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영단주택이라고 불리는 주택들은 조선주택영단이라는 현재의 LH공사 이전 주택공사의 전신인 공공기관에서 주관하여 지은 것들로, 재건주택, 부흥주택, 희망주택 등의 이름으로 지어졌다. 이들의 차이는 공공사업으로 주택을 지을 때, 건설비용을 어디서 지원했느냐에 대한 차이로 구분을 하기도 한다.
- 재건주택(후생주택) :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United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의 원조. 정부계획에 의거해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이 원조하는 자재 및 자금으로 건설, 관리하는 주택
- 부흥주택, 국민주택 : 정부시책으로 산업부흥국채발행기금 또는 귀속재산처리적금 중 주택자금융자에 의해 건설하여 분양 또한 임대하는 주택
- 희망주택 : 대지와 공사비를 입주자가 부담하되 자재에 한하여 영단에서 배정, 분양하는 주택
재건주택
재건주택의 평면은 田자 모양의 겹집 형식으로, 서울의 안암동에 최초로 49채를 지었다고 한다. 그 후 1954년에 주택영단은 성북구 정릉동, 동대문구 휘경동 등지에 계속해서 9평의 재건주택을 지었으며, 특히 성북구 정릉천변에 253호의 흙벽돌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해방 후 주택영단이 개발한 최초의 대규모 단지로 알려져 있다.
여러 주택의 도입과 건설로 과도기를 거친 후, 1957년부터는 시멘트 블록을 주 재료로 사용한 주택들이 건설되었다. 특히 시멘트 생산이 본격화된 1958년 이후부터 영단은 흙벽돌 대신 최초로 시멘트 블록을 사용해서 정릉에 2층 연립주택을, 우이동에는 국민주택을 건설하였다.
1950년대 대한주택영단에서 제안한 평면 계획의 초기에는 전면 2칸, 측면 2칸 형식이 제안되었다. 제일 처음 제안된 것은 안암동, 정릉동, 창천동에 1954년 건립된 9평 '田'字형 주택이다. 이 주택은 당시 자재 사정이 여의치 않아 흙벽돌로 된 조적식으로 지었으며, 연탄난방 방식을 채택했다. 우선 마루를 구석에 두고 2개의 침실 공간을 마련해두었다. 그리고 현관을 독립해서 남쪽에 계획했으며, 변소는 건물 내부 공간으로 하되 외부 출입 방식을 택했다. 현관이 있으나, 마루공간에서도 외부공간으로 직접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한 점도 새로운 요소라고 할 수 있다.
― 임창목,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2011
안암동 재건주택 단지의 위치는 현 안암동5가 우신향병원 북서쪽과 인촌로24길의 동쪽 지역으로, 1954년 기록에 따르면 안암동5가 103번지 일대에 49세대가 지어진 것으로 나와 있다. 현재 유일하게 원형을 잃은 채 남아 있는 안암동5가 재건주택의 기록을 살펴보면, 1954년 2월 9일 신축과 사용승인일이 문서에 기록되어 있고, 1988년 3월 31일에 증축되었다고 나와 있다. 현황기록을 보면, 1층은 흙벽돌조로 된 39.67㎡와 연와조로 된 9.92㎡의 두 건물이 있고, 2층은 연와조의 37.7㎡의 건물이 올려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1952년에 흙벽돌로 쌓은 재건주택이 지어졌고, 이후 마당 위를 막아 실내공간으로 사용하고, 1988년 2층을 올려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인촌로는 현재 고려대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