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교동 한규설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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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민속문화재
장소 유적
유물 건축물
성북구 정릉로 9길 64에 위치한 조선말 한성판윤을 지낸 한규설이 살던 저택이다. 원래 위치인 중구 장교동에서 국민대학교로 옮겨와 1980년 12월 20일 완공했다. 이 가옥은 189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교동에 있을 때에는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 사당, 광채가 넓은 대지 위에 있었다. 현 위치로 옮겨 오면서 없어졌던 솟을대문, 좌우 행랑채를 복원했고, 본래는 있었으나 철거된 중문간(間) 사잇담도 복원했다. 행랑마당-사랑마당-안마당-사당마당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사대부가의 이상적이며 논리적인 공간구성이고, 조선후기 세도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정릉동
  • [성북을 찾다] 한규설 고택
  • 한규설 가옥 설경
  • 한규설 가옥 내 녹야정
  • 장교동 한규설 가옥의 정자와 연못
  • 장교동 한규설 가옥의 안채
  • 한규설 가옥 전경
  • 한규설 가옥 내부
  • [성북을 찾다] 한규설 고택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長橋洞 韓圭卨 家屋
  • 이명칭: 장교동 한규설대감가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   유물 건축물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
  • 비고: 1890년대 건축 추정

주소

  • 주소: 02708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855-2 (정릉로9길 64)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문화유적 문화유적 12 장교동 한규설 가옥 옛 풍모를 그대로 간직한 고관의 저택 - 구한말 고관대작의 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왕궁과는 다른 지체 높은 대감댁의 모습을 보려면 성북구 정릉동으로 가면 된다. 국민대학교 인근에는 현재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판윤을 지낸 한규설 대감의 저택이 옛 풍모를 간직한 채 보존되어 있다. 원래 중구 장교동에 있던 저택을 1980년 이곳으로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1890년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저택에는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 사당 등이 복원됐다. 전체의 건물은 평면을 주조로 함으로써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지어졌다. 행랑마당-사랑마당-안마당-사당마당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사대부가의 이상적이며 논리적인 공간구성이고, 조선후기 세도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건물 배치 외에도 몇 가지 면에서 후기 주택의 특징을 보여준다. 각 건물이 겹침으로써 각 방의 규모와 깊이가 커졌고, 툇마루의 발달은 각 방을 연결하여 마루바닥에서 동선처리가 가능하도록 했다. 또 화강암의 장대석 기단과 잘 가공된 육각초석, 부연을 단 겹처마의 구성은 이전의 건축양식을 넘어서는 장식화의 추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규설 대감은 자를 순우라 했고, 제주가 본관으로 무과에 급제해 포도대장, 장위사, 내각의 의정부참정 등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울분을 토하며 관직에서 물러났다. 한때 중추원 고문, 궁내부 특진관을 지내기도 했지만, 한일합병 이후 모든 작위를 거절하고 재야에 묻혀지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26-27쪽
  • 1890년경 지어진 이곳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조선시대 한성판윤에 참정대신 등을 지낸 한규설 대감의 집으로, 중구 장교동에 있던 고택을 1980년 도시 재개발로 멸실될 위기에 처하자 이전한 것이다. 한규설 대감의 고택은 60칸으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상류층 저택이다. 대문은 주인의 지체를 상징하는 솟을대문이며 가마를 타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규모다. 이를 지나면 이내 두 개의 중문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사랑채로, 다른 하나는 안채로 향한다. 사랑채의 절정은 사분합문(4개로 분할된 문)이다. 이를 들어 열면 사통팔달(바람 길)이 생긴다. 동시에 마당의 나무와 담장, 안채의 지붕 선을 살며시 담아낸 액자가 만들어진다. 전통 건축을 이야기할 때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차경借景(외부 경치를 내부로 끌어들인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표현)의 묘미인 것이다. 안채는 대문으로부터 먼 북쪽에 자리 잡았다. 안방, 대청 그리고 건넌방으로 이뤄졌고 뒤쪽으로 부엌과 찬방이 있다. 과거 가족들이 대소사를 치렀던 넓은 명적의 방과 마당은 현재 여러 행사의 무대로서 다채롭게 활용되고 있다. 이 외에도 별채에 사당까지 갖췄고, 채별로 행랑마당, 사랑마당, 안마당, 사당마당이 있다.
