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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리에서 월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장위고개라고 하였가고 한다. 조선시대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에서는 우장현雨藏峴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외에도 장위현長位峴, 다릿굴 고개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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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상월곡동에서 장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다릿굴(월곡)에서 장위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다릿굴고개 ,우장현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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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상월곡동에서 장위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로서, 월곡을 다릿굴이라고 하였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장위고개,장위현,우장현이라고도 하였다. 장위고개는 장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에 기우제를 지낼 때 쓰는 물품을 보관하던 곳이었던 데서 우장현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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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상월곡동에서 장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장위고개라 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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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는 능을 배알하러 가던 길에 월곡동에서 장위동 및 석관동으로 넘어가던 고개인 우장현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동쪽 일대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융복을 갖추고 교(轎)를 타고 이극문을 거쳐 홍화문을 나갔다. 동관왕묘 앞의 체마소(遞馬所)에 이르러 교에서 내려 말을 탔다. (중략) 우장현(雨藏峴)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소차(小次)에 들어갔다. 내가 이르기를, “국도(國都)의 지세가 세 면은 다 험하여 관문이 될 만한 곳이 있으나 동쪽은 산천이 광활하고 들판이 넓게 트여 한눈에 삼사십리가 들어와 막히는 곳이 없다. 지금 둘러보니 과연 허술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하니, 승지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여기서부터 동으로는 큰 산이 많으니 전적으로 허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일성록』 1785년(정조 9) 2월 10일(경인). (번역 : 한국고전번역원 데이터베이스))
정조가 신하들에게 한 말의 요점은 도성 수비의 허술함을 염려하는것이었지만, 그의 말에서 우장현에서 본 일대의 당시 풍경을 그려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