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벽정
1935.09.26 - ?
장소 유적
장소 상업시설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113번지(현 성북구 선잠로71로 추정)에 있던 별장이다. 명성황후의 조카이며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별장이었다. 19세기 말부터 관료로서 활약했던 민영환은 성북동에 아름다운 별장을 지어놓고 많은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당시 청에서 파견되어왔던 위안스카이(袁世凱)도 민영환과 교류하며 음벽정을 방문하였었는데, 민영환이 순국한 후 그는 혼자 찾아와 추도하는 시를 읊기도 하였다. 민영환이 죽은 후 동생이 소유했던 음벽정은 1931년 가옥 임대업을 하던 일본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1934년 한택수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그때부터 요정으로 운영되어 주변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엔 불에 타서 없어졌고, 현재 그 자리에는 연화사라는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성북동
  • 음벽정화재(飮碧亭火災) 별실일동전소(別室一棟全燒)
  • 철야영업(徹夜營業)이 상투(常套)
  • 교외산재(郊外散在)한 요정(料亭)에 "철야영업(徹夜營業)"을 경고(警告)
  • 민영환 사진
  • 실종(失踪)됏던 승묘탑(勝妙塔), 성북동(城北洞)음벽정(飲碧亭) 뜰에 현신(顯身)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飮碧亭
  • 이명칭: 민영환별장, 민영찬별장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   장소 상업시설

시기

주소

  • 주소: 02839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정13 (선잠로 71)
  • 비고: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113번지, 기존 별장에 요정 개업, 현 연화사

근거자료 원문

  • 사람이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성북동은 예로부터 문인들의 사랑을 받는 동네였다. 특히 계곡이 깊고 물이 맑아 조선시대부터 양반들의 별장지로 사랑 받았다. 의친왕 이강의 별장인 성락원, 여흥 민씨 집안인 충정공 민영환의 음벽정 등은 지금까지도 이름을 남기고 있고, 부호 이종석의 별장, 안동 김씨 집안의 별장 등도 이곳 성북동에 있었다. 성락원과 이종석 별장은 아직도 남아 당시 양반들의 호화로운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26-127쪽
  • 조선말기 문신이자 순국지사인 민영환의 별장인 음벽정에는 많은 명사들이 찾아 왔다. 서양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던 민영환의 별장이었기에 조선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도성을 나가 이곳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22쪽
  • 순국지사 민영환의 별장이었던 음벽정도 요정이 되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29쪽
  • 음벽정은 민영환의 생전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와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던 장소였다. 1939년 3월 동아일보에 실린 <경성동명점고>에서는 음벽정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이래서 여기는 예부터 재상가의 별장이 많더니 그중에도 근년의 민충정공 별장 음벽정은 유명하던 것이었다. 어이없다. 이 음벽정이 말세에 이르러 탕자들의 술 놀이, 계집놀이터가 된 채 음벽정이란 정호마저 그대로 욕을 불 줄 지하의 민충정공이 알기나 할 것인가?’ 민충정공(민영환)이 나라를 빼앗겨 자결을 택하였듯이 그 정신이 깃들어 있는 음벽정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1939년 불을 너무 때서 이불로 불이 옮겨진 화재로 소진되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30쪽
  • 사람이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성북동은 예로부터 문인들의 사랑을 받는 동네였다. 특히 계곡이 깊고 물이 맑아 조선시대부터 양반들의 별장지로 사랑 받았다. 의친왕 이강의 별장인 성락원, 여흥 민씨 집안인 충정공 민영환의 음벽정 등은 지금까지도 이름을 남기고 있고, 부호 이종석의 별장, 안동 김씨 집안의 별장 등도 이곳 성북동에 있었다. 성락원과 이종석 별장은 아직도 남아 당시 양반들의 호화로운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1쪽
