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
1905.09.22 - 1977.05.23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인, 언론인, 번역가이다. 일본에서 유학 후 교사 생활과 평론 활동을 하였다. 1933년부터 모교인 중동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면서 1940년까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41년 2월 이로 인해 경찰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61년 성북동 168-34(현 성북로10길 30)에 집을 마련했지만, 뇌출혈로 쓰러져 오랜 기간 병석에 있었고 그동안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성북동 집에 대한 애착을 잃고 동소문동을 거쳐 미아동으로 이사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병마와 싸우면서 관념적인 시에서 구체적인 체험을 시로 형상화하는 변화를 보인다. 그의 대표작인 「성북동 비둘기」를 비롯한 「겨울산」, 「산」 등은 성북동 집에서 구상하여 미아동에서 완성한 것이다.
성북동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김광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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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김광섭(4)
  • 김광섭_성북동 비둘기 표지(삼성출판박물관)
  • 자유문학 제3권 제5호 표지(삼성출판박물관)
  • 김광섭 집터(원익스카이빌)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35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68-34 (성북로10길 30)
  • 비고: 김광섭 집터

근거자료 원문

  • 1971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 1월 하순께 서울 서소문에 있던 명지대학교 15층 강당에서 열린 한국문인협회 정기총회는 말 그대로 선거열풍의 도가니였다. 총회가 열리기 한 시간 전부터 투표권을 가진 문인들이 꾸역꾸역 몰려 들었다. 몸이 불편해 동료 문인의 부축을 받으며 입장하는 문인도 있었고, 심지어 <성북동 비둘기>의 원로시인 김광섭은 휠체어를 타고 입장해 장내를 잠시 숙연케 하기도 했다. 정규웅, 2010,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 이가서, pp.228-231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03
  • 김광섭의 집 1. 성북동 168-34 그리고 160W 73rd St, New York - 빛나는 노년 2015년 8월, 오래된 엽서 한 장이 신문에 소개되었다. 화가 김환기(1913-1974)가 시인 김광섭(1905-1977)에게 보낸 엽서가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신문에는 엽서의 앞, 뒷면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앞면, 보내는 사람 김환기의 주소는 160W 73rd St, New York. 미국 뉴욕이었다. 받는 사람 김광섭의 주소는 서울 성북동 168-34. 1966년 1월, 뉴욕 맨해튼에 가있는 김환기가 성북동의 김광섭에게 보낸 엽서였다. 뒷면의 편지글은 김광섭에게 부디 서러워 말고 빨리 건강을 찾아 환희에 찬 싱싱한 시를 써달라는 김환기의 당부였다. 익히 알려진 다른 김환기의 엽서와 달리 아무런 그림이나 장식이 없는데, 이는 얼마 전 김광섭의 모친이 별세한 것을 의식한 까닭이다. 1965년 4월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다 같은 해 10월 노모까지 여의는 변고를 당한 시인을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외로우시겠지. 할 말이 없어요. 빨리 일어나셔요. 빨리 건강을 되찾으세요. 그래서 겨울산에도 가고 술집도 찾고 하게요. 나는 기타 하나와 스케이트 한 벌을 사고 싶어 벼르고 있어요. 이런 것으로 무심 해지는 취향을 갖고 싶어요. 나도 빨리 일어나서 허드슨 강가에나 부지런히 나가고 건강해지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참신한 일을 시작하고 싶어요. 부디 서러워 마시고 빨리 건강해지셔서 환희에 찬 싱싱한 시를 써 주십시오. 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왜 돌아가지 못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럼 부디 안녕― 또 쓸게요. 