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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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이름이다. ‘아리랑고개’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홍봉진이 1929년 ‘상춘원’이라는 요리집의 위치를 홍보하기 위해 ‘신흥사(흥천사) 옆 아리랑고개’라는 문구를 사용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설, 1930년대 일본인들이 정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용하여 고급 음식점을 꾸미고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길목에 붙여 널리 알렸다는 설, 1926년 나운규가 발표한 영화「아리랑」의 배경이 되어 널리 알려졌다는 설 등이 있다. 성북구에서는 1997년에 아리랑고개를 ‘영화의 거리’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기념가로수와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등 영화의 거리로 특화함으로써 전통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명소로 탈바꿈시켰다.
정릉동 돈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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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정릉고개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아리랑로)
  • 비고: 도로명칭

근거자료 원문

  • 성북구 전체로 보자면 조정래씨의 ‘한강’이라는 소설은 아리랑고개가 배경입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84쪽
  • 서울의 길 아리랑 고개 -돈암사거리~정릉 아리랑고개- 성북구 동소문동5가 76 돈암 사거리에서 동소문동 돈암동을 거쳐 정릉2동 139의 7 아리랑시장 앞에 이르는 너비 15m, 길이 1천 4백 50m의 지선도로. 서울시내 2백 50여개 도로명 가운데 유일하게 ‘고개’란 이름이 붙은 이 길은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정릉고개의 옛 이름이 아리랑고개였던 데서 유래됐다. <중략> 이 길 옆에는 흔히 新興寺라 불리는 興天寺가 있는데 이 절은 李朝 태조 5년(1396)에 왕의 발원으로 현재의 세종문화회관 별관자리에 세워졌으나 그 뒤 여러 곳을 전전하다 정조 18년(1794)에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절은 태조가 총애하던 神德王后 康氏가 숨지자 시신이나마 가까이 두고자 능을 경복궁에서 바라다 보이는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조성하고 그 원당(願堂)으로 세운 곳. <후략> 『경향신문』 1988. 8. 10.
  • ⑭ 아리랑고개 아리랑고개는 돈암동 4거리(동소문동 5가 76) 를 기점으로 하여 동소문동과 돈암동을 지나 정릉길과 교차하는 아리랑시장앞(정릉동 139-7)까지에 이르는 폭 15m, 길이 1,450m의 支線道路이다. 아리랑고개라는 명칭은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유서깊은 아리랑고개(일명 정릉고개)가 있으므로 붙여진 것인데 서울의 가로명중 “고개”라는 명칭으로 유일한 것이다. 아리랑고개의 명칭유래는 1935년경에 요리업자들이 정릉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용하여 고급요정을 꾸미고 손님을 끌기 위하여 이 고개에 길을 닦고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아리랑」의 이름을 따서 「아리랑고개」란 표말을 이 고개 마루턱에 세우고 고개너머 좋은 놀이터가 있음을 선전한데서 연유되었다 한다. 이 길이 개설된 연대가 日帝時代인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으나 光復後의 공사기록으로는 1961년에 2차에 걸쳐 「돈암동∼정릉동간 도로확장공사 및 정릉교 가설공사」가 시행된 바 있는데, 폭 8m에 1,810m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의 노폭으로의 확장은 확실치 않으나 1970년대 중반인 것으로 짐작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56-357쪽
  • 동선 제2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아리랑고개길」(돈암4거리∼전병원앞∼아리랑시장)은 폭 15m, 길이 1,450m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다, 이 길이름은 1984년에 제정된 것인데 그 이유는 아리랑고개가 있기 때문이다. 이 고개이름은 우리민족의 대표적 민요인 아리랑 노래를 붙인 것이다. 고개이름의 유래는 1935년경에 일본인들이 貞陵일대를 개발하고 요정을 꾸민 다음 이곳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고개 위에 아리랑고개라고 푯말을 세운 것이라는 설이 있고, 1929년에 홍봉진씨가 가정교사를 할 때 그 집주인이 정롱에 상춘원이라는 요리집을 내면서 선전광고문을 부탁했으므로 이를 써주면서 고개 마루턱 老松가지에다 「아리랑고개」라고 써서 매달았기 때문에 연유되었다는 것이다. 「아리랑고개길」은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신흥사 부근의 대형음식점을 찾아 회갑연에 참석하려는 사람으로 교통혼잡이 심하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79쪽
  • ○ 현대인들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사랑방 휴식처 61 전통과 문화가 조화 이룬 명소 중의 명소 -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아리랑고개는 좌절과 시련의 역사, 그리고 이를 극복한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 아리랑고개는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넘던 고개였고, 눈물을 흘리며 걷던 고개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실존의 고개이든 상징의 고개이든 아리랑고개가 많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를 주제로 한 영화가 만들어져 민족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아리랑고개는 돈암사거리를 기점으로 서쪽으로 동소문동, 동쪽으로 동선동을 지나 돈암동, 정릉길과 교차하는 아리랑시장 앞까지의 도로를 일컫는다. 서울 시내의 거리 이름 가운데 길이 아닌 고개로 부르는 유일한 도로다. 춘사 나운규는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 <아리랑>을 1926년에 발표하였다. 성북구민의 날을 기념하여 매년 아리랑축제를 개최해 온 성북구에서는 1997년에 아리랑고개를 ‘영화의 거리’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기념가로수와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등 영화의 거리로 특화함으로써 전통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명소로 탈바꿈시켰다. 아리랑고개 곳곳에는 아리랑쉼터와 나운 소공원등의 휴식공간이 조성되어 가족나들이 장소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10-111쪽
