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는 실재하는 장소 그 자체를 넘어 제작 당시 공간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상황이 반영된 기록물입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중요한 배후지였던 성저십리(城底十里)로, 일제강점기 경성의 첫 번째 계획도시 돈암지구로, 우리는 지도를 통해 성북이 품은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문화유산과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동시에 전국에서 대학이 가장 많은 젊은 도시, 도심과 가까운 뉴타운, 활발하게 운영되는 마을공동체 등 현재의 성북구를 둘러싼 여러 인식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국왕의 정사(政事)를 위해 만든 조선시대 도성도부터, 토지의 소재·지번·지목·경계를 나타내는 지적도, 자원활동가들과 어린이들이 마을 곳곳을 직접 탐방하고 조사한 결과물인 마을지도까지 다양한 지도가 들려주는 각양각색 성북의 이야기를 만나보시기를 바랍니다.
18세기 말에 제작한 한양 지도로,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政事)를 살피는 국왕의 시각에 맞추어 방위가 거꾸로 묘사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따라서 도성 밖 성북 지역은 북동쪽이 아닌 남서쪽에 묘사되어 있다.
18세기 유행한 정선(鄭敾, 1676-1759)의 진경산수화풍을 따르는 회화성이 탁월한 지도로, 보물 제1560호에 지정되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다.
김정호가 제작한 전국 지도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수록되어 있는 <도성도都城圖>이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1861년에 발간한 약 16만분의 1 대축척 지도이며, 22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성도>는 함께 수록된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의 한양도성 내부 지역을 자세하게 표현한 지도이기에, 지금의 성북구 지역은 많이 생략되었다. 그럼에도 낙타산(낙산)의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산맥 부근, 즉 지금의 보문동 지역에 비구니 사찰을 뜻하는 '니사尼舍' 두 곳을 표기하였다. 두 사찰은 조선시대 궁녀들이 궁을 나온 후에 여생을 보낸 보문사와 미타사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성북동, 안암동, 숭신방 등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호가 제작한 전국 지도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수록되어 있는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이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1861년에 발간한 약 16만분의 1 대축척 지도이며, 22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조오부도>는 한성부 전체를 포함하여 도성 밖 성저십리 지역까지 담았다. 미아리고개의 옛 이름인 '적유현(狄逾峴)'을 비롯하여 정릉, 의릉, 안암동, 안암천, 성북동 등을 표기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수선전도首善全圖>는 현재 고려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목판 수선전도와 거의 유사한 형태의 목판본 지도이다. '수선首善'이란 『시경詩經』에 '建首善自京師始', 즉 으뜸가는 선善을 건설함은 서울에서 시작된다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수선전도首善全圖'는 곧 '서울전도'를 의미한다. 고려대본 수선전도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제작 시기에 관해 여러 의견이 있으나 김정호의 생존 시기를 1800년대에서 1860년대로 보아 고려대본의 제작 시기를 1840년대로 보는 의견이 가장 유력하다. <수선전도>는 목판으로 인쇄한 후에 산과 하천, 주요 궁궐 등을 엷게 채색한 것이다. 또한 고려대본과 달리 상단에는 주기가 하단에는 간기가 기재되어 있다. 지도에 기록된 지명과 좌측 하단의 간기 '갑자甲子'를 토대로 1864년에 다시 판각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설명 인용]
도성 밖 북동쪽에서 성북동, 안암동, 혜화문, 적유현(미아리고개), 신흥사(흥천사), 정릉 등 성북 관련 지명을 찾을 수 있다.
1902년 영국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가 제작한 가로 58.7cm, 세로 65cm 크기의 서울 지도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도성 밖 북동쪽을 살펴보면 문헌에 나타나는 서울의 동명 중 가장 오래된 안암동을 비롯하여 사아리(沙阿里, 현 정릉동), 숭신방(崇信坊, 현 안암·종암·돈암·정릉·동소문·동선동), 인창방(仁昌坊, 현 장위·석관·월곡동), 락타산(낙산) 등 성북구 관련 지명이 한글과 한자로 병기되어 있다.
왕립아시아학회의 한국지부는 1900년 창립되었고 국내외 서양인들에 의한 한국 연구의 본진으로 기능하였다.
