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암동
1949.08
장소 인문지리
성북구에 위치한 행정구역인 동의 하나이다. 예전에 현재 대광아파트 단지 가운데에 20여 명이 앉아 쉴 만한 큰 바위가 있어 ‘앉일바위’라 불렀고, 한자로 ‘안암’이라고 썼는데 여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안암동은 조선시대 한성부에 속해 있었으며, 1911년 4월에는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안암리, 1914년 4월에 안암리, 부석리, 궁리, 원리를 경기도 숭인면 안암리로 개편하였다. 1936년 경성부 확장 때 편입되어 안암정이라 칭하였고 1943년 6월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1946년 10월 안암정에서 안암동으로 바뀌었으며 1949년 8월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의 안암동은 1975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확정된 것이다.
안암동
  • 안암동, 종암동 일대 항공촬영 사진
  • 고려대학교와 주변 안암동 전경
  • 안암동·동선동·삼선동 전경
  • 안암동 전경
  • 심야위생업소단속(안암지역)
  • 심야위생업소단속(안암지역)
  • 심야위생업소단속(안암지역)
  • 심야위생업소단속(안암지역)
  • 서광BD에서안암대광맨숀APT
  • 안암동 1가 한옥밀집지구
  • 안암동 청사
  • 안암역 사거리(안암로터리 방면)
  • 성신여자대학교와 주변 모습(1996)
  • 2014 안암동 은행나무 축제(6)
  • 개운산 전경(3)
  • 고려대학교 본관 주변 전경
  • 안암2구역 풍경(2)
  • 안암2구역 풍경(1)
  • 안암2구역 전경
  • 안암동 일대와 고려대학교
  • 안암. 보문동 전경
  • 안암동3가 경로당 개원식(1)
  • 안암동3가 경로당 개원식(2)
  • 개운산 전경(5)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安岩洞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1949.08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근거자료 원문

  • ‘앉일바위’라 하던 것을 한자로 옮겨 쓴 것에서 유래된 안암동 안암동은 문헌에 나타나는 서울의 동명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안암이라는 동명 유래는 문헌상으로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예전에 안암동 3가의 대광아파트단지 가운데에 20명이 앉아 편히 쉴만한 큰 바위가 하나 있었다. 그 바위 이름을 ‘앉일바위’라 했고 한자로는 ‘안암’이라 옮겨 썼는데 여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안암동은 조선시대 한성부에 속해 있었으며, 조선 말기 고종 때 발간된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 안암계로 되어있다. 갑오개혁 때는 한성부의 행정조직이 부(府) 대신 서(署)로 고쳐져서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 문외계 궁리, 원리로 칭하였다. 한일병합 후인 1911년 4월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안암리가 되었고, 1914년 4월에 안암리, 부석리, 궁리, 원리를 경기도 숭인면 안암리로 개편하였다. 그 후 1936년 4월 경성부 확장 때 편입되어 경성부에 속하게 되면서 안암정이라 칭하였다. 1943년 6월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고 광복 후 1946년 10월 안암정에서 안암동으로 바뀌었다. 1949년 8월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으며 안암동 1~5가로 구분되었 다. 1955년 4월 동제 실시에 따라 종전의 동회제도 대신 행정동이 설치되면서 안암동은 동암, 남암, 서암의 3개 동으로 구분되었다. 이 3개 동은 그 후에 안암 제1동, 제2동으로 고쳐졌다가, 1977년 관할구역 개편이 있을 때 다시 안암동 1개동으로 통합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5년부터 자신의 능지를 정할만한 산지를 찾아 산수 좋 은 곳을 왕래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안암동은 태조의 능 지로 지목되었다. 1396년 8월에는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난 후 태조가 흰 옷에 흰 관을 쓰고 능지를 친히 보러 안암동으로 나갔으니, 그가 일찍부 터 안암동 산록의 지리에 많은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 달 21일에 다시 안암동으로 나가 산지를 정하고 이튿날에 땅을 파보니 물이 솟아나서 중지하고, 그 다음날 취현방, 즉 지금의 중구 정릉으로 나가서 능지를 정하였다. 1406년 9월에는 태종이 안암동 검교 호조전서 김식의 집을 수리하게 한 뒤 이어하기도 했다. 