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회
1933.08 - 1936
인물 단체 문학
1933년 조직된 문학단체이다. 1930년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가 주도한 사회주의 계급문학과는 구별되는 순수문학을 표방하였다. 구인회의 결성을 주도한 것은 이종명과 김유영이며, 창립멤버는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이태준, 조용만, 김기림, 정지용 등 9인이다. 구인회 설립 당시 이태준이 성북동에 거주하였다. 구인회는 이후 여러 번 회원들의 교체를 겪었는데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김상용, 이상, 김유정, 김환태 등 8명이다. 구인회는 1936년 동인지인 『시와 소설』의 발행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접는다. 구인회도 1936년 10월에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북동
  • 『구인회(九人會)』 주최(主催)의 『시(詩)와 소설(小說)의 밤』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九人會
  • 이명칭: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단체 문학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근거자료 원문

  • 1. 수연산방-상허 이태준과 구인회 1933년은 이태준에게 특별한 해였다. 그는 그해 성북동 골짜기 개천 옆에 집을 짓고 수연산방이라 이름 지었다. ‘벼루硯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壽 글을 쓰는 집’이란 의미였다. 잠시 집을 비운 일도 있긴 하지만 수연산방은 월북할 때까지 그의 보금자리였다. 1933년, 이태준에게 보금자리의 마련만큼 특별했던 일은 구인회의 결성이었다. 1930년대 초반은 문학계에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 동맹)가 맹위를 떨치던 시점이다. 카프는 문학을 통해 사회주의적 계급의식을 계몽·선전하려 했다. 구인회는 이런 경향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단체였다. 처음 구인회의 결성을 주도한 것은 이종명과 김유영이다. 이들은 카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단체의 구성을 희망했고, 이를 위해 당시 소위 순수 문학으로 이름을 날리던 문인들에게 접근했다. 그중 가장 적극적으로 이 단체에 참여 의사를 밝힌 사람이 바로 이태준이다. 다만 이태준은 카프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보다는 문학 자체에 충실한 모임이 되길 원했고, 모임에 성격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을 하며 자연스럽게 모임의 좌장으로 자리 잡는다. 구인회라는 이름 역시 이태준의 제안이었다. 구인회가 본격적으로 창립을 선언한 것은 1933년 8월의 일이다.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당시 조선인들이 운영하던 각 신문은 8월에 구인회의 창립을 전하고 있다. 이태준의 구인회 활동은 공교롭게도 성북동에서 시작된 것이다. 구인회의 주요 활동 무대는 사대문 안이었다. 본격적인 창립 준비를 위한 발회식은 광교 주변의 작은 양식집에서 이루어졌고, 모임도 종로의 카페에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구인회의 공식적인 첫 활동은 월평회였는데, 월평회가 이루어진 것도 사대문 안이었다. 1934년 6월 17일부터 6월 29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격!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을 연재한 것은 구인회의 첫 집단행동으로 볼 수 있는데, 신문연재에 지역을 따질 수는 없지만 조선중앙일보 사무실이 종로에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종로에서 일어난 일로 볼 수도 있다. 「격!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으로 첫 집단행동을 한 구인회는 바로 두 번째 행동에 돌입한다. 바로 강연회이다. 첫 번째 강연회는 1934년 6월 30일 열린 “시와 소설의 밤”이었다. 당시 광고는 “시와 소설의 밤”의 주체가 구인회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발표자는 이태준,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이었고, 장소는 종로 중앙기독청년회관(YMCA)이다. 역시 종로였다. (중략) 구인회 회원들도 성북동을 찾았다. 수연산방을 나와 성북천을 건너 조금만 오르면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걸어서 5분도 되지 않을 거리이다. 이 별장에서 이태준은 구인회 회원인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단순히 그 한번뿐만 아니라 구인회 회원들은 자주 성북동을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수연산방은 일종의 별장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런 좋은 곳을 손님들이 가만히 두었을리 없다. 구인회는 이후 여러 번 회원들의 교체를 겪는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김상용, 이상, 김유정, 김환태 등 8명이다. 구인회는 1936년 동인지인 『시와 소설』의 발행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접는다. 구인회도 1936년 10월에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29-230쪽, 232쪽