1930년대, 83.5X65.5cm
1920년대 경성에 관한 도시계획의 필요성이 제기된 이래 1934년 6월 2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시가지계획령"(총독부령 제18호)을 발포하고, 경성에 대한 도시계획에 착수하였다. 도시계획의 주된 내용은 도심부의 도로를 개수하고, 시역(市域)을 확장하며, 확장된 시역에 대해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지도를 보면 경복궁을 중심으로 남서쪽과 북동쪽으로 도시가 확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도로가 개설되고 행정구역이 개편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박물관 자료설명 인용]
지도에서 노란색으로 채색된 지역은 토지구획정리지구이며 그 중 경복궁 북동쪽이 지금의 성북구 돈암동, 동선동, 삼선동, 안암동, 보문동 일대에 해당하는 '돈암지구'이다.
1937년, 103X139cm, 조선인쇄주식회사
경성도시계획연구회에 의해 만들어진 1/15,000 축척의 서울 시가지 계획지도이다. 1930년대 후반 서울의 도시계획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지도에는 서울의 시가지 계획과 관련하여 강북을 중심으로 시가지계획지구, 토지구획정비지구, 넓은 도로, 대로, 중로, 광장, 거주불가능지경계선, 철로 등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박물관 자료설명 인용]
지도 우측 상단에서 지금의 돈암동, 동선동, 삼선동, 안암동, 보문동 일대에 해당하는 '돈암지구'에 대한 계획을 확인할 수 있다.
1938년에 작성된 『경성부 영등포 및 돈암 토지구획정리비 기채의 건』 문서에 실린, 「시가지계획 돈암 토지구획정리 계획평면도」이다. 돈암지구에 주거지뿐 아니라 학교, 공원, 시장, 관사 등 근대적인 도시기반시설을 조성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본 문서는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다.
1939년 5월 5일에 지성당(至誠堂)에서 발행한 최신경성전도(最新京城全圖)이다. 구 경성 도심과 용산을 비롯해 1936년 조선총독부의 대경성계획에 따라 경성에 편입된 마포, 영등포, 여의도 및 현재의 성북구, 동대문구 지역의 일부가 지도에 포함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유물 설명 인용]
<지번입대경성정밀도>는 경성 지성당서점에서 1940년에 발행한 1:11,000의 서울지도이다. 편집발행인은 백천행청(白川行晴)이고, 인쇄소는 일본 요꼬하마에 있는 광릉 인쇄합자회사로 조선헌병대사령부와 조선총독부의 점검을 거쳐 1940년 1월에 인쇄·발행되었다.
지도는 도성과 도성의 동서지역 및 용산과 영등포지역을 모두 한 지도에 표현하기 위해 서쪽으로 기울여 제작하였다. 그리고 산악은 등고선 없이 음영법으로 처리하였으며, 지번을 함께 적어 놓아 지적도의 성격도 겸하였다. (중략)
돈암지구와 영등포지구 등에 넓은 도로가 바둑판식으로 뚫려 있어 토지구획사업이 진척되었음을 알 수 있고, 신설동에는 경마장(1923)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는 이름에 걸맞게 이 시기에 제작된 지도 중 가장 축척이 크고 정밀한 지도여서 당시 서울의 변화상을 잘 엿볼 수 있는 지도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유물 설명 인용]
<지번입대경성정밀도>는 경성 지성당서점에서 1940년에 발행한 1:11,000의 서울지도이다. 편집발행인은 백천행청(白川行晴)이고, 인쇄소는 일본 요꼬하마에 있는 광릉 인쇄합자회사로 조선헌병대사령부와 조선총독부의 점검을 거쳐 1940년 1월에 인쇄·발행되었다.
지도는 도성과 도성의 동서지역 및 용산과 영등포지역을 모두 한 지도에 표현하기 위해 서쪽으로 기울여 제작하였다. 그리고 산악은 등고선 없이 음영법으로 처리하였으며, 지번을 함께 적어 놓아 지적도의 성격도 겸하였다. (중략)
돈암지구와 영등포지구 등에 넓은 도로가 바둑판식으로 뚫려 있어 토지구획사업이 진척되었음을 알 수 있고, 신설동에는 경마장(1923)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는 이름에 걸맞게 이 시기에 제작된 지도 중 가장 축척이 크고 정밀한 지도여서 당시 서울의 변화상을 잘 엿볼 수 있는 지도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유물 설명 인용]
1940년, 85X66cm
1/25,000 축척의 행정용 서울지도로 간행되었다. 이 지도에 서울의 범위는 한강 이북, 북악산 이남, 김포 이동, 중랑천 이서 지역이다. 시가지나 부락은 갈색으로 표현하고, 주변의 산지는 황색으로 채색했다. 사찰과 신사, 교회, 학교, 우편국, 경찰서가 기호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를 통해 당시 서울의 행정과 지명,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박물관 자료설명 인용]
돈암지구 정비사업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시기에 제작된 지도라 도로망이나 주거지 조성 상황 등을 확인할 수 있다.
