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암동
1949
장소 인문지리
성북구에 위치한 행정구역인 동의 하나이다. 종암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으며, 조선 말 고종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 종암동계였으며,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서 인창방 동문외계 대종암, 소종암이라 칭하였다. 일제강점기 1911년 4월, 일제에 의해 경성부 숭신면 대종암, 소종암으로 개편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숭인면으로 개편되었고, 다시 1936년 4월 대종암리와 소종암리가 종암리로 통합되어 경성부로 편입되었으며, 일본식 동명에 따라 종암정이 되었다. 1943년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으나, 해방 후 1946년 일본식 이름인 종암정 대신 종암동으로 바뀌었고, 1949년 성북구의 신설로 성북구에 속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종암동
  • 월곡역 육교(8)
  • 월곡역 육교(7)
  • 월곡역 육교(6)
  • 월곡역 육교(5)
  • 월곡역 육교(4)
  • 월곡역 육교(3)
  • 월곡역 육교(2)
  • 월곡역 육교(1)
  • 취로사업
  • 내부순환로공사전경(정릉천변월곡동)
  • 내부순환로월곡동전경
  • 월곡1동 동신아파트 주변
  • 월곡4동 두산위브아파트와 트리즘빌딩
  • 종암동과 월곡동의 도시 전경
  • 재건축중인 종암시장과 내부순환도로
  • 종암1동 고려A 주변 재개발 지역
  • 종암1동 I-Park 건축현장 주변
  • 종암동전경(2)
  • 종암동전경(1)
  • 종암동성가병원에서월암교로타리쪽
  • 종암로(1)
  • 종암사거리 전경
  • 종암로(2)
  • 종암사거리2
  • 종암동 전경
  • 종암1동 전경
  • 종암1동 전경2
  • 종암2동 주택가의 모습
  • 개운산에서 바라본 종암동 전경
  • 종암동 일대(2005)
  • 동일하이빌에서 본 월곡동,  종암동 일대(2)
  • 종암동 하수공사(1)
  • 종암동 하수공사(2)
  • 종암2동 집 내부사진(1970)
  • 종암로 일대(종암사거리 부근)
  • 종암동 수해지구 복구현장(3)
  • 종암동 수해지구 복구현장(2)
  • 종암동 수해지구 복구현장(1)
  • 종암동 하수도 개량공사 설명
  • 종암어린이공원 재정비공사 준공식
  • 종암동 하수공사(3)
  • 종암동 하수공사(4)
  • 종암동 뒷골목 포장공사(2)
  • 종암동 뒷골목 포장공사(1)
  • 종암동 하수공사(12)
  • 종암동 하수공사(11)
  • 종암동 하수공사(10)
  • 종암동 하수공사(9)
  • 종암동 하수공사(8)
  • 종암동 하수공사(7)
  • 종암동 하수공사(6)
  • 종암동 하수공사(5)
  • 2018 성북구 디지털 사진 공모전 당선작_스마일 성북구
  • 종암동, 월곡동 일대 야경(2)
  • 종암동, 월곡동 일대 야경(1)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중, 고등학교와 종암동 일대
  • 동일하이빌에서 본 월곡동,  종암동 일대(1)
  • 종암동SK아파트 항공촬영 사진
  • 종암5주택재개발지구와 일신초등학교
  • 안암동, 종암동 일대 항공촬영 사진
  • 종암로24가길 전경(2005)
  • 종암동을 지나는 내부순환로
  • 내부순환로와  종암동, 하월곡동 일대
  • 종암동 호텔마가레트
  • 종암동 일대 아파트(2)
  • 내부순환로와 종암동, 월곡동 일대
  • 종암동, 월곡동 일대
  • 종암동 일대
  • 종암1동 공동주차장 개장식
  • 종암사거리 일대(1997)
  • 종암동 국민은행
  • 종암1동사무소(1993)
  • 종암유아원 개원식(2)
  • 종암유아원 개원식(1)
  • 종암아파트
  • 성북 종암동(鍾岩洞) 파출소 신설
  • 월곡역 육교(8)
  • 월곡역 육교(7)
  • 월곡역 육교(6)
  • 월곡역 육교(5)
  • 월곡역 육교(4)
  • 월곡역 육교(3)
  • 월곡역 육교(2)
  • 월곡역 육교(1)
  • 정릉천 풍경(8)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鍾岩洞
  • 이명칭: 한성부 숭신방 종암동계, 한성부 동서인창방 동문외계, 대종암, 소종암, 북바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

근거자료 원문

