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리빙랩 사업] 안암학 디지털 아카이브
안암학은 지역학의 관점에서 안암동이라는 공간을 사유하고 재해석하고자 하는 학문입니다. 안암동이라는 공간에는 전통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안암동에 거주하는 주민, 상인, 노동자, 학생들을 포함하여 안암동의 역사, 문화, 예술, 자연 경관, 민속 등 안암동의 모든 것이 안암학 연구의 원천 자료가 됩니다. 우리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학제간의 연구를 통해 안암학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그 시작 단계로 고려대학교를 중심으로 안암동 일대의 ‘역사’와 ‘문학’ 자원을 정리했습니다. 이를 통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안암동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연구책임자: 정호섭 / 공동연구원: 엄태웅 / 참여 학생: 이행묵, 하태희, 양여진, 이영채, 권순, 정요한, 문기백, 김민경)
  • 전체
  • 안암동
  • 고려대학교
  • 문화재
  • 문학
  • 독립운동
  • 민주화운동
  • 경성시가지계획 돈암지구 구획정리사업
    사건
    경성시가지계획 돈암지구 구획정리사업
    1936년부터 1941년 사이에 시행된 서울시 최초의 토지구획 정리사업으로, 현재의 성북구 돈암동, 동선동, 삼선동, 안암동, 보문동 일대를 새로운 시가지로 조성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의 인구 증가에 따라 도시의 확장이 필요해졌고, 총독부는 1936년 ‘경성시가지계획’을 수립하여 구획정리를 시행하였다. 사업 대상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고, 이미 거주하던 빈민들을 몰아내고, 택지를 분양하고 교통망을 설치하였다. 돈암지구의 정비는 1937년 시작하여 1940년 12월 사업이 종료되었다. 1960년대 돈암지구 지도를 보면 1930년대 후반에 제작된 토지구획정리계획도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아 당시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이후 시가지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할 수 있다.
  • 보성전문학교
    장소
    보성전문학교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고려대학교의 옛 이름이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4월 이용익이 설립하였는데, 아어학교(러시아어학교, 현 종로구 수송동) 건물에서 개교하였다. 1907년 이용익이 해외 망명 중 죽은 후에는 손자 이종호가 운영을 맡았는데 역시 안중근의 의거에 연루되어 구금되자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천도교에서 학교를 인수했으나 손병희가 체포당하자 또다시 어려움에 빠졌고, 1921년 김병로 등이 재단을 만들어 운영하였는데 총독부의 간섭은 심했고 재정의 어려움도 여전하였다. 1932년 경성방직을 설립한 사업가 김성수가 인수하여 안암동(현 고려대학교)으로 학교를 옮기고 운영하였다. 해방 후 1946년 중앙학원으로 흡수하고,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으며 고려대학교로 이름을 정했다.
  • 고려대학교
    장소
    고려대학교
    성북구 안암로145(안암동5가 1~2)에 위치한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1905년 이용익이 교육구국의 이념하에 설립한 보성전문학교로 출발하였다. 1921년 민간독지가 58명의 공동명의로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여, 1922년 「조선교육령」에 의해 정식으로 전문학교 인가를 받게 되었다. 1932년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재단법인 중앙학원으로 인수하고 교장으로 취임했고, 1934년에 안암동 현 위치에 교사를 신축·이전하였다. 1944년 4월 총독부에 의해 학교명이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변경되고 경제과·척식과만을 두게 하는 등의 시련을 겪었다. 광복과 함께 재단이사회가 개최되어 교명과 학사규정을 보성전문학교 당시로 환원시켰다가, 1946년 8월에 종합대학으로 승격, 개편하여 고려대학교를 창립하게 되었다.
  •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장소, 유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 고려대학교 내에 있는 건축물이다. 1934년 고려대학교 본관 건물을 짓고, 곧이어 1937년에 본 건물을 완공했다. 설계는 본관과 마찬가지로 박동진이 하였는데, 시공자는 미상이다. 건물의 구조는 화강석을 주재료로 한 L자 모양의 고딕 양식으로, 남서쪽 모서리에 탑 모양의 구조를 세우고 이 곳에 주출입구를 두었다. 특히 동남측 끝단 돌출부에는 네 모서리에 고딕식 튜렛(turret)을 세우고, 남측 창들 사이에는 부축벽(flat buttress)을 세워 기품 있는 고딕양식의 풍취를 더해주고 있다. 오랫동안 도서관으로 사용하다, 중앙도서관을 신축한 후 현재는 대학원동과 교수연구실로 사용하고 있다.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6호로 지정되었다.
  • 고려대학교 본관
    장소, 유물
    고려대학교 본관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에 위치한 근대식 학교 건축물이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완공된 건물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본관으로 사용하였다. 건물의 주재료는 화강석이며, 중앙부의 탑 모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고딕양식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대체로 평면 H자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중앙에는 넓은 홀이 있고, 앞면 현관의 돌기둥에는 호랑이상이 조각되어 있고, 뒷면의 돌기둥에는 무궁화가 조각되어 있다. 한편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건축가인 박동진[1899-1981]이 설계하였고, 일본인 후지타 고지로[藤田幸二郎]가 시공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최신식 내부시설은 물론 외관도 유례없이 화려하고 웅장하다고 알려졌다.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 이용익
    인물
    이용익
    관료이자 교육가이다. 고종의 측근으로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러일전쟁 발발 후 일본으로 납치된 그는 일본에서 근대적 교육기관을 살펴보고 그 필요성을 절감했다. 1905년 귀국하면서 600여 권의 서적을 사들여 와 번역하게 했으며 신교육에 의한 인재양성을 위해 보성소학교를 비롯하여 보성중학교 및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을사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세계열강에 널리 알리려고 했으며, 프랑스와 러시아 등지를 유랑하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 김성수
    인물
    김성수
    교육자, 언론인, 정치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다. 1915년에는 중앙학교를 인수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동아일보사를 창립하였다. 『동아일보』를 통해 물진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자 힘썼다. 1932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북악산 기슭 안암의 언덕에 새 교사를 세웠다. 1945년 8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종합대학인 고려대학교를 창립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다. 그러나 1940년대에 학도지원병을 고무하고 징병제 참여를 독려하는 등 친일행적이 인정되어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고, 2018년 2월 서훈이 취소되었다.
  • 박윤성
    인물
    박윤성
    고려대학교 내의 건축물을 남긴 건축가이자 교수이다.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파리8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로 재임하였다. 1959년 대전시 종합경기장 마스터플랜 및 주경기장 설계를 시작으로, 교육시설, 사무소 등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건축계획 분야에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 박동진
    인물
    박동진
    고려대학교 본관과 도서관을 설계한 건축가이다. 1924년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 졸업 후 조선총독부 건축기사로 1938년까지 활동했다. 관직에 있던 시기에 보성전문학교 본관과 도서관을 설계하였다. 고려대학교 본관 건물은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85호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현 대학원관)은 사적 제286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영락교회(1946), 남대문교회(1955) 등이 서울 중심가에 남아있는 그의 작품이다.
  • 안암동
    장소
    안암동
    성북구에 위치한 행정구역인 동의 하나이다. 예전에 현재 대광아파트 단지 가운데에 20여 명이 앉아 쉴 만한 큰 바위가 있어 ‘앉일바위’라 불렀고, 한자로 ‘안암’이라고 썼는데 여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안암동은 조선시대 한성부에 속해 있었으며, 1911년 4월에는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안암리, 1914년 4월에 안암리, 부석리, 궁리, 원리를 경기도 숭인면 안암리로 개편하였다. 1936년 경성부 확장 때 편입되어 안암정이라 칭하였고 1943년 6월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1946년 10월 안암정에서 안암동으로 바뀌었으며 1949년 8월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의 안암동은 1975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확정된 것이다.
  • 안암동/역사
    장소
    안암동/역사
    안암동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능지와 신덕왕후 강씨의 능지를 정하기 위해 안암동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부지가 안암동으로 정해진 후 땅을 파보니 물이 솟아나와 부지가 옮겨졌지만, 산수가 아름답고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그 입지가 능지에 적합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안암이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조선 초 이 지역에 살던 한명회의 육촌 형제 한계희(韓繼禧, 1423-1482)가 인근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여 이를 기리기 위해 ‘편안할 안(安)’자가 붙어 안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안암은 이미 태조대부터 문헌상에 나타났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이름에 ‘편안할 안’자가 들어가는 것은 이 지역이 편안하고 살기 좋은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 안암동/명칭
    장소
    안암동/명칭
    안암동의 명칭 변화와 관련된 설명이다. 안암동은 성북구에서 가장 먼저 생긴 지명이기도 하다. 조선 태조대부터 등장하는 이 이름은 지금의 대광아파트 단지에 20명 정도가 앉아서 쉴 수 있는 ‘앉일바위’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또한,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과 그 후손들이 살아서 궁리(宮里)라고 불렀다고 하며, 그들이 살았던 집과 사당은 현재 안암동3가 지역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밖에 조선초 이 지역에 살았던 문정공 한계희와 관련된 설도 있다. 곤궁하게 살던 한계희를 위해 친척들이 북바위 부근 논을 주었는데, 한계희가 이 논에서 나온 곡식을 인근의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되었고, 이를 기려 마을 이름에 ‘편안할 안(安)’을 붙여 안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 안암동/인구
    장소
    안암동/인구
    안암동의 인구변화에 대한 내용이다. 안암동의 인구는 1915년 345명에 불과하였으며, 1920년 892명, 1930년에는 1,718명으로 증가하였다. 해방 이후 1949년에는 1930년의 10배에 달하는 17,664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인구가 줄어들었으나, 1961년 14,599명으로 회복되었고, 1970년에는 27,692명으로 증가하였다. 1980년에는 46,801로 폭발적인 증가세로 정점을 찍었지만, 그 다음해부터 줄기 시작해 1990년에는 44191로 크게 줄었다. 감소의 원인은 안암동의 상업업무기능의 상대적 확장으로 주거 기능이 상대적으로 감퇴했던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암암동의 인구는 17,260명 세대수는 8,785세대이다.
  • 안암동/주거
    장소
    안암동/주거
    안암동의 주거환경과 관련된 설명이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가 지금의 고려대학교 자리로 옮겨오며 대학촌이 형성되었고, 193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돈암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보문동과 함께 신흥주택지가 조성되었다. 1950년대 후반 안암동에도 판자촌과 산동네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나 1960년대 후반 추진된 서울시의 ‘무허가 주택 양성화 사업’과 1970년 초 시작된 ‘현지개량 사업’을 거치며 차츰 연립주택이나 다세대주택 등으로 변모해 갔다. 한편, 토지구획사업으로 인해 들어선 도시형 한옥들은 1990년대 중반 다세대주택 건설붐이 일면서 대거 사라지고 말았다. 그나마 안암동에는 다른 동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도시형 한옥들이 남아있는 편이기는 하나 그마저도 많이 변형되거나 퇴락한 상태이다.
  • 안암동/생활
    장소
    안암동/생활
    안암동의 생활상과 관련된 설명이다. 일제강점기 안암동은 고양군 숭인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본래 과일 재배로 유명했다. 대부분 임야지역이었던 이곳은 전차의 도입과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따른 개발 등으로 인해 1920년대부터 빠르게 인구가 증가하였다. 사람들이 전차를 타기 쉬운 전차역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청량리선이 지나는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에도 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한편으로 1937년 조선총독부는 경성부 동부지역을 돈암지구로 묶고 대규모 주택단지를 개발하는 계획을 세웠고, 본격적으로 1939년 말부터 40년대 중반까지 집중적으로 주택 공급을 시작했다. 주택과 함께 수도가 공급되고, 간선도로인 보문로가 만들어지고, 전차도 돈암지구까지 연장되면서 안암리가 포함된 경성부 동부지역은 새롭게 주택지역으로 거듭났다.
  • 안암동/교통
    장소
    안암동/교통
    안암동의 도로, 교통운영과 관련된 내용이다. 안암동은 예부터 한양도성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교통로 상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1976년 안암동 로터리와 용두동 사이 길이 400m, 폭 25m의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개통되었고, 1990년대에는 지금의 고려대로가 크게 확장되었다. 원래 ‘고려대 이공대 뒷길’이라 부르던 이 소로는 1990년대 초 고려대 부속병원이 혜화동에서 지금이 자리로 옮겨오게 됨에 따라 이름이 바뀌고 폭도 넓어졌다. 1992년과 1999년에 두 번의 확장공사를 실시, 전구간 왕복 4차선 도로로 개통되었다. 한편 서울의 서북부와 동북부를 연결하는 지하철 6호선이 안암동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안암동 내에 소재하는 역은 안암역이다.
  • 안암동 한옥밀집지역
    장소
    안암동 한옥밀집지역
    1936~1941년까지 진행된 ‘돈암지구 구획정리사업’에 따라 조성된 현재 성북구 안암동 일대의 한옥밀집지역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의 인구 증가에 따라 도시의 확장이 필요해졌고, 총독부는 1936년 ‘경성시가지계획’을 수립하여 돈암 지역, 영등포 지역 등에 대한 구획정리를 시행하였다. ‘돈암지구 구획정리사업’은 현재의 성북구 돈암동, 동선동, 삼선동 일대를 새로운 시가지로 조성하는 것이었다. 현재 안암동의 서쪽면 일대는 이 사업 구역에 속했던 지역으로, 용문중고등학교, 안암초등학교와 성북천 주변으로 도시형 한옥이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헐려서 안암초등학교 서측에서 성북천 사이에 군락의 흔적을 볼 수는 있으나, 건물 신축으로 인해 멸실의 속도가 매우 빠른 상황이다.
  • 개운산
    장소
    개운산
    성북구 돈암동, 안암동, 종암동을 접하고 있는 산이다. 개운산이란 이름은 ‘나라의 운(運)을 연다(開)’라는 뜻의 사찰인 개운사에서 유래했다. 개운산은 해발 134m의 낮고 넓은 산인데, 크고 작은 돌들로 이루어진 산이라서 그 주변의 동네은 모두 바위 암(巖)자 붙은 돈암동, 안암동, 종암동의 이름을 갖고 있다. 산 기슭에는 성북구의회를 비롯해 각급 학교와 산책로, 쉼터, 체험장이 있어, 주민들의 든든한 안식처이자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 북바위밭
    장소
    북바위밭
    성북구 안암동의 밭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북바위밭은 한자로 고암전(鼓岩田)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고려대학교 경상대 쪽에 북바위로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그 뒤쪽 일대의 밭을 북바위밭이라고 하였는데, 수확이 잘되는 기름진 땅이었다고 전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태종이 하루는 미행을 나갔는데, 몰래 우의정 박은(朴訔)의 집에 이르러, 박은이 간장그릇 하나로 조밥 먹는 것을 모고 “한 나라의 재상으로 조밥을 먹을 정도로 가난한가?”라고 의심하였으나 사실이었다. 이에 태종은 청빈함에 놀라고 감탄하면서 청문(동대문) 밖 북바위 밭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 궁말
    장소
    궁말
    성북구 안암동에 있었던 마을의 옛 이름이다. ‘궁말’로 불린 마을은 조선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과 그의 아들 영순군, 그리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이 마을에 광평대군 일가의 사당이 있어 사당말로 불리기도 하였고, 궁리(宮里) 혹은 중리(中里)로 불리기도 하였다. 사당에는 태조의 7째 아들인 방번(무안대군), 광평대군과 부인 신씨, 영순군과 부인 최씨의 3대를 모셨는데, 방번이 들어간 이유는 세종이 후사(後嗣)없이 죽은 방번을 위하여 광평대군을 방번의 후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광평대군은 약관의 나이에 천연두를 앓다가 세상을 떴으나, 영순군 이후 후손들은 자손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현재 사당은 강남구 수서동의 광평대군 묘역으로 옮겨져 있다.
