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심우장
1933
사적
장소 유적
유물 건축물
성북구 성북로29길 24에 있는 유적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님의 침묵」을 지은 시인이며, 불교개혁가였던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 6월 29일 입적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심우장은 벽산 스님이 땅을 제공하였고, 수학교사인 최수동이 설계하였으며, 방응모와 박광, 그리고 아내 유숙원 등이 자금을 보태어 만들어졌다.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한용운은 이곳에 거처하며 그의 또 다른 본거지인 선학원을 출입, 불교 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흑풍』을 집필하는 등 문학 활동도 이어갔다. 현재 심우장 입구에 만해 산책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매년 6월 29일 선생의 기일에 성북문화원 주관으로 추모 다례가 열린다. 2019년 4월 8일 사적 제550호로 등록되었다.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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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79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 (성북로29길 24)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사적
  • 지정일: 2019.04.08
  • 비고: 1984.07.05. 서울시 기념물 제 7호 지정 / 2019.04.08. 사적 제550호 지정

근거자료 원문

  • 심우장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다가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인데 반해서, 성락원은 시민이 들어가지 못하는 문화재에요.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120쪽
  • 심우장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독립운동가이자, ‘님의 침묵’을 지은 시인이며,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불교개혁을 외치기도 했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55세 되던 1933년부터 1944년 6월 29일 입적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심우(尋牛)’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수행자가 본성을 깨달아 가는 10단계 과정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심우도(尋牛圖)라고 하는데, 심우의 단계는 이 가운데 첫 단계이기도 하다. 심우도의 마지막은 본성을 깨달은 수행자가 다시 대중 속으로 향하는 것이다. 즉 심우장은 한용운 선생이 인간의 본성을 깨우쳐 다시 대중 속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지은 이름이며, 이는 그가 평생 주장했던 대중 속의 불교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심우장은 벽산 스님이 땅을 제공하였고, 수학교사인 최수동이 설계하였으며, 방응모와 박광, 그리고 아내 유숙원 등이 자금을 보태어 만들어졌다. 또한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한용운은 이곳에 거처하며 그의 또 다른 본거지인 선학원을 출입, 불교 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흑풍』을 집필하는 등 문학 활동도 이어갔다. 독립투사 일송 김동삼 선생의 영구(靈柩)를 수습하여 장례를 치른 곳도 바로 이곳 심우장이었다. 한용운 선생의 딸인 한영숙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심우장에서의 삶은 가난했지만, 밥을 굶을 정도로 궁핍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43년 겨울, 중풍으로 쓰러진 후 한용운 선생의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광복 1년여를 남기고 그는 세상을 달리한다. 그의 나이 66세 되던 해였다. 심우장은 현재 성북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록 한용운 선생은 가고 없지만, 그의 손때가 묻은 건물 안을 들어가 볼 수도 있고, 그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도 그대로 남아 있다. 심우장에서 한용운 선생의 자취를 느끼고, 그의 시를 읽으며, 치열했던 그의 독립운동과 삶을 되새겨 보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귀한 경험이 될 것이다.
  • [ 49 ] 심우장과 만해 한용운 1. 심우장 연혁 ○ 1933년 성북동 222-1에 심우장 건축 - 벽산 김적음의 토지기증과, 방응모 등 지인의 도움을 받음 ○ 1981년 심우장 내 만해기념관 건립 ○ 1990년 만해기념관이 남한산성으로 옮겨가 개관(관장 : 전보삼) ○ 1999. 2. 11. 성북구가 한용운의 외동딸 한영숙으로부터 매입 ○ 1999년 심우장 원형복원공사 진행 ○ 2016년 마당의 벽돌조 주택 철거 및 관리동 건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54쪽