  • 북둔도화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성북동 여기저기에서 도성 양반들의 별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볍지 않은 명예와 부를 가진 이들은 서민들이 사는 북저동과는 조금 거리를 둔 한적한 계곡이나 야트막한언덕에 정원을 조성하고 그 사이에 기와집 몇 채를 들여놓았다. 용도는 주로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함이었다. 수려한 자연환경에다 도심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은 양반 별서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만족했다. 1790년경부터 하나둘 조성된 별서는 19세말까지 꾸준히 그 수가 늘었다. 유득공의 북둔초당, 민영환의 음벽정, 의친왕 이강의 성락원, 윤용선, 이근택, 이종석의 별장 등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 밖에 주인 미상의 별서로는 오로정, 성북정, 백운정사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선시대 성북동의 별서 조성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의 양옥 별장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재벌들의 고급 주택지 조성으로까지, 시대마다 조금씩 형태를 달리해 이어졌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56-57쪽
  • 성북정회는 성북동 주민들의 불만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 중 첫 번째는 마을의 주택지에 요정料亭을 허가한 행정당국에 문제를 제기하고 신규 요정의 설립 허가 조치를 취소 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성북정에는 당시 유명했던 음벽정飮碧亭이 있었다. 성북정 주민들은 음벽정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음벽정이 생긴 이후 도로는 좁은데 자동차의 왕래가 심해져 통행에 불편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성북정에는 학교, 유치원, 예배당, 야학 등이 있었고, 1,500여명의 학생이 머물고 있었으며, 선생과 연구자 80여명이 살고 있었다. 이들에게 요정이었던 음벽정은 풍기상, 위생상 좋지 않은곳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또 다른 요정이 설치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이에 이신구를 포함한 5명은 성북정회를 대표하여 동대문경찰서에 방문하여 요정허가의 부당함을 진정하였다. 그리고 동대문 경찰서로부터 현재 있는 음벽정을 제외한 신규 요정은 허가하지 않겠으며 불편한 도로는 수리해주겠다는 답변을 얻었다. 이와 동시에 음벽정에도 요구사항을 제출했다. 하지만 음벽정에서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음벽정 측에서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실천하지 않자 주민들은 다시 정회를 열고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성북정의 주민들은 지속적인 요정 추방 운동을 벌이면서 성북동의 요정촌화를 막아낸 것이다. 성북정회에서 음벽정에 요구한 사항 요구조건 一. 도로진애道路塵埃를 방지할 것. 一. 도로파착道路罷鑿을 수시 보수할 것. 一. 업무시간을 준수하여 정민町民의 안면安眠을 도圖할 것. . 一. 요정에 오는 거마車馬를 서행徐行케 하여 통행인의 위험을 방지할 것. 一. 도로 협착처에 가교架橋를 완전히 설치할 것. 一. 요정에 오는 자동차가 정내 통과시 주의사항을 요정 구내에 게시함을 용인할 것. 一. 요정 소속인원이 정내에서 후주행악酗酒行惡하여 정민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동시에 극해極害를 끼치는 때에는 요정주料亭主가절대책임을 질 것. 소화 11년 8월 5일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94-96쪽
  • 음벽정飮碧亭 음벽정은 1930년대에 만들어진 요정料亭이다. 성북정13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음벽정에 대한 기사에 따르면 음벽정의 경영주는 한양호韓亮鎬와 한택수韓澤洙였다. 한양호는 한말참정대신 한규설의 아들이며 한택수는 그의 아들이다. 조선토지조사사업 결과 작성된 토지대장을 보면 한택수는 1934년 7월 4일 성북정 13번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음벽정은 1934년부터 영업이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음벽정은 당시 손꼽히는 요정이었다. 이상적인 주택거주지라고 평가를 받았던 성북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1938년 총독부는 오전 1시 이후에는 전국에 있는 요리집은 영업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음벽정은철야 영업을 계속하였으며 또한 풍기문란 등으로 인한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음벽정의 이러한 행동은 성북정 주민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음벽정은 원래 요정이 아니었던 곳이었다. 음벽정은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별장이었다. 민영환 사후 그의 동생 민영찬閔泳瓚의 소유였으나 1931년 가옥 임대업을 하던 일본인 오미안태랑五味安太郞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1934년에 한택수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96-97쪽
