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위동
1949
장소 인문지리
성북구에 위치한 행정구역인 동의 하나이다. 우이천의 서쪽과 ‘북서울꿈의숲’ 남쪽 일대에 위치한다. 장위동은 마을 뒤에 장위산(獐位山)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오래전 명신(名臣), 즉 ‘높은 지위’의 사람이 살았던 것에서 장위(長位)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장위동은 조선 초 한성부에 속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동부 인창방 장위리계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고, 1949년 8월 성북구가 분리·신설될 때 성북구로 편입되었다. 장위동에는 민속문화재 제25호 장위동 김진흥 가옥이 있는데, 순조의 부마 윤의선과 그의 아들 윤용구가 살았던 곳이다. 1960년대 이전까지 장위동 농토 대부분이 윤용구와 그 친척들의 소유였으나 윤씨가가 매도하고 택지로 바뀌면서 현재는 주택이 밀집되어 있다.
장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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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長位洞
  • 이명칭: 한성부 인창방 장위리계, 명덕굴, 간대마을, 활량리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근거자료 원문

  • 마을 뒤 장위산이라 불리는 산에서 유래된 장위동 장위동의 명칭은 조선시대 초에도 장위리라 불러 온 것으로 보아 고려시 대의 명신(名臣)이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되기도 하 고, 마을 뒤에 장위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어서 이 산의 이름을 딴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장위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1396년(태조5)에 도성 및 성저를 5부 52방으로 획정할 때 동부에 소속되었으며, 조선 후기 1751년(영조 27)에 간행된 『어제수성윤음』「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동부 인창방 장위리계로 되어 있다. 장위동은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방이 강행된 후인 1911년에 한성부 를 개칭한 경성부 인창면에 편입되었으며, 다시 1914년 4월 1일을 기하여 전국의 부군을 자의로 통폐합할 때 장위동은 성 외(外) 지역에 해당된다 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 장위동이 다시 서울에 들어온 것은 1949년 8월 성북구가 분리・신설될 때이다. 그와 동시에 장위동은 성북구 관할 아래 놓였고 같은 해 성북구 내에 설치된 숭인 출장소 소속이 되었다. 1952년부터 행정상 편의를 위해 석관동과 합쳐서 장석동이라 칭하며 동 행정을 함께 보았는데, 다시 장위동과 석관동으로 분리된 것은 1963년의 일이다. 1973년 7월에는 숭인 출장소가 폐지되면서 장위동은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5년 10월 1, 2동으로 분동되고, 1977년에 인구증가에 따라 3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래 장위동 지역은 웃말, 아래말, 명덕굴, 간대마을, 활량리 등 5개의 자연 촌락이 합쳐진 것으로, 웃말은 이 지역 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윗마을이란 뜻이다. 아랫말은 이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 아래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간대마을(간대말)은 이 지역 가운데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고, 활량리는 한량리의 와전된 음으로 조선시대 때 이 마을에 술집이 많아 한량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 장위동長位洞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로 마을 뒤의 장위산獐位山의 이름을 따되 훗날 한자를 변형시켜 장위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동네는 조선시대부터 줄곧 농민들이 살았으며 별다른 특산물 없이 벼농사와 조, 수수, 고추 등의 작물만 재배되었다고 전해진다. 거주민들의 생활이 전통시대 한국의 보통사람들과 차별성이 없었다는 점은 자연스레 마을의 특징적인 자연물로 마을 이름을 정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마을 이름 대다수가 그 주변의 산, 강, 바위처럼 두드러진 자연물에서 따왔다는 점은 이러한 추론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다른 하나는, 오래 전에 이 마을에 명신名臣이 살았었기에 장위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보는 견해이다. 