  • ○ tour tip >>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영화 내용은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광인 청년과 그의 여동생, 광인의 친구들이 벌이는 사랑과 살인에 관한 것이다. 실성한 청년 영진은 마을을 휘젓고 다닌다.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 현구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영희를 비롯한 마을사람들은 반갑게 맞이하지만, 영진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마을에서 풍년잔치가 열리던 날 사람들이 흥에 겨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부잣집 관리인인 오기호는 혼자 집에 있던 영희를 욕보이려 덤벼든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영진은 오기호에게 달려들어 싸움을 벌이던 끝에 살인을 하고 만다. 흥겹던 마을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지고 포승에 묶인 채 순사 손에 끌려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을 바라보며 ‘아리랑’ 노래가 구슬프게 흘러나간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12쪽
  •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아리랑고개는 좌절과 시련의 역사, 그리고 이를 극복한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 아리랑고개는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넘던 고개였고, 눈물을 흘리며 걷던 고개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아리랑고개가 많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를 주제로 한 영화가 만들어져 민족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아리랑고개는 돈암 사거리를 기점으로 서쪽으로 동소문동, 동쪽으로 동선동을 지나 돈암동, 정릉길과 교차하는 아리랑시장 앞까지의 도로를 일컫는다. 서울 시내의 거리 이름 가운데 길이 아닌 고개로 부르는 유일한 도로다. 춘사 나운규는 1926년에 발표한 영화 <아리랑>의 배경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성북구민의 날을 기념하여 매년 아리랑 축제를 개최해온 성북구에서는 1997년에 아리랑고개를 '영화의 거리'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기념가로수와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등 영화의 거리로 특화함으로써 전통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명소로 탈바꿈시켰다. 아리랑 고개 곳곳에는 아리랑 쉼터와 나운규 소공원 등의 휴식 공간이 조성되어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 한편, 홍봉진(1903~1979)이라는 사람이 쓴『양촌일지陽村日誌』에 아리랑고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동대문 밖 삼선평三仙坪을 지나 신흥사 옆으로‘아리랑고개’를 넘으면 옥수 청류玉水淸流가 흐르는 시냇가에 기암奇岩과 청송靑松으로 울鬱을 삼아 깨끗이 지어 놓은 상춘원賞春園을 찾아오시면 미식주효美食酒肴로 값싸게 대접하여 드리겠다. 이는 1929년 홍봉진이 숭인면장을 지내고 요릿집‘상춘원’을 연 부호김씨의 부탁을 받아 광고를 만들면서 고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당시 상춘원이 신흥사의 고갯길로 올라가 후미진 곳에 있어 찾기가 어렵자, 홍봉진은 고갯길 당집 앞 노송의 가지에‘아리랑고개’라고 쓴 간판을 매달고 광고문에 상춘원을‘신흥사 옆 아리랑고개’에 있다고 알렸다. 그런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영화 <아리랑>에 나오는 아리랑고개가 이곳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홍봉진은 영화와 관계없이 붙인 이름이라는 기록을 남겼으나, 상춘원의 선전 광고문을 걸었던 고개를 지금까지 아리랑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아리랑고개는 좌절과 시련의 역사, 그리고 이를 극복한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 아리랑고개는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넘던 고개였고, 눈물을 흘리며 걷던 고개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실존의 고개이든 상징의 고개이든 아리랑고개가 많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를 주제로 한 영화 「아리랑」을 발표하는데, 아리랑의 마지막 장면이 이곳 아리랑고개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성북구의 날을 기념하여 매년 아리랑축제를 개최해온 성북구에서는 1997년에 아리랑고개를 ‘영화의 거리’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기념가로수와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등 영화의 거리로 특화함으로써 전통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명소로 탈바꿈시켰다. 가족과 함께 아리랑고개에서 영화 「아리랑」을 회상하고, 민요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옛 이야기에 젖어보면 어떨까? 아리랑 고개에 위치한 아리랑시네센터와 아리랑정보도서관에서 영화와 책을 함께 만나는 이색체험도 해보길 권한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62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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