형적조차 장안사람들의 애석해하는 가운데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 문이 헐린 곳에는 장차 시내로부터 삼선평으로 직통하는 넓이 24미의 한 대 도로를 부설하게 되어 동소문 안쪽으로는 동성상업운동장 일부와 조선영호회사 축음스튜디오며 대학의원의 서부쪽 담장 일부가 모두 헐리는 중이다. 동소문은 이태조 5년 장안을 둘러 성곽을 쌓을 때 축조된 것이므로 근 500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본래는 홍화문이라는 것을 9대 성종 14년 창경궁 앞에 동문을 건국하여 홍화문이라 칭하였으므로(현재의 창경원 정문) 중종 6년에 이를 분간하기 위해 혜화문이라 개칭하였든 것이다. 그리고 최초 루문 천장에는 예문 밖 부근의 조해를 막는 의미에서 용 대신에 봉황을 그렸었으나 이미 10여년에 이것은 무너져 없어졌다. 『동아일보』 1938년 5월 25일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92
  • 혜화문(惠化門) 밖의 냇가 동쪽에 석벽이 있었다. 거기에 돌로 만든 처마가 덮여 있고 두 개의 기둥이 지탱하고 있는데 기둥 역시 모두 돌로 만든 것이다. 벽면에 불상 하나가 조각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노비부처〔奴佛〕’라 부르고 그 시내를 ‘불천(佛川)’이라 이름 지었다. 도성 동쪽의 나무하는 노비들이 날마다 그 밑에 모여들어 올려다보며 욕하기를, “우리를 남의 종으로 만든 놈이 이 불상이다. 불상이 무슨 면목으로 우리를 쳐다본단 말인가.” 하면서 낫을 추켜들어 눈을 파내니 불상의 두 눈이 모두 움푹 파였다. 혹사당한 원한이 마침내 불상에게까지 옮겨 갔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그들의 속담에 “이 불상이 없어지면 노비 역시 없어진다.” 하였는데, 노비를 없애는 것은 그래도 가능하지만 석불은 누가 없애겠는가. 내가 젊었을 때는 그래도 불상이 높이 솟아 있고 그 발밑에 냇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매년 장마가 져서 산이 깎이고 하천이 메워져 수십 년 사이에 모래가 그 처마까지 쌓이는 통에 불상의 몸체가 전부 파묻혀 제거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속담대로 과연 이 불상이 없어진 것이다. 영조 신해년(1731, 영조 7)에 노비 가운데 양인 어미 소생은 어미의 신분을 따르도록 명하니 노비가 비로소 줄어들어 지금은 집안에 노비가 없는 자가 대부분이다. 금상 신유년(1801, 순조 1)에 내시노비(內侍奴婢) 대장을 소각하도록 명하여 공노비가 모두 사라졌으니 사노비가 자신들의 천역에 종사하려 하겠는가. 결국에는 반드시 모든 노비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대체로 노비의 자식이 대대로 노비가 되는 것은 중국 성왕(聖王) 시대의 법이 아니라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다. 기자(箕子)의 팔조법금(八條法禁)에 도둑질한 자를 노비로 삼도록 한 것은 그 당대만을 징계한 법이니, 어찌 대를 이어가며 노비로 삼게 하였겠는가. 그러나 끝내는 대대로 남의 종살이를 하는 원한이 불상의 눈을 파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니, 불상이 만약 지각이 있다면 응당 그들을 가엾게 여겨 눈물을 흘리고 성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공노비 대장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온 백성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으니, 하늘에 왕업이 장구하기를 비는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올해의 대풍을 해마다 기약할 수 있어 복록이 국가에 돌아가고 은택이 노비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노비가 없는 집안도 걱정할 것이 없다. 한편 자기 몸을 팔아 노비가 되는 자가 어찌 없겠는가. 이러한 경우는 옛 법에도 있는 것으로 단지 당대에 국한된 노비일 뿐이다. 『청성잡기(靑城雜記)』 권5 「노비부처와 공노비 해방」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93
  • 기우제의 절차 정원에 전교하였다. “근일 가뭄이 극심해서 비를 바란 지가 오래인데 비가 올 듯하면서 오지 아니하니 매우 걱정스럽다. 기도(祈禱)하는 일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내일 오관산(五冠山) 등에서 기우(祈雨)한 다음에 형편을 보아서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정문(肅靖門)을 열고 피고(皮鼓)를 치지 말고, 저자를 옮기는 등의 일도 거행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금년에는 무(巫)·맹(盲) 및 소동(小童)의 기우를 아직 거행하지 않았으니 또한 전례를 상고해서 아울러 거행할 것으로 예조에 이르라.” =================================== 예조에서 아뢰기를, “춘당대(春塘臺)에서 석척 동자(蜥蜴童子)가 기우제를 지낼 때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정문(肅靖門)을 열어 3일 만에 그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 예조가 기우제 등의 일로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금년에 한재가 꼭 파종 시기에 닥쳤고 망종(芒種) 절기가 내일(來日)인데 이미 추수(秋收)할 가망이 없어 사정이 민망하고 절박하게 되었으니 기우(祈雨)하는 일을 불가불 일체 거행해야 하며, 폐문 천시(閉門遷市)하고 북을 치지 못하게 하는 일들을 속히 거행해야 합니다. 또한 재변이 이처럼 절박한 시기에는 이전에는 대신을 보내 종묘 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중신 및 내신을 나누어 보내 기우하는 의식이 있었으니 지금도 그 사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춘당대(春塘臺) 못가에서의 석척 기우(蜥蜴祈雨)3194) 는 오는 21일에, 맹무 동자 기우(盲巫童子祈雨)는 오는 25일에 거행하고, 별도로 대신을 보내 종묘 사직에 제사하는 의식과 중신 및 내신을 나눠 보내 기우하는 의식은 속히 거행하며 경복궁에서의 석척 기우와 폐문 천시하고 북을 치지 못하게 하는 일들은 우선 일기(日氣)를 보아서 차차 거행할 것이니 일시에 다 거행할 수 없다.” 하였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63
