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릉
1724
사적
장소 유적
성북구 화랑로32길 146-20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이다.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의 무덤인데,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재 위치에 능을 먼저 조성하였고, 영조 6년(1730)에 선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의릉 아래에 능을 조성하였다. 의릉은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능역 내에 있어서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하였다. 이 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뀐 후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1996년에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고,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외래수종 제거, 전통수종 식재, 인공연못 성토, 금천교 복원 등 기초적인 의릉 복원 정비를 마쳤다.
석관동
  • 의릉
  • [성북을 찾다] 옛 중앙정보부와 의릉
  • [조선 왕릉을 찾아서2] 서울 정릉 태조 이성계의 비 신덕왕후 능
  • [조선 왕릉을 찾아서1] 석관동 의릉에 경종과 선의왕후 이야기
  • [마을은 지금] 이런 곳 아시나요?(의릉과 천장산)
  • [동네 산책 5회] 서울 의릉
  • 의릉과 석관동(2014)
  • 의릉 홍살문(2014)
  • 의릉 홍살문
  • 의릉 경종 봉분 좌측면
  • 의릉 경종 봉분 우측 석물
  • 의릉 경종 곡장에서 바라본 석관동(1)
  • 의릉 경종 곡장에서 바라본 석관동(2)
  • 의릉 경종 곡장에서 바라본 석관동(3)
  • 의릉 경종 봉분 좌측 석물
  • 의릉 경종 봉분
  • 의릉 선의왕후 어씨 석호(3)
  • 의릉 정자각
  • 의릉 정자각과 능침(1)
  • 의릉 비
  • 의릉 비각
  • 의릉 정자각과 능침(2)
  • 의릉 선의왕후 어씨 봉분
  • 의릉 선의왕후 어씨 석호(1)
  • 의릉 선의왕후 어씨 석호(2)
  • 의릉 전경
  • 석관동 의릉
  • 2017년 의릉문화축제(1)
  • 2017년 의릉문화축제(2)
  • 의릉과 천장산 자락의 석관2동 전경
  • 의릉 안내판
  • 의릉 경종 석물과 선의왕후 어씨 봉분
  • 의릉 선의왕후 어씨 봉분(앞)
  • 의릉 선의왕후 어씨 봉분(뒤)
  • 의릉 선의왕후 석호2(우) 앞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2(좌) 뒷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2(좌)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2(좌) 좌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2(좌) 앞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2(좌) 뒷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2(좌)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2(좌) 좌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2(좌) 앞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1(좌) 뒷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1(좌)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2(우) 좌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2(우)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1(우) 앞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1(우) 뒷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1(우)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1(우) 좌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1(우) 앞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2(우) 뒷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2(우)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2(우) 좌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2(우) 앞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2(우) 얼굴
  • 의릉 선의왕후 석호2(우) 뒷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1(좌) 좌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1(좌) 얼굴
  • 의릉 선의왕후 석마2(좌) 좌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2(좌) 앞면
  •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좌) 뒷면
  •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좌) 상체
  •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좌) 얼굴
  •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좌) 앞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1(좌) 뒷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1(좌)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1(좌) 좌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1(좌) 앞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2(좌)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2(좌) 뒷면
  • 의릉 선의왕후 문석인(좌) 앞면
  • 의릉 선의왕후 석호1(좌) 앞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1(좌) 뒷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1(좌)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1(좌) 좌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1(좌) 앞면
