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1901.04.18 - 1945.04.25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인물 개인 종교인
정릉동에서 거주한 종교인,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다. 일본 유학 당시 무교회운동을 전개하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아 송두용,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 함석헌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7년 귀국 후 이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하였고, 1930년 5월부터는 주필 겸 발행인으로 단독 간행하였다. 1936년 정릉으로 이사한 그는 『성서조선』의 간행을 이어나가며 무교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의 머리말인 「조와」에 민족 해방을 염원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성서조선』은 폐간되었다. 이후 1944년 7월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입사하여 일하던 중이던 1945년 4월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201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정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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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김교신
  • 김교신_김교신 수필선집 표지
  • 상현
  • 조와(1)
  • 성서조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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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901.04.18 - 1945.04.25
  • 비고: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기록된 생년월일인 1901년 3월 30일은 음력 생일인 1901년 2월 30일의 오기로 추정됨

주소

  • 주소: 02710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378-1 (정릉로19길 19)
  • 비고: 정릉리 378

근거자료 원문

  • 김교신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 378이 본적으로 1922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무교회운동(無敎會運動)을 전개하던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아 함석헌(咸錫憲),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양인성(梁仁性), 유석동(柳錫東) 등과 함께 동경에서 조선성서연구회(朝鮮聖書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27년 7월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유석동 등과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였고, 1930년 5월 제16호부터 혼자서 주필 겸 발행인으로 『성서조선』을 발행하여 무교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 3월호의 권두언에 「조와(弔蛙)」라는 글을 실어 조선민족의 상황을 암시하며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였다가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1945년 4월 병으로 사망하였다.
  • 본적: 함남 함흥 주소: 정릉동 계열과 단체: 국내항일운동 <활동 내용> 김교신은 함흥농업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고, 지리,박물과로 전과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 당시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 기독교의 자주성을 주장하면서 무교회운동(無敎會運動)을 전개하던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유학생이던 함석헌(咸錫憲),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양인성(梁仁性),유석동(柳錫東) 등과 함께 동경에서 조선성서연구회(朝鮮聖書硏究會)를 조직하여 우리말 성경을 읽고 연구하였다. 1927년 7월 송두용,정상훈,양인성,유석동 등과 협의하여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일본 동경에서 창간하였으며, 1930년 5월 제16호부터 혼자서 주필 겸 발행인으로 『성서조선』을 발행하였다. 한편 김교신은 1927년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와 양정중학교, 경기중학교, 그리고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등 주로 민족사학(民族私學)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무교회주의를 실천한 종교인이자 교육자로 평생을 살았다. 김교신이 주필 겸 발행인으로 간행하던 『성서조선』은 1934년부터 폐간되던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로부터 출판물 압수와 출판금지 처분을 10여 차례 받았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강화된 출판법 적용으로 인하여 여러 차례의 출판금지 처분을 받은 『성서조선』은 1942년 3월호의 권두언인 '조와(弔蛙)'에서 조선민족의 소생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폐간을 당하였다. 김교신은 1942년 3월 30일 소위 성서조선사건과 관련하여 함석헌, 정상훈, 송두용 등 12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고, 1년 동안 미결수 상태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3년 3월 29일 석방되었다. 이후 1944년 7월 일본질소비료공장 흥남연료용흥공장[흥남질소비료공장]에 취업하여 조선인 노무자 주택인 서본궁(西本宮) 관리계 계장으로 일하던 중이던 1945년 4월 병으로 사망하였다.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42년-김교신 《성서조선》의 권두언 ‘조와’로 체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쪽
  • ○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김교신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기독교 사상가 1901~1945 / 건국포장 / 정릉동 378-1 거주 성서 중심의 무교회주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한 독립운동가로 1927년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을 창간했습니다. 1942년 《성서조선》의 머리말인 ‘조와’(弔蛙, 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하다)를 실어 해방을 염원하는 민족의 희망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가 체포 후 옥고를 치렀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로도 활동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8쪽