이로 보아 태종 역시 안암동 일대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암동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성 밖 지역에 속하였는데, 승려들이 많이 모여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411년 6월 승도들의 초막을 철거시킨 기사가 있 는데 그 기사에는 안암, 사을한 등 성북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안암동 일대는 사냥터로도 쓰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곳에 일반인의 경작을 금하고 나무를 심어 산맥을 보호하게 했기 때문이다. 1914년, 안암리로 칭하던 시기에 궁리(궁말), 원리, 부석리까지 포함시켰 다. 궁리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과 그의 아들 영순군이 거주했던 데서 유래한 것이고, 원리는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묘소 영명원이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 이 원은 속칭 ‘애기릉’이라고도 한다. 궁리는 광평대군 세거지였을 뿐 아니라, 태조의 일곱 번째 아들인 무안군 방번과 그 부인 왕씨, 광평대군과 그 부인 신씨,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과 그 부인 최씨 3세대를 봉사하는 광평대군 일가의 사당이 있어 ‘사당말’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였다. 안암동 5가와 동대문구 제기동 사이에 있는 안암로 큰길의 나지막한 고 갯길로 제터고개라는 곳이 있다. 옛날 제사 드리던 터가 있는 부근이라 하여 얻어진 이름이며, 그 부근 마을 이름 또한 ‘제터’로 불려왔다.
  • 城北區에 취락이 형성될만한 곳은 비교적 평탄한 안암동·종암동 일대였다. 安岩洞은 문헌상 나타나는 서울의 洞名중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다. 李成桂는 한양으로 천도한 이듬 해인 太祖 4년(1395) 자신의 萬年幽宅을 찾아 果川·廣州 등을 돌아보고 그해 9월 28일에는 安岩洞에 거동하였다. 그 이듬해 여름에도 왕비 神德王后 康氏가 세상을 떠나자 그 陵地를 찾아 안암동에 내왕하였다. 그 지세가 풍수지리상으로 좋았기 때문인데, 그후 이곳은 世宗의 다섯째 아들인 廣平大君의 세거지였으니 명당이었음이 알려졌음에서였다. 실제로 광평대군의 자손은 그후 번창하여 李氏王族 중에서도 후손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이 일대의 농토가 비옥하였음은 태종 때의 제상 朴訔의 일화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인근의 典農洞·祭基洞·龍頭洞 일대에는 조선시대 국왕이 솔선수범하여 농사짓는 모습을 보여주던 籍田과 농사가 잘되기를 국가적으로 기원하던 先農壇이 있었다. 이로써 볼 때도 이 부근에는 농경이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2쪽
  • 安岩洞 安岩川과 「安岩路」를 끼고 있는 安岩洞은 전에 安岩洞3街의 大光아파트團地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어 20여명이 앉아 편히 쉴만 하므로 그 바위 이름을 「앉일 바위」라 하던 것을 漢字로 옮겨 쓴 것이 洞名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안암동은 조선초부터 漢城府에 속해 있었으며 조선말 高宗 4년(1867) 에 발간된 『六典條例』에는 한성부 東部 崇信坊(城外) 安岩契로 되었고 甲午改革때에는 한성부 東署 崇信坊(城外) 東門外契 宮里, 園里로 칭하였다. 한일합방 후 日帝는 1911년 4월 1일(京畿道令 제3호) 경기도 京城府 崇信面 安岩里로 되고, 1914년 4월 1일(京畿道令 제1호)에 安岩里, 剖石洞, 宮里, 園里를 경기도 崇仁面 安岩里로 하였다. 그 후 1936년 4월 1일(總督府令 제8호) 京城府 확장 때 편입되어 京城府 安岩町이라 하였다. 1943년 6월 10일 東大門區에 속했고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安岩町은 安岩洞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1949년 8월 15일 城北區의 신설로 이에 속했으며 安岩洞은 1, 2, 3, 4, 5街로 구분되었다. 1975년 10월 1일(市條例 제979호) 安岩橋에서 高麗大學校 理工大앞에 이르는 안암동 동남지역 일대의 安岩 洞4, 5街의 일부가 東大門區의 龍頭洞과 祭基洞으로 개편되었다. 고려대학교 뒷산에서부터 開運寺를 돌아 남쪽으로 뻗어온 安岩山麓을 중심으로 한 덤바위, 북바위 등의 바위는 鐘岩, 鼓岩 등의 地名, 洞名을 남겨 전한다. 북바위(鼓岩)는 고려대학교 구내에 있었던 북같은 모양의 바위라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이 북바위부근을 학더미라고 했는데 그 유래는 옛날 이곳의 논이 매우 肥沃하여 세 마지기 (3斗落)에서 나는 쌀로 10여 식구가 살아갈 수가 있었는데, 어느날 욕심많은 주인이 곡식을 더 많이 내어 먹으려고 논 가운데 있는 큰 더미를 파들어 가자 속에서 학이 나와 날아가고, 그 후로는 비옥하던 땅이 薄土로 변하였다고 전해온다. 