1944년, 76X54cm, 지성당 발행
1940년대 전반의 서울을 알 수 있는 지도이다. 한강을 중심으로 서울의 성벽, 산악, 구(區)의 범위, 각급학교, 사원과 신사, 경찰서의 위치가 명료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철도와 전차, 버스 노선을 표시하여 당시 교통수단과 운행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서울 시내의 도로망, 행정경계, 외곽 경계, 토지이용 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이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박물관 자료설명 인용]
돈암지구 정비사업이 완료된 이후에 제작된 지도로, 현재의 돈암·안암·보문동 일대로 경성부가 확장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북정(城北町), 돈암정(敦岩町), 안암정(安岩町), 신설정(新設町, 현재 보문동 포함) 등의 일본식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1972년 1월 17일 서울 인창서관에서 발행한 서울 지도로,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도봉구(1973년), 노원구(1988년), 강북구(1995년)가 분구되기 이전인 1972년 성북구의 행정구역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도봉동·방학동·쌍문동(현 도봉구), 상계동·월계동·중계동(현 노원구), 번동·삼양동·수유동(현 강북구) 등이 모두 성북구에 속해있는 모습이다.
하단에는 '1972年 1月 6日 인쇄, 1972년 1月 16日 발행', '정가 五O원 송료 五원', '출판등록 1,146호', '서울 인창서관 발행 150-02(우편번호) 서울·영등포구 화곡동 361 주택공사 8동 201호' 등이 인쇄되어 있다.
1973년 서울 인창서관에서 발행한 서울 지도로,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서울시의 행정구역 등을 간략하게 인쇄하였고 하단에 발행처, 판매가격(100원) 등의 정보를 기재했다. 푸른색으로 채색된 지역은 '그린벨트'이다.
서울 동북지역 인구 증가로 인해 1973년 7월 1일 도봉구가 분리·신설되어 성북구가 현재의 면적으로 축소되었다. 1973년 7월 10일에 발행된 본 지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성북구 관할 지역(동)의 변화는 같은 곳에서 발행한 1972년 약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와 비교하여 확인할 수 있다.
지하철을 비롯하여 도시계획 결정 시, 지적(地籍)을 확정 고시한다. 본 기록물은 서울특별시 교통국 운수제1과가 1980년에 작성한 문서로, 지하철 4호선 건설과 관련된 동소문동 지적고시내역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한성대입구역과 성신여대입구역 사이인 동소문로 일대가 1980년 당시에도 세무서, 우체국, 파출소, 시장, 은행 등 여러 관공서 및 상업시설이 들어선 시가지였음을 알 수 있다.
* 서울기록원 홈페이지에서는 본 지적고시내역을 PDF 형식의 원문으로 제공하되, 이용조건에 제한을 두지 않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성북마을아카이브는 본 기록물의 지도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주기 위해 이미지 파일(PNG)로 변환 및 부분 편집하여 공개함을 밝힌다.
지하철을 비롯하여 도시계획 결정 시, 지적(地籍)을 확정 고시한다. 본 기록물은 서울특별시 교통국 운수제1과가 1980년에 작성한 문서로, 지하철 4호선 건설과 관련된 동소문동 지적고시내역이 포함되어 있다. 1980년만 해도 동소문동3가(동소문로 48)에 동도극장이 존재한 것을 볼 수 있다.
동도극장은 1948년에 개관하여 1981년까지 운영한 영화관 겸 공연장으로 성북구의 대표적인 문화시설이었다.
* 서울기록원 홈페이지에서는 본 지적고시내역을 PDF 형식의 원문으로 제공하되, 이용조건에 제한을 두지 않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성북마을아카이브는 본 기록물의 지도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주기 위해 이미지 파일(PNG)로 변환 및 부분 편집하여 공개함을 밝힌다.
