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9일은 한글날이 575돌을 맞는 날입니다. 이는 한글의 창제를 기념하고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국경일로,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창립된 조선어 연구회에서 1926년 '가갸날'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정하였습니다. 조선어 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요. 이곳 성북구에도 이극로, 최두선, 안재홍, 서승효 등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거나 관계하던 인물들이 있으며, 광복 이후 한글학회 『국어교본』의 편찬위원을 맡았던 조지훈도 성북구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이렇듯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지켜진 한글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문헌을 통해 그 가치를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간송미술관 및 고려대학교에는 국문연구안, 동국정운, 용비어천가, 홍무정운역훈, 훈민정음 해례본 등의 한글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장위동에 묘소가 마련되었던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와 그의 아들 윤용구의 글씨는 한글의 위대함과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우리말과 글 연구를 목적으로 창립된 학술단체이다. 1908년 8월 주시경과 김정진 등이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여 활동하였으나 1917년 활동이 중단되었다. 1921년 12월 임경재, 최두선, 이승규 등이 모여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학회를 재건하고, 1931년 1월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쳤다. 조선어학회는 학문 연구뿐 아니라, 말과 글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일을 실천하였다. 1942년 일제에 의해 학회의 중요 인사가 모두 검거되거나 기소되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인해 학회활동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광복과 함께 활동을 재개하였고, 1949년 9월 5일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한 인사 중 성북구에 거주했던 인물로는 안재홍, 최두선, 이극로 등이 있다.
성북동 관련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에서 유학하였고, 1919년에 중앙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21년 발족한 조선어연구회에 참여하였다. 1925년에 조직된 기독교 계열의 항일운동단체인 흥업구락부 소속으로 활동했는데, 1938년에는 피검되기도 하였다. 이후 제8대 국무총리와 제5대 대한적십자 총재를 역임하였다. 성북 177-30에 거주하였다.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42년 서울에서 이우식 등 지인들에게 조선어학회에 출자하도록 권유하다 체포되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당시 '성북 돈암 산48'(현 동소문로 179-42)에 거주하였다. 현재 집터 추정 장소에는 1965년에 준공된 돈암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국어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편찬 집행위원을 맡았다. 이후에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내며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으며 1948년에 월북하였다. 주요 저서로는「조선어 임자씨의 토」, 「조선어 단어성립의 분계선」, 「짓말에 대하여」 등이 있다. 1929년 결혼 후 약 10년 동안 숭례초등학교 부근인 종암동 40번지에서 거주하였다.
시조시인이자 사학자이다. 1920년대부터 『조선문단』 같은 잡지에서 시, 평론, 수필 등을 발표하였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전통문화와 시조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시조 연구와 시조 창작을 하였는데 이은상의 시조에 김동진, 홍난파, 윤이상 등이 곡을 붙인 「가고파」, 「봄처녀」, 「성불사의 밤」 등 가곡 1백여 곡이 전한다. 『조선사화집』, 『탐라기행한라산』, 『이충무공일대기』, 『노산시조집』, 『푸른 하늘의 뜻은』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1960~1970년대 안암동 104-43번지에서 거주하였다.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사학자, 언론인이다. 그는 1910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11년 9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고, 10월 조선인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였다. 1914년 여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임시정부의 연통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귀국 후 『시대일보』 와 『조선일보』에서 약 10년 동안 언론인 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돈암동 산 11-152번지에서 거주하였다. 미군정기에 민정장관을 역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65년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언론인이자 정치인, 종교인이다. 충청남도 서산출생으로 한학을 수학하다가 상경하여 1907년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1909년 오세창·장효근이 『대한민보』를 창간할 때 논설기자로 민중계몽과 국민지식계발에 힘썼다. 1910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월보』의 주필 및 발행인으로 언론을 통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신문』 주필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3년간 투옥하였다. 1930년대 성북리(현 성북동)에 거주하였는데 1938년 ‘무인멸왜기도사건’ 이후 천도교 구파가 일제에 타협하였을 때 친일적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제헌 국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제2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당시 납북되어 납북 중 사망하였다.
시인이자 학자, 교육가이다. 1939년 『문장』에 시 「고풍의상」과 「승무」, 1940년에 「봉황수」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해방 후 성북동에 한옥을 마련하여 ‘방우산장’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근처에 살고 있던 김기창, 김환기, 윤이상 등과 교류했다. 그는 방우산장에서 박목월, 박두진과 모여 의견을 나누며 『청록집』을 간행하였는데 이 책의 장정은 김용준이 맡았다. 그의 작품은 민족정서와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활동 후기에는 혼란한 현실 정치를 비판하며 『지조론』(1962)과 같은 산문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왕족이다. 조선 23대 왕 순조의 셋째 딸로, 어머니는 순원왕후이다. 1829년(순조 29)에 덕온이라는 작호를 받았으며, 조선의 마지막 공주로 알려져 있다(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딸이 있었으나 정식 공주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다). 1837년(헌종 3) 윤의선에게 하가하였다. 1844년(헌종 10) 5월 24일 헌종의 계비를 간택하는 행사에 참여했다가 급체로 죽었다. 묘소는 현재의 장위동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덕온공주의 묘 봉표(封標, 봉분을 하고 표를 세움)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데 사방의 경계표가 서로 명덕동에 이르고, 동으로 장위리(長位里)에 이르며, 남으로는 외백호 산등성마루에, 북으로는 동안평에 이르러 경계가 맞닿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문헌이다. 1907년 9월 16일 국문연구소의 제1회 회의 이후 1909년 3월 3일까지 연구소의 문제 토의 과정에서 위원들이 제출한 원고를 등사하여 다시 연구 위원들에게 배포한 것을 7책으로 묶은 것이다. 마지막 보고서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문서가 수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위원의 의견과 그와 관련된 이론도 전개되어 있어, 당시 연구소의 활동을 보여 주는 산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국어 정책론사의 기본 자료로서, 또한 영성한 개화기 국어학사의 자료로서 매우 귀중하다. 2012년 12월 24일 등록문화재 제527호로 지정되었다.