수화(樹話) 배(拜) (중략)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김광섭 시인이 새로운 모색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김광섭과 김환기, 둘의 인연은 멀리 193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환기가 서울의 문인들과 교분을 트게 된 것은 1938년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있던 문학평론가 이헌구(1905-1982)의 부탁을 받고 함대훈(1906-1949)의 소설집 『폭풍전야』의 표지화를 그려주면서부터다. 김환기는 이헌구를 통해서 서울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게 되었다. 그런데 이헌구의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광섭이었다. 둘은 동갑에 같은 함경북도 출신인데다 김환기도 잠시 다닌 적이 있는 중동학교를 나란히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이헌구는 불문학, 김광섭은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렇게 이헌구라는 다리를 통해 김광섭과 김환기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8년의 나이차를 뛰어넘은 둘의 우정이 평생토록 이어졌음은 앞서 소개한 엽서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1939년 6월에 발행된 문학잡지 『문장』 제5집은 흥미로운 자료인데 여기에는 김환기의 권두화와 김광섭의 대표 시 「마음」이 함께 실렸다. 그림과 시가 하나의 주제 아래 묶인 것은 아니지만 훗날 「저녁에」라는 시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에서 보이는 시인과 화가의 예술적 교류의 싹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김광섭과 김환기 둘 다 성북동에 거주한 때가 있긴 했지만 같은 시기 성북동에서 지낸 적은 없다. 김환기가 성북동에 주소지를 둔 것은 1944년부터 1956년까지, 김광섭은 1961년부터 1966년까지이니 말이다. 하지만 30년을 훌쩍 넘게 이어온 인연이니만큼 서로 주고받은 영향도 적지 않았을 터이다. 감상과 격정을 분방하게 표출하지 않고 논리와 지성의 토대 위에서 절제를 미덕으로 알고 창작활동을 해나갔다는 점에서 장르는 다르지만 둘의 예술적 지향은 통하는 점이 많았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서로의 작품을 가지고 논한 글이 없어 어떤 근거를 대면서 논할 여지는 없다. 다만 두 사람의 작품과 생활 태도를 접하면서 어렴풋한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광섭의 시와 김환기의 그림은 하나의 숙제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작품은 우리 시대 문학과 미술을 아우르는 미학적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1965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김광섭의 투병 생활은 그의 시작詩作 활동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김광섭이 1956년 6월에 동료 문인들과 힘을 모아 창간한 월간 문학잡지 『자유문학』이 1964년 여름,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76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부족한 재정 때문에 매 호 동분서주, 피눈물을 흘려가며 발간해 온 잡지였다. 그의 50대 정열을 이 잡지에 다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대문학』, 『사상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후배 문인들에게 활동할 공간을 주고, 전후 황폐한 문화 풍토 속에서 우리 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자유문학』. 김광섭에게 ‘한국 현대문학의 건설자’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안겨주기까지 했던 이 잡지의 폐간으로 한동안 그는 실의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든 재간해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 무렵 김광섭의 유일한 낙은 야구 구경이었다. 술 한 잔 걸치고 동대문야구장을 찾아 야구를 보다 보면 잠깐이나마 시름을 덜 수 있었다. 1965년 4월 22일 그날도 그는 동료 문인과 함께 동대문야구장에 야구 경기를 보러 갔더랬다. 낮부터 마신 술로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타자가 친 공이 높이 뜬 것을 지켜보는 순간이었는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이었다. 메디컬센터(지금의 국립의료원)의 병상에 있은 지 근 한 달 만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차렸다. 죽을 고비는 넘겼으나 집에 돌아온 그는 반신불수의 상태였다. 하지만 아내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꾸준히 움직이고 걷기 연습을 되풀이한 결과, 몸 상태는 점점 호전되어 갔다. 