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1396.02.18
사적
장소 유적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이다. 조선 초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해 성곽을 쌓도록 하고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두었다. 조선시대 때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는데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축조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근대도시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성벽과 성문을 무너뜨렸으나 1968년 숙정문 중건을 시작으로 복원이 시작되었고, 1975년 서울성곽 정화 사업을 통해 전 구간의 중건이 이루어졌다. 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의 70%, 총 13.7㎞(2020년 기준) 구간이 남아있거나 중건되었고, 숙정문·광희문·혜화문 등의 성문도 중건되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성북동 삼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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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악스카이웨이 올라가는 길목에서 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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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을은 지금] 한양도성
  • [동네 산책 3회] 한양도성 길
  • 도성의 여첩을 수축하는데 종친부에서 가져온 돈을 쓰도록 하다
  • 도성 수축 도감에서 올린 도망한 성 쌓는 군사 치죄 건의문
  • 도성의 수축에 앞서 삼각산에 고유제를 지내다
  • 도성의 무너진 곳을 수축하다
  • 도성 조축 도감을 설치하고 그 직제를 정하다. 정도전에게 성 쌓을 자리를 정하게 하다
  • 민정 11만 8천 70여 명을 징발하여 도성을 쌓게 하다. 도성의 공사 구역 측량과 작업 구역 할당
  • 도성의 기초를 닦았으므로 백악과 오방 신에게 제사하다
  • 경기 백성을 징발하여 도성을 수축하게 하다
  • 목멱산·백악의 산신에게 축성을 제사 지내어 알리다
  • 축성 후 부실 공사를 즉시 고치게 하고 논죄하게 하다
  • 도성을 수축할 때 죽은 군인들의 호역을 면제하고 부물을 주도록 하다
  • 무너진 도성을 북청 감역관과 두목 총패에게 개축하도록 성문 도감이 계하다
  • 도성 수축 도감을 설치하다
  • 당령 선군과 방패·섭육십을 징용하여 도성을 수축하다
  • 한양도성 성곽길(1)
  • 한양도성 성곽길(2)
  • 한양도성 성곽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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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도성 성곽길(7)
  • 한양도성 성곽길(8)
  • 한양도성 성곽길(9)
  • [여기는 성북] 한양도성 순성길
  • [성북을 찾다] 도성 안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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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선동 일대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漢陽都城
  • 이명칭: 서울성곽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396.02.18
  • 비고: 1396년 1월 9일(음력) 축성 시작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삼선동
  • 비고: 성북구, 중구, 용산구, 종로구 일원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사적
  • 지정일: 1963.01.21

근거자료 원문

  • ▫ 사적 제10호 서울성곽 서울城郭 시대 : 조선전기(태조 5년, 1396) 소유자 : 국유 소재지 : 성북구, 중구, 용산구, 종로구 일원 지정연월일 : 1963. 1. 21.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 성곽이다. 이 성곽이야말로 조선 5백년 동안 동대문・숙청문・서대문・남대문 등의 4대문과 4소문에 이어져 서울 장안을 지키던 울타리이다. 높이 40척(약12m)의 돌로 쌓은 이 성곽은 두레가 5만 9,500척(약 18km)으로 서울의 4산인 북안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잇고 그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다. 이 성곽은 현재 남대문, 동대문 등의 성문과 암문(暗門)・수문(水門)・여장(女墻)・옹성(甕城) 등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천도 후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지은 다음 태조 4년(1395)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에 명하여 성터를 측정, 조사하게 했다. 정도전은 서울의 4산에 올라 실측하여 이를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의 민정(民丁) 11만 8,000명을 동원하여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개 구(區)로 나누어 정하고 49일의 말미를 주었다. 구역마다에는 천자문의 자호(字號)를 표시하여 북악산 동쪽에서부터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북악산 서쪽에 이르러 조자(弔字)까지 구획하였다. 공사는 구간 600척을 6등분하여 각 공사 구간에 판사(判事)・부판사・사(使)・부사・판관(判官) 등 12명씩을 임명, 민정을 독려하여 견고하게 축성하도록 책임을 맡겼다. 성벽에는 관직과 군명(郡名)을 새겨 넣어 책임을 분명히 하도록 했는데 총 석축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석재는 자연석을 약간씩 다듬어 쌓되 기초석은 길고 큰 돌을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평지는 흙으로 쌓았는데 너비는 아랫부분이 25척, 윗부분이 18척, 높이 25척이었다. 그 단면은 사다리꼴을 이루는 성토판축(盛土版築)을 하였는데 토축의 둘레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홍예[雲梯]를 쌓고 그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했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그런데 49일 동안 맡은 구역의 축성을 완료하기 위해 책임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자 동상자(凍傷者)와 부상자가 늘어났고, 전염병까지 돌아 병사하는 사람도 생겼다. 태조 이성계는 이를 염려하여 “야간작업과 눈이 오는 날,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은 공사를 중지시키고 사망자 가족들은 따뜻하게 보살펴 주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 당시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본 종림(宗林) 스님은 윤안필과 함께 판교원(板橋院)을 구호소로 삼아 병을 치료하고 음식을 제공하자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이렇게 쌓은 서울 성곽은 성문을 만들지 못해 성곽 구실을 할 수 없었던 데다가 이 해 여름 장마가 지자 토성으로 쌓은 이곳저곳이 무너져 버렸다. 그러자 태조는 이 해 가을 8만 명의 민정을 다시 동원하여 무너진 토성을 돌로 쌓게 하는 등 보수했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남대문은 1396년에, 동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세종 4년(1422)에는 전국에서 32만 2,000명의 민정이 동원되어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토축 부분을 모두 석축으로 바꾸어 높이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女墻)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이 당시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가 8만 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로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가 만들어졌다. 그 뒤 세종 8년(1426)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성문과 성벽을 보호하게 했고, 세종 29년(1447) 남대문을 다시 세웠으며, 성종 10년(1479)에 남대문을 중수했다. 또한 문종 원년(1451) 1월부터 경기・충청의 수군(水軍) 3천 명으로 성벽을 수축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한성이 함락되어 일본군이 왜루(倭壘)를 쌓아 이듬해에 수복하여 이를 철거하고, 그 돌로 다시 수축했다. 광해군 8년(1616)에는 부분적인 수축을 했고, 숙종 30년(1704) 3월부터 약 5년간에 걸쳐 오군영(五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975보, 성첩(城堞) 7,081개의 대대적인 수축을 했다. 또한 영조 19년(1743)에 부분 보수를 했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했으며, 고종 6년(1869) 동대문의 개축을 마지막으로 도성의 수명은 다하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태조 때 창축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축조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은 쉽게 구분된다. 태조 때에 쌓은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랫부분은 비교적 큰 돌로,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이 때는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세로 2척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는 근대적 축성기술의 완성으로 견고한 축성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1915년 일제는 근대도시로의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경성시 구역 개수계획을 수립하여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현재 삼청동・성북동・남산・장충동 일대에만 성벽이 남아있고, 성문도 남대문・동대문・숙정문・창의문・광희문만 남아 있게 되었다. 어언 6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울 성곽은 때때로 개축・보수공사를 하여 관리했지만, 성벽이 주로 산 능선을 따라 수축되었음에도, 45리에 달하는 어느 한 곳의 기초부분이라도 내려앉은 곳이 없는 것은 당시의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정교한 기술로 튼튼하게 쌓았던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초 태조 때 서울 성곽의 쌓을 위치를 둘러싸고 성리학자 정도전과 불교계의 대표 무학대사와 의견 대립이 있었다는 것이다. 무학대사는 현재 종로구 무악동에 마치 중이 장삼을 입은 모습의 선바위[禪岩]가 도성 안에 들어오도록 북악산~인왕산~안산~남산으로 연결해서 성곽을 쌓자고 한데 반하여, 정도전은 인왕산에서 곧바로 남산으로 연결해서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 성곽은 1975년 이전까지는 종로구와 중구 지역을 둘러싸고 있었으므로 서대문구・성북구・용산구・동대문구・성동구와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었다. 현재 서울 성곽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전체의 2/3 정도인 11.424km이고, 완전히 사라져 혼적조차 없는 곳은 6.703km나 된다. 남아 있는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의 태조・세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축성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석축을 보수했고, 1972년과 1976년에 부분 보수와 개축을 했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1, 1989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1987.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81-84쪽
  • ○ 1960~7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서울성곽 안팎 20m를 보호구역으로 지정 서울시는 23일 복원중인 서울성곽안팎 20m를 성곽보호구역으로 정해 이곳에 녹지대를 조성, 산책로로 활용할 계획이다. 올해부터 80년까지 5년 동안 조성될 녹지 조성대상지역은 성북·장충·광희·청운·동숭지구등 5개지구 3천6백60m. 녹지는 성곽주변에 들어선 불량주택의 재개발사업과 함께 추진, 주민들의 부담을 최대한 줄일 방침이다. 녹지조성 대상지역은 다음과 같다. ▲성북구(보성고 뒤쪽∼성북동·혜화동·와룡동 일부)=길이 1천3백m, 폭4∼8 m.▲장충지구(장충동 2가일부)= 길이 9백40m 폭4m. ▲광희지구(광희문∼신당동일부)=길이 1백20m, 폭8∼16m. ▲육운지구(사직「터널」∼행촌·부암·서운동 일부) 길이4백50m, 폭4∼8m.▲동숭지구(동숭시민「아파트」∼이대부속병원)=길이 8백50m, 폭4∼8m (1976.02.1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7쪽
  • ○ 1960~7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서울성곽의 복원에 따른 주택 철거 문공부의 국방 유적 복원 시책에 따라 서울시는 올해 시비 5억2천만원을 들여 서울 성북지구 성곽 2천60m를 복원한다. 복원에 걸리는 건물들을 보상 철거하고 산책 도로, 녹지 시설 등의 주변 정화 사업도 병행하게 될 성북지구 성곽 복원 공사는 오는 8월초 착공 예정. 성곽 복원 공사로 보상 철거될 건물은 성곽에 접해 있는 성북동 113의 1, 3, 4, 5, 8, 11의 무허 건물 80동과 성북동 123의 2∼5까지의 유허 건물 18동, 사유지 3백평 (성북동 113의 76, 123의 3) 등이다. 감사원 뒷산에서부터 혜화국민학교 뒷산을 지나 보성고교 후문 (종로구 혜화동 산 6의 1)까지 이어질 성북지구 성곽 복원 공사는 금년 말까지 완공할 계획이다. 문공부 문화재 관리국이 고증 등을 후원하고 서울시가 총 40여억원의 예산을 들여 6개년계획 (74년∼79년)으로 추진중인 서을 성곽 복원 공사 총 목표 길이는 성곽 1만1천4백24m와 광희문·숙정문 등 2개의 성문. 문헌 기록에 나타나 있는 서울 성곽의 총 연장 길이는 1만8천1백27m. 서울시는 이중에서 성곽의 흔적이 현존하고 있는 부분만을 복원한다. 현재까지 복원된 것은 지난해 11월 4천6백만원의 예산을 들여 완공한 광희문뿐이다. 현재 45% 정도의 공사가 진행된 삼청 지구 성곽 1천9백94m와 목조 12평의 숙정문은 오는 7월31일까지 완공할 예정이다. 올해 착공되는 성북지구 성곽과 광희문 옆 성곽 50m가 완성되면 76년까지 복원되는 서울성곽은 약 4km. 광희지구 성곽복원에는 광희동 l09의 1, 5동의 무허 건물 10동과 신당동 229의 46, 40동 유허 건물 20동, 사유지 2백50평이 보상 철거된다. (1976.02.1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6쪽
  • ○ tour tip >> 조선시대 건축양식의 대표작 서울 성곽은 뛰어난 축성 기술뿐만 아니라 규모면에서도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고 수도 방위를 위해 쌓은 이 성곽에는 무려 20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또한 높이 40척(약12m)을 돌로 쌓았고 둘레가 5만9,500척(17km)에 이르는 성곽은 서울의 4산인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잇고 있으며 암문, 수문, 여장, 옹성 등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세종 때 장방형 마름돌을 사용해 전면 개축된 성곽은 숙종 즉위 시 다시 정방형의 돌로 보수되었다. 조선왕조가 이 성곽에 어느 정도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건축양식의 대표작인 동시에 왕실의 존엄을 표현한 결정체인 것이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48쪽
  • ○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성북구의 명소 성북구의 명소 85 호국정신이 스며든 귀중한 문화유산 -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 조선왕조 초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다.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흥인지문(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쌓았다.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때에는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시설을 늘리는 대대적인 공사를 단행했다. 숙종에 이르러서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축조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도시의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개수 계획을 세워 많은 성벽과 성문을 무너뜨렸으나 조선 6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느 한 곳의 기초 부분도 내려앉지 않아 조상들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복원되어 사적지로 정비된 이곳은 인왕산과 이대병원 뒤쪽, 혜화동 방향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찾아갈 수 있으며 곳곳에 벤치와 정자, 공원 등이 마련되어 훌륭한 휴식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성곽은 조선시대 성 축조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의 호국 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46-147쪽
  • ○ 관련 자료 - 세종 때 도성의 규모와 성문의 이름 도성의 둘레가 9천 9백 75보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 【곧 동소문(東小門)】,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 【곧 수구문(水口門)】,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 【곧 남대문】,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 【곧 서소문】,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태조 5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 11만 8천 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 4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세 곳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 — 『세종실록』 「지리지」 중 “경도 한성부”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58쪽