마을 이름 장위長位의 한자 뜻을 풀어본다면 ‘높은(長) 관직(位)’이라는 뜻이다. 자연촌으로 이루어진 행정단위인 리里가 막 만들어지기 시작할 조선 초부터 이 마을 이름이 장위동이었다는 점은 앞서의 한자 뜻풀이와 함께 결부시킨다면 조선 이전의 시기, 즉 고려시대 언젠가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이 마을에 살았기에 장위동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시기는 조금 다르지만 이 마을에는 조선 후기 이조판서를 지냈던 윤용구尹用求가 살기도 했다. 윤용구의 호號 가운데 장위산인獐位山人은 바로 장위동, 혹은 장위산을 염두해 둔 것이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258-259쪽
  • 長位洞 牛耳川의 서쪽과 서울 드림랜드 남쪽 일대의 위치한 長位洞은 朝鮮時代初에도 長位里라 불리어 온 것으로 보아 高麗朝 때 名臣이 이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고, 또 하나는 마을 뒤에 獐位山이 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따서 長位洞이 되었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長位洞은 조선초부터 漢城府에 속했는데 英祖 27년(1751)에 간행된 『守成冊全』중의 「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보면 漢城府 東部 仁昌坊(城外) 長位里契로 되었고 甲午改革때는 漢城府 東署 仁昌坊(城外) 東小門外契의 長位里가 되었다, 그 후 한일합방에 따라 日帝는 1911년 4월 1일(京畿道令 제3호) 京城府 仁昌面 長位里로 칭했으며 이어서 1914년 4월 1일(京畿道令 제1호) 京畿道 高陽郡 崇仁面 長位里가 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大統領令 제159호) 서울市에 편입되면서 城北區의 신설로 이에 속하고 崇仁出張所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50년 3월 15일(市條例 제10호) 長位里는 장위동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1978년 10월 10일(市條例 제1286호)에 50m 도로를 경계로 석관동 일부(주민 2, 135명)가 이 洞에 편입,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長位洞 사람들 사이에는 「양주밥 먹고 고양굿 한다」는 말이 널리 유행되었는데 이 말은 농토는 楊州에 두었고 高陽에서 거주하므로 食生活은 楊州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는데서 생겼다, 이와 같이 朝鮮시대의 이 곳 주민들은 대부분 농민이었으며 벼농사와 조, 수수, 고추 등만 재배되어 특산물은 없었다고한다. 당시 장위동의 농토는 대부분 尹判書(石村 尹容求)와 그 친척들의 땅이었는데 1960년경부터 尹氏家에서 매도하고 또 택지로 바뀌어 현재 주택이 밀집되었다. 현재 장위동에는 민속자료 제25호로 지정된 金鎭興家(장위동 76-59)가 있다. 이집은 南寧齋로 불리는데 조선말 純祖의 駙馬인 南寧尉 尹宜善이 거처해서 南寧尉宮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건평 107평, 대지 759평의 이 주택은 高宗 2년(1865)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많은 부분이 개축, 개수되었다. 이 집은 尹宜善에 入養한 石村 尹容求(1853∼1939) 가 大臣을 내놓고 隱居했으므로 잘 알려져 있다. 윤용구는 아호를 石村, 海觀이라 하고 獐位山人이라 했으므로 장위동을 藏位라고 썼다. 이것은 尹判書가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은거했다는 뜻으로서 상통하는 점도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도 윤판서의 雅號가 獐位인 것, 즉 獐位라 쓴 것을 誤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윤용구는 고종 8년(1871)에 直長으로 庭試文科에 丙科로 及第한 다음 檢閱을 지내고 여러 벼슬을 거쳐 禮曹, 兵曹判書를 역임한 다음 乙未改革(1895) 이후 法部, 度支部, 內部의대신으로 10여회나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獐位山밑에 은거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났는데 특히 楷書와 行書 그리고 金石文을 많이 썼으며 竹蘭을 잘그렸다. 韓日合邦 후에 日帝가 男爵을 수여했으나 거절하였다. 그의 일화로는 南寧齋에 은거해 있을 때 현 장위동 91번지 장호다방 자리에 동구다리가 있었고 또 현 76번지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으며, 南寧齋 문밖에 큰 섬돌이 하나 있었는데 이 다리는 당시 관직의 고하에 따라 下馬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또 長位洞 사람을 잡으러 왔을 경우나 죄인이 장위동으로 잠입했을 경우에도 尹判書의 허락없이는 체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장위동은 1960년대에 구획정리가 되어 개발되면서 洋屋이 많이 들어선 주택가이지만 도로변은 商街가 형성되어 있고 土着住民이 많은 편이다 현재 장위동은 長位第1, 2, 3洞에서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11-813쪽