지하철을 비롯하여 도시계획 결정 시, 지적(地籍)을 확정 고시한다. 본 기록물은 서울특별시 교통국 운수제1과가 1981년에 작성한 문서로, 지하철 4호선 건설과 관련하여 길음·하월곡동 지적고시내역이 포함되어 있다. 1981년에 주거 밀집 지역이었던 이 일대는 1985년 길음역이 생기고 2000년대 재개발이 진행된 이후에도 '주거 중심형' 뉴타운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도에 보이는 미아시장은 2008년 철거되어 지금은 주상복합아파트로 탈바꿈하였다.
* 서울기록원 홈페이지에서는 본 지적고시내역을 PDF 형식의 원문으로 제공하되, 이용조건에 제한을 두지 않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성북마을아카이브는 본 기록물의 지도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주기 위해 이미지 파일(PNG)로 변환 및 부분 편집하여 공개함을 밝힌다.
서울특별시 교통국 운수제1과가 1981년에 생산한 문서로, 지하철 4호선이 정차할 각 정거장의 위치를 지적도(地籍圖) 형식으로 작성하였다. 본 위치도에서 말하는 돈암역은 현재의 성신여대입구역으로, 1985년 4월 개통 직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으며 이후 인근 동명인 '돈암'을 병기하였다.
* 서울기록원 홈페이지에서는 본 지적승인 문서를 PDF 형식의 원문으로 제공하되, 이용조건에 제한을 두지 않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성북마을아카이브는 본 기록물의 지도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주기 위해 이미지 파일(PNG)로 변환 및 부분 편집하여 공개함을 밝힌다.
서울특별시 교통국 운수제1과가 1981년에 생산한 문서로, 지하철 4호선이 정차할 각 정거장의 위치를 지적도(地籍圖) 형식으로 작성하였다. 본 위치도에서 말하는 삼선역은 현재의 한성대입구역으로, 1985년 10월 당시 삼선동 부지에 확장·이전을 준비 중이었던 대학 명칭을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하고 '삼선교역'은 부역명으로 병기하였다.
* 서울기록원 홈페이지에서는 본 지적승인 문서를 PDF 형식의 원문으로 제공하되, 이용조건에 제한을 두지 않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성북마을아카이브는 본 기록물의 지도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주기 위해 이미지 파일(PNG)로 변환 및 부분 편집하여 공개함을 밝힌다.
성북구마을사회적경제센터가 마을자원활동가들과 함께 2021년 하반기 진행했던 마을공동체공간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제작한 지도이다. 성북구 10개 마을을 5개 권역으로 구분하고 주민커뮤니티센터, 도서관, 복지관, 공방 등 다양한 공간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본 기록물은 정릉 권역에 대한 지도이지만, 다른 성북구 마을에 대한 간략한 정보도 파악할 수 있다.
성북구마을사회적경제센터가 마을자원활동가들과 함께 2021년 하반기 진행했던 마을공동체공간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제작한 지도이다. 성북구 10개 마을을 5개 권역으로 구분하고 주민커뮤니티센터, 도서관, 복지관, 공방 등 다양한 공간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본 기록물은 정릉 권역에 대한 지도로, 정든마을·삼덕마을·교수단지의 공동체시설을 파악할 수 있다.
성북구마을사회적경제센터가 마을자원활동가들과 함께 2021년 하반기 진행했던 마을공동체공간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제작한 지도이다. 성북구 10개 마을의 주민커뮤니티센터, 도서관, 복지관, 공방 등 다양한 공간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본 기록물은 성북·동선 권역에 대한 지도이지만, 다른 성북구 마을에 대한 간략한 정보도 파악할 수 있다.
성북구마을사회적경제센터가 마을자원활동가들과 함께 2021년 하반기 진행했던 마을공동체공간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제작한 지도이다. 성북구 10개 마을을 5개 권역으로 구분하고 주민커뮤니티센터, 도서관, 복지관, 공방 등 다양한 공간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본 기록물은 성북·동선 권역에 대한 지도로, 성북동·삼선동·동선동·돈암동·보문동 일대의 마을공동체공간을 파악할 수 있다
성북구마을사회적경제센터가 마을자원활동가들과 함께 2021년 하반기 진행했던 마을공동체공간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제작한 지도이다. 성북구 10개 마을을 5개 권역으로 구분하고 주민커뮤니티센터, 도서관, 복지관, 공방 등 다양한 공간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본 기록물은 길음·종암 권역에 대한 지도이지만, 다른 성북구 마을에 대한 간략한 정보도 파악할 수 있다.