  • 조선후기 성북동이 사람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교통과 자연환경 때문이었다. 도성의 바로 밖이라는 교통의 편리함, 산과 물이 어우러진 훌륭한 자연환경은 양반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성북동은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유가 있는 양반들은 성북동에 별장을 짓기도 했다. 안동 김씨 김좌근의 별장, 여흥 민씨 충정공 민영환의 별장 등이 모두 성북동에 있었다. 의친왕 이강도 성락원이라는 별장에서 살았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1-12쪽
  • 세 번째는 한말 총리대신 한규설韓圭卨의 아들인 한양호韓養浩의 별장이다. 한양호는 성북동에 있었던 유명한 요리 집인 음벽정의 경영에 관여했으며, 문영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87쪽
  • *성북동-이야기자원모음집 2-34 조선요리 음벽정 『동아일보』, 1937.10.26.(석간) 동아일보 광고 사진 참고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34
  • 백만장자의 제2세 행장기 韓亮鎬氏=氏는 朝鮮 사람이라면 누구나 記憶에 남어 잇슬 韓末 政界의 空氣 속에 게시든 參政大臣閣下 故韓圭卨氏의 長男이니 故韓圭卨氏로 논하면, 韓末當時에 늣긴 바 잇서고 餘生을 杜門不出로 맛친 분이다. 이가티 지내시든 一方 數百萬의 財産도 能히 직혀 내려오다가 氏에게 이것만을 傳하고 不歸의 客이 되엇는데 이제 韓亮鎬氏는 靑年 때에는 多少 豪遊한 남어지에, 「父死後出給」이란 「奉天票」가튼 證書를 濫發하야 아름답지 못한 榮譽(?)를 남겻지만 一次 財産相續을 바든 後는 그 前의 모든 것을 淸算하고 家財를 整頓한 後 前過를 飜然悔悟하야, 그 令胤 學洙君과 더부러 家産을 扶植하기에 全力을 傾注하는 중인데 氏는 지금 城北洞에 잇는 某氏의 別莊을 비러가지고 「飮碧停」이라는 料亭을 開設하고 그것을 經營 중이라 하며 其他로는 敎育協會에 應分의 助力을 하고 잇다고. 『삼천리』 제8권 제6호, 1936.06.01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51
  • 飮碧亭 경영주 韓澤洙씨는 조선의 명문가인 韓主高씨의 愛孫으로 本年 삼십 미만의 弱冠의 몸이다. 방면이 다른 요리업 경영에 발을 듸려 놓은 씨는 心腹의 人 趙萬九씨에게 모든 경영을 맷기고 있다. 서울에 있는 요리옥으로서는 그 위치가 別莊地帶에 처하여 있어 展望의 風光은 실로 絶好하다. 『삼천리』 제8권 제8호, 1936.08.01.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52
  • 飮碧亭火災(음벽정화재) 別室一棟全燒(별실일동전소) 7일 오전 1시 경 부내 성북정(城北町) 113번지 음벽정(飮碧亭) 별실에서 돌연 발화되어 때마침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으로 삽시간에 한 채를 전소시키고 진화되었는바 이 방에 들었던 손님들도 가려고 최후의 마력을 내어 술을 드리키고 있다가 허둥지둥 모두들 나와 다행히 인명의 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발화 즉시로 소방대가 출동은 하였으나 인수(引水)를 못하는 관게로 연소되지만 못하게 할 따름이었으며 이 급보를 받은 소관동대문서에서 조사한 결과 원인은 불을 너무 땐 관게로 온돌 “핏치”가 파열되어 깔았던 요에 붙은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손해는 약 천(千)원 가량 이라한다. 『동아일보』, 1939.02.08.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57
  • 철야영업이 상투(常套) 동서관내 요정(料亭)에 통봉(痛棒) 작년 가을부터 부내 각 요리집에 유흥하는 손님은 자정 이후는 받아서는 안 되고 오전 한시 이후에는 문을 다고 영업을 중지하라는 지시가 발표됨. 부내 각 요정에서 이것을 어겨 많은 처벌을 당한 후 매우 좋은 실적을 보임. 그러나 부외 한적한 곳에 있는 요리집과 요리집 별장 등에는 취체경관의 손이 잘 미치지 않아서 이것이 실시가 되지 않아서 철야토록 영업을 하고 유흥을 하며 심한 데서는 기생과 더불어 추잡한 일이 있다. 그중에서 비난이 자자한 곳은 동대문서 관내에 있는 성북정 음벽정 등의 별정에 비난성이 자자하다. 늦게까지 무제한으로 유흥하려는 손님들이 예사로 이곳에 모여 철야를 하고 당국이 지정한 1시까지의 시간제한을 무시하고 있다. 요리조합에 가입되어져 있어 1시까지 영업해야 한다. 앞으로 위반하면 가차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39.03.23.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59