  •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에서 유래된 종암동 종암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는데, 조선 말 고종 4년(1867년)에 발간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한성부 동부 숭신방 종암동계로 되어있고,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서 인창방 동문외계 대종암, 소종암으로 칭하였다. 그러던 것이 한일합방 후인 1911년 4월, 일제에 의해 경성부 숭신면 대종암, 소종암으로 개편되었다가 다시 1914년 경기도 숭인면으로 개편되었고, 다시 1936년 4월 대종암리와 소종암리가 종암리로 통합되어 경성부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때, 동명을 일본식 동명인 경성부 종암정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1943년 6월 구제 실시 때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에 일본식 이름인 종암정 대신 종암동으로 바뀌었고 다시 1949년 8월 15일 성북구의 신설로 성북구에 속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1978년 10월 종암동 일부가 하월곡동으로 편입되면서 동이 축소되기도 했으며, 현재 동암동은 종암 1동과 종암 2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종암 1동은 종암로 동쪽 일대 종암동 지역의 동장관할구역 명칭이다. 이 동은 1936년 4월 경성부에 편입된 후 종암정회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광복 후 1946년 10월 종암동회로 바뀌었다. 1955년 4월부터는 종암동 사무소로 칭하게 되었는데, 1970년 5월 ‘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의 변경’에 따라 종암동은 종암1동과 종암2동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종암동은 야산의 능선을 끼고 있기 때문에 동 전체 지역이 산비탈에 주택가를 형성하는 반월형을 이루고 있다. 이 중 종암1동은 전체 면적의 1/3 이상이 임야지역으로써 다른 어느 동네보다 공기가 맑고 신선하다. 이 지 역의 야산은 원래 울창한 산림으로 되어 있어서 인근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쉼터로 이용되어 왔고, 산에서 나오는 낙엽이나 나무의 잔가지들을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자유를 찾아 남하해온 많은 사람들이 이곳 산비탈에 정착하면서 나무들을 마구 베었다. 또한 한국 전쟁 때 미아리와 종암동을 잇는 국군의 서울방어 저지선이 바로 이 능선이었으므로 포격전에 의해 많은 나무가 불타서 한때는 민둥산이 되었다. 그 후 1960년대 말부터 조림 및 식수 사업을 실시해 지금은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종암동 동명은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를 한자로 ‘종암(또는 고암)’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종암1동의 옛 이름은 ‘안말’인데 비교적 부촌이었다고 한다. 경주 김씨와 경주 정씨의 집성촌이기도 했는데 이 둘의 사이가 좋지 않아 한 동리에 살면서도 서로 통혼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안말은 숭례초등학교 앞 쪽을 큰 해창, 뒤쪽을 작은 해창이라 칭했다. 여기서 해창이란 이 부근에 조선 중기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와 남편 해창위 오태주의 묘가 있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종암2동은 종암로 서쪽 종암동 지역의 동장 관할구역 명칭으로, 1970년 5월 설치되었다. 전에는 모랫말 또는 모랫골이라고 칭했다. 그 이유는 월곡동과 경계가 되는 정릉천의 물이 맑아 빨래터로 사용되었는데, 상류에서 내려온 모래가 쌓여 주변이 언제나 모래밭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런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이곳의 모래는 소금기가 전혀 없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양질의 모래여서 하수구관이나 전봇대 등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 다음 鍾岩洞은 그 서편 산자락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한자로 鍾岩 또는 鼓岩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 서쪽은 산으로 되어 있어 옛날에는 山林이 울창하였으나, 동쪽 일대는 貞陵川 연변으로 비옥한 농경지가 형성되어 예로부터 소출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東國輿地備攷》에 의하면, 북바위 부근에 있는 논과 밭은 소출이 많기로 유명하여, 농부의 자격을 결정하는 의미로도 쓰여 「북바위 전답을 아느냐 ? 」고 물어서 대답을 못하면 「농군으로서 그것도 모르는 것을 보니 가짜 농군임에 틀림없다」고 하여 동리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慶州 金氏와 慶州 鄭氏가 집단적으로 集村部落을 이루고 있었다. 농경지는 石串洞·長位洞 일대에 비교적 넓게 펼쳐 있었는데, 벼농사가 주로 행해졌다고 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3쪽
