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암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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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안암동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능지와 신덕왕후 강씨의 능지를 정하기 위해 안암동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부지가 안암동으로 정해진 후 땅을 파보니 물이 솟아나와 부지가 옮겨졌지만, 산수가 아름답고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그 입지가 능지에 적합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안암이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조선 초 이 지역에 살던 한명회의 육촌 형제 한계희(韓繼禧, 1423-1482)가 인근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여 이를 기리기 위해 ‘편안할 안(安)’자가 붙어 안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안암은 이미 태조대부터 문헌상에 나타났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이름에 ‘편안할 안’자가 들어가는 것은 이 지역이 편안하고 살기 좋은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안암동
  • 안암. 보문동 전경
  • 각동(各洞)의 명칭(名稱)과 구획변경(區劃變更,) 돈암동등일부(敦岩洞等一部)를 보문동(普門洞)으로
  • 도성도 (도성 밖 동쪽 세부)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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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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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근거자료 원문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듬해인 1395년(태조 4)부터 수릉壽陵, 즉 자신의 능지로 정할 만한 산지를 찾아 산수 좋은 곳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안암동에 거동하여 수릉을 정할만한 곳을 구경했다. 또한 1396년(태조 5)에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가 세상을 떠난 이틀 후에 흰 옷에 흰 관을 쓰고 능지陵地를 직접 살피기 위해 안암동으로 나갔다. 이러한 기록들을 미루어보아 태조는 일찍부터 안암동의 산록과 지리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암동에 능지가 조성되는 일은 없었다. 안암동 산지山地를 정하고 땅을 파보니 뜻밖에 물이 솟아나서 중지하였고, 결국 다른 곳을 능지로 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보면, 안암동 지역은 산수가 아름답고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그 입지가 산릉터에 적합하게 여겨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일찍부터 사람들이 기거할만한 공간으로 대두했던 것이다. 이러한 안암동은 문헌상에 나타나는 서울의 동명洞名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이다. 앞서 밝혔던 『태조실록』의 기사뿐만 아니라 『태종실록太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등에도 안암동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1411년(태종 11) 6월 9일 승도僧徒들의 초막草幕을 철거시켰다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에 안암 지역에 대한 언급이 있다. 병조(兵曹)에서 승도(僧徒)들의 초막(草幕)을 헐어버리자고 청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게으른 승도(僧徒)들이 유명(有名)한 사사(寺社)에서 살지 아니하고, 역사(役事)를 면하기 위하여 남산(南山) · 안암(安巖)· 사을한(沙乙閑) 등지에 초막(草幕)을 얽고 재(齋)를 베풀어, 남녀(男女)를 모아다가 소나무와 잡목(雜木)들을 베고 그 뿌리까지 캐내는데 이르고 있사오니, 청컨대 초막들을 모두 철거해 버리시고, 정업원(淨業院) 이 외에는 산속의 여승방[尼僧房]을 금지하여, 이것 또한 모두 철거해 버리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중략) 한편 안암동 일대는 왕의 사냥터로도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1464년 (세조 10) 9월 19일, 왕과 신하들이 안암동 일대에서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있다.