  • ① 長橋洞 韓圭卨大監 家 城北區 貞陵洞 國民大學校 내에는 朝鮮 말 漢城判尹을 지낸 韓圭卨대감이 살던 건평 61.58평, 대지 412평에 달하는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된 (1977년 3월 17일) 집이 中區 長橋洞에서부터 옮겨와 1980년 12월 20일 완공하여 1981년 3월 9일 國民大學校로 등기 이전되어 있다. 한규설은 光武 9년(1905) 議政府 參政으로 內閣을 조직하여 동년 11월 17일 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될 때 극구반대하다가 파직되고 고향에 은거하다가 후일 中樞院顧問宮內府 特進官을 역임하였고 韓日合倂時 男爵을 주었으나 거절한 사람이다. 이 가옥은 189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장교동에 있을 때에는 소슬대문·사랑채·안채·사당·광채가 넓은 대지위에 있었는데 현 위치로 이축하면서 없어졌던 소슬대문 좌·우의 행랑채를 복원하였고 본래는 있었으나 철거된 중문 間 행랑채와 사잇담도 복원하였다 안채는 정면 5間, 측면 2間에 4間이 덧붙여져 돌출되었다. 西南向한 안채의 서측에는 정면 1間, 측면 3間의 안방이 있고 동쪽으로 정면 3間, 측면 2間의 대청과 이의 동쪽으로 정면 1間, 측면 2間의 건넌방이 있다. 안방 뒤쪽에 부엌이 돌출되어 있는데 정면 2間, 측면 1間 半이며, 이의 북쪽에 정면 1間 半의 방이 붙어 있다. 서울에서 흔히 나타나는 안채의 평면은 부엌이 안방의 정변인 남쪽에 붙어 동·서로 面하는데 비하여 이 안채는 안방 뒤쪽으로 배치되어 안방이 남쪽으로 배치되게 한 점이 특이하다. 사랑채는 정면 4間, 측면 2間 半, 다른 쪽 측면은 3間 半인 L字形으로 西南向인데 침방, 사랑방, 사랑마루로 구성되고 사랑방 前面에는 褪間이 있다. 祠堂채는 西南向하여 안채의 광채 사이에 있는데 일반적으로 3間, 1間에 褪間을 둔 다른 祠堂채와는 달리 정면 2間, 측면 1間이다. 별채는 ㄱ자형으로 안채의 서북쪽 안쪽에 있는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 광채와 연결되었으며 광채는 정면 4間, 측면 1間이고 부엌은 1間이고 부엌 북쪽에는 西方1間의 방이 있고 이의 동측에 마루가 있다. 건물은 花崗石 基壇(높이 48㎝) 과 화강석 육모뿔 초석위에 기둥을 세웠고 안채, 사랑채, 뒷채의 마루는 모두 우물마루이며 대부분의 窓戶는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겹처마이며 전면은 굴도리이나 후면은 납도리이고 전후면 모두 소로받침을 하고 있다. 안채의 구조는 五樑架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 가옥은 현재 국민대학교내 새로 조성된 1,359평 규모의 대지 위에 원형 그대로 이 건하여 학교의 生活館으로 사용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11-712쪽
  • 활기 넘치는 20대 대학생들 사이에서 130여 년의 세월을 자랑하는 한규설 가옥. 반듯한 현대식 건물이 가득한 국민대학교 내에 한옥 한 채가 이색적이다. 189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 건물은 조선조 말기의 한성판윤 한규설 대감이 살던 집으로 원래 중구 장교동에 있었다. 한규설 가옥은 60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를 제한하였다. 대군은 60칸, 군과 옹주는 50칸, 종친과 2품 이상은 40칸, (55쪽 마침) 3품 이하는 30칸, 서인은 10칸이었다. 조선 말 신분제가 약화된 상황임을 감안하더라도 상류층의 전형적 주택임을 짐작할 수 있다. 1980년 도시 개발로 인해 가옥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당시 소유주였던 하옥순 여사는 명원 김미희 여사에게 가옥을 기증하여 국민대학교로 옮겨졌다. 명원 김미희 여사는 당시 국민대 중흥을 이끈 성곡 김성곤 선생의 부인으로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7호 궁중다례의식 보유자이다. 명원민속관으로 개관한 이곳은 국민대학교 교양수업인 <다례> 강의실이자, 차동아리 <명운다회>의 동아리방이기도 하다. 현재 솟을대문 좌·우의 행랑채와 중문간 행랑채, 사잇담도 복원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안채는 3칸의 안방과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 그리고 2칸의 건넌방이 있으며, ㄴ자로 꺾여 부엌과 찬방이 있다. 명원민속관 개관 이래 안마당을 공연장 삼아 다양한 국악공연을 펼치고 있다. 바쁜 일상, 잠시 빠른 걸음을 멈추고 조선시대로 돌아가 느긋한 발걸음으로 한옥을 돌아보며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55-56쪽