  • 《東國輿地備攷》, 《漢京識略》 동에는 종암동의 북바위 전설을 수록하고 있는데, 농토가 매우 비옥함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조선 후기 太宗때에 朴訔이라는 명신이 있었다. 그는 고려 말의 고관이었던 판전교시사 朴尙衷의 아들이요, 牧隱 李穡의 사위로서 학문과 덕행이 높아 유명하였다. 일찌기 태종과 뜻이 맞아 친근하게 지냈으며, 그리하여 벼슬길이 순탄하여 호조·예조·병조 판서를 지내고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평소 검소한 생활을 하고 가산을 돌보지 않아 가난하였는데, 스스로도 조밥과 베옷을 즐겨 하였다. 하루는 태종이 미행을 나섰다가 朴訔이 사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朴訔은 마침 퇴청하여 늦은 저녁상을 받고 있었는데, 조밥 한 사발과 간장 한 종지가 전부였다. 이때 태종을 수행했던 도승지가 들어와서 태종이 행차하였음을 알렸다. 朴訔이 황송해 하면서 곧 임금을 맞아들이려 했으나, 너무 급하여 씹지도 않고 삼킨 조밥 덩어리가 속에 걸려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이를 진정시키느라고 태종이 문 밖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좀 지체되었다. 이에 임금은 노하여 朴訔을 꾸짖자 그는 사실대로 아뢰었으나, 태종은 “한 나라의 재상이 조밥을 먹을 정도로 가난한가?”라고 의심하며 사람을 시켜 들어가 보게 하니 사실이었다. 이에 태종은 그의 청빈함에 놀라고 감탄하여 특별히 명하여 동대문 밖 북바위 전답을 하사하였다. 당시 북바위 부근에 있는 논과 밭은 소출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또 북바위 전답은 농부의 자격을 뜻하는 의미로도 쓰여 “북바위 전답을 아느냐 ?”고 물어서 대답을 못하면 “농군으로서 그것도 모르는 것을 보니 가짜 농군이로다”고 하여 동리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한편 설렁탕의 유래가 북바위 전답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하는데, 임금이 親耕을 하기 위해 직접 행차하여 농부에게 “북바위 전답을 아느냐”고 물어서 안다고 하면 “진정 그대는 농부이구나”하면서 곧 북바위 아래서 잡은 소로 끓인 설렁탕을 수행한 대신은 물론 인근 마을의 모든 농부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9-400쪽
    본문에 '조선 후기 太宗때에 朴訔이라는 명신이 있었다'라고 쓰여진 부분에서 '조선 후기'는 '조선 초기'의 오기인 것으로 파악된다.
  • 〈鍾岩路〉 「鍾岩路」를 끼고 있는 鍾岩洞은 고려대학교 구내에 鍾 또는 북(鼓)처럼 생긴 큰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종암동은 조선초부터 漢城府에 속했는데 조선말 高宗 4년(1867) 에 발간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漢城府 東部 崇信坊(城外) 鍾岩洞契로 되었고, 甲午改革때에는 漢城府 東署仁昌坊(城外) 東門外契 大鍾岩, 小鍾岩으로 칭하였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日帝는 1911년 4월 1일(京畿道令 제3호) 京城府 崇信面 大鍾岩, 小鍾岩으로 개편하더니 다시 1914년 4월 1일 京畿道 崇仁面 鍾岩里로 하였다. 이어서 1936년 4월 1일(總督府令 제8호) 경성부 확장으로 편입되어 京城府 鍾岩町으로 개칭되었고 1943년 6월 1일 區制실시 때 東大門區에 속하게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鍾岩町이란 이름 대신 鍾岩洞으로 바뀌었고 다시 1949년 8월 15일 城北區의 신설로 성북구에 속해 현재에 이르렀다. 1978년 10월 10일(市條例 제1286호)에 종암동 일부가 50m도로를 경계로 하월곡동으로 편입되었으므로 이 洞은 축소되었다, 종암동의 서쪽지역(종암제1동 지역)은 日出峰과 채석장으로 사용한 陳石山이 있고 그밑에 주택가를 이루고 있다. 이 산은 광복 전까지 나무가 울창했으나 광복 후 越南民들이 정착하면서 벌목하고 6·25동란 때 전투로 나무가 타버려 민둥산이 되었다. 陳石山은 陳氏가 이 산을 소유하여 이름이 붙여졌는데 1960년경까지도 石質이 좋아 고급주택을 지을 때 이 돌을 사용하였고 국립박물관을 건축할 때도 일부 사용되었다. 북바위 밑의 밭은 鼓岩田으로서 기름져서 소출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데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뒤편 아랫쪽의 주택가에 해당된다. 이 땅은 조선초 朴訔에게 하사된 토지로 알려져 있다. 