  • ▫ 서울시 기념물 제7호 만해 한용운 심우장 萬海韓龍雲尋牛莊 시대 : 근대(1933) 소유자 : 한영숙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동 222-1, 2 지정연월일 : 1984. 7. 5. 심우장은 3・1 운동 때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1933년에 짓고 만년을 보낸 곳이다. 한용운은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중국에 망명하여 방랑하다가 1913년에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불교대전≫ ≪조선불교유신론≫을 펴냈으며 1916년 월간 ≪유심≫을 발간하는 등 3・1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3・1 운동으로 피체되어 복역한 후 1926년에 시집 ≪님의 침묵≫을 펴낸 뒤 신간회에 가담했다. 19321년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월간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사상 고취에 진력했다. 1937년에는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 조종자로 체포되었다. 심우장을 짓게 된 경위는 3・1 운동으로 3년 동안의 옥고 끝에 출옥한 한용운이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빈한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 때 금벽산(金碧山) 스님이 자기가 초당을 지으려고 송림 속에 사둔 52평을 드리겠으니 몇 칸 집을 지어 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집 지을 1,000원 정도의 돈이 없어 주저했는데 부인 유씨(俞氏)의 소지금 약간에다 조선일보사 방응모(方應謨) 사장과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외에 금융조합에서 대부를 받아 대지 112.99평, 건평 17.8평 규모의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용운은 남향의 집터를 마다하고 그 반대편 산비탈 북향한 곳에 집을 앉힌 것은 일제의 총독부와 등진 곳에 자리를 정한 것이다. 한용운은 집을 짓고 그 이름을 ‘심우장(尋牛莊)’이라 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 기와지붕을 이룬 민도리 소로수장 집에서 한용운은 광복 1년 전인 1944년에 중풍으로 운명할 때까지 살았다. 현재 한용운 선생이 서재로 쓰던 방에는 위창 오세창(吳世昌)이 쓴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심우장이라는 이름은 한용운 선생의 아호 중에 만해, 오세인(五勢人), 성북학인(城北學人), 목부(牧夫), 실우(失牛) 등이 있는데 그 중 목부는 소를 키운다는 뜻인 바 마음 속의 소를 키움은 모든 사람들이 가야 할 왕생(往生)의 그 길을 멈출 수 없음을 나타내는 의미심장한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심우장이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 것으로 그의 수양경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집을 지을 당시 소나무 숲에 지어진 이 집은 매우 한적했다. 한용운은 청빈한 가운데 정원에 많은 화초를 가꾸는 것을 즐겼는데 지금도 당시에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높이 자라고 있어 옛 주인의 꿋꿋한 절의를 말해 주는 듯하다. 이 집을 통하여 온 국민이 3・1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아울러 한국 근대사의 일맥을 주지시키기 위한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편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심우장의 건너편 대교단지(大敎團地)에는 일본대사관저가 자리를 잡음으로써 이 집을 지키던 한용운의 외동딸 한영숙이 이 집을 떠나 이사하자 한 때 만해사상연구소가 사용했다. * 참고자료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동명연혁고≫ 성북구편, 1983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 박경룡, ≪서울문화유적≫, 1997.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39-140쪽
  • ○ 1980~9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 만해 한용운 심우장 정비 만해 (卍海) 한용운 선생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33년 출옥한 뒤 4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던 심우장 (尋牛莊)이 시민 휴식공간으로 새롭게 정비된다. 성북구 성북동222의1, 222의2번지 대지 1백13평에 달하는 심우장은 만해를 기리는 수많은 시민들이 즐겨찾고 있지만 현재 만해의 딸 영숙(63) 씨의 사유지로 돼있어 일반시민이 관람하려면 관람 가능여부를 사전에 확인해야 하는 상태다. 이에 따라 성북구는 서울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돼 있는 심우장을 한씨로부터 매입한 뒤 99년말까지 대대적으로 정비, 시민들에게 개방키로 했다. 이를 위해 30억원의 예산을 확보한 구는 보다 편리한 이용을 위해 주변 건물의 땅 일부를 함께 매입, 폭 6m의 진입로와 11대 규모의 주차장을 함께 마련할 계획이다.(1997.11.04.)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7쪽
  • ○ 1980~9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 심우장 서울시 기념물 지정 서울시는 20일 3·1독립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았던 심우장(서울 성북동 222의1)을 사적지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지방기념물로 지정, 보존키로 했다. (1984.06.20.)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2쪽