  • 안암로터리
    장소
    안암로터리
    보문로와 종암로를 잇는 안암로에 있는 교차로이다. 안암로터리는 신설동에서 돈암동을 연결하는 보문로에서, 경동시장 네거리에서 북쪽 방향의 종암로를 대각선으로 연결하는 중간에 위치한다. 다른 이름으로 안암오거리라고도 하며, 안암로를 중심으로 무학로, 약령시로, 고려대로가 교차한다. 안암로터리는 1930년대 중반 이후 교차로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2014년작 이문열 작가의 소설 『변경』을 통해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 사이의 안암로터리 주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 고려대학교 박물관
    장소
    고려대학교 박물관
    고려대학교(성북구 안암로 145) 내에 위치한 박물관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1934년에 ‘민속전시관’으로 처음 문을 열었고, 이는 한국 최초의 대학박물관이었다. 민속자료 중심으로 유물을 축적해가던 박물관은 해방 후 박물관으로 개편하였고, 1959년에는 대학박물관 최초로 발굴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1962년에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박물관 건물을 준공하였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현재 지하 1층의 기획전시실부터 지상 5층의 석조물을 전시한 옥상정원까지 6개 층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 고대박물관 소장 홍진종 의복
    유물
    고대박물관 소장 홍진종 의복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복식유물이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 홍진종(洪鎭宗)[1649-1702]의 의복으로 1968년 5월 20일 경기도 오산에서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것이다. 출토된 유물로는 남자바지 3접, 창의(氅衣) 9점, 중치막(中致莫) 1점, 심의(深衣) 1점, 답호(褡護) 1점 등이 있다. 유학자들은 사망 후 심의를 수의로 사용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수의로 입은 심의가 다수 출토되는데, 홍진종의 묘에서 출토된 심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심의 유물이다. 이들 의복은 17세기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어 당시의 복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80년 4월 1일 국가민속문화재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 과학조선
    유물
    과학조선
    고려대학교에서 소장중인 문헌이다. 1930년대 김용관, 박길룡 등 발명학회와 과학지식보급회의 주도자들에 의해 두 기관의 기관지로 간행되었던 잡지이다. 창간 초기에는 발명가들에게 발명 활동을 돕기 위한 실용적 정보를 제공하고 사회 전반에 발명 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내용이 기사의 주를 이루었지만, 1934년 발명학회를 주도로 한 과학 대중화 사업이 대규모 대중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과학조선』의 성격도 점차 대중적 과학잡지로 변모하였다. 『과학조선』은 한국 지식 사회에 과학기술 지식을 널리 보급했으며, 독립된 국가를 세우려는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이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주목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2013년 8월 27일 등록문화재 제566-2호로 지정되었다.
  • 괴원성회록
    유물
    괴원성회록
    고려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시화첩이다. 19세기 중엽 광산김씨들의 아회(雅會) 장면을 담은 「괴원성회도」와 시부(詩賦)를 함께 엮은 것으로, 제작 배경이 된 모임은 1855년(철종 6) 강원도 홍천에 있는 김재중의 괴원(槐園)에서 열린 것으로 보인다. 화면의 중앙에 모임 장소인 괴원의 자연경관과 누각, 참석자들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이 작품은 19세기 중엽 지방에 거주하는 족친들이 가진 모임을 계기로 제작된 그림과 시문으로 엮은 시화첩이라는 독특한 성격의 유물이다.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지역화사의 작품이고 괴원 인근의 실경을 재현한 아회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10년 6월 17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09호로 지정되었다.
  • 국문연구안
    유물
    국문연구안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문헌이다. 1907년 9월 16일 국문연구소의 제1회 회의 이후 1909년 3월 3일까지 연구소의 문제 토의 과정에서 위원들이 제출한 원고를 등사하여 다시 연구 위원들에게 배포한 것을 7책으로 묶은 것이다. 마지막 보고서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문서가 수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위원의 의견과 그와 관련된 이론도 전개되어 있어, 당시 연구소의 활동을 보여 주는 산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국어 정책론사의 기본 자료로서, 또한 영성한 개화기 국어학사의 자료로서 매우 귀중하다. 2012년 12월 24일 등록문화재 제527호로 지정되었다.
  • 동궐도
    유물
    동궐도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보유중인 회화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鳥瞰圖)식으로 그린 조선 후기의 궁궐그림이다. 세로 275㎝, 가로 576㎝의 이 그림은 16첩 병풍으로 꾸며져 있으며, 작가는 미상이나 도화서(圖畫署)의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 주변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산과 언덕들은 남종화풍(南宗畫風)의 준법(皴法)으로 구사되어 있으나 건물 표현과 원근 처리 등에는 미약하게나마 서양화법의 영향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은 회화성보다는 궁궐건물의 연구에 더 중요한 의의가 있다. 특히 19세기경의 원형대로 복원할 때도 정확한 근거와 자료를 제공해 주는 역할도 해주는 등 건물배치나 양태 등의 연구와 고증에 사료적 가치가 더욱 크다. 1989년 8월 1일 국보 제249-1호로 지정되었다.
  • 계미동경소진첩
    유물
    계미동경소진첩
    고려대학교에서 소장중인 화첩이다. 7폭의 초상화와 서문으로 이루어진 계첩(契帖)으로서 비단 바탕에 수묵채색으로 그려졌다. 모두 1703년(숙종 29)에 태어난 문사들의 초상화로 엮은 특이한 형식의 동경계첩으로. 화첩에는 참판 이익진, 판서 조영진, 참판 이규채, 영의정 한익모, 부사 송진흠, 영의정 신만, 유언술 등 7명의 반신초상이 순서대로 실려 있다. 문사들의 생몰연대를 통해 1765년(영조 41)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계미동경소진첩』은 전하는 사례가 많지 않은 동경계회도이고, 일반적인 계첩들과 달리 초상화를 모아 꾸민 특이한 예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계회도 연구는 물론 초상화 연구에 있어 중요한 유물에 해당된다. 2010년 6월 17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08호로 지정되었다.
  • 안암동 오층석탑
    유물
    안암동 오층석탑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고려 중기(추정)에 건조된 높이 5.55m의 오층석탑으로, 본래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원당국민학교에 소재했으나, 1986년 10월 27일 고려대학교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기단부의 상대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있으며, 탑신부(塔身部)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이 얕고 옥신(屋身)이 높아 웅장한 감을 준다. 2층 옥신과 기단부 면석 3매와 상륜부(相輪部)는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유물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태항아리이다. 인화문으로 보아 전라도 지방에서 15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태호(胎壺)는 주로 왕실에서 태를 담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것으로 내호와 외호로 되어 있다. 태호는 태지석(胎誌石)과 함께 나지막한 산봉우리에 안치되며 겉에 작은 태비가 세워져 도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 태호는 외호와 함께 내호에 있는 명주조각과 망태기의 조각으로 태(胎)를 담는 습속의 한 면을 알 수 있다. 1974년 7월 9일 국보 제177호로 지정되었다.
  • 서궐도안
    유물
    서궐도안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 중인 궁궐도이다. 표제에서 서궐(西闕)은 경복궁(北闕)의 서쪽에 있는 궁궐, 즉 경희궁(慶熙宮)을 의미한다. 서궐도는 「동궐도」와는 달리 채색이 가해지지 않고 수묵으로만 그리는 백묘(白描)의 계화(界畵) 양식으로 그린 것으로, 먹 아래에는 밑그림이 남아 있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전각이 이건, 변용, 훼철되어 버린 경희궁의 옛 모습을 한눈에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밀하고 자세한 묘사로 복원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그림이다. 또한, 작화 과정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는 밑그림이란 점에서도 주목된다. 2007년 12월 31일 보물 제1534호로 지정되었다.
  • 신록
    유물
    신록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화가 노수현[1899-1978]의 산수화이다. 화면의 좌측 하단에 묵서로 ‘심산(心汕)’ 서명이 되어 있으며, 낙관이 찍혀 있고, 뒷면에 보성학교 교인(交印)이 찍혀있어 노수현의 모교인 보성학교의 의뢰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작연도는 크기, 주제, 구도, 화법으로 미루어 보아 1925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24년 작인 「산촌귀목(山村歸牧)」과 전체적인 분위기와 유사하며, 산, 나무, 집, 들판, 나무꾼, 물 등의 묘사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산수화에서 근대적 사경산수화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노수현의 1920년대 대표적인 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크다. 2013년 2월 21일 등록문화재 제531호로 지정되었다.
  • 용감수경 권3~4
    유물
    용감수경 권3~4
    고려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헌이다. 997년 요(遼)나라 승려 행균(行均)이 펴낸 한자(漢字) 자전(字典)의 원형으로 세계적으로 유일한 책이다. 이 책은 재래 중국의 자전과 달리 부수별로 먼저 배열하고, 또 같은 각수 안에서는 운(韻)별로 배열하여 여러 가지를 병용하는 방법을 취하였고, 정자 이외의 속자까지도 전부 망라하여 해설을 붙인 것이다. 이 책을 복각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권4의 끝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나주에서 권득령의 주관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자(本字)가 26,430여 자이며 주(註)가 163,170자에 달하여 자전으로서 매우 귀중할 뿐만 아니라 요대의 음운을 연구하는 데 유일한 자료이다. 1997년 1월 1일 국보 제291호로 지정되었다.
  • 수선전도 목판
    유물
    수선전도 목판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목판이다. 서울 시가도인 『수선전도』를 찍어내기 위해 만든 것으로 크기는 세로 82.5㎝, 가로 67.5㎝이다. 1824~1834년 사이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에 참여하였다고 고증하고 있는데, 제작 연대의 상한을 경우궁(景祐宮)이 나타나 있음을 들어 그것이 창건된 1824년(순조 24)으로 잡고, 하한을 제생동(濟生洞)이 계생동(桂生洞)으로 이름이 바뀐 1834년(순조 34)으로 본 것이다. 정확성과 정밀함, 크기로 보아 서울 도성지도 중에서 뛰어난 지도 중의 하나이며, 지도 제작뿐 아니라 목판으로서의 제작 솜씨도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어 판목의 가치는 더욱 귀중하다. 1986년 3월 14일 보물 제853호로 지정되었다.
  • 왕세자입학도첩
    유물
    왕세자입학도첩
    고려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화첩이다. 1817년(순조 17) 3월 11일 성균관에서 치러진 효명세자의 입학례를 기념한 화첩이다. 입학례의 과정을 다섯 장면으로 구성하고, 이튿날(3월 12일)에 있었던 진하례 장면을 마지막에 그려 넣었다. 화면 상태가 양호하고 그림의 양식으로 보아 1817년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세자 관련 행사기록화가 많지 않은 가운데 본 유물은 왕세자의 입학례 과정을 시각화한 유일한 예로서 왕세자 관련 행사기록화의 형식과 구성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2010년 6월 17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 동인지문 사육
    유물
    동인지문 사육
    고려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헌이다. 고려 말의 문신 최해(崔瀣)[1287-1340]가 신라와 고려 명현의 문집을 모은 『동인지문』에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만 모아서 간행한 시문선집(詩文選集)으로 전 15권이다. 『동인지문』의 완성 시기는 1336년(충숙왕 복위 5)이며 전질 25권으로 신라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충렬왕 때까지가 수록범위로 여겨진다. 간행은 복주(福州)와 진주(晉州)에서 간행이 이루어졌다. 『동인지문사륙』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문선집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동인지문사륙』 고려대학교 소장본은 1981년 3월 18일 보물 제710-1호(권1~3, 4~6, 10~12, 13~15), 보물 제710-2호(권1~6), 보물 제710-5호(권7~9)로 지정되었다.
  • 동인지문사육 권1~3, 4~6, 10~12, 13~15
    유물
    동인지문사육 권1~3, 4~6, 10~12, 13~15
    고려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헌이다. 고려 말의 문신 최해(崔瀣)[1287-1340]가 신라와 고려 명현의 문집을 모은 『동인지문』에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만 모아서 간행한 시문선집(詩文選集)으로 전 15권이다. 크기는 34.5cm×21㎝이며, 1355년(공민왕 4)에 새긴 목판에서 조선초기에 찍어낸 후쇄본으로 보인다. 이 책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고, 계선(界線)이 없다. 이 전래본은 글자에 완결(刓缺)이 있고 마손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운 것도 있음을 감안하면 판각이 이루어진 훨씬 뒤에 인출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 간본에 고려 역대 왕의 휘(諱)는 피하여 결획(缺劃) 또는 대자(代字)가 나타나 있다. 이것은 고려본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이다. 1981년 3월 18일 보물 제710-1호로 지정되었다.
  • 동인지문사육 권1∼6
    유물
    동인지문사육 권1∼6
    고려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헌이다. 고려 말의 문신 최해(崔瀣)[1287-1340]가 신라와 고려 명현의 문집을 모은 『동인지문』에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만 모아서 간행한 시문선집(詩文選集)으로 전 15권이다. 1355년에 판각하고 조선 초기 후쇄한 것으로 보이는 목판본이다. 보물 제710호와 같지만 그보다는 책의 외형이 약간 작은 편이다. 1권의 서문 및 목차, 제1∼2장의 오른쪽 위끝 일부가 훼손되었다. 1981년 3월 18일 보물 제710-2호로 지정되었다.
  • 동인지문사육 권7∼9
    유물
    동인지문사육 권7∼9
    고려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헌이다. 고려 말의 문신 최해(崔瀣)[1287-1340]가 신라와 고려 명현의 문집을 모은 『동인지문』에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만 모아서 간행한 시문선집(詩文選集)으로 전 15권이다. 외형과 내용은 다른 보물과 같지만 진주판(晉州板)으로서는 유일한 간행본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마지막 권에는 발문(跋文)이나 상세한 간행기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이 책 외에는 남아 있지 않으므로 자세히 살필 수 없다. 1981년 3월 18일 보물 제710-5호로 지정되었다.
  • 삼국유사 권3~5
    유물
    삼국유사 권3~5
    고려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 하고 있는 조선 초기 간행된 문헌이다. 『삼국유사』의 권 제3~권 제5까지 3권을 1책으로 묶은 것으로, 권3의 첫 부분 10장, 권5의 18장 후면부터 31장(발문)까지 모두 23장이 결락되었다. 표지는 개장한 것으로 홍사를 이용한 오침안장이다. 이 책은 국내에 현존하는 정덕본(1512년 제작) 『삼국유사』 가운데서 규장각본과 함께 비교적 초기에 인출한 선본에 속하며, 중종 임신본의 서지적인 특징 및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정덕본 중에서는 유일하게 구결로 현토되어 있어 독해에 도움을 준다. 2002년 10월 19일 보물 제419-4호로 지정되었다.