  • 의릉 선의왕후 경종 망주석(좌) 세호
  • 의릉 선의왕후 경종 망주석(좌)
  • 의릉 선의왕후 문석인(좌) 뒷면
  • 의릉 선의왕후 문석인(좌) 상체
  • 의릉 선의왕후 문석인(좌) 얼굴
  • 의릉 경종 석상 고석
  • 제5회 의릉문화축제 포스터
  • 의릉 내부(2)
  • 의릉 정자각 내부(2)
  • 의릉과 주변 풍경
  • 의릉 정자각 내부
  • 의릉 내부(1)
  • 의릉 전경
  • 의릉
  • 의릉 선의왕후 석상 고석
  • 의릉 선의왕후 석상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상 좌측면
  • 의릉 내부(4)
  • 의릉 내부(5)
  • 의릉 내부(6)
  • 2019년 의릉문화축제(2)
  • 2018년 의릉문화축제(2)
  • 2018년 의릉문화축제(1)
  • [성북을 찾다] 옛 중앙정보부와 의릉
  • [조선 왕릉을 찾아서2] 서울 정릉 태조 이성계의 비 신덕왕후 능
  • 지적도 등본 : 한국예술종합학교 및 의릉 일대, 2022년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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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네 산책 5회] 서울 의릉
  • 천장산 전경(4)
  • 의릉 선의왕후 석상 앞면
  • 의릉 선의왕후 장명등 화창
  • 의릉 선의왕후 석마2(우)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2(우) 좌측면
  • 의릉 선의왕후 문석인(우) 뒷면
  • 의릉 선의왕후 문석인(우) 상체
  • 의릉 선의왕후 문석인(우) 얼굴
  • 의릉 선의왕후 문석인(우) 앞면
  • 의릉 선의왕후 망주석(우) 세호
  • 의릉 선의왕후 망주석(우)
  • 의릉 선의왕후 석양1(우) 뒷면
  • 의릉 선의왕후 석양1(우)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2(우) 뒷면
  •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우) 앞면
  •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우) 얼굴
  • 의릉 선의왕후 장명등 개석과 정자석
  • 의릉 선의왕후 장명등 앞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1(우) 뒷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1(우) 우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1(우) 좌측면
  • 의릉 선의왕후 석마1(우) 앞면
  •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우) 뒷면
  •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우) 어깨문양
  •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우) 칼문양
  •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우) 상체
  • 의릉 선의왕후 석양1(우) 좌측면
  • 의릉 경종 석상 우측면
  • 의릉 경종 석양1(좌) 등부분
  • 의릉 경종 석마2(좌) 앞면
  • 의릉 경종 무석인(좌) 우측면
  • 의릉 경종 무석인(좌) 좌측면
  • 의릉 경종 무석인(좌) 뒷면
  • 의릉 경종 무석인(좌) 상체
  • 의릉 경종 무석인(좌) 얼굴
  • 의릉 경종 무석인(좌) 앞면
  • 의릉 경종 석마1(좌) 우측면
  • 의릉 경종 석마1(좌) 좌측면
  • 의릉 경종 석마1(좌) 뒷면
  • 의릉 경종 석마2(좌) 뒷면
  • 의릉 경종 석마2(좌) 좌측면
  • 의릉 경종 석마2(좌) 우측면
  • 의릉 경종 석양1(좌) 우측면
  • 의릉 경종 석양1(좌) 좌측면
  • 의릉 경종 석양1(좌) 뒷면
  • 의릉 경종 망주석(좌)
  • 의릉 경종 문석인(좌) 우측면
  • 의릉 경종 문석인(좌) 좌측면
  • 의릉 경종 문석인(좌) 뒷면
  • 의릉 경종 문석인(좌) 상체
  • 의릉 경종 문석인(좌) 얼굴
  • 의릉 경종 문석인(좌) 앞면
  • 의릉 경종 석마1(좌) 앞면
  • 조선 경종과 선의왕후 의릉 전경
  • 서울 의릉(사적 제204호) 전경
  • 서울 의릉(사적 제204호)
  • 의릉 관람 일시 중단 안내문
  • 의릉 관람 일시 중단 안내 현수막
  • 의릉 경종 석상 좌측면
  • 의릉 경종 석마2(우) 뒷면
  • 의릉 경종 석마2(우) 우측면
  • 의릉 경종 석마2(우) 좌측면
  • 의릉 경종 석마2(우) 앞면
  • 의릉 경종 문석인(우) 뒷면
  • 의릉 경종 문석인(우) 상체
  • 의릉 경종 문석인(우) 얼굴
  • 의릉 경종 문석인(우) 앞면
  • 의릉 경종 망주석(우)
  • 의릉 경종 석양1(우) 뒷면
  • 의릉 경종 무석인(우) 앞면
  • 의릉 경종 무석인(우) 얼굴
  • 의릉 경종 무석인(우) 상체
  • 의릉 경종 석상 앞면
  • 의릉 경종 장명등 개석과 정자석
  • 의릉 경종 장명등 문양
  • 의릉 경종 장명등 앞면
  • 의릉 경종 석마1(우) 뒷면
  • 의릉 경종 석마1(우) 우측면
  • 의릉 경종 석마1(우) 좌측면
  • 의릉 경종 석마1(우) 얼굴
  • 의릉 경종 무석인(우) 칼문양
  • 의릉 경종 무석인(우) 뒷면
  • 의릉 경종 석양1(우) 우측면
  • 의릉 경종 석양1(우) 좌측면
  • 의릉 경종 석호2(좌) 우측면
  • 의릉 경종 석호2(좌) 좌측면
  • 의릉 경종 석호2(좌) 뒷면
  • 의릉 경종 석호2(좌) 앞면
  • 의릉 경종 석양2(좌) 등부분
  • 의릉 경종 석양2(좌) 뒷면
  • 의릉 경종 석양2(좌) 우측면
  • 의릉 경종 석양2(좌) 좌측면
  • 의릉 경종 석호1(좌) 등부분
  • 의릉 경종 석호1(좌) 우측면
  • 의릉 경종 석호2(좌) 등부분
  • 의릉 경종 석호2(우) 앞면
  • 의릉 경종 석호2(우) 뒷면
  • 의릉 경종 석호1(우) 뒷면
  • 의릉 경종 석호1(우) 우측면
  • 의릉 경종 석호1(우) 좌측면
  • 의릉 경종 석양2(우) 등부분
  • 의릉 경종 석양2(우) 우측면
  • 의릉 경종 석양2(우) 좌측면
  • 의릉 경종 석양2(우) 뒷면
  • 의릉 경종 석호2(우) 등부분
  • 의릉 경종 석호2(우) 우측면
  • 의릉 경종 석호2(우) 좌측면
  • 의릉 경종 석호1(좌) 좌측면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懿陵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시기

주소

  • 주소: 02789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333-1 (화랑로32길 146-20)
  • 비고: 화랑로32길 146-20은 의릉 관리사무소와 한예종이 포함된 의릉의 공식 주소이고, 의릉 봉분 부분의 주소는 화랑로32길 146-37이다.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사적
  • 지정일: 1970.05.26

근거자료 원문

