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고개는 도심에서 혜화문을 나와 동북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조선 초에는 이 길을 통해 여진인이 한양으로 왔으며, 많은 물산이 이동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교통의 편의를 이유로 ‘죽은 자의 수도’로 불린 미아리 공동묘지가 조성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서울을 두고 이 고개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통해 북으로 끌려갔습니다. 노래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당시의 아픔을 잘 전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도심에서 밀려난 맹인역술가들이 미아리점성촌을 형성하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판자촌이 형성되었고, 1970년대에 높은 고개를 깎고, 도로를 넓혔습니다. 2019년 현재 미아리점성촌은 서울시 미래유산이 되었고, '죽은 자의 수도'는 산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중 1950년 6월 26일부터 27일 사이에 미아리고개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전면 남침으로 38도 분계선에 인근한 전선이 무너졌고, 수도 서울이 위협받게 되었다. 6월 27일 북한군을 방어하기 위해 이응준 소장이 이끄는 국군 제5사단과 유재흥 준장이 이끄는 제7사단이 미아리고개의 좌측과 우측 방어를 나누어 맡았으며, 6월 27일 오후부터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은 적군의 진출을 지연시키기 위해 길음교 폭파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차가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으로 진입하면서 미아리저지선이 무너졌다. 하지만 일부 부대가 방어진지에서 끝까지 저항하거나 국지적인 시가전을 펼치며 북한군에게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성북구 돈암동 51번지 일대에 있는 미아리고개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노래비이다.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오랑캐(여진족)가 들어오던 길이라 하여 되너미고개 혹은 적유현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 공동묘지가 들어서기도 하였다. 해방 후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이 서울로 들어온 길이어서 치열한 교전이 펼쳐졌고, 북한군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끌려갔던 길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역사와 아픔을 기억하고자 1996년에 미아리고개공원을 조성되었다. 공원에는 특히 6.25전쟁과 관련한 기념비가 2개 있는데, 전쟁의 아픔을 형상화한 사적비와 강제 납북의 안타까움을 노래한 ‘단장의 미아리고개’(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의 가사를 적어놓은 노래비가 있다.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에 점집들이 밀집하면서 형성된 지역을 지칭한다. 1966년 미아리고개의 도로를 확장하면서 고개의 경사를 낮추었고 야트막한 고가도로도 놓였다. 고가도로 밑에는 도로 양쪽 동네를 연결하는 길이 생겼고 행인들이 오갔는데, 이곳에 노점 점집이 들어서고 장사가 잘 되면서 주변에 많은 점집이 모여 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점성촌은 1970~80년대에 호황을 누렸는데, 1998년 IMF 사태 이후 손님이 줄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주변 재개발과 점을 보는 문화가 바뀌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는 일부만 남았는데, 이 역시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이었으므로 2014년 서울시의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의 점집 밀집 지역에 관한 신문기사의 모음이다. 기사에서 다룬 내용들을 보면, 점성촌이 활황을 누린 1970년대 기사부터 수록되었는데, 특히 80년대엔 점집들에 손님이 넘쳤고 선거, 입시, 당선, 합격 등에 관한 다양한 관심과 기원이 소개되었다. 1998년 IMF 직후에는 개인적인 관심 외에도 위기에 놓인 나라의 운세까지 점 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인터넷으로 점을 치고, 점집의 형태나 운영도 다양해지는 등 새로운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점시장’이 조용히 늙어가고 있다는 기사까지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의 점집 밀집 지역에서 오랫동안 역술업에 종사했던 역학사들의 인터뷰를 모은 것이다. 현대 역술업이 주로 맹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심남용(청산철학관)의 인터뷰를 비롯하여 8명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미아리 역학촌의 출발과 전성기, 쇠락의 시기와 사회분위기 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이다.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이후 수도로 들어가는 중요한 진입로였기 때문에 시기별로 많은 역사상이 녹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함경도 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 도로였기 때문에 여진인들이 이 길로 왕래하였고, 그래서 오랑캐가 넘어오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되너미고개’,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이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미아리고개 너머 현 길음2동 일대에 총독부에 의해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북한군이 서울로 침투했던 길이자 후퇴했던 길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던 곳으로 이산의 아픔과 고통이 서린 곳이기도 하였다. 1970~80년대에는 역학촌이 성행하였는데, 도로의 확장과 주변 재개발로 옛 모습은 찾기 힘들다.