  • 기우제 절차의 의미 예조 판서 윤인경(尹仁鏡)이 아뢰었다. “사직에는 이미 섭행했고, 종묘에는 연(輦)을 치우고서 가마를 타고 나오시어 재계하는 별궁에서 치재하시다가 비로 인해 정지하셨으니, 비록 이번에 친제하시더라도 번거롭지 않을 듯합니다. 또 지금의 토룡석척(土龍蜥蜴)이나 원통한 옥사를 심리(審理)하는 것이나 해골을 덮어주고 시체를 매장해 주는 것이나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청문(肅淸門)을 열어놓는 것과 같은 일들은, 토룡으로 비를 부르고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어놓고 사람의 해골을 묻어주고 항아리에 석척·사의를 담아놓고 비를 기원하고 옥사를 즉시 처결하고 의옥(疑獄)을 잘 분별하여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풍운뇌우단에서 친제를 거행하시려는 것은 성탕(成湯)이 상림(桑林)에서 비를 빌고 송 인종(宋仁宗)이 교외에서 친히 비를 빈 것과 같은 아름다운 뜻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조종조에는 비록 한재를 만나더라도 친제한 때가 없었으므로 예관(禮官) 만으로 의논하기는 곤란하니, 대신들과 의논하심이 어떻겠습니까?” ======================================= 삼공이 아뢰기를, “봄 여름의 가뭄에는 숙정문(肅靖門)을 열고 숭례문(崇禮門)을 닫으며 피고(皮鼓)를 치지 않고 징을 사용하는 것은, 양기(陽氣)가 강성하기 때문에 음기(陰氣)를 붙잡아 세우고 양기를 억제하려 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이미 가을철로 들어와 음기가 기세를 부리는 때이므로, 숭례문을 닫고 징을 치는 것은 사리에 어그러질 듯합니다. 더구나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중추(仲秋)에 춘령(春令)14548) 을 사용하면 가을비가 내리지 않고, 하령(夏令)을 사용하면 그 나라가 가문다.’ 했습니다. 단지 비를 비는 일만 하고, 숙정문을 여는 것이나 숭례문을 닫는 것과 피고를 치지 않는 등의 일은 정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이번에 추장의 사송(使送)으로 온 사람에게는 관원을 명하여 잔치를 내리시면 되고, 부득이 보시기로 하면 왕궁(王宮)에서 인견(引見)하시는 것이 가합니다. 왜인(倭人)을 공궤(供饋)하는 일 때문에 법가(法駕)14549) 를 갖추고 다른 대궐로 행행(行幸)하시는 것은 사체에 방해로울 듯싶습니다. 또한 듣건대, 이 왜인들이 객관(客館)에 있을 적에 건방지고 오만한 말을 많이 하여 폐단이 매우 적지 않았다는데, 지금 동래(東萊)와 웅천(熊川) 고을 등의 수령들【동래 현령 노보세(盧輔世)·웅천 현감 신포(辛抱) 등을 왜인들 대우를 잘못한 것 때문에 잡아다가 추고(推考)했다.】을 잡아다가 추고하고 있지만 죄가 있는지 죄가 없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대저 왜인들의 선척을 척량(尺量)할 적에 분명하게 단속해서 하면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게 되고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따라주면 좋아하는 것은 곧 그들이 언제나 가지는 마음입니다. 이번에 만일 이런 것 때문에 수령들의 죄를 다스릴 경우, 다음에 수령된 사람들이 과연 모두 현명하다면 공정을 지키고 사곡하지 않겠지만, 만일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면 그들이 물고 늘어질까 싶어 일체 왜인들이 하려는 대로 따르고 국가의 법은 지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 그 사람들이 일로(一路)와 객관(客館)에서 한 짓을 보면 건방지고 오만함이 막심하니, 심상한 예절로 보셔야 하고 예를 갖추어 대우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대신들이 아뢴 말이 지당하니, 성문을 열고 저자를 환원하여 즉시 전대로 하도록 하라. 객인(客人)들을 접견하는 일도 대신들이 아뢴 말대로 관원을 명하여 공궤하게 하라.”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64
  • “생겨나자 겸구령, 행세 못하든 내 신세. 다치어 있길래 신산한 파란도 안 격고 세상밧겨 열린 입이니 한두마듸 말씀 나의 본명은 숙정 무단히 받은 냉대 북문을 숙정문이라고 합니다. 북쪽에 있다하여 차별대우를 받는지는 모르되 나는 세상에 태어나는 그날부터 입이 닫기어 문으로 행세를 못하다가 시세가 바뀌어 다른 문이 문의 행세를 못하게 되는 근년부터야 비로소 입이 열리어 문의 행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동아일보』 1928년 5월 11일 2면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80