  • ○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문화유적 문화유적 02 의릉 경종 모자의 비극적 일생 증언 - 조선시대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가 바로 의릉의 주인이다. 경종은 숙종과 함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장희빈의 맏아들이다. 재위 3년에 접어든, 한창 나이인 37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비운의 왕이기도 하다. 의릉은 당파 싸움의 한가운데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건강도 잃은 경종 모자의 비극적인 일생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의릉은 좌우로 봉분을 조성한 다른 능과 달리 왕과 왕비의 봉분을 앞뒤로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석물은 작고 간소해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1시간 정도 걸리는 의릉 산책로는 늘 한적해서 명상을 하면서 둘러보기에 더 없이 좋고, 아이들에게도 훌륭한 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4쪽
  • ③ 懿陵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4호로 지정하였으며 陵域 114,658坪으로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朝鮮 제20대 景宗과 同繼妃 宣懿王后 魚氏의 陵이며, 寧陵式의 雙陵制度로 배치되어 있다. 경종은 肅宗과 禧嬪 張氏의 소생으로 숙종 14년(1688) 10월 28일 昌慶宮 就善堂에서 탄생하여 숙종 46년(1720) 慶熙宮 崇政門에서 즉위하였고, 경종 4년(1724) 8월 25일 창경궁 環翠亭에서 승하하여 동년 12월 16일 東部 仁昌坊 石串里(현 石串洞)에 葬于本陵하였다. 선의왕후 魚氏는 成原府院郡 領敦寧府事 有龜의 딸로서 숙종 31년(1705) 10월 29일 탄생, 숙종 44년 15세로 世子嬪이 되었고 경종 즉위와 더불어 왕비로 進封되었으며 英祖 6년(1730) 6월 29일 慶熙宮 魚藻堂에서 26세의 나이로 소생없이 돌아가자 同年10월 19일 景宗과 같은 장소에 陵域을 조성하였다. 陵은 서울시내에 위치하고 있는 陸基中 유일하게 왕릉과 왕비릉이 같은 언덕에 앞뒤 서로 엇갈리는 雙陵의 制로 陵域을 조성하였다. 즉 왕릉과 왕비릉이 각각 單陵의 象設을 모두 갖추었으나 뒤에 있는 왕릉에만 曲墻이 있어 雙陵임을 나타낸 배치이다. 이러한 前後陵設制度는 顯宗 14년(1673)에 東九陵域內 元陵(英祖·繼妃貞純王后 金氏, 1776년 조성) 자리에 있던 왕릉을 英陵(世宗·昭憲王后 沈氏, 1469년 조성)옆에 모신 寧陵(孝宗·仁宣王后 張氏)에서 처음 나타난다. 앞뒤로 배치하면서 쌍릉 형식을 취한 것은 兩陵을 나란히 놓을 적에 어느 한쪽이 風水地理에서 말하는 이른바 生氣가 왕성한 正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을 우려하여 先後로 배치하여 양자를 모두 正穴에 있게 하고자 한 것이다. 陵石物의 배치며 전체적인 石物樣式은 明陵(肅宗·第1繼妃 仁顯王后 閔氏. 第2繼妃 仁元王后 金氏, 1720∼1757년 조성)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厚陵制度를 택함으로서 續五禮儀에 따른 듯하다. 王(后)陵 봉분 아래의 屛風石이 寧陵이후 폐지되었음을 그대로 반영시키고 있으며 象設制度는 왕릉에는 曲墻 3面· 欄干石 12間·魂遊石 1·明燈石 1·望柱石 1쌍·文石 1쌍·武石 1쌍·馬石 2쌍·羊石 2쌍·虎石 2쌍이며, 왕후릉의 象設은 丁字閣·水刺廳·望燎位·表石 1. 紅箭門·齋室이 있다. 특히 왕후릉은 曲墻만 설치하지 않았을 뿐 石物은 왕릉의 象設과 동일하다. 表石에는 다음과 같이 陰記되어 있다. 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崇禎紀元後 六十一年戊辰十月二十八日誕生 庚子卽位甲辰八月二十五日 昇遐十二月十六日 葬于楊州南中梁浦天藏山申坐之原在位四年 壽三十七 繼妃敬純孝仁惠穆宣懿王后魚氏 乙西十月二十九日誕生 戊戌冊世子嬪庚子進封王妃 康戌六月二十九日昇遐十月十九日 祔葬在下壽二十六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88-689쪽
  • 석관동 산 1∼5번지에는 史蹟 제204호로 지정된 懿陵이 있다. 이 왕릉은 조선20대 왕인 景宗과 繼妃 宣懿王后 魚氏의 릉으로 雙陵이다. 경종은 숙종의 長子로 숙종 14년 당시 3세로 세자가 되었고 숙종 43년에 세자로서 대리청정을 하기도 하였다. 숙종이 승하한 뒤 즉위하였으나 病弱하여 원년 8월에 이복동생(숙종의 4子) 延仍君을 世弟로 봉하였으며 재위 4년만에 3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繼妃 宣懿王后는 威原府院君 魚有龜의 女로 숙종 44년 15세로 세자빈이 되었고 경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進封되었으며 英祖 6년에 26세로 所生없이 타계하였다. 追尊된 純祖의 아들 翼宗의 陵도 純祖 31년(1831) 8월 4일에 이 곳 懿陵 左岡에 모시고 延慶墓라 하다가 헌종 즉위년에 추존하여 緩陵으로 높인 뒤 哲宗 6년(1855) 에 楊州都 九里面 仁倉里(東九陵)로 遷奉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17쪽
  • 다음 懿陵은 城北區 石串洞 산1번지 5호에 현재 능역 114,658坪을 범위로 하며 史蹟 제204호로 지정되어 전하고 있다. 懿陵은 조선왕조 제20대 왕인 景宗과 繼紀 宣懿王后 魚氏를 모신 雙陵으로 申坐寅向에 同原上下封이다. 景宗은 肅宗의 長子로 禧嬪 張氏의 소생이며, 숙종 14년(1688)년 10월 28일 昌慶宮 就善堂에서 탄생하여 3세 때 世子가 되었고 숙종 43년(1717)에 세자로서 代理廳政을 하기도 하였다.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난 후 慶熙宮 崇政門에서 즉위하였고 元年 8月에 延礽君(후의 英祖)을 世弟로 봉하였으며 재위 4년만인 37세를 일기로 昌慶宮 環翠亭에서 승하하니 1724년 12월 16일 漢城府 東部 仁昌坊(城外) 石串里에 葬陵하였다. 繼妃 宣懿王后 魚氏는 咸原府院君 領敦寧府事 有龜의 딸로서 숙종 31년(1705) 10월29일 탄생하여 숙종 44년에 15세로 世子嬪이 되었고, 景宗 즉위와 함께 왕비에 진봉되었으며, 英祖 6년(1730) 6월 29일 慶熙宮 魚藻堂에서 26세로 소생없이 세상을 떠나 同年 10월 19일에 景宗과 같은 장소에 陵域을 조성하였다. 이 懿陵을 서울에 위치해 있는 陵墓中 유일하게 같은 언덕에 앞뒤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曲墻 3面內에 왕릉을 奉陵한지 6년 후 그 앞에 后陵을 영조한 것이다. 陵은 왕릉과 왕비능이 前後로 비껴 雙陵의 형태를 띠며 象設은 單陵의 모습을 갖추었다. 陵의 石物배치와 石物의 양식은 작으만 하고 厚陵의 石物制度를 채택하여 肅宗의 明陵과 같은 양식을 취하고 있다. 형식은 雙陵이며 玄室은 灰隔으로 되어 있으며 屛風石은 없고 方位의 표현은 12支로서 欄干石柱에 표시되어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96쪽