  • 교외 산재한 요정에 철야영업을 경고 성북정에 있는 음벽정에서는 영업시간 외는 물론 심지어 밤새도록 영업하는 일이 있으므로 누차 동대문서 주의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철야영업을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철저히 임검하여 처벌함은 물론 유흥객도 발견하는 대로 시말서 또는 구류처분에 부쳐 시국 하에 국민 정신동원에 발맞출방침이라고 한다. “東署嚴保安主任 談 : 업자들을 불러 엄중히 주의를 시킬 생각이다. 이 문제는 시국하에 국민정신동원이 강조되어 있는 때인 만큼 유흥객들도 맹성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시국에 반하는 행동이 있을 때에는 유흥하는 남녀도 처벌할 생각이다. 운운” 『동아일보』, 1940.02.28.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62
  • ‘음벽정(飮碧亭)’은 꿩의 바다에 있던 민영환(閔泳煥)의 별장이다.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조선후기 문신으로 일본 세력에 반대하여 자결을 한 순국지사이다. 음벽정은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99칸 한옥과 양옥을 지어 놓은 아름다운 별장이었다. 정원에는 괴석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숲에서 나오는 물을 받아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민영환이 벼슬에 있을 때 중국 정치가인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만나 이곳에서 교류를 하였다. 후에 민영환이 죽고 혼자 이곳을 찾은 위안스카이가 민영환을 추도하며 시를 읊기도 하였다. 음벽정은 한국전쟁 후에 불 타 없어졌다.
  • 종로구 전동典洞(현재 견지동)에 살던 민영환은 성북동에 별장‘음벽정飮碧亭’을 두었다. 음벽정에는 명사들이 찾아와 풍류를 읊었다. 청나라에서 파견된 원세개袁世凱, 1859~1916는 조선 군영의 일을 맡아 보며 조정에 출입하였다. 조선의 내부 사정에 밝았고, 왕실과 밀접하였던 원세개는 민영환과도 교류가 있어 음벽정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민영환은 1898년부터 독립협회를 후원하고, 개혁을 주장하다가 반대 세력에게 밀려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고대한2천만동포유서警告大韓二千萬同胞遺書’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주인을 잃었지만 음벽정의 명성은 더해갔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도 가까운 성 밖 나들이 장소로 들리곤 하였다. 1905년 황성신문에는 동소문 밖 ‘민보국 정자’(민보국은 민영환을 일컬음)로 미국 여성 일행이 유람을 나갈 때 경찰과 헌병이 호위하였다는 기사가 실렸다.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의 운동회가 음벽정 넓은 터에서 열렸고, 사회단체의 모임 장소로 쓰이기도 하였다.
  • “음벽정이라함은 푸르름, 바로 색깔 아니예요, 푸르름[碧]을 마시는[飮]. 그러니까 사방이 나무와 푸른 산으로 둘려 있었어요. 살림을 살 수 있는 99칸 거대한 한옥을 짓고, 약간 언덕이 있는 데는 양옥을-아름다운 양옥이었어요-기둥을 멋지고 우아한 집인데 마당에는 보기 드문 정원석, 괴석을 여기저기 놓았고, 원시림의 물을 받아서 연못을 만들고. 그 음벽정에 청나라 대장군 원세개를 불러서 같이 연회를 하며 외교를 한거에요.” 서세옥 인터뷰
  • 음벽정은 1920년대부터 요정(술집)으로 신문에 등장한다. 당시 서울시 내외에는 기생을 두고 영업을 하는 서린정, 조선관, 명월관 등지가 있었다. 음벽정도 기생을 둔 요릿집으로 운영되면서 사기난봉꾼들이 꾀여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유흥지로 전락하였다. 이 때문에 주민들에게 원성을 사기도 했다. 1936년 성북정城北町을 관할하는 동대문경찰서에 서는 새로 요리점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음벽정이 시설을 넓히는 것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가 그치지 않았는지 그 다음달 주민들이 대책회의를 열기까지 하였다. 1939년 부주의로 한옥 건물 한 채가 전부 타 버렸다. 1946년 무렵에는 유사 종교 단체인 정민회正民會가 음벽정에 근거를 두기도 하였는데, 관리가 되지 않아 남아 있던 석물이 없어지고, 건물도 훼손되었다. 음벽정 마당에서 국보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이 발견되어 문제가 된 사건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와다和田가 남창동 자택에 두고 있던 탑으로 어떤 연유인지 몇 년 만에 이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음벽정 터 1천여 평은 1960년대 기업가 이홍근이 매입하며 주인이 바뀌었다.