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에게 명하여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금일 첩종령(疊鍾令)을 행하였으니, 그것을 속히 통지(通知)하라.” 하고, 정오에 근정전(勤政殿) 앞 처마 아래에 나아가니, … 명령하기를, “당상(堂上) 이상은 갑옷을 풀고, 그 나머지는 모두 갑주(甲胄)를 입고 동대문(東大門) 밖 안암동(安巖洞)에서 몰이하라.”하였다. … 일모(日暮)에 상군(廂軍)과 잡류(雜類)가 합해서 몰이하여 내려오니, 여우가 위내(圍內)에 있었으므로, 세자(世子)로 하여금 이를 쏘게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문헌 상에 등장하는 안암동은 조선시대 고지도에서도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8세기 중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도漢陽圖』나 조선 후기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지도 『수선전도首善全圖』, 『도성도都城圖』 등을 살펴보면 흥인문 밖으로 ‘안암동安岩洞’이라는 글자를 확인할 수 있다. 안암동이라는 동명은 옛 문헌과 고지도 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 중 지금의 안암동3가 대광아파트 단지 가운데 큰 바위가 있어 20여 명이 앉아 편히 쉴만하기에 그 바위를 ‘앉일바위’라 불렀고, 이를 한자 로 옮겨 ‘안암安岩’이라 부른 것이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 있다. 안암이라는 동명이 ‘앉일바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 잡은 가운데, 조선 초 이 지역에 살던 문정공文靖公 한계희韓繼禧(1423~1482)와 연관된 설도 존재한다. 한계희는 세조를 도와 공신이 된 한명회韓明澮의 육촌 형제였다. 그러나 한계희는 한명회를 비롯한 다른 친지들에 비해 매우 곤궁하였고, 나물로 겨우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이를 높은 관직에 있는 친척들이 측은하게 여겨 북바위鼓巖 부근 논 열섬지기를 받게 하였으나, 한계희는 논은 받되 그 논에서 나온 곡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를 인근의 어려운 가정에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 덕에 인근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되었으므로, 이를 기리기 위해 마을 이름에 ‘편안할 안安’을 붙여 안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안암’이라는 지명은 한계희가 태어나기 이전인 1395년(태조 4)부터 문헌상에 나타나기 시작하기에 시기상 맞지 않다. 또한 한계희는 1447년(세종29) 승문원정자를 시작으로 집현전정자, 우문학, 좌승지 등을 거쳐 이조판서, 중추부사 등의 관직까지 오르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물이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떠한 유래가 있었든 ‘편안할 안安’이 이름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이 지역이 얼마나 편안하고 살기 좋은 지역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안암동은 1751년(영조 27)에 간행된 『수성책자守城冊子』의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과 1867년(고종 4)에 발간된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에 한성부 동부 숭신방 안암계로 기록되어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15-220쪽
  • 남경으로 가는 길 태조 이성계가 안암동의 풍수지리적 입지와 아름다운 풍광에 관심을 보여 문헌 상에 기록한 것은 조선시대 초의 일이다. 하지만 안암동의 그러한 조건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비록 ‘안암’이라 이름 붙여 지진 않았겠으나, 사실상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고려의 수도는 개경開京이었다. 하지만 도참사상圖讖思想에 따라 918년(태조 1)에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987년(성종 6)에 경주를 동경東京으로 하여 중경中京=개경)과 함께 삼경三京의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1067년 (문종 21)에 양주楊州10에 남경南京을 설치하여 사경四京이 되었으나, 이 호칭을 피해 때로는 개경을, 때로는 동경을 제외시켜 삼경이라 칭했다. 