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동
1950
장소 인문지리
성북구에 위치한 동의 하나이다. 정릉동은 정릉 1~4동의 4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貞陵)이 있는 데서 동명이 유래했다. 정릉동의 처음 지명은 ‘살한이’로, 그것을 한자화한 사을한리(沙乙閑里)·사아리(沙阿里)였다. 일제강점기 1914년 경성부 숭신면의 대정릉동·소정릉동·손가정·청수동을 병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가 되었다. 1936년에는 일부 지역이 돈암리에 포함되어 다시 경성부로 편입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남은 지역이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고 1950년 정릉동이 되었다. 정릉동의 면적은 성북구 소재의 동 중에서도 가장 넓으나 북한산 남쪽 산비탈 일대가 포함되어 있어 주거가 가능한 면적은 그리 넓지 않다. 행정구역이 세분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정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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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7 : 옛날 정릉의 교통편, 주변 시장, 이웃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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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5 : 어린시절 놀이, 고아원 건물과 주변 풍경 (1)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4 : 명동 양품점 시절의 생활, 결혼의 계기가 된 사건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3 : 미아리에 있었던 외가, 인창중학교, 부모님의 결혼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2 : 손가정 마을 사람들의 생업, 돌 일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12 : 할머니의 구절판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13 : 어린시절 놀이, 고아원 건물과 주변 풍경 (2)
  • [2004] 현 정릉입구 삼거리 부근(4)
  • [2004] 현 정릉입구 삼거리 부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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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정릉2동 재개발 현장(1)
  • [2004] 정릉 앞 매점
  • [2004] 정릉 가는 길(아리랑로19길)
  • [2021] 정릉2동 교통광장 버스정류장(1)
  • [2021] 정릉입구 삼거리 부근(교통광장 옆)
  • 정릉2동 교통광장 희망나무(1)
  • [2021] 정릉2동 교통광장 버스정류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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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정릉우체국
  • [2021] 정릉입구 삼거리 부근 보국문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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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아리랑로19길 한옥
  • [2004] 아리랑로19나길 3 한옥
  • [2004] 아리랑로19나길 4 건물과 아리랑로19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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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아리랑로19길 48 앞 나무
  • [2004] 아리랑로19길에서 본 정릉중앙하이츠빌아파트
  • [2004] 아리랑로19가길 일대
  • [2004] 아리랑로19가길 4
  • [2004] 아리랑로19길 29 건물 옆 골목
  • [2004] 아리랑로19길 일대(1)
  • [2004] 아리랑로19길 54
  • [2004] 정릉중앙하이츠빌 1단지
  • [2004] 정릉중앙하이츠빌 1단지 후문 일대
  • [2004] 아리랑로19길 61 건물
  • [2004] 아리랑로19길 57 건물
  • [2004] 정릉중앙하이츠빌아파트 후문
  • [2004] 아리랑로19길 57 건물과 정릉중앙하이츠빌아파트 후문
  • [2004] 아리랑로19길 54와 56 사잇길(2)
  • [2004] 아리랑로19길 54와 56 사잇길(1)
  • [2004] 아리랑로19길 54와 56
  • [2004] 아리랑시장 일대(1)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貞陵洞
  • 이명칭: 살한이사을한리사아리숭신방 정릉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근거자료 원문

  • 정릉동은 법정동 명이며 정릉 1~4동의 4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의 이름은 조선시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貞陵)이 있는 데서 유래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태종 9년에 양주로 옮겨 모셨는데, 지금도 이곳을 정릉동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해동지도』 『광여도』 『1872년 지방지도』에는 도성 밖에 정릉이 표기되어 있다. 정릉 이전의 지명은 ‘살한이’였는데, 그것을 한자화한 사을한리(沙乙閑里)·사아리(沙阿里)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09년(태종 9) 정릉을 도성 밖의 사을한산으로 천장하였다”는 관련 기록이 있다. 「한성부지도」에도 사아리가 표기되어 있다. 1914년 경성부 숭신면의 대정릉동·소정릉동·손가정(孫哥亭)·청수동(淸水洞)을 병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가 되었다. 1936년 일부 지역이 돈암리에 포함되어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1949년 남은 지역이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고 1950년 정릉동이 되었다.