성북구마을사회적경제센터가 마을자원활동가들과 함께 2021년 하반기 진행했던 마을공동체공간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제작한 지도이다. 성북구 10개 마을을 5개 권역으로 구분하고 주민커뮤니티센터, 도서관, 복지관, 공방 등 다양한 공간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본 기록물은 길음·종암 권역에 대한 지도로, 소리마을과 길음동·종암동의 공동체공간을 파악할 수 있다
성북구마을사회적경제센터가 마을자원활동가들과 함께 2021년 하반기 진행했던 마을공동체공간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제작한 지도이다. 성북구 10개 마을을 5개 권역으로 구분하고 주민커뮤니티센터, 도서관, 복지관, 공방 등 다양한 공간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본 기록물은 월곡·석관·장위 권역에 대한 지도이지만, 다른 성북구 마을에 대한 간략한 정보도 파악할 수 있다.
성북구마을사회적경제센터가 마을자원활동가들과 함께 2021년 하반기 진행했던 마을공동체공간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제작한 지도이다. 성북구 10개 마을을 5개 권역으로 구분하고 주민커뮤니티센터, 도서관, 복지관, 공방 등 다양한 공간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본 기록물은 월곡·석관·장위 권역에 대한 지도로, 삼태기마을·한천마을·장위마을의 시설을 파악할 수 있다.
[2021년 성북구 아동·청소년 어울마당] 보조사업을 통해 제작된 마을지도이다. 2021년 6월~7월, 글빛도서관에서 <우리 동네 Serendipity>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길음시장과 글빛도서관을 중심으로 하는 마을탐방과 코딩로봇(오조봇)을 활용한 ICT 체험을 진행하였다. 프로그램에는 초등학교 3~6학년 학생 14명이 참여하였고, 이 지도는 길음1동 마을 탐방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369마실의 입구와 369예술터의 입구 사이에 세워져 있는 369마을지도이다. 지도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삼선동 359성곽마을은 '삼선 재개발 6구역'의 첫소리를 따서 369마을이라 부르게 되었고, 마을의 정체성과 문화를 바탕으로 주민이 화합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언덕마을이라는 세 가지 뜻으로 '삼육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성북구청 지적과를 통해 입수한 1966~1976년 하월곡동 23-1번지 일대의 지적도이다. 과거 하월곡동 산2-12의 임야로 등록되었던 이 지역은 1963년에 하월곡동 23-1, 즉 현재의 지번으로 등록전환되었고 1967년 3월 동덕여자대학교가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 지적도는 1976년 폐쇄되었다.
성북구청 지적과를 통해 입수한 성북동 246번지 일대의 축척 1/1200 지적도이다. 우측 상단에 한자로 경성(京城),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高陽郡 崇仁面 城北里)로 표기했다가 정정한 흔적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에 만든 지적도에 수정 작업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좌측 상단에 붉은 글씨로 작성한 폐쇄 시기를 통해 1962년 3월까지 유효했던 문서임을 파악할 수 있다.
246번지 앞에 '천(川)'이 기재되어 이 일대에 성북천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중앙에 '산(山)'으로 표기된 땅은 아직 226번지 일대에 북정마을이 조성되기 이전임을 말해준다.
성북구청 지적과를 통해 입수한 1990년대 성북동 246번지 일대의 축척 1/1200 지적도이다. 우측 상단에 굵은 글씨로 '천'이 기재되어 아직 성북천 복개가 완료되지 않은 시기에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61년에 폐쇄된 동일 지번의 지적도에는 '산(山)'으로 표기되었던 넓은 면적의 땅이 본 지적도에서는 촘촘하게 구획된 것을 볼 수 있는데, 226번지 일대의 이 지역이 바로 북정마을이다. 현재 성북동 246에는 성북구립미술관이 들어섰으며 복개된 성북로 주변으로 간송미술관, 성북선잠박물관, 성북역사문화센터 등 문화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본 지적도는 2010년 부로 폐쇄되었다.
