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1882.01.15 - 1931.04.10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돈암동의 독립운동가이다. 돈암동에 거주하던 김규식은 1907년 군대해산 후 연천 등지에서 허위 등과 함께 의병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유형 15년을 받았다. 이후 만주로 망명, 김좌진 등 독립운동가들과 북로군정서를 조직했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 참가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31년 반대세력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돈암동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김규식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金奎植
  • 이명칭: 노은(芦隱), 서도(瑞道), 호장군(虎將軍)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882.01.15 - 1931.04.10
  • 비고: 사망일(19310323)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 비고: 경성부 동대문구 돈암정

근거자료 원문

  • 양주군 노원면 출신으로 돈암동에 거주하던 노은(蘆隱) 김규식(金奎植, 1882~1931)이다. 김규식은 1903년 1월 대한제국 육군사관학교에 견습생으로 입교하여 수업을 받다가 1904년 3월 동교가 폐교되자 퇴교하였다. 1905년 12월 대한제국의 시위대에 입대하여 1906년 부교(副校)가 되었다. 이후 연성학교(硏成學校)에서 근무하다 1906년 10월 청원퇴영하였다. 이 무렵 돈암동에 거주하던 그는 1907년 음력 6월 전 육군 정위(正尉) 현덕호(玄德鎬)가 주관하던 이현(梨峴) 기독교신흥학교(基督新興學校) 사무를 보았다. 그는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당하자 현덕호와 함께 양주군 동두천에 가서 허위의 부대에 참여하여 마전, 삭녕, 연천, 양주, 철원 등지에서 1년간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 양주군 노원면 출신으로 돈암동에 거주하던 노은(蘆隱) 김규식(金奎植, 1882~1931)은 1907년 군대해산 후 연천 등지에서 허위 등과 함께 의병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유형 15년을 받았다. 1910년 소위 은사감형(恩赦減刑)으로 풀려났다. 1919년 양주군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다가 1920년 8월 내란죄(內亂罪)로 기소되었다. 그는 체포의 손길이 다가오자 1920년 7월 15일 이성규의안내로 서울을 떠나 1920년 8월 북간도 왕청현의 북로군정서에 도착하였다. 북로군정서의 중대장을 거쳐 제2연대 제1대대장에 임명된 그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7일까지 백운평·천수평 등지에서 전개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다. 청산리전투 후 김규식은 노령으로 넘어가 1921년 3월 이만을 거쳐 알렉세프스크(자유시, 현 스보보드니)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홍범도·이청천 등과 대한의용군의 참모부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을 당하여 동지들을 잃는 슬픔을 맛보았다. 이 직후 북만으로 돌아온 김규식은 1922년 말 목릉현(穆陵縣) 마교하(馬橋河)에서 김좌진·이범석 등과 재기를 모색하였다. 얼마 뒤 중국 관헌의 무장해제를 당하고 영안현(永安縣) 영고탑(寧古塔)으로 이동하여 재기를 모색하였고, 이것마저 제지를 당하자 연길현(延吉縣)으로 이동하였다. 1923년 5월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향후의 전투를 대비하여 평소 노동을 하면서 군사훈련을 받는 둔경제(屯耕制)를 실시하였다. 1924년 3월 영안현에서 조직된 대한군정서의 참모로 참여하였고, 동년 5월 고려혁명군이 대한군정서에 통합된 후 대한군정서의 총사령에 선임되었다. 1925년 3월 목릉현에서 북만지역 독립운동단체의 대표자들과 함께 부여족통일회의(夫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고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이후 그는 연수현(延壽縣) 태평촌(太平村)에서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는 신민부가 민정파와 군정파로 분화될 때 민정파에 참여하여 1928년 경 민정파에서 조직한 고려국민당의 군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후반 북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의 민족유일당운동의 결과 정의부 주류를 중심으로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자 그는 이청천·신숙 등과 함께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부위원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3월 주하현 하동농장에 가서 지청천·신숙 등과 연수현에서 운영하던 학교 문제를 논의하려다가 백운봉과 최호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 본적: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사노리 281번지 주소: 경성부 동대문구 돈암정 계열과 단체: 허위의진, 13도의군, 북로군정서 <활동 내용> 1903년 1월 대한제국 육군사관학교의 견습생으로 입교하여 수업을 받다가 1904년 3월 동교가 폐교되자 퇴학당하였다. 1905년 12월 대한제국의 시위대에 입대하여 1906년 副校가 되었다. 이후 硏成學校에서 근무하다 1906년 10월 청원퇴영하였다. 