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1396
사적
장소 유적
성북구 아리랑로19길 116에 위치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를 모신 왕릉이다. 신덕왕후 강씨의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슬하에 2남(무안대군, 의안대군) 1녀(정순공주)를 두었으며, 1396년(태조 5) 음력 8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를 사랑했던 태조는 경복궁에서 바로 보이는 황화방(현 중구 정동)에 능을 조영했는데, 태조가 죽자 태종이 현재 위치로 옮기고 방치했다. 이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했다. 민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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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貞陵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396
  • 비고: 1669년 보수. 1409년은 현재 위치로 이장한 연도.

주소

  • 주소: 02813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508 (아리랑로19길 116)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사적
  • 지정일: 1970.05.26

근거자료 원문

  • 성북구 정릉동에 자리 잡은 사적 제208호인 정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제2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능이다. 왕후의 능이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진 것은 1409년(태종 9)이며, 능 관리를 위해 영(令) 1인, 참봉 1인을 두었다. 조선시대 능관은 종9품 참봉이어서 흔히 능참봉이라 한다. 능참봉은 조선시대 왕릉을 수호하는 미관말직으로, 왕릉 내의 산림을 수호하면서 일반인들의 범경(犯境), 경작(耕作), 투장(偸葬), 투작(偸斫) 등을 방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조선후기 능역에 몰래 들어와 땔나무를 하거나 목재를 베어가는 일이 빈번하여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막는 일이 능참봉의 주된 업무였다.
  • 현재 정릉 입구 왼편에 재실이 있는데 이곳이 왕릉 관리를 맡은 능참봉이 상주해 있던 곳이며, 제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전반적인 제례를 준비하던 곳이다. 집무실과 제기고,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소실되었던 정릉 재실은 2014년에 복원되었다.
  • ○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문화유적 문화유적 01 정릉 역사의 현장이자 구민들의 자부심 - 조선왕조를 일으킨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 처음 이 능은 정동에 있었으나 태종 때의 정부에서 왕의 무덤이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 도성 안에 있고, 무덤이 크고 넓다는 논란이 일어나자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태조가 여덟 번째 왕자인 방석을 세자로 정한 것에 대한 방원(후에 태종)의 사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어 이장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태종은 능을 옮긴 후 정자각을 없애고 홍수로 인해 없어진 광통교를 다시 짓는데, 정릉의 십이지신상 등 석물을 실어다 세우게 하였다. 이장한 지 수백 년 간 정릉은 왕후의 무덤이라기보다 주인없는 무덤에 불과할 정도로 초라했다. 그러다 2백 년이 훨씬 지난 현종 때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보수를 한 후 제대로 된 왕후의 능으로 변모했다. 정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호석과 양석이 각 한 쌍으로 줄어들었으며, 무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왕후의 무덤과 비교해 빈약해 보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조선왕조 최초로 만들어진 왕후의 무덤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정릉은 역사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구민들의 휴식처로도 손색이 없다. 능을 뒤로 하고 동산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나무와 바위, 물이 어우러진 산책로가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바위에서 떨어지는 약수가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른다. 