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종원
1915.05.13 - 2001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교육가
인물 개인 학자
평론가이자 교육자이다. 1938년 『만선일보』에 수필 「이역에 젖은 애상」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으며, 1942년 『매일신보』에 「문학의 함축성」을 발표함으로써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4월 ‘조선청년문학협회’를 결성하고, 김동리, 조연현 등과 함께 일체의 정치적·사회적 이념을 초월한 본격 문학에 매진함으로써 프로문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하지만 그의 대표적 평론 중 하나인 「결전 문학의 이념」을 비롯하여, 『동양지광』, 『매일신보』등에 기고한 6편의 저작물이 친일 평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3년 성북구 돈암동 산3-1에 세워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의 교수로 있었으며, 이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숙명여대 총장 직무대리와 건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돈암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산3-1
  • 비고: 서라벌예술대학(활동)

근거자료 원문

  • 곽종원(郭鍾元) 1915-2001 춘파(春波) 평론가·교육자. 경북 고령 출생. 1938년 《만선일보》에 수필 「이역異域에 젖은 애상」을 발표했고, 《매일신보》에 「문학의 함축성」을 발표함으로써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예술원 문학분과 회장, 예술진흥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 1956년 4월 미아리고개 너머 산을 깎아 만든 자리에 서라벌예술대학의 3층짜리 교사가 지어졌다. 1953년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대학이 새로 건물을 짓고 돈암동 산3-1번지로 이사를 온 것이다.‘ 문인 사관학교’라고 불린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에는 김동리를 비롯해 당대 최고의 시인 서정주, 안수길, 박목월, 곽종원, 이광래, 정태용, 김구용, 양원달 등이 교수로 있었다.
  • 정의 해방 이후 『신인간형의 탐구』, 『사색과 행동의 세월』, 『사색의 반려』 등을 저술한 평론가. 문학평론가. 생애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났다. 호는 춘파(春波)이고, 일제 말기에 이름을 암곡종원(岩谷鍾元)으로 바꿔 창씨개명에 참여하였으며, 그의 대표적 평론 중 하나인 「결전 문학의 이념」이 『국민문학』(1944년 4월호)에 발표되는 것을 비롯하여, 『동양지광』,『매일신보』등에 기고한 6편의 저작물이 친일 평론으로 평가받았다. 1941년일본대학(日本大學) 문과를 졸업했고, 만주에서 남만공업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55년부터 1968년까지는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숙명여대 총장 직무대리와 건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활동사항 1938년『만선일보』에 수필「이역에 젖은 애상」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해방공간에서 김동리, 조연현 등과 함께 그가 주간으로 있던 『생활문화』의 ‘토요회’를 모태로 1946년 4월 4일 ‘조선청년문학협회(약칭 청문협)’를 결성하였다. 그의 비평 활동은 김동리, 조연현 등과 함께 일체의 정치적·사회적 이념을 초월한 본격 문학에 매진함으로써 프로문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적 현실을 인도주의와 생명주의로 파악하는바, 새로운 유형의 창조, 즉 신인간형을 작가에게 주문했다. 그의 신이상주의와 신인간형은 문협 정통파의 문학관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이론의 기반이 되었다. 특히 그는 과학과 이데올로기란 이름으로 불리우는 비평과 거리를 두는 감성주의 비평의 태도를 견지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0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곽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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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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