  • 안암동 삼층석탑(예산 소재)
    유물
    안암동 삼층석탑(예산 소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고려 중기(추정)에 건조된 높이 3.31m의 삼층석탑으로, 본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모사리에 소재했으나 1962년 1월 5일에 고려대학교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기단부에서 탑신부까지의 옥개석과 옥신은 일정한 비례로 축소되어 안정감을 준다. 2, 3층 옥개석 추녀 모서리의 각각 세 부분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 안암동 삼층석탑(봉화 소재)
    유물
    안암동 삼층석탑(봉화 소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고려 중기(추정)에 건조된 높이 3.7m의 삼층석탑으로, 본래 경상북도 봉화군에 소재했으나 1987년 3월 13일에 고려대학교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기단부의 하대갑석은 1매의 큰 방형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은 두터우며 추녀 모서리는 반전이 얕아 전체적으로 단아한 감을 준다.
  • 조선요리제법
    유물
    조선요리제법
    고려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헌이다. 『조선요리제법』은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교수인 방신영이 우리 음식을 집대성하여 근대식 음식 조리법 기술 형태로 쓴 책이다. 이 책은 재료의 분량을 계량화하여 소개하는 등 조리과학의 발전과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초판본이기 때문에 조선을 지나서 근대기 조리법의 변화를 알게 해주는 사료적 가치도 충분하다. 2017년 5월 29일 등록문화재 제686호로 지정되었다.
  • 중용주자혹문
    유물
    중용주자혹문
    고려대학교 도서관이 보유한 문헌이다. 이 책은 주희(朱熹)[1130-1200]가 『중용』에 대한 여러 문제점을 설문 해답한 식으로 서술한 것인데 원나라로부터 수입되어 공민왕 20년(1371) 다시 인쇄한 것이다. 1책 목판본 세로 29.8㎝, 가로 18.5㎝인 이 책의 권말에는 홍호(洪虎) 4년 7월, 진주목에서 개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홍호의 ‘호(虎)’는 고려 혜종의 휘인 ‘무(武)’의 글자 사용을 피하여 글자의 뜻이 같지만 다른 글자로 바꾸어 쓴 것이다. 원본의 특정이 잘 나타나 있으며, 새김이 비교적 정교하여 인쇄가 깨끗한 편이다. 고려시대의 지방관판본으로서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981년 3월 18일 보물 제706호로 지정되었다.
  •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
    유물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
    고려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후기 전국의 봉수대를 그린 지도이다. 상단에는 붉은색의 전서체로 제목이 쓰여 있고, 각 지역 별로 백·적·황·갈·녹·청색의 동그라미에 지명이 적혀 있다. 제작시기는 17세기 후반 무렵으로 추정되며, 지방의 읍치와 도서지역을 비롯하여 산맥과 산봉우리 그리고 하계망이 자세히 그려져서 봉수의 간선로를 일목요연하게 알아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조선시대 봉수로를 보여준다는 역사적 가치 외에도 풍부한 회화성이 돋보인다. 산지 표현은 태세가 있는 회화적 필선을 사용하였으며 청록색 안료를 효과적으로 구사하였다. 2007년 12월 31일 보물 제1533호로 지정되었다.
  • 혼천의 및 혼천시계
    유물
    혼천의 및 혼천시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천문지리기구이다. 1669년(현종 10)에 천문학 교수 송이영(宋以穎)이 제작한 천문시계이다. 이 시계는 가로 나무상자 속에 오른쪽 절반은 중력식 진자시계가 장치되어 있고, 왼쪽에는 혼천의가 설치되어 있다. 이는 종래의 물레바퀴를 돌려 동력으로 삼은 장치가 아니고, 서양식 자명종의 원리를 이용한 천문시계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혼천시계 중 남아있는 유일한 유물로, 동아시아의 수격식 시계장치의 전통을 계승하고 서양식 기계시계와 조화시켜 전혀 새로운 천문시계모델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세계 시계제작 기술사에서 독특한 천문시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85년 8월 9일 국보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
    유물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백자 지석과 석함이다. 2001년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 일대의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에서 출토되었다. 묘지의 주인은 세조의 장모이자 정희왕후(貞熹王后)[1418-1483]의 어머니인 흥녕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이며, 묘지에는 1456년 7월 14일에 대부인이 졸하여 10월 8일에 예를 갖춰 매장했다는 장례 경위와 생전의 덕행, 가계 및 후손들의 현황 등을 기록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기년명 청화백자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으며, 백자 개합에 담아 매장하던 후대의 백자 지석과 달리 석함에 담아 매납했다. 청화백자의 개시 시기, 백자 지석의 초기 제작 양상과 매납법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2012년 6월 29일 보물 제1768호로 지정되었다.
  • 유길준 단령
    유물
    유길준 단령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의복유물이다. 이 의복은 개화기 사상가였던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 착용하였던 소례복 단령이다. 개화기의 중요한 사상가이자 갑오경장을 이끌었던 유길준은 1883년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이를 계기로 미국 유학을 했으며 미국 유학 중인 1884년에 자발적으로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었다. 귀국 후에는 단발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복의 보급화에도 앞장섰다. 이 유물은 유길준이 입었던 것이 유물로 착용시기가 분명하며, 전통복식과 서양복식이 결합된 절충적 요소보인다는 점, 당시 시행된 소례복 제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2014년 10월 29일에 등록문화재 제606호에 지정되었다.
  • 용비어천가 권1~2, 7~8
    유물
    용비어천가 권1~2, 7~8
    고려대학교 만송문고에 소장된 문헌이다. 이 책은 1447년 초간본으로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및 보물로 지정된 역사박물관 소장본, 계명대 소장본과 같은 판본이다. 특히 권7은 유일본이고 권8은 지정된 계명대본보다 보존상태가 좋다. 지질이나 인쇄 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각 책의 전체 내용이 비교적 잘 남아있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 손색이 없다. 용비어천가는 한글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문헌이다. 125장의 한글가사는 한글 사용의 가장 오래된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주해 속에 나오는 고유명사, 관직명의 한글 표기는 국어사 연구에서도 소중한 가치를 가진다. 2009년 10월 20일 보물 제1463-4호로 지정되었다.
  • 사영 김병기 일가 옷
    유물
    사영 김병기 일가 옷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의복으로 조선말의 문신 김병기(金炳冀)와 그 일가가 입던 옷이다. 김병기는 1847년(헌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 등을 역임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판돈녕부사까지 지낸 관료이다. 김병기의 조복(朝服)의 일부인 적초의·후수·훈상 각 1점과 구군복 2착·전복 2착·제복 1착이 있으며, 부인 송씨의 원삼 1착, 아들 김용규(金龍圭)의 관복 1착, 장손 김승진(金升鎭)의 관복 1착이 있다. 이 유물들은 착용자의 신분과 연대가 확실하며 대례복·소례복·평상복 등이 갖추어져 있어 한 시대의 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귀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2월 19일 국가민속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 홍무정운역훈 권3~16
    유물
    홍무정운역훈 권3~16
    고려대학교가 소유하고 있는 조선 초기 간행된 문헌이다. 한자의 중국음을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편찬한 중국음에 대한 한글 주음운서이다. 총 16권 8책, 낙질 1, 2권 1책, 현전 14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글과 한자 큰 글자는 목활자를 사용하고, 작은 글자는 갑인자(甲寅字)로 간행되었으며 이것이 현존 유일판본이다. 이 책은 당초의 목적과 달리 표준음으로서의 가치보다 오히려 자료로서의 큰 가치를 가진다. 한자음의 전통적인 표시방법은 반절이나 운도(韻圖) 등에 의지하는데, 이들은 한글 표기의 정확성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에 그런 측면에서 더욱 한글 표기상의 훌륭한 자료가 된다. 1965년 4월 1일 보물 제417호로 지정되었다.
  • 허목 전서 함취당
    유물
    허목 전서 함취당
    고려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예작품이다. 17세기 유학자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의 전형적인 대자(大字) 전서풍을 보여주는 편액이다.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한 편이며, 편액 아래에 함취당 주인 홍수보(洪秀輔)[1723-?]가 1791년(정조 15) 4월에 지은 발문이 딸려 있어 그 전래내력을 알 수 있는 보기 드문 예이다. 또 그동안 보이지 않던 허목의 인장 네 개(眉老, 和, 九疇人, 叟)가 찍혀 있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2010년 10월 25일 보물 제592-2호로 지정되었다.
  •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 (壯勇營 本營圖形 一括) 정간 기미본
    유물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 (壯勇營 本營圖形 一括) 정간 기미본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유하고 있는 건축화이다.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 (壯勇營 本營圖形 一括)은 정조 재위 시절, 친위부대였던 장용영(壯勇營)이 주둔한 청사의 본영(本營)을 그린 것으로 1799년에 그려진 채색화(도형 기미본) 1점과 1799년, 1801년에 그려진 평면도안(정간 기미본, 정간 신유본) 2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도형 기미본과 정간 신유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고 정간 기미본만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자료는 도성 안에 설치된 장용영 본영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과 관청의 변화를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정확한 축척에 기초하여 건물의 배치를 상세히 그렸으며 건축물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기에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청구도
    유물
    청구도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유하고 있는 조선시대 전국지도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김정호(金正浩)가 1834년 제작한 것으로 채색필사본이다. 『청구도』는 전국을 남북 29층, 동서 22개판으로 구획하여 전국을 그렸다. 지도의 한 면은 남북 100리, 동서 70리의 범위를 그렸으며, 축척은 『대동여지도』(1861)와 동일한 약 16만분의 1이다. 이 책의 특징은 황색, 적색, 회색, 청록색을 이용하여 군현별로 채색을 달리하였다는 점이다. 보관 상태가 좋고 구성이 뛰어난 지도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9년 4월 22일 보물 제1594-3호로 지정되었다.
  • 4·19 혁명 부상자 명단(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
    유물
    4·19 혁명 부상자 명단(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
    4.19 혁명 하루 전에 일어난 4.18 고려대학교 학생 의거와 관련된 유물이다. 4.18 시위에 참가한 고려대학교 학생 부상자 명단 초안 2종과 이를 정리한 정서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안(1)에는 부상자 명단에 학과, 학년, 번호, 이름 장소, 맞은 정도 등이 함께 적혀있다. 초안(2)는 ‘4월 18일 부상자 명단’이라고 쓰여 있는데 초안(1)과 달리 한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서본은 ‘4.19 의거 시 부상한 학생’이라는 제목으로 초안 내용을 수정 또는 보완해 재정리한 것이다. 이 사료는 4.19혁명을 이해하는 역사적 가치가 큰 자료로 인정 받아 2020년 8월 12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국문연구안(2)
    시청각류
    국문연구안(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국문연구안 사진이다. 국문연구안은 1907년 9월 16일 국문연구소의 제1회 회의 이후 1909년 3월 3일까지 연구소의 문제 토의 과정에서 위원들이 제출한 원고를 등사하여 다시 연구 위원들에게 배포한 것을 7책으로 묶은 것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소장 중이다.
  • 국문연구안(3)
    시청각류
    국문연구안(3)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국문연구안 사진이다. 국문연구안은 1907년 9월 16일 국문연구소의 제1회 회의 이후 1909년 3월 3일까지 연구소의 문제 토의 과정에서 위원들이 제출한 원고를 등사하여 다시 연구 위원들에게 배포한 것을 7책으로 묶은 것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소장 중이다.
  • 김준엽
    인물
    김준엽
    안암동의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44년 일본 게이오대학 2학년 재학 중 학도병에 징집되었다. 중국 쉬저우지역에서 기초훈련을 받고 경비중대에 배치되었으나, 1944년 3월 하순 부대를 탈출했고, 이후 중국 중앙군 소속 유격대에 배치되었다. 6월 장준하, 윤경빈 등과 함께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향해 떠났다. 광복군 훈련반에 입교하여 1945년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었으며, 8월 초 미국 전략정보국의 특별군사훈련을 받고 광복군 국내 정진군 강원도반 반장에 임명되어 국내진입의 날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고려대학교 문리대 조교, 교수를 거쳐, 1982년 고려대학교 제9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1980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 최경옥
    인물
    최경옥
    안암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 동아자동차회사 공장노동자로 신사상 운동을 위한 동지 규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934년에는 권영태 그룹에서 인쇄한 메이데이 격문을 서울 용산공작주식회사 등에 배포하였기도 하였다. 1935년에 조선공산당재건동맹사건으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위반 및 출판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36년 12월 출옥하였다. 이후에 그는 다시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적색노동자조합을 조직하였으나, 1938년 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안암정 112-17에 거주하였다.
  • 김종윤
    인물
    김종윤
    안암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1940년 경성공립중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인 해방투쟁동맹(일명 ‘CHT’)에 가입하여 활동하여,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거주지는 서울 안암정 200-13호이다.
  • 최승우
    인물
    최승우
    안암동에서 태어나고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유학 후 1943년 4월부터 욱동산업주식회사의 총무과장으로 재직했다. 같은 해 12월 중국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려다 발각되어 강제귀국당했다. 1944년 4월 안암정의 처가 유해창의 집에서 독립운동을 할 것을 협의하였다. 친일파를 처단하고 격문을 작성 살포하는 파괴부, 독립 실현 후 건설 부분을 담당하여 연구 준비하는 건설부 등 구체적 계획을 구상하였으나 조선총독의 암살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었다. 1944년 10월 23일 체포되어 1945년 7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재판 당시의 본적과 주소 모두 서울 동대문 안암정 228번지(현 성북구 안암동1가 229)였다.
  • 최승우 집터
    장소
    최승우 집터
    안암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승우 집터이다. 최승우는 안암동에서 태어나고 거주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본적과 주소 모두 '서울 동대문 안암정 228번지'였다. 집터로 추정되는 위치에는 현재 다가구용 단독주택이 들어서 있다.
  • 오세덕
    인물
    오세덕
    안암동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897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 127번지(현 성북구 안암로9가길 57, 49, 59)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과 철원애국단에서 활동했으며 애국단 대표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1923년 이른바 '김시현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폭탄밀반입시도로 김시현이 경찰에 쫓기고 있을 때 그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같은 해 한성은행에서 근무하던 중 의열단원 구여순(具汝淳)의 한성은행 자금 탈취를 도와주려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오세덕 집터
    장소
    오세덕 집터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 127번지(현 성북구 안암로9가길 57, 49, 59)에 있었던 독립운동가 오세덕의 집이다. 오세덕은 1897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현재 성북구 안암동)에서 태어났다. 오세덕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철원(鐵原)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후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활동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3월에는 의열투쟁을 전개하던 김시현이 이른바 '황옥 경부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폭탄밀반입시도로 경찰에 쫓기게 되자 안암리 127번지에 있던 오세덕의 집에서 은거하였다. 현재 오세덕의 집터에는 빌라들이 들어서 있으며 집터의 뒤편으로는 고려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 김현국
    인물
    김현국
    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김현국은 1929년 충주에서 권오순, 서상경 등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문예운동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잡지인 『문예운동』을 간행하여 무정부주의를 선전하려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았다. 1931년에는 비밀결사 언론기관인 자유연합사를 조직하여 주간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34년에도 무정부주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당시 거주지는 서울 안암정 86-11번지(현 안암로111)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김현국 집터
    장소
    김현국 집터
    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김현국의 집터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김현국은 아나키즘 단체인 문예운동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지금의 고려대학교와 정릉천 사이로 추정되는 안암정86-11번지에 거주하였다. 현재 넓은 공터에 주유소가 들어서 있다.