  • 의릉은 조선 후기 경종(景宗)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魚氏)의 능이다. 의릉이 위치한 곳은 천장산(天臧山) 밑으로서 옛 지명은 양주 중량포(中梁浦)이다. 경종은 숙종의 장남인데, 장희빈으로 더 잘 알려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장씨(張氏)의 소생으로 이름은 균, 자는 휘서(輝瑞)이다. 숙종 14년(1688)에 태어나서 세 살 때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숙종 43년(1717) 8월에 청정(聽政)을 대리하다가 3년 후에 숙종이 승하하자 경희궁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4년만인 1724년 경종이 승하하자 의릉을 조영하였고, 6년 뒤 계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여 경종의 능 앞쪽에 선의왕후의 능을 만들었다. 이는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형식으로 ‘동원상하봉’이라고 한다. 이런 형식은 조선 왕릉에서는 매우 드물다. 경종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으며, 왕릉과 왕후릉 모두 혼유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석물을 별도로 배치한 모양으로, 능묘 조각들은 규모가 작고 왜소한 편이다. 의릉의 장명등은 건축 양식에 있어 의미가 있다. 장명등의 지붕은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숙종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형식으로 건원릉부터 나타난 8각등에 비해 한결 간략하면서도 소박한 인상을 준다. 왕후릉 역시 방풍석 없이 난간석 만으로 봉분을 둘러쌌으며, 석물들의 배치도 같다.
  • ▫ 사적 제204호 의릉 懿陵 시대 : 조선후기(경종 4년, 1724) 소유자 : 서울시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석관동 1-5 지정연월일 : 1970. 5. 26. 의릉은 조선후기 경종(景宗)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魚氏)의 능이다. 의릉이 위치한 곳은 천장산(天藏山) 밑이며, 옛 지명은 양주 중량포(中梁浦)이다. 경종은 숙종의 장남으로서 장희빈으로 더 잘 알려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장씨(張氏)의 소생으로 이름은 균(呁), 자는 휘서(輝瑞)이다. 숙종 14년(1688)에 태어나서 세 살 때 왕세자에 책봉되어 숙종 43년(1717) 8월에 대리청정을 시작했으며, 3년 후 숙종이 사망하자 경희궁에서 즉위했다. 경종의 첫 번째 왕비는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인데 세자빈으로 있을 때 세상을 떠났으므로 동구릉의 혜릉(惠陵)에 안장했다. 이어서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15세 때 세자빈이 되었다. 경종의 즉위와 더불어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는데, 온유한 성품을 지니고 매사에 익숙했으나 영조 6년(1730)에 26세로 소생 없이 사망했다. 경종은 병약하여 재위 4년 만에 사망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모후 장희빈이 사사된 후부터 질환이 있었다는 것이다. 경종은 성격이 온유했으며 자녀가 없고 병이 많아 이복동생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했다. 4년 동안의 경종 재위 기간 중에는 집권세력이던 소론(少論)이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던 노론(老論) 세력을 숙청한 경종 원년(1720)의 신축옥사(辛丑獄事)와 경종 2년(1722)에 임인옥사(壬寅獄事) 등 두 번의 옥사가 일어났다. 경종은 재위기간 동안 서양의 수총기(手銃器: 소화기)를 모방하여 이를 제작하게 하고, 삼남지방 양전(量田)의 민원을 시정하게 했다. 일반적으로 쌍릉(雙陵)은 좌우로 조성하나 의릉은 앞뒤로 놓아 능역을 조성했다. 이러한 전후능설제도(前後陵設制度)는 영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에서 처음 나타난 형식인데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생기가 왕성한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두 개의 봉분을 앞뒤로 놓아 능을 조성했다. 영릉과 다른 점은 영릉은 왕과 왕비의 두 봉분을 약간 엇비스듬하게 배치했다면 의릉은 두 봉분을 앞뒤로 배치했다는 것이다. 왕릉과 왕비릉은 각가 단릉(單陵)의 상설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 뒤에 있는 왕릉에만 곡장(曲墻)을 둘러 쌍릉임을 나타냈다. 석물(石物)은 능 앞에 척수를 줄여 실물 크기로 조각된 문관석・무관석이 세워져 있고 봉분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두르고 있다. 그밖에 혼유석(魂遊石)・장명등(長明燈)・망주석(望柱石)・문무석(文武石)과 말・양・호랑이가 있다. 능석물의 배치와 양식은 명릉(明陵: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厚陵制度)를 택하였는데 이는 ≪속오례의(續五禮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의릉의 능역은 114,658평이다. 추존된 순조의 아들 익종(翼宗)의 능도 순조 31년(1831) 8월 4일에 이곳 의릉 좌강(左岡)에 자리를 잡아 연경묘(延慶墓)라 하다가 헌종 즉위년에 추존하여 수릉(綏陵)으로 높였는데 철종 6년(1855)에 동구릉으로 이장했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7, 1990.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86-88쪽
  • 사적 제204호로 지정된 의릉(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은 조선 제20대 왕인 경종景宗과 그의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의 능이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208쪽
  • 1724년(경종 4) 8월 25일 경종이 승하하자 같은 해 12월 16일 양주 중량포의 천장산天藏山 기슭 언덕에 예장하고 능의 이름을 의릉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 1730년(영조 6) 6월 29일 26세의 젊은 나이로 계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10월 19일 경종 왕릉 아래에 능을 조영하였다. 의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의 앞뒤로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 능이다. 조선왕릉 중 효종의 영릉과 더불어 두 곳이 이런 형식이다. 곡장을 두른 것이 경종의 능침이며 그 아래 곡장이 없는 것이 선의왕후의 능침이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221쪽
