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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先蠶壇과 靈星壇
한편 靈星壇은 일명 星壇이라고 불렀으며, 祈雨를 할 때는 龍壇이라고 지칭되었다. 靈星이 곧 龍星이기 때문이며, 또, 龍의 왼쪽 뿔이 天田星으로 稼穡(농사)을 관장하는 神이라 하여 이 天神을 致祭하기 위해 설치된 壇이다. 즉 새해 풍년을 기원하며 곡식을 맡은 별과 농사를 맡은 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처음에는 漢南洞 402번지에 있는 龍壇으로 추측되는 南郊에 설치되었다가 다시 惠化門밖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靈星壇의 설치는 고려 때 처음 시작된 것이며 조선에서도 그 遺制에 따라 漢陽遷都 후 南郊에 설치하고 入秋 후에 辰日을 정일로 하여 제사를 지냈다. 또한 太祖의 고향인 咸興에 조선 개창을 감사하는 뜻에서 영성단을 설치하고 해마다 祭官을 파견하여 치제하기도 하였다. 영성단의 神座는 북쪽에 있어 南向하고 있으며 단의 규모는 정사각형 한변 길이가 2丈 1尺(6.3m), 높이는 2尺 5寸(0.75m) 정도이며 사면으로 섬돌이 있고 담장안은 사방이 25步였으며 단의 남쪽으로 출입문이 있었다.
光武 元年(1897)에 五星과 28宿을 圜丘壇에 從享제사하고 星壇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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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지정
영성단 靈星壇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동 75
별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일명 성단(星壇)이라고도 부르고, 기우제를 낼 때에는 용단(龍壇)이라고 불렀다.
농사가 잘 되도록 곡식과 농사를 맡은 별에 제사를 지냈는데 풍운뇌우(風雲雷雨)와 우사(雩祀) 등에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이 서울 남쪽에 단을 만들었다. 이 단은 그 후 혜화문 밖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단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들어섰으므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영성제는 삼국시대부터 해마다 지내온 것으로 나타나고, 영성단은 고려 때 처음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그 유제(遺制)에 따라 한양 천도 후에 설치하고 입추 후에 진일(辰日)을 택하여 제사를 지냈다.
영성단의 신좌(神座)는 북쪽에 있어 남향하고 있었는데, 단의 규모는 정사각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6.3m, 높이는 0.75m 정도이며 사면으로 담을 쌓아 출입을 통제했다. 섬돌이 있고, 담장 안은 사방이 25보(步)였으며 단의 남쪽에는 출입문이 있었다. 너비는 0.6m 정도 되며 위로 열고 드나들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 단의 남쪽에는 요단(燎壇)이 있었는데 한 변의 길이는 1.5m 정도 되었다. 단 위에는 영성의 신좌와 용의 왼쪽 뿔이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서 안치되어 있었다. 용의 왼쪽 뿔은 하늘의 농토와 곡식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지상에서도 풍년이 들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모셔 놓은 것이다.
* 참고자료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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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성단의 축조
○ 축조 시기
- 고려 때 처음 개경에 설치
- 조선에서는 고려의 유제(遺制)에 따라 한양 천도 후 남교에 제단을 축조
- 함흥에도 영성단을 축조하고 해마다 제관을 파견해 제사를 지냄
- 광무 원년(1897) 폐지
○ 제단 규모
- 사방 21척, 높이 2척 5촌
- 사방에 섬돌이 나와 있는 즉 승강구를 두었으며, 축대 하나가 25보(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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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성제
○ 제의의 기원
- 영성제(靈星祭)는 입추 후 진일(辰日)에 영성(靈星)에게 한해의 농사가 잘 된 것을 감사하며 지내는 제사
- 중국 주나라에서 처음 시작되어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음
- 영성은 세성(歲星) 또는 방성(房星)으로 간주될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천전성(天田星)을 가리키며 천전성은 28수 가운데 동방 창룡(蒼龍)의 왼편에 있는 각수(角宿)로서 농사일을 주관하는 신이라 믿어 농상(農祥)이라 부르기도 함
○ 조선시대의 영성제
- 조선시대 영성제에 대한 의절과 규식은 태종대에 만들어져 『세종실록』 「오례의」에 실리고 다시 성종대 『국조오례의』에 등재됨
- 영성제는 소사(小巳)로서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제품(祭品)은 8변(籩) 8두(豆), 2보(簠) 2궤(簋), 1조(俎)로 구성되어 있으며 헌관은 3품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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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자료
- 1797년(정조 21), 영성제의 규례를 정리하여『성단향의(星壇享儀)』완성
『성단향의(星壇享儀)』가 완성되었다. 상이 영성(靈星)과 수성(壽星)에 대한 제사를 회복하려 하면서 무릇 역대의 전례(典禮)로서 두 별의 사전(祀典)을 언급한 것을 널리 채집하여 한 책으로 엮어 책상 위에 비치하고서 때때로 살펴보았다. 마침 예조 판서가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된 의절(儀節)을 따라 두 별에 대한 제사를 일찍 거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헌의(獻議) 하도록 명한 뒤 다시 전일에 편집한 책을 가져다 그 의절 가운데서 오늘날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을 고르고 또 악가(樂歌)와 악무(樂舞)를 붙여서 『성단향의』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하여 앞으로 거기에 맞추어 시행하려다가 마침내 일이 많아서 행하지 못하였다.
