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곶이 공간의 역사
이종호(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교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 일첩,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를 보면 한양의 주산 삼각산에서 출발하여 성문 밖 동쪽 일대를 휘감는 뚜렷한 산줄기가 있다. 산줄기는 화계사와 수유리 언덕을 넘어 지금의 북서울 숲이 자리한 오패산을 지나 두 줄기로 나뉘며 잠시 한 봉우리에 머문다. 봉우리 동쪽을 보면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한 가운데 의릉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저 지도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기운을 뿜고 있다. 다시 산줄기는 남으로 또 동으로 뻗어내려 지금의 시립대 뒤편 배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내 그 긴 끝자락을 중랑천에 드리운다. 그리 높지도 않은 산자락이 꽤나 넓다. 잠시 머물던 그 봉우리 이름이 ‘하늘이 감추고 있는 산’, 바로 의릉을 품은 천장산(天藏山)이다. 한양 동북부에서 가장 중요한 산이다. 오늘날의 돌곶이를 말하려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야기의 그늘이 넓고 깊은 산이다.
천장산 그늘의 넓이부터 살펴보자. 서남쪽 신촌 지역에 대학들이 많다지만 사실 이곳 천장산 지역에 비할 바 아니다. 한예종, 외대, 경희대와 카이스트 서울캠퍼스가 이 산을 둘러싸며 자리하고 있다. 좀 더 넓혀보면 서울시립대, 고려대, 동덕여대, 광운대가 모두 이 권역 안에 있다. 대학뿐인가. 과학기술연구원, 국방연구원, 산림과학원, 산업경제연구소, 농촌경제연구소가 모두 이 산에 기대어 있다. 우리가 미처 이를 한데 묶어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산의 그늘이 정말 넓다. 우리의 주된 관심인 돌곶이 영역은 기실 그 넓은 영역 중 몇 분지 일일 뿐이다. 그러니 돌곶이의 공간을 사유하려 한다면 적어도 이 천장산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범위 전체를 아우르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영역과의 연계를 고려하며 진행되는 것이 옳다.
그늘의 깊이를 살펴보면 터를 둘러싼 쟁투가 쉽게 읽혀진다. 의릉 말고도 영휘원, 숭인원 등 왕가의 무덤이 이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뿐 아니라 홍릉이라는 이름만 남기고 떠난 릉, 명성황후의 릉도 있었다. 홍릉은 사실 천장산 가장 깊은 골짜기에 있었던 비구니 승방터를 밀어내고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고종 승하 후 남양주의 홍유릉으로 합장되었고 그 자리는 국립수목원이 차지하게 되었다. 승방 자리에 왕가의 무덤이, 다시 그곳에 근대기의 시설(수목원)이 들어서게 되고, 세월이 더 흘러 산업화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과학연구소가 그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름 하여 터의 유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좋은 터의 운명이 본래 그러하다. 찬바람 막아 줄 산을 등지고 볕이 잘 드는 아늑한 터에 어느 때인가 사람의 삶이 깃들었고 그 중 좀 더 나은 터를 차지하려는 힘겨루기가 당연히 따랐을 것이다. 한 예로 산중 사찰의 창건기록을 보면 흔히 이런 표현이 나온다. “대사가 도적의 무리를 내쫓고 불사를 일으키셨으니”. 그것은 절이 들어서기 전 그 자리에 무리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세월이 흘러 그 불교 또한 힘을 잃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 소수서원은 숙수사라는 절터에 들어 앉기도 했다. 설립 교장 주세붕은 심지어 절의 동종을 녹여 학교의 예산으로 사용했다는 ‘미담’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좋은 자리를 차지한 기독교 수양관을 보면 이곳이 혹시 서원이나 절의 옛터는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장소를 둘러싼 힘의 정치, 공간 정치의 과정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관심지역, 돌곶이-의릉 일대야말로 말한 바 ‘좋은 터’의 운명, 장소 유전의 표본이다. 한양의 주산인 삼각산으로부터 맥을 이으며 좌우의 산세가 튼실한 곳, 당시 중랑천 돌다리를 건너 가평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변이었으니 의릉이 자리하기 전에 이미 일대의 살림살이가 그저 허접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랑천 퇴적지가 아주 넓고 천장산 도당 할머니 마을신이 모셔진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할머니 신은 지금 영상원 뒤편 길 모퉁이, 아주 조그만 도당에 밀려나 계시다. 한참을 지나 이미 왕조는 기울고 해방과 전쟁이 이어지던 시절, 이곳 의릉 주변 좌우 능선에는, 서울 변두리 다른 곳처럼 판잣집들이 즐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앙정보부라는 막강한 권력이 의릉 주변으로 자리를 잡았다. 새로이 경계를 긋고 여러 집들을 헐어내며 담을 높이 쌓았다. 지금 한예종의 경계를 확정했다. 그러나 정보부 영역의 음습한 아우라는 그 경계보다 훨씬 더 넓게, 그리고 길게 미쳤다. 그 결과 아주 오랫동안 이 일대에 아주 특별한 장소의 감각을 만들어냈다. 뭐라 규정하기 어려운 그 감각은 공간과 시간 모두에서의 폐쇄, 이탈, 균열과 같은 것들이다. 아주 강하다. 묘한 내적 강도의 잠재력으로도 읽혀진다. 그래서 그 잠재력이 이 일대를 새롭게 출발시키는 힘이 될 수는 없을지 생각하게 만든다.
돌곶이-의릉 일대의 공간 정치는 아직 미완이다. 마지막 다툼이 한예종과 문화재청 사이에 진행되고 있다. 정보부가 힘을 빼 간 이후 그 공백을 비집고 구본관, 수송대, 지금의 미술원 영역으로 한예종이 자리를 잡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근본적 한계가 잠재되어 있었고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사건과 더불어 구체화되었다. 진입로, 미술, 전통 영역이 다툼의 겉모습이지만 달리 본다면, 문화재의 존재 자체를 더 귀중히 여겨 그것으로부터 일상적 삶을 격리시키려 하는 ‘문화재 권력’의 이슈이기도 하다. 오늘날 가장 강한 권력이다. 하지만 다툼을 오래 끌 일이 아니다. 돌곶이 영역, 학교의 교육 어느 편에도 좋은 일이 못된다. 빨리 다툼을 마무리 짓고 전혀 다른 긍정적 상황을 위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 돌곶이의 문화지도를 그리려는 일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