  • 피한봉
    인물
    피한봉
    안암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피한봉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동 164번지(현 안암동1가 164)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확산되던 때인 3월 23일 밤 10시경, 안암동 안암천 부근에서 다수의 군중을 모아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태형 90대를 선고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는 2017년에 공훈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피한봉 집터
    장소
    피한봉 집터
    안암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피한봉의 집터이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피한봉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동 164번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를 토대로 현 주소지를 추정하면 고려대로7다길 29이다. 집터 추정 장소에는 2020년 현재 다가구용 단독주택이 들어서 있다.
  • 3월 23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안암동·안감천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3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안암동·안감천의 만세시위
    성북구 안암동 일대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성북천 안암동 구간) 부근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안암동에 거주하였던 독립운동가 피한봉은 밤 10시경 숭인면 안암동 안감천 부근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고, 이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대의 처분을 받았다.
  • 3월 26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안감리(안암리) 일대 약 200명 규모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6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안감리(안암리) 일대 약 200명 규모의 만세시위
    성북구 안암동 일대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26일 밤 안감리(현 안암동 일대)에서 약 200명의 군중이 만세를 외치며, 전차 유리창에 독을 던져 파괴하고, 전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에게 하차를 요구하는 등의 압박을 하는 등 폭행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 5명이 출동하였고, 시위는 곧 해산되었다고 한다.
  • 3월 27일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일대 약 500명규모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7일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일대 약 500명규모의 만세시위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부근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안감천은 현재의 보문동 대광초등학교부터 성북구청, 돈암동성당 쪽까지 안암동을 지나가는 성북천의 일부 구간을 부르는 이름이다. 1919년 3월 27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돈암리 등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하였으며, 주모자는 체포되었다고 한다. 안감천 부근에서 발생한 만세운동에는 약 500명이 참여하였다.
  • 일제강점기 학병거부 운동
    사건
    일제강점기 학병거부 운동
    1943년 일제의 강제 징병에 저항한 학도지원병 거부운동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이후 학생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 시켰고, 조선인 학병 해당자들은 일제의 갖은 강압과 회유에 여러 형태로 저항하였다. 보성전문학교 법과·상과 학생들은 경성제국대학 학생 등과 함께 조선총독에게 학병거부 이유서를 작성하여 보내거나, 총독 관저에서 학도병지원제와 식민정책의 부당성에 대해 의견을 내세우는 등의 학병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1944년 평양사단 보병 42부대에 배속된 보성전문 상과 학생 손희용 등은 소속 부대 및 다른 부대의 학생을 규합해 탈출과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학병으로 차출된 학생들의 지속적인 군대 이탈과 대일 투쟁 전개는 일제에게 위기의식을 안겨주었다.
  • 아리랑
    작품
    아리랑
    1926년 나운규(1902-1937) 감독이 만든 첫 영화이다. 일제의 무력침탈로 식민지가 된 당시 상황과 식민지 현실과 우리 민족의 울분을 영화에 옮겨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성북구 안암동은 영화 『아리랑』의 촬영 장소로, 당시 기와집 한 채와 초가집 십여 채가 있는 산중 골짜기가 배경이 되었다. 영화 『아리랑』을 기념하기 위해 돈암동과 정릉 사이에 있는 아리랑고개에는 영화의 거리와 아리랑시네센터가 조성되었다.
  • 고려대로
    장소
    고려대로
    성북구 보문동과 안암동 일대의 도로이다. 고려대로는 성북구 보문동 166번지의 보문동사거리에서 성북구 안암동 42번지 고대앞사거리에 이르는 길로 길이는 1,150m, 폭은 15~25m이다. 원래 고려대학교 설립자 인촌 김성수의 호를 인용하여 ‘인촌로’라고 불렸으나 성북구는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된 자와 관련된 도로명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2018년 12월 ‘고려대로’로 도로명을 변경하였다. 이 길은 지하철 6호선 안암역과 보문역을 지나는 보조간선도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김상준
    인물
    김상준
    안암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상준은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한낙규의 감화를 받았고,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경제학 대강 등의 좌익서적을 탐독하여 공산주의에 공명하여 조선독립과 공산화를 희망하게 된다. 1941년 이종갑으로부터 사회과학에서 공산주의 이론과 실천, 학생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교육 받았으며, 보성전문학교 내에서 동급생 등과 사회과학문제, 경제학 등을 연구하였다. 1943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44년 9월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 받았다.
  • 김순원
    인물
    김순원
    안암동 관련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부친과 형의 영향으로 숭실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부터 민족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고, 보성전문학교 2학년 손석태의 영향으로 신사상에 찬성하여 신사회 건설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다시 1940년부터 조선독립을 위한 조선공산당 경성콤그룹 재건활동 및 조직 확대, 신사상의 이론학습, 동지획득 등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1941년에 치안유지법으로 기소되어 재판 도중 옥사하였다고 알려졌으나 사망사실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 김용태
    인물
    김용태
    안암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전라북도 고창 출신으로 1934년 고창농민조합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농민들에게 신사상을 선전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36년에는 서울 낙원정 허신병원에서 홍종식과 신사상 운동의 필요성과 그 실천의 불가피성에 대하여 협의하였던 사실이 발각되어 치안유지법위반 및 군형법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국으로 보내졌다. 거주지는 서울 안암정 157번지이다.
  • 홍애시덕
    인물
    홍애시덕
    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유관순과 함께 비밀결사인 여성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1920년 김활란 등과 7인전도회를 조직해 전국을 순회하며 계몽운동을 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결성에 참여하여 여성 권익옹호 및 사회풍토 개선활동을 했다. 1926년 기독교계 인사들과 함께 망월구락부를 결성하여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과 협력을 모색했다. 이후에도 1927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회장 역임하고, 근우회의 결성준비에 참여하는 등 종교를 통한 여성운동과 항일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안암동 4가에서 거주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상세 주소는 알 수 없다.
  • 양원길
    인물
    양원길
    안암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경성의학전문대학 재학 중에 일제가 육군특별지원병제도(1943)와 단기군의지원병제도(1944)를 실시하자 동창생과 함께 일본의 전쟁패배와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고 신사상 서적 탐독 및 동지 획득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45년 5월 3일 체포되었다. 안암정 171-14에 거주하였다.
  • 전광용
    인물
    전광용
    소설가이자 국문학자이다. 1918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1940년대부터 서울에 살았는데, 안암동과 성북동을 거쳐 1960년대에 동소문동 1가 140-69번지로 이사하여, 부산 피난 시절 외에는 성북구에서 생활하였다. 1939년 동화 「별나라 공주와 토끼」가 동아일보에, 1955년 「흑산도」가 조선일보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56년부터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소설 연구와 한국 근현대 문학 연구에 힘쓰면서 문단과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대표작 『꺼삐딴 리』(1962)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혼란스러운 시류에 편승한 주인공을 통해 시대상을 보여준 작품이다.
  • 정한숙
    인물
    정한숙
    소설가이자 교육가이다. 1947년 전광용, 정한모, 전영경 등과 ‘주막’동인을 만들고 활동했다. 1948년 『예술조선』에 「흉가」가 입선된 이래 많은 단편소설을 발표하였으며, 「전황당인보기」(1955), 「금당벽화」(1955), 「고가」(1956)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향을 떠나 온 뒤 안암동, 성북동, 삼선동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교수로서 자리를 잡을 무렵 성곽 앞쪽으로 집을 옮겼다. 그는 다양한 소재와 소설기법을 사용하여 새로운 시대 상황에서 살아 갈 한국적 인간상을 창조했다는 평을 받는다.
  • 한홍택
    인물
    한홍택
    안암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 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기소의견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수사 과정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숭인면 안암리 117번지(현 성북구 안암동)에 거주하였다.
  • 돈암지구
    장소
    돈암지구
    일제강점기 성북구 돈암동, 동선동, 삼선동 일대를 개발한 사업단위 구획이었다. 1936년부터 1941년 사이에 시행된 서울시 최초의 토지구획 정리사업으로, 현재의 성북구 돈암동, 동선동, 삼선동 일대를 새로운 시가지로 조성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의 인구 증가에 따라 도시의 확장이 필요해졌고, 총독부는 1936년 ‘경성시가지계획’을 수립하여 돈암 지역, 영등포 지역 등에 대한 구획정리를 시행하였다. 사업대상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고, 이미 거주하던 빈민들을 몰아내고, 택지를 분양하고 교통망을 설치하였다. 돈암지구의 정비는 1937년부터 토지매입을 시작하여 1939년에는 택지 분양까지 완료되었고, 1941년에는 돈암동(지금의 성신여대 태극당 부근)까지 전차가 다니게 되었다.
  • 한홍택
    인물
    한홍택
    안암동에 거주한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동경도안전문학교에서 디자인을,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귀국 후 1940년부터 유한양행에서 근무하며 광고 제작과 디자인을 담당했다. 1946년 ‘대한산업미술가협회’의 전신인 ‘조선산업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1975년까지 회장직을 지냈으며, 홍익대 공예과와 덕성여대 응용미술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의 디자인 작품의 특징으로는 회화성, 한국적 소재 등을 꼽을 수 있다. 개인전을 꾸준히 개최하며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장한 그는 한국 그래픽 디자인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성춘관
    장소
    성춘관
    안암동에 있었던 요리집이다. 성춘관은 신간회 경동지회 발기준비회의 창립대회를 연 장소였다. 원래는 신간회 경동지회 발기준비회는 숭인면, 한지면, 독도면 일대를 신간회 경동지회 구역으로 확정하고 1929년 신설리 신설학원에서 창립대회를 열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설학원에서 대회 개최를 거부하자 숭인면 안암리에 있는 요리점 성춘관으로 개최장소를 변경하게 된 것이다. 1929년 6월 16일 오후 4시 신간회 경동지회 창립대회가 성춘관에서 개최되었고, 이 대회에는 100명에 가까운 회원과 다수의 내빈이 참석하였다. 대회는 창립의 경과 보고, 축사와 축문 낭독, 전형위원 선발, 회장과 간부를 선임하는 것으로 진행이 되었다. 성춘관은 신간회의 경동지회가 창립을 선포했던 역사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 강창규
    인물
    강창규
    건칠공예의 전통을 이은 공예가이다. 일본 도쿄미술학교 공예분야에서 공부했다.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제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고, 일본왕 접견실 실내장식가로 위촉받기도 했다. 단절 위기에 있던 우리나라 건칠 공예를 홀로 고수하며 현대적으로 승화시킨시켰으며, 우리의 전통문양인 포도, 석류, 물고기 등을 자개무늬로 즐겨 사용하였다. 한동안 안암동에서 거주하였다.
  • 황금수
    인물
    황금수
    안암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1934년 6월 조선공산당재건 코민테른 조선레포트회의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 122번지에 거주하였다.
  • 김만형
    인물
    김만형
    화가이다.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다.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면서 등단한 그는 색채와 질감을 강조한 그림들을 주로 그렸다. 안암동에 거주한 바 있으며, 조선미술동맹에서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월북했다. 손응성 등과 함께 친일미술단체인 단광회(丹光會)의 일원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고대신문
    개인/단체 발간물
    고대신문
    1947년 11월 3일 창간된 고려대학교 교내 신문이다. 창간호에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원인을 지식인으로서 냉철하게 인식하고, 이것을 학생 사회 내에 공유하기 위한 장으로서 고대신문을 만들었다는 의지가 기록되었다. 6.25전쟁 당시 대구에 임시로 고려대학교를 개교할 때도 발빠르게 고대신문사는 속간호를 발행하였으며, 3.15 부정선거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신문에 담아내기도 했다. 대내외적 사회 문제에 활발하게 대응했던 고대신문은 인터넷 매체의 등장이라는 변화에 대응하여 편집형태를 수정하고, 2000년대 초반부터는 온라인 뉴스사이트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 고려대학교 100년사
    개인/단체 발간물
    고려대학교 100년사
    2008년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고려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3권의 책이다. 제1권은 보성전문학교의 창립부터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시점까지의 내용이 담겨있다. 제2권에서는 해방 이후 고려대학교의 출범에서부터 1979년까지 고려대학교의 설립 과정, 학생활동, 기념사업 등을 살폈다. 제3권은 서창캠퍼스가 출범한 시기부터 설립 100주년에 이르기까지 학교 공간의 확대, 학사 행정의 변화, 학생 운동의 다원화 등이 정리되어 있다. 각 권의 시작부에는 관련 사진 자료를 첨부하였고, 마지막에는 색인을 추가하여 고려대학교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개인/단체 발간물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2005년 5월 5일 고려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책이다. 이 책은 해방 이전 3.1운동부터 1990년대까지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의 전말을 다루고 있다. 총 4부로 구성되어 1부에서는 한말·일제 하의 민족운동과 보성전문학교의 투쟁에 대해 기술하고, 2부에서는 해방 후 보성전문학교와 고려대학교의 학생운동을 정리하였다. 3부와 4부에서는 각각 1980년대, 199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고려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 4.18 고대학생 의거
    사건
    4.18 고대학생 의거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이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면서 벌인 평화시위이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온갖 부당한 일이 자행되었고, 자유당과 경찰의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를 규탄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주로 지방도시의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하던 가운데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대학생으로서는 최초로 서울에서 시위를 감행하였다. 18일 오후 1시 3천여 명의 고려대학생들이 교문을 나섰고, 국회의사당 앞에 도달하여 농성하였다.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학생들은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김주열 열사의 죽음과 고려대학생들의 피습사건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 고려대학교 4.18의거실록
    개인/단체 발간물
    고려대학교 4.18의거실록
    1960년 4월 18일에 발생한 고려대학교 학생 의거에 대해 정리한 책이다. 당시의 신문기사 및 4.18, 4.19 관련 문헌을 검토하여 4.18의거의 모의 과정, 시대적 상황, 4월 18일 당일의 상황 등을 상세하게 정리하였다. 책은 2부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4.18의거의 시대적 배경, 모의 및 진행 과정과 전체상이 정리되어 있고, 2부에서는 모의 주도자, 의거 참여자, 관찰자 등 73인의 수기를 게재하였다. 부록에는 4.19헉명 공로 건국포장 수훈자 명단과 1961년 8월 25일 혁명재판소의 ‘4.18 고려대 의거 데모대 습격사건’ 재판 기록을 수록하였다.
  • 고려대학교 4.18 기념탑
    장소, 유물
    고려대학교 4.18 기념탑
    1961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민주정신을 기리며 세운 기념비이다. 탑이 세워지기 1년 전인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은 자유당 독재에 항거하여 학생대표의 선언문 낭독 후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하였다.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학생들을 정치깡패가 습격하여 일부 학생들은 중상을 입었다. 이른바 4.18의거는 대규모의 대학생 시위이자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기념비 오른쪽 하단에는 고려대학교 교수였던 조지훈 시인이 쓴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라는 제목의 비문이 있고, 왼쪽 상단에는 4.18 의거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모습을 기린 부조가 있다.
  • 김왈영
    인물
    김왈영
    4.19혁명 때 희생된 민주열사이다. 1954년 4월 1일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김왈영은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 시위에 참여하여 경무대 입구 바리케이드를 뚫다가 목에 총상을 입어 사망하였다. 당시 사망자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는데, 보도과정에서 김왈영의 왈(曰)을 일(日)로 착각해 ‘김일녕’이라고 오기했기 때문이었다. 1962년 4.19혁명 공로 건국포장 역시 ‘김일녕’이라는 이름으로 수여되었다. 그의 존재가 발견된 것은 2020년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4.18의거 60주년 특별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언론에 보도된 고대생 희생자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였다, 이후 ‘김일녕’이라는 이름으로 전산화된 학적부의 생년월일과 사진을 국립 4·19민주묘지 안장자 기록과 비교하여 ‘김일녕’이 국립묘지의 ‘김왈영’과 동일 인물임이 확인되었다.