  • ○ 만해 한용운 심우장(서울시 기념물 제7호) ㆍ1933년, 김벽산(金碧山)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 ㆍ조선총독부가 위치하던 남쪽을 등진 곳을 택하여 북향의 집을 짓고 심우장(尋牛莊)이라고 편액 ㆍ한용운은 만해(萬海)라는 호(號) 외에 필명으로 오세인(五歲人), 성북학인(城北學人), 목부(牧夫), 실우(失牛) 등의 이름을 가끔 썼는데 목부란 ‘소를 키운다’는 뜻으로, 곧 내 마음 속의 소를 키움은 왕생의 길을 멈출 수 없음을 나타냄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03쪽
  • ○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문화유적 문화유적 05 만해 한용운 심우장 만해 한용운의 한과 넋이 깃든 한옥 -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만해 한용운이 지은 집. 심우장은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집을 북향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으로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금도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심우장이란 명칭은 선종에서 말하는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에서 유래한 것이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한용운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이 쓴 것이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8쪽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33년-한용운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거주 시작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쪽
  • ○ 심우장 문학 행사 - 「만해의 충절 살아숨쉬는 심우장」, 『경향신문』, 1983.2.28.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 심우장 문학 행사 - 「인물동정」, 『매일경제』, 1995.6.29.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 심우장 문학 행사 - 「심우장에 만해 표징 세워」, 『경향신문』, 1995.7.2.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 심우장 문학 행사 - 「우리 문학 유산을 찾아(1)」, 『경향신문』, 1996.1.29.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 심우장 문학 행사 - 「3월은 만해 한용운의 달」, 『동아일보』, 1991.2.25.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 심우장 문학 행사 - 「한용운 유고에 비친 시세계」, 『동아일보』, 1970.10.5.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 조용했지만 뜨거웠던 저항의 근거지 성북 - 한용운은 1933년부터 그가 입적한 1944년까지 심우장에 거처합니다. 집이 북향인 것은 그가 일부러 조선총독부과 등지기 위해 의도한 방향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심우장에서는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김동삼의 장례식이 치러지기도 했었지요. 역시 같은 해인 1933년, 소설가 이태준도 성북동에 수연산방을 짓습니다. 그는 1947년 월북하기 전까지 가족들과 함께 거주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심우장과 수연산방은 1930년대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도심 속 역사의 공간이자 일제강점기 뜨겁게 글을 써내려갔던 두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났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0쪽
  • ① 萬海 韓龍雲 尋牛莊 성북구 성북동 222-1, 2에는 3·1운동 때 33인중의 한사람이요 「佛敎維新論」을 쓴 바도 있는 佛家詩人 萬海 韓龍雲이 晩年을 보낸 尋牛莊이 112.99평의 대지에 17.8평의 건평 규모로 있어 1984년 7월 5일 서울특별시 記念物 제7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소유자는 그의 딸 韓英淑이다. 韓龍雲은 1879년에 태어나 1944년 6월 29일 세상을 떠났는데 본관은 淸州이고 俗名은 奉玩, 龍雲은 法名이며 萬海는 雅號이다. 1894년 東學革命에 가담하였고 설악산의 五歲庵 百潭寺에서 수도하였으며 1910년 한일합방 후 중국에 망명하였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3월 1일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언서의 公約三章을 집필하였으며 1926년 “님의 침묵”을 발표하였고, 1934년 이 곳 김우장에서 처녀 장편소설 『黑風』을 집필하여 朝鮮日報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계통의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 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尋牛莊을 짓게 된 경위를 보면 그가 3·1운동으로 3년동안의 獄苦 끝에 출옥하여 夫人 兪氏와 어린 딸(英淑)과 함께 성북동(당시 城北町) 골짜기 셋방에서 빈한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金碧山스님이 자기가 草堂을 지으려고 松林속에 사둔 52평을 드리겠으니 몇칸 집을 지어 보라고 권유하여 집을 지을 계획을 세웠지만 자금이 없었는데 1933년 朝鮮日報社 方應模사장을 위시한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萬海는 南向의 집터를 마다하고 그 반대편 산비탈 北向之地 즉 日帝의 總督府와 등진 곳에 자리를 정하여 집을 지었다. 