성북구청 지적과를 통해 입수한 옛 돈암동 458-585번지 일대의 지적도이다. 우측 상단에 한자로 경성(京城),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高陽郡 崇仁面 敦岩里)로 표기했다가 정정한 흔적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에 만든 지적도에 수정 작업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좌측 상단에 붉은 글씨로 작성한 폐쇄 시기를 통해 1962년 3월까지 유효했던 문서임을 파악할 수 있다.
좌측 상단에 '천(川)'이 표기되었는데 이 일대는 훗날 성북천이 복개되어 삼선상가아파트 등이 건설되고 2000년대 들어 다시 복원된 지역이다. 이 지적도가 만들어진 시기에는 돈암동에 속했으나 1961년 구획정리 이후 현재까지 행정동으로는 삼선동, 법정동으로는 동소문동2가에 해당한다.
성북구청 지적과를 통해 입수한 1999년 동소문동2가 일대의 축척 1/600 지적도이다. 과거에는 돈암동에 속했지만 1961년 구획정리 이후 현재까지 행정동으로는 삼선동, 법정동으로는 동소문동2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962년에 폐쇄된 동일 지역(돈암동 458-585 일대) 지적도와 비교하면 구획정리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성북구청 지적과를 통해 입수한 1964년 보문동1가 및 2가 일대의 지적도이다. 우측 상단에 동대문구 보문동으로 행정구역이 기재되어 있는데, 보문동은 1955년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분리되었고, 1975년에는 성북구 관할이 되었다.
중앙에 큰길, 즉 보문로를 경계로 보문동1가와 2가로 나뉘어 2000년에는 그 중심에 지하철 보문역이 들어섰다. 본 지적도는 1990년 3월 31일부로 폐쇄되었으며, 축척은 1/600이다.
성북구청 지적과를 통해 입수한 일제강점기 신설리 380-50번지 일대(현 보문동)의 지적도이다. 고양군 숭인면 신설리(高陽郡 崇仁面 新設里)가 우측 상단에 기재된 것으로 보아, 돈암지구가 조성되어 이 지역이 다시 수도로 편입된 1936년 이전에 작성한 문서임을 알 수 있다. 아직 대로(현 보문로)를 비롯하여 시가지 계획이 진행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성북구청 지적과를 통해 입수한 옛 돈암동 101-32번지 일대의 지적도이다.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高陽郡 崇仁面 敦岩里)가 우측 상단에 기재된 것으로 보아, 돈암지구가 조성되어 이 지역이 다시 수도로 편입된 1936년 이전에 작성한 문서임을 알 수 있다. 본 지적도는 '경성시가지계획 돈암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이 지역은 이후 시가지 및 주거지가 조성되고 1949년 돈암동에서 동선동으로 분리된 지금의 성신여대입구역 인근이다.
성북구청 지적과를 통해 입수한 1960년대 동선동1가 및 3가 일대의 지적도이다. 동선동1가 114-1에 경전전차 돈암동 종점 사무소가 있고 전차가 다니던 시기이다. 1936년 이전의 동일 지역(옛 돈암동 101-32 일대) 지적도와 비교하면 돈암지구 구획정리사업의 결과를 파악할 수 있다. 우측 상단에 한자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이 기재되었는데 동선동은 1949년 성북구 신설 이후 돈암동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중앙에 표기된 점선은 동선동1가와 3가의 경계인데 이것은 2022년 현재에도 해당된다. 본 지적도의 축척은 1/600이며 1968년 폐쇄되었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동선동1가 및 3가의 지적도이다. 전차가 폐선된 이후인 1968년 12월에 생산한 문서로 기존에 종점 사무소가 있던 114번지 일대(좌측 상단) 토지구획의 변화가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일 지역의 1968년 폐쇄 지적도에서는 하나의 필지였던 85번지(좌측~중앙 하단)가 본 지적도에서는 여러 지번으로 구획되었다. 현재 동선동1가 85번지 일대는 성신여대 등 인근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한 하나로거리이다. 축척은 1/600, 폐쇄 일자는 1990년 3월 31일이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75년 보문동6가 지적도이다. 이곳은 1930년대 후반 돈암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도시형 한옥이 대거 지어진 '보문동 한옥밀집지역'으로, 1970년대에도 한옥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주거 문화가 급변하여 상당수의 한옥을 허물고 필지를 합병하기도 했으나,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전 가치를 인정받았다. 또한, 1975년 보문동이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로 편입된 사실이 반영되었다. 축척은 1/1200, 폐쇄 일자는 1990년 3월 31일이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일제강점기 신설리 216-1 일대(현 보문동6가)의 지적도이다. '경성시가지계획 돈암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된 1936년 이전의 문서로, 아직 필지의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이후 구획정리를 완료하고 계획적으로 주거지가 조성된 모습은 동일 지역인 보문동6가의 1975년 지적도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50~60년대 안암동1가 및 2가 일대의 지적도이다. 