  • 한일협정 반대운동(6.3 학생운동)
    사건
    한일협정 반대운동(6.3 학생운동)
    1964년 박정희 정권이 국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진행한 것에서 촉발된 항쟁이다. 1964년 3월 24일 시위로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학생들이 참여한 시위가 시발점이었다. 고려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은 교내와 안암동, 신설동 로터리 일대 등에서 시위를 벌였다. 6월 3일 시위가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고려대학교는 시내 대부분 학교와 함께 무기한 휴교에 돌입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이 정식 조인된 후에도 회담 철회를 주장하며 반대 시위를 이어 갔지만, 무장군인이 학교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구타하거나 교내 강의실 및 실험실을 파손 등의 탄압이 계속되었다. 6.3 학생운동은 비록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최초의 민중에 의한 반정부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3선개헌 반대시위
    사건
    3선개헌 반대시위
    1969년 대통령 박정희가 3선을 목적으로 추진하였던 제6차 개헌에 반대한 민주화 운동이다. 1967년 박정희 정권은 6.8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하였다. 1969년 개헌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반대 시위가 연일 전개되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도 헌정 수호를 내세우며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벌였다. 6월 19일 고려대학교 법대학생 7백여 명은 3선개헌 성토개회를 열었고, 28일에는 교내 배구장에서 시작된 시위가 안암동 로타리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기동경찰의 최루탄 발사 등의 제지로 교내로 되돌아갔다. 결국,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으며, 고려대학교는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3선개헌 반대투쟁은 학생운동을 촉발하는 동시에 민중의 관심과 연대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 양호기
    개인/단체 발간물
    양호기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현민 유진오가 쓴 회고록이다. 1932년 부터 1966년까지 35년동안 보성전문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회고한 내용이다. 유진오는 「고우회보(高友會報」에 1971년 봄부터 1972년 8월까지, 1974년 1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전후편으로 나누어 회고록을 연재하였는데, 이 글을 모아 『양호기』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을 통해 일제지배 하의 수난, 해방 이후 좌우익의 충돌, 6.25전쟁, 4.19의거 등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과 보성전문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파악할 수 있다.
  • 이정덕
    인물
    이정덕
    건축가이자 교수이다. 고려대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캠퍼스 건축에 참여하였다. 1957년 종합건축연구소와 한국산업은행 주택기술실을 거쳤으며, 한국건축가협회 설계분과위원장과 서울시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 1969년 고려대학교 학생회관 및 정문, 1970년 해영회관, 1973년 고려대학교 도서관, 1975년 고려대학교 경영관, 1978년 신행정수도 중심부 계획과 고려대학교 기숙사를 계획하였으며,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 유진오
    인물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문학가·법학자·정치인이다. 1920년대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 법과 강사로 활동하였고, 1937년에는 교수에 임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대학교육의 근간이 되는 법령 초안을 작성했으며, 대한민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의 헌법 초고는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다가 고려대학교의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문학·법학·교육·정치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930-1940년대 중일전쟁을 선전하거나 징병제와 지원병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고 좌담·대담·강연 등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을 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손기정
    인물
    손기정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육상선수이다. 1932년 양정고보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마라톤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33년부터 1936년까지 13개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였고, 이중 베를린 올림픽을 포함한 10개의 경기에서 우승하였다.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수여 당시 꽃다발로 일장기를 가린 것과 국내 언론사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1937년 보성전문에 입학한 이후 보성전문 육상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해방 이후 안암동에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을 ‘마라톤 선수 합숙소’로 이름 붙이고 마라톤 유망주를 뽑아 훈련시켰는데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1950년 보스턴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은·동을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이 모두 손기정에게 가르침을 받은 선수들이다.
  • 손기정 집터
    장소
    손기정 집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의 집터와 관련된 내용이다. 손기정은 일제강점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 때문에 기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우승 후 외국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기도 하였다. 해방 후 손기정은 안암동에 거주하며 자신의 집을 ‘마라톤 선수 합숙소’로 이름붙이고 마라톤 유망주를 뽑아 훈련시켰다. 손기정의 가르침을 받은 서윤복,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이 국제대회에서 우승 등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지도자로서도 성과를 내었다. 현재 집터는 다세대주택이 들어서서 집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 보성전문학교 체육부
    인물
    보성전문학교 체육부
    보성전문학교 체육부는 현재 고려대학교 체육위원회의 전신이다. 보성전문학교 체육부에는 축구부, 농구부, 럭비부를 비롯한 15개 운동부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당시 전교생 580명 가운데 300명이 운동부에 가입해 있을 정도로 보성전문 학생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보성전문 체육부 소속의 여러 운동부원은 국내 경기뿐 아니라 베를린 올림픽, 일왕배 전일본 선수권 대회 등에서도 여러 차례 좋은 성적을 거두며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울분을 푸는데 일조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체육부 출신의 선수들은 이후 대한민국 스포츠의 주축을 차지하게 된다.
  •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이전
    사건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이전
    보성전문학교는 수송동을 시작으로 낙원동, 송현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32년 김성수는 보성전문을 인수할 당시 새로운 부지 선정과 신교사 건립을 약속한 바 있다. 안암동의 부지가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1933년 중앙학원을 통해 6만 2천여 평의 넓은 부지를 매수하였다. 송현동 교사의 부지 6백여 평에 비하면 1백여 배 넓은 면적이었다. 안암동 신교사는 최대 550명의 학생을 수용할 것을 예상하고 교장실, 사무실, 응접실, 회의실, 교실, 중강당 등으로 구성된 본관이 설계되었다. 신교사의 설계는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수로 일하고 있던 박동진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4년 새로운 교사로 이전하던 날 교수·직원·학원은 송현동 구교사에서 고별식을 갖고 행렬을 갖추어 안암동으로 이전하였다.
  • 서윤복
    인물
    서윤복
    고려대학교 출신의 체육인이다. 서윤복은 고려대학교 육상부 소속으로 안암동에 있는 손기정의 자택에 합숙하며 손기정의 지도를 받았다. 1946년 5월 제1회 조선마라톤선수권대회, 같은 해 9월 제1회 전국육상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높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듬해인 1947에는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동양인 최초로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당시 그가 세운 세계 신기록은 2시간 25분 39초였다. 1948년 런던 하계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참가하였고, 이듬해에 은퇴 후 육상 지도자로서 후진을 양성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부 감독,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감독 등을 역임하며 한국 스포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사건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운동경기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승부를 겨루는 행사이다. 두 학교가 공식적으로 운동경기에서 만난 것은 1925년 열린 제5회 전(全) 조선 정구대회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사립 전문학교인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가 자주 맞붙게 되면서 두 학교의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화제가 되었고, 이들의 경기는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대상 속에서 민족의 혼을 살리는 민족적인 경기로 인식되었다. 1945년 12월 양교 OB구락부와 조선 축구협회의 공동 주관으로 열린 축구전은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의 시발점이 되었고, 1956년 현재의 정기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57년부터는 고려대가 주관시에는 고·연전으로, 연세대가 주관시에는 연·고전으로 부르기로 양교가 합의하였다.
  • 김양복
    인물
    김양복
    안암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1928년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아나키즘단체인 일성단을 조직하였다. 1929년 평남 용강군의 한 씨름대회에서 총독정치의 억압과 착취를 폭로하고 농민들을 단결하여 일제타도에 앞장설 것을 호소하는 무정부주의 선전문을 살포하였다. 1929년 7월 평양에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거주지는 서울 안암정 205번지 11호이다.
  • 손진태
    인물
    손진태
    사학자, 민속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3일 밤 안암동·안감천(성북천)의 만세시위에 참여할 당시 안암리 11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1932년 송석하·정인섭과 함께 조선민속학회를 창설하고 193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하였다. 1934년 안암동으로 이전한 보성전문학교의 사서로 고용되고, 이후 보성전문학교의 문명사 교수와 도서관 관장직을 맡았다. 1949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거쳐 문리대학장에 재직 중 6.25 전쟁으로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조선신가유편』 『조선민담집』 『조선민족설화의 연구』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조선민족사개론』, 『국사대요』 등이 있다.
  • 여대현
    인물
    여대현
    보성전문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41년 4월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 일본에서 항일결사 효민회를 조직해 활동한 최홍준을 만나 일본의 민족차별에 대한 실상을 듣고 식민통치에 항거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민족문화 향상과 실력양성에 주력하였으며, 조선어 연구를 통한 민중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2월 성북동에 있던 여대현의 집에서 최홍준·성장환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안을 토론하며 독립의식을 길렀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할 것으로 판단하고 다가올 독립에 대비하였다. 항일 활동을 지속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해방 이후 1968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이기을
    인물
    이기을
    안암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40년 서울 중앙중학교 3학년 재학 중에 노국환, 황종갑, 유영하, 조성훈과 함께 정치와 역사에 대하여 토론하는 ‘5인독서회’를 조직하고 최복현을 지도교사로 추대하였다. 1941년 활동 범위를 확대하던 중 황종갑의 서신이 사전 검열에 발각되어 그를 비롯한 관련 학생들이 체포되어 100일 만에 석방되었다. 교사 최복현은 1942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아 1943년에 출옥하였다.
  • 이병우
    인물
    이병우
    안암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1943년 3월 강원도 홍천군의 한 음식점에서 지원대근(池原大根)에게 경기도에서 식량부족으로 아사한 사람 2명을 보았다는 말을 하였다가 조선전시보안령위반으로 체포되어 벌금 200엔(혹은 40일간 노역장 유치)을 받았다. 서울 안암정 186-28에 거주하였다.
  • 이재성
    인물
    이재성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감리 78번지(현 안암동 5가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4.18기념관 일대로 추정)에 거주하였으며, 직업은 연초상(煙草商)이었다. 1919년 3월 26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사무소(현 성북구 안암동5가 일대로 추정) 앞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이로인해 1919년 5월 1일 치안유지법위반을 이유로 5월 1일 태 90대 형을 선고받았다.
  • 홍기문
    인물
    홍기문
    안암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이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로 선임되었고, 1931년에는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또한 국어연구에도 전념하여 1927년에 「조선문전요령」을 『현대문학』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서울신문사 편집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정음발달사』, 『조선문법연구』을 간행하였다. 1948년 4월 남북정치협상 대표였던 부친 홍명희를 따라 입북하여 그대로 잔류하면서 국어연구와 정치활동, 문화활동을 병행하였다. 1981년에는 『조선왕조실록』 한글 번역의 공로로 노력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 유신헌법 반대 학생운동
    사건
    유신헌법 반대 학생운동
    1972년 10월 선포된 유신체제에 반대하여 일어난 학생운동이다. 1973년 서울대 문리대에서 유신 선포 이후 최초의 학생시위가 발생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동맹휴학, 시험거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되었다. 정부는 1974년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긴급조치가 해제되었으나 복역 중인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못하였고, 고려대학교 학생회는 이들의 석방을 요청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가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교문에서 학생들과 경찰의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시위가 계속되자 1975년 4월 정부는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여 고려대학교의 휴교와 동교내 집회ㆍ시위금지 등을 명하였다. 민주화 운동의 기세를 꺾으려는 의도가 담긴 조치였으나 이후 대학가의 연합으로 유신체제 반대운동은 지속되었다.
  • 6.10 민주항쟁
    사건
    6.10 민주항쟁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일어난 범국민적 민주화 운동이다. 1987년 전두환 정부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사회 각계 인사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한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조직적으로 조작‧은폐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온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고려대학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7년 6월 10일 고려대학교에서는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여 출정식을 개최한 뒤 민주광장에서 시청 앞까지 가두시위를 전개하며 6‧10 대회에 참가하였다. 한편 교수들도 민주화에 대한 연좌시위를 교내에서 전개하고, 성명을 발표해 개헌을 요구하였다. 6월 내내 이어진 항쟁의 결과,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 백원만 아저씨
    작품
    백원만 아저씨
    1999년 발표된 김재혁 시인의 시집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에 수록된 시이다. ‘백원만 아저씨’는 고려대 앞 지하도에서 ‘백원만’을 외치고 다닌 인물에게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김재혁 시인이 묘사하는 ‘백원만 아저씨’는 쓸쓸하고 외로운 정서를 깊게 내포하고 있다. 대상 자체가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심리적인 상태가 이러한 정서 표현을 만들어 내며, 이를 통해 당대 젊은이로서 시인이 느끼고 있는 막막한 감정을 예측할 수 있다.
  • 백원만 씨 유감
    작품
    백원만 씨 유감
    2004년 발표된 김종태 시인의 시집 『떠나온 것들의 밤길』에 수록된 시이다. ‘백원만 아저씨’는 고려대 앞 지하도에서 ‘백원만’을 외치고 다닌 인물에게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시인은 정처없는 ‘백원만 아저씨’의 존재를 ‘운동이 잦아들던’ 시대 현실과 연결 지어 풀어나간다. 90년대의 흔적들과 자신의 기억, 사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공간과 대비되어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상인 ‘백원만 아저씨’을 보며 화자는 생각에 잠긴다.
  • 또 백원만 아저씨
    작품
    또 백원만 아저씨
    2007년 발표된 김재혁 시인의 시집 『아버지의 도장』에 수록된 시이다. ‘백원만 아저씨’는 고려대 앞 지하도에서 ‘백원만’을 외치고 다닌 인물에게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저자의 시집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1999)에 수록된 ⸀백원만 아저씨」에서도 이야기했던 대상이다. 이 작품에서 백원만아저씨는 변화한 세월과 바뀐 풍경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대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 안암동 구두닦이 아저씨
    작품
    안암동 구두닦이 아저씨
    1999년 발표된 김재혁 시인의 시집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에 수록된 시이다. 언제나 존재하고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 속의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인의 시선이 잘 드러나 있는 시이다. 안암동에서 구두닦이로 살아가는 중년 남성의 삶의 형태를 그의 직업인 구두닦이에 비유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 국수먹는 꼴뚜기 집에서
    작품
    국수먹는 꼴뚜기 집에서
    2013년 발표된 김재혁 시인의 시집 『딴생각』에 수록된 시이다. '국수 먹는 꼴뚜기 '는 고려대학교 인근에 있는 식당이다. ⸀국수 먹는 꼴뚜기 집에서」에는 가게의 익숙한 풍경 속에서 말없이 위로를 받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추억은 햇살의 멜로디에 들어 있다’는 표현에서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과 함께 했던 날들의 햇살을 가게에서 느끼며 자신의 추억을 잊지 않고 기쁘게 추억한다. 흘러가는 현재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한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는 시이다. 구체적인 장소를 드러냄으로써 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을 생각해보게 한다.
  • 그 해 안암동
    작품
    그 해 안암동
    1998년 발표된 문경화 시인의 시집 『언 강물에 발을 녹인다』에 수록된 시이다. 시인은 1996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안암동’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시 ⸀그 해 안암동」에서 화자는 가을에 첫 눈이 오기를 기다리는 심리로 안암동의 풍경을 묘사했다.