이 무렵 돈암동에 거주하던 그는 1907년 음력 6월 전 육군 정위 玄德鎬가 주관하던 梨峴基督新興學校 사무를 보다가,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현덕호와 함께 양주군 동두천에 가서 허위의 부대에 참여하여 마전, 삭녕, 연천, 양주, 철원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1년 만에 체포된 그는 1908년 8월 경성공소원에서 내란죄로 유형 15년의 형을 받았다. 1920년 7월 15일 서울에 독립군을 모집하러 온 李成奎 및 前부의 洪忠意, 前 參尉 金燦洙·朴亨植과 함께 서울을 떠나 8월 북로군정서에 참여하였다. 북로군정서의 중대장을 거쳐 제2연대 제1대대장에 임명된 그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7일까지 백운평·천수평 등지에서 전개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다. 청산리전투 후 김규식은 노령으로 넘어가 1921년 3월 이만을 거쳐 알렉세프스크(자유시, 현 스보보드니)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홍범도·이청천 등과 대한의용군의 참모부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을 당하여 동지들을 잃는 슬픔을 맛보았다. 이 직후 북만으로 돌아온 김규식은 1922년 말 목릉현(穆陵縣) 마교하(馬橋河)에서 김좌진·이범석 등과 재기를 모색하였다. 얼마 뒤 중국 관헌의 무장해제를 당하고 영안현(永安縣) 영고탑(寧古塔)으로 이동하여 재기를 모색하였고, 이것마저 제지를 당하자 연길현(延吉縣)으로 이동하였다. 1923년 5월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향후의 전투를 대비하여 평소 노동을 하면서 군사훈련을 받는 둔경제(屯耕制)를 실시하였다. 1924년 3월 영안현에서 조직된 대한군정서의 참모로 참여하였고, 동년 5월 고려혁명군이 대한군정서에 통합된 후 대한군정서의 총사령에 선임되었다. 1925년 3월 목릉현에서 북만지역 독립운동단체의 대표자들과 함께 부여족통일회의(夫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고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이후 그는 연수현(延壽縣) 태평촌(太平村)에서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는 신민부가 민정파와 군정파로 분화될 때 민정파에 참여하여 1928년 경 민정파에서 조직한 고려국민당의 군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후반 북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의 민족유일당운동의 결과 정의부 주류를 중심으로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자 그는 이청천·신숙 등과 함께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부위원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3월 주하현 하동농장에 가서 지청천·신숙 등과 연수현에서 운영하던 학교 문제를 논의하려다가 백운봉과 최호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특이사항>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참고문헌>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4, 국가보훈처, 1987, 517-519쪽. 김규식, 「김규식(노은) -만주독립투사의 거목, 암살당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리니』(김영사, 2008), 198-218쪽. 국가보훈처, 『요시찰인명부』, 1996, 112-115쪽. 「판결문」(경성공소원, 1908. 8. 25.)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2년 노은 김규식 의병활동 정리 후 만주로 망명 1923년 노은 김규식 만주에서 고려혁명군 조직 1925년 노은 김규식 만주에서 신민부 활동 1931년 노은 김규식 헤이룽장성에서 반대파에 의해 사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12쪽
  • ○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김규식 독립군의 호랑이 장군 1882~1931 / 독립장 / 돈암동 거주 대한제국 육군의 참위를 지냈으며 1907년 정미7조약 이후 군대가 해산되자 철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차례 일본군을 대파했습니다. 이후 만주로 망명, 김좌진 등 독립운동가들과 북로군정서를 조직했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 참가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31년 반대파에 의해 안타깝게 순국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7쪽
  • ○ 독립군으로 거듭난 김규식과 나중소 오로지 독립만을 열망하며 비슷한 길을 걸었던 서로 닮은 두 사람이 또 있습니다. 경술국치 전후로 항일 의병활동에 있어 큰 활약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노은 김규식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주역 중 한 사람이지요. 대한제국 시위대의 부교(중사계급)를 지내고 육군연성학교에서 근무한 바 있던 그는 1907년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 당하자 의병장 허위(1855~1908)의 부대에 참여,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했고 약 4차례 일본군을 대파했습니다. 이른바 독립군의 호장군, 즉 호랑이장군으로 불렸던 그의 투혼은 1920년대에 더욱 뜨겁게 불타오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32쪽