(星壇享儀成 上擬復靈星壽星之祀 凡歷代典禮之及於二星祀典者 廣蒐博采 編爲一冊 而置諸丌上 以時審繹 會宗伯之臣 請遵五禮儀所載儀節 早擧兩星之祀 上旣命大臣儒臣獻議 更取前日所編之書 撮其 儀節之可行於今者 且附以樂歌樂舞 名曰 星壇享儀 將按而行之 竟鄭重未果)
— 『정조실록』 정조 21년(1797) 윤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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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북동의 영성단
○ 위치 : 성북동 75번지 (선잠로 9-6, 성북동 작은형제회수도원 경내)
○ 축조 시기 : 1865년(고종 2) 11월경
※ 1897년(광무 1) 12월(양력)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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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자료
- 1865년(고종 2), 혜화문 밖 어창계에 ‘성단(星壇)’ 축조
예조(禮曹)에서 ‘제단(祭壇)의 이름은 성단(星壇)으로 정하고, 제단을 쌓을 곳은 혜화문 밖의 숭신방 어창계(御倉契)에서 자좌오향(子坐午向 : 정북은 등지고 정남으로 향함)으로 정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禮曹以 壇號星壇爲定 壇處所惠化門外崇信坊御倉契 子坐午向之地爲定 啓)
— 『고종실록』 고종 2년(1865)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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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자료
- ‘성단(星壇)’에서 지내는 제향의 규례와 치제
전교하기를, “성단(星壇)의 제향은 매년 정월 상인(上寅)에 지내는 것으로 행사의 규례를 정하라.”하였다.
(敎曰 星壇祭享 以每年正月上寅 行事定式)
— 『고종실록』 고종 2년(1865)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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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자료
- ‘성단(星壇)’에서 지내는 제향의 규례와 치제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성단(星壇)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初五日 詣勤政殿 親傳星壇香祝)
— 『고종실록』 고종 30년(1893)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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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靈星壇
성북동 75번지에는 별에게 제사를 드리던 영성단이 있었다.
靈星壇은 일명 星壇이라고 불렀으며, 祈雨를 할 때는 龍壇이라고도 지칭되었다. 새해 농사가 잘되도록 곡식을 맡은 별과 농사를 맡은 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만든 제단으로 風雲雷雨와 雲祀 등을 지내는 단과 같이 서울의 南郊에 있었는데 다시 혜화문 밖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지금은 이 터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들어서고 단은 폐지된지 오래되어 정확한 위치조차 알 수 없다.
문헌에 의하면 삼국시대부터 해마다 영성제를 지내온 기록이 있다. 영성단의 설치는 고려 때 처음 시작된 것이며 조선에서도 한양천도 후에 남교에 설치하고 立秋 후에 辰日을 정일로 하여 제사를 지냈다.
단의 규모는 정사각형이며 한변의 길이가 6.3m 정도이고 단의 높이는 0.75m정도이다. 주위는 한 변이 15.6m이고 사면으로 담을 쌓아 출입을 통제하였다. 단의 남쪽 6m쯤에 燎壇이 있는데 한 변의 길이는 1.5m쯤 된다. 출입문은 단의 남쪽으로 나 있는데, 너비는 0.6m쯤 되며 위로 열고 드나들도록 되어 있다. 단 위에는 영성의 神座와 龍의 왼쪽 뿔이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서 안치되어 있다. 용의 왼쪽 뿔은 하늘의 農地와 主穀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상에서도 풍년이 들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숭배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20-7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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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단 북쪽, 성북초등학교 후문 쪽에는 조선시대에 별에게 제사지내는 영성단(靈星壇)이 있었다. 현재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당에 영성단 표석이 세워져 있다. 민가가 거의 없던 성북지역에는 국가의 제례를 담당하는 제단이 주변에 많았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