  • ○ 관련 자료 - 정도전,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 중 제8수 여덟째는 북교(北郊)의 목마(牧馬)였다. “바라보면 저 북교(北郊) 숫돌과 같은데, 봄이 오면 풀은 무성하고 샘은 달구나. 만마(萬馬)가 구름처럼 모이고 까치처럼 날뛰는데, 목인(牧人)은 멋대로 서(西)로 갔다 남(南)으로 갔다 하도다.” (八曰北郊牧馬 瞻彼北郊如砥 春來草茂泉甘 萬馬雲屯鵲厲 牧人隨意西南) —『태조실록』 태조 7년(1398) 4월 26일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57쪽
  • ○ 관련자료 조선 초기 한성부의 행정 구역(5부 49방) 동부(東部) 12방(坊) 【숭신(崇信)·연화(蓮花)·서운(瑞雲)·덕성(德成)·숭교(崇敎)·연희(燕喜)·관덕(觀德)·천달(泉達)·흥성(興盛)·창선(彰善)·건덕(建德)·인창(仁昌)】 남부(南部) 11방(坊) 【광통(廣通)·호현(好賢)·명례(明禮)·대평(大平)·훈도(薰陶)·성명(誠明)·낙선(樂善)·정심(貞心)·명철(明哲)·성신(誠身)·예성(禮成)】 서부(西部) 8방(坊) 【인달(仁達)·적선(積善)·여경(餘慶)·황화(皇華)·양생(養生)·신화(神化)·반석(盤石)·반송(盤松)】 북부(北部) 10방(坊) 【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嘉會)·안국(安國)·관광(觀光)·진장(鎭長)·명통(明通)·준수(俊秀)·순화(順化)·의통(義通)】 중부(中部) 8방(坊) 【징청(澄淸)·서린(瑞麟)·수진(壽進)·견평(堅平)·관인(寬仁)·경행(慶幸)·정선(貞善)·장통(長通)】 5부(五部)의 호수(戶數)는 1만 7천 15호, 성저십리(城底十里)의 【동쪽은 양주(楊州)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에 이르고, 서쪽은 양화도(楊花渡) 및 고양(高陽) 덕수원(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은 한강 및 노도(露渡)에 이른다】 호수는 1천 7백 79호이다. — 『세종실록』「지리지」 중 “경도 한성부”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58쪽
  • ○ 영조 연간 이후 수축 공사 - 1745년(영조 21) : 방어의 취약 지구에 치성 축조, 40여 곳의 무너진 곳과 성벽 위에 여장 수리 공사(3군문) ※ 군영별 공사 구간 ㆍ훈련도감 : 숙정문 동변의 무사석에서 돈의문 북변까지 4,850보 ㆍ금위영 : 돈의문에서 광희문 남쪽 마을 집의 뒤까지 5,042.5보 ㆍ어영청 : 광희문에서 숙정문까지 5,042.5보 - 1751년(영조 27) : “수성윤음(守城綸音)” 반포 - 1769년(영조 45) : 3군문에서 체성과 여장 등 여러 시설을 구역 배정을 배정하여 보수·관리를 정례화 - 1844년(헌종 10) : 여장과 성랑(城廊) 수축 공사 시행 - 1869년(고종 6) : 흥인지문의 지반을 높여 개축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59쪽
  • ○ 한양도성(서울성곽) 복원 공사 ㆍ1976년, 서울시 성북지구 성곽 2,060m 복원공사 ㆍ성북동 113의 1, 3, 4, 5, 8, 11의 무허 건물 80동과 성북동 123의 2∼5까지의 유허 건물 18동, 사유지 3백평 (성북동 113의 76, 123의 3) 등 보상 철거 ㆍ서울성곽 안팎 20m를 성곽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녹지대를 조성, 산책로로 활용 ◈ 성북동(보성고 뒤쪽∼성북동·혜화동·와룡동 일부)=길이 1천3백m, 폭4∼8m. ◈ 숙정문 복원(홍예석 위 문루 신축)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1쪽
  • 1) 漢陽定都 1392년 7월 17일 開京에서 왕위에 오른 太祖 李成桂는 8월 13일에 都評議使司에 하교하여 漢陽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으며, 15일에는 三司右僕射 李恬을 한양으로 보내 궁궐을 수리하는 실제적인 천도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해 9월 3일 侍中 裵克廉·趙浚 등이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고 겨울철 백성의 안위를 들어 그 시기를 궁실과 성곽의 축성 및 官衝의 배열이 이루어진 후에 천도할 것을 청하여 한양천도계획이 일시 늦추어졌다. 이러한 한양천도의 배경을 살펴보면 먼저 新王朝개창에 따른 새 정부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자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당시 풍미했던 風水地理說에 따라 지력이 쇠한 開京을 대신하여 漢陽이 주목되었으며, 특히나 조선왕조 개창에 따른 고려 말의 어지러웠던 정치현장을 떠나고자 했던 太祖이하 開國功臣들의 심리가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高麗朝의 世臣巨族은 물론 南誾 등 新王朝의 일부 중심인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도가 실현되었던 것이다. 한편 王命으로 王室安服地를 찾아 楊廣·慶尙·全羅道에 나갔던 政堂文學 權仲和가 태조 2년 1월에 돌아와 胎室의 吉地로 全羅道 珍同縣지방의 山勢形勢圖를 헌상하고, 楊廣道 鷄龍山 都邑圖도 함께 바치었다. 太祖는 여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룡산을 실지 답사키로 하고 安宗源·金士衡·李之蘭·南誾등과 함께 계룡산으로 떠났으며, 도중에 楊州 橧岩寺에 들려 王師 自超를 동반하고 2월 8일에 新都候補地에 도착하였다, 太祖는 이곳에 5일간 머물면서 山水形勢를 살펴보고 이곳에 도읍할 것을 결정하였다. 따라서 漕運의 便否와 險易關係를 조사하고 성곽의 형편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新都에 건설할 종묘·사직·궁궐·朝市의 형세도를 작성하고 실지를 측정하는 등 구체적인 新都建設문제가 결정되었다. 또 그해 3월에는 新都 畿內에 속할 州縣·部曲·鄭·所등 81개소를 정하고, 8월에는 京畿內 田地를 고쳐 측량하여 民丁을 나누어 주는 등 건설공사와 함께 여러 조치도 진행되었다. 그런데 1393년 3월 新都建設工事를 착수하여 12월까지 10개월간 진행된 鷄龍山 신도건설공사는 중지되고 말았다. 이는 당시 풍수지리에 권위자였던 京畿左右道 觀察使 河崙이 계룡산 도읍지 불가를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河崙은 ‘도읍은 나라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역이 남쪽에 치우쳐 있어 東·西·北面과 거리가 멀며, 계룡산의 지형이 山은 乾方(동북방)에서 왔는데 水는 巽方(동남방)으로 흘러가니 이는 宋朝의 風水家 胡舜臣의 이른바 「水破長生, 衰敗立至」의 불길한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河崙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계룡산 신도공사는 중지되고 이후 新都후보지로 母岳이 등장되었다. 太祖는 河崙에게 명하여 書雲觀에 소장된 祕錄文書를 모두 살펴 다시 천도할 만한 곳을 찾아 아뢰게 하니, 河崙은 毋岳, 즉 鞍山남쪽 오늘날 新村·延禧洞 일대를 신도후보지로 지목하여 아뢰었다. 그러나 太祖는 趙浚·權仲和 등으로 書雲觀의 관원들과 함께 현지를 답사케 하였는데, 그 결과 그 곳은 지역이 좁아 새로운 도읍지로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太祖는 그 3년 7월 陰陽刪定都監을 두고 新都邑地를 고르게 하는 한편 친히 母岳 현지를 살피기도 하였다. 이때 鄭道傳의 천도 반대의견이 있었다. 즉, 새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되어 국가의 근본이 확립되지 못하여 民生은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기에 천도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니 시기를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太祖는 천도의지를 꺾지않고 北岳山 남쪽 고려 南京宮闕터를 다시 살피고 尹莘達 등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리하여 ‘國內에서는 松京이 제일이요, 다음이 이곳이나 乾方(동북방)이 낮고 水泉이 메마른 것이 유감’이라는 의견을 듣고 王師 自起와 중신들의 동의에 따라 이곳을 도읍지로 정하였다. 이렇게 太祖는 한양을 신도의 후보지로 정하고 귀로에 다시 積城郡 廣實院의 동쪽과 都羅山 및 長湍郡 白鶴山등지를 둘러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開京에 돌아온 太祖는 즉시, 左政丞 趙浚·右政丞 金士衡 등의 상소에 따라 漢陽을 새도읍지로 확정하였다. 이어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太祖는 1394년 9월 1일 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沈德符·金溱·李恬·李稷을 그 判事로 임명하여 새도읍지 한양의 건설공사를 급속히 추진하게 하였으며, 9일에는 여러 중신들을 한양에 보내어 宗廟·社稷·宮闕·官衙·市廛·道路의 基地를 선정·구획하고 沈德符·金溱로 하여금 현지에 남아 한양도읍지 營建事業을 감독 시행케 하였다. 그 한달 후인 10월 25 일 松京에 있는 각 정부기관에 두 사람씩 남겨두고 門下侍郞贊成事 崔永址, 商議門下府事 禹仁烈 등으로 分都評議使司를 삼아 松京의 모든 일을 관장하게 하고 新都 漢陽으로 遷都를 단행하였다. 王室·政府 일행이 28일 新都에 도착하여 예전 漢陽府의 客舍를 임시왕궁으로 정하고 계속적인 신도건설을 추진하였다. 1395년 9월 宗廟와 景福宮이 이루어지고 12월에 왕이 新宮에 入御하게 되는 新都의 면모가 차츰 갖추어지고 또한 관아·시가·도성·궁성 등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이어 漢陽府를 漢城府로 고치고 判事·副判事·尹·少尹·判官·參軍등의 관직을 두었다. 다음해 漢城府의 행정구역을 東·西·南·北·中의 5部52행을 구획하고 웹城과 門樓를 완성하니 한성부는 일국의 수도로서 내용과 외모를 구비하게 되었다. 이때 城北歐地域은 城底十里지역으로 肅淸門 밖의 계곡과 惠化門 밖의 구릉과 평지에 자연부락을 이룬 형편에 불과하였으며 이곳에 東部 崇信坊(城外)이 설치되었다. 그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다시 開京으로 천도하였다가,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太宗 4년(1404)에 다시 漢陽遷都가 확정되어 이듬해 漢場離宮 즉 昌德宮이 완성되어 입궁하니 이후 漢陽은 다시 조선의 도읍지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5-77쪽
  • 1. 史蹟 ① 서울城郭 鐘路區·中區·城北區·龍山區·西大門區 일부를 지나며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연장 약 17㎞에 달하는 조선시대의 석축도성, 1963년 1월 2일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성북구에는 돈암동에서 성북동에 걸쳐 소재하고 있으며 국유이다. 현재 남대문·동대문 등의 성문과 暗門·水門·女墻·甕城 등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건국초 太祖는 한양천도를 결정하고 1395년 궁궐과 종묘를 지은 뒤에 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鄭道傳에게 성터를 측정·조사케 하여 城郭築城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제1단계 공사가, 그 해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제2단계 공사가 진행 되었는데 연인원 197,470명의 民丁을 동원, 성벽은 白岳·駱山·南山·仁旺山의 능선을 따라 600尺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區로 나누어 정하였는데, 白岳의 동쪽으로부터 천자문의 千字로 시작하여 白岳 서쪽의 弔字區城으로 막음하였다. 工事는 每字區間 600尺을 6등분하여 每工區에 判事·副判事·使·副使·判官 등 12명을 임명하고 民丁을 독려하여 견고하게 축성하는 책임을 부가시켜,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城壁石에 官職과 郡名을 새기도록 해서 책임 한계를 분명히 하였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尺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총 석축길이는 1만 9,200尺이었다. 평지는 흙으로 쌓았는데 너비는 아랫부분이 25尺, 윗부분이 18尺, 높이 25尺이며 그 단면은 사다리꼴을 이루는 盛土版築을 하였는데 토축의 둘레는 4만 3,000尺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水口에는 虹蜺(雲梯)를 쌓고 그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I,050尺 이었다. 城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내었으니, 4대문은 東의 興仁之門, 西의 敦義門, 南의 崇禮門, 北의 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은 東北의 弘化門, 東南의 光熙門, 西北의 彰義門, 西南의 昭德門을 말한다. 그런데 동대문(興仁之門)에만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은 暗門으로 하여 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남대문은 1396년에, 동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을 보았다. 1422년(세종 4) 에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토축부분을 모두 석축으로 바꾸어 높여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향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으며, 여장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이 投事에 동원된 인원은 전국에서 약 322,000여명이었다. 이 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I0尺,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堞, 稚城 6군데로 되었으며, 曲城 1군데, 城郭 15군데를 만들었다. 그 후 1426년(세종 8) 修城禁火都監을 두어 성문과 성벽을 보호하게 하였고, 1447년 남대문을 다시 세웠고 1479년(성종 10) 남대문을 중수하였다. 또한 1451년(문종 1) 1월부터 경기·충청의 水軍 3,000명으로 성벽을 수축하였으나 임진왜란의 참변을 당한 뒤 1616년(광해군 8) 부분적인 수축을 하였고, 1704년(숙종 30) 3월부터 약 5년에 걸쳐 五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975보, 城堞 7,081개의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1743년(영조 19) 부분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灰紛으로 단장하였으나 1869년(고종 6) 동대문의 개축을 마지막으로 도성의 수명이 다하였다. 그러다가 日人들이 관여하면서 소위 京城市區域改修計劃을 만들고 성문과 성벽 일부를 헐어 南大門, 東大門과 肅淸門, 虹蜺門이 남았었고 성벽은 三淸·城北·裝忠洞 일대가 남았었으나 서울시 주관으로 1963년, 1972년, 1976년에 걸쳐 홍예문에 문루(光熙門)를 세우고 성벽도 거의 보수개축하였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창축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인데, 축조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은 쉽게 구분되는 바, 조선시대의 태조·세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축성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85-687쪽
  • 1. 성북동의 문화재 ○ 사적 종목 : 사적 제10호 명칭 : 서울 한양도성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동~삼선동 지정일 : 63.01.2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0쪽
  • 1. 태조 때의 도성 축조 ○ 한양 천도와 도성축조 계획의 수립 - 1394년(태조 3) : 8월, 한양 천도 결정 9월, 신도궁궐조성도감 설치 - 1395년(태조 4) : 6월,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 9월, 종묘와 경복궁 완성(12월 移御) 윤9월, 도성조축도감설치 → 성벽 터를 측량, 확정 ○ 태조 때의 도성 축조 공사 - 1396년(태조 5) : 1월 9일~2월 28일(49일간), 전국의 민정을 동원하여 1차 도성 축조 공사 ※ 평안도 안주 이남, 함길도 함주 이남, 강원, 경상, 전라도에서 총 11만 8,000여 명 동원 - 1396년(태조 5) : 8월 6일~9월 24일(49일간), 2차 도성 축조 공사 ※ 경상·전라·강원도의 민정 7만 9,400명을 징발하여 동대문 근처 미완성 구간, 장마로 무너진 곳 개축, 낮은 석축 성벽보강, 성문의 월단(홍예)과 문루 설치 - 1397년(태조 6) : 1월, 황해도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도성을 쌓게 함 2월, 남대문 문루 완성 8월, 경기의 장정을 동원하여 도성 수축 - 1398년(태조 7) : 1월, 경상·전라·충청·황해도 군인들을 징발하여 도성 수축 ○ 태조 때 도성 축조 공사의 특징 - 성터 전체의 규모는 영조척(營造尺)으로 재어 5만 9,500척이 되므로, 백악 동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600자(약 180m)씩 97개 구간으로 분할 -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호로 구간 이름을 차례로 정하고, 각지에서 징발한 장정들에게 축성 책임 구간을 균등하게 배정(57쪽 [표4]에 태조 4년(1395) 1차 도성 축조 공사 구간별 분담 내역표가 제시되어 있음). - 토성과 석성의 혼재 - 지반이 경사지고 험한 곳에는 돌로 축조 : 1만 9,200자(약 5.7~5.8km) - 기초가 낮고 평탄한 곳은 흙으로 판축 성벽을 축조 : 4만 300자(약 12.1km)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56쪽