  • 貞陵洞 北漢山城 南將臺 남쪽 일대에 위치한 貞陵洞은 정릉이 李成桂의 繼妃 康氏의 정릉이 있으므로 洞名이 유래되었다. 원래 정릉동의 처음 地名은 沙乙閑里로 「살한리」를 한자음으로 옮긴 것이고 沙阿里로 줄여서 칭하기도 했다. 이 곳은 조선초부터 漢成府 속했던 것은 정릉동 408번지, 淸水莊유원지 入口에 城底五里碑(史蹟제110호)가 세워져 있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선말 高宗 4년(1867)에 발간된 『六典條例』에는 漢城府 東部 崇信坊(城外) 陸洞契로 나타나고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東署 崇信坊(城外) 東小門外契의 小貞洞, 淸水洞, 孫哥亨지역으로 칭했다. 한일합방후 日帝는 1911년 4월 1일(京畿道令 제3호) 京城府 崇信面 大貞陵洞, 小貞陵洞, 淸水洞, 孫哥亨으로 칭하고, 이어서 1914년 4월 1일(京畿道令 제1호) 京畿道에 속하여 高陽郡 崇仁面 貞陵里로 되었다. 그 후 1949년 8월 13일(大統領令 제159호) 서울市 확장으로 편입되어 城北區 貞陵里로 칭하게 되다가 이듬해 3월(市條例 제10호) 貞慶洞으로 고쳐졌다. 1975년 10월 1일(市條例 제981호) 貞陵洞 236의 482, 235번지의 동북쪽 지역을 도봉구 미아동에 편입하였다. 貞陵洞에는 이 洞의 명칭이 된 貞陵외에도 많은 史蹟이 있다. 우선 貞陵은 조선을 건국한 太祖의 繼紀인 神德王后 康氏의 陵이다. 미모를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康氏가 太祖 5년(1396) 8월 13일衝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너무 상심하여 슬퍼하다가 陵地를 친히 찾은 끝에 聚賢坊 북쪽 언덕, 현재 중구 貞洞 4번지 부근으로 정했다. 그 뒤 이곳으로 陵을 이전한 것은 太宗 9년(1409) 2월에 議政府에서 貞陵이 유독 城內에 있어서 未便하고 中國사신이 머무는 太平館이 가까우니 이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 후 貞陵은 기억 속에 잊혀져 있다가 170여년이 지난 宣祖 14년(1581) 에 그 위치를 찾게 되어 陵寢을 修封하고 寒食에 제사하는 것만으로 그쳤다. 이어서 顯宗 10년(1669) 신덕왕후를 宗廟에 배향하고 陵의 면모를 갖추게 되니 260여년만의 예우를 갖추게 된 셈이다. 封陵設祭하는 날 貞陵 일대에 비가 흡족히 내리자 사람들은 이 비를 洗寃하는 비라 하였다. 貞陵의 願刹로는 앞서 돈암동의 新興寺가 있었지만 정릉동에도 奉國寺(정릉동 637번지)와 慶國寺(정릉동 754번지)가 있다. 봉국사는 「貞陵길」 변에 있는데 高麗 恭愍王 3년(1354)에 懶翁大師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일명 藥師寺로 칭하다가 현종 10년에 정릉을 수봉하면서 이 절을 奉國寺로 고치고 願刹로 삼았다. 조선말 임오군란 때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重建했다. 경국사는 청수장 올라가는 중간에 잇는데 이 절은 高麗 때 창건한 절로 원래는 靑岩寺였다. 역시 이 절도 현종 때 貞陵을 修封하면서 願刹로 삼게 되었다. 청수장 유원지로 가는 「輔國路」는 북한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인데 大成門, 輔國門, 南將臺를 지나 白雲臺에 오르게 된다. 北漢山은 白雲臺, 仁壽峰, 萬景臺의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므로 흔히 三角山이라고 칭하며, 서울의 主山으로서 祖宗山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중기 肅宗 37년(1711)에 수도 방어를 위해 20여里의 北漢山城을 쌓았다. 貞陵 북쪽의 貞陵 藥水는 일명 環壁泉으로써 위장병과 피부병에 약효가 있다고 해서 유명하며 현재는 正心藥水로 불리운다. 그리고 國民大學校 내에는 조선말의 議政府 參政으로 內閣을 조직한 韓圭卨의 가옥이 있다. 서울지방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된 韓圭卨大監 집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가옥으로 중구 장교동에서 이곳으로 옮겨 1980년 12월 20일에 완공되었다. 연재 貞陵洞의 행정은 貞陵 제 1, 2, 3, 4洞에서 담당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89-791쪽
  • 〈貞陵 第1洞〉 貞陵 第1洞은 貞陵洞의 동쪽편, 즉 아리랑고개와 숭덕국민학교 동쪽 일대의 정릉동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 명칭이다. 貞陵洞은 1949년 8월 13일 서울市에 편입된 후 貞陵第1洞會와 第2洞會로 구분되어 행정을 담당했다. 1953년 당시 정릉 제1동회의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791쪽 표 참조). 1955년 4월 18일(市條例 제66호)에 정해진 정릉제1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은 정릉동 중 정릉천 支流小河川을 경계로 하는 서남방의 지역으로 했다. 이어서 1970년 5월 18일(市條例 제613호)에 정릉동이 4개 洞事務所로 나뉘어질 때 정릉제1동은 정릉동 중 아리랑 고갯길 동측지역과 숭덕국민학교 동측도로 以東지역으로 정해져 현재에 이르렀다. 이 洞 남서쪽으로는 「아리랑고갯길」이 지나고 동서로는 貞陵川을 복개해서 확장된 「정릉길」(북악터널∼길음교∼월암교)이 있어서 북악터널을 지나 세검정으로 통한다. 1990년 현재 정릉제I 동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791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91쪽