  • 〈長位第1洞〉 長位第1洞은 「月漢路」(미아삼거리∼창문여중∼하계동) 변에 위치한 장위동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廳區域 명칭이다. 이 洞은 1949년 8월 13일 서울市에 편입된 후에 洞會 名稱은 알 수 없으나 1953년 초에는 長位洞會로 호칭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당시 長位洞會는 장위동과 석관동 일대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5년 4월 18일(市條例 제66호) 「洞制」실시 때 長石洞事務所라고 개칭해서 행정을 담당했다. 그 뒤 1963년 1월 1일부터 시행한 서울特別市條例 제274호 「서울特別市 洞名稱 및 區域制定」으로 앞서 長石洞을 長位洞, 石串洞으로 분리시켰으며, 1970년 5월18일(市條例 제613호) 長位洞을 1, 2동으로 분동했다. 1977년 9월 1일(市條例 제1181호) 인구 확장에 따라 종전의 1, 2洞에서 3洞으로 分洞, 현재에 이른다. 앞서 1970년 5월 18일 分洞될 때 장위제1동의 관할구역은 장위동 중 長位橋를 기점으로 123번지에서 212번지에 이르는 溝渠 이북지역과 236번지 및 237번지 앞 도로를 경유, 동방생명주택 조성지역 (238번지 포함)을 옹하고 南下, 68번지 앞 도로에서 山3의 북측 地籍線과 연결되는 西北 지역으로 정했다. 원래 장위동 지역은 웃말, 아랫말, 명덕굴, 간대마을, 활량리 등 5개의 자연 촌락이 합쳐진 것으로 장위제1동의 옛 영광중학교 자리(장곡국민학교 위치)에 명덕굴이 있었다. 명덕굴은 明德고을의 와전된 말로 주민의 말에 의하면 獲位山人 尹容求의 형이 이 곳에 살았고 또 그 윗대부터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洞의 북쪽으로는 「月溪路」가 지나고, 동쪽으로는 「돌곶이길」이 지나며 이 두 길을 연결하는 「長位洞길」이 있으므로 교통이 원활하다. 현재 이 洞관내에는 한국상업은행 장위동지점과 장위중학교, 장위국민학교 등의 공공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장위제1동의 현황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814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13-814쪽
  • 〈長位第2洞〉 長位第2洞은 「花郞路」북쪽 일대 장위동 일부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 명칭이다. 이 洞은 앞의 장위제1동과 같이 1949년 8월 13일 서울市에 편입된 후 長位洞會로 호칭된 것으로 추정되며 1955년 4월 18일(市條例 제66호) 長石洞事務所로 되었다. 이어서 1963년 1월 1일(市條例 제274호) 長石洞이 長位洞事務所와 石串洞事務所 관할구역으로 나뉠 때 長位洞事務所에서 이 洞의 행정을 담당했다. 1970년 5월 18일(市條例 제613호) 長位洞事務所관할구역을 長位第1洞과 長位第2洞으로 分洞함으로써 설치되었다. 그 뒤 1977년 9월 1일(市條例 제1181호) 15m 도로를 경계로 장위 제1동과 제2동 관할구역에서 장위 제3동을 分洞함으로써 축소되었다. 分洞되기 전의 장위제2동의 인구는 33,776명 이었는데 第3洞으로 분동되면서 21,926명으로 줄어들었다. 이 洞의 자연촌락 이름은 웃말과 활량리가 있었다. 웃말은 이 마을 위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윗마을이란 뜻이다. 현재 長位 3洞 일부와 2洞 일부로서 南寧齋가 있는 마을로 1930년경에는 약 80호의 民家가 살고 있었다 한다. 또한 현재 장위제2동사무소 부근은 활량리로 칭했던 마을인데 활량리는 閑良里의 와전된 음으로 조선시대 이 마을에 술집이 많아 都城 한량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 洞의 남쪽으로는 「화랑로」가 지나고, 「돌곶이길」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이 洞관내에는 장위동우체국, 석관동우체국, 중소기업은행 장위동지점, 국민은행 장위동지점 외에 장석국민학교, 상업은행 합숙소, 장위쇼핑 등이 자리하고 있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장위제2동사무소의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815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14-815쪽