이 북바위 부근의 논은 조선초 太宗이 예조판서 등을 지낸 朴訔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洞의 史蹟으로는 開運寺와 이 절의 암자인 普陀寺 내에 磨崖白佛이 있다. 개운사는 현재 조계종이지만 최근까지 太古宗에서 관리하여 1955년에 帶妻僧 주최로 全國布敎師大會를 이 절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이 절은 조선초 태조 5년(1396) 無學大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처음에는 高麗大 理工大學 부근에 절을 짓고 永導寺라고 했는데 正祖 3년(1779) 5월에 후궁 元嬪 洪氏가 세상을 떠나자 영도사 자리에 묘소를 정했으므로 이곳으로 이전하여 開運寺로 개청했다. 이 절은 현재 대대적인 重建計劃을 세워 추진하고 있으며 경내에는 洋式건물로 지은 僧伽大學이 있다. 이 절 동쪽 골짜기에는 大園庵과 普陀寺(안암동 5가 157)가 있는데 보타사 대웅전 뒤의 암벽에는 5m 크기의 磨崖白佛이 있어서 1992년 6월에 「서울 鄕土史學會」에서 확인, 고증해서 서울특별시와 문화재 관리국에 문화재 지정을 요청했다. 1914년에 安岩里로 칭할때 宮里(궁말), 園里, 剖石里까지 포함시켰는데 宮里는 世宗의 5男인 廣平大君과 그의 아들 永順君이 거주했기 때문이고, 園里는 元嬪 洪氏의 묘소인 永明園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安岩洞 1, 2, 3, 4, 5街의 행정은 安岩洞事務所에서 담당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83-784쪽
  • 〈安岩洞〉 安岩洞은 安岩洞 1, 2, 3, 4, 5街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 명칭이다. 이 洞은 1936년 4월 1일 京城府에 편입되고 나서 安岩東部町會와 安岩西部町會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安岩東部洞會와 安岩西部洞會로 바뀌었다. 이 당시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785쪽 표 참조). 그 후 1955년 4월 18일(市條例 제66호) 「洞制」실시에 따라 안암동 5가 일원을 東岩洞事務所, 안암동 3, 4가 일원을 南岩洞事務所, 安岩洞 1, 2가 일원을 西岩洞事務所관할구역으로 정했다. 이어서 1970년 5월 18일(市條例 제613호)에 안암동 1, 2, 3, 4가를 安岩第1洞事務所, 안암동 5가를 安岩第2洞事務所로 정했으며 1977년 9월 1일(市條例 제1185호) 안암동 1, 2, 3, 4, 5가를 安岩洞事務所로 통폐합했다, 이 洞관내의 안암동 5가는 안암동 지역의 2/3를 점유하는데 대부분 고려대학교와 이공대학 및 의대 부속병원이 들어서 있고 나머지 1/3지역은 주택가이다. 이 洞남쪽은 「안암로」(대광고교∼안암동∼종암동3거리)가 지나고 서쪽은 안암천을 끼고 「안감내길」이 있으며 동서로 관통하는 「仁村路」가 있다. 우리나라 私學의 名門인 高麗大學校(안암동 5가 1) 는 光武 9년(1905) 李容翊에 의해 普成專門學校로 출발해서 孫秉熙 등 민족지도자에 의해 운영되다가 1932년 仁村 金性洙가 운영을 맡아 1934년에 이곳에 校舍를 건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本館과 舊圖書館은 史蹟제285호와 제28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후 1946년에 高麗大學校로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그 밖에도 龍門中高等學校(안암동 2가 96), 安岩國民學校(안암동 2가 93)가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1970년 이후의 안암동사무소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786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85-786쪽
  • 산과 하천, 그리고 사람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안암동의 모습은 직사각형을 기울인 모습(◇)을 하고 있다. 서남쪽은 성북천(혹은 안암천)을 경계로 보문동과, 남동쪽은 안암로를 경계로 동대문구 제기동과, 북동쪽은 개운산과 그 자락을 경계로 종암동과, 북서쪽은 동선동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이런 현재의 행정구역은 대체로 1975년 10월 1일 이뤄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한 것이다. 근대 이전의 안암동은 대체로 성북천 동쪽에서 개운산 자락 서쪽 사이의 지역(현재 안암동1가에서 4가 지역)에 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암동은 궁리宮里로도 불렸는데,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과 그 후손들이 살아서 붙은 이름이다. 그들이 살았던 집과 사당은 현 안암동 3가 지역에 있었다고 전한다. 안암이란 동명의 유래가 된 ‘앉일바위’가 있던 지역이 현 안암동3가에 위치한 대광아파트였다는 것도 옛 안암동의 중심지를 짐작케 한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10-211쪽