하루는 太宗이 私服차림으로 옛 친구이자 대신인 박은의 집을 찾아갔는데, 마침 조밥식사를 하다가 재채기가 나서 곧 나와서 손님을 맞이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다가 주인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니 자연 안색이 좋지 않았다. 주인인 박은이 송구스러워 하며 사실을 말하니 태종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이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조밥을 먹는다니 말이 되느냐?」고 하며 사람을 시켜 안으로 들어가서 알아보게 하였는데 과연 사실이었다. 이에 태종은 감탄하며 특별히 명하여 동대문 밖의 鼓岩田 몇 마지기를 주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 북바위 전답은 농부의 자격을 결정하는 의미로도 쓰여 「북바위 전답을 아느냐?」고 물어서 대답을 못하면 「농군으로서 그것도 모르는 것을 보니 가짜 농군임에 틀림이 없다.」라고 하여 동리에서 쫓겨났다고 전해온다. 한편 설렁탕의 유래가 북바위 전답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하는데 국왕이 親耕을 하기 위해 직접 행차하여 농부에게 「북바위 전답을 아느냐」고 물어서 안다고 하면 「진정 그대는 농부이구나」라고 흡족해 하며 곧 북바위 아래에서 잡은 소로 끓인 설렁탕을 수행한 대신은 물론 인근 마을의 주민들에게까지 주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북바위 밑은 근처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 모두 이곳에 피신해 있다가 날이개인 후에 다시 일을 계속 하는데 그러한 일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소나 돼지를 잡아서 북바위에 제사를 드렸다. 만약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물난리를 당한다는 말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또한 李東亮이 지은 『寄齋雜記』에 보면 조선초의 韓繼禧는 한명회의 재종형으로 청렴해서 조석으로 나물밥을 먹을 정도로 빈한했다. 어느날 한명회의 집에서 門中會를 열었을 때 그를 모두 도와줄 수 없느냐고 말하자 한명회가 「이것은 나의 책임이다」하고 종이와 먹과 붓을 가지고 오게 해서 책을 만들어서 일족들의 이름을 쓰고 한 門中이 구조하지 못한 실책을 쓴 뒤에 鍾岩 밑의 벼논 10石지기를 준다고 썼다. 이에 모였던 老少가 일어나 춤을 추고 술에 취해 돌아갔다고 하였다. 현재 종암동은 종암 제1동과 종암 제2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99-801쪽
  • 〈鍾岩第1洞〉 鍾岩第1洞은 「鍾岩路」(종암동3거리∼월곡동∼미아3거리) 동쪽 일대 鍾岩洞지역의 洞長管轄區域 명칭이다. 종암 제1동은 1936년 4월 1일 京城府에 편입된 후 鍾岩町會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鍾岩洞會로 바뀌었다. 1955년 4월 18일부터는 鍾岩洞事務所로 칭하게 되었는데 1970년 5월 18일(市條例 제613호) 「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의 변경」에 따라 鍾岩洞은 鍾岩1洞과 鍾岩2洞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당시 종암 제1동의 관할구역은 종암동 중 「古山路」以西의 지역으로 정했다. 「古山路」는 현재 「종암로」의 전 가로명이다. 이 洞의 옛이름은 안말로서 慶州金氏와 鄭氏의 集姓村落이었는데 사이가 좋지 않아 전일에는 서로 通婚조차 하지 않았다. 안말은 숭례국민학교 앞쪽을 큰 해창, 뒤쪽은 작은 해창이라고 칭했는데 해창이란 명칭은 조선 중기의 顯宗의 셋째 딸인 明安公主와 남편인 海昌尉 吳泰周의 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종암 제1, 2동을 나누는 「종암로」는 말행길, 또는 큰 길이라고 했다. 옛날에 의정부 방면에서 서울로 들어오려면 미아3거리에서 길음교를 건너 미아리고개를 넘어 혜화문을 통해야 하거나 다른 하나는 미아3거리에서 「종암로」를 지나 마장동을 거쳐 동대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미아로」는 좁고 고개가 높아 도보로 이용하기에 펀리하고, 「종암로」는 말을 이용하거나 달구지 등이 다닐 수 있어서 말행길이라고 했지만 貞陵川이 범람하면 물에 잠겨서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하여 水路라고도 칭했다. 이 洞관내에는 종암경찰서와 성북소방서가 위치하고 교육기관으로는 종암여자중학교와 숭례국민학교가 있다. 광복 당시부터 1990년까지의 종암 제1동의 현황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802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01-802쪽