건너편에는 정심 약수터와 매점 등 휴식시설이 잘 갖춰져있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 도시 속에서 숲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산책로는 계절에 따라 서로 다른 운치를 더한다. 한 여름 시원한 청량감을 전해주는 것은 물론, 겨울에는 눈꽃을 구경할 수도 있다. 이곳에서는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바라볼 수도 있어 절경이 따로 없다. 또한 길 중간 왼쪽으로는 또 하나의 산책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가면 북악의 한 줄기와 계곡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쌓아올린 돌탑을 볼 수 있다. 발길을돌리면 능선을 따라 길이 나 있고, 곳곳에 약수와 조그마한 정자들이 운치를 더해준다. 맑은 물이 흐르는 약수를 돌고 나면, 곧 정릉을 중심으로 한 바퀴를 도는 것과 같다. 능과 산책로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정릉은 구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장소이자 자부심이 묻어나 있는 곳이다. 2009년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의릉 및 다른 조선왕릉38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0-12쪽
  • ○ tour tip 동화같은 사랑의 주인공 - 급하게 말을 달리다 목이 탄 젊은 장수가 우물가에 말을 멈춘다. 장수는 마침 물을 긷던 여인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한다. 그러자 여인은 버들잎을 따 물에 띄워 장수에게 건넨다“. 급하게 마시면 체할까봐” 그랬다는 여인의 설명을 들은 장수는 감탄하면서 청혼한다. 사극이나 전설을 통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장면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물을 청한 장수는 태조 이성계이고, 우물가의 여인은 그의 두 번째 부인이자 정릉의 주인인 신덕왕후이다. 만약 두 사람이 우물가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정릉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3쪽
  • ④ 貞陵 朝鮮 太祖의 繼妃인 神德王后 康氏(?∼태조 5년)의 單陵이 지금도 성북구 정릉동에 있어 사적 제20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데 陵域面積은 90,621坪이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산역을 시작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중구 貞洞에 자리를 정하게 되었다. 그 뒤 태조가 돌아감에 제3대 太宗은 기왕부터 강비에게 지녔던 감정상 성안에는 능을 두지 않는 법이라 하여 그의 9년(1409) 에 성밖의 沙乙閑 곧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 정릉자리로 능을 옮기었다. 신덕왕후는 黃海道 谷山府 출신인 康允成(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의 따님으로 태조가 새 나라를 세우던 태조 원년(1392) 에 顯妃로 책봉되었으며 태조 7년 8월 13일 判內待府事 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태조는 능역을 皇華坊 北原(현 貞洞)에 奉陵하고 그 동편에다 齋宮으로 興德寺를 세우고 자주 行幸하였다. 遷陵前의 石物은 屛風石·欄干石·魂遊石·羊石·虎石·馬石·文人石·武人石·長明燈·望柱石 등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의 석물은 많이 생략된 曲墻 3면·魂遊石 1·明燈石 1·望柱石 1쌍·文石 1쌍·馬石 1쌍·羊石 1쌍·虎石 1쌍·丁字閣·水刺廳·望燈位·表石 1·紅箭門·齋室 등을 상설하였다. 表石의 陰記는 다음과 같다. 順元顯敬神德高皇后康氏 太祖高皇帝繼后 六月十四日 誕生壬申開國冊封 顯妃丙子 八月十三日昇遐丁丑五月葬于漢城皇華坊 太宗己丑二月 二十三日移葬于 楊州南沙阿里康坐之原 顯宗己酉追祔太祖追上徵號順元顯敬光武三年己亥十一月追尊恭上 詩號曰 高皇尼敬書前面與陰記庸伸小子之微忱焉 光武四年康子(開國五百九年) 月 日 舊 貞陵의 석물 중 일부인 병풍석은 太宗 10년(1410) 廣通橋(현 廣橋)로 사용하였으며 그 밖의 石材나 목재들은 太平館 건립시 부속재로 사용하였다. 太宗 9년(1409) 현 위치인 楊州 沙乙閑麓(현 貞陵)으로 천릉하였으나 宗關에 祔廟하지 않아 존재조차 인식치 못하여 왕후의 능이라기보다 주인 없는 무덤에 불과하였다가 宣祖時 신덕왕후의 친정 후손이 國墓奉祀者의 軍投 면제에 따른 혜택을 보고자 貞陵의 소재파악을 시작, 이에 卞季良의 移葬祝文에서 그 위치를 겨우 찾아 寒食節 제사만 지내오다가 顯宗 10년(1669) 宋時烈의 계청으로 비로소 신덕왕후의 太廟配享을 하게 되었으며 본격적인 복구작업과 이에 따른 守護軍과 모든 象設을 구비하게 되었다. 이때에 현종은 10월 2일 敎書를 발포하고 科擧를 특별히 설정하여 성대하게 경축하였다. 封陵 設齋하던 날에는 비가 정릉동 일대에만 많이 쏟아졌는데 그 당시에 주민들은 이 큰 비를 가리켜 억울한 원을 씻는 비라 해서 「洗寃之雨」라 하였다고 전한다. 貞陵의 願刹인 興天寺는 170여간으로 태조 6년 陵을 造營하고 그 동쪽에 세워 曹溪宗의 本山으로 삼았다. 이를 태종 9년 정릉의 천릉과 동시에 陵傍에 小菴을 만들고 新興寺라 개칭했으나 현종 10년에 이 절이 너무 陸寢과 가깝다 하여 다시 石門 밖 含翠亭 遺址에 이건하였다가 正祖 18년(1794)에 현재의 장소인 敦岩洞으로 이건하였으며, 高宗 2년(1865) 에 다시 興天寺라 하였다. 이 절에는 정면 3間, 측면 3間 多包系의 팔작지붕인 極樂寶殿을 위시해 冥府殿, 龍花殿, 七星閣, 獨聖閣, 萬歲樓, 僧房, 蓮花臺, 大房, 一柱門, 鐘閣 등의 건물이 있다. 願刹이란 王(后)이 승하하면 능의 가까운 곳에 있는 사찰을 정하여 王(后)의 명복을 기원하는 願堂으로 域內外의 관리, 祭享時 두부공급을 하므로 일명 豆泡寺라고도 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89-691쪽