  • 2) 都城의 藥造와 肅淸門·惠化門建立(1) 都城은 천도와 더불어 동시에 쌓기로 하였으나, 궁궐·종묘·사직 등의 건립이 우선하였던 것으로 곧 착공하지 못하였다. 太祖 4년(1395) 9월 궁궐과 종묘의 공사가 거의 끝나게 되자 太祖는 都城葉造令을 내렸다. 즉, 9월 26일 左政丞 趙浚과 右政丞 金士衡에게 다음해 정월부터 각 道의 民丁을 동원하여 도성 쌓을 것을 명하고, 閏 9월 3일 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함과 동시에 判事·副判事·使·副使·判官·錄事를 두었으며 判三司事 鄭道傳으로 하여금 城基를 정하도록 하였다. 城基 결정에 대하여 혹은 無學大師가 잡았느니, 혹은 겨울에 눈이 온 후 눈녹은 자리를 보고 결정하였다는 여러가지 전설이 있으나 모두 사리에 맞지않는 것이다. 城基는 아직 눈이 오지않는 閏 9月에 鄭道傳이 白岳·駱山·南山·仁旺山에 올라가 실측한 것으로 四山을 연결한 총거리는 59,500尺이었다. 이렇게 1395년에 도성축조계획을 세우고 다음해 태조 5년 정월부터 城을 쌓기 시작하였다. 工事는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서 실시하였다. 1차 공사는 1월 9일 白岳神과 五方神에게 도성축조를 고하고 開基祭를 거행함으로써 시작하여 2월 28일까지 49일간 慶尙道·全羅道·江原道 및 西北面의 安州以南과 東北面의 咸州以南의 丁壯 118,070명을 징집하여 全長 59,500尺의 都城을 쌓았다. 이 때 공사의 총 지휘는 領三司事 沈德符와 平壤伯 趙浚 등이었다. 이해의 음력 1월 9일은 양력으로 2월 26일에 해당하여 혹한은 지났으나 아직 일기가 추울 때였다. 이와 같이 추울 때 인민을 동원하여 중노동인 築城工事를 실시한 것은 農閑期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사에 정집당하지 않은 지방의 民丁은 前年에 이미 宮役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압록강·두만강 방면의 국방에 종사하였기 때문이다. 축성공사의 진행방법을 보면 全長 59,500尺의 城基를 600尺을 1區로 정하여 97個區로 나누고, 각 구마다 天字文으로 字號를 표시하였는데 白岳山頂으로부터 동쪽으로 天字로 시작하여 駱山·南山·仁旺山을 거쳐 白岳山 서쪽에 이르러 吊字로 마쳤다. 59,500尺 의 城基를 600尺씩 97區로 나누면 1,300尺의 여유가 있게 되는데 이것은 仁묘山頂에 城을 쌓지 않아도 좋은 石嶺 즉, 자연의 石城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전체의 城基를 600尺씩 97字區로 나누어 1字區를 다시 100尺씩 6號로 나누어 各道·郡의 인구비례에 의해 공사구역을 배정하였으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79쪽 표 참조)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城北區 서북 경계지역의 축성은 江原道와 慶尙道의 人丁이 담당하였다. 이렇게 各道에 字區를 배정하고 두 字區에 判事·副判事 각 1명과 使·副使·判官등 12명의 감독관을 두어 공사를 추진하였으며 城壁外側 各面에 字號와 감독관의 姓名 및 담당 郡名을 새겼다. 공사는 예정대로 마쳤는데 감독관이 공사를 서둘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시켰다. 1·2월의 추운 날씨에 城을 쌓는 일은 매우 고된 일일 뿐만 아니라 이때 서울은 천도한지 1년밖에 되지않아 11만 8천명의 인부를 재울만한 집도 없어 露宿하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야간작업으로 病者와 負傷者·死亡者가 속출하니, 太祖는 밤일을 시키지 못하게 하고 사망자를 위하여 水陸齋를 올려 명복을 비는 동시에 그 가족에게는 3년간 復戶하여 요역을 면제시켰다. 그리하여 공사는 예정대로 2월 28일 완료되었으며 그 축성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높고 험한 산에는 石城을 쌓았는데 높이가 15尺, 총길이가 19,200尺 이다. 石材는 인공을 가하지 아니한 自然石을 이용하였는데 基礎石이 長大하고 城壁은 수직이며 돌과 돌사이에 작은 돌로 메꾸워 쌓은 것이 특색이다. 둘째, 平地와 平山에는 土城을 쌓았는데 下層의 넓이가 25尺, 上層이 18尺, 높이가 25尺, 총길이가 43,000尺 이다. 세째, 東大門 부근 淸溪川 水口에는 구름다리를 만들고 양편에 石城을 쌓았는데 높이가 I6尺 총길이가 1,050尺 이다. 여기서 都城의 총길이를 합하면 63,250尺으로 처음 鄭道傳이 측정한 59,500尺보다 3,750尺 이 더 많은데 이는 城의 중심부가 아니라 성곽의 外面을 측량하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태조 5년 1차 도성공사는 東大門을 제외하고 약 40里의 도성을 쌓았으나 土城이 2/3이상을 차지하고 城門도 만들어지지 않은 불완전한 성곽이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8-80쪽
  • 2) 都城의 藥造와 肅淸門·惠化門建立(2) 이렇게 제1차 공사로 쌓은 도성은 완성하지 못한 곳이 많을 뿐만 아니라 49일간의 단기간에 쌓은 것이기 때문에 부실한 곳도 많았으며, 또 그해 7월의 장마로 水口 2間이 무너지고 土城도 여러 곳 붕괴되었으므로 補修工事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太祖는 慶尙道·全羅道·江原道 인부 79,400명을 징발하여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역시 49일간 제2차 공사를 실시하였다. 그 공사내용을 보면 첫째 봄에 완성하지 못한 東大門 부근의 城을 완전히 쌓고, 둘째 장마로 무너진 水口의 구름다리를 다시 쌓는 동시에 雲梯 한곳을 더 설치하였다. 세째, 장마로 무너진 土城을 石城으로 개축하였으며 네째, 石城가운데 낮은 곳을 더 높게 쌓았다. 끝으로 都城 8大門의 月團(아치)과 門樓를 만들고 門名을 다음과 같이 명명하였다. 正北 肅淸門 東北 弘化門 俗稱 東小門 正東 興仁門 〃 東大門 東南 光熙門 〃 水口門 正南 崇禮門 〃 南大門 西南 昭德門 〃 西小門 正西 敦義門 〃 西大門 西北 彰義門 한편 2차공사로서도 都城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門樓는 기술이 요하는 것으로 그중 가장 규모가 큰 南大門樓는 2년 후인 太祖 7년 2월에 준공되었다. 그리고 都城도 수차례의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宮城I事의 완료와 더불어 서울의 都城과 宮城은 太祖5년 정월부터 7년 3월까지 약 2년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왕자의 난을 계기로 開京으로 遷都하여 7년간 漢陽을 비워두게 되었기 때문에 新都서울의 시설은 크게 황폐하였다. 그러므로 太宗은 漢城還都후 昌德宮을 짓고 景福宮과 각 官衝를 수리하고 道路와 開川을 크게 정리하고, 市中의 행랑과 기타 都市施設을 신설 또는 확장하였으며 太宗 13년과 16년에 걸쳐서 領議政府事 河崙의 건의에 의하여 都城補修를 결정하고 京城補修都監 또는 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각 道의 인부까지 배정하였다. 그러나 太宗은 民力의 휴양을 위하여 이를 중지하였으며 世宗 4년(1422) 에 이르러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세종은 처음에 백성의 괴로움을 염려하여 우선 급한 것만 수리하고 전면적 보수는 풍년을 기다려 실시하려 하였으나 太上王太宗의 특명으로 1422년 봄에 都城을 수축하기로 하여 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都提調, 提調, 使, 副使, 判官, 錄事등의 실무자를 선정하였다. 이어 세종 4년 정월 14일 白岳·木覓 兩神洞에 告祠하여 기공식을 올리고 15일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기간은 40일로 정하였으며 담당구역을 다 쌓으면 그 이전에라도 돌아가게 하였으며 견실하게 쌓지 아니하면 감독한 提調와 守令·摠牌·頭目등을 처벌하고, 개축된 뒤 기울거나 무너지면 이것을 쌓은 고을에서 다시 쌓을 것을 규정하고 각 字區마다 修築한 고을의 이름을 石面에 새기게 하였다. 이때 城北區地域의 도성수축공사는 咸吉(鏡) 道·江原道의 人丁과 京畿道·忠淸道의 일부 人丁이 담당하였는데 공사는 예정보다 2일 앞당겨져 38일만인 2월 23일에 완공되었다. 그 공사개요는 다음과 같다. 첫째 城은 모두 石城으로 쌓았는데 높이가 험한 곳은 16尺, 다음은 20尺, 平地가 23尺 이었다, 당초의 공사계획은 土城무너진 곳 24,535尺과 石城무너진 곳 3,952尺을 보수하기로 한 것인데 공사결과 성곽 전체가 石城으로 되었다. 둘째 城牒과 女牆을 쌓았는데 성첩은 일정한 간격과 일정한 높이로 全 城上에 쌓은 것이며 女錯은 적이 침입하기 쉬운 門樓좌우와 기타 요소에 한길 정도 높게 쌓은 城上 城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적을 사격할 수 있는 구멍을 내어 놓았다. 세째 동대문 부근에 水門 2間을 증설하였다. 네째 西箭門을 막고 敦義門을 移建하였다. 太祖때 건축된 돈의문 즉 서대문은 지금 사직동 고개길에 세운 듯하다. 그런데 태종 13년에 風水學生 崔揚善이 上書하여 돈의문을 막고 중앙기상대쪽에 새문을 내어 西箭門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세종 4년 都城을 수축할 때 특히 平安道 軍丁 1000명을 뽑아 서전문을 조금 남쪽인 지금 서대문 고개로 이전하여 敦義門이라 하였다. 다섯째 城 안팎에 15尺의 도로를 내어 순찰에 편하도록 하고 城門都監을 설치하였다. 여섯째 城基가 60,892尺으로 확정되었다. 이는 土城을 모두 石城으로 개축한 뒤의 성주위로 이후 변화가 없었다. 이와 같이 하여 都城은 짜임새를 갖추었으며 그후 壬辰倭亂, 李适의 亂, 丙子胡亂을 겪은 후 숙종 30년(1704) 에 이르러 다시 修築하기에 이르른다. 숙종 30년 2월 都城修築令을 내리고 漢城左尹 尹就商과 韓城君 李基夏에게 명하여 城基를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3월 25일 三角山에 先祭하고 都城修築工事를 착수하였다. 이때는 8道의 民丁을 정집하지 아니하고 訓練都監·御營廳·摠戎廳·守禦廳·禁衛營등 五營軍門의 군인을 동원하여 분담 수축케 하고 기간을 정하지 아니하고 서서히 수축하게 하였다. 이때 五軍門의 분담구역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東西兩邊을 五軍門이 분담하여 32년 10월에 완료하고, 다시 남북면의 도성을 수축하기 시작하여 33년 7월에 肅靖門 서쪽 城牒의 수축이 완료 되었으며, 36년 2월에 나머지 공사인 女墻을 수축하게 하여 공사를 완료하였다. 여기서 太祖·世宗·肅宗때의 용藥 혹은 修築城敵의 특정을 살펴보면, 먼저 太祖 때의 것은 1尺 정도의 方形의 작은 돌로 쌓은 것이며, 세종 때의 것은 2尺×4尺 정도의 長方形의 긴 돌로 쌓은 것이고 肅宗 때의 것은 正方形의 돌로 쌓은 것이다. 태조·세종 때의 돌은 규격이 일정하지 아니하여 사이사이에 잔돌을 사용하였으나 숙종 때의 것은 규격이 일정하고 수직으로 쌓아 올린 것이 특징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0-83쪽
  • 2) 都城의 藥造와 肅淸門·惠化門建立(3) 다음 英祖 21년과 22년에 都城의 補修가 있었다. 이때 訓練都監·禁衛營·御營廳의 三軍門이 분담하여 40여 곳의 무너진 곳과 城牒을 보수하였으며, 아울러 惠化門·昭德門(西小門)·彰義門의 문루를 改建하였다. 이와 같이 도성을 보수한 다음 英祖는 守城節目을 제정하고 五部 坊民으로 하여금 三軍門에 分屬하여 城을 지키게 하고, 27년에 守城綸音을 내려 都城死守를 말하고 都民은 一心合力하여 城을 굳게 지킬 것을 당부하였으며 《守城冊全》을 간행하였다. 그 주요 내용을 보면 첫째, 都城의 수비와 보수는 三軍門에서 부담하는데 ㅍ靖門에서 光熙門까지는 御營廳에서, 光熙門에서 西大門까지는 禁衛營에서, 西大門에서 肅靖門까지는 訓練都監에서 담당하고, 각 軍門은 다시 前後左右中의 5停으로 나누어 분담하였다. 둘째, 五部 各契의 民戶를 各營·各停에 배속시키고 국가유사시에는 男女老少를 막론하고 모두 城에 올라 軍人과 함께 지키게 하였다. 세째 五部各契는 그 소속을 밝히기 위해 小旗를 만들게 하였다. 네째, 유사시에는 각 軍門에서 소속 部에 연락하고 각 部에서는 領將이 部民을 인솔하여 城에 올라가는데, 鳥銃이나 弓失를 가진 사람은 이것을 휴대하고 없는 사람은 돌을 가지고 오르도록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3-85쪽
  • 2. 세종 때의 도성 개축 ○ 세종 4년 도성 개축 공사 - 1421년(세종 3) : 10월, 도성수축도감 설치 ※ 영의정 유정현, 우의정 이원 등을 도제조로 삼고 박자청 등 5명의 제조를 임명 - 1422년(세종 4) : 1월 14일~2월 15일(38일간) 도성의 남북에 있는 백악과 목멱산의 신에게 고유제를 올리고 이튿날 공사 시작 ※ 32만 2,400여 명의 장정을 팔도에 배정하여 동원(경기·함길도·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평안도·황해도) 97개 구간 개축 ○ 세종 4년 도성 개축 공사의 특징 - 신축 공사에 준하는 규모의 대대적인 도성 개축 공사로 전국 팔도 32만여 명의 민정을 동원하여 38일 간의 공역으로 종래의 석성 가운데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약 4만여 자 이상의 토성 외측 벽면을 전부 석성으로 고쳐 쌓음 - 도성 주위 성의 안과 밖에 모두 15자 너비의 길을 새로 내었는데 이는 평상시 순찰과 유사시의 대비를 위한 것임 → “순성길”의 탄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57-58쪽
  • ③ 孝女 都里莊 三仙洞의 서쪽과 남쪽의 경계를 이루는 서울성곽이 史蹟 10호로 지정된 바 있는데, 이 성곽은 太祖 5년(1396) 1월부터 축조하기 시작한 것으로서, 이 성을 쌓을 때 都里莊이란 孝女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都里莊의 아버지는 전라도 長城에서 都城을 쌓으려 서울에 올라와 그만 병이 들어 板橋院의 구호소에 있게 되었다. 板橋院은 일종의 구호소로 宗林이란 스님이 前判尹 尹安弼과 都城 축조공사에 동원된 民丁들이 질병으로 쓰러져, 보다 못해 이 판교원을 지어 환자를 수용하고 약과 음식을 제공하였으며 또 完治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에게도 行糧을 주어 돌려 보냈기 때문에 칭송을 자자하게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都里莊은 아버지가 객지에서 혼자 고생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통곡하다가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都里莊은 男裝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연약한 처녀의 몸으로 추운 날씨에 천리길을 떠난다는 것만해도 효성이 지극하지 않고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都里莊은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병으로 누운 사람이 있으면 아버지가 아닌가 반드시 확인해 보았다. 겨우 판교원을 찾아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거의 운명 직전이었다. 도리장이 정성을 다해 간호하자 얼마 후 차도가 있었는데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부친을 부축해 고향에 돌아오니 인근 주민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 이야기가 太祖에게 알려지자 왕은 특별히 都里莊에게 옷감을 賞으로 내려 都里莊의 효성을 포상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27-628쪽
  • 3. 조선후기의 도성 수축 ○ 숙종 때의 수축 공사 - 1704년(숙종 30)~1712년(숙종 38) : 대대적인 도성 수축 공사 ※ 중앙군인 5군문(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이 분담하고, 책임구역의 장교와 석공의 이름을 그가 쌓은 성벽의 면석에 새김 - 규모 : 둘레 9,975보, 여장 7,081첩 - 특징 ㆍ가로·세로 약 2자씩 정사각형의 규격화된 성석으로 쌓았으며 여장 축조시 벽돌 사용 ㆍ1712년(숙종 38) : 북한산성(둘레 12.7km) 수축 공사 시작 ※ 북한산성은 한양도성의 배후에 마련된 입보용 산성으로 남한산성과 마찬가지로 행궁과 사찰 등 유사시를 대비한 시설을 갖춤. 이로써 한양도성은 기존 나성(羅城)으로 둘러싸인 단순한 구조에서 배후에 험준한 산성을 거느린 복합적인 구조로 변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59쪽
  • 가장 성북동답다고 말할 수 있는 성곽을 제외하면 성북동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103쪽
  • 경기·충청도·전라도의 당령선군(當領船軍) 및 방패(防牌)·섭육십(攝六十)을 징용(徵用)하여 도성(都城)을 수축하였다. 이달 26일로 기한하였으나 지금 기한에 못 미쳐서 마쳤기 때문에, 그 군사를 나누어서 남은 날에는 흥인문(興仁門)과 동소문(東小門)을 수리하였으며 혹은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집 바깥 담을 쌓았다. - 문종실록 6권, 문종 1년 3월 17일 병진 9번째기사 1451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6
  • 도성 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이 계(啓)하기를, “여러 도의 군정(軍丁) 속에서 갑사 별패(甲士別牌)·시위패(侍衛牌)·수군(水軍)·진군(鎭軍)·수성군(守城軍)·익정군(翼正軍)·첨발(簽發)·봉족(奉足) 및 잡색군(雜色軍)을 제외하고서 성을 쌓게 되는데, 토성(土城)으로 된 곳이 허물어진 데가 2만 5천 5백 35척인데, 매 척당 각 15명씩으로 쌓게 되니, 계가 38만 3천 25명이고, 석성(石城)으로 된 곳이 허물어진 데가 3천 9백 46척인데, 매 척당 각 5명씩으로 쌓게 되니, 계가 1만 9천 7백 30명이요, 서전문(西箭門)과 옹성(甕城)이 1천 명이니, 합계 40만 3천 7백 55명이다. 매 명당 40일 식량을 싸 가지고 와서 맡은 지역을 나누어 공사에 착수하게 하였는데, 경기는 백악산 동쪽 천(天) 자(字)로부터 진(辰) 자에 이르는 석성(石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3백 97척이고, 토성(土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1천 5백 45척이요, 함길도는 숙(宿)자로부터 열(列) 자에 이르러, 석성(石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1백 44척이고, 토성으로 허물어진 데가 3백 86척이요, 강원도는 열(列) 자의 끝나는 데로부터 내(來) 자에 이르기까지, 석성(石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1백 10척, 토성(土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1천 7백 30척이며, 충청도는 내(來) 자의 끝나는 데로부터 세(歲) 자에 이르기까지, 석성(石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8백 67척이고, 토성(土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4천 3백 89척이며, 전라도는 세(歲) 자의 끝나는 데로부터 여(麗) 자에 이르기까지, 석성(石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5백 70척이고, 토성(土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3천 9백 2척이며, 경상도는 여(麗)자의 끝나는 데로부터 해(海) 자에 이르기가지, 석성(石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2백 60척이고, 토성(土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7천 94척이며, 평안도는 해(海) 자의 끝나는 데로부터 상(翔)자에 이르기까지, 석성(石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6백 26척이고, 토성(土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3천 3백 91척이니, 서전문(西箭門)과 옹성(甕城)이며, 황해도는 상(翔) 자의 끝나는 데로부터 조(弔) 자에 이르기가지, 석성(石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9백 78척이고, 토성(土城)으로 허물어진 데가 2천 98척이다. 각도의 관찰사가 도내의 수륙 방어의 긴급하고 긴급하지 않은 것과, 호구의 많고 적은 것을 작량하여 뽑아 보냈는데, 40일 안에 필역하면 바로 돌려 보내 줄 것이나, 단단하게 쌓지 아니한 자는 감독(監督)과 제조(提調)와 수령(守令) 및 총패(摠牌)와 두목(頭目)이 모두 중죄를 더할 것이며, 만일 고쳐 쌓은 뒤에 무너지게 되면, 처음에 쌓던 관원을 시켜 다시 쌓도록 하소서.” 하니, 태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13권, 세종 3년 10월 29일 무오 6번째기사 1421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3
  • 도성 수축 도감에서 계하기를, “성을 쌓는 군사가 도망하는 자는, 처음 범하면 곤장 1백 대를 치게 하고, 두 번 범하면 참형(斬刑)에 처하게 하소서.” 하니, 태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14권, 세종 3년 12월 24일 계축 3번째기사 1421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3
  • 도성(都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003) 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 【곧 동소문(東小門)】 ,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 【곧 수구문(水口門)】 ,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 【곧 남대문】 ,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 【곧 서소문(西小門)】 ,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今上) 4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 】 -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도 한성부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5
  • 도성(都城)의 수축(修築)을 시작하기에 앞서 삼각산(三角山)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오군문(五軍門)에서 각각 장교(將校)를 보내어 노원(蘆原)과 주암(舟巖) 등지에서 돌을 뜨게 하였다. 그리고 밥을 짓고 기계(機械)에 소용되는 나무는 사산(四山)의 벌레먹은 나무를 베어다 쓰게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신완(申琓)이 기계를 준비하여 8월부터 수축을 시작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경기(京畿) 백성으로 군문(軍門)에 예속된 사람들은 이 역사 때문에 폐농(廢農)하였고, 돌을 운반하는 역사에서는 사상자(死傷者)가 상당히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 숙종실록 39권, 숙종 30년 3월 25일 갑자 3번째기사 1704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7