  • “구문팔자타령(4) 동소문 파락한 금일 잔해 삼선평고성도 환멸 영문장졸의 추격하든 곳도 온데간데 물터로 모여가는 부녀만 오락가락해 어린애들 수수격기에 탈달린 문이 어느문이냐하는 문이즉나외다. 속칭은 동소문이라고 불르나 관명은 혜화문이라고 합니다. ...... “오백년의 역사가진 동소,수구양문 철훼, 돈이 없어 보존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역사 긴 동소문과 수구문을 헐어버려. 창의문만 근보전태. 경성 성벽 구문 중에는 동북간 문인 동소문=혜화문과 남동간에 있는 부정문이라고 하는 광희문=수구문은 퇴락하여 위험하기 짝이 없으며 또한 보관을 소홀히 하여 걸인의 숙박처가 되어 위생상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야 이전부터 돈을 들여 고적보존회의 손으로 수리보관을 하든지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철회하야 불안이 없이하자는 두 의견이 있어 오든바 고적보존회로부터 경비가 없어서 전기 두문을 유지할 수 없으니 철회하여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표시하였음으로 토목부 관유재산계에서는 재목만을 내자동에 사는 진모에게 1천2백여원에 팔아버리어 철회케하는 중인데 동소문은 이태조 5년에 창건되어 홍화문이라고 하다가 연산군 10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오. 광희문은 본시 수구문으로 출상하든 문인데 창건된 년대는 미상하다고 한다. 이밖에 창의문마저 헐어버리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아직 그럴 필요가 없다하여 그것만은 고적보존회에서 관리하기로 되었다더라.” 동아일보 1928년 4월 22일 동아일보 1928년 7월 12일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91
  • 숙정문 한양도성의 북쪽에 위치한 문으로 본래 이름은 숙청문이다. 태조 5년(1396) 완공되었다. 북대문으로 불릴 만도 하지만, 그 규모가 작고 이용하는 사람의 수가 적어서 ‘대문’으로까지 불리지 못하고 ‘북문’으로 주로 불렸다. 숙청문에서 숙정문으로 바뀐 이유와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숙정문肅靖門이란 이름은 중종 18년(1523) 6월에 처음 등장하여 그 이전에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이후에도 숙청문이란 문 이름이 드물지만 사용되고 있다. 숙정문이 사용되기 이전 마지막으로 숙청문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중종 4년(1509) 4월이다. 한양도성의 사대문과 사소문은 모두 문루가 있지만, 숙정문은 문루가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정북쪽 문을 숙정문이라 하는데, 위에 집 지은 것架屋이 없으며 닫아둔채 다니지 않는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비고편, 「동국여지비고」 제1권) 위의 기록을 보면 가옥, 즉 문루가 없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다만 태조 대에는 문루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1975년 복원 당시 문루를 만들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1530년에 발간된 것이니 만들어진지 150년도 되지 않아 문루가 없어진 것이다. 한양도성의 다른 문은 문루가 낡으면 수리하거나 다시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유독 숙정문만 없이 방치한 것은 그만큼 사용자가 적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숙정문은 태종13년(1413) 풍수상에 이유로 막아버렸다. 세종 4년(1422)에는 다시 숙정문을 열어 군사들의 이동 통로로 사용하였지만 1530년 당시에는 다시 막혀있었다. 연산군 10년(1504)에 ‘숙정문을 막고 오른쪽에 새 문을 만들라.’는 전교가 있었지만, 옮겼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평소에는 막혀 있는 숙정문이었지만 풍수지리 상 북쪽이 음陰과 물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 문을 열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숙정문 관련 기록은 대부분 문을 열고 기우제를 지냈다는 것이다. 또한 음陰과 관련된 이야기도 전한다. 숙정문은 곧 양주의 북한산으로 통하는 곳인데, 그 문 역시 지금은 폐치閉置되어 있다. 이 문이 어느 때에 폐치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문을 개통하던 당시, 성 안 마을에 남녀 간의 음란한 풍조가 자꾸 일어나므로 폐치하였다고 한다.(『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위 기록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년~1856)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내용이다. 이것을 보면 숙정문은 조선 후기까지 폐쇄되어 있었다. 또한 그 이유를 ‘음란한 풍조’ 때문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숙정문이 음陰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10호로 지정되었는데, 1968년 북한 간첩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침투한 1.21 사건으로 일반의 출입이 차단되었다. 2006년 4월 다시 일반에게 공개되었지만 여전히 군사 통제 지역으로, 정해진 시간에만,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이 가능하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57-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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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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