  • 안암동은 조선시대 한성부에 속했다. 고종 4년(1876)에 발간된 『육조조례六曹條例』에 따르면 안암동은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안암동계로 되어 있다. 이후 고종 32년(1895)에 한 차례 개편되었다. 이때 안암동은 한성부 동서 숭신방(성외) 동문외계에 속했으며 원리 · 궁리 · 상리 · 중리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안암동이 보다 작은 단위로 분할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다시 변화를 맞는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성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성외 지역을 8면제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안암동은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에 속하게 되었다. 경성부가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지만, 경성부의 위상 변화만 있었을 뿐 큰 변동이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 큰 변화는 1914년에 일어난다. 총독부는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를 발표한다. 경성부를 축소한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경성부(혹은 한성부)에 속해 있던 보문동 지역은 이때 분리되어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속하게 된다. 안암리 · 부석동 · 궁리 · 원리는 모두 합하여 안암리가 되었다. 다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은 22년이 지난 1936년 4월의 일이다. 조선총독부는 총독부령 8호를 발표했다. 경성을 다시 확대한 것이다. 이때 확대된 경성부의 면적은 기존 경성부 면적에 3.5배에 달한다. 안암동은 다시 경성부 안암정이 되었다. 1943년 구區제가 실시되면서 안암정은 동대문구에 속하게 된다. 해방 이후인 1946년 10월 1일에 발표된 서울시헌장과 미군정법령 제106호에 의해 일제식 지명이 우리식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때 안암정은 안암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이후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로 성북구가 동대문구에서 분리 · 신설 되는데, 안암동은 이때 성북구에 속하게 되며 1가~5가로 구분되었다.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6호에 의해 행정동제가 실시될 때 동암동, 서암동, 남암동이 설치되었으며, 1970년 5월 5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에 의해 동암동, 남암동, 서암동은 폐지되고, 안암 제1동과 안암 제2동이 설치되었다. 현재와 같이 안암동 전체를 하나의 주민센터가 관할하게 된 것은 1977년 9월의 일이다. 이때 이루어진 동 관할구역 개편으로 안암 제1동과 제2동은 모두 안암동으로 조정 통합되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13-214쪽
  • 안암동에는 궁리 혹은 원리라고 불리는 지명이 남아있다. 궁리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과 그의 아들 영순군이 거주하였으며, 그 일가의 사당이 세워진 것에서 유래했다. 이 사당에는 광평대군과 영순군, 영순군의 군부인이 배향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리는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묘소인 인명원이 있어 유래했다. 부석리라는 지명도 전하는데, 채석장이 잇어 얻어진 이름이다. 지금도 '돌뜨기말'이란 우리말로 불린다. 조선 초기 안암동에는 승려들이 많이 모여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 11년(1411) 6월 승도들의 초막을 철거시킨 기사가 있는데 그 기사에는 안암, 사을한 등 성북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성종 1년(1470) 9월 기록을 보면 안암사라는 사찰이 그 사이에 생겨났다가 철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가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1991년 고려대학교 부속 안암병원의 이전 개원과 2000년 지하철 6호선 개통이다.
    성북문화원, 2016, 성북문화 제4호, 298-299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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