응달이고 길도 물도 없는 北向 산비탈에 집을 짓고 그 이름을 「尋牛莊」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萬海라는 號외에 筆名으로 五歲人·城北學人·牧夫·失牛 등의 이름을 가끔 썼는데 牧失란 소를 키운다는 뜻인 바 내 마음 속의 소를 키움은 우리 모두가 가야할 往生의 그 길을 멈출 수 없음을 나타낸 말로 의미심장한 뜻을 갖고 있다. 즉 尋牛莊이란 佛敎의 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한 공부하는 집, 공부하는 人生을 의미한 것이다. 잃을 소 없건마는 찾을 소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이것은 韓龍雲의 尋牛莊詩이다. 그의 수양의 경지를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萬海는 그 후 이 성북동 심우장에서 貧窮 抵抗의 생애를 계속하였으며 日帝의 감시와 유혹에도 굽히지 않고 조국의 광복을 빌고 또 믿었으나 광복 1년 전 이곳에서 운명하였다. 尋牛莊플 앞에는 萬海가 손수 섬은 향나무 한 그루가 오늘도 높이 서 있어 옛 주인의 높은 節義를 말해 주는 듯 하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15-717쪽
  • 1. 1937년 봄, 심우장-한용운, 김동삼, 조지훈 선생을 마지막으로 뵈온 것은 일송 김동삼 선생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셨을 때 때가 때인지라 일송 선생의 시신을 돌볼 사람이 없어 감옥 구내에 버려둔 것을 선생이 망명시절 고인에게 받은 권우眷遇와 지사志士 선배에 대한 의리에서 결연이 일어나 성북동 심우장까지 일송 선생의 관을 옮겨다 놓고 장사를 치르시던 모습이다. 위 글은 시인 조지훈이 1954년 잡지 『신천지』에 쓴 「한용운 선생」의 일부이다. 이 짧은 글에는 3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용운, 김동삼, 조지훈. 그리고 조지훈은 이 장례를 아버지와 함께 갔으니 아버지 조헌영을 더하면 넷이 된다. 실제로 조헌영은 장례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뒤에 한용운을 대신해서 조사弔辭를 낭독했으니 총 4명이 이 글의 당사자가 된다. 과연 당시의 상황은 어땠으며, 이들은 무슨 관계였을까? (중략) 새로운 인연이 찾아온 것도 1933년의 일이다. 간호사 유숙원과의 만남이었다. 둘은 결혼했다. 지치고 떠돌던 한용운에게 부인이 마음의 안식처였다면 떠돌던 그의 육신에도 안식처가 필요했다. 김벽산 스님에게 52평의 땅을 받아,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래도 모자란 것은 빚을 내어 집을 지었다. 그리고 이름을 심우장이라 했다. 지친 순간 안식이 찾아왔다. 심우장에서 한용운은 딸 영숙을 낳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옛 친구들이 하나 둘 변절하는 모습을 지켜본 것도 이곳 심우장에서였다. 그러던 중에 김동삼의 옥사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중략) 1937년 봄, 심우장에서는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가 있었다. 차가운 관속에 누워 있었을 김동삼 선생의 시신, 그 관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한용운, 묵묵히 조사를 읽어갔을 조헌영,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지켜봤을 청년 조지훈이 그곳에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상황이었고, 식민지 안에 심우장만이 조선 땅으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바로 그 장면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02-203쪽, 207-208쪽
  • 1. 성북동의 문화재 ○ 서울시 기념물 - 서울시 기념물 제7호 : 만해 한용운 심우장 -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성북동) - 지정일 : 1984.07.05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1쪽
  • 그 때문인지 문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문인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에도 이미 김일엽, 김기진, 이종린 등이 성북동에 살았고, 만해 한용운도 이태준과 같은 해에 심우장을 짓고 성북동 생활을 시작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23쪽
  • 다음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태준의 수연산방과 한용운의 심우장이다. 공교롭게도 두 집 모두 1933년에 지어졌다. 두 집 모두 큰 규모의 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번듯한 기와집이었고 상당한 공사비가 들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태준의 경우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이라는 번듯한 직업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한용운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의 도움 등 주변 지인들의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정도의 집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28쪽
  • 대문 안 마당 바로 왼쪽에는 소나무, 오른쪽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각각 서있고, 그 오른쪽 모서리에는 한용운이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유한 성북동 송림의 심우장에서 만해는 큰 안정을 얻고 「산거」라는 시를 남긴다.