  • 貞陵은 史蹟 제20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太祖妃 神德王后 康氏(?∼1396) 의 單陵이다. 처음 都城안인 지금의 中區 貞洞에 있었으며 太宗 9년(1409)에 이곳 城北區 貞陵洞으로 移葬하였다. 神德王后는 黃海道 谷山 출신인데 判三司事 贈象山府院君 康之成의 딸이다. 康氏는 어려서부터 비범한 자질을 보여주었고 장성하면서도 정숙하고 지혜가 있어 인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아가 太祖를 도와 朝鮮王朝를 창건할 때 內助의 공이 컸던 것이다. 더구나 왕조 개창 때는 제1왕비인 神懿王后 韓氏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重臣과 太祖와의 사이에서 開國 始政을 하는 데에 神德王后가 교량의 역할을 하였던 만큼 태조의 신임과 重臣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神德王后가 太祖 5년 8월 13일 세상을 떠나자 太祖는 매우 슬퍼하여 朝會와 市廛을 10일간이나 정지하고 白衣로 친히 나가 陵地를 구하였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安岩洞이었으나 開基의 山役을 시작할 때 물이 솟아 나오므로 皇華坊 北原 지금의 중구 정동에 자리(정동 4번지)를 정하였다. 太祖는 5년 8월부터 제 2차 都城修築이 있을 때 9월 9일에 친히 축성을 독려하면서 顯紀의 능침 꾸미기를 감독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0일에는 左議政 趙浚, 判中樞院事 李勳 등에 명하여 현비의 諡冊을 받들게 하여 神德王后라 하였고 다음 해 1월 3일 마침내 皇華坊 북쪽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貞陵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동편에다 齊宮으로 興天寺를 세우고 자주 行幸하였다. 이러한 貞陵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太祖가 세상을 떠난 불과 9개월 후인 太宗 9년(1409) 2월 23일이었다. 이때 遷陵의 이유로 議政府 상소에 보면 ‘옛날의 帝王 陸墳이 모두 都城밖에 있는데 지금 貞陵은 유독 城內에 있으니 불편합니다. 이곳은 또한 중국의 使臣이 머무는 太平館이 가까우니 城外 沙乙閑里로 옮기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여 이를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하였다. 太祖 제1비인 神懿王后 韓氏 소생의 왕자가 6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2비인 神德王后 康氏의 소생인 芳碩이 世子로 책봉되자 靖安君 芳遠은 私感이컸던 것이다. 이때 鄭道傳·南誾 등의 개국공신이 芳碩을 지지하게 되자 방원은 태조 7년 제 l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芳碩·芳審과 정도전·남은을 숙청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太宗 6년(1406)에는 議政府의 啓請에 의해 都城안에 있는 貞陵의 瑩域이 너무 광대하다 하여 陵에서 100步거리 밖에 있는 지역은 전부 철거하여 住家를 짓게 하였다. 또한 태종은 神德王后를 太廟에 配享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貞陵이 옮겨진 뒤 한달이 지난 그해 4월에는 陵의 丁字閣을 헐어서 太平館의 北樓 3間을 짓고, 貞陵의 옛자리를 평지로 만들어 흔적을 없앴으며, 石物을 모두 묻어버리게 하였다. 太宗 10년 여름에 큰 장마가 져서 도성 안 종로거리가 모두 침수되고, 廣橋에 있던 흙다리가 무너졌을 때에는 貞陵舊墓의 石物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 石橋에 사용한 12支神像을 새긴 石材 등은 상당한 美術品으로 文化財가치가 높은 것이었으나 청계천 복개공사로 지하에 묻히게 되었다. 太宗 9년 2월 貞陵을 沙乙閑里의 산록으로 옮길 때는 왕명으로 각 관청 관원들의 반수로 白衣·黑角帶·烏紗帽의 복장을 하고 靈柩를 시위하여 행상하게 하였으며 2월 과 10월 이름있는 날에는 2品 官員을 보내어 제사드리는 것을 恒式으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그후 宗廟에는 太祖神位와 함께 神懿王后 韓氏의 신위만을 配位로 모시고, 陵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드리는 의례마저 폐지되니 墳墓은 자연 황폐하여지고 石物은 무너져 그 자리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宣祖 14년(1581), 貞陵을 沙乙閑里로 옮긴지 170년이 지나 貞陵奉審의 논의가 조정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돌보지 않은지 오래되어 현재의 廣壯洞에 있는 峨嵯山일대까지 지목하고 찾다가 마침내 卞季良이 지은 春亭集 중에 「貞陵告遷祭文」을 발견하여 서울 동북쪽 계곡에 誌石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諸候는 再聚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陵寢을 修封하고 寒食에 제사드리는 것만으로 그쳤다. 