  • 〈長位 第3洞〉 長位 第3洞은 牛耳川邊 장위동 일부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 명칭이다. 이 洞은 앞의 장위제1, 2동과 같이 1949년 8월 13일 서울市에 편입된 후에는 長位洞會, 1955년 4월 18일 이후 長石洞事務所, 1963년 1월 1일 다시 長位洞事務所, 1970년 5월 18일 長位 第1, 2洞事務所, 1977년 9월 1일(市條例 제1181호) 장위 제1, 2동의 인구가 25,000명 이상이 되므로 15m 도로를 청계로 分洞할 때 장위 제3동(인구 22,3654명)이 신설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다. 이 洞일부에는 웃말과 아랫말, 간대말이란 자연 촌락이 있었다. 웃말은 장위제2동과 이 洞에 걸쳐있던 마을로 이 지역 위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아랫말은 이 지역 아래에 있다해서 붙여진 것으로 현재 長石市場이 위치한 마을이름이다. 간대말은 이 지역 가운데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제일은행 장위동지점과 장위제3동사무소 일대가 해당된다. 이 洞의 관내로는 「漢川路」(전농교∼중랑교∼석관동∼도봉구청 입구)가 牛耳川과 나란히 지나고 있고 남쪽으로는 「花郞路」가 뚫려져 있는데다가 동쪽으로는 電鐵 石溪驛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그리고 이 洞에는 남대문중학교, 광운국민학교가 있으며 북부소방서, 제일은행 장위동지점, 장석시장 둥이 자리하고 있다. 1990년 현재 장위 제3동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816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15-816쪽
  • 장위동의 동명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존재했다. 고려시대에 이름 난 선비가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며, 마을 뒤에 있는 장위산에서 비롯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장위동 지역은 웃말, 아래말, 명덕굴, 간대마을, 활량리 등 5개의 자연 촌락이 합쳐진 것으로, 웃말은 이지역 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윗마을이란 뜻이다. 아랫말은 이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 아래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간대마을(간대말)은 이 지역 가운데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활량리는 한량리의 와전된 음으로 조선시대 때 이 마음에 술집이 많아 한량들이 발걸름이 끊이지 않았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장위동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다. 주로 벼농사와 조, 수수, 고추 등 시골에서 키우는 작물을 재배하였다. 본격적으로 주택단지로 개발된 것은 동방생명보험회사에서 택지를 조성하여 팔기 시작한 1966년부터로 성북구에서 가장 늦게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성북문화원, 2016, 성북문화 제4호, 309-310쪽
  • 도성을 멀찍이서 둘러싼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과 같이 수려한 산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중랑천과 그 지천들이 핏줄처럼 흐르는 널찍한 평야지대. 이러한 자연환경 때문에 조선시대 장위동과 석관동 일대의 땅들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천장산과 오패산 자락에는 왕실의 능묘가 자주 들어섰고 양반 관료들은 자신들의 별업을 조성하였으며, 농민들은 토지를 일구어 논밭을 경영했다. 근대에 접어들어 장위동과 석관동에는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중심에 철도가 있었다. 1911년 경원선 철도가 중랑천을 따라 남북으로 놓였고, 1939년 경춘선 철도가 장위동과 석관동을 가로지르며 동서로 놓였다. 철도의 건설 이후 장위동, 석관동을 지나는 인구와 물자의 이동량이 많 아지고 서울의 권역이 확대됨에 따라 장위동과 석관동의 인구와 주택도 많아졌다. 1970년대 이후 경원선 철도가 도심과 연결되는 전철 노선으로 쓰이며 신이문역, 석계역이 잇달아 생기고, 자동차 도로와 다리가 놓였다. 이와 함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장위동, 석관동에 남아 있었다는 논밭과 농가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두 동은 완연한 서울 시내 주택가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한동안 1 · 2층짜리 단독주택들이 많았지만 1980년대 연립주 택과 다세대주택들이 대거 들어섰고 2000년대부터 구역별로 재개발이 차근차근 이루어지며 고층 아파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 가고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1쪽
  • 장위동은 이들 오패산 고개의 동쪽에 자리한 동으로, 서북쪽으로 오패산의 산세를 등지고 남동쪽으로는 우이천과 중랑천 유역의 너른 평지를 마주하고 있는 서고동저의 지형적 특징을 가진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4쪽