  • 구인회는 ‘무의지파’가 아니다 금년 초에 두루마기 입고 和信食堂(화신식당)에 요기를 하러 갔다가, 눈상그러운 꼴을 보고 온 일이 있었다. 어린 조카를 데리고 가서 '우동'을 시켰더니 심부름하는 아이가 국물을 반이나 엎질러 놓기에 다시 가져오라고 하니까 대답도 없이 그대로 가서는 함흥차사다. 눈꼴이 틀려서 그대로 나오다가 監督(감독) 비슷한 사람을 붙들고 논란을 하니까 그 監督(감독) 같은 사람이 나의 어깨를 치다시피 하며 “온, 선생님두. 그러게 洋服(양복)을 입고 오시지오. 온 암만 일러도, 그 애들이 그렵니다그려” 하고 웃는 바람에 나도 따라 웃고 만 일이 있다. 경제적으로 보든지 미관으로 보든지 관습으로 보든지 주택구조로 보든지 朝鮮의 周衣(주의, 두루마기)가 그렇게까지 천대를 받아야 할 아무 조건도 없건마는, 천대를 받고 있는 것만은 否認(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本情(본정)이나 기타 朝(조), 日(일), 英(영), 米(미) 이렇게 각국인이 모이는 장소에서 조선의복이 홀대를 받는 것은 가끔 체험하는 일이지마는, 조선인의 경영이오 조선 어린아인 계집애들까지 우리의 의복을 그처럼이나 과소평가하는 근거가 어디 있는지 모를 일이다. 언제나 말하는 바이지마는 오늘날의 조선문학도, 주의와 같은 천대를 받고 있지 않은가 싶다. 외국인이 그렇고 사회인이 그렇고 문단인이 그렇다. 오랫동안 제것만은 얼싸안고 살려다가 실취한 조선인은, 이번에는 남의 것만 동경하다가 역시 같은 실패로, 되풀이하지나 않는가 저으기 걱정이 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조선문학만 사수하라는 것은 아니다. 조선에 문학이 없으면 문학이 생기도록 노력함이 우리의 마땅히 할 일이어든 식당 계집애가 무조건하고 조선주의 입은 사람이면 박대하듯이 그와 똑같은 태도로, 문학을 논하며 문단을 논하는가? 다같이 조선인이오, 다같이 조선의 문단을 떠메고 나선 문단인으로서 문단이 없느니 문학이 없느니 한 번도 아니오 두세 번 한사람도 아니고 네다섯 사람이나 마치 책임이나 전가하려는 듯한 태도를 끝끝 고집하려 함은 무슨 까닭일까? (중략) 원래 신중한 비평가로 백철 씨가 필요에 의하여 비평을 한다면 구인회의 진로를 보아 그것을 비평함이 옳을 것이다. 어찌 발기된 구인회의 방향을 점쟁이가 아닌 다음에야(점이라는 것은 시인해 놓고 말한다면)알 길도 없는 것이, 안다면 도리어 기적일 것이다. 비평은 해야 하겠고, 재료는 없으니까 조급한 마음에 (구인회를) 무의지파라 명명을 해놓고 마치 발표되지 않은 작품은 혼자서 비평하고 있는 그대로의 월권을 범하고 있다. 구인회는 백씨가 예정한대로 무의지파는 아니다. 백씨가 아직 그 방향을 모르는 것이다. 동회의 총회가 머지않아서 열리고 토의될 조항이 기초되었다 하니 그때를 기다려보면 백씨는 반드시 조급했던 비평을 후회할 것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63
  • 구인회 주최의 “시와 소설의 밤” 내일 밤 종로청년회관서 구인회에서는 명 30일 밤 8시 15분부터 종로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시와 소설의 밤”을 개최한다는데 회비는 일반은 10전이오, 학생은 5전이며 연사와 연제는 다음과 같다 한다. - 창작의 이론과 실제: 李泰俊(이태준) - 언어와 문장: 朴泰遠(박태원) - 시낭독: 鄭芝溶(정지용) - 시의 근대성: 金起林(김기림) 『동아일보』 1934. 6. 29.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65
  • 구인회는 어디로? 구인회는 그 명칭이 창립 당시의 회원수에 유래한 것이요, 목적은 다독다작에 둘 뿐, 무슨 뚜렷한 주장이나 색채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찍이 무의지파 또는 자유주의전파라 한 평도 있었다. 구인회로부터서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없었것다. 이는 그 자신이 “무의지“로 자처한 것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의지는 있어도 공언키 어려웠던 까닭인지도 모를 일. 그런데 최근에 구인회의 진용에 이상이 있다. 某某氏(모모씨)의 신가입을 회세의 확장이라고 본다면 모모씨의 탈퇴는 무엇으로 볼 것인가. 단순히 다독다작을 위한 것이라면 가입은 있을망정 탈퇴는 없을 일. 없을 일이 있는데는 이유가 없지 않으렷다. 억측을 허한다면 이제 구인회가 파로서의 의지를 새로이 가짐이 아닌가. 아니 창립 당시부터 배태하고 있던 의지가 최근의 제정세에 순응하야 순수예술주의적 입장 위에 서게 되려는 것이나 아닐까. 구인회가 문예의 정치적 효과의 발휘를 위한 단체가 아님은 당초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바인즉 이제 그가 의지를 가진다면 그 가지는 바 의지가 무엇일 것도 자타가 공인할 수 있다. (알파) 『동아일보』 1935. 3. 10.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66.