그렇게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던 때 밤마다 떠오른 시상이 있었는데 마침 한국일보의 청탁을 받게 되자 원고지에 옮겨 쓴 게 바로 「봄」이라는 시다. 꽃은 지난 가을 짧은 해에 어디쯤 갔다가 노루 꼬리만큼씩 길어지는 봄해를 따라 몇 천리나 와서 오늘은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화원을 이루는가 다락에서 묵은 빨래 뭉치를 풀어서 봄빛을 따라 나와 산골짜기에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졸졸 흐르고 시냇가로 간다. ― 김광섭, 「봄」 중에서 아마도 그의 집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성북천과 그 너머 산등성이를 보면서 떠오른 시였을 것이다. 이후 김광섭은 병상에서 하나둘 떠오른 시상을 옮겨 적어 베개맡에 던져두었는데 3년 만에 도합 34편의 시가 쌓이게 되었다. 새로운 시를 발표할 때마다 동료 문인들의 거짓 없는 칭찬과 격려의 말이 답지했다. 뉴욕에서 보내온 김환기의 응원 엽서에 답하기라도하듯 이 시기 김광섭은 ‘싱싱한 시’를 쓰고 있었다. 「봄」을 필두로 「생의 감각」, 「산」, 「황혼이 울고 있다」, 「성북동 비둘기」, 「저녁에」 등이 바로 이 시기에 쓴 시들로 모두 1969년에 발간한 네 번째 시집 『성북동 비둘기』에 실려 있다. 문학평론가 김우창은 그의 네 번째 시집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시집 『성북동 비둘기』에서 시인은 이상과 허무의 고독한 사유자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목소리 드높은 계관시인도 아니다. 그는 자연과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진실에 있으면서 또 가장 일상적인 삶을 사는 평상인 사이에 있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사람과 산과 비둘기가 날로 번창하는 인조물에 밀려 헐벗은 고지대로 쫓겨 가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고난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원초적인 모습의 인간의 삶이 고귀한 것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김광섭 씨의 근년의 시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것은 인간이 하나의 공간적 · 시간적 공동체를 이루며 대지에 산다는 인간의 운명의 고귀함과 신비함에 대한 감각이다. ― 김우창, 「이 달의 시」 중에서 (『동아일보』1974. 12. 18)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다시 대지에 선 시인에게 이 삶을 이루는 시공간은 전과는 다른 빛으로 다가왔다. 새벽마다 새롭게 시작되는 삶은 신비 그 자체였으며 아무리 흔하고 평범한 사물일지라도 다른 모든 것들과의 깊은 연관 속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회복기의 시인은 온몸으로 느꼈다. 고통 속에서 태어난 시어는 쉽고 차분하면서도 삶과 세계의 진실을 말했으므로 함께 고통 받는 1960년대 모든 한국인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고국에서 병을 이겨내며 ‘싱싱한 시’를 써 나가는 김광섭의 모습은 뉴욕의 김환기에게 큰 힘이 되었을 법하다. 김광섭에게 엽서로 보내는 위로와 응원은 어찌 보면 자신에게 향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1960년대 후반, 이 시기에 내놓은 김환기의 그림과 김광섭의 시는 각자의 일생일대에 가장 완성도 있는 작품들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고통이 어떻게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가를 두 원로 예술가들은 작품으로써 당당히 후배 예술가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어쩌면 이 두 예술가들은 굳이 말년의 걸작들을 내놓지 않았더라도, 이미 이루어놓은 업적으로만 점수를 매겨도 한국 미술사와 문학사에서 충분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의 역경을 밑거름 삼아 기어이 자신의 전작들을 뛰어 넘는 새롭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성과들은 고스란히 후배 시인, 화가들의 예술적 자양분이자 넘어서야 할 숙제로 남겨졌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46-255쪽
    원문에는 『자유문학』이 1964년 여름에 폐간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원문의 내용은 김광섭의 자서전 『시와 인생에 대하여』을 근거로 작성한 것으로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진 『자유문학』의 폐간 시점과 차이가 있다.