  • 〈貞陵 第2洞〉 貞陵 第2洞은 「정릉길」 남쪽과 북쪽의 숭덕국민학교 뒷쪽 일대의 貞陵洞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 명칭이다. 정릉 제2동은 제1동과 같이 1949년 8월 13일에 서울市에 편입된 후 설치되었는데 1953년 당시 정릉 제2동회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792쪽 표 참조). 이어서 1955년 4월 18일(市條例 제66호)에는 정릉 제2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을 정릉동 중의 정릉 제1동 관할구역을 제외한 전역으로 정해졌다. 또한 1970년 5월 18일(市條例 제613호)에 정흥동 지역은 종전의 정릉 제1동, 제2동에서 제3동, 제4동으로 증설되어 4개의 동사무소가 설치될 때 정릉 제2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은 숭덕국민학교 동쪽 길을 북상, 227번지를 경유 410번지 地籍線을 따라 城底 5里 경계비 및 404앞 도로를 경유 貞陵川을 남하, 배밭골로 향하는 하천을 따라 650앞 溝渠에서 山 87의 3 地籍線과 일직선을 連하는 지역과 「아리랑고갯길」 以西地域으로 정해져 오늘에 이르렀다. 이 洞의 동서로는 「정릉길」이 지나고 남북으로는 「輔國門길」(청수교∼정릉4동∼청수장)이 뚫려 「貞陵길」에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洞에는 貞陵이 위치하고 있어서 부근의 마을 이름을 능말이라고 칭한다. 1990년 현재 정릉 제2동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792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91-792쪽
  • 〈貞陵 第3洞〉 貞陵 第3洞은 정릉동의 서쪽편, 즉 「보국문길」 서쪽 일대의 정릉동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명칭이다. 정릉 제3동은 1970년 5월 18일(市條例 제613호)에 정릉 제1동, 제2동에서 分洞되어 설치되었다. 이 당시 정릉제3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은 정릉동 중 정릉천 이서지역으로 동남은 정릉 2동과 경계를 이루는 것으로 정해져 오늘에 이른다. 이 洞의 동서로는 「정릉길」이 관통하고 있어서 양분되고 있는 형편이며 「세검정길」과 연결되는 北岳터널이 있다. 810m의 이 터널은 1971년 7월에 개설되었으나 최근 쌍굴이 개통됨으로써 4차선 도로의 병목현상이 사라졌다. 북한산 기슭에 위치한 까닭에 서북쪽은 크고 작은 산봉우리가 솟아 있고 능선사이의 깊은 계곡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 이에 따라 淸水라는 마을이름이 유래되어 淸水莊이 있고 부근에는 유원지가 개발되어 있다. 淸水洞 맞은편에는 고려 때 귀양 온 孫氏가 많이 살았다해서 孫哥亭이 있으며, 洞口에 바위가 문설주처럼 서 있다 하여 바위를 문바위, 마을을 문바위굴(골), 배같이 생긴 모양의 바위가 있다 하여 배바위라 하고 이 바위가 있는 마을을 배바윗골(船岩洞)로 불러 오기도 한다. 또 옛날부터 소나무와 시냇물이 어울려 좋은 경치를 이룬 것을 사랑하여 찾아 노는 사람들이 「松溪洞天」4글자를 바위에 새겨 전한데서 이름을 얻은 松溪洞이 있다. 이 洞에는 교육기관이 많아서 국민대학교(정릉동 861-1)를 위시하여 고려대학교 병설 전문대학, 고려중고등학교, 북악중학교, 청덕국민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국민대학교는 1946년 3월, 申翼熙先生을 초대 학장으로 모시고 출발한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이 학교 내에는 지방민속자료 제7호인 韓圭卨大監家가 있다. 정릉 제3동이 分洞될 당시의 1970년과 1990년 현재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793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93쪽