  •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최석정(崔錫鼎)이 연사(年事)가 흉년이 든 이유로써 우선 도성(都城)의 역사를 중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너진 성을 보수(補修)하는 것은 성을 쌓는 데 비할 것이 아니다. 대개 도성의 일에 논의가 일치(一致)하지 않는데, 비록 정치가 태평할 때일지라도 또한 편안할 때에 위태함을 잊지 않는 방도(方道)가 있어야 하는데, 더구나 오늘과 같은 때이겠는가? 논하는 자는 반드시 강화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말을 하는데, 남한산성은 외롭고 위태하여 외부의 원조를 바라기 어려웠던 것은 병자년의 일로써 또한 증험할 것이며, 강화도는 착실히 보장(保障)할 방비(防備)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해구(海寇)가 만약 온다면 더욱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혹시 사변(事變)이 있게 되면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도성의 수축은 곧 국가의 큰 계획이니, 긴급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임금이 또 말하기를, “임진년의 난리엔 선조(宣祖)께서 내부(內附)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어가(御駕)가 용만(龍灣)에 머무는 데 이르렀지만, 지금은 내부(內附)의 방도(方道)가 없으며, 더구나 인심(人心)과 사세(事勢)가 어찌 한 걸음이라도 옮길 수가 있겠는가? 강화도나 남한산성은 모두 믿을 수 없으니 도성(都城)을 수축하는 것은 실로 이것이 큰 계획인데, 늘 이와 같이 하면 어느 때에 성취되겠는가? 모름지기 착실히 유의(留意)하도록 하라.”하였다. 최석정이 또 〈도성이〉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써 말을 하니,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도성을 굳게 지키는 것은 의리(義理)에 정당(正當)한 것이니, 점차로 다 쌓게 되면 어찌 이루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설령 당초에 이런 의논을 오발(誤發)하였더라도, 그 본심을 구명(究明)한다면 실로 나라를 위하여 낸 것인데 근래에 문득 당론(黨論)을 이룬 것입니다.”하였다. - 숙종실록 43권, 숙종 32년 2월 4일 계사 3번째기사 1706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7
  • 병조가 아뢰기를, “도성의 무너진 곳에 낭청(郞廳) 4명을 파견하여 금화사(禁火司)의 별좌(別坐)와 금군(禁軍) 등을 거느리고 구역을 나누어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지난달 28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9일에 역사를 마쳤습니다. 남소문동(南小門洞) 근처 같은 곳은 성이 무너진 부분으로 인마(人馬)가 통행하여 마치 큰 길과 같았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이 방벽을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뜻이겠습니까. 보기에 몹시 한심하였습니다. 지금은 체성(體城)과 궁가(宮家)가 모두 수축되었으나, 제대로 간수하지 않으면 무뢰배가 임의로 돌을 가져가 얼마 안 가서 도로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인가(人家) 근처는 앞서의 계사대로 한성부로 하여금 사산감역(四山監役)을 인솔하여 성 내외의 인가를 일일이 나누어 맡기게 하고, 두 건의 책자를 만들어 본조와 한성부에 나누어 간직하여 훗날 참고에 대비하도록 전교를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또 체성을 수축하는 곳의 석면에는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감축관(監築官)의 성명을 새기도록 하여 그의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징험할 수 있게 하고, 남소문과 성균관 뒤 숙정문(肅靖門)의 곡성(曲城) 같이 인가와 멀리 떨어진 곳은 평상시의 구규(舊規)대로 군보(軍堡)를 설치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순라돌며 수직하게 하여 범하는 자는 법으로 다스림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54권, 광해 4년 6월 4일 정묘 7번째기사 1612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6
  • 도성의 무너진 곳을 수축하였다. -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9월 15일 임인 4번째기사 1623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6
  •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서울 장안을 지키던 울타리였다. 둘레가 약 18Km나 되며 서울의 4대산인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에 걸쳐 지어졌다. 태조는 한양에 종묘와 사직, 궁궐을 지은 뒤 바로 이 성곽을 세우는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세종, 숙종 등의 왕들이 성곽을 끊임없이 보수하고 정비하도록 하였다. 이 성곽의 공사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이 동원되었고, 이들을 책임지는 지도자들도 함께 올라왔다. 지역별로 맡은 구간의 공사가 끝나면 석성 벽면에 직접 자신의 지역과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1915년 한양도성에 위기가 닥친다. 일제가 근대도시로의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성곽과 성문들을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삼선동과 낙산자락에 걸쳐 있던 성곽이 다행히도 일제의 손길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남아있다. 현재 낙산에 있는 한양도성 성곽은 낙산공원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성곽 벽면에 붙어 지어진 집들은 하나둘 철거되었고, 성곽 위로 펼쳐진 길에는 운동기구가 설치되었으며, 색색의 꽃들이 잘 가꾸어져 있다. 낙산공원에 오르면 한쪽으로는 삼선동이, 한쪽으로는 대학로가 한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요즘은 대학로나 동대문에서 마을버스를 타면 쉽게 올라올 수 있다.
  • 서울성곽의 공식 명칭은 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궁궐과 종묘를 짓고, 태조 5년(1396)부터 성곽을 두르기 시작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인력을 동원하여 성곽을 세웠는데, 부실공사를 막으려고 성벽을 쌓은 돌에 공사를 맡은 담당고을과 담당자의 이름을 새겼다. 숙정문과 혜화문 구역 성곽 돌에는‘강릉江陵’이 새겨져 있어 강원도 관할 구역인 것을 알 수 있다. 숙종 때까지 몇 대에 걸쳐 구간 확장과 보수를 한 성곽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구간이 훼손되었다. 1915년부터 일제는 경성시 구역 개수계획京城市區域改修計劃을 세우고 성문과 성벽을 없애고 길을 내거나 건물을 세웠다. 해방 후 서울 경계가 확장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성곽 바로 밑까지 집이 들어섰다. 성북동 풍치보호림 지대까지 학교를 세우며 성곽을 허물기도 했고, 집과 학교를 지을 때 성벽의 돌을 쓰기도 하였다. 1963년에는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으나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1972년부터 서울시에서 성곽 보수와 개축계획을 세워 성북지구는 1976년 복원 공사를 하였다. 성곽 주변 건물이 일부 헐렸고, 주변에 녹지가 조성되었다. 서울의 북쪽 문인 숙정문肅靖門은 1968년 무장공비가 침투하는 사건으로 그동안 일반인들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2006년 숙정문을 다시 개방하면서 북악산을 따라 성북동으로 들어오는 성곽길이 열렸다. 숙정문을 대신해 북방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던 혜화문은 1929년 전차가 다니며 헐렸다가 1994년 현재 자리에 복원되었다.
  •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 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숭례문 ·흥인지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 광희문은 서울성곽의 사소문 중에 동남방향에 있는 성문이다. 서울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졌으며, 수구문이라고도 불렀다. 속칭 남소문이라고도 한다. 광희문은 1711년에 개축하였으며, 성문 위 문루는 1719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광희문이라는 편액은 이때 써 붙였다. 그후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서문 위 여장은 파괴되었으며, 1976년에 고증을 거쳐 북원하였다. 지금의 광희문은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 성곽과 북정 마을 (상략) 서울 성곽의 원래 명칭은 한양도성이다. 한양도선은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연결하여 궁궐 주위에 쌓은 약 18㎞에 이르는 돌로 만든 성이다. 한양도성에는 모두 네 개의 큰 문(大門)이 있었고, 큰 문과 큰 문 사이에 작은 문 (小門)을 만들어 모두 8개의 문이 있었다. 큰 문은 각각 유교의 핵심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이름을 지었다.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북대문(北大門:북정문)이 그것이다. 다만 북대문인 숙정문은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에 세웠기 때문에 4대 덕목 중 하나인 지(智)를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 성곽은 1395년(태조 5년)에 11만 8천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석성과 토성으로 쌓았으며, 세종 때 모든 구간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오랜 세월 꿋꿋이 견뎌오던 서울성관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일본인들이 도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성곽의 돌을 빼다 집을 짓기도 하고, 건축 자재로 사용하는 바람에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현재의 성곽은 197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서울성곽의 성북동 구간은 1972년에 비로소 복원이 시작되었다. 현재 성북동을 통과하고 있는 성곽은 숙정문에서 혜화문 구간이다. 북정마을은 이 구역의 중간 쯤에 위치한다. 한양도성의 성북동 구간은 다른 구간과 다른 특징이 있다. 다른 구간 대부분은 인가가 밀집한 지역을 지난다. 혹은 숙정문 구역은 인가가 없는 숲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성북동 구간은 자연과 인간이 어울려 있는 구간이다. 숙정문에서 이어진 성곽이 북정마을에 이르면 자연만의 성곽을 버리고 인간과 어울려 이어지다가, 경신고등학교 담이 되어버린 구간에서는 인간만의 구간으로 몸을 바꾼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22-24쪽
  • 성벽은 시작부터 잘려 있다. 새로 지은 혜화문의 왼어깨로부터 뻗어나간 성벽은 새것이 아닌 정말로 옛 것이다. 거대한 장방형 돌의 집합으로 공간을 감아쥐며 기세 좋게 북진하려던 성벽은 채 50미터도 못 가서 평범한 골목길 하나를 만나 쩔쩔맨다. 성벽은 왕복 8차선 간선 도로는 물론 골목길에게도 속수무책이다. 그 골목을 검정 세단 한 대가 유유히 빠져나간다. 혜화문으로부터 혜성교회를 지나 경신고등학교 울타리 끝나는 지점까지, 성북동과 혜화동의 경계를 이루는 한양도성 성벽은 줄곧 이렇게 골목과 자동차와 학교와 무슨무슨 빌라, 맨션의 위세에 눌려 자세를 낮추고 엎드려 전진한다. 마름모꼴의 일본식 축대에 깔려있는 성뿌리, 축대와 담장 사이에 끼어 있는 유난히 큰 성돌들. 그리하여 어느 주택, 어느 도시텃밭의 울타리로 용도가 바뀐 성벽은 행인들의 무심한 시야 바깥에 있다. 흔적도 없이 잘려나간 구간도 숱하다. 그런 곳에서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가며 그 옛날 이 언덕 위에 솟아올라 물결치던 조선 성벽의 아름다운 흐름 하나를 마음에나 그려볼 뿐이다. 1970년대 들어 시작한 한양도성의 복원은 우선 내사산內四山의 산등성이에 걸린 성곽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주택이 밀집한 지역을 가로지르거나 유실된 성벽은 복원할 엄두를 못 냈다. 성북동 구간만이 아니라 신당동, 장충동, 서소문 지역도 상황이 비슷했다. 빽빽하게 자리잡은 건물과 높은 축대를 들어낼 방도가 없었기에 남아 있는 성벽만이라도 파괴되지 않도록 잘 보존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렇게 놔둔 성벽은 주변 건축물과 어우러져 마치 콜라주 기법으로 만든 작품처럼 재미난 골목 경관을 만들어냈다. 방심한 사이 골목 한 구석에서 불쑥 시야에 떠오르는 말 없는 성돌의 무리는 만약 그 유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라면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의 훌륭한 안내자가 되기도 한다. 모가 둥그스름하고 어른 몸통만한 크기로 다듬은 받침돌이나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어 촘촘히 쌓아올린 성벽은 1422년(세종 4)부터 거기에 놓인 것이다. 돌을 반듯한 직육면체로 다듬어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꼭 맞게 쌓은 성벽은 대체로 숙종~순조 연간에 보수한 부분이다. 반듯할수록 시기가 늦다. 그리고 한양도성의 일부는 아니지만 화강암에 시멘트를 부어 마름모꼴로 쌓아올린 축대는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들어온 양식으로 1960~70년대에 쌓은 것이다. 담장의 지음새로 기호화된 600년 세월이 성북동 좁은 골목을 따라 펼쳐진다. 그 골목의 끝에 강릉이 있다. 경신고등학교 뒤편 담장 어느 큼지막한 성돌에 한자로 새겨져 있는 두 글자. 풍설에 깎이어 희미해진 글씨를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높은 산에서 발견한 물고기 화석인양 신기한 눈으로 더듬더듬 판독한다. “야. 강릉이 여기 있네.” 그렇다. 강릉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각자刻字성돌로부터 왼쪽으로 600척(약 180미터) 되는 구간을 강릉에서 온 사람들이 쌓았다. 사정은 이렇다. 세종 3년(1421), 태조 때 축조한 도성이 20년이 지 나 무너지고 헐린 데가 많으므로 도성을 개축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얼마 후 도성수축도감이 만들어지고 둘레 5만 9,500척의 한양도성 전 구간을 석성으로 개축하기로 결정이 났다. 공사기간은 이듬해 음력 1월 15일부터 2월 25일까지 40일. 팔도의 역군 32만 2천여 명을 동시에 불러 모았다. 도성 둘레를 97개 구간으로 나누고 백악 정상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경기도, 함길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황해도 각 군현에 600척씩 공사량을 할당했다. 강릉 사람들은 바람 센 성북동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돌을 져 나르고 깎고 다듬고 쌓아 올렸다. 추위에도 공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부상자와 도망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왕명은 지엄했다. “도성을 수축한 후에 혹시 돌 한 개라도 무너져 떨어지는 것이 있으면, 즉시 그 방면의 감독관으로 하여금 보수하게 하고, 모두 논죄할 것이다.” ― 『세종실록』 세종 4년(1422) 1월 17일 꿈속에서라도 다시 눈 쌓인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오는 일은 없어야 했다. 역군들은 이를 악물고 돌과 싸웠고 마침내 튼튼한 성벽 하나를 이룩했다. ‘이만하면 우리 고을 이름 깊게 새겨도 될 거야.’ 그렇게 새겼다. 江陵 강릉을 지나 경신고등학교를 뒤로 하고 골목을 빠져나오면 이제 그럴싸한 성곽을 만난다. 복원 사업의 결과로 몸통과 성가퀴, 총구멍과 덮개돌까지 완벽하게 갖춘 성곽이 백악 능선을 타고 비상하는 용처럼 치솟는다. 아이들이 ‘만리장성이다!’하고 소리치면 선생님이 ‘저건 한양도성 성곽이란다.’고 다시 알려주는 곳. 성북동 쉼터라고 부르는 이곳에서부터 성곽은 아무 장애물 없이 저 너머 인왕산 자락까지 거침없이 이어진다. 몇 군데 가파른 경사를 만나지만 성곽 위에 조성된 널따란 산책로를 걷는 것도 큰 무리가 없다. 느티나무 그늘이 커서 한여름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 준다. 언제나 고요하고 생기 있는 시간이 거기에 있는 듯하다. 고개를 남쪽으로 돌리면 나뭇잎 사이로 혜화동과 명륜동이 보이고 이정표만 잘 따라간다면 성균관, 창경궁까지도 걸어갈 수 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영차! 들어 올려 아래로 떨어뜨린다는 덮개돌 너머로, 산하나를 온통 크고 작은 지붕으로 뒤덮은 커다란 마을 하나가 따스한 햇볕을 받고 있다. 찰칵, 성북동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1-29쪽
  • 성북동 성곽 주변 102채 건물 철거 방침 표고 70m이상 고지대 건물철거가 4윌 1일부터 시작된다. 이번에 철거될 고지대 건물은 동숭·옥인 「아파트」주변등 총30개 지구 5천 7백 27채 16만 4천 3백 67평이다. 이 가운데 5천 3백 57채의 무허가 건물에는 20만원 씩의 철거보조비가 지급되고 유허가건물 3백 90채에는 보상비로 모두 9억원이 지급되고 있다. 지구별 철거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숭 왕인 「아파트」주=집74 ▲면목1, 2, 3동=1백46채 ▲답십리동산12=1백63채 ▲신당동산34, 37, 432일대=5백86채 ▲옥수동산5의102=1백16채 ▲하왕십리동890=21채 ▲행당동388의395, 산30=3백채 ▲정릉동산1=2백50채 ▲동소문동552=61채 ▲돈암동산11의209일대=1백40채 ▲안암동5가152일대=1백54채 ▲인수동산65=1백5채 ▲성북동성곽주변=1백2채 ▲동소문동616일대=2백채 ▲돈암동산80의 83일대=50채 ▲쌍문1동산27l4일대=21채 ▲미아동산100, 108일대=4백67채 ▲수색동산28, 30일대=6백81채 ▲연희동산117일대=2백채 ▲홍은동산1일대=63채 ▲홍제동=1백17채 ▲사당동산17, 22일대=2백39채 ▲봉천동 산101일대=4백58채 ▲상도동 산75일대=87채 ▲시홍동산91, 100일대=5백48채 ▲치암동산1일대=1백17채 ▲녹번동산1일대=1백83채 ▲신사동산93, 105일대=27채 ▲응암동산7일대=50채 『중앙일보』 1978.03.27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39
  • 성북동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는 서울 한양도성과 북악산으로 둘러 쌓여있으며, 성곽도시 서울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4쪽