그리고 이때 國陵으로 다시 봉하여 定宗의 왕비 安氏의 厚陵의 제도에 따라 建閣하고 관리를 두었다. 그후 顯宗 10년(1669), 宋時烈의 啓請에 의해 神德王后를 宗廟에 配享하고 陵墓는 奉審하기에 이르렀다. 봉심 보고와 함께 능의 보수는 물론 丁字閣·安香廳·典禮廳 등을 세우고 守護軍을 定給하게 하였다. 이어 宋時烈 鄭太和 등 중신·문관들의 상소와 庭請에 의하여 왕후에게 順元·顯敬의 徵號를 올리고 그해 종묘에 신위를 배향하니 沙乙閑里 遷移 후 260년이 지나 貞陵은 비로소 본연의 면모와 예우를 갖추게 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94-96쪽
  •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능이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산역(山役)을 시작할 때 물이 솟아나와 현재 중구 정동의 덕수궁 북서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신덕왕후는 황해도 곡산부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이성계와 만나 2남 1녀를 낳았다. 태조 원년(1392)에 현비로 책봉되었으며, 태조 7년(1398) 8월 13일 판내시부사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사랑하던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너무 상심하여 슬퍼하다가 능터(陵地)를 친히 찾았다. 태조는 공신들의 주장대로 국모를 높이는 뜻에서 공신수릉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하고 능역을 황화방 북원(皇華坊 北原, 현 정동)에 조영하였다. 그 동편에는 정릉의 원찰(願刹)로서 170여간의 흥천사(興天寺)를 세운 다음 자주 행행(行幸)하였고 흥천사에서 신덕왕후의 재(齋)를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다. 이 흥천사 종은 후일 종루(鐘樓)에 걸려 서울 장안의 시각을 알리기도 하였다. 현재는 덕수궁에 옮겨져 있다. 그러나 정릉은 태종이 즉위하면서 푸대접 받게 되었다. 이방원(태종)은 세자의 자리를 놓고 신덕왕후, 정도전 등과 정치적으로 갈등했다. 결국 두 번의 왕자의 난을 거쳐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태조가 승하한 후 9개월 만인 태종 9년(1409)에 정릉을 덕수궁 부근에서 동소문밖 사을한리(沙乙閑里 : 현 정릉)으로 이장한다. 태종은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태조와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만을 함께 모시고, 신덕왕후의 신위는 모시지 않았으며, 그녀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켜 버렸다. 이후 정릉은 백년간 왕후의 무덤이라기보다는 주인 없는 무덤에 불과했고, 무덤의 존재마저 잊혔다가 200여년이 지난 선조 때에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이장축문(移葬祝文)을 근거로 하여 찾았다. 그 후로도 한식절(寒食節)에만 제사를 받드는 등 소홀히 다루어지다가 현종 10년에(1669) 다시 정릉의 상설을 복구하고 종묘에 배향을 결정하게 되어 그 한을 풀게 되었다. 이 때 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져서 사람들이 이를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불렀다. '세원지우'란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 정릉은 다른 능들과는 달리 홍살문이 ‘ㄱ자’로 꺾여 배치되어 있다. 아마도 처음 이곳으로 이장될 당시에는 홍살문이 없었다가, 훗날 현종이 이곳을 복구할 때 만들어서 이런 구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이장될 당시 후궁의 능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에 정릉의 곳곳에서는 다른 능에 비해서 빈약한 부분들이 있다. 봉분 위쪽에는, 조선시대 능에 설치된 가장 오래된 석물인 장명등과 혼유석이 긴 세월 동안의 수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의 장명등이 고려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능의 양식이 고려시대를 모범으로 삼았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장될 당시 태종이 봉분을 깎고 석물을 매장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기의 다른 능에서 발견되는 병풍석과 난간석, 그리고 무인석이 빠져 있어 허술한 모습을 하고 있다.