  • 원래 장위동 지역은 웃말, 아래말, 명덕굴, 간대마을, 활량리 등 5개의 자연 촌락이 합쳐진 것으로, 웃말은 이 지역 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윗마을이란 뜻이다. 아랫말은 이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 아래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간대마을(간대말)은 이 지역 가운데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활량리는 한량리의 와전된 음으로 조선시대 때 이 마을에 술집이 많아 한량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마을 이름이 1960년대에 발행된 지도에도 나온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23쪽
  • 세시풍속과 놀이 삼재막이 삼재막이는 정월 열나흗날 밤에 행하는 액막이 풍속의 하나로 ‘제웅치기’라고도 부른다.23 제웅치기는 직성直星의 액厄을 쫓고 화를 면하는 술법을 말하는데, 이런 풍속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인다. 제웅치기의 이칭異稱으로 허수아비버리기(강원), 허두새비버리기(전남), 도채비방쉬(제주) 등이 있으며, 지역에 따라 제용만들기, 삼재맥이한다고 불린다. 장위동 지역에서는 구체적인 명칭은 확인할 수 없으나 “정월에 짚단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돈을 꽂아서 삼재가 든 사람보고 동구 밖에 가져다가 버리라고 했다. 그러면 삼재가 물러난다고 여겼다.”라는 구술 내용을 보면 ‘삼재막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직성은 아홉 개가 있어 9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데 남자는 11, 20, 29, 38, 47, 56세에 직성 들고 여자는 10, 19, 28, 37, 46, 55세에 직성이 든다. 직성이 든 해는 만사가 여의치 않을 뿐 아니라, 병이 들거나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미리 이런 액살을 없애기 위해 제웅치기를 한다. 제웅은 짚으로 만들며, 배나 허리에 노자 돈이나 쌀을 넣고 액년이 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어 개천이나 징검다리 또는 사거리에 버려 액을 푼다. 지나던 사람이 이 제웅을 주워 돈을 꺼내고 버리면 그가 액을 가져가게 된다고 믿는다. 장위동의 경우에는 직성에 대해서는 모르고 삼재가 든 사람에게 액막이로 짚단 모양을 만들어 몸에 돈을 꽂아 동구 밖에 가져다 버렸다. 이는 삼재를 물리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돈을 함부로 가져가는 사람은 없지만 동네 아이들이 몰래 그 짚단을 찾아서 돈을 빼내고 짚단을 땅에 힘껏 내동댕이치면서 놀았다고 한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76-177쪽
  • 세시풍속과 놀이 대동놀이 석관동에는 1960년대까지 마을주민들 전체가 참여하는 세시 놀이로 대동놀이가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초여름에 날을 잡아 중랑천 백사장에 천막을 치고 가마솥을 걸어 음식을 하고 명창 지화자, 목계월 등 5명 정도를 불러다가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당시 중랑천은 매우 맑아 그중 마루돌이 있는 곳에 주민 전체가 나와 빨래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행사에 드는 비용은 주민들 중에 경제적으로 넉넉한 독지가들의 출연으로 마련된다고 한다. 대동놀이는 70년대까지도 이어졌으며 장위동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였다. 장위동에서도 대동놀이를 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활량리가 제일 잘 놀았다고 한다. 장구 치고 꽹과리 불며 놀았는데, 대동놀이 하러 소근내(지금의 우이천)의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근처까지 갔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77쪽
  • 시장, 시장사람들과 시장의 이용 60년대 이후 장위동과 석관동 지역에는 시장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장위시장과 석관시장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점차 근처 시장을 이용했으며 시장에서는 주로 생필품, 부식을 샀다고 한다. 아래는 장위동과 석관동 지역에 있는 시장의 설립(허가) 시기를 기준으로 요약한 표34이다. (187쪽 표 참조) 위의 표와 장위동, 석관동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장위동에는 장석시장, 장위시장, 새장위시장, 장위전통시장, 번동시장, 장계시장, 장계골목시장 등 총 7개의 시장이 있었다. 장석(법인)시장은 1968년에 설립허가가 난 시장이다. 삼익아파트 입구 안에 있는 시장으로 장위4주택재개발 구역에 들어가 철거되었다. 