  • 수성 절목(守城節目)을 작성하고 호조와 선혜청 및 여러 군문들의 창고를 차례차례 성 안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중략) 드디어 하교하여 절목을 속히 작성하고 성 밖의 창고를 모두 옮기되, 창고를 옮기기 전에 받아들이는 곡물은 성 안의 창고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후 절목이 작성되었다,〈그 절목에 이르기를,〉 1. 오부(五部)의 민호를 각기 가까운 데에 따라 삼영(三營)에 분속시킨다. 1. 삼영(三營)이 나누어 받은 성첩(城堞)은 모두 5정(停)으로 나누어 전(前)·좌(左)·중(中)·우(右)·후(後)의 차례를 정한 다음, 돌에 글자를 새겨 표시를 한다. 【훈전(訓前)·훈좌(訓左)·훈중(訓中)·훈우(訓右)·훈후(訓後)로 표시하고, 금위영 어영청도 이와 같이 한다.】 1. 각 군문이 지킬 성첩을 다섯으로 나누고 만약 1영으로써 지킬 것 같으면 5부(部)를 나누어 5정을 만들고, 1부로 지킬 것 같으면 5사(司)를 나누어 5정을 삼으며, 1사로 지킬 것 같으면 1초(哨)를 나누어 5정을 삼는다. 1. 5부의 각계(各契)는 모두 조그마한 기를 만들되, 훈련도감은 황색, 금위영은 청색, 어영청은 백색으로 하여 아무 부, 아무 계라는 것을 쓰고, 또 훈전·훈좌 등의 글자를 써서 표시를 삼으며, 해당 영이 만들어서 해당 부에 지급하되, 평상시에는 본영에 간직하여 둔다. 1.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매 호(戶)마다 집을 지키는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성을 지키고, 동서(東西) 양반의 현직·전직 및 유생(儒生)·출신(出身)·잡과(雜科)·한산인(牀散人)들까지도 일제히 성첩에 올라가서 힘을 합쳐 성을 지킨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성을 설치하는 목적은 장차 지키자는 것이다. 주현(州縣)의 조그마한 성일지라도 적의 침입을 보고 버리고 갈 수 없는데, 더구나 왕성이겠는가? 그러나 침입의 안팎과 형세의 완급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니, 성을 지킬 것인가의 여부를 어떻게 미리 정할 수 있겠는가? 또한 한양성(漢陽城)이 지키기 어렵다는 논란은 예로부터 있어 온 것이고, 강가에 창고를 설치한 것에 대해 3백 년이 지나는 동안 오늘까지 아무 이의도 없었다. 옛사람들이라고 모두가 겁쟁이이고 꾀가 없었겠는가? 대개 성이란 높고 작으면 형세가 견고하여 안전을 기하기가 쉽고, 평평하고 넓으면 힘이 분산되어 지키기가 어려운 법이다. 강가의 창고는 평상시에는 강가에 사는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생계를 이어왔는데, 난리가 있으면 성 안으로 실어들일 수도 있고 배에다 실어서 아무데로나 보낼 수도 있다. 오부의 백성들로 나누어 지키도록 한다는 데에 있어서는 군자들도 아직 말하지 않은 일이니, 설사 도성을 사수한다 하더라도 적군을 맞아 대응하는 데는 그 형편에 따라 변화가 무궁하고, 또 도성의 백성을 통제하는 것은 단 한 사람의 장수가 수행할 수 있는 일이니 억지로 나눌 필요도 없고 또 미리 나누어 둘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때에 임금이 사업에 뜻을 기울인 나머지 많은 개혁을 시도하여, 관제를 이미 수정하고 방례(邦禮)를 보완하며 법률을 밝히고, 아악(雅樂)을 바로잡았으며, 또 군비에 마음을 두었다. 이에 구성임이 도성을 지킨다는 말로 비위를 맞추고 나섰고, 또 그가 이른바 성을 수축한다는 것도 대개 분장하는 데에나 힘써서, 해묵은 석회가 굳어져서 벗겨지지 않는 곳은 날카로운 쇠끝으로 후벼내어 도색이 수월하게나 할 정도였다. 여러 창고를 헐어버림으로 인하여 삼강(三江)이 텅 비게 되고, 내창(內倉)으로 곡물을 운송하느라 손실이 수없이 많았으며, 두 역사에 따른 경비 또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대신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옳지 못한 처사임을 알면서도 극력 간쟁하여 만류하는 자가 없었으니, 참으로 아는 일이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옛날 양신(良臣)의 의리에 비추어볼 때 부끄러운 노릇이다. 그럼에도 임금은 유독 구성임의 무리와 더불어 국가의 큰 계책을 결정하면서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주역(周易)》 〈이괘(履卦)의 구오(九五)에〉 이르기를, ‘결단코 이행하려 한다. 마음을 곧바르게 가져도 위태하다.[夬履貞厲]’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바르지 못한 것이겠는가? 아! 안타깝다.” - 영조실록 64권, 영조 22년 12월 6일 정묘 3번째기사 1746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8
  •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도성의 여첩(女堞)을 차례로 수축하고 있는데, 어영청(御營廳)의 물력이 다 떨어져 완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종친부(宗親府)에서 가져온 돈 가운데 2,000냥(兩)을 구획(區劃)하여 보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9월 12일 무진 3번째기사 1866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9
  • 이 洞의 서쪽과 남쪽의 경계를 이루는 서울 城廓은 史蹟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성곽은 총 연장 18,127m로서 北岳山, 仁旺山, 南山, 駱山을 잇고 있다. 이 성곽은 태조 이성계가 漢陽에 천도한 지 2년 뒤인 太祖 5년(1396)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간 118,070명을 동원하여 축조하였다. 이 때 2/3이상은 士城으로 쌓았으므로 그 해 여름에 장마로 무너지자 태조는 2차로 9월 1일부터 49일간 79,400명을 동원해서 돌로 쌓고 8개의 門樓를 건축했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서 무너진 곳이 많게 되자 世宗 4년(1422) 1월 15일부터 40일간 322,640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이 당시 872명이 사망했는데 부상자 수효는 알 수 없다. 世宗 때 축성된 도성은 모두 石城으로 자연석이 아닌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쌓은 것이 특색이며, 太祖 때보다 1尺씩 높게 쌓은 외에 城堞을 쌓아 군사들이 전투 때 이 城堞에 의지해 싸울 수 있도록 했다. 또 城 안팎에 I5尺 의 도로를 내어 순찰에 편하도록 하였으므로 都城의 위용은 世宗 때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도성의 관리를 위해 城門都監을 설치하고 右議政을 책임자로 8인의 실무진을 두어 10일마다 1번씩 도성 내외를 순찰하고 보고를 하게 했다. 임진왜란 후 肅宗 30년(1704) 3월 25일부터 수축공사를 하다가 중지하고 이듬해 6월부터 시작하여 숙종 35년(1709) 에 완료했다. 蕭宗 때 수축된 도성의 특색은 上下 모두 약2尺의 方形이고 돌과 돌 사이의 간격이 없이 수직으로 쌓았는데 東大門, 白岳 동쪽, 光熙門 부근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삼선동에서도 간혹 볼 수 있다. 그 후에도 이 성곽은 英祖 때와 高宗 때도 보수공사를 했지만 日帝에 의하여 光武 2년(1898) 10월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여 1915년에 京城市區域改修計劃에 따라 많은 부분이 철거되었다. 이에 1975년부터 서울市에서 서울성곽 복원계획을 세워 총연장 18,127m 중에서 滅失된 6,703m 외에 복원 가능한 11,424m를 1979년까지 단계적으로 복원했다. 이 洞의 남쪽 玉女峰부근의 오똑한 곳은 옛날 軍人의 死刑場으로 쓰였다고 구전되어 온다. 또 惠化門 밖에는 새의 피해를 막기 위해 惠化門 門樓에 鳳凰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에 따라 이 곳에 鳳凰亭이란 정자가 지어졌다고 하며 亭子이름을 따서 鳳凰洞이란 마을 이름도 있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71-772쪽
  • 조선시대 도읍지 한성부의 경계를 둘러 방어를 위해 쌓은 한양도성은 전체 길이 18.6km나 되는 규모이다. 태조5년부터 쌓기 시작하였고, 성 안팎을 오가도록 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4대문), 혜화문·소의문·광희문·창의문(4소문)을 두었다. 성돌에는 공사를 맡은 군현이나 담당자를 새겨 넣었고, 처음 흙으로 쌓았던 평지 구간을 세종 때 돌로 쌓았다. 일제강점기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여 도시가 확장, 개발되며 없어진 구간이 늘어났다. 1963년 사적 제10호로 지정, 1968년 숙정문 구간부터 복원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2011년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처음으로 도성 조축 도감(都城造築都監)을 두어 판사·부판사·사(使)·부사(副使)·판관·녹사 들을 임명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를 정하게 하였다. -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윤9월 13일 갑술 1번째기사 1395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
  • 경상·전라·강원도와 서북면의 안주(安州) 이남과 동북면의 함주(咸州) 이남의 민정(民丁) 11만 8천 70여 명을 징발하여 처음으로 도성을 쌓게 했다. 이미 성터를 측량하여 자호(字號)를 나누어 정하였는데, 백악(白岳)의 동쪽에서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백악의 서쪽으로 조자(弔字)에서 그치게 하였다. 서쪽 산 돌재[石嶺]까지 합해서 땅의 척수가 무릇 5만 9천 5백 척(尺)이요, 6백 척마다 한 자호(字號)를 붙였으니, 모두 97자(字)이며, 한 글자마다 6호(號)로 나누고, 두자(字)마다 감역(監役)을 두고, 판사(判事)·부판사(副判事)는 각 1원(員)을 두고, 사(使)·부사(副使)·판관(判官)은 12원(員)을 두었다. 각도 주군(州郡)의 민호(民戶)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천자(天字)로부터 일자(日字)까지는 동북면이, 월자(月字)에서 한자(寒字)까지는 강원도가, 내자(來字)에서 진자(珍字)까지는 경상도가, 이자(李字)에서 용자(龍字)까지는 전라도가, 사자(師字)에서 조자(弔字)까지는 서북면이 맡게 하였다. 역사를 감독하는 사람이 낮이나 밤을 가리지 않고 시키니, 임금이 날씨가 심히 춥다고 하여 밤의 역사는 못하게 하였다. -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1월 9일 무진 1번째기사 1396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
  • 도성(都城)의 기초를 열었으므로, 백악(白岳)과 5방(方)의 신(神)에게 치제(致祭)하였다. -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1월 9일 무진 2번째기사 1396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
  • 명하여 경기(京畿) 안의 백성을 징발하여 도성(都城)을 수축하게 하였다. -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8월 14일 계사 4번째기사 1397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
  • 침해(侵害)된 고적보존지대(古蹟保存地帶) 성석(城石)무너 축대(築臺)로 경신중고교(儆信中高校), 교사신축(校舍新築)에 무리(無理) 시내 경신(儆信)중고등학교에서 동교의 신축교사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인근의 고적보존지대로 되어잇는 옛 서울 성터의 성돌(城石)을 깨어 축대를 쌓아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문제가 되고 있다. 즉 성북동과 혜화동의 중간선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동교에서는 수개월 전부터 신축교사 건축을 위하여 교지(校地)를 닦기 시작하였는데 그 장소가 옛 서울의 성터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상 그 성터의 일부를 허물어뜨려 경사진 곳을 골라야 하게 되어 있고 또 한쪽 낮은 곳을 축대로 쌓아올려야하게 되어있으므로 많은 석재를 필요로 하여 그 석재의 일부를 성돌(城石)을 부셔서 사용한 것이 최근에 알려져 인근 주민들의 비난을 사고있을뿐더러 관계당국으로부터도 주의를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곳의 옛 성터(城趾)는 국가에서 지정한 고적보존지대로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할 곳인데 이를 허물어 뜨려 하나의 “채석장(採石場)”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여지껏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는 관계당국의 처사에 점차 비판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더욱 동교의 교지마저 풍치보호림(風致保護林)지대로 되어 있다는 곳이라 한다. ◇ 경신중고교장서병호씨담(儆信中高校長徐丙浩氏談)=신성사(新星社)라는 청부업자에 맡겨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그들이 모르고 임의로 채석한 것이다. 학교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즉시중지시키고 또 그 자리를 다시 좋게 만들어 놓을려고 생각하고 있다. ◇ 문교부(文敎部) 조문화(曺文化) 국장담(局長談) 그러한 소식을 듣고 곧 서울시에 공문을 발송하여 진상을 조사보고토록 지시하였는데 아직 정식 회답을 접수치 못하였다. 보고를 접수하는 대로 적절 조치하겠다. 『동아일보』 1955.11.11 기사(뉴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82
  • 태상왕이 병조에 묻기를, “일기가 이와 같이 추우니, 도성(都城)을 수축하는 여러 도(道)의 군인들이 오는 도중에 얼어 죽는 사람이 없겠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여러 도에서 각기 수령(守令)을 보내어 전적으로 맡겨 거느리고 오게 했으므로, 반드시 얼어 죽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상왕이 말하기를, “비록 성을 쌓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어찌 백성들을 얼어 죽게 해서야 되겠느냐?” 하였다. 이에 명하여 지인(知印)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군인을 거느리고 오는 수령에게 타이르기를, “도착할 기일만 생각하지 말고 일기가 춥거든 머물러 유숙하고 땔나무를 준비하며, 일기가 따뜻하거든 그제야 길을 떠날 것이며, 백성 한 사람도 얼어 죽는 자가 없게 하라. 만약 얼어 죽는 사람이 있거든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1월 5일 계해 3번째기사 1422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4
  • 도성(都城)을 수축하는 일로써 목멱산(木覓山)과 백악(白岳)의 산신(山神)에게 제사 지내어 알렸다. -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1월 14일 임신 5번째기사 1422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4
  • 선지하기를, “도성을 수축한 후에 혹시 돌 한 개라도 무너져 떨어지는 것이 있으면, 즉시 그 방면의 감독관으로 하여금 수보(修補)하게 하고, 모두 논죄(論罪)할 것이다.”하였다 -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1월 17일 을해 3번째기사 1422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4
  • 임금이 신궁에 문안하여 군정(軍丁)이 많이 사망한 일을 태상왕에게 아뢰니, 태상왕이 노하여 조말생·이명덕에게 이르기를, “도성을 수축한 군사 중 죽은 자가 매우 많은데, 경들은 어째서 아뢰지않았는가. 지금 다행히 주상의 말로 인하여 이제야 이를 알게 되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이를 알수가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 것과 다름이 있으랴.”고 하니, 말생 등이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였다. 태상왕이 즉시 병조에 명하여 의원(醫員)을 거느리고 성 밑으로 돌아다니면서 병들고 굶주린 사람과 죽어서 매장되지 않은 사람을 두루 찾게 하고, 또 한성부로 하여금 성밖 10리 안에서 찾도록 하였다. -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2월 26일 계축 2번째기사 1422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4
  • 선지하기를, “도성을 수축할 때에, 각도의 군인들 중에 길에서 죽은 사람은 다른 예(例)에 의거하여 호역(戶役)을 면제하고 부물(賻物)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3월 20일 정축 2번째기사 1422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4
  • 성문 도감(城門都監)이 계하기를, “함길도 북청부(北靑)에서 맡아 쌓은 부분인 도성(都城)이 무너졌으니, 청컨대 당초의 북청 감역관(監役官)과 두목(頭目)·총패(摠牌)에게 명령하여 기한 안에 서울에 와서 수축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25권, 세종 6년 8월 5일 정미 3번째기사 1424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4
  • 하윤 등이 아뢰기를, “도성(都城)은 나라의 근본이 되므로 의리상 완고(完固)하게 해야 마땅하니, 청컨대, 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경성수보도감(京城修補都監)을 설치하여,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를 도제조(都提調)로 삼고,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 김한로(金漢老)·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자청(朴子靑)·여칭(呂稱)·여천군(驪川君) 민여익(閔汝翼)·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심온(沈溫)·좌군 총제(左軍摠制) 우희열(禹希烈)·인녕부 윤(人寧府尹) 안노생(安魯生)·전 도관찰사 이귀산(李貴山)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정부에서 아뢰기를, “수축군(修築軍)은 경기에서 1만 2천 명, 충청도에서 2만 2천 명, 경상도에서 2만 7천 명, 전라도에서 2만 4천 명, 강원도에서 5천 명, 풍해도(豊海道)에서 1만 명, 아울러 10만 명을 조발(調發)하여 속히 부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8월 1일 정미 1번째기사 1413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2
  • 도성 수축 도감(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였다.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0월 13일 신미 1번째기사 1416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2
  • 한양도성과 낙산 등은 비밀회의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한양도성의 성벽 인근에서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학생단체나 사회주의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협의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방용모는 1940년 10월 경부터 1941년 6월 경까지 매주 월요일 경성부 성북정 성벽에서 공산주의운동가인 이종갑과 회견하였다. 그리고 경기도 광주 출신의 석혜환은 낙산에서 광주공산당협의회의 비밀회의를 가졌다.
