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1861
보물
유물 천문지리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이 보유한 지도이다. 1861년(철종 12)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우리나라 전국지도이다. 축척은 약 16만분의 1로 남북 22층으로 되어 있고, 각 층은 세로 30.2㎝, 가로 20.1㎝ 크기의 8폭으로 접을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목판본이다. 보존상태도 좋고 채색도 훌륭하다. 내용은 기존의 『청구도』와 큰 차이가 없으나 지형의 표시와 하천과 교통로 등이 자세하고 정밀하다. 특히, 산맥의 표시 방법은 이전의 지도들과 많은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의 지도 가운데 가장 정밀한 세밀도로서, 전체적으로는 이전의 지도보다 발전하여 현재의 지도와 근사할 정도로 정확하다. 1985년 8월 9일 보물 제850-1호로 지정되었다.
동선동 돈암동
  • 대동여지도(1)
  • 대동여지도(2)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大東輿地圖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김정호
  • 비고:
  • 유형: 유물 천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02844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3가 249-1 (보문로34다길 2 성신여자대학교)
  • 비고: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보물
  • 지정일: 1985.08.09

근거자료 원문

  • ▫ 보물 제 850 호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 시대 : 조선후기(철종 12년, 1861) 소유자 : 성신여자대학교 소재지 :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 서울 성북구 동선동 3가 249-1 지정연월일 : 1985. 8. 9. 철종 12년(1861)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우리나라 전국지도이다. 목판본으로 축척은 약 1/16만 동서남북 22층으로 되어 있고, 각 층은 세로 30.2cm, 가로 20.1cm 크기의 8폭으로 접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동여지도는 잘 보존되고 채색도 훌륭하다. 각 층을 책의 크기로 접은 판의 크기는 실제거리가 동서 80리, 남북 120리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이 22층을 순서대로 접합하면 세로 7m, 가로 3m에 달하는 커다란 한 장의 한국전도가 되도록 고안되어 있다. 지도에 따로 축척 표시는 되어 있지 않으나 좌표에 방안(方眼)을 그리고 ‘매방 10리(每方十里)’라 표시하여 사실상 축척이 표시된 셈이며, 읍(邑)과 읍 사이의 도로에 10리마다 눈금을 표시하여 거리의 축척을 알기 쉽도록 표시하였다. 서문의 성격을 지닌 <지도유설>에는 지도제작의 경위와 지도의 중요성, 지도의 도법, 지도의 실용 가치에 대하여 서술하고, 끝으로 전국 해안선의 길이와 6대 간선도로의 총길이를 기록하였다. 제도(製圖)의 원리는 <지도유설>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지도와 지지(地誌)의 기원을 서술하고, 그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였다. 이 지도는 ≪청구도≫에서와 같이 중국인 배수(裵秀)의 6개 원칙이 충실히 적용되었다. 그러나 제도 원리는 ≪청구도≫와 같다고 하더라도 그 표현 형식과 내용 등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내용은 ≪청구도≫와 큰 차이가 없으나 지형의 표시와 하천과 교통로 등이 자세하고 정밀하다. 특히, 산맥의 표시 방법은 이전의 지도들과 많은 차이가 있다. ≪청구도≫ 및 이전의 지도들은 산을 연속적으로 표시함으로써 산맥을 표현하였으나, ≪대동여지도≫에서는 산맥을 추상화하여 선과 섬으로 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묘도(墓圖)에 널리 사용되었던 이 방법은 특히 선이 넓고 좁음과 형태로 산의 모양과 크기 및 분수령과 하천 유역을 뚜렷이 파악할 수 있는 점이 특색이다. 이 지형 표시법은 약 45° 각도로 위에서 투영하여 얻을 수 있는 그림자의 모양으로 일종의 산악투영법(山岳投影法)이다. ≪대동여지도≫의 또 다른 특징은 이전의 지도에서 즐겨 사용했던 설명식의 주기를 모두 없애고, 지도의 1층에 범례로서 지도표를 제시하여 지도의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도식화하여 기호로 표시한 점이다. 또한 ≪청구도≫에서는 지도의 여백을 이용하여 호구(戶口)와 전결(田結) 등을 기재하였으나 이 지도에서는 지지적(地誌的) 내용의 기재가 생략되어, 지금까지의 주기를 중시하던 지도의 전통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면모로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을 현재의 지도와 비교하면, 서해안과 해안의 해안선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동북부 지방의 압록강 상류지방, 그리고 동해안의 울진 부근이 현재의 지도와 차이를 나타내며, 위도 상 차이보다 경도 상의 차이가 많다. 이것은 당시 정확한 천문시계가 없었고, 우리나라의 교통로가 남북 방향으로 발달되어 동서방향으로의 도로가 적었으며, 남북으로 발달된 산자 관계로 동서 거리의 측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지도 가운데 가장 정밀한 세밀도로서, 전체적으로는 이전의 지도보다 발전하여 현재의 지도와 근사할 정도로 정확하다. 또한 지도에 표기된 지명의 총수가 1만 2천 개로 행정적인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으며, 역참・진보・성지・고산성・관읍 등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긴요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김정호는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1834) 등의 판각 등을 통하여 서양의 경위도식 지도제작원리를 이해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방안(方眼) 조직을 이용한 전통적인 동양의 지도제작 방법을 기본으로 하면서 동서양의 지도를 참고하고, 간이 측량 및 관측을 통하여 독창적인 지도를 완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도학 상으로는 물론 민족문화에 길이 빛날 걸작을 만든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판목(板木) 중 1매는 숭실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목판본 지도는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필사본은 규장각 도서관 등 여러 곳에 있다. 1936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영인본이 나왔고, 광복 후 2차에 걸쳐 영인되었다. 1980년 경희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에서 축소 영인되었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6, 1989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70-72쪽