  • 반면 의릉의 영향력은 수십 년 전까지만해도 부정적인 편이었다. 이유는 의릉 그 자체에 있기보다 능역 안에 들어선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 청사 때문이었다. 1962년 1월 중앙정보부의 입주와 함께 석관동 일대에는 새 도로가 놓이고 주택과 공장들이 들어섰다. 서울 근교의 한가한 농촌 지역이었던 석관동은 금세 도시의 외양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옆에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을 끼고 있는 지역인만큼 도시의 개발에는 한계가 있었다. 곧 청사 주변 석관동과 이문동의 건물 층수와 고도가 제한되었으며 외부인들에게 금단의 땅으로 알려진 지역은 서울에서도 가장 음울하고 삼엄한 빛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1995년 의릉 앞 정보기관이 내곡동으로 이전하고 1996년 그 자리에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들어섬으로써 석관동은 다시 도시의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면서 서울시와 성북구는 쾌적한 경관 조성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주민들은 골목에서 아파트에서 새로운 이웃공동체를 일구어 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22-24쪽
  • 의릉은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해 있다. 그리 높지 않은 아담한 천장산 자락에 자리잡았다. 독특한 것은 지도상으로 보았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석관동 캠퍼스에 둘러싸인 형태라는 점이다. 대학 캠퍼스 속 조선왕릉. 이처럼 이질적인 두 공간이 함께 있게 된 데에는 복잡한 현대사 속 이야기가 얽혀있다. 의릉은 이곳의 주인공인 경종의 삶만큼이나 다사다난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35-36쪽
  • 의릉의 조성 그리고 수난 1724년(경종 4) 8월 25일 경종이 승하한 후 같은 해 12월 16일 양주 중량포의 천장산天藏山(현 성북구 석관동 소재) 기슭 언덕에 예장하고 묘호를 경종, 능의 이름은 의릉이라 하였다. 1730년(영조 6) 6월 29일 경종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10월 19일 경종릉 아래 예장하였다. 왕과 왕비의 봉분을 언덕에 앞뒤로 배치하여 동원상하이봉으로 구성하였다. 곡장曲墻을 두른 것이 경종의 것이고 없는 것이 선의왕후의 것이다. 능지의 선정에 대해서는 9월 초부터 논의하였다. 총호사 이광좌李光佐가 후보지로 옛 영릉寧陵 터, 중량포, 용인, 교하, 왕십리의 다섯 곳을 선정하였다. 이광좌 등을 비롯한 몇몇이 이중 옛 영릉 터가 좋다고 하였으나 김일경金一鏡 등이 천릉하였던 장소에 다시 능을 쓴 사례는 찾을 수 없다고하여 반대하여 논의 끝에 중량포로 결정하였다. 이후의 조성 과정은 아래와 같다. 1724년 9월 24일 산릉공사 시작 1724년 9월 24일 묘시(卯時)에 무덤을 만들기 위해 풀베기와 땅파기 시작(斬破土) 1724년 11월 초10일 진시(辰時)에 관을 땅에 묻기 위해 ‘井’자 모양에 맞추어 구덩이를 팜(開金井) 1724년 11월 13일 묘시에 관을 담는 외재궁(外梓宮)을 내림 1724년 12월 16일 발인 후 임금의 관을 구덩이(玄宮)에 내린 뒤 묻고 장사지냄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Ⅵ,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299쪽.) 흔히 의릉의 특징으로 잘 알려진 것은 능의 상하이봉 배치이다. 쌍릉은 좌우로 놓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풍수설에 따라 산릉처로 부적합한 좌우 배치보다 혈穴이 명확한 상하 배치가 더 좋다는 풍수설에 따라 위아래로 배치하였다. 이는 효종孝宗(1619~1659)의 영릉寧陵과 같은 방식이다. 의릉의 또다른 특징은 기존 왕릉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도상이 적용된 문무석인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의릉에 배치된 석물의 체제는 명릉明陵의 예를 따랐다. 석물의 종류나 규모, 크기, 위치 등 대부분 명릉과 흡사하게 조성되었다. 그러나 석물의 조성은 1722년(경종 3)에 추배된 단의왕후端懿王后(1686~1718)의 혜릉惠陵과 많이 닮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무석인의 도상은 혜릉과 의릉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양식이다. 두 능의 무석인을 비교해보면 얼굴 표정과 같은 세세하게 다른 부분이 있지만, 투구의 모양이나 상모가 달린 점, 허리 부근에 꼬리가 돌돌 말린 표범 가죽옷을 입고 있는 등의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혜릉의 석수 조성에 참여했던 석수들이 다수 의릉의 석수 조성에 참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더불어 혜릉의 석물 추배와 의릉의 조성이 연이어 일어났다는 사실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47-49쪽
  • 의릉의 건축물들은 명릉의 예를 따랐다. 건축물이 배치되었던 곳이나 그 규모는 기록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정자각은 능아래 72보 지점에 있으며, 정자각 내부의 포진은 건원릉과 같다. 수라청은 3칸으로 정자각 우측 13보 지점에 있으며, 수직방 3칸은 정자각 좌측 12보 지점에 있다. 망료위는 정자각 남쪽 4보 되는 곳에 있다. 표석은 하나로 정자각 서북쪽 15보 되는 곳에 있는데, 길이 8자, 두께 3치, 두께 1자 5치로 보호각이 있다. 전서로 ‘朝鮮國景宗大王懿陵宣懿王 后祔’라는 음기가 있다. 홍살문은 정자각 남쪽 51보 되는 곳에 있다. … 전사청은 8칸으로 홍살문 북쪽 264보 되는 곳에 있으며, 제기고 3칸은 전사청 옆에, 안향청 6칸과 집사청 5칸은 홍살문 북쪽 273보 지점에 있다. 재실 13칸은 전사청에 접해 있으며, 연지는 재실 남쪽 100보 지점에 있는 데 길이는 140자, 너비는 89자다. (『춘관통고(春官通考)』 12책 권20 「고례(吉禮)」, 18쪽; 국립문화재연구소, 위의 책, 2014, 346쪽에서 재인용.) 이 기록에 따르면 의릉의 건축물로는 정자각, 수라청 3칸, 수직방 3칸, 비각, 홍살문, 전사청, 제기고, 안향청, 재실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 정자각과 비각은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며, 홍살문은 최근 복원되었다. 그러나 수라청, 수직방, 전사청, 제기고, 안향청, 재실 등은 현재 남아있지 않고, 기록을 통해 그 위치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의릉은 조선왕조가 유지될 때까지는 여느 왕릉처럼 왕실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었다. 비바람 등으로 인하여 곡장 일부가 무너지거나 석물의 회칠이 벗겨지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으나 왕실에 의해 금세 수리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현대사를 거치며 의릉은 능역이 철저히 파괴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49-51쪽