  • 경성(京城) 우리 태조 5년에 돌로 쌓았는데 평양 감사(平壤監司) 조준(趙浚)이 공사를 감독하였다. 세종 4년에 고쳤는데, 주위가 1만 4천 9백 35보로 주척(周尺)으로 재어서 8만 9천 6백 10자요, 높이가 40자 2치이다. 문 8개를 세웠다. 정남쪽 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 정북쪽 문을 숙정문(肅靖門)이라 하는데, 위에 집 지은 것[架屋]이 없으며 닫아둔 채 다니지 않는다. 정동쪽 문을 흥인문(興人門)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밖을 곡성(曲城)으로 둘렀으며 민간에서 동대문이라 부른다. 정서쪽 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하는데, 조일회(曺一會)가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신문(新門)이라 부른다. 동북쪽 문을 혜화문(惠化門)이라 하는데 처음엔 홍화(弘化)라고 이름하였다. 중종 6년(1511)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조이(趙履)가 현판 글씨를 썼다. 민간에서 동소문(東小門)이라 부른다. 서북쪽 문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고, 동남쪽 문을 광희문(光熙門)이라 하는데 민간에서 수구문(水口門)이라 부른다. 서남쪽 문을 소의문(昭義門)이라고 하는데 처음 이름은 소덕(昭德)이다. 장경왕후(章敬王后)께 시호(諡號)를 올린 다음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민간에서 서소문(西小門)이라 부른다. 대개 숭례문ㆍ흥인문ㆍ돈의문ㆍ혜화문이 정문이고 나머지 네 문은 사잇문이다. 예전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어서 광희문 남쪽, 목멱산 봉대(木覓山烽臺) 동쪽에 있었는데, 김안로(金安老)가 제멋대로 닫았다고 하니, 근거할 바가 없다. 숙종 5년(1679)에 다시 설치하자고 의논하다가 곧바로 중단되었다. 또 수문(水門) 2개가 있는데, 흥인문 남쪽에 있는 것이 오간수문(五間水門)이고, 또 그 남쪽 곧 광희문 북쪽이다. 에 있는 것이 이간수문이다. ○ 성의 동서남북을 그 지세의 험하고 평탄함을 헤아려 삼군문(三軍門)에 나누어 맡겨서 훼손되는 대로 수축하게 하였는데, 숙정문 동쪽 가 무사석(舞砂石)에서 돈의문 북쪽 가에 이르기까지 4천 8백 50보는 훈련도감에, 돈의문 북쪽 가 무사석에서 광희문 남쪽 가 남촌(南村) 집 뒤에 이르기까지 5천 42보 반은 금위영에, 광희문 남쪽 가 남촌 집 뒤에서 숙정문 동쪽 가에 이르기까지 5천 42보 반은 어영청에 맡겨서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보살펴 지키게 하고,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은 사산(四山)의 감역(監役) 지금의 참군(參軍) 이 그 산지기를 시켜서 나누어 맡아 살펴보게 하였다. ○ 오래도록 비가 오면 숭례문ㆍ흥인문ㆍ돈의문ㆍ숙정문 네 문에 나가서 영제(禜祭 개기를 비는 제사)를 거행하였다. ○ 영제는 당하(堂下) 3품관이 연 3일간 설행하는데, 그래도 오래도록 개지 않으면 3차에 한하여 또 설행한다. ○ 성문 안에는 월도(月刀)를 꽂는데 영종조(英宗朝)에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시작한 것이다. ○ 영종 무신년(1728)에 이인좌의 여러 역적들을 쳐서 평정하고, 왕이 숭례문에 나가 헌괵례(獻馘禮 적장의 머리를 드리는 예)를 받았다. 계해년(1743)에는 왕이 북교(北郊)에서 비를 빌고 돌아오다가 창의문루에 임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들의 성명을 새겨서 걸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후의 임금으로 하여금 여기를 지나면서 성조(聖祖)의 힘들고 어려웠던 일을 생각하게 하라.” 하였다. ○ 영종 47년(1771)에 성을 나누어 세 군영에 속하게 하였다. 훈국도감의 관내[宇內]는 돈의문에서 동쪽으로 숙정문까지 1천 5백 14타(垜)로 모두 4천 8백 50보이다. 성랑(城廊)이 24개 소(所)이며, 무릇 성랑 근처에는 모두 돌을 높이 쌓았는데, 인왕산(仁王山)은 몹시 험하여 5개 처(處) 80보를 쌓지 않았다. 금위영 관내는 돈의문 북변 무사석에서 광희문 남변까지 1천 5백 42타로 모두 4천 9백 35보인데, 성랑이 24개 소이다. 어영청 관내는 숙정문에서 동쪽으로 광희문 남쪽 표석(標石)까지 1천 5백 98타로 모두 3천 7백 95보이며, 치첩(雉堞)이 6개 처, 성랑이 27개 소이다. ○ 매해 봄ㆍ가을에 병조 판서와 낭청이 공조ㆍ한성부의 당상과 낭청과 함께 두루 다니면서 성첩을 조사하여 무너진 곳은 고쳐 쌓으며, 번갈아 맡은 영문에서 장교를 정하여 군사 20명을 거느리고 파수하기를 궁성(宮城)같이 한다. ○ 도성 7개 문의 자물쇠는 문마다 각각 2개씩인데, 상하면 바꿔서 쓴다. 설성(雪城) 《택리지(擇里誌)》에 이르기를, “한양에 외성(外城)을 쌓으려고 하나 아직 주위의 원근(遠近)을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하룻밤에 눈이 와서 밖은 쌓이고 안은 녹았다. 우리 태조가 크게 이상히 여겨, 명하여 눈을 따라 성 터를 정하였으므로 설성이라고 이름하였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京都)〉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01
  • 구나(驅儺)에 관한 일은 관상감(觀象監)이 이를 주관한다. 제석(除夕)에 악공(樂工) 한 사람이 창사(唱師)가 되어 붉은 옷에 가면(假面)을 쓰고, 방상시(方相氏) 4인이 황금빛 나는 네 개의 눈이 달린 가면에 곰 가죽을 쓰고, 지군(持軍) 5인이 붉은 옷에 화립(畫笠)을 쓰고, 판관(判官) 5인이 연두색 옷에 화립을 쓰고, 조왕신(竈王神) 4인이 청포(靑袍)에 목홀(木笏)을 들고, 초라니[小梅] 몇 사람이 여자 모습의 가면을 쓰고 대가 긴 깃발을 들고, 12신(神)이 각각 자신들의 가면을 쓰는데 예를 들어 자신(子神)은 쥐 모양의 가면을 쓰고 축신(丑神)은 소 모양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또 악공 10여 인이 도열(桃茢 복숭아나무로 만든 지팡이와 갈대 이삭으로 만든 비)을 들고 이들을 따른다. 그리고 아이들 수십 명을 가려 뽑아서 이들에게 붉은 옷에 가면을 씌워서 아이 초라니[侲子]를 만들어서 의식이 끝날 무렵에 징을 울리며 역귀(疫鬼)를 몰아내도록 한다. 섣달의 대나(大儺)는 광화문(光化門)과 도성의 흥인문(興仁門), 숭례문(崇禮門), 돈의문(敦義門), 숙정문(肅靖門)에서 행하는데, 아이 초라니와 방상시의 복색(服色)과 주사(呪辭)는 고려(高麗)의 의식과 같다. 관상감 관원이 나자(儺者)를 거느리고 새벽에 근정문(勤政門) 밖에 나아가면 승지가 역귀를 쫓을 것을 계청한다. 그러면 내정(內庭)으로 들어가서 서로 창화(唱和)하며 사방에다 대고 부르짖기를 마친 뒤 북을 치고 떠들면서 광화문으로 나오는데, 매 대(隊)마다 횃불을 든다. 마침내 사문(四門)의 성곽 밖에 이르면,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이 미리 수탉과 술을 준비하고 있다가 나자가 문을 나오려고 하면 문 가운데에 신석(神席)을 펴고 희생(犧牲)의 가슴을 벽고(疈辜)하여 찢어서 신석의 서쪽에 자리를 깔고 제사를 지낸 뒤, 끝나면 닭과 축문을 땅에 묻는다. 나식(羅湜)의 시에 이르기를, 나례의 북소리가 둥둥 이웃 마을까지 울리며 / 儺鼓鼕鼕動四閭 사방 동서로 쫓아내는 형세가 어지럽구나 / 東驅西逐勢紛如 해마다 너를 들으면 흰머리만 늘어날 뿐 / 年年聞汝徒添白 이 나라 귀신 하나라도 없앤 적이 있더냐 / 海內何曾一鬼除 하였다. 『임하필기』 권16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나례(儺禮)〉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14, No.068
    조선시대 때 한양도성에서 행하던 나례의식에 관한 내용
  • ○ 섣달에 대나(大儺)의 행사를 광화문(光化門) 및 서울 안의 흥인문(興仁門)ㆍ숭례문(崇禮門)ㆍ돈의문(敦義門)ㆍ숙정문(肅靖門)에서 행한다. 관상감(觀象監)이 역귀를 몰아내는 나자(儺者)를 거느리고 새벽에 근정전(勤政殿) 문 밖에 나아가면 승지가 역귀를 몰아낸다고 계청하고 대궐 안 뜰에 들어가서 한 사람이 선창하면 다른 사람이 따라 대답하여 두루 다 마친 뒤에 북을 두드리면서 요란하게 지껄이며 광화문으로 나와 대열마다 횃불을 가지고 사교 밖[四郊外]으로 쫓아냈다. 이때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이 먼저 수탉[雄鷄]과 술을 준비하고 있다가 나자(儺者)가 나올 때에 닭고기를 찢고 술을 부어 제사를 마치고는 땅에 묻는다. 『연려실기술 별집』 권12 「정교전교(政敎典故)」 〈속절(俗節)의 잡희(雜戲)〉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067
    한양도성에서 행해진 제사에 관한 기록
  • 경성(京城)의 8문에서 정남쪽에 있는 문을 숭례문(崇禮門) 속칭 남대문 이라 하고, 정북쪽에 있는 문을 숙청문(肅淸門)이라 하며, 정동쪽에 있는 문을 흥인문(興仁門) 속칭 동대문 이라 하고, 정서쪽에 있는 문을 돈의문(敦義門) 속칭 신문(新門) 이라 하였으며, 그 동북쪽에 있는 문을 혜화문(惠化門) 속칭 동소문 이라 하고,서북쪽에 있는 문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며, 동남쪽에 있는 문을 광희문(光熙門) 속칭 남소문 이라 하고, 서남쪽에 있는 문을 소의문(昭義門) 속칭 서소문 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수구문(水口門)이 있었으니, 소의문과 수구문 이 두 문은 시체를 내보내는 데에 쓰였다. 《지봉유설(芝峯類說)》 『연려실기술』 권1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개국 정도(開國定都)〉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33
  • 이렇게 보면 한양이 천도 후보지로 결정된 것은, 한양이 풍수론적으로 명당인 동시에 교통이 편리하고 방어에 유리하다는 인문지리적 조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한양의 지리적 조건을 이렇게 적고 있다. 북으로 삼각산을 진산으로 삼은 한양 땅은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끌어안은 지세요, 남쪽은 한강으로 띠를 삼고 왼쪽으로 관령이 인접해 있으며 오른쪽으로 발해를 둘렀으니 그 형세가 한반도의 으뜸이다. 과연 산과 강의 지세가 험준하여 다른 곳보다 백 배나 훌륭한 땅이다. 또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6)은 그가 지은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수도 한양의 지세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함경도 안변부의 철령에서 나온 하나의 산줄기가 남쪽으로 오륙백 리를 달리다가 양주에 이르러 여러 작은 산이 되었다. 다시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 만장봉이 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남서쪽을 향해 나아가면서 잠시 끊어진 듯하다가 우뚝 솟아서 삼각산(지금의 북한산으로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를 합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백운대가 되었다. 이곳에서 한 가지가 서남쪽으로 내려가서 만경대가 되었으며, 한 가지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백악산이 되었다. 풍수가들은 이 형국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을 꿰뚫는 목성木星(산 정상이 둥글면서도 우뚝 솟은 산)의 형국이고 궁성의 주산이다. 동쪽과 남쪽 그리고 북쪽의 세 방향으로 모두 큰 강이 둘려 있으며, 서쪽으로 바다의 조수와 통한다. 여러 곳의 큰 강이 모두 모이는 그 사이에 백악산이 서리고 얽혀 있어서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이라 일컫는다.(이중환, 『택리지』, 경기)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31-32쪽
    한양도성의 입지 조건을 설명함
  • 한양도성의 입지를 둘러싸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대립한 이야기도 전해지고있다. 인왕산 서쪽 기슭에 그 모양이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있는 것처럼 보이는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선禪바위’란 이름도 그 모양 때문에 붙은 것이다. 이 바위는 옛 한양도성을 경계로 생각하면 도성 바깥에 있다. 그런데 전설에 따르면 무학대사는 이 바위를 성 안쪽에 두고 싶어했다고 한다. 이 때 정도전이 강력하게 반대하였는데, 그는 태조에게 “이 바위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면 불교가 성할 것이고, 성 밖으로 내보내면 유교가 흥할 것입니다”라며 바위를 성 안에 들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태조가 그의 말을 따르니, 무학대사는 “이후로는 중들이 선비의 책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겠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어느 산을 한양의 주산으로 삼을 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달랐다고 한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산과 남산이 좌청룡 우백호가 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정도전은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쪽을 향하여 앉아[南面] 다스렸다는 이유로, 백악산을 주산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무학대사는 자신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서 반드시 내 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옛적 신라의 의상義湘대사가 예언하기를 “도읍을 선택하는 자가 만약 중의 말을 믿게 되면 오래 갈 것이고, 정씨 성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건다면 5대를 가지 못하여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생길 것이며, 200년이 못가서 나라가 어지러워 질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라며 정도전의 주장을 반박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한양도성의 입지를 두고 대립하는 전설은 훗날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후에 그를 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였을 것이다. 무학대사는 태조의 의견에 따라 한양의 지세가 도읍지로 합당하다 말하면서도, 여러 사람에 의견에 따라 결정할 것을 권할 정도로 자신을 부각시키지 않으려 한 인물이었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인물들이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유학자들이었으므로, 당시 불씨佛氏라 매도되던 승려가 몸을 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정도전에게 저주에 가까운 막말을 퍼부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38-39쪽
  • 한양도성의 축조과정 도성을 짓다 – 태조 시기 한양도성의 축조 태조가 머물 궁궐이 한창 지어지고 있던 태조 4년(1395) 윤9월, 도성 축조를 위한 임시 특별 관청으로 도성축조도감이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성을 쌓을 자리를 정하게 하였으며, 본인이 직접 여러 차례 산에 올라 성을 쌓을 곳을 관찰할 정도로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 토대로 이듬 해인 태조 5년(1396) 정월부터 전국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정해진 구역에 성벽을 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1월 9일에 도성의 주산인 백악산과 오방五方의 여러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도성 축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실록은 이 때 동원된 인부들의 숫자와 성벽의 축조 방법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적고 있다. 먼저 인부는 경상도·전라도·강원도 및 평안도의 안주 이남과 함길도(지금의 함경도)의 함주(지금의 함흥) 이남 지역에서 총 11만 8천 70여 명을 동원하였다. 국방상의 이유에서 평안도와 함경도의 북부 지역에서는 인부를 동원하지 않고, 도성에서 가까운 황해도·경기도·충청도는 차후의 보완 축조 및 수리와 관리를 위한 예비 인력의 동원지로 남겨두었다. 도성축조도감에서 성터를 측량한 결과를 토대로 하여 작업 구역을 배분하였는데, 600척을 한 구역으로 해서 각 구역마다 천자문千字文의 글자를 한 글자씩 할당하였다. 모두 97자가 사용되었는데, 백악산 동쪽의 천天에서 시작하여 백악산 서쪽의 조弔로 끝났다. 전체 둘레가 5만 9천 5백척이었는데 당시에 사용한 영조척營造尺이 한 척에 약 30cm가 좀 넘었으므로 성벽둘레의 길이를 오늘날 사용하는 수치로 환원하면 대략 18km가 된다. 천天부터 일日까지는 함경도, 월月에서 한寒까지는 강원도, 래來에서 진珍까지는 경상도, 이李에서 용龍까지는 전라도, 사師에서 조弔까지는 평안도에서 뽑혀 온 인부들이 담당하게 하였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40-41쪽
  • 감독이 철저한 만큼 축성에 동원된 인부들의 형편 또한 세심하게 고려되고 있었다. 처음 공사가 시작됐을 때는 감독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부들에게 작업을 시켰으나, 태조의 명령으로 야간 작업이 금지되었다. 또한 태조는 추위가 심해지자 “얼어서 죽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니, 이제부터는 바람 불고 눈내리는 날은 역사를 시키지 말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공사 기간이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이라는 단시일 안에 끝나도록 계획된 것도 농번기를 피해 백성들이 입을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 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사가 마무리 되던 2월 27일에는 성문 밖 세 곳에서 수륙재水陸齋를 베풀어 죽은 인부들의 혼령을 위로하고, 그 집의 세금을 3년 동안 면제해 주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41-42쪽