  • ▫ 서울시 민속자료 제7호 장교동 한규설대감가 長橋洞韓圭卨大監家 시대 : 조선후기 소유자 : 국민대학교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정릉동 855-2(국민대학교내) 지정연월일 : 1977. 3. 17. 조선말 한성판윤을 지낸 한규설이 살던 저택이다. 건평 61.58평, 대지 412평의 이 집은 원래 위치인 중구 장교동에서 국민대학교로 옮겨와 1980년 12월 20일 완공했다. 이 가옥은 189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교동에 있을 때에는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 사당, 광채가 넓은 대지 위에 있었다. 현 위치로 옮겨 오면서 없어졌던 솟을대문, 좌우 행랑채를 복원했고, 본래는 있었으나 철거된 중문간(間) 사잇담도 복원했다. 한규설은 대한제국 때 의정부 참정(參政)으로 내각을 조직한 인물로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극구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에 은거했다. 후일 중추원 고문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했는데 한일합방 때 일제가 남작(男爵)을 수여하려 하자 이를 거절했다. 이 가옥은 서울에서 흔히 나타나는 안채의 평면에서는 부엌이 안방의 정면인 남쪽에 붙어 동-서로 면하는 데 비하여 이 안채는 안방 뒤쪽으로 배치되어 안방이 남쪽으로 배치되게 한 점이 특이하다. 이것이 대지 모양에 맞추기 위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화강석 기단과 6각 초석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안채, 사랑채, 뒤채의 마루는 모두 우물마루이며 대부분의 창호(窓戶)는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사당(祠堂)이 위치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겹처마이며 전면은 굴도리이나 후면은 납도리이고, 전후면 모두 소로받침을 하고 있다. 서북쪽에는 ‘ㄱ자’ 형의 평면을 가진 또 다른 별채가 있다. 이 별채는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된 서울의 ‘ㄱ자’ 형 평면에 광채가 연속된 것이다. 이 가옥은 국민대학교 내의 새로 조성된 1,395평 대지 위에 원형 그대로 이건하여 이 학교의 생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참고자료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43-144쪽
  • 1890년경 지어진 이곳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조선시대 한성판윤에 참정대신 등을 지낸 한규설 대감의 집으로, 중구 장교동에 있던 고택을 1980년 도시 재개발로 멸실될 위기에 처하자 이전한 것이다. 한규설 대감의 고택은 60칸으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상류층 저택이다. 대문은 주인의 지체를 상징하는 솟을대문이며 가마를 타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규모다. 이를 지나면 이내 두 개의 중문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사랑채로, 다른 하나는 안채로 향한다. 사랑채의 절정은 사분합문(4개로 분할된 문)이다. 이를 들어 열면 사통팔달(바람 길)이 생긴다. 동시에 마당의 나무와 담장, 안채의 지붕 선을 살며시 담아낸 액자가 만들어진다. 전통 건축을 이야기할 때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차경借景(외부 경치를 내부로 끌어들인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표현)의 묘미인 것이다. 안채는 대문으로부터 먼 북쪽에 자리 잡았다. 안방, 대청 그리고 건넌방으로 이뤄졌고 뒤쪽으로 부엌과 찬방이 있다. 과거 가족들이 대소사를 치렀던 넓은 명적의 방과 마당은 현재 여러 행사의 무대로서 다채롭게 활용되고 있다. 이 외에도 별채에 사당까지 갖췄고, 채별로 행랑마당, 사랑마당, 안마당, 사당마당이 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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