  • 만해 한용운 심우장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독립지사이자 시인이며 승려였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생이 1933년부터 1944년 입적할 때까지 11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거처했던 한옥이다. 만해 한용운은 1910년에는 불교의 변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으며, 1919년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발기인 33 인에 참가하고 3·1독립선언문의 「공약삼장」을 작성하였다. 1926년에는 근대 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님의 침묵』을 펴냈으며, 1927년에는 좌우합작으로 중요한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으 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택호인 심우장은 불교의 선종화 심우도尋牛圖(또는 시우도十牛圖)에서 따온 것이다. ‘심우’란, 본성을 찾아 수행하는 단계를 동자가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서 묘사한 10단계 중 첫 번째 단계를 말한다. 사랑방 위쪽에 걸린 편액은 서예가 일창 유치웅이 1980년대에 쓴 것이다. 심우장은 일반적인 가옥처럼 남향이 아니라 ‘북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남향으로 집을 지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러 북향으로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 심우장 입구에 만해 산책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심우장 관람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가능하다. 매년 6월 29일 선생의 기일에 성북문화원 주관으로 추모 다례가 열린다. 찾아가는 길 버스 : 1111번, 2112번 버스를 이용,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혹은 서울다원학교 정류장에서 내려 도보 5분. 03번 마을버스를 이용, 북정마을 노인정 정류장에서 내려 도보로 3분. 지하철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 6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30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68-269쪽
  • 성북구 성북동 222번지에 있는 「尋牛莊」은 그가 晩年을 보낸 집이다. 이 집은 그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출옥하여 夫人兪氏와 어린 딸 英淑과 함께 갈 곳이 마땅치 않아 곤란에 처했을 때 金鐵中씨가 그의 형 廷國이 東亞日報 大吸支局長으로 떠났으므로 형의 집에 萬海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때 金碧山스님이 자기가 草堂을 지으려고 松林 속에 사둔 52평을 드려 집 지을 것을 권유하매 부인 유씨의 소지금 약간과 당시 朝鮮日報社 方應謀사장 외 여러명의 도움으로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는 南向의 좋은 집터를 마다하고 그 반대편 산비탈 北向터에 집터를 정하였으니 그것은 日帝의 總督府가 보기 싫어서 등을 지고 집을 지은 것이다. 이 집을 尋牛莊이라고 이름한 것은 그가 萬海라는 號이외에 筆名으로 五歲人·城北學人·牧夫·失牛 등을 가끔 썼는데 소를 키운다는 뜻인 牧夫는 내 마음 속의 소를 키움은 우리 모두가 가야할 往生의 그 길을 멈출 수 없음을 나타낸 의미심장한 뜻을 가지고 있다. 즉 尋牛莊이란 불교의 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 것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48-749쪽
  • 성북동 222번지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이 있다. '심우장(尋牛莊)'이란 이름은 한용운 선생의 또 다른 호인 '목부(牧夫)'에서 유래된 것이며, ‘내 마음속에 소를 키운다’는 뜻으로 불교의 무상대도를 깨우치기 위해 늘 정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심우장을 건축할 때 볕이 잘 드는 남향에 지을 수 있었으나, 그는 남향은 일제의 총독부를 마주하는 곳이라 하여 산비탈에 북향으로 집을 짓게 했다고 전한다. 만해 선생은 이 심우장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생애를 보내면서 그들의 감시와 유혹에도 굽히지 않고 조국의 광복을 빌고 또 빌었으나, 광복 1년 전 이곳에서 운명하였다. 그런데 심우장 건너편 대교 단지에 여러 다른 나라 대사관과 함께 일본 대사관도 자리잡게 되었으니, 심우장을 지키던 만해 선생의 딸 한영숙 씨는 한때 이곳을 만해사상연구소로 사용하게 하고 명륜동으로 이사하였다. 심우장의 고인이 쓰던 방에는 만해의 글씨, 유고, 초간본, 송수첩, 옥중공판기록, 만해선생 연구논문집들이 그대로 있다. 현재 성북구에서는 심우장을 1999년 말까지 이 주변의 도로를 확장하고 환경을 정비하여 주민들을 위한 휴식공간과 역사학습장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만해 선생이 남긴 시조 「심우장」를 읊어보면 그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잃을 소 없건 만은 찾을 소 우습도다 만일 잃을 소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닐쏘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다
    양보경, 1998, (사연이 깃든) 성북의 유래, 47-48쪽
  • 성북동에는 3.1운동 때 33인의 한사람인 萬海 韓龍雲이 살던 尋牛莊(성북동 222번지, 서울시 記念物 제7호)이 있다. 이 집은 3.1운동 후 한용운 선생이 총독부를 등지고 일부러 北向해서 지었는데 吳世昌선생이 尋牛莊이라고 문패를 써주었다. 한용운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광복을 1년 앞두고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이 집에는 외동딸인 韓英淑씨 가족이 거주하고 있고 선생의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63-764쪽
  • 성북로 1111번과 2112번 버스의 회차 지점 주위로는 만해 한용운 심우장,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터, 성북 우정의공원 등이 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78쪽
  • 심우는 <심우도(尋牛圖)>의 첫 번째 그림으로 소를 찾는 동자가 산 속을 헤매는 모습을 초발심의 단계에 비유한 내용이다. <심우도>는 선(禪) 수행의 단계를 소와 목부(牧夫)에 비유하여 열 폭으로 그린 그림이다. 한용운의 아호 중에는 ‘목부’가 있는데, 이는 소를 키운다는 뜻이다. ‘목부’는 ‘심우’와 같은 뜻으로, ‘심우장’의 ‘심우’란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뜻이고, ‘심우장’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즉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다.