이 삼경을 설치한 것은 통일신라 시대 풍수지리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도선道詵이 쓴 『도선기道詵記』의 내용을 따른 것이다. “고려 땅에 삼경이 있는데 송악(宋岳)이 중경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은 남경이 되며, 평양이 서경이 되어 왕이 11 · 12 · 1 · 2월에는 중경에 거하고, 3 · 4 · 5 · 6월에는 남경에 머물고, 7 · 8 · 9 · 10월에는 서경에 머물면 36국(國)이 조공(朝貢)하리라.” 이렇게 고려삼경 중 하나로 선택된 남경은 그 위상이 올라갔고, 개경에서 남경으로 향하는 길 또한 통행이 가장 편리한 곳에 자리 잡으며 발달하였다. 『고려사』에 나오는 역참들을 보면 고려시대 개경에서 남경에 이르는 길이 크게 두 갈래였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길은 ‘개경 → 청교역 → 장단 → 통파역 → 파주 → 혜음령 고개 → 벽지역 → 영서역 → 남경’이었다. 그런데 이 길은 거리가 짧은 반면 혜음령 등 제법 높은 고개들을 넘어야 하는부담이 있었다. 따라서 조금 길더라도 평지와 물길을 따라 남경으로 향하는 두 번째 길이 널리 이용되었다. 두 번째 길은 개경에서 파주까지는 앞의 길과 똑같으나, 파주에서 동남쪽으로 향하여 ‘녹양역 → 노원역 → 남경역 → 남경’의 경로를 따르는 것이었다. 첫 번째 길에 비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 두 번째 길은 오늘날 그 경로가 명확히 드러나있지 않다. 그렇기에 남경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하루 쉬며 의관도 정제하고 할 일을 정리했던 남경역 또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역사자료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해 추정할 수는 있다. 남경역은 개경에서 오는 사람들 외에도 남경의 동쪽 또는 동남쪽에서 오는 사람들도 이용했을 것이니, 그 길들이 모이는 곳이 확인된다면 자연스럽게 그곳을 남경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지도는 없으니 조선 후기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도성도』를 토대로 살펴보자. 먼저 개경에서 오는 길은 양주 · 포천에서 수유현을 넘어 사하리, 고암, 제기현을 거쳐 동대문을 향한다. 동쪽에서 오는 길은 중랑포를 건너 청량사, 선농단을 지나 동대문을 향하는데 이 두 길은 안암천 직전에서 만난다. 이렇게 만나게 된 지점에서 남경 쪽을 바라보면 유난히 높게 솟은 언덕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남경역이 아닐까 한다. 몇 날 며칠을 걸어 남경을 찾아왔을 때 남경에 도달하기 직전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저 언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언덕은 안암천에 면해있어 목욕물이나 식수 등을 충분히 구할 수 있었기에 남경에 들어가기 전 하루 쉬어가기에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20-223쪽
  • 2. 安岩洞「日韓神宮奉敬會」전말 安岩洞의 옛 소속은 高陽郡 崇仁面 安嚴里였으며 大韓帝國時代에는 漢城府 東部 崇信坊 安嚴洞이었다. 1905년 11월에 서울에 統監府라는 것이 설치되어 이른바 保護政治라는 것이 시작되자 당시 서울에 와있던 일부 日本人들은 제1급 親日派들을 종용하여 「이제 韓國은 어차피 日本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런데 앞으로 일본과 한국은 一體가 되어야 되는데 그것을 상징하는 神社를 만들기로 하자. 그 神社에는 조선의 始祖인 壇君과 일본의 始祖인 天照大神 그리고 朝鮮王朝를 건국한 太祖의 3柱로 하고 神社의 이름은 日韓神宮이라고 하자. 이 神宮建立에는 조선사람들이 앞장서서 함으로써 日本政府에 충성심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부추긴다. 당시 日本人들에게 붙어서 榮譽와 權力·金力을 얻으려고 血眼이 되었던 親日人士들이 여기에 앞장서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神宮의 위치와 면적 神宮造營의 예정지는 漢城府 崇信坊 安嚴洞 中里의 御座峰이며 현 安岩洞 124번지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그 면적은 1,608평 6합이었다. 이 땅은 제22대 王 正祖의 後宮이었던 元嬪 洪氏의 묘였던 元嬪墓가 있던 작은 언덕 西端의 중턱이었으며 훗날 敦岩地區 구획정리사업으로 부지의 西半에는 새 道路가 났고 도로의 서쪽은 주택지로 개발된 곳이다. 당시에 이 일대는 松林이 우거져 保安林指定地였는데 神宮地域 예정지 일부가 保安林에 속하고 있었기때문에 당시의 農商工部 大臣 趙重應은 隆熙 3년(1909년) 9월 4일에 이 保安林 중에서 692평을 해제하고 같은 해 10월 6일자 官報에 이를 告示하였다. 