장위시장은 설립허가가 1972년에 났으나 토박이들은 장석시장보다 먼저 생긴 시장이 장위시장이라고 이야기 한다. 장위시장이 처음 설 때 줄타기 등 놀이꾼들도 불러 크게 놀았다고 한다. 장위시장은 지금의 장위전통시장 윗부분에 속하며, 코코마트 자리와 그 주변 골목에 섰던 시장이다. 지금은 코코마트가 서고, 골목시장은 장위전통시장과 연결되어 있다. 장위시장 맞은편에 새장위시장도 섰었으나 지금은 없어진 상태다. 장위동 301번지에 있던 번동시장은 이미 없어진 상태다. 이 표에는 없으나 마을주민들은 장계시장과 장계골목시장도 있었다고 말한다. 장곡초등학교 골목길에 형성된 장계골목시장은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장위5구역 자리, 즉 광운초등학교 못 가서 건너편 옛날 주택은행 아래에 장계시장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상태다. 이렇게 보면 장위동에서 현재도 운영 중인 시장은 장위시장, 장위전통시장, 장계골목시장뿐이다. 장위골목시장은 현재 장위전통시장으로 바뀌었다, 장위시장과 같은 골목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따로 조직하여 2005년에 장위골목시장이라고 등록하면서 생겼다고 한다. 등록 당시 점포는 133개였다. 그 위쪽에 위치하면서 장위전통시장이란 초록색 천막을 걸지 않는 점포는 장위골목시장 등록에 동의하지 않아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현재 장위전통시장은 절반 가까이가 재개발구역 안에 들어가 있어 이미 많은 상인들이 가게를 비운 상태다. 현재 재개발구역 안에 남아있는 20여개 점포는 10월말까지 가게를 비워줘야 한다. 재개발로 인하여 196개였던 점포가 56개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충남전자를 운영 중인 허광수 사장도 올 10월까지 가게를 비워줘야해서 가게 정리에 한창이다. 가게 한쪽 옆에는 단골들이 가져 온 수리할 가전제품들이 쌓여 있다. 이 가게가 곧 문을 닫는다는 소문을 듣고 수리할 가전제품들을 가져왔다고 한다. 충남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공과대를 다닌 그는 가전제품 판매와 수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1967년에 장위시장에서 들어 올 때만 하더라도 장위시장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동방고개에 버스가 다니지 않아 사람들이 걸어서 이 시장골목을 지나다녔고, 또 대동극장이 있어 영화를 보려거나 버스를 타려는 번동 사람들이 이 골목시장으로 지나가곤 했었다. 그래서 그 때는 시장이 아주 잘 되었다. 처음 광명상사라는 상호로 시작한 그는 60년대에는 전기밥솥이 나오기 전이라 석유풍로가 잘 나갔다고 한다. 후지카 같은 상표는 3,000원 정도 했는데 그 당시로 놓고 말하면 비싼 가격이었다. 심지 한 장 껴주는 데도 150원 씩 받았다. 지금도 가끔 석유풍로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곰탕을 끓일 때 가스가 많이 나간다고 하여 석유풍로를 사 가는데 현재 석유 풍로 가격은 7~8만 원정도 한다. 심지 한 장 가는데 1만 원정도 받는다. 장위전통시장은 상인회 회원이 91명, 임원이 12명이다. 1년에 한 번씩 정기총회를 갖고, 관리비조로 하루에 1,000원씩 낸다. 상인회에서는 시장에 대한 관리와 명절날 고객 맞이 행사를 담당하고 있다. 또 상인 15명이 장위전통시장 집수리봉사단을 조직하여 5년 동안 각 동마다 독거노인이 거주하는 주택 하나를 선정하여 수리를 했었다. 그러다가 봉사단 회원들이 이사 나가고 하면서 지금은 이미 끊긴 상태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86-189쪽
  • 장위동 · 석관동의 건축이야기 장위동과 석관동은 1960년대 이후 도심의 본격적인 확장으로 공공사업을 통한 주택단지의 건설, 국가권력의 상징이었던 구 중앙정보부가 자리잡기 시작했던 지역이다. 중랑천의 동쪽으로는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학교 이공대학(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이 자리잡고 두 지역은 경춘선과 화랑로를 통해 접근이 가능했다. 석관동 중앙정보부는 청와대와 가까운 남산에 신청사가 지어지며 기능이 축소되었으나, 국가지정문화재 의릉 권역은 이미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수십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소규모 밀집 주택 단지는 재개발로 인하여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고 있고, 의릉은 지속적인 복원정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도시 교통 기반시설의 확충으로 많은 인구가 살고있는 동네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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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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