  • ▫ 사적 제208호 정릉 貞陵 시대 : 조선전기(태조 4년, 1396) 소유자 : 서울시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 87-16 지정연월일 : 1970. 5. 26.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능이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산역(山役)을 시작할 때 물이 솟아나와 현재 중구 정동의 덕수궁 북서쪽에 능을 조성했다. 신덕왕후는 황해도 고산부 강윤성(康允成, 判三司贈象山府院君)의 딸로 이성계와 만나 2남 1녀를 낳았고 태조 원년(1392)에 현비로 책봉되었으며, 태조 7년(1398) 8월 13일 판내시부사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사망했다. 사랑하던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너무 상심하여 슬퍼하다가 능터[陵地]를 친히 찾았다. 태조는 공신들의 주장대로 국모를 높이는 뜻에서 공신수릉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하고 능역을 황화방 북원(皇華坊北原, 현 정동)에 조영했다. 그 동편에는 정릉의 원찰(願刹)로서 170여 칸의 흥천사(興天寺)를 세운 다음 자주 행행(行幸)했고, 경복궁에서 정릉의 아침 재 올리는 흥천사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다. 이 흥천사 종은 후일 종루(鐘樓)에 걸려 서울 장안의 시각을 알리기도 했다가 현재는 덕수궁에 옮겨져 있다. 그러나 정릉은 태종이 즉위하면서 푸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는 조선 건국 후 이방원(태종)이 건국공신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던 차에 신덕왕후가 그의 소생 방석을 세자로 삼았으므로 증오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덕왕후가 사망한 지 2년 뒤에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이복동생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그의 형 방간과 싸워 이겨 왕위에 오르자 정릉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이윽고 태조가 사망하자 이로부터 9개월 만인 태종 9년(1409) 2월에, 의정부에서 정릉이 유독 성 안에 있어서 미편(未便)하고, 중국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이 가까우니 이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동소문 밖 사을한리(沙乙閑里: 현 정릉동)로 이장했다. 태종은 능을 옮긴 지 한 달이 지난 후에는 봉분을 깎아 버리고 정자각(丁字閣)을 헐어냈으며 석물(石物)들을 모두 땅에 묻도록 했다. 그런데 그 해 여름, 흙으로 만든 광교(廣橋)가 무너지자 병풍석 12신상(十二神像) 등의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하고, 그 밖의 석재나 목재들은 태평관을 건립할 때 부속재로 사용했다. 이로부터 정릉은 돌보는 이가 없었으므로 능침이 황폐하여 아무도 신덕왕후의 능으로 보지 않았는데, 170년이 지난 선조 때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이 군역 면제 혜택을 받고자 조정에 소청하자 이를 계기로 정릉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이 당시 아차산 일대 등을 모두 뒤졌으나 흔적이 없었는데, 조선 초 태종 때 변계량(卞季良)이 하늘에 제사 지낸 제문(祭文) 속에서 정릉에 관한 구절을 찾아내어 정릉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정릉 능침을 수봉(修封)하고 한식에 제사하는 것만으로 그쳤다. 그 후 현종 10년(1669)에 송시열(宋時烈)의 계청(啓請)으로 신덕왕후는 200년 만에 비로소 종묘에 배향되고 능묘로 봉심(奉審)하기로 했다. 또한 이경석(李景奭) 등의 계청으로 능을 수리하고, 재실(齋室)을 중건하여 수호군을 정해 주기에 이르렀다. 이 능의 관리를 위해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었다. 이 때 현종은 10월 2일 교서를 발포하고 과거(科擧)를 특별히 설정하여 성대하게 경축했다. 봉릉(奉陵) 설재(設齋)하던 날에는 비가 정릉동 일대에만 많이 쏟아졌는데 그 당시에 주민들은 이 큰비를 가리켜 억울한 원을 씻는 비라 해서 ‘세원지우(洗寃之雨)’라 하였다고 전한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9, 1990 / 한국문원, ≪문화유산 왕릉≫, 1995.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88-90쪽
  • 정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자 조선의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의 능이다. 정릉은 원래 중구 정동에 있었으나 태종(이방원) 9년(1409)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당시 정릉은 신덕왕후를 끔찍이 사랑했던 태조 이성계의 공으로 묘역이나 신장석(능을 조성하는 병풍석 등)의 아름다움은 조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당시의 정릉에 사용되었던 신장석 등은 태종에 의해 현재의 정릉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광통교의 부재로 사용됐다. 따라서 현재 청계천 광통교에서 그 일단을 직접 볼 수 있다. 이후 능을 돌보지 않아 처음의 모습을 잃고 초라했으나 현종 때에 개축하여 다소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조선왕릉 정릉은 사적 제208호이며, 남한에 위치한 40기의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현재 정릉의 재실은 발굴복원 중에 있다.