  • 〈貞陵 第4洞〉 貞陵 第4洞은 정릉동의 북쪽지역, 즉 「보국문길」 북쪽 일대의 정릉동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명칭이다. 앞의 정릉 제3동과 같이 1970년 5월 18일(市條例 제613호)에 정릉 제1동, 제2동에서 分洞되어 설치되었다. 이 당시 정릉 제4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은 정릉 제 1, 2, 3동을 제외한 지역이었다. 이 洞의 「輔國門길」은 北漢山으로 오르는 등산로이고 「보국문길」이 끝나는 곳에는 淸水莊과 유원지가 조성되어 있어서 봄, 가을이면 등산객들이 줄을 이으며 여름철이면 피서나 淸遊를 위해 찾아드는 人波가 계곡을 가득 메운다. 또 淸水洞 위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등산로가 북한산성의 大成門, 輔國門을 지나 북한산 정상인 白雲臺까지 이어지는데, 보국문을 넘어서면 동북쪽으로 露積峰, 萬景臺, 白雲臺, 仁壽峰 등 북한산의 웅장하고 기묘한 봉우리들을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다. 북한산은 峰巒, 계곡이 수려하여 風光으로도 유명하지만, 주위 20여리에 달하는 石城이 있어 더욱 널리 알려졌다. 大一파출소 입구에는 문설주처럼 서 있어 문바위로 불리어진 큰 바위가 있어서 그 안쪽에 있는 마을을 「문바위굴(골)」로도 불러왔는데 이 곳 주민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 바위를 다치거나 깨면 큰 재앙을 받는다고 하여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으며, 또 바위의 魂을 달랜다고 하여 해마다 음력 10월 초가 되면 洞民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며 神靈視하여 왔다. 그러나 1972년 5월에는 주민들이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도로를 크게 넓히면서, 마을입구를 막은 이 문바위를 깨고 길을 넓혔기 때문에 지금은 문바위의 밑부분만이 남아서 옛날 일을 회상하게 한다. 이 洞의 관내에는 야간대학으로 유명한 서경대학(전일 국제대학, 정릉동 16-1) 외에 大一外國語高等學校, 大一高等學校, 정릉여자상업고등학교, 은주중학교, 정릉국민학교 등교육기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 山麓에는 많은 사찰이 세워져 있고 정릉4동시장, 청수시장 등이 있다. 이 洞이 分洞될 당시와 1990년 현재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795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94-795쪽
  • 정릉동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즉 정릉을 품고 있는 데서 유래하였다. 그 이전의 지명은 사을한리(沙乙閑里)였는데 이는 우리말의 ‘살한이’를 한자 음으로 옮긴 것으로 사을한리는 다시 사아리(沙阿里)로 약칭되기도 했 지만, 신덕왕후의 정릉이 이곳에 옮겨지면서 ‘능말’, 즉 능동(陵洞)이라는 이름을 얻었 다.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을 겪으면서 이곳의 명칭은 다른 마을처럼 여러 번 바뀌었다. 숭신방 정릉계, 숭신방 정릉동, 숭신면, 숭인면 정릉리 등의 명칭으 로 불리다가 현재의 행정구역이 정해지고, ‘정릉동’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50년 부터의 일이다. 정릉동은 서울의 북쪽 북한산 연봉 밑에 위치하고 있고, 면적은 성북구 소재의 동 중에서도 가장 넓으나 지역이 북한산 남쪽 산비탈 일대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주거가 가능한 면적은 그리 넓지 않다. 그래서인지 정릉의 행정구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세분 화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부근의 마을은 지금도 능말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물이 맑은 마을이라는 뜻의 청수동, 고려 때 귀양 온 손씨가 많이 살았다는 손가정, 동구(洞口) 에 문설주(문짝을 끼워 달기 위하여 문의 양쪽에 세운 기둥)처럼 서 있 다 하여 문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 문바위골, 배 모양을 하고 있어 배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 배바위골(선암동) 등이 아직 옛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 찾아온 사람들이 ‘송계동천(松溪洞天)’이 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겨 전한 데서 이름을 얻은 송계동도 있다. 이 외에도 사라진 옛 모습을 떠올려 보자면, 정릉1동에는 예전에 빡빡산이라 부르던 곳이 있었는데 그 당시의 이 산은 나무가 하나도 없고 돌이 많은 곳이었으며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현 재 주택가인 정릉1동의 16번지 일대는 호박밭이 많은 구릉지대였고, 배밭골시장이라고 하는 지역은 예전에 배밭이 많은 지역이었는데 이 배밭은 지금의 평창동 지역까지 뻗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정릉1동 16번지 일대는 한국전쟁 이후 평안북도 철산의 피난민 들이 많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정부는 이곳에 영국식의 철판으로 된 집을 열 채 정도 지어 피난민들을 수용하였다. 