1960년 4.19혁명 시기 미아리고개와 관련한 신문 기록들의 모음이다. 동아일보의 기사들인데, 4.19 직후인 4월 20일자 「데모대원을 실은 트럭, 미아리고개를 넘어 창동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부터 시작하여, 미아리에서 있었던 총성과 군중의 집결 등을 다루었고, 5월 17일자 「4.19 당시 미아리의 총성/한양대학 공과대학 정현식의 수기」라는 제목의 4.19 당시 총격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한 기사까지 수록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한국전쟁 당시의 미아리고개 상황에 대한 기록들을 모은 것이다. 6.25전쟁 당시의 미아리고개는 북한군의 서울 침투 경로이자 후퇴 경로였다. 서울 침투시에는 격전이 벌어졌고, 후퇴시에는 많은 사람들을 납치하여 끌고 갔다. 그러한 상황에 대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기록들인데, 동아일보는 주로 납북자들의 증언을 특집으로 다룬 것이고, 경향신문의 기사는 전쟁 당시 미아리고개의 상황을 다룬 특집 기사이다.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에 대한 여러 이름과 유래이다. 현재의 강북구 미아동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어서 미아리라는 이름이 생겼고, 이 고개가 미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미아리고개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함경도 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 도로였기 때문에 여진인들이 이 길로 왕래하였고, 그래서 오랑캐가 넘어오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되너미고개’,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 혹은 호유현(胡踰峴)이라고 불렸다.
성북구 돈암동 51번지 일대에 조성된 근린공원이다. 1990년부터 미아리고개 일대에 근린공원을 조성하는 계획이 추진되었고, 미아리고개공원은 1996년에 완공되었다.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오랑캐(여진족)가 들어오던 길이라 하여 되넘이고개 혹은 적유령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 공동묘지가 들어서기도 하였다. 해방 후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이 서울로 들어온 길이어서 치열한 교전이 펼쳐졌고, 북한군에 의해 많은 사람이 강제로 끌려갔던 길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기억할만한 역사와 아픔이 베어있는 곳이기에 공원 조성의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공원에는 전쟁의 아픔을 형상화한 사적비, 강제 납북을 노래한 ‘단장의 미아리고개’(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의 노래비 등이 있다.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에 있었던 종교시설이다. ‘당’은 주로 마을 단위의 민속신앙에서 신을 모시는 장소인데, 전통사회에는 서울에도 곳곳에 이러한 당집이 있었다. 미아리고개에도 조선시대부터 당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미아리당은 특히 자손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영험하다고 소문이 났었고, 조선왕조의 왕비를 배출했던 민씨 집안도 이곳에서 치성을 드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미아리고개 일대에서 점집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증언으로는 미아리당이 1990년대에 없어졌다고 하며,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미아리고개를 소재로 1956년 발표된 대중음악이다. 반야월이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의 이 곡은 작사가 반야월이 피란을 가다가 목숨을 잃은 딸을 생각하며 만든 노래로도 잘 알려져 있다. 6.25전쟁 당시 미아리고개는 북한군의 서울 침투 경로이자 후퇴 경로로 남·북한의 격전지이자 많은 사람이 강제로 납북되어 끌려가는 애환이 있는 장소였다. 곡의 1절에는 강제로 북송된 사람들의 사연이, 2절에는 반야월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이 곡은 전쟁의 아픔을 노래한 대표적인 노래로 사랑을 받았고, 1990년대에는 미아리고개공원 내부에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성북구 동소문로 177(돈암동 51-49)에 위치한 공연장이다.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은 성북구 미아리고개 구름다리 아래에 위치한 극장이다. 1998년 활인소극장으로 출발하여, 2003년에는 아리랑아트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2009년부터 성북구와 한국예술종합학교가 협력하여 지역 공공극장으로 운영되기 시작했고, 2012년 성북문화재단 출범 이후에 서울연극협회 및 지역 예술가들의 활동 공간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2016년부터는 '마을담은극장협동조합'과 협력운영하여 지역 예술가, 활동가, 주민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한 문화예술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고 있다.