  • 먼저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의 아우라는 무엇보다도 ‘정릉’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비롯한다. 비록 다른 조선왕릉들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는 정릉이지만 그 명칭이 포괄하는 영역은 다른 왕릉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일단 동쪽 북악터널로부터 서쪽 길음교에 이르기까지, 북편의 북한산성에서부터 남으로 아리랑고개(정릉고개)까지를 포함하는 약 8㎢가 넘는 넓은 지대가 모두 정릉동이라는 이름 아래 묶여 있다. 여기에 사는 인구는 9만 명이 넘는다. 그런 점에서 정릉은 결코 작은 왕릉이 아니다.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정릉동 사람들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정릉에 산다’고 대답하는데 하나 같이 ‘동’이라는 뒤에 붙는 딱딱한 수식어는 빼고 말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답 속에는 ‘정릉’과 ‘정릉동’이 똑같은 의미로 통용된다는 사실 외에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한 막연한 긍지와 애정이 들어 있다. 또한 거기에는 600년이 넘도록 변치 않고 내려온 ‘정릉’이라는 고유명사의 질긴 생명력이 배어 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정릉이 정릉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란 가시적 이고 물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무형적이고 정신적인 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21-22쪽
  • 정릉은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중략) 본래 사대문 안에는 보통 사람들의 무덤은 물론 왕릉도 쓸 수 없다. 그게 법도였다. 하지만 그것을 가장 먼저 어긴 사람이 다름 아닌 이성계다. 그는 무덤이나마 강씨를 가까이 두고 싶었다. 처음 생각한 곳은 안암동이었다. 하지만 땅에서 물이 나왔다. 그래서 황화방皇華坊(지금의 덕수궁 근처)에 강씨의 무덤(능)을 만들고 이름을 정릉貞陵이라 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58쪽
  • 이성계가 죽자(1408) 신덕왕후와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이방원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능을 도성 밖 사을한리(지금의 성북구 정릉동)로 옮겼다(1409). 남은 석물들은 땅에 묻혀 있다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를 재건하는 것에 사용됐다. 이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정릉의 석물을 밟고 다니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지위를 왕후에서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중략) 지금 덕수궁 근처 정릉의 흔적은 정동이라는 이름으로만 남아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61쪽
  • 정릉의 복권은 송시열宋時烈(1607 ~1689)에 의해 추진되었다. (중략) 이 논의는 현종10년(1669) 1월에 시작되어, 8월 5일 신덕왕후가 종묘에 부묘祔廟가 허락되었고, 10월 1일에 부묘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후궁으로 격하되어 옮겨진 지 60년 만이고, 선조 때 처음 복권이 처음 논의된 지 88년 만의 일이었다. 복권되던 날은 비가 많이 왔다. 사람들은 이 비를 ‘원한을 씻어주는 비’, 즉 세원지우洗怨之雨라고 불렀다. 이후에 고종이 황제로 즉위 후 신덕왕후는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최종적으로 추존된다(1899년(광무 3년) 12월 19일).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63-64쪽