  • 〈鍾岩 第2洞〉 鍾岩第2洞은 「鍾岩路」서쪽 鍾岩洞지역의 洞長管轄區域명칭이다. 종암 제2동은 1955년까지는 앞의 제1동과 같으므로 중복을 피하고 1970년 5월 18일(市條例 제613호)에 鍾岩洞事務所가 鍾岩 第1, 第2洞事務所로 分洞되면서 설치되었다. 이 당시 종암 제2동의 관할구역은 종암동 중 「古山路」以東의 지역으로 정해졌다. 종암 제2동은 전에 모랫말이라고 칭했다. 그 이유는 月谷洞과 경계가 되는 貞陵川의 물이 맑아 빨래터로 사용되었는데 상류쪽에서 내려온 모래가 쌓여 정릉천주변은 언제나 모래밭으로 변해 모랫말 혹은 모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곳의 모래는 良質의 모래여서 下水溝管이나 전봇대 등을 만들었다. 현재 종암제1동의 종암여자중학교 자리에는 中央産業이 건축자재 등을 생산하였다. 이 洞에는 서울師大부속중·고등학교(종암동 19번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전일의 이 곳에는 서울大學校 商科大學이 위치하고 있다가 신림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공공기관으로는 종암우체국과 국민은행 직원합숙소, 고려시장 등이 있다. 참고로 1970년, 1990년의 종암제2동의 현황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803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02-803쪽
  • 종암동은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이를 한자로 '종암'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안말'이라고 하는 부촌이 있었다고 전하며, 경주 김씨와 경주 정씨의 집성촌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해창'이라는 지명도 남아 있는데, 조선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와 남편인 해창위 오태주의 묘가 있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모랫말 또는 모랫골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이는 월곡동과 경계가 되는 정릉천의 물이 맑아 빨래터로 사용되었는데 상류에서 내려온 모래가 쌓여 정릉천 주변은 언제나 모래밭이였기 때문이다. 1939년 경성고등상업학교(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가 현재의 서울대학교사범대학 부속 중, 고등학교자리로 이전했다. 1943년에는 경성경제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해방 후인 1946년 8월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서울대학교가 관악에 새 캠퍼스를 만들어 각지에 흩어진 단과대학을 묶어 이사할 때 함께 이전하였으며, 현재는 서울사대부중,고가 자리하고 있다.
    성북문화원, 2016, 성북문화 제4호, 305-306쪽
  • 마을사람들은 그 당시 농사도 했고 또 암암리에 소도 잡아 팔았어요. 당시 단속이 심해서 한 곳에서 오래 하지를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했는데, 혹시라도 갑자기 형사들이 들이닥쳐 들키면 잡혀 가서 벌금을 내곤 했었죠. 한번 소를 잡으려면 다섯 명에서 여섯 명 정도 투입되었어요. 그렇게 소를 잡아 파는 사람이 무려 7~8명 정도 되었어요. 소는 주로 경기도 우시장에 가서 암소를 사요. 그러면 소를 끌어다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어요. 잡은 소는 주로 뼈째로 각을 떠서 바로 시내로 들어갔죠. 큰 시장에 들어갔어요. 여기서 나온 가죽은 가죽공장에 팔았죠. 종암동에 가죽공장이 있었어요. (석관동 강명복 씨 구술. (2018년 조사, 면담자: 류영희)) 미아리도살장 및 무허가 도살장이 있음으로 하여 장위동 근처에 마방을 운영하는 집도 있었고, 마방에서 야윈 소를 데려다가 먹여 살을 찌워 되파는 사람도 있었다. 또 도살장에서 나오는 가죽으로 생가죽장사를 하던 사람도 있었고, 가죽을 가공하는 피혁공장을 운영하는 집도 있었다고 한다. 소뼈를 끓여 접착제를 만드는 아교공장은 주로 타동 사람들이 했었는데 상월곡동 정보센터 쪽으로 한 집 있었다. 아교공장은 맥주공장이 들어오기 전에 주로 종암동에 많았다고 한다. △△△씨는 생가죽장사로 돈을 번 유명한 장사꾼 중의 한명이다. 장위동, 월곡동, 석관동 일대에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 이 지역에서는 아주 유명하고, 그 자손들이 아직도 장위동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갖바치라고 하면 자손들이 듣기 거북해 한다고 하면서 그의 이름을 알리기를 꺼려한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84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12

이 자료의 하위 자료 보기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