미아리고개 고가도로 하부에 마련된 문화예술 공간이다. 공간의 선정과 기획부터 운영과 관리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다양한 주체들이 직접 참여하였다. 2015년 공간이 조성된 이후 마을장터, 아이들의 놀이터, 예술가들의 무대, 마을 사람들의 쉼터 등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며 마을의 활력을 불어 넣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을 주축으로 미아리 역학촌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단체이다. 고려시대에는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을 맹승(盲僧)이라고 불렀으며 수도에 이들의 동업조합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명통사(明通寺), 맹청(盲廳)으로 이어졌다. 일제강점 초기 명맥이 잠시 끊겼다가 1925년 조선맹인역리대성교 맹인조합이라는 단체로 부활하였다. 1971년 사단법인 대한맹인역리학회라는 명칭으로 법인설립 인가를 받았고, 1989년 7월 성북구 동선동 현재의 자리로 중앙회 회관을 이전하였다. 미아리 역학촌은 한국의 대표적 역학촌으로만 아니라 한국 시각장애인 점복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나가는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미아리 역학촌에 처음으로 문을 연 역학사이다. 이곳으로 오기전에는 남산 기슭 양동에서 영업을 시작했으나, 서울 도심이 개발되면서 변두리 지역인 미아리 고개로 옮겨왔는데, 종점과도 가까울 뿐 아니라 고개를 오르내리는 행인들도 많아 점집을 차리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였다고 한다.
성북구 동소문로25길 21(동선동4가 193)에 있는 점집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역술가는 19살 때부터 역술업에 종사하였으며, 사람들이 항상 푸르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기원을 담아 늘푸른철학원이라는 상호명을 붙였다고 한다. 처음 미아리고개 밑에서 시작하여 서울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다가, 2002년 6월 9일에 현재 위치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성북구 동소문로23길 8-15(동선동4가 154)에 있었던 철학관이다. 1971년에 미아리 역학촌에서 동양철학관을 개업한 역술가 이회택은 미아리로 들어오기 전에는 “대한문복가(大韓問卜家)”라는 이름으로 점집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점을 묻는 전문가라는 의미의 ‘문복가’라는 명칭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현재 동양철학관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식당이 들어섰다.
성북구 동소문로28길 10(동선동3가 1)에 있는 점집이다. 1988년에 미아리 역학촌에서 역술가 송오순이 매화부인예언가라는 이름을 내걸고 개업하였는데, 사주를 전문으로 보며 입소문이 나서 외국인들도 찾는다고 한다. 사주카페와 같은 현대식 점집에서는 하지 못하는, 산가지를 뽑는 ‘산통점(육효점)’으로 괘를 만들어 점치는 차별화된 노하우를 갖고 있다고 한다.
성북구 동소문로27길 11-1(동선동4가 294)에 있는 점집이다. 1974년 시골에서 상경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고 개업하였다고 하는데, 은하수(銀河水)라는 이름은 열일곱 살 무렵 직접 지었다고 한다. 깊은 곳의 하얀 차돌이 보일 정도로 깨끗한 물속처럼 깨끗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리라는 생각에 이름을 지었고, 가까운 곳에만 전단지를 돌리며 시작했는데 지금은 많이 알려져 외국인들도 종종 찾는다고 한다.
성북구 동소문로27길 17(동선동4가 268)에 있는 점집이다.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에 역학촌이 형성된 것은 1966년 미아리고개의 도로 확장 이후 고가도로 밑에 노점 점집들이 들어서면서부터였는데, 바로 그 첫 번째로 자리잡은 역학사가 철원철학관의 이도병이다(현재는 ‘철원역학운명감정원’의 간판이 걸려 있다). 이도병은 1966년 이곳 노점에서 손님을 받기 시작하였고, 1968년 집을 얻고 본격적인 ‘점집’을 운영했다. 처음에는 주변에 역술집이 혼자였다고 하는데, 도심의 개발로 밀려난 역술가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미아리 역학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성신여대입구역교차로는 동서 방향으로 동소문로가 지나고 북쪽으로는 아리랑로가 남쪽으로는 동소문로20길이 이어진다. 서쪽으로 동소문로를 따라가면 한성대입구역이 나오고 동쪽으로 가면 미아리고개를 지나 길음역이 나온다. 북쪽으로 아리랑로를 따라가면 아리랑고개를 지나 정릉으로 갈 수 있다. 남쪽으로 동소문로20길을 따라가다가 성북천을 건너면 성북구청이다.