  • ○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초석을 다지다 만주의 동쪽, 북간도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는데 이 지역에는 북로군정서라는 부대가 있었습니다. 서간도에 서로군정서가 있었다면 북간도에는 대종교를 믿는 단체인 중광단이 후원한 부대 북로군정서가 있었지요. 그리고 북로군정서에 바로 노은 김규식과 나중소가 있었습니다. 앞서 항일 의병투쟁으로, 또 대한제국 진위대의 군인으로 활동했던 두 청년들을 기억하나요? 그들이 만주로 망명해 들어간 부대가 북로군정서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역사의 멋진 기록을 남긴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지요. 1910년대는 간도 지역의 독립 운동가들의 청산리 전투와 같은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교육체계를 갖추고 치밀하게 준비를 하던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74-75쪽
  • ○ 청산리 전투에서 활약한 나중소와 김규식 항일의병투쟁을 주도하다 내란죄로 기소됐던 노은 김규식은 사면 이후 간도로 망명하자마자 북로군정서의 중대장을 거쳐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 임명돼 청산리 전투를 이끕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77쪽
  • ○ 에피소드 여덟-세 명의 김규식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한자까지 이름이 같은 세 사람의 독립운동가가 등장합니다. 일단 성북구의 독립운동가는 노은 김규식입니다. 이른바 만주의 호장군, 즉 호랑이 장군으로 불리며 만주를 호령한 그는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끄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노은 김규식은 1931년 52세의 나이로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독립운동사에는 그 이후에도 김규식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 바로 우사 김규식입니다. 노은 김규식이 총을 든 호랑이로 비유된다면 우사 김규식은 펜을 든 독립지사로 비유되곤 합니다. 우사는 임시정부에서 외무총장, 국무위원, 부주석 등을 역임하며 독립을 위한 탁월한 외교활동가로 활약했습니다. 조소앙,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하기도 했었지요. 마지막 한 사람은 안동 출신으로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던 김규식입니다. 노은 김규식이 북로군정서에서 김좌진과 함께 활약했다면 안동 출신의 김규식은 신민회 출신으로 김동삼과 함께 독립운동건설 및 서로군정서로 활약했습니다. 세 사람 모두 건국훈장이 추서된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들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78쪽
  • ○ 험난했던 두 독립투사의 길, 그리고 창대한 끝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독립군들은 다시 만주로 내려옵니다. 1925년, 독립군들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로 부대를 정비합니다. 나중소는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회 참모부위원장에 임명됩니다. 같은 해 신민부와 정의부의 연합부대에서 간도 일부 지역을 관할하는 서남로향관으로도 활동합니다. 그 와중에 일본은 중국의 만주 군벌과 ‘독립군을 잡아 일본에 넘기면 돈을 주겠다’는 요지의 미쓰야 협정을 체결해 독립군을 끊임없이 탄압합니다. 이로 인해 북간도로 돌아온 김규식 역시 동지들과 재기를 모색하는 와중 중국 관헌의 제지와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는 나중소와 마찬가지로 신민부에 가담해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일본과 중국의 미쓰야 협정에 맞서 3부 통합운동을 전개합니다. 그 결과 북만주 지역의 혁신의회, 남만주 지역의 국민부가 설치되는데 3부를 하나로 통합하지 못한 이유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념 대립 때문이었습니다. 조국해방이라는 같은 목적을 두고도 이념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한 까닭에 1920년대 이후 항일 운동사는 두 가지 갈래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지요. 안타깝게도 김규식은 1931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한 백운봉, 최호 등의 반대세력의 습격으로 서거합니다. 나중소는 이보다 앞선 1928년 지린성 돈화현 산중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순국합니다. 두 사람 모두 해방된 조국을 다시 밟지 못한 채 타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갑작스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이 오로지 조국 독립만을 위해 온 생애를 다 바쳤음을 기록하고, 또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79-80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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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인물
    시기: 조선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