  • 문인들의 회고에 등장하는 성북동의 풍경에서 집들이 점차 현대적인 꼴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60년대 중반경은 넘어야 했다. 윤이상이 조지훈과 마주보고 즐겼던 성북천이 복개된 것 역시 1967년 이후이다.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는 바로 이 본격적인 회고의 이전 시대를 읊조리는 이야기이다. 김광섭은 1961년 건축가 김중업에게 부탁한 설계대로 집을 짓고 성북동에서 5년을 거처했다. 그리고 이때의 기억을 후일 시집에 실었던 것이 바로 「성북동 비둘기」였던 셈이다. 성북동에 대한 문인들의 정서는 이렇듯 김광섭에 의해 절묘하게 드러났지만, 그것은 또한 당대 문인들이 성북동을 바라보던 시선이기도 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56쪽
  • 특히 1967년 6월 성북동 산 25번지 일대의 숲속 풍치지구 약 10만 평이 대규모 외국인 주택단지로 책정된 것은 그야말로 오늘날 성북동 부촌의 전조를 알린 신호였다. 성북천은 복개되었고, ‘풍치지구’로 개발이 불허되었던 숲의 나무들이 집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북악스카이웨이 공사를 위한 대대적인 공사의 진행이 이루어질 무렵 김광섭이「성북동 비둘기」를 발표했던 것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59쪽
  • 2.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시와 그림의 이중주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1969. 11. 『월간중앙』 제20호 붓다는 열반에 들기 전 유언을 남겨 “이 세상에 난 것이란 죽고야 말며”, “모인 것은 마침내 헤어진다”는 생자필멸生者必滅과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이치를 분명히 해두었지만 이 땅의 시인들은 그 뒤에다 기어코 거자필반去者必返, “떠난 사람은 다시 돌아온다”는 짝말을 붙여 또 한 번 인연의 불씨를 이어나가길 바랐다. 「제망매가」의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그리며 “아으 미타찰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고 한 것이나 「님의 침묵」에서 만해가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고 한 것은 이별의 순간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에서 새로운 희망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결코 아무렇지 않은 체할 수 없었던 우리네 시인들의 인생에 대한 어쩔 도리 없는 사랑 고백이었다. 「저녁에」의 시인 역시 그러한 임박한 이별과 죽음 앞에서 노래하고 있다. 시인이 선 곳은 지도상의 특정 장소라기보다 자신의 삶이 막 바지에 이르렀음을 느끼는 어느 때이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모든 시공간은 저녁에 다름 아니다. 모든 그리운 존재들은 별빛으로 하늘에 박혀 밝아오는 시간의 흐름 속에 사그라져 가고 있었다. 필시 서울의 어느 저물어가는 하늘에 뜬 별이었겠으나 꼭 그러지 않아도 좋았다. 2천여 년 전 붓다가 마지막으로 본 하늘, 1천여 년 전 월명사가 경주에서 본 하늘에서도 무수한 별들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누구는 필멸을 깨닫고 또 누구는 윤회의 끈을 놓지 못했으나 결국엔 누구든 홀로 있음을 느끼며 차가운 고독 속에 몸을 떨었다. 시의 마지막 두 행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는 단조로운 해석을 거부한다. 만해처럼 ‘다시 만날 것을 믿’지도 않고 그렇다고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체념의 어조도 아니다.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만나지 못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만나고 싶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운명을 헤치고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만남은 또 얼마나 기쁠 것인가 하는 기대도 섞여 있다. 헤어지면서 ‘또 만나’하고 상투적으로 던지는 말이 아닌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면서 진짜로 다시 만나고 싶을 때 하는 말이다. 마침내 헤어진다는, 누구나 죽고 만다는 차가운 현실일지나 지금 여기 ‘나’와 ‘너’가 함께 있음에 기뻐할 뿐 미래의 일은 아무래도 어떠랴는 것이다. 이 ‘다시 만나랴’의 미묘하고 풍부한 뉘앙스. 그날 저녁, 육십 평생 험악한 세월을 건너온 시인에게 중요했던 것은 말의 명확한 의미보다는 그저 한없이 잔잔하게 퍼져가는 말의 파동이었을지 모른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56-258쪽