  • 성벽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하였다. 북쪽은 백악산(342m) 정상에서 동서 방향으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 동쪽은 타락산(125m)의 남북으로 뻗은 능선, 남쪽은 목멱산(265m) 정상에서 동서 방향으로 낮아지는 산줄기, 서쪽은 인왕산(338m) 산줄기를 잇는 식으로 성벽을 쌓아나갔다. 높고 험한 곳은 돌로 쌓았는데 높이가 15척(약 4.5m)이었다. 평탄한 산에는 흙으로 쌓았는데 하단 너비가 24척(약 7.8m), 상단 너비가 18척(약 5.4m)에 높이는 25척(약 7.5m)였다. 사람과 물자 및 물길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성문과 수문을 설치했는데, 각각 사방으로 4개씩 큰 문(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흥인지문)과 작은 문(소의문,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을 설치하고, 지대가 낮은 동쪽에는 2개의 수문을 설치하였다. 공사는 농한기가 끝나는 2월 28일까지 마무리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동대문(흥인지문)과 그 부근은 기한 내에 완성되지 못했다. 지대가 낮아 밑에 돌을 포개어 올리고 그 위에 성을 쌓는 작업이 다른 곳 보다 고됐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공사 기간을 10여 일 연장하는 것이 검토되기도 했으나, 민심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동대문은 일단 미완성인 채로 두게 되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42-43쪽
  • 1차 공사에서 축조된 성벽은 기대보다 견고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6월 2일 축성 제조提調였던 이성중李誠中이 성을 쌓은 것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7월에 장마가 들자 성을 쌓은 것이 부실의 이유였다. 7월에 장마가 들자 두 차례에 걸쳐 수구와 옹성이 무너지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태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8월 6일 경상도·전라도·강원도에서 인부 7만 9천 4백 명을 징발하여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1차 공사 때 완성되지 못한 부분을 마무리하게 하였다. 공사는 9월 24일까지 진행되었다. 이 공사에서는 무너진 부분을 개축하고, 미완성이었던 부분을 보완하는 것 외에도 수문을 하나 더 만들고, 4대문과 4소문의 누대를 짓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공사가 계속되어 도성 축조가 시작된 지 3년 만인 태조 7년(1398) 중순에야 작업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43쪽
  • 도성을 고치다 – 세종 시기 한양도성의 개축 한양 도성은 태종의 아들인 세종 때에 와서 다시 한 번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세종 3년(1421) 6월에 든 장마로 도성의 수문이 흙으로 막혀 물난리가 난 일이 있었는데,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진鄭津 등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문 한 곳을 더 개설하자고 요청했다. 또한 8월에는 공조판서 최윤덕崔閏德이 다음 해 봄에 성곽의 허물어진 곳을 수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세종은 최윤덕의 말에 일면동의하면서도 한 번 공사를 시작하면 성을 확장하는 것으로 국론이 정해진 상태이므로 쉽게 공사를 시작할 수 없다는 이유로 허물어진 곳을 급히 막는 것만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그 해 10월 상왕인 태종의 명에 의하여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이 설치되어 도성 개축의 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도성을 개축하는 방법에 대한 회의에서 토성土城 부분을 모두 석성石城으로 고쳐쌓아야 한다는 의견과, 토성이라 하더라도 단단하게 쌓으면 문제가 없고 모두 돌로 고쳐 쌓는다면 인력이 많이 들어 공사 기간이 길어지므로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대립하였고, 절충안으로 모두 돌로 쌓는 것이 좋지만 그럴 수 없다면 외국사신들이 볼 수 있는 사현沙峴으로부터 남산南山까지의 구간 만이라도 돌로 성을 쌓아야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도성수축도감에서 내려진 결론은 전부 돌로 고쳐쌓는 것이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토성으로 된 곳이 허물어진 데가 2만 5천 5백 35척이고, 석성으로 된 곳이 허물어진 데가 3천 9백 46척이었다. 토성부분은 기존에 있던 성곽을 허물고 완전히 새로 쌓아야 하므로 매 척당 15명의 인부를 배당하고, 수리만 하면 되는 석성부분은 이보다 적은 매 척당 5명의 인부를 배당한다고 했을 때, 40만 2천 7백 55명이 필요했다. 여기에 각 구간별로 인원 배분이 상세하게 정리된 보고가 상왕인 태종에게 올라갔고, 그대로 수용되었다. 하지만 처음 성을 쌓을 때 두 차례에 걸쳐 동원된 인원이 20여만 명인데, 개축에 40여 만 명의 인부는 너무 많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10여 만 명을 줄이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함경도에서 동원된 32만 2천 4백명이란 숫자는 전체 길이 23km로 한양 도성보다 규모가 더 컸던 고려 나성羅城 축조 때 동원된 23만 명을 넘는, 우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인부 동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45-46쪽
  • 도성 개축은 세종 4년(1422) 1월 14일에 목멱산과 백악산의 산신山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시작으로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처음 도성을 쌓을 때와 마찬가지로 천자문의 글자가 할당된 구역별로 인부들이 배치되어 작업을 진행했다. 도성 개축이 시작된 이유가 먼젓번에 쌓았던 도성의 절반가량이 무너진 데에 있었으므로, 감독이 한결 엄격해졌으며, 책임소재를 묻는 것도 철저해졌다. 처음 보고된 도성 개축 계획에 “40일 안에 공사를 마치면 바로 돌려보내 줄 것이나, 단단하게 쌓지 아니한 자는 감독 이하의 모두를 중죄로 다스릴 것이며, 만일 고쳐 쌓은 뒤에 무너지면 처음에 쌓던 사람을 시켜 다시 쌓게 할 것”이란 내용이 있었는데, 실제로 2년이 지난 세종 6년(1424)에 함경도 북청부에서 맡아 쌓은 부분의 도성이 무너지자 그곳을 쌓은 사람들이 다시 불려 와서 성벽을 쌓는 일이 있었다. 공사는 예정된 기간이었던 40일을 이틀 단축한 38일 만인 2월 23일에 마무리되었다. 계획대로 성벽은 모두 돌로 쌓았는데 태조 때의 성벽보다 1척 높아졌다. 또한 수문 2칸을 더 설치하여 막힌 것을 통하게 했으며, 서전문西箭門을 헐고 돈의문敦義門을 수리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성벽 전체의 길이가 태조 때의 5만 9천 5백척에서 6만 8백 92척 8촌寸으로 늘었다는 사실이다. 1,392.8척의 성벽이 늘어난 셈인데, 토성 부분을 허물고 돌로 새로 쌓는 과정에서 성벽의 외연이 확장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태조 때와 세종 때 사용한 척도가 달랐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큰 공사를 겨우 38일 동안의 짧은 기간에 완성하였던 만큼 인부들의 고통과 희생은 적지 않았다. 공사 기간에 각 도 군인의 사망자 총 수는 872명에 달하였다. 또한 이번 개축 공사 중에 인부 동원이 너무 많아서 도성에 쌀이 귀해지고, 먼 지방 사람들은 소·말·베 등으로 쌀을 바꾸어 먹어도 굶주려서 병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공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중에 병에 걸려 죽은 사람도 많았다. 세종 때의 도성 개축 이후 작은 규모의 도성 수축은 이따금씩 있었으나 대규모의 수축은 없었다. 18세기 초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도성을 수축하였는데, 숙종 30년(1704)부터 6년간에 걸쳐 대대적인 수축공사가 이루어졌다. 이어서 영조 21년(1745)에는 40여 곳의 무너진 곳과 성벽 위의 여장女墻에 대한 수리 공사와 함께 방어가 취약한 부분에 치성雉城이 축조되었다. 이후 도성의 수축 공사는 19세기를거쳐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기 얼마 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46-48쪽
  •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때의 성벽들을 구분하기 태조 때의 성벽은 자연석을 거칠게 가공하여 쌓은 것이다. 아래쪽에는 넓은 돌을 놓고 위쪽으로 갈수록 작은 돌로 쌓았는데 위로 갈수록 조금씩 들여쌓는 방법을 썼다. 돌과 돌 사이의 틈은 작은 쐐기돌로 메웠다. 돌은 주로 화강암과 편마암 두 종류가 사용되었으며 거의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가져다 썼다. 태조 때의 성벽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남산 지역이다. 세종 때의 성벽은 태조 때의 그것보다 가지런히 정리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석재 가공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아래쪽에는 장방형(직사각형)으로 된 돌을 쌓았는데 좌우상하로 닿는 접촉면을 가능한 한 늘리기 위해 다듬었을 뿐만 아니라, 가로와 세로 방향으로 내밀고 끼워지도록 그랭이 공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랭이 공법이란 인공석을 자연석에 맞추어 깎아 맞물리게 하는 방법을 말한다. 태조 때와 마찬가지로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들여쌓는 공법을 썼고, 석재는 모두 화강암이다. 숙종 때의 성벽은 돌을 한 변이 45cm 정도의 정방형(정사각형)에 가깝게 규격화하여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40~60㎝로 불규칙한 모습이 나타난다. 돌을 다듬어 완전한 정사각형이 아니라 ‘ㄱ’ · ‘ㄴ’자의 형태로 만 든 것도 많이 보이는데, 석재 간의 마찰면을 늘려 성벽을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다. 태조나 세종 때와는 달리 성벽은 거의 수직에 가깝다. 석재의 종류는 세종 때와 마찬가지로 모두 화강암이다. 숙종 때 성벽의 가장 큰 특징인 여장이 여러 곳에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여장이란 성 위로 올려진 낮은 담장을 말하며 ‘성가퀴’라고도 한다. 성밖의 상황을 살피고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현대에 복원된 여장은 모두 이 숙종 때의 성곽에 남아있는 것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기존에는 확연히 구분 가능한 성벽 개축의 시기를 태조, 세종, 숙종 때로 보았다. 하지만 최근의 조사에서 성벽을 쌓은 돌의 크기가 정형화.(가운데 점) 규격화되는 시기가 순조 때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시기 성돌은 한 변이 60㎝내외로 정형화된 모습을 보인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48-50쪽
  • 사대문과 사소문 모든 성은 기본적으로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한 구조물이다. 따라서 모든 성은 안과 밖을 구분하고 있다. 한양도성 역시 적을 막기 위한 구조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16㎢의 넓은 공간을 18㎞가 넘는 긴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양도성은 단 한 번도 방어의 용도로 사용된 적이 없다. 오히려 왕의 통치의 공간을 표시하며, 안팎의 사회·정치적 차별을 정당화 하는 구조물로 역할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성은 완전히 고립된 공간은 아니다. 성의 안팎은 문을 통해 연결되었다. 성문을 통해 사람과 물자가 드나들었다. 특히 한양도성은 지금의 서울과 같이 자급자족을 하는 도시가 아니었다. 지방에서 모여든 물자를 소비하는 ‘소비도시’였다. 그러기에 성의 안팎을 연결해주는 문의 역할을 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한양도성은 처음부터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 총 8개의 문으로 계획되었는데, 그것은 조선이 목덕木德의 나라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목덕을 의미하는 숫자가 바로 8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조 5년 가을에 도성을 쌓는 공사가 끝나 자 인부들을 돌려보내는 기사와 함께 사대문과 사소문의 이름이 등장한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태조실록』권10, 9월 24일 기묘) 위에 보이는 한양도성 사대문의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서 이름을 따서 정도전이 지었다고 전한다. 인의예지는 동서남북 순으로 들어가 있다. 동쪽의 興‘仁’之門, 서쪽의 敦‘義’門, 남쪽의 崇‘禮’門, 북쪽의 숙청문이 그것이다. 북문은 본래 흥지문興智門이나 홍지문弘智門이 되었어야 하는데, 어떤 이유에서 인지 숙청문으로 이름이 정해졌다. 일설에 따르면 지智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是非之心을 의미하는데, 당시 위정자들이 백성들이 똑똑해 지는 것이 싫어 공경하고 깨끗하다는 의미의 숙청肅淸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렇게 한양도성과 함께 만들어진 8개의 문은 시간이 흐르며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많은 이야기들이 남았다. 하지만 남은 이야기들을 알아보기에 앞서 문에 대해 먼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55-57쪽
  • 근대의 유입과 고종시대 한양의 변화 성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성城’이란 글자는 성城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고대에는 도시를, 국가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의 모습과 의미가 변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한 성의 파괴, 변혁 같은 것 정도로만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그 성이 만들어낸 공간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의 삶이 변화해감을 의미한다. 사회가 변화해가고 있는 것이고 국가가 변화하고, 시대가 바뀌어가고 있음을 상징한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축성된 한양도성은 몇 번의 전란과 내란을 겪었지만, 그 높은 성벽과 단단한 성문은 파괴되지 않은 채 왕조와 그 안의 민들을 지키는 역할을 계속 수행해왔다. 하지만 19세기 말, 서양인들이 조선에 찾아오면서 한양도성의 운명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서양인들이 몰려온 것만이 아니었다. 성을 무력화시키는 새로운 무기들이 함께 왔고, 새로운 도시 형태에 대한 압력이 찾아왔다. ‘서구근대’가, 새로운 시대가 조선에 도래한 것이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211-212쪽
  • 일본 제국주의 침투와 한양도성 파괴의 시작 대한제국의 도시 개조 사업 방향이 변화한 결정적 계기는 정치주체의 변화였다. 바로 일본이 러시아와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이었다. 일제는 군사적 위협과 협박 등을 통하여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한 후, 1906년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했다. 명목상으로는 외교권을 통감부가 장악하는 것이었지만, 곧 제반 행정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쳐왔다. 1905년에서 1910년의 보호국 기간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1905년에서 1907년까지는 ‘대내적 이중권력기’를 거치며 통감부와 고종황제가 이중적으로 그 힘을 작동시켰고,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이후에는 통감부의 ‘통치기구 완전 장악’이 이루어졌다. 1907년은 한양도성에 있어서도 중요한 변동을 가져왔다.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는 그 동안 유지되었던 한국 독자적 방식의 도시개조 포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는 서구화된 일본식 도시개조가 대치하게 되었다. 근대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매우 강력하게 ‘구물타파舊物打破’와 ‘문명개화文明開化’를 추구했다. 일본 각지에 있는 봉건영주의 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성곽을 구물舊物로 파악하고 파괴할 대상으로 보며, 성곽 파괴를 추진했다. 1890년대에 이르러서야 일부의 경우를 다시 보존의 대상으로 보고, 파괴한 성곽을 문화재로 이해해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문화재란 언제든 ‘근대화’의 명목으로 제거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것은 이미 기능은 사라졌으며 공원화·사적화·명승지화되었을 뿐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214-216쪽
