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암사
1470.09.26
장소 종교시설
조선 초기 현재의 성북구 안암동에 있었던 사찰이다. 안암사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파악하기 어렵다. 조선 초에 다시 세워졌지만 억불정책에 따라 성종 1년(1470)에 철거되었다. 그리고 성종 15년(1484)에 인수대비와 귀인 권씨가 중창을 추진하여 조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하였지만, 결국 비빈들의 원찰(願刹)로서 다시 세워졌다. 하지만 연산군 10년(1504) 절은 폐사되고 말았다. 절의 비구니들은 모두 한치형의 빈집으로 옮겨 살게 하였고, 이후 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지금은 정확한 위치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안암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安巖寺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종교시설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근거자료 원문

  • 안암동에는 안암사安巖寺라는 절도 생겼다. 하지만 안암사는 1470년(성종 1) 9월 26일 예조禮曹의 건의에 따라 철거되고 백성들이 경작하는 농토로 변했던 것을 다음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조에서 도성(都城)의 안팎을 순행하여 살피고, 경작을 금지하고 나무를 심는 등의 편의한 조목을 만들어 아뢰기를, “… 국초에 도읍을 세울 때에 산과 물의 향배(向背)를 살펴서 사사(寺社)를 건립하여 산수의 부족함을 도와서 재변을 진압하고 물리쳤는데, 그후 사찰로서 복세암 · 안암사(安巖寺) · 정일암 · 향실암 · 수정암 · 망성암 · 은암 · 일출암 · 대고산사 · 소고산사 · 입암사 · 도장동사 · 정업원과 같은 것이 세워졌고, … 이 때문에 주산에서 내려오는 맥과 용호(龍虎) 곧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와, 안산(案山) 곧 앞산의 지맥(地脈)이 휴손(虧損)되어 매우 미편합니다. 청컨대 모두 철거하게 하고, 부득이 두어야 할 것이 있으면 땅을 골라서 옮겨 짓는 것이 어떠합니까?”하니 전지하기를, “가하다. 다만 관청에서 창건한 사찰과 사당은 다른 곳으로 옮겨 짓도록 하라.” 하였다. 그 후 15년이 지난 1484년(성종 15), 귀인貴人 권씨權氏가 안암사를 국도國都의 비보裨補라 하여 왕에게 중건하기를 청함에 따라 왕이 이를 허락하니 안암사 중창의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가 빗발쳤다. 그럼에도 왕은 굽히지 않고 강행하였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16-217쪽
  • [정의] 성종대 왕실 비빈들에 의해 중창된 비구니원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있었던 절. [개설] 안암사(安巖寺)는 삼국시대에 창건되었지만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조선 건국 초에 비보사상(裨補思想)에 따라 중창되었으나 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뚜렷한 사격(寺格)을 갖추지 못하였다. 성종 초에는 탑과 무너진 전각만이 남았다가 성종의 후궁인 귀인권씨(貴人權氏)와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 등의 발원으로 중창하였다. 비구니 사찰로 유지되다가 1504년(연산군 10) 폐사되었다. [내용 및 변천] 창건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존재하다가 조선 건국초에 중창하였다. 1470년(성종 1) 예조에서 산과 하천 등의 토목 공사를 계획하면서 여러 절을 폐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안암사를 비롯하여 국가에서 건립한 사사(寺社)는 철거하지 말고 이전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년 9월 26일]. 그 결과 10여 년 후인 1484년(성종 15)에는 절터만 남아 있었다. 탑과 몇 개의 건물만 남아 있던 자리에 귀인권씨가 중창할 뜻을 세우면서 이에 관한 찬반 논의가 3개월 이상 계속되었다. 명분은 귀인권씨의 발원이었지만, 사실은 인수왕대비와 인혜왕대비의 뜻이었다. 곧 절은 국도(國都)의 비보사찰로 창건되었으므로 중창하여 국가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목적이었다. 성종은 이를 허락하고 절에 민전(民田)을 지급하였다. 그러자 신하들은 국가에서 절을 중창하는 것은 이단(異端)을 숭상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국왕은 『경국대전』에 절을 새로 짓는 것은 금지하였으나 옛터에 중창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하였으므로 들어주지 않았다[『성종실록』 15년 2월 24일]. 그런데 당시 절 땅을 3~4인의 백성이 점유하여 소작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적은 수의 백성이지만 그들의 터전을 빼앗는 일은 나라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국왕은 백성들이 무단 점유한 것이므로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성종실록』 15년 2월 26일]. 그럼에도 신하들의 상소가 그치지 않자 국왕은 왕대비(王大妃)들에게 상소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왕대비들은 비구니들이 경성 안에 거주할 수 없어 부득이 안암사를 중창하는 것이며,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수강궁(壽康宮)에서 철거한 재목을 내려준 것이라고 해명하였다[『성종실록』 15년 3월 1일]. 성종과 왕대비 등의 뜻이 분명하였지만, 신하들의 반대 상소는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중창된 후 5년이 지나서도 국왕이 절의 중창에 재목과 기와 등을 지원하였다는 낭설까지 떠돌았다[『성종실록』 20년 6월 28일]. 성종은 자신이 불교를 숭상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귀인권씨와 왕대비 등의 개인적인 일이라며 절의 중창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중창되었지만, 1504년(연산군 10) 절은 폐사되고 말았다. 절의 비구니들은 모두 한치형(韓致亨)의 빈집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7월 29일]. 이후 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정확한 위치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황인규, 『마지막 왕사 무학대사』, 밀알, 2000. ■ 이봉춘, 「조선초기 배불사 연구: 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2007, 조선왕조실록사전, 항목명 : 안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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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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