  • 안암동에서
    작품
    안암동에서
    윤희상 시인의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에 수록된 시이다. 안암동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보타사’의 주지 스님과 ‘중국음식점’의 배달원 두 인물을 비교하였다. 일반적인 시각을 초월하여 인간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 보타사(시)
    작품
    보타사(시)
    2014년 발표된 윤희상 시인의 시집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에 수록된 시이다. 안암동에 위치한 보타사에서의 경험을 소재로 하여, 짤막한 시를 통해 조용하고 고요한 보타사의 모습과 화자가 느끼고 있는 고즈넉한 정취를 드러냈다.
  • 상수리 나무의 기억
    작품
    상수리 나무의 기억
    2014년 발표한 윤희상 시인 시집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에 수록된 시이다. 화자는 개운사 금륜전 앞에서 자칫 지나칠 수도 있는 자그마한 존재를 살펴보고 있다. 화자와 마찬가지로 상수리나무는 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과 사를 살피며 그 기억을 자신의 안에 저장한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선 덕에 존재들은 죽어도 완전히 잊히지 않은 채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따뜻한 생각을 시인은 자신이 포착한 사소한 일상을 통해 전달한다.
  • 그 집의 기억
    작품
    그 집의 기억
    시인 최성수가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교육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총 48화로 한 회분이 독립적으로 완결되지만, 전체로 볼 때 같은 공간인 어느 중학교에서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의 제1화는 '안암교 다리 아래 제느강은 흐르고'로 중학교 시절 작가가 포착한 안암동은 정릉천과 제기천 사이에 위치한 동네이면서, ‘제느강’이라는 별칭을 가졌던 낭만적인 공간으로 묘사된다.
  • 고려대학교(시)
    작품
    고려대학교(시)
    1994년 오탁번이 발표한 시집 『겨울강』에 수록된 시이다. 고려대학교의 학생이자 교수였던 시인은 고려대학교 정문에 문패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시인은 안암동에 정체성처럼 자리 잡은 고려대학교를 ‘아무 빛깔 없으면서도 모든 맛을 다 지닌’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
    작품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
    1960년 5월 3일 『고대신문』 제238호에 실리면서 공개되었다. 시집으로 엮인 것은 1964년 일조각(一潮閣)에서 출판된 『여운(餘韻)』에서이다. 시집에서 시 말미에 적힌 창작일은 1960년 4월 20일이다. 4.19혁명을 이끈 학생들을 선생의 입장에서 지켜본 소회를 적은 시로, 불의에 맞서는 학생들의 생각지 못했던 모습을 마주한 놀람과 스승이자 선배로서 앞장서지 못한 부끄럼움을 고백하고 있다. 고대신문에 실린 원문과 『여운』이나 『조지훈 전집』에 실린 것은 시의 형태가 많이 다르다. 최초 지면에서는 이후에 실린 시보다 훨씬 격정적이며 거친 말이 많이 등장한다.
  • 절망의 일기
    작품
    절망의 일기
    1959년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에서 발간한 제4시집 『역사 앞에서』에 수록된 작품이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서 나흘 간의 경험을 날짜 별로 기록하고 있다.
  • 허정남 4.18, 4.19혁명 인터뷰
    시청각류
    허정남 4.18, 4.19혁명 인터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4.18고대생의거에 대한 허정남의 인터뷰 영상이다. 고려대학교 농예화학과에 재학했던 구술자가 기억하는 1960년 4‧18 고려대 시위의 발생 배경과 시위대의 행진 경로 등을 담고 있다.
  • 노재동 4.18, 4.19혁명 인터뷰
    시청각류
    노재동 4.18, 4.19혁명 인터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4.18고대생의거에 대한 노재동의 인터뷰 영상이다. 경찰들의 학원 감독이 심했던 당시의 상황과 4월 18일 당일의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 김병총 4.18, 4.19혁명 인터뷰
    시청각류
    김병총 4.18, 4.19혁명 인터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4.18고대학생의거에 대한 김병총의 인터뷰 영상이다. 4.18고대학생의거의 배경과 4‧18 당일의 학생들의 동향에 대한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 4·19 혁명 부상자 명단(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1)
    시청각류
    4·19 혁명 부상자 명단(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1)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4·19 혁명 부상자 명단(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 이미지이다.
  • 4·19 혁명 부상자 명단(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2)
    시청각류
    4·19 혁명 부상자 명단(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4·19 혁명 부상자 명단(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 이미지이다.
  • 4·19 혁명 부상자 명단(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3)
    시청각류
    4·19 혁명 부상자 명단(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3)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4·19 혁명 부상자 명단(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 이미지이다.
  • "高大生襲擊(고대생습격)한『깡패』빨리잡으라"
    기타
    "高大生襲擊(고대생습격)한『깡패』빨리잡으라"
    내용: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습격한 깡패들을 조속히 체포하라는 내용의 기사이다. 4.19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신문명: 동아일보 발행일: 1960년 4월 23일 발행구분: 조간 기사위치: 3면
  • <일부(一部) 데모대원(隊員)>30대(臺)의 『추럭』에 분승(分乘)
    기타
    <일부(一部) 데모대원(隊員)>30대(臺)의 『추럭』에 분승(分乘)
    내용: 4.19 혁명 참가자들이 미아리고개를 넘어가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 신문명: 동아일보 발행일: 1960년 4월 20일 수요일 발행 구분: 석간 발행 호수: 제11702호 기사 위치: 3면 10단
  •  大學生(대학생)『데모』도全國(전국)에波及(파급)?
    기타
    大學生(대학생)『데모』도全國(전국)에波及(파급)?
    내용: 3.15 부통령선거이래 산발적으로 전개되어 오던 학생들의 데모가 18일을 기해 부산, 청주 등지를 위시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될 기세를 보이는 가운데 격화되었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특히 18일 오후 1시를 기점으로 고려대학생 3,000여 명이 대학생으로서는 최초로 서울에서 데모를 강행하면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생들이 동요할지를 두고 비상한 관심이 집중된다고 보도하고 있다. 신문명: 동아일보 발행일: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발행 구분: 석간 발행 호수: 제11701호 기사 위치: 1면 1단
  • 서울高大生(고대생)데모 AP報道(보도)
    기타
    서울高大生(고대생)데모 AP報道(보도)
    내용: 1960년 4월 18일 약 5천 명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부통령선거를 규탄하여 경찰의 봉쇄를 뚫고 행진한다는 기사이다. 신문명: 조선일보 발행일: 1960년 4월 19일 발행구분: 조간 기사위치: 1면
  • 4.19의 導火線(도화선)
    기타
    4.19의 導火線(도화선)
    내용: 1961년 4월 18일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려대학교 학생들에 대해 다룬 기사이다. 부통령 선거에 대한 부당함과 민주주의를 위해 데모를 실시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문명: 조선일보 발행일: 1961년 4월 18일 발행구분: 조간 기사위치: 3면
  •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관(1)
    시청각류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관(1)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학술정보관이 위치한 100주년 기념관의 모습이다.
  •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관(2)
    시청각류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관(2)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학술정보관이 위치한 100주년 기념관의 모습이다. 사진 속 출입구는 박물관으로 연결되는 출입구이다.
  • 김병길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시청각류
    김병길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에 대한 김병길의 인터뷰 영상이다. 구술자가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에 참여하고 고려대 6.2 및 6.3시위에서 박정희 정권 하야 구호를 외쳤던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 박정훈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시청각류
    박정훈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에 대한 박정훈의 인터뷰 영상이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했던 구술자가 민족적 민주주의 부활식 기도를 반대하고, 5.25난국타개궐기대회를 준비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박철현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시청각류
    박철현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에 대한 박철현의 인터뷰 영상이다. 고려대학교 서클인 민주정치사상연구회(민정회)에서 활동했던 구술자가 기억하는 한일협정반대운동 준비 과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 서진영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시청각류
    서진영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에 대한 서진영의 인터뷰 영상이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과에 재학했던 구술자가 선배들과 6월 6일 현충일 행사 때에 데모를 하기로 결정했던 내막 등을 담고 있다.
  • 오충수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시청각류
    오충수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운동에 대한 오충수의 인터뷰 영상이다. 구술자가 기억하는 고려대 한일협정반대운동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정성헌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시청각류
    정성헌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에 대한 정성헌의 인터뷰 영상이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했던 구술자의 한일회담에 대한 당시의 생각과 6.2시위 준비와 결행 과정 등을 담고 있다.
  • 조홍규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시청각류
    조홍규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에 대한 조홍규의 인터뷰 영상이다. 구술자가 고려대 한일협정반대운동 당시에 각종 시위 선언문을 써주고 맹건영, 최효식 등과 소통하며 학생운동을 지도했던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 최장집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시청각류
    최장집 한일회담·한일협정반대운동 인터뷰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한 최장집의 인터뷰 영상이다. 구술자가 고려대학교에 재학했던 당시에 박정희 정권 하야 구호가 등장했던 내막과 독재를 반대하는 구호가 6.2시위, 6.3시위에 사용된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 서울大(대),高大(고대),延大學生(연대학생)들 韓(한)·日會談反對(일회담반대)「데모」
    기타
    서울大(대),高大(고대),延大學生(연대학생)들 韓(한)·日會談反對(일회담반대)「데모」
    내용: 1964년 3월 24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 데모를 다룬 기사이다. 당시 대학생들의 일본에 대한 분노와 반대 이유 등을 담은 내용이 실려있다. 신문명: 경향신문 발행일: 1964년 3월 24일 기사위치: 1면
  • 「젊은 隊列(대열)」흩어져도 데모大學生(대학생)의 手記(수기)
    기타
    「젊은 隊列(대열)」흩어져도 데모大學生(대학생)의 手記(수기)
    내용: 1964년 3월 28일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선두에 나선 대학생들의 수기를 소개한 기사이다. 데모의 과정과 상세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신문명: 동아일보 발행일: 1964년 3월 28일 기사위치: 3면
  • 일제히 聲討(성토)…街頭(가두)로
    기타
    일제히 聲討(성토)…街頭(가두)로
    내용: 1965년 6월 21일 고려대 등 한일회담 중지를 요구하는 대학가의 시위를 다룬 기사이다. 한일회담 반대 데모에 대한 자세한 정황과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신문명: 동아일보 발행일: 1965년 6월 21일 기사위치: 3면
  • 안암동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대일외교반대성토대회
    기타
    안암동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대일외교반대성토대회
    내용: 1965년 6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대일외교반대성토대회를 다룬 기사이다. 당시 선언문과 시위의 과정을 간략히 묘사하고 있다. 신문명: 동아일보 발행일: 1965년 6월 18일 기사위치: 3면
  • 벼랑에선 沮止(저지)와沮止(저지)
    기타
    벼랑에선 沮止(저지)와沮止(저지)
    내용: 1965년 6월 22일 고려대 등의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다룬 기사이다. 데모에 대한 구체적 내용들이 담겨 있다. 신문명: 동아일보 발행일: 1965년 6월 22일 기사위치: 7면
  • 學期末(학기말) 試驗(시험)도 보이코트하고 高大生(고대생)들 데모
    기타
    學期末(학기말) 試驗(시험)도 보이코트하고 高大生(고대생)들 데모
    내용: 1965년 6월 29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험 거부와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다룬 기사이다. 성토대회의 과정과 이후 이루어진 데모의 과정을 간략하게 요약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문명: 경향신문 발행일: 1965년 6월 29일 기사위치: 3면
  • 김극기 3선개헌반대운동 인터뷰
    시청각류
    김극기 3선개헌반대운동 인터뷰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3선개헌반대운동에 대한 김극기의 인터뷰 영상이다. 구술자가 고려대학교 재학 중에 한국사상연구회를 만드는 데에 참여하고, 한국사상연구회와 민족사상연구회가 합쳐져 '한국민족사상연구회'가 된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 조춘구 3선개헌반대운동 인터뷰
    시청각류
    조춘구 3선개헌반대운동 인터뷰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3선개헌반대운동에 대한 조춘구의 인터뷰 영상이다. 구술자가 고려대학교 재학 중에 3선개헌반대운동을 위해 전체 학생의 분위기 고조에 일조하고, 데모 가담을 결심한 후에 마이크를 잡고 대중 동원에 성공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 함상근 3선개헌반대운동 인터뷰
    시청각류
    함상근 3선개헌반대운동 인터뷰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3선개헌반대운동에 대한 함상근의 인터뷰 영상이다. 구술자가 고려대 이념서클인 '한맥'에서 광주대단지 실태를 고발했던 글을 쓴 이야기 등을 담고 있어 당시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 五百(오백)여高大生(고대생) 改憲反對(개헌반대)데모
    기타
    五百(오백)여高大生(고대생) 改憲反對(개헌반대)데모
    내용: 1969년 6월 27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개헌 반대 데모를 다룬 기사이다. 민주헌정수호 성토대회와 이후 개헌에 대한 반대 데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신문명: 동아일보 발행일: 1969년 6월 27일 기사위치: 3면
  • 開學後三日(개학후삼일)째 改憲反對(개헌반대)데모 高麗大(고려대)
    기타
    開學後三日(개학후삼일)째 改憲反對(개헌반대)데모 高麗大(고려대)
    내용: 1969년 8월 27일 개학 후 3일 째 진행 중인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개헌 반대 데모를 다룬 기사이다. 데모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문명: 동아일보 발행일: 1969년 8월 27일 기사위치: 3면
  • 高大生(고대생)들 또 데모
    기타
    高大生(고대생)들 또 데모
    내용: 1969년 6월 29일 고려대학교 학생 600여 명의 개헌 반대 데모와 경찰과의 대치를 다룬 기사이다. 데모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담고 있다. 신문명: 조선일보 발행일: 1969년 6월 29일 기사위치: 7면
  • 高麗大(고려대) 세차례街頭(가두)로
    기타
    高麗大(고려대) 세차례街頭(가두)로
    내용: 1969년 7월 2일 고려대학교 학생 600여 명의 개헌 반대 데모와 경찰과의 충돌을 다룬 기사이다. 대치 내용을 간략히 담고 있다. 신문명: 동아일보 발행일: 1969년 7월 2일 기사위치: 3면
  • 森嚴(삼엄)한 켐퍼스 武裝軍人(무장군인)들 校門(교문)봉쇄 高麗大(고려대)
    기타
    森嚴(삼엄)한 켐퍼스 武裝軍人(무장군인)들 校門(교문)봉쇄 高麗大(고려대)
    내용: 1975년 4월 9일 무장군인 3백여 명이 고려대학교 정문을 봉쇄하고, 교내에 배치되었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독재를 반대하는 학생들에 대비한 긴급조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문명: 조선일보 발행일: 1975년 4월 9일 기사위치: 7면
  • 고려대학교 대학원관(구 중앙도서관)
    시청각류
    고려대학교 대학원관(구 중앙도서관)
    2015년에 촬영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사진이다. 이 건물은 사적 제286호로 지정되어 있다.
  •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시청각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현재의 대학원관)의 사진이다. 이 건물은 사적 제286호로, 현재는 대학원 건물로 이용되고 있다.
  • 고려대학교 본관 외관
    시청각류
    고려대학교 본관 외관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고려대학교 본관 외관 사진이다. 이 사진은 서울경관기록화의 일환으로 촬영되었다.
  • 고려대학교 본관 - 서울 성북구 안암동
    시청각류
    고려대학교 본관 - 서울 성북구 안암동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고려대학교 본관의 사진이다.