  • 통감부 치하의 대한제국에 적용된 원칙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성곽 훼철에 대한 주장은 1905년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와 조선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 미치長谷川好道에 의해 제기되었다. 하야시 곤스케는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공문을 보내어 남대문 양쪽의 성벽을 헐어 철거하고 성문을 우회하는 2개의 통로와 또 하나의 대로를 뚫어 통행을 편리하게 하자는 방법을 제안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고종의 강력한 의사에 따라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러한 요구는 계속되었다.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이보다 더 나아간 주장을 했다. “포차砲車 왕래에 지장이 생기니 그런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 버려라”고 말하면서 남대문·동대문 등 한양도성 성문의 완전한 파괴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의외로 일본인 거류민 사이에 서 반대 여론이 나와 더 이상의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들어왔다는 남대문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통과했다는 동대문은 일본인 거류민 입장에서도 보존의 가치가 있다는 논리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 논의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도 남대문·동대문이 서대문·서소문·동소문과 달리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한양도성 본연의 의미로서의 생존이 아니라, 제국 일본적 맥락으로 남대문·동대문의 보존이 결정된 것이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216쪽
  • 일제의 요구에 밀려 성곽 훼철 안건이 상정된 것은 1907년 3월 30일이었다.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이 ‘동대문 남대문 좌우 성첩城堞을 훼철하는 건’을 제안했다. 이때의 논리는 성문에 전차가 다니면서 사람도 붐비고 수레와 말들도 복잡하게 다녀 접촉사고 위험이 크다는 것이었다. 교통운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문 옆의 좌우 성첩城堞을 8칸 씩 헐어버리고 전차가 드나들 선로를 만들고 문은 전적으로 사람만 왕래하도록 하자고 말했다. 결국 고종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성벽 철거가 진행된 것은 그로부터 4개월 뒤 1907년 7월 19일 고종이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황제에서 강제로 물러나고 순종이 새 황제로 등극한 이후였다. 순종 즉위 직후 제3차 일한협약으로 대한제국 내정이 완전히 일본 관리 하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6일 후인 7월 30일 내각령 제1호로 “성벽을 헐어 철거하는 일과 그 밖에 이와 관련된 일체 사무를 처리”하는성벽처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성벽처리위원장에 일본인 기노우치 주시로木內重四郞가 임명되었다. 성벽처리위원회는 10월 16일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의 서울 입성에 대비해 1907년 9월 초순 남대문 북쪽 성벽을 헐어 철거하고, 남대문 앞에 있던 남지南池를 매몰해 버렸다. 남대문의 문루는 그대로 남겨 두고, 좌우성벽을 헐어 폭 8칸의 새길을 내고, 문루 주위를 돌담으로 두른 뒤 돌담 내부에 잔디와 나무를 심고, 그 네 귀퉁이에 석주를 세워 옥玉전등 4개로 장식했다. 조선왕조 500년 넘게 지켜온 금성탕지金城湯池, 매우 견고한 성과 연못)가 일본 황태자를 ‘봉영奉迎’하기 위해 철거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조선왕실을 수호하던 한양성곽이 침략자 일본의 황태자가 방문하는 것으로 인해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실제 황태자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는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남대문 북측의 석단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성벽에 현수막을 쳐서 보기 흉한 부분을 감추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성벽의 훼철이 황태자의 방문을 위해서라기보다 성벽의 파괴 자체가 통감부의 시급한 과제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통감부는 도시의 근대화를 명분으로 성벽을 파괴함으로써 왕성의 권위를 박탈하는 동시에 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음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양도성 밖의 용산 일본인 거류지와 남촌(충무로 일대)의 일본인 거류지를 성벽에 방해 없이 연결하면서, 조선왕조의 수도인 한양을 탈피하고 일본인 중심의 식민지 도시 경성을 건설하는 첫 발걸음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어 1908년 3월부터 남대문의 남쪽 성벽, 그리고 동대문 북쪽의 성벽과 남쪽의 오간수문五間水門이 헐리고 파괴되었으며, 이후 시내 교통상 요지라고 여겨지는 곳들의 성벽이 파괴되어 나갔다. 이로써 1899년 전차선 개통 때에도 유지되었던 조선왕조 방위의 상징인 남대문 동대문 성벽이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이는 조선왕조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과도 같았다. 이렇게 성벽이 파괴 철거되고 남대문 좌우에 도로를 개설하는 공사는 1908년 10월 완성되었으며, 부속공사는 1909년 5월 30일까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길을 남쪽으로 연장하여 남대문역전(현 서울역전)까지 도로 확장 공사를 진행하는 일진회가 남대문 앞에 세운 일본 황태자 환영문(1907)중, 곧 경술년(1910) 8월 29일 한국의 ‘통치권’을 일제에 ‘양여’함으로써 험난한 식민지의 길로 들어섰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216-219쪽
  • 일제강점기 때 벌어졌던 이런 수난들은 해방 이후라고 달라지지는 않았다. 식민지시기를 지나며 고착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계속된 것이다. 게다가 서울이 급격한 도시화를 이루면서 새롭게 정착한 사람들은 성벽 주위에 판자촌을 이루었고, 성석을 건물의 축대로 가져다 쓰거나, 아예 성벽에 붙여 민가를 세우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성석의 무단 이용은 민간만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도 일어났다. 경신중고등학교 교사신축(1955), 남산 국회의사당 건립공사(1959), 남산 자유센터 건립(1964), 퇴계로 연장공사(1966), 남산 종합송신탑 설치(1972)로 한양 도성 성벽 철거는 계속 진행되었고 성석들은 축대로함부로 사용되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때 겨우겨우 살아남았던 광희문을 도로 연장공사를 위해 철거하겠다는 논의가 1962년에 일어나기도 했다. 권력주체가 바뀌어도 그 수난은 계속됐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222-223쪽
  • 한양도성 복원의 기치를 올리다. 도성 복원은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961년 창의문 좌측 성곽 보수, 1962년 숭례문 해체복원에 이어 1963년에는 인왕산 구간 성벽을 정비했고, 1970년에는 창의문을 보수햇으며, 1972년에는 창의문 동쪽에서 백악산 정상까지의 성곽 도 보수하였다. 이렇게 부분적인 정비는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도성 전체를 하나의 문화재로 다루어야 함을 인식하고 계획을 수립하여 보수를 진행한 것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한양도성 복원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관심을 갖고 추진한 사업이었다. 한양도성 복원에 관심갖게 된 것은 1968년 1월 21일 일어났던 1·21사태에서 비롯되었다. 정부는 조상이 물려준 관방官房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것이 국민의식 속에 국가안보정신을 심는데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정권 차원에서 ‘전통문화’와 ‘민족의식’을 강조하면서 이를 통한 총력안보체제를 구축하려던 것이 배경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한양도성 보수 복원 사업 계획은 단순히 한양도성 만을 초점으로 진행한 것이 아니라, 다른 국방 유적 보수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연계되어 진행된 것이었다. 당시 사업은 대통령 지시로 서울시에서 추진했으며, 사업추진단으로 ‘서울성곽 복원사업추진본부’와 ‘서울성곽복원위원회’를 조직했다. 서울성곽복원사업추진본부는 복원사업에 관련된 모든 업무 기능을 합리적으로 조정 통제하고 책임과 체계있는 집행을 기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 제1부시장을 본부장으로 하고 그 아래 성곽복원 담당관, 조경녹지담당관, 도시계획담당관, 건물철거담당관, 도로시설담당관 등을 두어 사업을 추진하고 문제점 해결과 사업을 평가 분석하도록하였다. 서울성곽복원위원회는 시장의 자문에 응하여 서울성곽 복원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하는데 목적을 두고 사학자 언론인 문화재전문가 도시계획전문가 조경전문가 건축토목전문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현재 상태에 대한 조사를 통해, 도성 총 18.627km 중 7.287km가 현존하고 10.094km가 복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문화공보부와 서울시는 도성을 성북지구, 삼선지구, 광희지구, 장충지구, 남산지구, 삼청지구, 청운지구 총 7개 공사 지역으로 나누고 성곽 6.711km의 보수, 성곽 746m 및 여장 6.783km의 복원 계획을 수립했다. 1975년부터 1982년까지 이루어진 대규모 복원공사의 결과 복원된 도성의 총 연장길이는 약 10km에 달했다. 공사에 들어간 총 비용은 55억 5,906만원이었다. 각 지부의 세부내용을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223-225쪽
    한양도성 복원과 관련한 내용 표의 내용은 성북문화원,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성북문화원, 225쪽 <1975~1982년 서울성곽 복원사업 내역> 참고
  • 1970년대 시작된 대규모 복원공사는 여러 가지 효과를 낳았다. 이전까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던 한국사회에서 문화재 행정을 확대시켰다. 한양도성에 인접해 있던 유·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녹지를 조성하면서 도성의 훼손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성곽 복원을 하면서 기존 성곽의 원형을 고증하여 복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여러 측면에서 원형 복원의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이 시기에 행해진 한양도성 보수·복원 사업은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한계점을 지닌다. 문화재 가치 보존보다도 안보의식 고취 목적이 더 강했고, 충분한 원형 고증 없이 비체계적인 복원 절차가 진행되기도 했다. 안보 강화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결과, 인왕산과 백악 구간에는 성벽 복원 시에 성벽 안쪽으로 군 초소를 설치해 복원공사가 오히려 한양도성의 원형을 파괴하고 미학적 역사적 가치를 훼손시켰다. 그리고 문화재 복원을 위해 충분한 사전조사가 필요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사항이었기에, 대통령 지시 이후 겨우 2달 만에 광희문 공사에 착수하고, 삼청지구, 성북지구 등은 3개월 만에 공사를 마치도록 계획했다. 그리고 광희문은 도로 교통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이전 복원되었다. 문화재 보수에 성급하게 콘크리트를 남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한계점들은 1970년대 한양도성 복원이 문화재에 대한 중요성을 되새기며 추진되기보다는 일정하게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데 연유한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지시에 부합해 급박하게 추진되었고, 원형을 복원하기보다는 편의주의적으로 접근한 측면이 많다. 문화재 원형보다는 안보가 앞섰고, 도시의 교통이 앞섰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226-227쪽
  • 현재의 한양도성, 미래의 한양도성 박정희시대의 한양도성 복원공사 이후에도 도성에 대한 복원과 수리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1983년 창의문의 부분 보수가 있었고, 1985년에는 숙정문과 창의문 출입문 수리가 이루어졌다. 1990년대에는 숙정문 지붕과 단청 보수 작업이 있었고, SK빌딩 앞 성벽 95m와 삼청·청운지구 성벽 47m, 인왕산~치마바위에 이르는 인왕산 구간 성곽 100여m가 정비·보수되었다. 그리고 1993년 남산 제3봉수대(서울특별시기념물 제14호) 복원과 1994년 혜화문 복원은 이 시기 행해진 대표적 복원공사였다. 다만 혜화문은 원위치에 이미 도로가 깔려있어 그보다 북쪽 언덕으로 옮겨져 복원된 아쉬움이 있다. 이러한 복원·보수 작업은 2000년대를 넘어서도 계속해서 진행중이다. 2000년대 들어서 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복원에 치중하는 것을 넘어 한양도성에 대한 다양한 발굴조사가 병행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발굴조사의 중심지는 남산과 동대문 일대였다. 이 두 곳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신궁과 동대문운동장을 지으면서 많은 훼손을 당한 지역이었다. 조선신궁과 동대문운동장 모두 사라졌다. 그 둘이 세워지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믿었던 한양도성의 터는 땅 속동대문 디자인 프라자 건립부지내 발굴에 남아 아직 살아 숨쉬고 있었음이 최근의 발굴들에서 드러난 것이다. 한양도성 발굴의 역사는 다음 표와 같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227-229쪽
    표의 내용은 성북문화원,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성북문화원, 229쪽 <한양도성 발굴 연혁> 참고
  • 초기에 이루어진 발굴은 전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발에 따른 구제발굴·구제조사적 성격이 강했다. 아직 본격적이지 않았으며 시굴조사 정도로만 그친 경우도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과가 적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 청계천 유적 발굴조사에서는 오간수문의 수문 바닥석과 홍예 기초석을 확인할 수 있었고, 2008년부터 진행한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 건립부지 내 발굴조사에서는 이 간수문 및 치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치성의 경우에는, 영조대 도성 수축공사에서 동대문~광희문 구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4개의 치성을 설치했는데 그 중 하나의 실체를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에 서울시 산하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남산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으로 남산구간의 발굴 및 복원사업을 추진하면서 기존의 조사보다 기간이 더 길고 정밀한 조사 및 복원이 진행되었다. 그 첫 번째 대상지는 남산 서쪽 자락에 위치한 아동광장과 백범광장 발굴이었다. 이 발굴에서 한양도성 성곽이 땅속에 파묻혀 있던 부분을 발굴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가 한양도성 성벽을 파괴했던 흔적 또한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1939년 조선신궁 진입부에 세웠던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의 기단부였다. 식민지 조선인을 제국 일본의 황국신민화하려고 세웠던 이 비석은 해방 이후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 비석이 올라서있던 자리 아래에는 콘크리트 기저부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양도성 건설과 훼손의 역사가 한 장소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되는 순간이었다. 한양도성은 이제 서울의 랜드마크이자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주말이면 한양도성 순성을 해 서울의 여기저기는 붐비고 있다. 이제 한양도성이 단순히 낡아빠지고 더러워서 버려야할 ‘과거’만을 상징하던 시절은 끝났다. 현재 서울시는 한양도성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준비중이다. 조선의 멸망과 근대의 유입 속에서 갖은 수난을 겪었던 한양도성은 파괴되어야 할 대상에서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발돋음하며 다시 새로운 도약을 준비중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229-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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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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