1992년에 촬영한 미아리고개 사진이다. 사진에 보이는 육교는 철거되었으며, 삼성아파트와 풍림아파트가 들어서서 현재의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사진의 오른쪽 하단부에 보이는 언덕은 성신초, 성신여중, 성신여고, 개운중학교로 이어지는 길이다. 또한 사진의 왼쪽 부분을 보면 빨간지붕들 사이로 밝은 흰색의 건물이 보이는데 이 건물은 돈암아파트 A동으로, 현재의 삼성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돈암아파트 B동은 지금도 성북성심의원 뒤쪽에 남아있다.
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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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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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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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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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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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총 공사비 8백43만 원을 들여 착공된 돈암동 미아리 도로 확장공사는 1차로 고개 위 바위부터 깨부수는 공사로 시작됐다. 인도도 없고 길이 좁아 버스가 겨우 엇갈릴 정도의 위험하던 길이 이번 공사로 이 지구가 주택가로 발전하게 됐다.(내용 출처 : 경향신문, 1964.06.17., 6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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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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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서울시는 돈암동과 미아리 간의 도로확장공사를 착공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2차공약에 의한 변두리지구로 뻗는 간선도로망의 확장정리와, 30여만 명에 달하는 고지대 및 외곽지대 주민들에게 급수혜택을 주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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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매일경제, 1966.05.16., 5면)[서울사진아카이브 상세설명 인용]
미아리고개는 성북구 동선동과 돈암동 사이에 있는 고개로 되넘이고개(되너미고개)라고도 부른다. 동명연혁고에 따르면 병자호란 때 오랑캐 즉 되놈이 한양을 침범할 때 이 고개를 넘었기 때문에 되너미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이 고개가 끝이라 끝에 이른 고개, 마지막고개라는 뜻으로 되너미고개라고도 한다. 또한 미아 7동에 있는 불당(佛堂)골에서 미아사(彌阿寺)가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이 절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미아리에 공동묘지가 조성되면서 사람이 죽으면 상여에 실어 이 고개를 넘어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니 가족들의 슬픔이 배어 있는 고개라고도 한다. 또한 '한 많은 미아리고개'라고 하는데 이것은 6.25때 저명인사나 애국지사들이 납북되어 못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연을 담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길음동』(2010), 64쪽[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내용 인용]
서울시는 시내도로 확장공사와 위험지역에 있는 무허가 판잣집 철거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미아리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길이 607m, 폭 12m의 도로를 25m로 확장하는 데 저촉한 80동의 건물을 철거하고 있다. (1964. 9. 12)
『서울, 폐허를 딛고 재건으로Ⅱ: 1963-1966』(2011), 94쪽[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내용 인용]
삼성아파트와 풍림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촬영한 미아리고개 일대 사진이다. 사진 속 육교 위쪽을 보면 빨간지붕들 사이로 밝은 흰색의 건물이 보이는데 이 건물은 돈암아파트 A동으로, 현재의 삼성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돈암아파트 B동은 지금도 성북성심의원 뒤쪽에 남아있다.
구술자가 살던 집이자 당시 조소앙 측 선거연락소가 있었던 건물 모습, 조소앙과 조병옥의 선거 운동 풍경을 구술
내용 요약
구술자가 살고 있던 길음교 옆에 붙은 목조 건물은 길음교와 닿은 윗층은 상가였고 아래층은 가정집이었고, 5월에 조소앙 측 선거연락소가 구술자의 집에 있었음. 건물은 6월 한국전쟁 때 화재로 사라짐. 당시 구술자의 집은 얼음 창고를 운영하며 주변 식당에 얼음 배달 일을 하고 있었음.
한국전쟁 경험을 구술
내용 요약
24일 토요일, 군인들이 무리지어 미아리고개 쪽에서 시내 방향으로 걸어감.
25일 일요일, 구술자네 얼음 배달 가게에 배달원들이 출근하지 않음. 저녁에 지프차를 탄 군인들이 미아리고개를 넘어감.
26일 월요일, 숭인국민학교에 등교하니 피난민들이 소를 끌고 와있음.
27일 화요일 오후 두시 경, 검은색 비행기가 중앙청 쪽으로 폭격. 저녁에 피난을 가려고 금품을 챙겨 시내로 나감.
(다음 영상 '성북구 주민 이강한 4 : 전쟁을 피해 피난길에 오르다'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