  • 고려대학교 본관 주변 전경
    시청각류
    고려대학교 본관 주변 전경
    서울연구데이터베이스에서 수집한 고려대학교 본관 주변 전경 사진이다. 고려대학교, 개운산, 종암현대아이파크2차아파트, 북한산국립공원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 사진은 서울경관기록화의 일환으로 촬영되었다.
  • 고려대학교 국제관
    시청각류
    고려대학교 국제관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고려대학교 국제관 사진이다. 이 사진은 2000 서울시 사진기록화사업의 일환으로 촬영되었다.
  • 옛 고려대학교 전경
    시청각류
    옛 고려대학교 전경
    성북구청으로부터 제공받은 옛 고려대학교 전경 사진이다.
  • 고려대학교 중앙광장(대운동장)
    시청각류
    고려대학교 중앙광장(대운동장)
    서울연구데이터베이스에서 수집한 고려대학교 중앙광장 사진이다. 이 사진은 서울경관기록화의 일환으로 촬영되었다.
  • 고려대학교 SK미래관
    시청각류
    고려대학교 SK미래관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사진이다. 고려대학교 SK 미래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사진은 서울경관기록화 6차 사업의 일환으로 촬영되었다.
  • 고려대학교 정문
    시청각류
    고려대학교 정문
    서울연구데이터베이스에서 수집한 고려대학교 정문 사진이다. 이 사진은 서울경관기록화 6차 사업의 일환으로 촬영되었다.
  • 고려대학교 의료원 안암병원
    장소
    고려대학교 의료원 안암병원
    성북구 고려대로 73에 위치한 병원이다. 1941년 종로구 혜화동에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으로 개원하였고, 30여 년간 학교법인 우석학원에서 경영하면서 병원의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71년 고려중앙학원이 우석학원을 병합함에 따라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우석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76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다시 바뀌었다. 1983년에는 부속병원을 총괄·운영하는 고려대학교 의료원이 발족하면서 의료원 산하가 되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부속 혜화병원’으로 변경하였다. 1991년에 안암동에 부속병원을 신축하여 이전하면서 이름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부속 안암병원’으로 바뀌고, 성북구 지역 최대 거점병원으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최동호
    인물
    최동호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교수로 1988년부터 2014년까지 재직하였다. 1948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여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지방 도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고등학생 시절 동급생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암송하는 것을 듣고 시를 쓰는 문학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76년에 첫 시집 『황사 바람』을 발간한 후 다수의 시집을 펴냈다. 본격적인 문학평론 활동은 1979년 『중앙일보』 신촌문예에 「꽃, 그 시적 형상의 구조와 미학」이 당선되면서 시작한다. 1985년 첫 시론집 『현대시의 정신사』를 간행한 후 다수의 시집과 평론집을 출간했다. 문예지 『서정시학』과 『미래서정』을 창간했다.
  • 안암로
    장소
    안암로
    성북구 안암동의 동명으로 붙여진 도로명이다. 보문로와 교차하는 대광고등학교(현 동대문구 신설동)를 기점으로 하여 고려대학교를 지나 종암로와 만나는 지점까지의 구간이다. 전구간이 동대문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19세기 중엽 김정희의 『대동여지도』에도 나타나는 길로, 동대문을 나와 안암동, 미아리를 고쳐 수유에 이르는 길이었다. 1961년 미아리~제기동 구간 약 2.1㎞의 확장공사가 이루어졌으며, 1962년에도 미아리~안암동 구간 약 3.6㎞의 확장공사가 완료되었다. 1966년 11월 도심권 간선도로에 대한 가로명을 제정할 때 처음 이름 붙여졌다. 이때는 대광중학교에서 고려대학교 앞에 이르는 구간까지만이었다. 1984년 11월 서울특별시고시에 의해 종점을 종암동삼거리로 변경하면서 안암로가 연장되었다.
  • 참살이길
    장소
    참살이길
    성북구 안암동의 길 이름이다. 안암역 교차로에서 안암오거리로 이어지는 길로, 공식명칭은 ‘고려대로24길’이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막걸리 집이나 몇 군데 있는 소박한 길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유흥·향락업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고려대 학생들은 이를 우려하여 해당 업소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펼친 적도 있다고 한다. 1992년 9월에는 ‘안암동 우리마당’이라는 행사를 열고 이 길은 학생들의 주인인 길이라 선언하면서 ‘참된 삶의 길’, ‘참된 삶이 이루어지는 길’ 등의 의미를 담아 ‘참살이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2018년부터는 참살이길 일대에서 지역주민, 상인, 학생이 함께 소통하며 지역의 활기를 불어넣고, 안암동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알리기 위한 ‘끌어안암’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 끌어안암
    사건
    끌어안암
    매년 가을 성북구 안암동 5가 참살이길 일대에서 진행되는 지역문화축제이다. 이 축제는 안암동 주민들과 고려대 재학생들 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고려대 안암동 캠퍼스타운을 새로운 문화 명소로 바꾸어 나가려는 취지에서 지역의 풍부한 역사, 문화, 생활콘텐츠를 소재로 하여 기획되었다. 2019년 끌어안암은 청년 창업 회사 소개 및 창업아이템을 체험 및 구매할 수 있는 창업마당, 기업 홍보부스 및 채용정보를 공유하는 취업마당, 전시와 문화공연이 있는 예술마당, 전통놀이와 어린이 놀이체험 부스가 마련된 놀이마당, 성북구 주민들이 플리마켓과 푸드마켓을 연 소소마당으로 구성되었다.
  • 안암동 주민센터
    장소
    안암동 주민센터
    성북구 고려대로(안암동2가 140-4)에 위치한 행정기관이다. 안암동은 대광아파트 단지 내에 있었던 큰 바위의 이름인 ‘앉일바위’를 한자로 옮겨 쓴 것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성북구의 신설로 이에 속가에 되었으며, 안암동은 1~5가로 구분되었다. 1975년 안암교에서 고려대학교 이공대 앞에 이르는 안암동 동남지역 일대의 4, 5가의 일부가 동대문구의 용두동과 제기동으로 개편되었다. 현재 안암동 주민센터는 안암동 1~5가 전 지역을 담당하고 있다. 2020년 6월 기준으로 담당면적은 1.33㎢이고, 인구수는 1만 5천여 명, 세대수는 9,174세대이다.
  • 용문고등학교
    장소, 인물
    용문고등학교
    성북구 고려대로17가길 46(안암동2가 96-1)에 위치한 사립고등학교이다. 용문고등학교는 1946년 11월에 창신동에 설립된 성도중학교(城都中學校)로 출발하였다. 1949년 4월에 재단법인 겸산학원이 설립인가를 얻었고, 1952년 학제변경에 따라 강문고등학교(康文高等學校)로 개편되었다. 이어 1953년 8월에는 재단법인 강문학원으로 변경되었으며, 1964년 4월에는 창신동에서 지금의 안암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70년 3월 1일에는 학교법인 용문학원으로 변경 인가를 받아 교명도 용문고등학교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오랜 전통을 지닌 축구부와 육상부문 등에서의 활동도 두드러진다.
  • 용문중학교
    장소, 인물
    용문중학교
    성북구 고려대로17길 46(안암동2가 96-1)에 위치한 사립고등학교이다. 1946년 11월 19일 성도중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고, 1949년 4월 재단법인 겸산학원 설립을 인가받았다. 1953년 5월 명성중학교를 인수하고, 재단법인 강문학원으로 개칭하였다. 1964년 4월 30일 창신동 교사에서 안암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1970년 3월 학교법인 용문학원으로 변경하고 용문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교훈은 ‘배우자, 참되자, 이기자’이며,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선진 조국을 이끌어갈 자율적이고 실력과 인성을 갖춘 도덕적 창의적 인간 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다. 2020년 1월 8일 제69회 졸업식을 진행하였다.
  • 서울안암초등학교
    장소, 인물
    서울안암초등학교
    성북구 고려대로7가길 39(안암동2가 93)가에 위치한 공립초등학교이다. 1956년 3월 24일 설립 인가를 받았다. 교훈은 ‘즐겁게 공부하고, 바르게 행동하며, 튼튼하게 자라자’이다. 미래핵심역량을 갖추고 꿈을 키워가는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핵심역량중심교육, 실천중심 협력적 인성교육, 체험 중심 진료교육 등의 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2019년 서울형혁신학교로 재지정 받았고, 같은 해 2019 청렴 우수학교 교육장 표창을 받았다.2020년 2월 제58회 졸업식을 진행하고 누적 졸업생 13,919명을 배출하였다.
  • 안감내
    장소
    안감내
    보문동 대광초등학교부터 성북구청, 돈암동성당 쪽까지 안암동을 지나가는 성북천의 일부를 부르는 이름이다. 안암천이라고도 불렸다. 안감천변을 따라오는 지선도로는 안감내길이라고 불렀다. 한편 ‘안감내’라는 이름과 관련한 설화가 전한다. 조선시대 안암동에 살던 채소장수 안감이란 사람이 도성 안에 살던 대감에게 선행을 베풀었고, 감동한 대감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였는데, 안감이 안암천을 건널 수 있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하여 소원대로 다리를 놓고 그 이름을 ‘안감내다리’라고 부르고 하천을 ‘안감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 안감내다리
    장소
    안감내다리
    성북천을 가로질러 성북구 보문동 4가와 안암동 3가를 잇는 안암교 자리에 있었던 옛 다리의 이름이다. 성북구 성북동에서 발원하여 삼선동 보문동 안암동을 지나고 동대문구 신설동을 거쳐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성북천의 옛 이름은 안암천이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보문동과 안암동을 연결하는 다리가 놓여 ‘안감내다리’라고 불렸다. 그런데 이 다리가 놓여진 데에는 설화가 있는데, 안암동에 살던 채소장수 안감이란 사람이 도성 안에 살던 대감에게 선행을 베풀었고, 감동한 대감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였는데, 안감이 안암천을 건널 수 있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하여 소원대로 다리를 놓고 그 이름을 ‘안감내다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 안감내길
    장소
    안감내길
    안암동 대광초등학교에서 안암천 건너편부터 돈암사거리에 이르는 지선도로이다. 안감내길은 안암동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성북구청 뒤를 거쳐 돈암동성당 앞을 지나 동소문동5가까지 이른다. 성북구 성북동에서 발원하여 삼선동, 보문동, 안암동을 지나고 동대문구 신설동을 거쳐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성북천의 옛 이름은 안암천이었으며, 안감내길이란 이름은 안암천의 옛 명칭인 안감내에서 유래하였다. 안감내에 얽힌 전설은 안암동에 살던 채소장수 안감이란 사람이 도성 안에 살던 대감에게 선행을 베풀었고, 감동한 대감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였는데, 안감이 안암천을 건널 수 있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하여 소원대로 다리를 놓고 그 이름을 ‘안감내다리’라고 불렀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그 개천을 안감내라고 하였다고 한다.
  • 원불교 안암교당
    장소
    원불교 안암교당
    성북구 안암로 27-7(안암동4가 41-21)에 위치한 종교 시설이다. 원불교 안암교당은 건축가 김인철의 작업으로, 지상 2층, 지하 1층, 100평(339㎡)의 대지에 연면적 177평(583㎡) 규모이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적벽돌로 마감되어 가로면에서도 눈에 띄는 건축물이다. 남북 도로에 면한 동쪽에서 진입하면 만나는 로비 부분과, 외부 기둥과 원통형 천장으로 싸인 1층 실내와 2층 법당 공간이 두 개의 매스로 나누어져 변화를 주고 있다. 현재 담장은 황토 기와 담장으로 바뀌었다. 이 지역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축물로 자리하고 있다.
  • 노을진 들녘
    작품
    노을진 들녘
    1961년 10월 23일부터 1962년 7월 1일까지 총 250회에 걸쳐 『경향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1960년대 박경리 작품의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며, 연재 후 곧바로 단행본이 나오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박경리가 『노을진 들녘』 연재 전에 이미 24회를 집필해놓았으며, 5년전부터 구상해왔다는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이 작품에 대한 박경리의 애정을 알 수 있다. 박경리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인 불륜, 절손, 억지결혼이 골고루 드러나며, "박경리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핵심 모티프와 작가의식이 담긴 소설"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 길
    작품
    『길』은 주요섭이 1953년 2월 20일부터 동년 8월 7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장편 소설이다. 삼성출판사에서 1972년에 문고본을 발행하였다. 이 작품은 6.25전쟁 초기 서울에서 거주했던 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로, 전쟁의 참상과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시간적 배경은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26일까지로, 기간은 매우 짧으나 서울 함락과 수복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인물의 심리 묘사가 치밀하게 되어 있어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작품의 주된 배경 중 한 곳으로 돈암동과 안암동이 등장하며, 미아리고개를 넘어 오는 피난민들에 대한 묘사가 있어 6.25전쟁 당시 성북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 보타사
    장소
    보타사
    성북구 개운사길 60-46(안암동 5가 7)에 위치한 사찰이다. 보타사는 개운사의 암자인데, 이 절의 전각들이 비교적 규모가 작은 데 비해 높이가 5m나 되는 마애불이 눈에 띈다. 마애불은 대웅전 뒤에 있는데, 좌상의 형태이고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큰 바위에 부조로 새겨진 이 마애불상은 몸 전체에 호분(胡粉)이 칠해져 있어서 ‘백불(白佛)’이라고도 부른다. 보타사 마애좌상은 현재 보물 제182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유물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개운사(성북구 개운사길 60-46)의 암자(칠성암)인 보타사 대웅전 뒤쪽 화강암 암벽에 조각된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이다. 거대한 보살상 머리에는 좌우 옆으로 뿔이 있는 관이 있고, 뿔끝에는 다양하게 장식된 타원형 느리개가 있다. 보타사의 전각들이 비교적 규모가 작은 것에 비해 이 미륵불은 그 높이가 5m나 되는데 이는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다. 큰 바위에 부조로 새겨진 이 마애불상은 몸 전체에 호분(胡粉)이 칠해져 있어서 흔히 백불(白佛)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초기 서울지역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보살상으로,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7월 2일 보물 제1828호로 지정되었다.
  •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유물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보타사가 보유하고 있는 금동으로 만든 보살상이다. 조성과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제작연대, 조각자, 시주자, 봉안 사찰 등을 알 수 없지만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크기로 볼 때 조선 초 왕실이나 지배층이 발원하여 조성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대좌 위에 앉아 있는 좌상으로, 왼쪽 다리는 대좌 아래로 내려뜨려 바닥을 딛고 오른쪽 다리는 무릎을 세우고 앉는 유희좌(遊戱座)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을 뿐 아니라 조선 초기에 유행한 귀족적 면모의 보살상 양식을 보여주는 예로서, 조선 전기 불교조각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2014년 3월 11일 보물 제1818호로 지정되었다.
  • 개운사
    장소, 유물
    개운사
    성북구 개운사길 73(안암동 5가 157)에 자리한 사찰이다. 1396년(태조 5)에 무학대사가 현재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에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고 이름 지었다. 그 후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묘인 인명원(仁明園)이 절 옆에 세워지자, 영도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절의 이름을 개운사(開運寺)로 바꾼 시기는 절을 옮긴 시점일 가능성이 크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절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1926년부터 근대 불교의 대표적인 석학이었던 승려 박한영이 이 곳에서 많은 제자를 키워냈고, 선사 탄허가 개운사의 암자인 대원암에서 불경 번역에 힘썼다. 현재 개운사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보물 1점과 서울특별시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 5점이 보관되어 있다.