간송미술관이 보유한 문헌이다. 조선 세종 때 신숙주・최항・박팽년 등이 왕명으로 1448년(세종 30)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韻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현재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 『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1호로 지정되었다.
고려대학교 만송문고에 소장된 문헌이다. 이 책은 1447년 초간본으로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및 보물로 지정된 역사박물관 소장본, 계명대 소장본과 같은 판본이다. 특히 권7은 유일본이고 권8은 지정된 계명대본보다 보존상태가 좋다. 지질이나 인쇄 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각 책의 전체 내용이 비교적 잘 남아있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 손색이 없다. 용비어천가는 한글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문헌이다. 125장의 한글가사는 한글 사용의 가장 오래된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주해 속에 나오는 고유명사, 관직명의 한글 표기는 국어사 연구에서도 소중한 가치를 가진다. 2009년 10월 20일 보물 제1463-4호로 지정되었다.
고려대학교가 소유하고 있는 조선 초기 간행된 문헌이다. 한자의 중국음을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편찬한 중국음에 대한 한글 주음운서이다. 총 16권 8책, 낙질 1, 2권 1책, 현전 14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글과 한자 큰 글자는 목활자를 사용하고, 작은 글자는 갑인자(甲寅字)로 간행되었으며 이것이 현존 유일판본이다. 이 책은 당초의 목적과 달리 표준음으로서의 가치보다 오히려 자료로서의 큰 가치를 가진다. 한자음의 전통적인 표시방법은 반절이나 운도(韻圖) 등에 의지하는데, 이들은 한글 표기의 정확성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에 그런 측면에서 더욱 한글 표기상의 훌륭한 자료가 된다. 1965년 4월 1일 보물 제417호로 지정되었다.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헌이다. 1446년(세종 28)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으로 훈민정음을 설명한 한문 해설서이다. 훈민정음 해례(解例)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부른다. 총 33장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 싣고 있다. 외국에서도 자국어를 위한 새 글자를 제정한 일은 있지만 『훈민정음』과 같은 서적을 펴낸 일은 없다. 따라서 이 책은 어문학뿐만 아니라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국문연구안 사진이다. 국문연구안은 1907년 9월 16일 국문연구소의 제1회 회의 이후 1909년 3월 3일까지 연구소의 문제 토의 과정에서 위원들이 제출한 원고를 등사하여 다시 연구 위원들에게 배포한 것을 7책으로 묶은 것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소장 중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국문연구안 사진이다. 국문연구안은 1907년 9월 16일 국문연구소의 제1회 회의 이후 1909년 3월 3일까지 연구소의 문제 토의 과정에서 위원들이 제출한 원고를 등사하여 다시 연구 위원들에게 배포한 것을 7책으로 묶은 것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소장 중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국문연구안 사진이다. 국문연구안은 1907년 9월 16일 국문연구소의 제1회 회의 이후 1909년 3월 3일까지 연구소의 문제 토의 과정에서 위원들이 제출한 원고를 등사하여 다시 연구 위원들에게 배포한 것을 7책으로 묶은 것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소장 중이다.
덕온공주가 한글로 풀어 쓴 아버지 순조의 자경전기
자경뎐긔 | 慈慶殿記
순조純祖(1790-1834) 지음, 19세기, 32×528cm
덕온공주德溫公主(1822-1844)가 어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1789-1857)의 명으로, 아버지 순조純祖(1790-1834)의 『자경전기慈慶殿記』에 토를 달아 한글로 쓰고 이어서 번역문을 적은 자료이다. 끝에 있는 윤백영의 부기에 그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자경慈慶은 자전慈殿(임금의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정조, 순조, 덕온공주로 이어지는 조선 왕실 3대의 깊은 효심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 설명 인용]
덕온공주가 한글로 풀어 쓴 부녀자가 지켜야 할 덕목과 예절
규훈외편 | 閨訓外編
19세기, 32.3×137.1cm
덕온공주가 한글로 풀어 쓴 『규훈외편』으로, 부모에 대한 공경과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한문 원문 없이 한글 번역문만을 실었다.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 설명 인용]
윤용구가 딸 윤백영에게 한글로 써준 중국의 여성들의 행적
여사초략 | 女史抄略
1899년, 32×537.6cm
윤백영이 12세 때 아버지 윤용구가 써 준 교훈서이다. 한문 원문을 적고 뒤에 우리말 번역문을 실었다. 조선 시대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여성 교육서에 포함되지 않은 다양한 인물 30명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 설명 인용]
윤용구가 한글로 쓴 중국 여성의 전기
동사기람 | 彤史紀覽
19-20세기, 28.5×19.2cm
윤용구가 한글로 풀어 쓴 중국 여성들의 전기傳記이다. 상고 시대에 혼인의 예법이 생겨난 유래부터 명나라 융무제隆武帝의 왕비 증후曾后의 이야기까지를 수록하였다.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 설명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