  • 우리 문학유산을 찾아 (20) 김광섭 시인의 서울 성북동 옛집 비둘기 오지않는 「성북동 비둘기」 산실 이른 새벽부터 돌 깨던 채석장도 자취없어 시인이 가슴아파했던 달동네 서민은 아직도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갔다/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성북동 하늘을 한바퀴 휘 돈다…」 (「성북동 비둘기」 중)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를 통해 60년대 개발과 건설의 소용돌이에 시달린 서민의 삶을 따뜻하게 그려난 이산(怡山) 김광섭(金珖燮)(1905~1977)의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 그러나 그에게 경성은 고향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1920년 서울 중앙고보에 들어간 뒤 그의 생활은 서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일본 와세다대(1926~32) 유학시절을 제외하고 평생동안 생활해온 서울은 제 2의 고향을 넘어선 삶의 터전이었다. (중략) 시비(詩碑)나 문학표징하나 없어 뒷산에서 동네 사람들과 심심풀이 화투놀이를 하던 김태수(金泰守)씨(61·성북동)는 『30년전 나도 채석장에서 4년간 일한 적이 있다』며 『당시만 하더라도 산등성이에 채소밭이 많았는데 이제는 모두 집들이 들어섰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일본 유학시절인 28년 이헌구 정인섭 등과 함께 한 해외문학연구회를 통해 문학활동을 시작한 이산은 1935년 「시원(詩院)」에 「고독」을 발표하면서 본격 시작(詩作)활동을 펼쳐왔다. 초기 시집 「동경」 「마음」등이 주지주의적 경향의 관념시를 강하게 보여준다면 후기시집 「성북동 비둘기」 「반응」은 생활 속의 소재를 통해 산업사회의 모순을 드러낸 사회시 경향을 띠고 있다. 폭넓은 주제 및 인간과 사회현실을 따뜻한 시선으로 형상화하며 우리 시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산 김광섭.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를 기리는 시비나 문학표징 하나 남아있지 않다. 이산의 장남 김재옥(金在玉)씨(61)는 『지난 89년 제정돼 실시되고 잇는 이산문학상(문학과지성사주최)이외에는 변변한 기념사업도 벌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며 『여건이 닿으면 아버지의 저작물을 모두 모은 「이산문학전집」을 발간하고 싶다』고 말했다. 조운찬기자 『경향신문』 1996. 9. 8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90
  • 시인 이산(怡山) 김광섭은 1906년 9월 22일 함경북도 경성군에 있는 어대진(漁大津) 송신동(松新洞)이라는 동해 바닷가 어촌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 생계는 한약국을 경영하는 할아버지가 맡아 꾸렸고, 아버지는 유생으로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건너갔다. 그러나 메마른 땅에서 고생만 하다가 일 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집 뒤에 있던 서당에 일본헌병대가 서당 선생을 내쫓고 들어섰다. 칼을 찬 누런 복색을 한 일본 헌병과 애국청년과 독립군이 헌병대의 고문에 못 이겨 지르는 비명 소리는 김광섭의 뇌리에 깊게 남았다. 이 사건은 김광섭이 민족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하여 중동학교를 졸업한 뒤 열여덟 살에 일본에 건너가 도쿄[東京]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에서 공부를 한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귀국하여 모교인 중동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스물일곱 살에는‘극예술 연구회’에 참여하여 서항석, 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과 친분을 쌓는다. 이때부터 신문, 잡지에 시와 평론을 발표했고, 1938년에 첫 시집 『동경』을 냈다. 이후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학생들에게 민족 사상을 고 취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 8개월 동안 사상범으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김광섭은 민중일보 편집국장, 미군정청 공무국장, 초대 이승만대통령 공보비서관, 경희대학교 교수, 세계일보 사장 등을 지냈다.
  • 성북구 성북동 168의 34. 1960년대 5년여 동안 살았던 이곳은 김광섭이 거쳐간 많은 주소지 가운데 유일하게 그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2남 2녀를 둔 김광섭은 커가는 자식들을 위해, 말년생활을 위해 1961년 성북동 산기슭에 집터를 사고 새집을 짓는다. 가파른 바위 언덕위에 자리 잡은 집은 프랑스 유학파 출신으로 한국 건축에서 큰 업적을 남긴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고 지은 집이다. 3m가량 축대를 쌓고 60여 평의 대지에 지은 2층 기와집이다. 이 집은 김광섭의 생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집에 살 때 뇌출혈로 쓰러진 후유증을 앓으면서 대표작인「성북동 비둘기」를 쓴 것이다.