  • 몇 년 전 영화 「건축학 개론」으로 더욱 유명해진 조선왕릉 정릉.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던 영화 속에서 등장한 정릉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와 그의 부인 신덕왕후의 애절한 사랑이 깃든 곳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자 조선의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 왕비를 너무나 사랑했던 태조는 신덕왕후가 위독할 때는 승려 50명을 모아 불공을 드렸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통곡하며 직접 능 자리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태조는 경복궁에서 바로 보이는 황화방 북쪽 언덕(현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자리)에 능을 조성하고,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흥천사를 건립한다. 태조 사후 태종(이방원)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도록 허락하고, 태종 9년(1409)에는 도성 안에 능이 있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남양주 남사아리(현 성북구 정릉)로 옮기게 된다. 능을 옮기면서 봉분을 깎고 정자각을 헐었으며, 석물을 모두 땅에 묻도록 했다.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에 잘 무너지자 병풍석으로 돌다리를 만들도록 하여 한양의 백성들이 신덕왕후가 남긴 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하였다. 태종은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태조와 자신의 친어머니인 신의왕후만을 모시고,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이후 능을 돌보지 않아 처음의 모습을 잃고 초라했으나 현종 때에 개축하여 다시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300년 만에 정릉의 위상을 되찾고 신위를 종묘로 모시는 날, 그날따라 정릉 주변에 유독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 비를 신덕왕후의 한을 풀어줬다 하여 ‘세원지우(洗冤之雨)’라 한다. 정릉은 조선 최초의 왕릉으로, 조선 초기 왕릉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능침공간의 장명등은 전형적인 고려양식을 띠고 있으며, 그 규모를 통해 조성당시의 정릉 규모를 가늠해 볼 수도 있다. 신덕왕후를 끔찍이 사랑했던 태조 이성계의 공으로 묘역과 병풍석의 아름다움은 조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태종에 의해 능이 현재의 정릉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원래 왕릉은 진입공간-제향공간-능침공간이 일직선을 이룬다. 하지만 현재 정릉은 진입공간에서 제향공간으로 들어가는 길이 일직선이 아니며,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까지의 참도는 꺾여 있다. 능침공간에서는 다른 왕릉과 달리 병풍석을 찾아볼 수 없는데, 정릉의 병풍석이 광통교의 부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정릉의 병풍석은 현재 청계천 광통교에서 그 일부를 직접 볼 수 있다. 정릉 내에는 평소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담당하던 능참봉이 머물고, 제례 시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인 재실이 있었다. 1960년대에 멸실되었다가 2012년부터 3년간 복원한 재실은 2015년에 완공되었다. 정릉의 마지막 능참봉이었던 서재국 참봉의 아들로 1955년 정릉 재실에서 태어난 서완석씨는 정릉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재실 복원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재실이 멋있어서 정릉에서 영화를 많이 찍었어요. 1년에 3,4편 정도는 찍은 거 같아. 영화를 그렇게 찍었는데 막상 영화 필름을 한 개도 못 찾아서 재실 복원하려고 하는데 애를 먹더라구. 결국 나하고 바로 위에 누님하고 당시 같이 살던 형님하고 셋이 모여 기억을 더듬어서 지금 재실이 복원되고 있는 거예요. -서완석(남, 60), 성북구 정릉2동 교수단지, 2014년 5월 26일 정릉동에 사는 주민들에게 정릉은 가족과 함께 야유회를 즐기는 장소였고, 학교 소풍장소로 각광받았던 곳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정릉은 산림청 문화재관리국의 관리 하에 개발이 제한되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정릉에 입장료가 생기자 주민들은 입장료를 아끼기 위해 개구멍을 만들어 출입하기도 했다. 그 때 입장료가 얼마였는지 그렇게 비싸진 않았어. 그런데 맨날 그냥 들어가려다가 돈을 내라니 아깝잖아. 그래서 개구멍을 만들어서 몰래 들어가고 그랬어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46-49쪽
  • 성북 지역에 처음 조성된 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이다. 최초에는 사대문 안에 조성되었으나,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어 정릉이 성 안에 있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라는 이유로 1409년(태종 9) 양주 사을한沙乙閑(지금의 정릉동)의 산기슭으로 천장遷葬이 이루어졌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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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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