  • 의릉의 능역은 조성 당시 약 30만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찍이 서울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주변의 훼손으로 1960년도 능역은 약 18만 평으로 축소되었다.34 이렇게 규모의 축소를 겪은 의릉은 일제강점기에는 인근에 공동묘지가 조성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고, 1962년에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무상임대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수난을 겪게 된다. 1962년 1월 13일, 당시 남산 부근에 있던 중앙정보부는 이전을 목적으로 의릉의 능역 131,401평을 무상임대하였다. 이후 능 우측에 본관건물을 도입하여 능의 좌청룡을 훼손하였고, 능의 좌측에도 건물을 신축하며 우백호마저 훼손하였다. 심지어 1972년 무렵에는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땅을 파서 인공 연못을 조성하여 능제를 훼손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금천교가파괴되었다. 인공연못이 조성되며 의릉은 왕릉으로서의 위엄있는 상징성이 배제되고 정원庭園의 기능이 부각되었다. 능역 곳곳에 각종 꽃나무와 수목을 심어 화려하게 치장하였고, 정자각의 양쪽에는 큰 청동 향로를 놓았으며 연못 부근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탑 등을 놓았다. 재야원로들과 사회각계 및 여야 지도급 인사들 1백 5명, 그리고 정부의 각료들과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이 17일 자리를 함께하고 안보 문제와 국민의 자세 등 시국 문제에 관해 무릎을 맞대고 얘기를 나누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참석자들이 정보부 구내의 의릉 앞 잔디밭에 준비된 노천식당에서 오찬에 들어가기 전 간단한 리셉션이 베풀어지고 있던 낮 12시 30분 김정렴 비서실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대동하고 도착, 박수를 받으며 입장해서 오후 2시까지 90분 동안 자리를 같이했다. ― ‘105명 원로들과 「안보대화」 90분’, 「동아일보」, 1975년 5월 19일. 위의 기사처럼 1975년에는 조성된 ‘정원’에서 대통령까지 참석하는 만찬이 열리기도 하였다. 본 행사는 중앙정보부가 주최한 행사로, 그들이 의릉 능역을 훼손한 후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건축물 또한 대부분 파괴되었다. 재실은 1969년 철거되어 1973년 영친왕 봉분이 있는 영원英園으로 이전하였다. 재실이 있던 자리는 사유지가 되어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의 부지로 활용되다가 1993년 ㈜한화제약의 사옥이 들어섰다. 금천교는 앞서 서술한 인공연못 조성 과정에서 파괴되었고 수라청, 수직방 등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비슷한 때에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51-54쪽
  • 중앙정보부에 의해 파괴된 의릉을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은 중앙정보부가 명칭을 국가안전기획부로 바꾼 후 1995년에 지금의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시작되었다. 1995년 9월 25일 청사 이전이 일부 완료되고, 토지가 일부 국가로 반환 되었다. 국가는 이를 정비하여 시민들에게 공개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1995년 10월에는 KBS 음악 프로그램 「열린음악회」의 녹화가 본관 앞 광장에서 열리기도 했다.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국가안전기획부로부터 1차로 토지 환수를 한 후 곧바로 의릉을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하고자 하였으나, 1996년 2월 한예종이 기존의 건물들을 사용하게 되면서 능침 주변만 우선 정비하여 공개하였다. 1997년 2차 토지 환수 이후에는 해당 건물 및 부지가 한예종에 관리 위임되었다. 토지의 환수는 이후 세 차례 더 이루어졌다. 2002년에는 문화재위원 자문회의에서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환수받은 건물을 철거하고 전 능역을 복원한다는 기본방침을 세웠으나, 한예종이 건물 사용허가를 받고 기존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건물 철거는 실현되지 않았다. 따라서 가능한 지역에 대해서만 복원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이에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복원공사를 실시하여 인공연못을 매립하고 홍살문을 원래의 자리로 옮겼다. 어도와 금천교도 복원하였으며 능침 주변의 외래수종을 제거하고 고유수종을 식재하였다. 다만 (구)중앙정보부강당은 1972년 7 · 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역사적 장소라는 점이 인정되어 철거 대상에서 제외되는 동시에 등록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 5차 토지 환수가 시행된 이후 2009년부터 단계적으로 한예종의 관리위임을 종료시키고 있으며, 2010~2012년에는 추가적으로 의릉 구관 철거지역 능제복원 사업을 실시하였다. 이후 능역 복원 및 보수 작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능역에 한예종이 자리하고 있어 완전한 복원은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한예종은 본디 새로운 캠퍼스 부지를 구해 이전해야 했으나 재정 문제로 인하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고려하여 관리위임 기간을 2022년까지 연장해주었다. 의릉이 고된 수난을 마치고 우리에게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란 무척 요원해 보인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54-55쪽