이 일대는 일제가 집터를 갈라놓았다가 광복 후 이승만 박사가 미국의 원조로 집을 지어 개인에 게 팔았던 지역이다. 그 당시 자재는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었고 시멘트 는 정부에서 지원하였으며, 집 짓는 데 사용된 모래는 그곳에 있던 것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집의 형태는 그 당시 정부의 부흥부(復興部)를 주축으로 하여 안암동 5가(개운사 일대)에 7채의 집을 시범적 으로 지었던 것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산 72번지 일대는 모두 판자집이었다. 예전에는 정릉동 16번지 안에 택시회사가 6개 정도 있었는데, 그런 연유로 지금까지도 이 지역에는 택시 운전기사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또 배바윗골 근처에는 지금까지도 무속인들이 천제당 등을 짓고 모여 살고 있다. 1960년대 초 뚝섬이 홍수로 침수되었을 때 정부는 그 곳 주민을 지금의 정릉3동으로 이주시켰다. 지금의 길음시장 뒤편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정릉4동 삼덕단지 일대는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전사한 군인들을 묻기 위해 묘지로 쓰다가 산세가 험하기 때 문에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동작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정릉 1동 16번지 안에는 미군부대의 쓰레기장이 있었는데, 당시의 주민들은 이곳에서 남은 물건을 팔기도 하고 남은 음식을 가져다 먹기도 하였다. 정릉동 사람들은 정릉동 여신이 자신들을 도와준다는 전설을 믿으며 매해 산신제를 지낸다. 만약 정릉을 떠나면 일이 잘못되거나 실패하여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릉의 여신이 놓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은 정릉3동 주민을 주축으로 매년 음력 10월 배바윗골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 정릉동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정릉을 품고 있는데서 유래했다. 그 이전의 지명은 사을한리였는데 우리말의 '살한이'를 한자로 옮긴 것이며, 사아리로 약칭되기도 했다. 정릉이 옮겨오면서 '능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능말' 혹은 '능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려 때 귀양 온 손씨가 많이 살았다는 손가정, 동구에 문설주(문짝을 끼워 달기 위하여 문의 양쪽에 세운 기둥)처럼 서 있다 하여 문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 문바위골, 배모양을 하고 있어 배바뷔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 배바위골(선암동) 등도 아직 옛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송계동 역시 옛날부터 소나무와 시냇물이 어울려 좋은 경치를 이루어서 찾아온 사람들이 '송계동천'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겨 전한데서 이름을 얻었다. 정릉1동 16번지 일대는 한국전쟁 이후 평안북도 철산의 피난민들이 많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또한 정릉동 16번지 안에 택시회사가 6개정도 있었는데, 그런이유로 지금까지도 이지역에는 택시 운전기사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정릉동 사람들은 북한산 산신이 자신들을 도와준다는 전설을 믿으며 매해 산신제를 지낸다. 만약 정릉을 떠나면 일이 잘못되거나 실패하여 다시 정릉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릉의 산신이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정릉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을 전후로 정릉2동 산신제, 정릉 3동 배밭골 산신제, 정릉 4동 한산대동제 등이 열린다.
    성북문화원, 2016, 성북문화 제4호, 300-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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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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