  • ­ 위치와 규모 ㆍ위치, 주소 불명 ㆍ부지 수만평이며 별장 건축이 뛰어나게 풍치가 있다고 전함 ㆍ충정공 민영환의 별장이 고급 요릿집으로 : 음벽정(飮碧亭) 음벽정은 1930년대에 만들어진 요정이다. 성북정 13번지(현 연화사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음벽정에 대한 기사에 따르면 음벽정의 경영주는 한양호와 그의 아들 한택수(韓澤洙)였다. 조선토지조사사업 결과 작성된 토지대장을 보면 한택수는 1934년 7월 4일 성북정 13번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음벽정은 1934년부터 영업이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음벽정은 당시 손꼽히는 요정이었다. 이상적인 주택거주지라고 평가를 받았던 성북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1938년 총독부는 오전 1시 이후에는 전국에 있는 요리집은 영업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음벽정은 철야 영업을 계속하였으며 또한 풍기문란 등으로 인한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음벽정의 이러한 행동은 성북정 주민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음벽정은 원래 요정이 아니었던 곳이었다. 음벽정은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별장이었다. 민영환 사후 그의 동생 민영찬(閔泳瓚)의 소유였으나 1931년 가옥 임대업을 하던 일본인 오미안태랑(五味安太郞)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1934년에 한택수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9쪽
  • ­ 한양호 ㆍ대한제국기 총리대신를 지낸 한규설(韓圭卨, 1856-1930)의 아들 ㆍ1926년 시천교에서 운영하던 경성 청석동(현 견지동)의 동아학교 교사 일부를 빌려 경성여자상업학교(현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설립 ㆍ충정공 민영환의 성북동 별장 음벽정을 매입하여 고급요릿집 ‘음벽정’ 개업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9쪽
  • ㆍ新式의 韓養浩別莊 그 부근에 저 韓末의 總理大臣 韓圭卨 씨의 令息인 韓養浩 氏 別莊이 또 잇다. 그의 아드님인 韓昌洙 氏는 韓靑삘딍의 所有者로 鍾路和信 건너편에 큰 삘딍을 짓고 잇느니만치 建築에는 자신이 잇는 듯 누구의 設計인지 모르나 이 別莊의 建築도 뛰여나게 風致가 잇다. 基他도 여러 萬坪일 듯 『삼천리』 7(5) 1935.6.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0쪽
  • ◈민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의 별장, 성북정 113번지. 정사(亭榭, 정자이면서 무술을 익히던 곳) ◈1906년 4월 22일 흥화학교 학생 음벽정에서 춘기운동회 개최 ◈1907년 4월 30일 음벽정에서 춘기운동회를 개최 ◈1908년 4월 흥화학교 운동회 개최 ◈1909년 9, 22 영친왕 이은 음벽정에서 소창 ◈1915년 7석일에 偶成三句片談 ◈1935년 9월 26일 요정 개업 계곡을 다름질치는 물결! 청청한 수목 바야흐로 가을빗치 깃드려 청지홍사로 수를 노은 佳境! 이런 곳이 서울 장안에서 그다지 멀지 안흔 성북동을 말함이니 문명의 雜沓과 黃塵에 시달이는 우리 도회인에게는 유일한 위안지이며 환락경이올시다. 금반 소생이 생각한 바가 잇서 좀더 새로운 포부와 여러분의 기대가 비저내인 형식으로 이 가경에다가 요정을 신설하고 사계권위 잇는 요리인을 초빙하여 미각을 자극식히는 이 가을에 마ㅡ치맛는 준비가 완비되여 9월 26일부터 개점케 되엿사오니 하로에 피로를 위안식히기 위하여 산책겸래정하시여 유쾌한 하로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소화 10년 9월, 시외 숭인면 성북리 13번지. 조선요리 음벽정 백. 전화 광화문 186호. ◈1936년 8월 6일 성북동 주민이 음벽정의 개설 운영에 대하여 진정 제기 ◈1937년 7월 음벽정 입구에서 자동차 전복. 2명 중상 ◈1938년 2월 음벽정에 화재 1동 전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94쪽
  • 민영찬의 별장. 1929년 3월 23일 조선남녀학생기독교하령회 개최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94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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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환
    분류: 인물
    시기: 조선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