  • 영조는 즉위 직후부터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흉흉한 소문에 시달렸다. 왕세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왕위에 보다 빠르게 오르기 위하여 경종으로 하여금 게장과 생감을 같이 먹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폈듯 낭설에 지나지 않았는데, 영조와 그를 지지하는 노론의 반대 세력에게는 좋은 정치적 무기가 되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1755년(영조 31) 발생한 나주벽서사건이다. 나주 객사인 망화루 기둥에 거병을 촉구하는 벽서가 붙은 것이 발단이 되어 수많은 소론들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다. 이 사건에 연루된 신치운申致雲은 국문 도중 영조의 면전에 대고 “나는 갑진년(1724년, 경종이 사망한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말했다. 영조가 재위에 오른지 30여 년이 흘렀음에도 아직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사실처럼 거론된 것이다. 이렇듯 영조의 재위기간 내내 경종 독살설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영조는 이러한 소문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소문은 영조의 정통성을 공격하고자 하는 세력들에 의해 끊임없이 전파되었고, 영조 또한 이를 말끔히 일소하기는 어려웠다. 영조는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영조는 52년이라는 긴 재위기간 동안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숙종의 명릉과 더불어 경종의 의릉에 자주 능행하였다. 특히 의릉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영조는 왕이 된 이후 태조의 건원릉과 아버지 숙종의 명릉보다 의릉에 가장 먼저 능행하였고, 3차례나 능행한 이후에야 다른 곳을 찾았다. 또한 영조가 의릉에 능행한 시기를 다른 능침에 능행한 것과 비교하면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주 목적지가 의릉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릉이 건원릉 등 구리의 동구릉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음에도 의릉만을 능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건원릉에 능행할 때에는 대부분 의릉에도 능행하였다. 영조의 재위기간 이루어진 총 77차례의 능행 가운데 의릉은 15차례 찾았다. 총 25차례 능행한 명릉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의릉을 특별하게 여긴 영조의 의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60쪽 표 참고)
  • 영조는 능행을 통하여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자신이 ‘삼종혈맥’을 잇는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때로는 경종에 얽힌 일이 정치적인 논란으로 부상하게 되면 의릉에 능행하여 신하들의 앞에서 능에 엎드려 우는 모습까지 보이며 경종과의 관계를 변호하였다.42 정치적인 목적으로 능행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능행의 목적이 거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조는 능행을 일종의 대민 직접 접촉의 기회로 삼았고, 군신관계를 조정하는 매개체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의릉으로의 능행은 좋은 기회였다. 이날 임금이 환궁하다가 노상(路上)에 연(輦)을 멈추고 양주(楊州)에 나이 많은 사람을 불러서 본읍(本邑)의 폐막(弊瘼)을 물었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권7, 1년 8월 27일(임진).) 영조가 재위에 오른 후 의릉에 두 번째 능행을 하였을 때의 기록이다. 이처럼 영조는 능행을 기회로 삼아 지방관들에게 지역의 폐단을 묻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백성들과 직접 만나 그들의 고충을 전해 들었다. 그런가하면 왕이 능행을 할 때 백성이 직접 호소하여 이를 해결해주는 일도 있었다. 임금이 의릉(懿陵)에 거둥하였는데, 돌곶이 고개를 지나갈 때 한 어린아이가 길가에서 호소하여 금오(金吾)가 붙잡았다. 임금이 승지 조명채(曹命采)에게 유시하기를, “그의 뿌리를 물어서 아뢰라.” 하였는데, 어가(御駕)가 능 아래에 이르자, 조명채가 말하기를, “그 아이에게 자세히 물었더니, 말하기를, ‘태종대왕(太宗大王)의 7대손으로 본디 금천(金川)에 살았는데 걸식을 하며 양천(陽川) 땅에 이르러 부모가 모두 죽었음에도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길가의 한 어린아이가 왕가의 후손이라 하는데, 이는 바로 사민(四民) 가운데서 고(告)할 곳이 없는 사람이다. 양천현감(陽川縣監)은 지난번 신칙한 후에 잘 받들어 거행하지 못해 현 안의 고할 곳이 없는 아이로 하여금 관(官)에 호소하지 못하게 하여 길가에서 슬피 울부짖게 했으니, 단속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고, 해당 도신(道臣)은 종중추고(從重推考)하며, 그 고아는 해청에서 식물(食物)을 넉넉히 제급(題給)할 것이며, 그 부모 역시 본현으로 하여금 돌보아 묻게하라.” 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권72, 26년 8월 20일(경인)) 이처럼 영조는 능행을 하였을 때 지방관을 통해 지역의 민심을 전해 듣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직접 백성을 불러 어려움을 묻기도 하였고, 때로는 왕 앞에 호소하는 자들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의릉 능행 이외에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능행이 지역에 가져다주는 부담도 경감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61-62쪽