  • 1905-1977 함북 경성 출생. 시인, 언론인, 번역가이다.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교사를 하며 신문, 잡지에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극예술연구회’에서 극작가 서항석, 소설가 모윤숙, 시인 노천명 등과 교류하였다. 첫 시집 『동경』을 내고 활동하던 중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심어준다는 이유로 체포 되어 3년 8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해방 후 민중일보 편집국장, 세계일보 사장, 경희대 교수 등을 지냈다. 문학단체의 임원직과 미군정청 공보국장, 대통령 초대 공보비서관 등 관직에 있으며 선후배 문인들을 여러 모로 도왔다. 1961년 성북동 168-34번지에 땅을 마련해 지은 2층 단독주택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였다.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처음으로 제대로 마련한 집이었지만 이곳에 사는 동안 뇌출혈로 쓰러져 오랜 기간 병석에 있게 된다. 병마와 싸우며 작품세계의 변화를 보여 관념적인 시에서 구체적인 경험과 일상어로 표현한 시를 쓴다.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는 성북동 집에서 착상하여 1969년 발표한 작품이다. 5년 여 동안 살던 성북동 집은 1990년대 말에 다세대주택으로 개발되어 사라졌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9쪽
  • 김광섭(金珖燮) 1905-1977 이산(怡山) 시인·교육자. 함북 경성 출생. 시, 평론, 수필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작품을 발표했다. 시집에 『동경』(1938), 『해바라기』(1957), 『성북동비둘기』(1966) 등이 있다. 중앙문화협회, 한국자유문학가협회 등 문학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 김광섭 시인 별세 40여년 간의 시작활동을 통해 민족정신의 고뇌를 대변해왔던 원로시인 이산 김광섭 씨가 23일 작고했다. 72년여에 걸친 이산의 생애는 한편 다채로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파란만장한 그것이었다. 1905년 9윌 22일 함북 경성군 어대진 읍에서 출생한 그는 32년 일본「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 후 그 이듬해 중동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작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 무렵의 다른 시인들이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추천을 받아 「데뷔」했던 것과는 달리 37년 시집『동경』을 출판함으로써 시인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이산은 그 후부터 저항적인 그의 시 정신 때문에 일제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무렵 그의 시 세계는 다음과 같은 그 자신의 말로 요약된다. 『내 생애의 시발은 바로 우리 민족수난의 시발이었다. 성장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리하여 그것은 자연발생적으로 내 가슴속깊이에서 움터 나왔다. 이것이 내시의 뿌리였다.』 이 같은 그의 강렬한 민족정신은 마침내 41년 그로 하여금 3년8개월에 걸친 형무소생활을 시작하게 한다. 죄목도 조선어 과목폐지반대·동아일보 폐간반대 등을 학생들에게 선동했다는 것.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그가 맞은 8·15해방은 더할 수 없이 감격적인 것이었으나 그것이 곧 민족분단의 비극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문학·사회운동은 보다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45년9윌 중앙문화협회를 결성, 좌익문인에 정면으로 맞선 이산은 그후 언론인(민중일보 편집국장)관리(군정청공보국장·대통령공보비서)교수(신흥대학·이화여대)등 활동의 폭을 넓히면서도 시에 대한 강한 집념을 버리지 못해 주목받은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그의 제2시집『마음』(48년)에서 나타나는바 이 무렵 그의 시 세계는 초기의 그것보다 한결 원숙해져 삶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정취가 깊이 담겨져 있었다. 65년4월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의 갑작스러운 졸도로 회생이 불가능한 듯 보였던 그는 삶에의 의지, 시에의 의지로 죽음의 그림자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빚을 찾았다. 그 후 10여년 동안 발표한 그의 작품들은 원로시인답게 부드러우면서도 다른 한편 강인하고 날카로움을 지닌 문제작들이었던 것이다. 그 자신『대표작이며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말한바 있는 『성북동 비둘기』(69년)는 그의 문학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에 있어서 새로운 획을 긋는 대단한 작품이었다. 외유내강의 전형인 이산은 최근까지도 시작의 정열을 식히지 않았다. 가볍게 산책하는 일 외에는 원고지와 씨름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 얼마 전『나의 시작태도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문학 외적인 일에 너무 치우치다보니 시를 깎고 다듬는데 다소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한 이산-. 그러나 그가 이룩한 문학의 업적은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정규웅 기자> 『중앙일보』 1977. 5. 24.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7쪽
  • ○ 김광섭과 문인교류 「내가 겪은 20세기(22)」, 『경향신문』 1972. 6. 2.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쪽
  • ○ 김광섭과 문인교류 「나래 접은 성북동 비둘기」, 『경향신문』 1977. 5. 24.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쪽