  • 개운사 팔상도
    유물
    개운사 팔상도
    개운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팔상도이다. 1883년(고종 20)에 대허 체훈과 금곡 영환, 한봉 창엽이 그린 것이다. 이 불화는 19세기 후반 서울・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화면 분할식 불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한 화면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것이다. 원색의 남용과 일부 팔상장면의 생략, 화면 분할식 구도 등 18세기 팔상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19세기 팔상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서 서울 지역에 예가 많지 않은 팔상도 중 하나이다. 이와 함께 19세기 후반 서울・경기지역 화승의 새로운 도상과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006년 7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 개운사 대웅전 지장시왕도
    유물
    개운사 대웅전 지장시왕도
    개운사에 봉안된 조선 후기 불화이다. 1870년(고종 7)에 서울 지역의 대표적 화승인 경선 응석, 봉감, 자한, 체훈 등이 함께 조성하였다. 개운사 대웅전의 향좌측 벽에 봉안되어 있다. 선악동자를 함께 그린 지장시왕도 형식의 대표작으로, 응석과 그 제자들이 그린 이런 형식의 지장보살도 중 개운사 불화는 가장 선구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유난히 가늘고 긴 눈과 아주 작은 입 등 얼굴 한 가운데로 몰려있는 이목구비라든가 놀란 듯한 동그란 눈동자와 좁은 미간, 눈 주위와 코, 뺨 부분에 음영을 표현하여 얼굴의 골격을 강조한 점은 다른 지역의 불화와 구별되는 서울·경기 지역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06년 7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5호로 지정되었다.
  • 개운사 신중도
    유물
    개운사 신중도
    개운사에 봉안된 조선 후기의 불교 유물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67.2㎝, 가로 193㎝. 범천과 제석천, 위태천을 중심으로 많은 신중들을 표현한 신중도이다. 조성 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불화의 양식적 특징과 조성 화원으로 볼 때 반대쪽에 봉안된 지장시왕도와 같은 시기인 1870년(고종 7)으로 추정된다. 천부중과 천룡팔부를 한 폭에 묘사한 형식이라든가 산신과 조왕신이 위태천의 협시로 등장하는 점, 주악천녀 등의 등장은 19세기 신중탱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면서도 다양한 존상의 세밀한 표현과 균형을 이루는 구성, 더불어 화사의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2006년 7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
    유물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
    개운사가 보유하고 있는 불상과 복장 유물이다. 중수발원문에는 충청남도 아산 축봉사에 봉안되어 있던 사실과 고려 충렬왕이 즉위했던 1274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제작된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 불상은 단엄한 상호, 세련되고 뛰어난 조각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 감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 등이 잘 어우러진 매우 완성도 높은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불상 내에서 발견된 다수의 발원문은 각기 작성한 연대가 표시되어 있어 구체적인 시기를 알 수 있고,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복장 유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2010년 4월 23일 보물 164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전적
    유물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전적
    개운사 미타전에 봉안된 목조 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발견된 복장유물이다. 충청남도 아산 축봉사에서 13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에서 나온 복장유물은 발원문 3점, 신라 하대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간행된 불서 22점, 조선시대 목판본 불서 6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다라니 8점, 탁본 1점, 족자 1점이다. 고려시대의 전적류와 함께 중수기에 등장하는 시기 외에 조선 후기에 들어서 재차 중수 및 이에 따른 복장 납입이 이루어졌으며, 이때 납입된 경전을 통해 당시의 신앙과 아미타불상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불상을 포함한 개금기 3건과 대방광불화엄경 사경 7건, 대방광불화엄경 인본 15건 등 총 25건은 2010년 4월 23일 보물 제1650호로 지정되었다. 이 복장전적은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 개운사 감로도
    유물
    개운사 감로도
    개운사(성북구 개운사길 73)가 소장하고 있는 불화이다. 이 감로도는 1883년에 30여 명에 달하는 많은 상궁들의 시주에 의해 제작된 불화로서 대허 체훈(大虛 軆訓)과 천기(天機), 수일(守一), 태삼(台三) 등이 그린 것이다. 감로도(甘露圖)는 지옥 아귀도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부처에게 설법을 듣는 불화로, 개운사의 감로도는 19세기 중엽 이후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한 감로왕도의 전형적인 도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조성 당시 불교의 재의식 장면을 비롯하여 서민들의 생활상 등 수륙재(水陸齋)의식과 생활상을 충실히 묘사했으며, 30여 명에 이르는 상궁들의 시주로 제작된 불화로서 당시 왕실에서의 불화발원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2006년 7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 대원암
    장소, 유물
    대원암
    성북구 개운사길 60-46(안암동 5가 8)에 위치한 사찰이다. 대원암은 개운사에 딸린 암자인데, 1845년(헌종 11)에 우기(祐祈, 호는 지봉)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 불교계의 석학인 박한영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많은 석학을 배출하였다. 당시에는 출가 제자 뿐만 아니라 신석정, 서정주, 홍명희, 이광수, 최남선, 정인보 등 당대 대표적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다. 1970년대에는 탄허스님이 이곳에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의 역경사업에 힘썼다.
  • 오봉리 지석묘
    장소
    오봉리 지석묘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 고려대학교 안에 있는 고인돌이다. 이 지석묘는 고려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팀이 주암댐 수몰지역 문화유적 발굴 조사 계획의 일환으로 전남 승주군 송광면 오봉리 신월 799번지에 해당되는 보성강 유역의 퇴적지에 16기가 남북으로 4열을 이루면서 군집되어 있던 것을 1986년 12월 1일~1987년 1월 6일에 발굴 조사할 때 발견된 것이다. 출토유물로는 홍도, 마제석검, 마제석촉, 삼각형석도, 대팻날, 무문토기편 등의 다양한 유물이 있으며 특이한 하부구조는 학술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고려대학교박물관에서는 발굴 조사된 지석묘들 중에서 4기와 그 하부구조를 1988년 12월 5일에 이전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했다.
  • 봉갑리 지석묘
    장소
    봉갑리 지석묘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 고려대학교 안에 있는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인 봉갑리 지석묘는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1987년 8월 주암(住岩) 댐 수몰 지역 문화 유적 발굴 조사 때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봉갑리, 보성강(寶城江) 유역의 돌출된 낮은 구릉의 말단 부분에 14기가 군집 분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출토 유물로는 마제석촉(磨製石鏃), 삼각형석도(三角形石刀) 등이 있는데 1989년 10월 30일 현재의 자리로 이동 전시했다.
  • 보제원 터
    장소
    보제원 터
    성북구 안암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구휼기관 보제원의 터이다. 1530년(중종 25)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에 따르면 한성부 동대문 밖의 보제원, 서대문 밖의 홍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 등 네 개의 원이 설치되어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공무 수행자에 대해 말과 숙식 제공 등이 주된 임무였으나, 그밖에 굶주린 백성들에 대한 구휼 업무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안암동천·제기현·고암을 거쳐 수유리를 지나 노원역에 이르러 경흥으로 향하는 동북 제2로에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현재 보제원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 할 수는 없으나 안암오거리 버스정류장 옆(동대문구 양령시로 2 앞)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 안암아파트
    장소
    안암아파트
    성북구 안암로9가길 9-16(안암동4가 23-3)에 위치한 주택시설이다. 1969년 안암동에 처음으로 건설된 아파트로 당시에는 꽤 고급 아파트여서 ‘안암 맨션’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안암아파트는 ㄷ자형 평면에 一자형 평면이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독특한 모양의 평면을 가지고 있다. 북쪽에서 진입하게 되어 있고, 남쪽으로 마당이 있는데, 이 마당이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 마당에서는 7층 규모로 보이며, 반대편 북쪽의 주 출입구에서는 6층으로 보인다. 남쪽의 마당으로 복도가 면하여 있는 구조로 지어졌다. 현재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고려대 교수들과 공무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건축 시 최고급 자재를 썼기 때문에 지금도 안전상 문제가 거의 없는 튼튼함을 자랑한다.
  • 대광아파트
    장소
    대광아파트
    성북구 안암로9나길 14(안암동 3가 136-1)에 위치한 공동주택이다. 대광아파트는 1971년 건축된 민영아파트로서, 안암동의 바위산 위에 최대한의 건물을 올리고자 하여 독특한 구조를 지어졌다. 현재 고려대학교 공대와 바로 접해 있는데, 당시로서는 고급 맨션으로 지어져 고려대학교 교직원을 주요 대상으로 분양되었다. 안암동의 지명유래와 관련있는 넓직한 바위가 아파트의 바로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 삼익아파트
    장소
    삼익아파트
    성북구 안암로9길 30(안암동3가 135)에 위치한 공동주택이다. 안암동 삼익아파트는 1983년에 완공되어 입주하였는데, 전체 204세대 규모의 작은 단지이지만 넓은 평수 중심으로 지어져 고급 아파트로 인식되었고, 이미 자리잡고 있었던 바로 위의 대광아파트와 옆의 안암아파트까지 연결된 작은 아파트촌이 형성되었다. 대광아파트와 삼익아파트 사이에는 안암동의 지명유래와 관련된 널찍한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 안암동 후생주택(재건주택)
    장소
    안암동 후생주택(재건주택)
    성북구 안암동5가 103번지 일대에 건설된 주택을 말한다. 후생주택(재건주택)이란 정부계획에 의거하여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이 원조하는 자재 및 자금으로 건설, 관리하는 주택을 말한다. 1953년 12월, 대한주택영단(현 LH공사)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안암동 개운사 앞(현 안암동5가 우신향병원 북서쪽과 고려대로 24길 동쪽 지역)에 49채의 후생주택을 지었다. 주택의 평면은 田자 모양의 겹집 형식으로 흙벽돌로 쌓았으며, 마루 한 칸, 방 두 칸, 부엌 한 칸의 구조로 연탄난방 방식을 채택했다. 안암동에 후생주택이 건설된 이후 서울시내에는 정릉동, 회기동 등에 후생주택이 건설되어 입주가 시작되었다.
  • 안암동학더미
    장소
    안암동학더미
    안암동의 옛 지명 중 하나이다. 학더미라는 이름은 고암(鼓岩), 즉 북바위 부근 논 가운데 있던 더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옛날 이 곳의 땅은 매우 비옥하여 세마지기에서 나는 쌀로 10여 식구가 충분히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주인이 욕심을 내어 곡식을 더 많이 거두려고 논 가운데에 있는 큰 더미를 파내기 시작했는데, 그 때 더미 속에서 학이 나와 날아가버렸다고 한다. 그 후, 그 비옥하던 땅은 박토로 변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 안암동-미아동간 도로 개통
    사건
    안암동-미아동간 도로 개통
    성북구 안암동과 강북구 미아동 사이의 도로가 개통된 사건이다. 서울시의 권역이 계속 팽창하고 성북구를 비롯한 북쪽 지역의 인구와 주택이 빠르게 증가함에 따라 도로망의 확충이 필요해졌다. 당시 미아리 지역도 인구가 급속히 늘고, 서울 도심과 연결하는 도로가 필요했기 때문에 1962년에 안암동과 미아동을 잇는 도로를 포장·개통하였다. 개통 당시에는 안암동과 미아동이 서울의 외곽이었기 때문에 '안암동-미아동간 외곽순환도로 개통'이라는 제목으로 신문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 도로의 개통으로 서울 도심과 미아동 인구주택 밀집지역간 이동시간이 단축되었고, 안암동은 두 지역을 잇는 중간지점이 되었다.
  • 경동교회
    장소
    경동교회
    성북구 고려대로12길 31(안암동3가 55-2)에 위치한 종교시설이다. 1900년대의 서울지역 교회가 부홍하여 각처에 교회가 설립될 때 성북지역에도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미아리교회(현 돈암감리교회)가 성북지역 최초로 설립된 이후 점차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경동교회는 1946년 설립되었다. 현재의 교회본원 건물은 1995년 완공되었다.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로, 성북구 보문로의 주변 멀리서도 볼 수 있을 만큼 웅장함을 자아낸다. 교회의 입지는 급경사지로서 악조건이었고 빈약한 예산이었지만, 완성된 건물은 교회 활동에 맞게 복합적이고도 다목적 활용이 가능했으며, 성서적인 근거를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 자초
    인물
    자초
    승려이다. 호는 무학, 당호는 계월헌이다. 1344년에 출가하여 승려 소지의 제자가 되었으며, 혜명국사에게 불법을 배웠다. 1353년에 원의 연경에 유학하여 당시 연경에 있던 나옹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조선 개국 후 태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태조의 왕사로 책봉되었으며, 한양 천도에도 관여하였다. 개운사는 1396년에 자초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처음에는 영도사(永導寺)라 하였다. 이후 정조 3년(1779년) 정조의 후궁인 홍빈(洪嬪)의 묘 명인원(明仁園)이 절 옆에 들어서자 인파(仁波)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개운사로 개명하였다.
  • 임석재
    인물
    임석재
    심리학자이자 민속학자이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하였고, 1930년 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심리학을 전공하였다. 1927년부터 아까마쯔[赤松智城]·아끼바[秋葉隆] 교수들의 민속자료 수집을 도우면서 민속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으며, 1931년 평북 선천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더욱 본격화되었다. 1946년부터 1967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심리학교수로 재직하고, 심리학회 회장도 역임하였으나 민속학에 지속적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료수집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특히 한국의 무속신앙을 병립신관(竝立神觀)이라는 용어로 설명한 『한국무속연구서설』(1970)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임석재는 1960년대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30여 년간 안암동 자택에서 살았다.
  • 이은상
    인물
    이은상
    시조시인이자 사학자이다. 1920년대부터 『조선문단』 같은 잡지에서 시, 평론, 수필 등을 발표하였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전통문화와 시조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시조 연구와 시조 창작을 하였는데 이은상의 시조에 김동진, 홍난파, 윤이상 등이 곡을 붙인 「가고파」, 「봄처녀」, 「성불사의 밤」 등 가곡 1백여 곡이 전한다. 『조선사화집』, 『탐라기행한라산』, 『이충무공일대기』, 『노산시조집』, 『푸른 하늘의 뜻은』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1960~1970년대 안암동 104-43번지에서 거주하였다.
  • 1991년 연고 민족해방제 학술제 준비토론자료집 표지
    시청각류
    1991년 연고 민족해방제 학술제 준비토론자료집 표지
    1991년 연고 민족해방제 학술제 “모의 민족통일 정치협상회의” 준비토론자료집의 표지이다. 고려대학교 생활도서관에서 보관중이다.
  • 1992년 고연제 자료집 표지
    시청각류
    1992년 고연제 자료집 표지
    1992년 고연제(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자료집 표지이다. 고연전 변천사, 행사 소개 등이 수록되어있다. 고려대학교 생활도서관에서 보관중이다.
  • 2001 고연민족해방제 안내 소책자 표지
    시청각류
    2001 고연민족해방제 안내 소책자 표지
    2001년 고연민족해방제(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안내 소책자의 표지이다. 통일골든벨 등 각종 행사가 소개되어있다. 고려대학교 생활도서관에서 보관중이다.
  • 제1회 안티연고전 행사 포스터
    시청각류
    제1회 안티연고전 행사 포스터
    2002년 안티연고전 행사 제1회 포스터이다. 고려대학교 생활도서관에서 보관중이다. 안티연고전은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의 학벌주의 조장과 남성중심주의, 교육 상품화를 비판하며 시작된 안티연고전 행사는 6년간 지속 후 2007년 사라졌다.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