  • 국왕의 능행은 능행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가능했다. 왕이나 신료와 더불어 수백의 군졸들이 동원되어 함께 대열을 유지한 상태로 이동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능행로는 백성의 생활 터전인 농경지나 가옥을 거쳐 가는 경우가 많아 백성들의 생업에 차질을 빚곤 했다. 또한 능행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능행로를 정비하는 일에 동원된 백성들은 인근 30리 이내의 거주민들이어서, 그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은 필수적 과제였다. 특히 능행로는 한 번 정해지면 큰 변화 없이 반복해서 이용하였기 때문에 능행을 자주 행하였던 곳은 더욱 신경을 써주어야만 했다. 이에 능행로를 정비하고 야간에 횃불을 밝히는 비용으로 저치미儲置米(국가비축미)를 내려주고, 농민들이 보유한 재화를 쓰는 일이 없도록 하여 부담을 줄여주었다.농번기에는 백성을 동원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서 의릉(懿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농민을 불러 보고 농사 형편을 물었다. 하교하기를, “… 의릉의 기신에 알릉(謁陵)하는 예(禮)를 정하였으나 바로 추수(秋收)하는 시기에 당하니, 길을 닦을 때에 절대로 농민을 쓰지 말아서 내가 석년에 휼민(恤民)을 체득한 뜻을 펴도록 하라.” 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권91, 34년 6월 28일(임오).) 정조는 이러한 영조의 뜻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선왕先王(영조)을 생각하면 감히 힘쓰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며 능행 중에 접수된 백성들의 상언上言을 모두 직접 처리하였는데, 재위기간 동안 총 4천여 건에 달했다. 또한 능행 시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저치미를 내려주는 것 이외에 각종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법을 만들거나, 기금을 만들고 이자를 이식하여 해결하기도 하였다. 앞서 말하였듯 한 번 정해진 능행로는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았다. 간혹 천재지변에 의해 이용할 수 없게 되거나, 길을 보수하는데 막대한 재력이 소모될 경우 일부만을 변경할 따름이었다. 능행로는 능행에 앞서 국왕에게 문서로 작성하여 보고되었는데, 이를 통해 후대 국왕들도 능행로를 그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실록 등의 기록에 의하면 의릉으로의 능행로는 영조 대에 처음 닦여 영조의 재위기간 동안 총 15차례 이용되었다. 돈녕부(敦寧府) 앞길 → 파자전 석교(把子廛 石橋) → 종묘동구(宗廟洞口)앞길 → 판전병문(板廛屛門) 앞길 →이석교(二石橋) → 초석교(初石橋) →흥인문 → 양산수석교(陽山守石橋) →동관왕묘 뒷길 → 보제원(普濟院) 앞길 → 승방천(僧房川) → 제기현(齊基峴) → 고암(皷岩) 앞길 → 사아리(沙阿里) (궐문(自闕門)으로부터 5리(里)) →대원천(大院川) → 냉천(冷川) → 석관지현(石串之峴) → 독산우(秃山隅)→ 능동(陵洞) 입구 (궐문(闕門)으로부터 10리(里)) (『어영청거둥등록(御營廳擧動謄錄)』 권3, 정미(1727) 1월 28일, 「병조절목(兵曺 節目)」(이왕무, 위의 책, 2016, 242쪽에서 재인용).) 위는 『어영청거둥등록』에 기록된 의릉 능행로이다. 이를 따라가보면, 어가는 돈화문을 통해 궁에서 나와 종묘 앞길을 지나 흥인문(동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동관왕묘 뒷길을 통해 보제원(지금의 안암오거리) 앞을 지나 제기현을 거쳐 고암(지금의 종암동) 앞길을 지났다. 그 뒤 두 개의 천을 건너 석관지현(지금의 석관동)을 지나 의릉에 도착한다. 이를 통해 의릉은 다른 능에 비해 비교적 궁궐과 가까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62-65쪽
  • 의릉과 중앙정보부 석관동 의릉 부지에 중앙정보부 청사가 들어서며, 의릉의 모습은 많이 훼손이 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1970년 5월 26일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04호로 지정되고 5월 27일에 고시된다. 1970년에도 의릉 권역이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18개의 능을 한꺼번에 문화재로 지정하는데 함께 이름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릉이 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와 서쪽의 천장산 자락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인식이 되어왔다. 의릉은 1960년대 초 당시 중앙정보부가 능역 내에 있어서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하였다. 이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고 1995년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1996년에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고,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외래수종 제거, 전통수종 식재, 인공연못 성토, 금천교 복원 등 기초적인 의릉 능제복원 정비공사를 마쳤다.(조선왕릉 의릉 이야기, https://royaltombs.cha.go.kr/tombs/ selectTombInfoList.do?tombseq=134&mn=RT_01_07_01) 2003년 7월 19일부터 10월 10일에 현장조사가 마무리되어 2004년에 발간된 『의릉 복원정비지역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의릉 권역에 대한 조사 배경 및 목적이 서술되어 있다. 의릉은 1970년 5월 26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204호로 지정되었으나, 1962년 이미 국가정보원(구 중앙정보부)이 자리잡고 주변으로 관련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일부 지형들이 변형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조성되어 있는 연못 또한 중앙정보부 관리 시절에 조성된 것이며, 다행히 1995년 9월에 중앙정보부의 새로운 통합신청사가 내곡동에 준공되면서 1995년 11월 2일 부지에 대한 1차 반환이 이루어졌고, 점차적으로 2002년까지 총 4차에 걸쳐 반환되어 현재는 대부분의 경역(境域)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부지 및 건물들이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관리 하에 놓임에 따라 완전한 반환은 이루지 못하였다. 문화재청에서는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반환받은 의릉의 일부 경역에 대하여 원래 능제(陵制)에 맞게 복원정비하고자 복원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이에 앞서 그 근거를 마련하고자 금번 조사를 본 연구소에 의뢰하게 되었다. (문화재청 ·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2004, 『의릉 복원정비지역 발굴조사 보고서』)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231-233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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