  • ○ 김교신, 혹한에 살아남은 개구리에 우리 민족을 빗대다 손기정과 연관된 독립운동가가 한 명 더 있습니다.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였던 김교신입니다. 사실 그는 손기정의 코치보다는 조선성서 연구회 활동을 바탕으로 성서 중심의 무교회주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고 《성서조선》을 발행한 기독교 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정릉동에 거주한 바 있는 그는 1942년 《성서조선》 3월호 책 머리말에 ‘조와(弔蛙)’라는 글을 실어 1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조와는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의 제목입니다. 조와는 봄비가 쏟아지던 새벽, 기도터의 작은 폭포 밑에서 혹한에 동사한 개구리들을 발견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그는 죽은 개구리들을 묻어주는 한편 혹한을 견디고 살아남아 기어 다니는 두어 마리의 개구리를 목격합니다. 그리고 글 마지막에 ‘아, 전멸을 면했나 보다!’라고 적습니다. 우리 민족이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음을 개구리의 모습을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지요. 결국 이 글로 인해 《성서조선》은 폐간을 당합니다. 옥고를 치른 김교신은 이후 일본질소비료공장에 취업했다가 1945년 광복 직전에 병으로 눈을 감습니다. 한편 금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숙인 채 승리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던 손기정은 해방 이후 안암동 자택에 마라톤합숙소를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95-96쪽
  • 김교신 1901~1945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간 김교신은 1922년 당시 중등학교 교사 양성기관으로 최고 명문이었던 도쿄고등사범학교의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지리‧박물과로 전과했다. 1927년 귀국한 김교신은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8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전근, 이후 12년간 양정학교 교사로 지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은 바로 올림픽 우승 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의 24살 늦깎이 재학생이었다. 김교신은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이자 스승으로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5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손기정의 요청에 따라 자동차로 앞서 달렸다. 훗날 손기정은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직 스승의 눈물만 보고 뛰어 우승할 수 있었다”고 이 날을 회상했다. 1936. 3. 21 (토) 흐린 후 맑음 휴일이어서 전 가족이 시외로 나가 북한산 기슭의 정릉리를 산책하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집을 짓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나 얼음이 녹아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과 한적한 주위의 산과 숲의 매력에 끌려서 드디어 정릉리로 이사를 결정하다. 만일 여기까지도 발전한답시고 환경이 요란하게 된다면 북한산성 안으로 다시 이사할 각오로, 지금은 북한산에서 내려오면서 두 번째 집이다. - 김교신의 일기 김교신은 식민지 지배를 받는 한국인들을 일깨우기 위한 진정한 농촌계몽을 벌이고자 도시의 번잡과 식민당국의 간섭을 벗어나 정릉리로 이사하였다. 김교신의 헌신으로 정릉리 주민들이 최저급 시설에서 최고급 교육을 받게 되었고 정릉리 농촌에서는 서서히 배움의 바람이 불었다. “방해하는 자만 없다면 이 정릉 산기슭에서라도 참교육을 해 보겠다”는 김교신의 뜻은 곧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릉리도 일제의 교육방침을 빗겨 갈 수 없었다. 모든 학교는 오직 일본어만을 사용해야 했고 조선어 교육은 금지되었다. 주민들은 반강제적으로 강습회에 나가 일본어를 배워야 했다. 자연히 발길은 뜸해졌다. 우리가 처음 이사 갔던 사람의 이웃은 거의 초등학교 교육도 못 받은 소박한 경기도 본토박이 농부들이었다. 아버님은 농촌계몽을 위해 김 선생과 최 선생 두 분을 장기가 초빙까지 하셨고, 아버님 자신도 낮에는 동리 교회당에서 가르치고 밤에는 성인들을 모아 야학을 하셨다. 나는 아버님을 따라가서 아버님이 수업을 하시는 것을 직접 보기도 하였다. -셋째 따님 김정혜씨의 증언 교직에서 쫓겨난 김교신은 1944년 7월 함경남도 흥남의 일본질소비료회사에 입사한다. 강제 징용당한 5,000여 한국인 노무자의 생활을 돕기 위해서였다. 노무자들의 교육, 주택, 처우 개선에 노력했던 그는 이곳에서도 야학을 열고 한글을 가르쳤다. 해방을 4개월 앞둔 1945년 4월 25일 발진티푸스로 생을 달리 한다. 공장 일대에 번진 발진티푸스를 막아보고자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환자들의 간호와 계몽에 힘쓰다 같은 병에 전염돼 쓰러진 것이었다. 장례는 평소 김교신을 존경하던 일본인 간부의 주장에 의해 최초로 공장장(工場長)으로 거행되었는데 그의 나이 44세였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132-134쪽
  • 김교신은 함흥농업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고, 지리, 박물과로 전과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 당시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 기독교의 자주성을 주장하면서 무교회운동(無敎會運動)을 전개하던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유학생이던 함석헌(咸錫憲),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양인성(梁仁性),유석동(柳錫東) 등과 함께 동경에서 조선성서연구회(朝鮮聖書硏究會)를 조직하여 우리말 성경을 읽고 연구하였다. 1927년 7월 송두용,정상훈,양인성,유석동 등과 협의하여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일본 동경에서 창간하였으며, 1930년 5월 제16호부터 혼자서 주필 겸 발행인으로 ≪성서조선≫을 발행하였다. 한편 김교신은 1927년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와 양정중학교, 경기중학교, 그리고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등 주로 민족사학(民族私學)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무교회주의를 실천한 종교인이자 교육자로 평생을 살았다. 김교신이 주필 겸 발행인으로 간행하던 ≪성서조선≫은 1934년부터 폐간되던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로부터 출판물 압수와 출판금지 처분을 10여 차례 받았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강화된 출판법 적용으로 인하여 여러 차례의 출판금지 처분을 받은 ≪성서조선≫은 1942년 3월호의 권두언인 '조와(弔蛙)'에서 조선민족의 소생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폐간을 당하였다. 김교신은 1942년 3월 30일 소위 성서조선사건과 관련하여 함석헌, 정상훈, 송두용 등 12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고, 1년 동안 미결수 상태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3년 3월 29일 석방되었다. 이후 1944년 7월 일본질소비료공장 흥남연료용흥공장[흥남질소비료공장]에 취업하여 조선인 노무자 주택인 서본궁(西本宮) 관리계 계장으로 일하던 중이던 1945년 4월 병으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金敎臣(한국신학연구소, 1994년) 171~173면 嘉信(矢內原忠雄, 1945. 9) 제8권 제9호 65면 聖書朝鮮(1942. 3) 第158號 50면 朝鮮出版警察月報(國史編纂委員會) 제64~75호, 제76~99호, 제114~123호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9권(2011년 발간)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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