  • 심우장 쪽도 인도가 별로 없고, 차도로 건너야 하고 차 중심이어서 걷기에 불편한 길이에요. (최성수)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122쪽
  • 심우장(성북구 성북동 222-1)의 ‘심우’란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뜻이다. 심우장은 불교의 무상 대도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즉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58쪽
  • 심우장尋牛莊은 만해 한용운萬海韓龍雲, 1879-1944이 1933년부터 살던 집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시인인 만해는 민족정신의 수호자이자 당대 사상계를 밝힌 등불이었다.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활발한 사회활동과 집필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있는 남쪽이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집을 세우고, 일제에 돌아선 변절한 지식인들은 문 안에 들이지 않았다. ‘심우장’은 불교의 선禪수행에서 처음 마음을 일으키는 단계에서 나온 말로,‘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려 공부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기와 지붕을 올린 한옥은 벽산 김적음 스님과 몇몇 지인들이 거처할 곳 없는 만해를 위해 마련해 준 것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만해가 거처할 때 석정 안종원의 글씨와 일주 김진우의 그림, 위창 오세창이 쓴 심우장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현재 방 위에 걸려있는 ‘심우장’ 편액은 위창이 쓴 것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성북동에 살았던 서예가 일창 유치웅一滄 兪致雄, 1901-1998이 쓴 것이다. 만해는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심우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심우장은 1985년 서울특별시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어, 만해를 기리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성북동 명소가 되었다. 만해는 떠났지만 그가 마당에 직접 심은 향나무가 주인을 닮은 기개와 푸르름으로 심우장을 지키고 있다.
  •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33년부터 입적하던 1944년 6월 29일까지 살던 집이다. 한용운 선생은 이 집에서 딸 한영숙 여사를 낳았고,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치렀다. 『흑풍』, 『박명』 등의 소설을 쓴 곳도 심우장이다. 한용운 선생의 사후에도 가족들은 이 집을 지키고 살았고, 이후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는 성북구청이 구입하여 관리 중이다.
  • 심우장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독립운동가이자, ‘님의 침묵’을 지은 시인이며,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불교개혁을 외치기도 했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55세 되던 1933년부터 1944년 6월 29일 입적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심우(尋牛)’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수행자가 본성을 깨달아 가는 10단계 과정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심우도(尋牛圖)라고 하는데, 심우의 단계는 이 가운데 첫 단계이기도 하다. 심우도의 마지막은 본성을 깨달은 수행자가 다시 대중 속으로 향하는 것이다. 즉 심우장은 한용운 선생이 인간의 본성을 깨우쳐 다시 대중 속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지은 이름이며, 이는 그가 평생 주장했던 대중 속의 불교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심우장은 벽산 스님이 땅을 제공하였고, 수학교사인 최수동이 설계하였으며, 방응모와 박광, 그리고 아내 유숙원 등이 자금을 보태어 만들어졌다. 또한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한용운은 이곳에 거처하며 그의 또 다른 본거지인 선학원을 출입, 불교 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흑풍』을 집필하는 등 문학 활동도 이어갔다. 독립투사 일송 김동삼 선생의 영구(靈柩)를 수습하여 장례를 치른 곳도 바로 이곳 심우장이었다. 한용운 선생의 딸인 한영숙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심우장에서의 삶은 가난했지만, 밥을 굶을 정도로 궁핍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43년 겨울, 중풍으로 쓰러진 후 한용운 선생의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광복 1년여를 남기고 그는 세상을 달리한다. 그의 나이 66세 되던 해였다. 심우장은 현재 성북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록 한용운 선생은 가고 없지만, 그의 손때가 묻은 건물 안을 들어가 볼 수도 있고, 그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도 그대로 남아 있다. 심우장에서 한용운 선생의 자취를 느끼고, 그의 시를 읽으며, 치열했던 그의 독립운동과 삶을 되새겨 보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귀한 경험이 될 것이다.