안암동1가와 2가의 경계인 점선 아래 넓은 필지는 1956년 3월 설립 인가를 받고 1960년 개교한 안암초등학교 부지(안암동2가 93)이다. 이 지역은 1936~1941년에 시행된 ‘돈암지구 구획정리사업’으로 도시형 한옥이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던 곳이다. 일종의 도시계획으로 조성된 주거지이기에 필지의 크기와 모양이 일정하고 반듯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적도가 유효했던 1960년대에도 한옥밀집지역이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멸실되었다. 본 지적도의 축척은 1/600, 폐쇄 시기는 1968년이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24년 옛 돈암동 294-1번지 일대의 지적도이다. 좌측 하단에 작성한 '대정13년'을 통해 발행 시기를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돈암지구가 조성되어 다시 수도로 편입되기 이전이므로 우측 상단에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로 기재되어 있다. 294-1번지 및 그 주변이 '밭(田)'으로 표기되고 필지의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돈암지구 구획정리사업 이후 주거지가 계획적으로 조성된 모습은 동일 지역인 동소문동6가의 1960년대 지적도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60년대 동소문동6가 일대의 지적도이다. 기존 돈암동에서 동소문동6가로 지번 정리가 완료된 1961년 이후 생산된 문서로, 폐쇄 시기는 1968년이다. 축척은 1/600이며 동소문동6가를 중심으로 동소문동 4·5가의 일부가 담겼다. 북서쪽 넓은 필지는 1944년 개교한 돈암초등학교 부지이다.
이 지역은 1936~1941년 돈암지구 개발 이후 동일한 형태의 도시한옥들이 들어선 주거지였다. 2022년 현재는 한옥의 형태를 살린 카페, 식당과 주택이 혼재되어 있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60년대 구 돈암동 606 일대의 지적도이다. 당시 이 지역은 산비탈에 불량주택이 우후죽순 지어진 산동네였는데 지적도에 기재한 지번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밀집도가 높다. 본 지적도는 1968년 폐쇄되었고 1990년대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대단지 고층아파트가 들어섰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38년 구 장위동 산3번지 일대 임야도의 오른쪽 페이지다. 우측 상단에 '고양군 숭인면 장위리'가 기재되었다. 임야로 등록되었던 이 일대는 1960년대 동방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단독주택이 대거 지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동일 지역의 1968년 지적도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38년 구 장위동 산3번지 일대 임야도의 왼쪽 페이지다. 우측 상단에 '고양군 숭인면 장위리'가 기재되었다. 임야로 등록되었던 이 일대는 1960년대 동방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단독주택이 대거 지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동일 지역의 1968년 지적도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68년 장위동 230-49 일대의 지적도이다. 230-49번지는 일명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의 지번으로, 1966년 동방생명보험 주식회사(현 삼성생명)가 장위동에 분양한 동방주택단지에 지어졌다. 1938년 임야도에 등록되었던 이 지역은 본 지적도에서는 작은 택지로 분할되어 주택이 들어설 수 있는 땅으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동방생명 10년사』(1967)에 따르면 장위동 동방주택단지의 총면적이 162,170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69년 구 상월곡동 7-33 일대의 지적도이다. 1962~1964년에 국민주택단지가 들어선 지역으로 국민주택은 단독형(8평형, 10평형, 15평형, 17평형 / 필지 50제곱미터)으로 지어졌다. 1958년 장위동에 조성된 재건주택, 부흥주택에 비해 필지와 건물면적이 더 컸다. 당시 상월곡동에 속했던 이 지역은 1978년 장위동에 편입되어 본 지적도는 1978년 10월 10일부로 폐쇄되었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78년 장위동 66-107 일대의 지적도이다. 1962~1964년에 국민주택단지가 들어선 지역으로 국민주택은 단독형(8평형, 10평형, 15평형, 17평형 / 필지 50제곱미터)으로 지어졌다. 인근에 조성된 재건주택, 부흥주택에 비해 필지와 건물면적이 더 컸다. 국민주택은 대부분 1980년대 이후 재건축되어 2022년 현재 극히 일부만 남아있다. 