  • ⑱ 大東輿地圖 1861년(철종 12) 金正浩가 제작한 分帖折疊式 우리나라 전국지도로, 축적은 약16만분의 1로서 남북 22층으로 되어 있고, 각 층은 세로 30.2㎝, 가로 20.1㎝ 크기의 8폭으로 접을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목판본이다. 보물 제850호가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잘 보존되고 채색도 훌륭하다. 각 층을 책의 크기로 접은 판의 크기는 실제거리가 동서 80리, 남북 120리가 되도록 만든 것인데, 이 22층을 순서대로 접합하면 세로 7m, 가로 3m에 달하는 커다란 한 장의 한국전도가 된다. 지도 첫머리인 제1층에는 좌표와 地圖標, 地圖類說, 서울의 都城圖, 京兆玉部圖 등이 실려 있다. 지도에 따른 축적표시는 되어 있지 않으나, 좌표에 方眼을 그리고 ‘每方十里’라 표시하여 사실상 축적이 표시된 셈이며, 읍과 읍 사이의 도로에 10리마다 눈금을 표시하여 거리와 축적을 알기 쉽도록 표시하였다. 서문의 성격을 지닌 〈지도유설〉에는 지도제작의 경위와 지도의 중요성, 지도의 도법, 지도의 실용가치 등에 대하여 서술하고 끝으로 전국 해안선의 길이와 6대 간선도로의 총길이를 기록하였다. 지도유설에서 김정호는 먼저 地圖와 地誌의 기원을 말하고, 그것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정치·경제·국방·학문연구의 모든 분야에서 地圖와 地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그 편찬목적을 밝혔는데, 지도제작에 있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리는 중국인 裵秀(224∼271년)의 6體가 정확히 측정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그 내용을 보면, ① 分率, 즉 지형의 넓고 둥근 도수를 나누는 것이며 ② 准望, 즉 이곳과 저곳의 형체를 바로잡는 것이며 ③ 道里, 즉 거리의 수를 정하는 것이며 ④ 高下의 측정이며 ⑤ 모나고 비뚤어진 것의 측정이며 ⑥ 둘린 것과 곧은 것의 측정이다. 〈대동여지도〉의 제도원리는 『청구도』와 같다 하더라도 그 표현형식과 내용 등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청구도』에서의 미비점이었던 圖式이나 지점의 명시, 산맥의 표현, 註記 등이 새롭게 바뀌었고, 기업된 내용으로는 산과 산줄기·하천·바다·섬·마을을 비롯하여 역참·창고·營衙·烽燧·陵墓·坊里·牧所·鎭堡·邑治·城址·古山城·古縣·온천·도로 등으로 『청구도』와 큰 차이는 없지만 지형의 표시와 하천·교통로 등이 자세하고 정밀하다. 특히, 산맥의 표시방법은 이전의 지도들과 많은 차이가 있어, 『청구도』나 이전의 지도들은 산을 연속적으로 표시함으로써 산맥을 표현하였는데 『대동여지도』에서는 산맥을 추상화하여 선과 변에서 표시하고 있는 바, 이 방법은 선의 넓고 좁음과 형태로 산의 모양과 크기 및 분수령과 하천유역을 뚜렷이 파악할 수 있는 점이 특색이다. 이 지형표시법은 산지를 약 45°각도로 위에서 투영하여 얻을 수 있는 그림자의 모양으로 일종의 山岳投影法이다. 『대동여지도』의 또 다른 특징은 이전의 지도에서 즐겨 사용하던 설명식의 註記를 모두 없애고 지도의 1층에 범례로서 지도표를 제시하여 지도내용을 간단명료하게 도식화하여 기호식으로 표현한 점으로, 지금까지의 주기를 중시하던 지도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근대적 면모로의 획기적인 진전이다. 지도표의 제시항목은 모두 14개항인데, 각 항목을 다시 1∼3으로 세분하여 전부 23개항을 표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을 현재의 지도와 비교하면,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안선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동북부지방의 압록강 상류지방, 그리고 동해안의 울진 부근이 현재의 지도와 차이를 나타내며, 위도상 차이보다 경도상의 차이가 많다. 이것은 당시 정확한 천문시계가 없었고, 우리나라의 교통로가 남북방향으로 발달되어 동서방향의 도로가 적었으며, 남북으로 발달된 산지관계로 동서거리의 측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지도 가운데 가장 정밀한 세밀도로서, 전체적으로는 이전의 지도보다 발전하여 현재의 지도와 큰사할 정도로 정확하다. 또한 지도에 표기된 지명의 총수가 1만 2천으로 행정적인 내용이나 자료도 풍부하며 역참·진보·성지·고산성·관읍 등 군사적인 측면에도 긴요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김정호는 『地球前後圖』(1834) 의 판각 등을 통하여 서양식의 경위도식 지도제작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방안조직(grid system)을 이용한 전통적인 동양의 지도제작방법을 기본으로 하면서 동서양의 지도를 참고하고, 간이측량 및 관측을 통하여 독창성을 지닌 지도를 완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도학상으로는 물론 민족문화에 깊이 빛나는 걸작을 만든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板本 중 1매가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목판본 지도는 국립중앙도서관에, 필사본은 규장각도서관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1936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축소판 영인본이 나왔고, 광복 후 2차에 걸쳐 영인되었다. 1980년 경희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에서 축소, 영인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76-679쪽
    '축척'이 '축적'으로 오기되어 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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