  • 측면으로 본 신문학 60년 (19) 구인회 조용만의 회고담 (상략) 1933년 봄이었다. 李鐘鳴(이종명)이라는 젊은 작가와 金幽影(김유영)이라는 영화 연극의 감독이 내가 관계하는 신문사의 단골기고가이었던 관계로 세 사람이 자주 만났었다. 우리들은 순수문학을 지향하고 있던 패들이라 「카프」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순수문학을 지키고 싶어하는 젊은 사람들끼리 한데 모여서 무슨 서클을 조직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여 尙虛(상허), 지용, 片石村(편석촌) 등이 모이게 되고 鐘鳴(종명)과 尙虛(상허)가 主動(주동)이 되어 여러 번 회합을 거듭한 결과 대체로 이렇게 합의되었다. 즉 「카프」가 투쟁단체인데 반하여 우리들은 친목(친목)단체를 만들 것. 따라서 무슨 강령이라든지 내규 같은 것을 전혀 만들지 말고 회장, 부회장과 같은 직제도 두지 말고 그냥 한 달에 한두 번씩 다방이나 간단한 음식점에 모여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나 하고 서로 친목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회원도 처음에는 7명으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결국 9명이 되었고 회이름도 여러 가지로 말이 나왔지만 구인회로 낙착이 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나프」에 대항해서 신흥예술파의 단체로 「십삼인구락부」가 있었으므로 구인회 이름이 이것을 모방한 것 같이 보여서 창피하다고 하였지만 尙虛(상허)의 고집으로 구인회로 되고 말았다. 孝石(효석)은 순수문학 쪽으로 전향하여 그때 경성농업학교에서 영어선생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하기방학에 상경하기를 기다려서 칠월 그믐께 종로에 있는 다과점에서 발회하였다. 아홉명이란 鐘鳴(종명), 유영(幽影), 尙虛(상허), 지용, 片石村(편석촌), 孝石(효석), 柳致眞(유치진), 無影(무영) 및 筆者(필자)이었다. 회원의 대부분이 신문사 학예부 관계자이었으므로 이 소식이 각 신문에 났었고「카프」에서는 민촌이 브르조아문학의 졸도들의 망동이라고 공격의 화살을 던졌다. 그러나 우리들은 잠자코 매월 1~2회 정기적으로 모여서 작품평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이 서너달 계속하였을까. 그해 가을에 위선 주동자인 鐘鳴(종명)과 유영(幽影)이 탈퇴하고, 孝石(효석)과 致眞(치진)은 처음부터 흥미가 없어서 잘 안 나오고 회합은 尙虛(상허)가 모든 것을 리드하고 지용의 해학으로 시종되었다. 이어서 孝石(효석)과 致眞(치진)과 내가 탈퇴하고 尙虛(상허)와 지용이 중심이 되어서 仇甫(구보)와 李箱(이상)은 무직이었으므로 열심히 회를 운영하여 문예강연회도 한 번 가졌고, 1935년 봄에 李箱(이상)이가 창문사 주인 具本雄(구본웅)을 움직여서 기관지 “시와소설”을 한 호 출간하였다. 구인회는 이것으로 흐지부지 되어버렸는데, 지금 와서 공정하게 생각하면 이 회는 문단적으로 아무런 족적을 남긴 것이 없다. 사교구락부나 친목계 같은 형식으로 몇 사람이 모여서 잡담을 했고,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하여 프로 문학에 물들지 않았을 뿐이다. 작품행동은 완전히 개인플레이 이어서「카프」같은 단체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이것뿐이다. 요새 와서 젊은 사람들이 구인회를 무슨 대단한 업적을 남긴 문학단체인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 회의 관계자였던 한사람으로서 나는 별반 무슨 두드러진 업적도 족적도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있다면 천하를 휩쓸던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영향을 벗어나서, 그들과 은연히 대립하는 한 세력을 결성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을까. 그러나 구인회의 한 사람도 좌익논객들과 대항해서 당당히 논쟁을 전개한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소극적이었다. 