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성균관 뒤편에 살던 조헌영은 1941년경 성북동으로 거처를 옮긴다(기록이 없어 이유는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혹 한용운 때문은 아니었을까?’라는 상상은 한 번쯤 해봄직 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거하며 제헌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의 활동을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북한의 이른바 ‘모시기 공작’에 의해 잡혀가고 만다. 지금 성북동에 남아 있는 조지훈 집터는 아버지 조헌영이 살던 집이다. 조지훈은 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지만, 혹여 아버지가 돌아오실까 죽는 날까지 이사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버지 이름으로 된 명의도 바꾸지 않았다. 지금 성북동 ‘조지훈 집터’는 사실 조헌영의 집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