  • ○ 김광섭과 문인교류 「우리 문학유산을 찾아(20)」, 『경향신문』 1996. 9. 8.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 김광섭 주소 : 성북동 168-34 분야 : 문학(시)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 ○ 성북인의 목소리 다섯 김광섭 이별의 노래 - 서대문형무소행 나는야 간다 나의 사랑하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깊은 산 묏골 속에 숨어서 우는 작은 새와도 같이 나는야 간다 푸른 하늘을 눈물로 적시며 알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나는야 간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광복 직전까지 일본의 민족말살통치는 굉장히 가혹했습니다. 일본의 야욕은 커져만 가서 태평양전쟁에 조선인들을 동원시키고 식민지 통치의 당위성을 부각시킵니다. 조선인이 조금만 일본에 반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곧바로 체포해 모진 고문을 가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는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옥살이를 했던 곳이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몸 바친 대가는 처절했습니다. 우리에게 「성북동 비둘기」로 잘 알려진 시인 김광섭 역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죄목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지요. 새벽녘,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 경찰에게 끌려간 그의 좌절과 안타까움이 시 「이별의 노래」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4-105쪽
  • ○ 민족의식을 일깨운 두 사람, 이완기와 김광섭 이완기와 공통분모가 많은 인물이 또 있습니다. 성북동에 거주했다는 점, 중동학교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독립사상을 전파했다는 것이 그 공통점입니다. 바로 시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김광섭입니다. 이완기가 학생 신분으로 독립의 필연성을 이야기했다면 김광섭은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지요. 1933년부터 1940년까지 모교 중동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했던 김광섭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일본의 민족차별정책, 조선어말살정책, 언론 탄압정책 등을 비판하며 민족의식과 독립의 중요성을 일깨웠습니다. 학생들에게 있어 애국지사나 다름없던 영어교사 김광섭은 결국 1941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새벽에 들이닥친 경찰에 체포됩니다. 김광섭은 체포되던 날 자신의 머리맡에는 청탁받은 신간평을 쓰기 위해 놓아둔 이태준의 문고판 단편소설집과 원고지가 놓여있었다고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 적었습니다. 당시 교사로서뿐만 아니라 한국문단의 주요 문인으로서 이태준과 같은 작가들과 교류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944년, 3년 8개월 만에 출소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11쪽
  • ○ 국외가 아닌 국내에, 임시가 아닌 정식의 정부가 수립되다 한편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많은 인물들이 정부수립과 함께 요직을 맡게 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옥살이를 했던 김광섭은 초대 대통령 공보비서관을 맡게 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8쪽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41년-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쪽
  • ○ 해방 이후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김광섭 독립을 꿈꾸던 ‘성북동 비둘기’ 1905-1977 / 애국장 / 성북동 168-34 거주 일본 유학 후 중동중학교에 영어교사로 근무하면서 일본의 민족차별정책, 조선어말살정책, 언론탄압정책 등을 비판하며 학생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잔혹한 고문을 당하며 미결구류 포함 3년 8개월 동안 복역했습니다. 해방 이후 성북동에 거주하며 성북동을 상징하는 그의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를 썼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21쪽
  • 김광섭은 1905년 9월 22일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중동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3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대통령 공보비서, 대한신보사 사장, 경희대 교수, 세계일보사사장 등 공직에 몸담기도 하였다. 김광섭이 성북동 168-34번지에 집을 얻어 생활한 기간은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약 4년간. 그러나 투병 생활에 접어들고 어머니를 여의고부터는 동소문동을 거쳐 미아동으로 이사했다. 1977년 향년 72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성북문화원, 2015, 성북문화 제3호, 87쪽
  • 함경북도 경성(鏡城) 사람이다.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시인(詩人)이 되어 해외문학(海外文學)·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동인으로 시작(詩作)과 함께 해외문학 번역 소개와 신극운동에 참여하였고, 『시원(詩苑)』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유치진(柳致眞)의 작품을 공연하려다가 일제 경찰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3년 4월부터 모교인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에 영어교사로 근무하면서 1940년까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수업시간에도 일제의 민족차별정책, 조선어말살정책, 동아일보(東亞日報)·조선일보(朝鮮日報) 폐간 등 언론탄압정책을 비판하여 학생들의 독립사상을 앙양하였다. 1941년 2월 21일 이로 인하여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1942년 9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107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1153·1178·1182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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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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