당시의 한국정부는 保護政治의 후기였기 때문에 모든 政務는 일본인으로 배치된 次官들이 거의 전행하였고 이 日本人次官을 통하여 사전에 統監府의 지도를 받거나 양해를 얻은 후에 시행된 것이므로 10월 6일자 官報의 기사가 9월 4일 날짜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日韓神宮 造營의 件은 미리 統監과 日本人 次官들 그리고 舊韓國政府의 各 大臣사이에서 公式으로 논의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官報에 게재된 告示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農商工部 告示 제30호 漢城府 東部 踏十里 安嚴洞 民有森林 面積 貳反參畝貳步 右 保安林을 解除함 隆熙 3년 9월 4일 農商工部大臣 趙重應 2) 神嚴의 設計와 神位 神殿설계의 개요는 우선 本殿으로서 오른쪽(東方)부터 檀君天皇 正殿, 天照皇 正殿, 太祖高皇帝 正殿의 三殿을 배치하고 다음에 神殿앞뜰의 오른쪽에 移安殿을, 그리고 왼쪽 排設廳을, 그 前面(南方) 오른쪽에 札殿, 왼쪽에 守僕廳, 正面에 三門을 건립하도록 예정하였다. 그 밖에 檀君碑閣·天照皇碑閣·太祖碑閣·世宗王碑閣 등 4개의 기념비각, 神宮事務所·神宮婦人事務所 등의 건립을 예정하고 조선에 있어서의 廟殿으로서의 體制를 완비한 것이었다. 그리고 神位는 다음의 세 개가 예정되었다. 大朝鮮開國 大始祖 檀君天皇 神位 大日本開國 大始祖 天照大神 神位 大韓開國太祖至仁啓運應天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神位 3) 上陳文과 諸規定 神宮내 3개 本殿의 上棟文 草案도 아주 長文으로 작성하였고 焚香式의 순서도 정했으며 祭享의 禮式은 四時의 大祭는 太廟의 禮에 따르고 春秋의 大亨은 文廟(成均館)의 例에 따라 매년 3월·9월의 上丁日에 거행하도록 하고 祭日당일의 初獻官·終獻官·執禮·大祝·典祀官 기타 등등의 制度도 모두 정했으며 祭器라든가 일반 亨需는 太廟(宗廟)의 例를 따르도록 하였다. 또 隆熙 3년(1909년) 8월 21일 자로 3章 24개 조문으로 된 神宮奉敬會建築所 規則, 9개 조문으로 된 別錄建築規則, 2개 조문으로 된 編輯規則 그리고 婦人入許門碑規則 등을 제정하였다. 4) 事業發起人 이 사업의 발기인은 아래와 같으며 이밖에 監督·監童 등을 합하여 216명을 선정했다고 한다. 總 議 長 李 埈 鎔 總 副 議 長 李 址 鎔 上 議 長 閔 泳 徵 上 副 議 長 尹 逈 求 公 事 議 長 金 昇 圭 副公事議長 尹 震 求 趙 卨 衍 贊 成 議 長 高 橋 久 司 尹 瀗 閔 丙 漢 李 奎 鎭 沈 九 澤 總務監督長 韓 成 奎 總 監 督 長 鄭 殷 采 副總監督長 鄭 秉 源 會計監督長 張 英 喆 掌財監督長 許 起 龍 財務監督長 金 興 演 基址監督長 金 泰 淵 副監督長 韓 殷 奎 編輯監督長 金 大 圭 編輯副監督長 田 文 珏 또 이 神宮건립에 관한 附帶事業도 계획하여 總務部·禮典部·敎育部·實業部·財務部의 5부를 설치하여 총 92명으로 이를 조직하였다. 이상은 당시의 日韓神宮奉敬會建築所가 발행한 「神宮建築誌」에 기재되어 있는 계획의 개요인데 그후 이 계획은 어느 정도까지 진척된 채 중단되었으니 그것이 중단되어 버린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훗날(1941년) 京城府가 京城府史 제3권을 발행하면서 당시 安岩町 122번지에 거주하여 당시의 상황을 실지로 목격했다는 洪春成이란 노인(1939년 당시 75세)에게 물어보았더니 「神宮建築을 위해서 많은 量의 石材·木材가 운반되어 와서 이곳에 퇴적되어 있었으나 資金의 不足으로 중지했다고 들었다」는 대답이었다는 것이다. 위의 직책에 거명된 자는 1939년 당시에는 모두 作故하였는데 오직 贊成議長이었던 閔丙漢만은 신장병으로 다년간 病中에 있었으나 아직 생존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문의한 즉 「資金이 달려서 중지했담」고만 답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城北區誌의 일부를 집필중인 필자의 추측으로는이 神宮에 奉祠될 3神位중에 日本神은 天照大神뿐이고 나머지 2개의 神位가 檀君과 朝鮮國의 太祖였다는 점에 일본의 神社관계자들이 강하게 반대하였고 伊顧博文 統監등을 통하여 공사진행을 중지시켰을 것으로 생각한다. 위에 거명된 자들은 당시에 모두 일급 親日派였고 또 개중에는 李埈鎔(興宣大院君의 손자)과 같이 그 이름만 빌려준 자도 있겠으나 거의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日帝에 아부하여 權勢의 언저리에 있고자 한 자들이었다. 1910년에 韓日合邦이 되자 그해 10월 7일자로 다수의 조선인이 貴族이 되었으나 乙巳五願의 하나였던 李址鎔은 伯爵 勳一等을 받았고 閔泳徽 는 子爵을 받았으며 그외에도 合邦功勞者로서 모두가 日本政府로 부터 이른바 「恩眼金」이라는 多額의 돈을 받아 日帝초기에 好衣好食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11-112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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