  • 심우장은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이 1933년에 지은 집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중국에 망명하여 의병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의 훈련장을 돌면서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민족대표 33명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선생은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1944년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조선불교유신론』, 『님의 침묵』 등이 있다. 심우장의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옆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 기와집으로, 선생은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 하여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심우(尋牛)란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뜻이라고 한다.
  • 심우장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인 역(逆) ‘ㄴ’자형 집이다. 중앙에 대청 두 칸을 두고, 왼쪽인 동쪽에는 서재로 쓴 온돌방 한 칸, 오른쪽으로는 부엌 한 칸이 있으며, 부엌에서 남쪽으로 꺾여 나간 곳에 찬마루 한 칸을 두었다. 서재로 쓰던 온돌방 밖 북쪽에는 위창 오세창이 전서체(篆書體)로 쓴 ‘尋牛莊(심우장)’이 걸려 있다. 방에는 이당 김은호의 포대화상(布袋和尙) 그림, 일주 김진우의 대나무 그림(竹畵), 석정 안종원의 글씨를 족자로 걸어두고 보았다. 또한 중국판 불경 등 수백 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 지금도 성북동 끝자락에는 만해 한용운의 마지막 거처인 심우장이 있다. 그리고 조금 내려오면 조선시대의 부호였던 이종석의 별장이, 그리고 그 아래에는 상허 이태준의 집인 수연산방이 남아 있다. 거기서 발걸음을 재촉해 내려가면 간송 전형필이 만든 보화각이 있고, 조금 더 걸으면 조선시대, 아마도 처음 성북동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선잠단지가 있다. 선잠단지에서 길을 건너면 혜곡 최순우가 깊은 산속 같은 사랑에 앉아 부석사 무량수전을 떠올렸을 그의 집, 최순우 옛집이 있다. 선잠단지를 끼고 위로 올라가면 의친왕 이강이 궁을 그리워하며 울분을 삭였을 성락원, 그리고 다시 올라가면 최고 요정에서 맑고 아름다운 사찰로 바뀐 길상사도 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4쪽
  • ㆍ심우장이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 (한용운, <심우장설> 참고) 한용운, 「심우장설」(1937. 6.) 필자는 성북동의 일우(一隅)에 소거(所居)를 복(卜)하고 심우장(尋牛莊)이라 명명하였다. 심우(尋牛)라는 뜻은 일반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어서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심우장」이라는 문패를 보고서 “심우장? 심우장? 아마 이것이 목장인가 보다”하는 말을 하게 되는 것도 그다지 괴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소(牛)는 비유로서 불교 중에 많이 쓰이는 것이거니와, 그 유래를 간단히 들자면 … (이하 생략)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03쪽
  • 1984년 7월에 심우장이 서울시 기념물 제 7호로 결정이 된 거죠. 개인이 살던 집을 문화재로 지정받은 첫 번째 케이스가 되었어요. (전보삼 경기도박물관장)
    성북문화원, 2015, 성북문화 제3호, 19쪽
  • (인터뷰 진행자) 만해 한용운 선생님이 심우장에 계실 땐 어떻게 생활하셨고, 그때의 심우장은 어땠는지 들려주신다면? (전보삼 경기도박물관장) 집 구조는 지금하고 같은데요, 만해는 사랑방에 기거하셨죠. 그 당시 장서는 불경 등 포함해서 100권정도 되고요, 제자나 만해를 좋아하던 지인들인 권동진, 유창환, 안종원 등이 서예작품이나 서화, 현판 등을 써서 갖다 준 게 있었죠. 오세창 선생께서는 “심우장”이란 현판을 써주신 것이 그 중 하나고요. 지금은 없어진 것이 많아 참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그리고 심우장에 얽힌 이야기를 몇 가지 들려드린다면, 당시 심우장이 지어질 때 북향으로 지어졌는데, 이게 만해 선생이 총독부를 보기 싫어서 이렇게 지은 거라고 해요. 그리고 만해 선생은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지내셨어요. 조선이 일제에 강점되어 내내 차가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어떻게 불을 땔 수 있겠느냐면서요. 그러면서도 힘겨운 청년들이 찾아오면 따뜻하게 잘 대해줬어요. 격려도 많이 해줬고요.
    성북문화원, 2015, 성북문화 제3호,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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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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