과거 상월곡동에 속했던 이 지역은 1978년 장위동에 편입되어 본 지적도는 1978년 10월 10일에 재작성되었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돈암동 173-1 일대의 1968년 폐쇄지적도이다. 1920년대 산7-13 임야로 등록되었던 이곳은 1930년 지금의 지번으로 등록전환되었다. 1944년 성신여학교(현 성신여자대학교)가 이 자리로 이전하면서 변화를 맞이하는데, 본 지적도에서는 북동쪽에 표기된 필지이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2022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및 의릉 일대의 지적도 등본이다. 천장산의 일부를 포함하는 석관동 409번지가 지목(地目)이 '묘'로 등록된 333-1과 333-2를 둘러싼 형태이다.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왕릉을 끼고 있어 넓은 부지가 확보되었던 409번지는 1962~1995년 중앙정보부 본청이 있던 곳으로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들어섰다. 333-1은 조선 20대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의 무덤인 의릉의 매표소 및 관리소, 비각, 정자각 등의 지번이며, 333-2가 봉분 지번이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62년 구 길음동 603-2번지 일대의 지적도이다. 중앙과 좌측 하단이 연결되어 '천(川)'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북한산 줄기에서 발원하여 길음동을 거쳐 정릉천에 합류했던 개천, 즉 인수천이다. 천변을 따라 노점이 형성되어 길음시장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복개공사가 시작되어 지금은 도로(길음로)로 사용되고 있다. 지번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구획된 모습인데 2000년대 들어 이 일대는 뉴타운으로 재개발되고 2016년에는 계성고등학교가 이전하였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일제강점기 미아리 533-10번지(현 길음동) 일대의 지적도이다. 1914년 경기도로 편입되어 우측 상단에 고양군 숭인면 미아리로 기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미아리, 하월곡리, 돈암리의 경계면 쪽에 표기된 '천(川)'은 정릉천이다. 예전부터 이 지역은 ‘기리묵골’ 또는 ‘기레미골’로 불렸는데, 정릉천이 흐르는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좋은 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으로 이를 한자화하여 길음동(吉音洞)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970년대 후반 정릉천 복개공사가 시작되어 현재는 하천이 아닌 길음역, 내부순환로, 아파트 단지 등을 볼 수 있다. 본 지적도는 1962년 폐쇄되었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97년 길음동 1276번지 일대의 지적도이다. 동일 지역(옛 미아리)의 일제강점기 지적도에는 표기되었던 정릉천이 복개되어 그 흔적이 사라지고 필지가 빽빽하게 구획된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1276번지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으며 복개된 정릉천 위로 내부순환로가 지나간다. 본 지적도의 축척은 1/1200이며, 2010년 11월 1일부로 폐쇄되었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69년 돈암동 흥천사 일대 지적도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경치가 좋고 도심과도 가까운 흥천사 주변에 연회장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연회 장소로 크게 번성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의 잔치 문화가 변화하고 돈암동에 아파트가 개발되면서 흥천사 주변 연회장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도성 밖 신도시, 돈암』(2022), 384-393쪽 내용 참고
본 지적도에서 좌측에 떨어져 있는 594 및 595번지가 흥천사이고, 주변 동쪽 필지들이 연회장인데, 오늘날 이 자리에는 돈암2동 주민센터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성북구청 지적과로부터 수집한 1968년 동선동 일대의 지적도이다. 동선동1·3·4가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중앙의 도로는 1964~1966년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실시한 미아로(현 동소문로)이다. 서울과 외곽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이었지만 8~10m 정도로 폭이 좁았던 미아로는 이때의 공사로 구간에 따라 23~35m까지 넓게 확장되었고 미아리고개의 경사도 완만해졌다. (구)돈암동 지역의 중심이 된 미아로 대로변에 점집이 하나씩 들어서면서 역학촌이 형성되었다. 미아리 역학촌은 1970~80년대에 호황을 누리다가 현재는 일부만 남았다. 미아로 확장공사 완료 후에 작성된 본 지적도의 축척은 1/600이며, 1990년 3월 31일부로 폐쇄되었다.