이제 와서 감회에 빠지는 것은 그 당시 홍안의 미청년이던 사람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또 그 중 몇몇은 「카프」 운동을 극력 반대하더니 해방 후 어느덧 그 쪽에 가담해서 조국을 배반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참으로 세상은 무상하다고 할까, 알 수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 1968. 7. 20.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68
  • 片片夜話(편편야화) <36> 「순수에의 志向(지향)」그러할 무렵 李泰俊(이태준) 鄭芝溶(정지용) 李孝石(이효석) 趙容萬(조용만) 등의 [구인회]가 나타났다. (뒤에 朴泰遠(박태원) 李箱(이상) 金裕貞(김유정) 등이 참가). 구인회는 해외문학파와는 달리 순수문학을 정면으로 들고 나온 그룹이었다.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구인회에 동반자작가라 불리던 이효석이 참가한 것은 일종의 이었으나 알고 보면 그것은 이효석 자신에게 있어서는 별다른 전신이 아니었다. 『동아일보』 1974. 4. 12.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72.
  • 片片夜話(편편야화) <36> 「순수에의 志向(지향)」 순수문학에의 움직임을 구인회가 선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움직임은 당시의 조선문학이 나아갈 필연적 진로이기도 하였다. 프로문학의 퇴조가 직접적으로 일경의 탄압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사상성 정치성을 강조하여 문학의 문학성을 경시해온 프로문학운동은 그자체의 내재적 필연으로서도 조만간 반성의 시기를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될 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동아일보』 1974. 4. 12.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72.
  • 구인회가 결성된 것은 프롤레타리아문학이 시든 1933년. 상허, 지용과 구보, 기림이 중심인 그 그룹에는 한두해 사이에 예닐곱명의 동인이 기질 차이와 문학관의 차이로 나가고 들어오게 된다. 『경향신문』 1983. 3. 5.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74
  • 1933년 8월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무영, 유치진, 이효석, 이종명, 김유영, 조용만이 결성한 문학 모임이다. 9월 1일자 신문에 ‘순연純然한 연구적 입장에서 상호의 작품을 비판하며 다독다작多讀多作을 목적으로 한 사교적 클럽’이라고 소개되었다. 얼마 뒤 모임에서 나가는 사람이 생겨 박태원, 이상, 김유정, 김환태가 들어왔으나 모임 이름처럼 늘 아홉 명을 유지하였다. 순수문학을 지향하면서 정기적으로 만나 문학에 대한 토의를 하고, 강연회를 몇 차례 열었다. 1934년 종로 청년회관에서 연 <시와 소설의 밤>은 ‘창작의 이론과 실제’(이태준), ‘언어와 문장’(박태원), ‘시 낭독’(정지용), ‘시의 근대성’(김기림) 등의 내용으로 연 강연회이다. 월간지 《시와 소설》을 한 회 발간(1936년) 하였다. 구인회는 각자의 문장력과 표현력이 뛰어난 문인들이 참여하며, 순수문학의 흐름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2쪽
  • 성북동 문학가들의 모임 - 이종명(탈퇴), 김유영(탈퇴), 이효석(탈퇴), 이무영, 유치진(탈퇴 후 재가입), 이태준, 조용만(탈퇴), 김기림, 정지용, 박태원(신규 가입), 이상(신규 가입), 박팔양(신규 가입), 김유정(신규 가입), 김환태(신규 가입)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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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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